국사당.
조선 태조가 한양(지금의 서울)에 수도를 정하고
수호신을 모신 사당. 북악 신사(北岳神詞)와 더불어
남산 꼭대기에 세운 목멱 신사(木覓神詞)의 사당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태조 5년 12월)
호국의 신으로 삼아(태종 4년 9월) 개인적인 제사는 금하고
국가 기우제와 기청제(祈晴祭)를 지냈다(태종 8년 5월, 9년 7월).
아울러, 신주(神主)가 있었음도
언급하고 있다,(태종 12년, 2월).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권3)에 의하면,
목멱신사 명칭의 사당이 남산 꼭대기에 있었고,
매년 봄·가을.,초제(醮祭: 별을 향하여 지내는 제사).
그러나, 국사당 명칭과 무신도(巫神圖)에 대한 언급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藁)'에서 볼 수 있다.
거기 기록에 언급되어 있는 것이 현재 국사당의 전신이다.
1972년 당시 당 관리인의 증언에 의하면,
조선 말, 국가 제사를 지내는 일이 없었다.
다만, 별궁(別宮)의 나인들이 치성을 드리러 오거나
또는 개성 덕물산(德物山)에 치성을 드리러 가는 사람들
먼저 이곳 국사당을 거쳐가고는 하였다고만 전해져 온다.
민중전(閔中殿)이 궁중 나인들을 시켜
국사당에 치성을 드리게 하였다는 사실은,
궁중 발기(撥記:다스리는 기록)의 기록이다.
궁중 발기에는 인근 각처 명산과 당·묘 등에
치성을 위하여 보낸 금품목록이 적혀 있는데,
여기에는 국사당의 이름이 여러차례 등장한다.
국사당은 뒷날 무당의 기도처로 바뀌었고,
1925년에 일본인들이 신궁(神宮)을 지을 때
인왕산 서쪽으로 옮겨 오늘날까지 존속한다.
무학대사.
충남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 간월암(看月庵)
물 위에 떠 있는 연꽃과 비슷하여.,‘연화대’(蓮花臺).
물이 차고 낙조가 떨어지면 바다 위에서 타오르는 연꽃.
물이 차면 섬은 만남의 문을 닫고 절대고독 속으로 빠져든다.
성철 스님이 갓 30 나이를 넘길 즈음
2년간 참선한.,간월도 간월암(看月庵)
'물이 들어오면 섬, 물이 나가면 육지'.,간월도(看月島)
해안과 연결되는 섬으로 '달빛을 본다.' 뜻이름.,간월도.
무학이 도를 깨우친 곳이라 사람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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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학은 '오백년 도읍지 한양' 천도설을 주장한 풍수지리학 대가.
그가 스승 청학거사를 만나 풍수지리학 기초를 닦은 곳은..지리산.
'무소유론' 무학대사가 이성계를 섬긴 목적의 숨은 뜻은.,불교 중흥.
그러나, '라이벌 법술가' 정도전에게 밀려 뜻을 이루지 못한다.
결국, 조선왕조 500 년 운명과 200 년후 국란을 예언하고 물러난다.
그당시 조선 개국 세력은 유림이었으므로.,무학이 설 자리는 없었다.
'조선왕조 500 년 세월 동안,
무학대사의 예언은 적중했다.'
200년 후, 국가환란.,임진왜란.
조선왕조 후반.,불교 탄압을 예견.
지리산의 전설을 수집해 보면,
이해 안되는, 역사 흔적이 많다.
역사적인 사실들이
시대적인 가치관에 따라
왜곡되고 흔적조차 사라졌다.
'무학대사는 정도전과 더불어
지리산에 큰 영향을 끼친.,인물.
미래를 바라보는 혜안은 있었지만,
신이 아니기에 인간 한계를 드러낸다.
즉, 조선의 미래를 예견한 혜안으로도
조선에서의 불교중흥 뜻은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500 년 전에
'백두대간'을 꿰뚫은
혜안은 놀랍기만 하다.
' 무학대사!
그는 어떻게
살다간 인물일까? '
고려 말, 국사였던 무학대사는
한양 500년 도읍지설의 주창자.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한반도의 골격.
그 대간 사이 산과 물에 맥과 혈을 기본으로 한 풍수지리설.
백두대간은 간룡(幹龍), 그곳에서 갈라진 산줄기는 지룡(枝龍).
원래, 백두대간과 간룡은
산을 나무에 비유해 본다면
나무 줄기(幹)와 그 가지(枝).
나무는 줄기에서도
열매가 맺히긴 하지만,
대개 가지에 열매가 맺힌다.
같은 이치로 풍수지리에서도
간룡보다 지룡에 혈(穴)이 생긴다.
따라서 백두대간이 비록 큰 산줄기이지만
백두대간에서 명당 자리는 가지에서 생긴다.
지리산 북쪽 지역에도
백두대간에서 뻗어나온
가지에 대부분 명당이 있다.
주촌리 구룡부주(九龍負舟 또는 黃龍負舟).,대명당.
황룡부주라는 명당은 용이 배를 등에 지고 간다는 명당터.
황룡부주 명당은 광복 전 이곳에 묘를 쓴 자손들이 크게 번성.
용이 배를 등에 짊어지고 항해를 하면,
무게중심을 잃고 배가 등에서 떨어진다.
하여, 정신 집중하여 무게 중심을 잡는다.
그러면, 배가 뒤집히지 않는다고 여긴다.
그런데, 황룡부주 명당에 석물을 설치하면
배가 중심을 잃고 뒤집혀 피해를 보게 된다.
이것이 명당터에 관한
풍수지리 기본 골격이다.
'지리산 불일폭포 위에 위치한
토굴에서 3년간 몰입했던.,무학.'
그후 조계산 송광사 소지선사 앞에서 머리를 깎고 이름을 무학.
그 후 경기도 용문사 혜명국사 지도로 선정닦는 법을 배우고 득도.
무학은 18 세에 불일폭포 인근 토굴에서 지리산과 인연을 맺게 된다.
.........무학대사(無學大師) 박 무학(朴 舞鶴) 행장기(行狀記)........
충청도 홍성과 서산 사이의 서해안 천수만(淺水灣)에 간월도(看月島).
6백년 전 관청의 돈을 빌어쓰고 갚지 못해 관가(官家)로 끌려가던 여인.
학돌재(鶴石峴, 현재 충남 서산군 인지면) 고개 마루에서 산고 끝에 출산.
포졸들은 아이를 버려둔 채
그 여인을 서산 관아로 끌고 가
원님 앞에 대령하였다고 전해온다.
"에끼, 인정머리 없는 포졸들아!
누가 애 낳는 여인을 끌고 오라더냐!
당장 저 여인에게 먹을 것과 어린 아기에게
입힐 것을 주어 집으로 돌려 보내도록 하라."
산모와 신생아에 드는 돈은 모두
내 월급에서 탕감하라." -원님 판결-
무학의 어머니인 이 여인의 운명은
15 살 때에 도사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첫 아기를 가질 때까지 말을 하지 않으면
큰 인물을 잉태할 상이라는 말을 듣고나서,
그로부터 무려 십년동안 벙어리 시늉을 하다가
결혼 후 아이를 낳고나서야 굳게 닫았던 입을 연다.
왜구들 출몰이 잦았던
그해 임신을 했던 그녀는
현해탄 건너 일본으로 갔다.
그 배안에서 왜놈들이
이 여인을 능욕하려 하자
그 남편의 눈에서 불이 났다.
"에라, 이 천하에 둘도 없는 악당들아!
감히, 아이를 밴 임산부까지 탐하다니...!"
박안일은 난투 끝 어깨에 중상을 입으며
아내를 탐하려는 왜구들을 물 속에 처넣었다.
그 배가 바람따라 조류따라 흘러 표류한 곳.,간월도.
그 아이의 특이했던 골상(骨相), 머릿 가운데 정수리가 산같이 솟았고,
양쪽 눈섭 꼬리가 유난히 치겨올라갔고, 콧머리는 세봉오리가 우뚝하고,
얼굴은 4각형으로 거북이 등판 같아 골상학에서 말하는 '학머리 거북얼굴'
부친은 할돌재 출생 아들을 무학이라 이름짓고,
마음대로 살 수 있도록 간섭 말고 키우라고 유언.
.
다섯에 글를 읽고, 여섯에 4서를 읽고.
열살에 사기(史記)와 열전(列傳)을 통독.
열 하나에 3경 춘추(春秋) 주역(周易) 통달.
열 다섯에 혼담이 오갔지만 여자를 탐하지 않았고,
열 여덟에 입신양명(立身揚名) 위해 과거 길에 오른다.
"자네가 여기에 올 줄을 알았지..나를 따라오게."
과거를 보러 개경 가려고 화개(花開) 마을에 도착했을 때 만난 도승.
그를 따라 쌍계사 뒤 불일폭포(佛日瀑布) 인근 조그마한 토굴에 당도.
"인간사에는 두 가지 시험이 있다.
하나는 과거이고, 다른 하나는 도가(道家)
과거는 속(俗)스러워 합격을 해도
10~ 20년 후 판서 참판 되기 힘드나,
도가의 과거에 입문(入門)하여 득도하면,
임금보다 더 높은 왕사(王師)가 되느니라.
나는 29년 전에 너의 어머니를 만났고,
그 때 이미 네가 태어날 것을 알았느니라."
청오경 금낭결 옥룡자결 삼한산수비기
천문 지리 음양 5행 운기 금단 옥급 수리
백련거사비기 책을 내민 청학동 청학거사
이리하여 무학은 풍수 도참(圖讖) 비기(秘記)를 공부하고
사미승 비구승을 거쳐 이성계의 건국공신 국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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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은 스물 셋에 진주 길상사에 가서 수도를 한다.
스물 넷에 모향산 금강굴에 들어갔다가 원나라 유학.
서른에 귀국하여 다시 지리산에 10년 만에 돌아오자
청학도사는 세상을 떠났고 무학에게 남겨진 유서 한통.
그 유서는 늘 스승이 사용했던 향나무 목침 안에 있었다.
'네가 이 글을 볼 때는 고려의 왕운이 다하였으니
새 왕을 도와 500년 국조(國祚)를 열라' -청학-
이 글을 본 무학은 큰 일을 앞 두고 고향을 찾아간다.
삼기현의 어머님을 뵙고, 비구니가 된 애인도 만났다.
무학이 출가 전에 사랑했던 두 여인들과 무학의 어머니.
다음 해에 어머니와 두 여인이 안거할 고향 절이 무학사.

아버지가 타계한 간월도에 지은 절이 간월암,
500 년 후 한국 불교계 고승 경허(鏡虛) 배출.
그후 세상을 순례하다가 원주 고달산에 암자를 짓고 정진 중
신돈이 왕정을 어지럽힐 무렵 함경도 안변 설봉산에 토굴에서,
고려가 멸망할 즈음 무학은 꿈 해몽을 부탁하는 이성계를 만난다.
닭이 "꼬끼요"하고 우는 것은 '고귀위(高貴位)'
즉 높고 귀한 자리에 오른다는 뜻이라 해몽한다,
서까래 세 개가 빠진 것을 모아 보면 임금 王자.
이성계가 왕이 될 징조라는 의미라고 풀이한다.
무학의 해몽대로 이성계는 최영과 맞서 위화도 회군을 감행
개성에 와서 왕으로 등극후 새로운 도읍지를 찾아 고심한다.
새 도읍을 '한양' 아니면, 공주 계룡산 '신도안'으로 할 것인가?
무학과 더불어 개국공신인 정도전은 신도안 도읍설.
무학은 한반도의 중심인 한양 도읍을 각각 주장한다
신도안은 계룡산 정기를 이어 받은 대전 인근이고,
한양은 북한산 정기를 물려받은 현재 서울 인근이다.
태조 이성계는 무학의 말을 들어 도읍지를 한양,
정도전의 말을 들어 궁궐터를 백악산(현재 북악산).
오늘날, 청와대 위치가 무학이 주장한 한양천도론 터.
훗날 무학은 국사를 사직하고 금강산에 들어갔다가
권력을 장악한 방원의 부탁으로 이성계를 찾아간다.
태상왕이 된 이성계를 회유해 함께 한양에 들어온다.
당시, 권좌에서 물러난 이성계를 만나러 갔던 신하들.
모두 이성계가 쏜 활에 맞아 죽어 유래된 말 '함흥차사'.
'무학대사와 이 성계' 두 인물이 얼마나 두터운 사이인지
무학이 방원에게까지 신뢰 받은 인물 임을 알수 있는 대목.
훗날, 이성계는 무학의 영향으로 불교에 귀의.
무학은 나이 79, 법랍(法臘) 61 세에...열반한다.
무학이 열반한 곳은 금강산의 금강암.
이성계에게 선정을 베풀도록 권한 무학.
무학은 왕실 발전을 위해 4 사찰을 세웠다.
동쪽에 동불암, 서쪽에 진관사,
남쪽에 삼막사, 북쪽에 승가사.
이성계는 죽음에 임박해 불교에 귀의한다.
그러나, 훗날 조선에서는 불교를 탄압한다.
' 조선 태종의 왕사'., 무학(無學)대사.
허물어져가는 집에서 서까래 셋을 지고 나온
꿈을 해석해 이성계가 왕이 될 것을 예언했다.
이성계도 등극 전 신비로운 사람이 꿈에 나타나
“이 금자(金尺)로 동국지방을 측량하여 다스리라”
그후 이성계도 스스로 왕이 될 것을 예견했다고 한다.
그 일화로 양(羊)이 등장하는 이성계의 꿈이 전해온다.
꿈속에서 양을 잡으려다 그 뿔과 꼬리가 몽땅 떨어진다.
초야에 있던 이성계는 이를 이상히 여겨 무학을 찾아간다.
“양(洋)이란 한자에서 양의 뿔과 꼬리가 떨어지면
‘왕(王)’자만 남게 되니 임금이 되리라”고 해몽했다.
이후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가 되어.,양꿈은 길몽.
전남 장성 백양산(白羊山·722m),
경기도 이천 양각산(羊角山·382m),
충청남도 보령 양각산(羊角山·412m) 등.
온갖 야사(野史)와 전설의 주인공.,무학.
한양 천도에 결정적 역활을 한.,왕사.
조선 건국 후, 한양에 경복궁을 지을 때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과의 논쟁이 있었다.
궁궐 건물의 방위를 정함에 있어서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여 낙산을 바라보는
형상으로 지으면 국운이 장고하리라." - 무학.-
“일국의 장래를 어찌 풍수에 맡길 수 있겠는가?
동서고금을 막론, 군주가 백성을 잘 다스리기 위해
대궐은 남쪽을 향하고 북쪽은 등져야 한다.” - 정도전 -
결국, 정도전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북악산(청와대 뒷산)을 주산으로 해
남산을 바라보는 지금의 경복궁 위치에
대궐을 지었고 다른 건물들도 이에 따랐다.
무학대사는 정도전의 주장대로 궁궐이 지어지자
북악산의 산세가 갈라지고 찢어지는 가파른 형상이라
200년뒤 나라에 후환이 있을 것이라 예언 후 산사에 잠적.
그당시 풍수 논쟁의 핵심은 인왕산 또는 북악산 중에서
어느 산을 도읍지 주산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주산이 정해져야 궁궐터 명당 혈자리가 잡히기 때문이다.
정도전은 북악산이 '백두산 지맥' 북한산 자락으로 판단.
무학은 인왕산의 강건함과 기운을 한양의 주산으로 판단.
그당시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의 판단에 따라 경복궁을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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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십리(往十里)가 도읍지로 적당하다고 생각한.,무학.
한 노인이 소를 꾸짖으며 "꼭 무학처럼 정도로 가지 않고
굽은 길을 가려느냐?" 하여 경복궁 터를 정했다.- 왕십리 유래-
한성부 성을 쌓을 때 정도전(鄭道傳)과 무학(無學)은
선바위를 성곽 안으로 넣을지 밖으로 둘지 다투었는데
다음날, 눈 녹은 자리에 성을 쌓기로 두 사람 간에 절충.
결국, 선바위는 성곽 밖에 놓이게 되었다 한다. - 선바위 설.-
그렇게 되자, 무학대사는 몹시 실망하며.,탄식.
"선바위가 도성 안에 있다면 불교가 성행할 것이고
선바위가 도성 밖에 있으면 유교가 흥하게 될 것이니
향후, 승도들은 선비 책보따리나 들고 따라다니게 될 것."
-
................선바위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4호.........
마치 중이 장삼을 입고 서 있는 형상 같아.,선바위(禪巖)
'태조와 무학대사의 상' 또는 '이성계 부부의 상'이란 전설
이것은 인간이 죽어서 석불(石佛)이 되었다는 인간의 화신 설화.
"여기에 소원을 빌면 성취할 수 있다."고 하여
선바위는 일찍부터 '기자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자식없는 사람이 빌면, 효험이 크다고 알려졌다.
"작은 돌을 문질러 붙이면 효험이 크다." 하여.,부침바위.
일제가 남산 정상 국사당을 선바위 곁으로 이전 후
더욱 선바위에 대한 신앙은 무속신앙과 밀착 되었다.
'암석숭배사상의 일종'과 무속신앙과 밀착된.,선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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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의 국사당에 걸려있는.,그림.
전생에 '부부 인연'이라는 '태조와 무학'
'흉허물 없이 농도 주고 받았다.'는.두 사람.
"내 눈에는 대사가 돼지처럼 보입니다."
"제 눈에 주군은 부처님처럼 보입니다."
"나는 흉허물 없이 농담했는데
대사는 어찌 그리 농을 받으시오."
"부처의 눈에는 세상이 부처 만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세상이 돼지 만 보이는듯.."
"대사! 농담은 그대가 이겼고 내가 졌소이다."
" 제가 주군에게 무례를 범한듯 송구하옵니다."
무학은 이성계와 언제부터 가까운 사이였는지 모르지만,
이성계의 꿈을 해몽을 하면서부터 몹시 가까워진듯 하다.
고려 말, 이성계가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치면서
명성을 날리던 어느날 밤, 닭이 우는 꿈을 꾸었다.
이성계가 찾아가 꿈이야기를 했더니.,무학이 큰 절.
"이제 왕이 되시겠습니다."
'꼬끼오'., 고(高), 귀(貴), 위(位).
"이는 높고 귀한 자리로 왕을 의미".,해몽.
이성계는 이 꿈을 이용해 자신의 왕업을 생각하고 실천
결국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하여 조선을 세웠다.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원동력을 제공한 사람이 무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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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은 고려(918~1392) 말, 조선(1392~1897) 초.,승려.
법명 무학(無學 : 1327~1405) 속성 박, 이름 자초(自超).
조선 태조에 의해 왕사가 되었으며, '한양천도'를 도왔다.
1327년 경상남도 합천에서 태어난.,박 자초(무학).
어릴 때, 부모는 왜구에게 끌려갔다가 돌아온 하층민.
갈대로 삿갓을 만들어 팔았고, 그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아기 때 지나치게 못생겨 내다 버렸으나
학들이 와서 버린 아이를 감싸므로 부모는
특별한 아이라 생각하여 도로 데려왔다 한다.
18세에 송광사에 들어가 소지 선사 밑에서 승려가 되었다.
이후 용문산(龍門山)의 혜명 국사로부터 불법을 전수받았고
묘향산 금강굴 수도 후, 1353년(공민왕 2년) 원나라 연경에 유학
인도의 지공(指空) 선사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원나라 오대산(五臺山) 등 중국 각지를 순례했다.
나옹 혜근을 만나 서산(西山) 영암사(靈巖寺)에서
수년을 머물다가 1356년(공민왕 5년) 고려로 돌아왔다.
1364년 나옹은 회암사 중건 후, 무학을 수좌승으로 삼았다.
나옹이 사망한 뒤에는 무학은 전국을 돌며 수행
이 때 이성계와 처음 만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무학은 일찍이 이성계의 꿈을 해몽하여
이성계가 석왕사(釋王寺)를 짓게 해준 인연으로
이성계 우우(優遇)를 받았으며, 상지술(相地術)에 밝았다.
연려실기술에는 무학의 해몽과 한양천도에 대한 기록.
그외 여러 기록이 있으나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미흡하다.
1392년(조선 태조 1년) 조선 개국 후 왕사가 되었고
묘엄존자(妙嚴尊者) 호를 받고 회암사(會巖寺) 상주.
조선 개국 직후부터 태조 이성계는 도읍을 옮기려 했다.
태조 이성계를 따라 계룡산 및 한양을 돌아다니며
땅의 모양을 보고 도읍을 정하는 것에 의견을 내었다.
이성계가 계룡산에 올라 지세(地勢)를 두루 관람하고
왕사(王師) 자초(自超)에게 물으니, 자초는 대답하였다.
“능히 알 수 없습니다.” - 태조 2년 계유년 2월 11일 -
남경 궁궐터에서 태조.,“어떠냐?”
“여기는 사면이 높고 수려(秀麗)하며
중앙이 평평하니, 성을 쌓아 도읍을 정할 만합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라서 결정하소서.” - 무학.
"이에 도평의사사에 명하여
경상·전라·충청·강원·풍해·경기좌·우도
민정(民丁)을 선발하여 축성공사를 하게 하라."
- 태조 3년 갈술 8월 13일 -
태조가 정한 두 번째 새도읍 후보지는 한양이었다.
왕사가 어명을 받고 새 도읍지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무학은 삼각산에 이어 목멱산(木覓山 : 남산)에 올랐다.
무학은 "이곳이 적당하다."고 쾌재를 부르는 순간,
한 노인이 소를 타고 지나가다가 소리질렀다 한다.
'이놈의 소! 미련하기가 무학과 꼭 같구나.
바른 길을 버리고 굽은 길을 찾아가다니, 이럇!'
무학은 노인을 쫓아가 길지를 알려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노인은 '여기서 서쪽으로 십리를 더 가면 알 일이다.
무학이 노인의 말을 쫓아 가보니, 그 곳은 바로 고려의 남경 터였다.
다시 삼각산을 거쳐 백악산 밑에 도착한 무학은
'인왕산을 주산, 백악과 남산으로 좌우 용호(龍虎)
이곳을 궁궐터로 정하고 태조에게 아뢰었다.' 전한다.
태조는 그말을 듣고 그곳을 궁궐터로 정하였다.
그런데 무학의 의견에 정도전이 반대하고 나섰다.
"예로부터 제왕은 모두 남면하여 나라를 다스려왔고,
'동향 궁궐터'라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정도전 건의에 따라 다시 잡은 곳이 북악산 밑, 경복궁.
본래, 무학이 잡은 궁궐 자리는 종로의 필운동 근처였다.
"백성의 생활이 안정되기 전에 큰 역사를 벌임은 옳지 않다."
1394년 8월 태조3년에 "천도 반대론"을 물리치고 천도를 강행.
그해 10월 태조는 각 관청당 2명씩만 남겨두고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개경을 출발, 한양으로 왔다.
그리고, 12월부터 한성부 본격적인 역사에 들어갔다.
태조는 무학을 매우 신임.
1393년 회암사 일대에 역질이 돌자
무학의 건강을 염려해 광명사로 가게 하고
1397년 무학 장수 기원탑을 회암사 북쪽에 건립.
태조는 왕위를 물려준 뒤,
회암사에서 한동안 지냈다.
그뒤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사이가 소원해진., 태조와 태종.
부자 간 화해를 위해 무학은 여러번 함흥과 한성을 오갔다.
그러나, 그의 노력에도 태조의 마음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무학은 조선 태종 2년(1401) 회암사 감주(監主)가 되었으나,
이듬해에 사직하였고, 금강산 금장암에 들어가 여생을 마쳤다
1405년 그가 사망한 후, 태종의 명으로 무학대사비가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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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국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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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민속자료 제28호. 서울을 수호하는 신당으로,
현재, 인왕산 기슭의 선바위 밑에 위치하고 있으나,
원래, 그 연혁은 남산과 관련된 신앙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태조 5년 12월)
호국의 신으로 삼아(태종 4년 9월) 개인적인 제사는 금하고
국가 공식행사로 기우제(祈雨祭)와 기청제(祈晴祭)를 지냈다.
태종 8년 5월,
태종 9년 7월,
태종 12년, 2월.
'신증동국여지승람(권3)'에 의하면,
목멱신사 사당은 남산 꼭대기에 있었고,
매년 봄·가을에 초제(醮祭)를 지냈다 한다.
'별을 향하여 지내는 제사'.,초제(醮祭).
이것이 국사당의 전신이고 무신도(巫神圖).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藁)에서 언급.
1972년 당 관리인 증언에 의하면,
조선 말, 이미 국가 제사는 없었다.
다만, 별궁(別宮)의 나인들이 치성을 드리러 오거나
개성 덕물산에 치성갈때 이 당을 거쳐가고는 하였고.
민중전(閔中殿)이 궁중 나인들을 시켜 국사당에 치성.
궁중 발기에는 인근 각처 명산과 당·묘 등에
치성을 위하여 보낸 금품목록이 적혀 있는데,
여기에 국사당 이름이 여러번 기록에 등장한다.
국사당은 1925년 남산에서 현재 위치로 이전되었다.
이것은 일본인들이 남산 기슭에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이보다 더 높은 곳에 위치한 국사당의 이전을 강요한 탓.
이전장소를 인왕산 기슭으로 택한 것은
그곳이 태조와 무학대사(無學大師) 기도처.
국사당 명칭도 무학대사를 모시는 데에서 비롯.
그리하여, 남산 국사당을 이전할 때
그 재료를 그대로 옮겨 원형대로 복원.
내부는 11평에, 바닥은 마루로 되어 있다.
동서 양쪽에 온돌방이 있는데,
이것은 나중에 만들어진 것이다.
마루 좌우 일부와 뒷면 및 전면에는 무신도.
평면 전체가 제상을 차리고 굿을 하는 공간이다.
구조가 단순하지만 규모는 민간 건물보다., 큰 편.
영조·정조 이래의 견실과 간결을 위주로 한
건축이념에 바탕을 두고 지어진 것인듯 하다.
국사당은 굿하는 곳만 아니라
단골신도들이 개인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찾아와 참배하고 기도.
참배객들이 서울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연중 끊이지 않고 찾아오는데, 정월에 가장 많고
그 다음이 2월·3월·9월의 순이며, 당굿은 크게 세 종류.
첫째는 상인이 사업 번창 경사굿,
둘째는 병자가 (病)굿 또는 우환굿,
셋째는 사령(死靈) 극락왕생 진오기굿.
그외, 몇가지 동기가 복합되는 경우도 있고
이러한 굿이 1년에 평균 100여 회 치러진다.
서울시내에도 이러한 굿당이 몇 군데 있었는데,
회현동 노인성당, 불광동 할미당, 자하문 서낭당 등.
자하문 서낭당은 없어졌지만, 국사당은 민속자료로 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