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1421~164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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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대명 :大明).....................
명나라(1368년 ~ 1644년)는 중국 역대왕조 중 하나.
주원장(朱元璋)이 원나라를 몰아내고 세운 한족 왕조.
정식 국호 대명(大明)이며, 16 황제를 거쳐 277년간 존속.
청나라의 거듭되는 침공과 이자성의 난으로 멸망하였고
그뒤 청나라가 이자성 반군과 남명(南明)제압 후 중국 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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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창업자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璋).
5,000년 중국 역사 속에서 수많은 황제들이 명멸했지만
그들 중에서 진정한 '민중의 아들'은 주원장 단 한 사람뿐이다.
한(漢)나라의 건국자인 한 고조 유방 역시
지체 높은 귀족이 아닌.,비천한 농민 출신.
그렇지만 유방은 상당한 재산을 가진 부농이었으며
마을 촌장 벼슬을 살 수 있을 정도로 여유 있는 집안.
유방과 달리 주원장은 하루하루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극도로 궁핍한 소작농 출신.
그것도 6남매 중의 막내로 일찍이 부모를 잃고
형제가 뿔뿔이 흩어져 호구지책으로 절에 들어가
탁발승 노릇을 하기까지 했으며 사회적 여건상 그것도
여의치 않자 절망적인 심정으로 홍건적(紅巾賊)에 가담했다.
.
그는 작은 무리를 이끄는 소두령으로 출세하기 시작
홍건적 최고 지휘관으로 스스로 권력 기반을 닦았으며,
이를 배경으로 치열한 경쟁 끝에 천하의 주인이 된 사람이다.
주원장은 당시 중국의 시대상황이 낳은 인물.
칭기즈칸 손자 쿠빌라이에 의해 창건된 원(元)나라는
채 90년을 존속하지 못했고 원 왕조의 황제들이 강력한
통치력을 행사한 기간도 고작 한 세대 남짓에 불과할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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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이 건국한 원나라 왕조는 14세기 들어와,
'제위상속'을 둘러싼 다툼으로 인해 통치능력 저하.
거기에 더불어 천재지변과 전염병이 차례로 일어났다.
백련교도가 일어나 1351년 홍건적의 난을 일으키자,
반란은 순식간에 널리 퍼져나갔고 홍건군 장수였던
농부 출신 주원장(훗날 태조 홍무제)은 남경을 근거지로
장강 유역을 통일하는 데 성공하여 1368년 명나라를 건국.
홍무제는 건국하자마자 북벌을 개시하여,
원 순제(토곤 티무르)는 대도(북경)를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쳐 만리장성 이남은 명에 의해 통일.
조선과의 관계
조선(1392~1910)은 27대에 걸쳐.,李氏 집권.
조선 시대의 전통적인 외교정책의 하나로는
중국의 왕조에 대해서 사대정책을 취하는 것
태조 이성계는 즉위 전부터 친명정책(親命策)을 표방
개국 즉시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새 왕조의 승인을 요청
국호도 '화령(和寧)·조선' 둘을 보내, 조선을 선택 받아 사용.
그러나, 명나라에 대해서는 여전히
“권지고려국사(權知高麗國事)” 칭호
조선이 명에게 “조선국왕(朝鮮國王)” 금인(金印)을 받아
왕(王)에 책봉된 시기는 1401년(태종 1)에 이르러서였다.
그뒤 국왕 즉위에는 반드시 명나라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조선 왕이 죽었을 때 이를 알려 시호를 받았으며,
또 종속(從屬)의 상징으로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
한편, 성절사(聖節使)·천추사(千秋使)·정조사(正祖使)·동지사(冬至使)
등 정기적인 사행(使行) 및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사신을 명나라에 보내
형식 상, 종속관계를 맺었지만 직접적으로 정치간섭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명나라와 실질적으로 유대를 맺게 되는 것은
조공과 회사(回賜)의 형식을 통한 양국 간의 접촉
파견하던 사행(使行)에는 일정한 액수의 공물을 바쳤다.
금은(金銀)· 마필(馬匹)· 인삼,·저포(苧布)·마포(麻布)·
석자류(席子類)·호피(虎皮)·나전(螺銓), 처녀, 환관(宦官)
이 중 국내 생산이 부족한 금은(金銀) 세공은.,커다란 부담.
국내에서는 함경도 단천(端川)의 금광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채광(採鑛)을 장려하며 민간 사용 제한.
이 때문에 금은(金銀) 은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대신에 다른 토산물을 바칠 것을 청하여, 세종 때에 이르러서
마필(馬匹)·포자(布子)로써 조선은 조공을 대납할 수 있게 되었다.
조공에 대한 명나라에 회사품(回賜品)으로는
각종의 견직물(絹織物)· 약재· 서적· 문방구 등.
일종의 관무역(官貿易)으로 경제적 의의도 컸다.
관무역 외에 사신이 서로 내왕할 때마다
북경(北京)에서는 회동관, 서울에서는 태평관
두 나라 사이의 사무역(私貿易) 또한 행해졌다.
명나라에 조공을 하기 위하여 국내의 물산을 거둬들이며,
아울러 명나라의 우수한 물산이 국내에 들어오게 됨에 따라
국내 산업은 위축되고, 금은·인삼 등을 비롯한 각종 무역의 통제.
일반적으로 상업 활동을 침체케 하는 결점도 있었으나,
선진국 명과 교섭은 귀족생활 향상과 문화발전에 이바지
명과 조선은 국초부터 문제점도 선조 때 해결되어 친선 돈독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명나라는 원병을 보내와
조선이 '7년전쟁' 왜군을 격퇴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7년전쟁을 통해 명나라 국력이 크게 소모
그 사이 누루하치가 청(淸)을 세워 명나라의 변경을 위협했다.
광해군은 국내 여론에 못이겨 군대를 파견했고
사령관 강홍립에게 "명이 우세하면 청과 맞서고,
청이 우세하면 싸우는 척 하다가 항복하라"고 밀명.
하여, 조선의 국력 손실을 최소화했다.
그러나 이는 명나라 멸망과 직결되는 일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즉위.
"명나라는 부모의 나라요, 조선은 형제의 나라요." 입장.
하여, 청태종은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공.
1636년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에 피신한 인조는
청태종에게 '삼전도 굴욕' 이후에 청 신하가 된다.
그러나, 그후에도 조선이 사대의 예로 섬긴.,명나라.
명나라의 해금정책을 따라야 했던.,조선.
동서양의 해상 실크로드를 봉쇄함으로서
동서양의 육로 실크로드를 확실하게 장악 후.
세계 경제를 주도해 전성기를 이루었던.,명나라.
그러나, 명이 해금정책을 고집하는 동안에
'해상 실크로드'의 무역 주도권은 서양이 독차지.
'유럽 변방' 서양이 세계무역을 주도하는 원인을 제공.
뒤늦게, 명나라는 해상 실크로드 개척을 시도.
그때는 이미 국력이 기울고 재정이 바닥난 상태였다.
결국, 유럽 변방들이 급부상하며 세계 경제는 서양이 주도.
1644년 청나라에 의해 멸망한.,명나라.
'1392년~1644년' 약 250년간.,조선 우호국.
'명말청초' 변혁기 속에서 일부 한족들은
정씨 왕국이 지배하는 대만으로 가기도 했고,
일부는 조선, 또 다른 부류는 일본 나가사키 행
이들은 에도 막부가 지정해준 장소에 모여 살았고
이것이 오늘날 나가사키 차이나타운의 기원이 되어
일본이 동아시아 해상왕국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된다.
'조선시대 명나라는 어떠한 나라였던 것일까?'
명(1368~1644)은 주원장이 원을 몰아내고 세운.,한족 왕조
정식 국호는 대명제국(大明帝國) 16명 황제, 277년 간 존속.
농민반란으로 멸망했고, 그후 청이 이자성을 제압한 후.,지배.
몽골이 건국한.,원나라는 14세기 들어와
제위 상속다툼이 일어나 통치능력이 저하.
천재지변과 전염병이 차례로 일어났기 때문에
백련교도 난 & 1351년 홍건적이 반란이 일어났다.
홍건군에 속한 장수였던 가난한 농부 출신.,주원장.
훗날, 태조 홍무제는 남경을 근거지로 장강 유역을 통일
1368년 명나라 건국 후, 곧바로 북경의 원 순제를 제압했다..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은 명나라 주원장에 의해 통일
홍무제는 통일을 달성한 뒤에는 외정을 자제하고,
농촌 토지 및 인구조사를 진행해 이갑제 위소제 시행.
내정을 안정시키는 한편, 명나라 건국공신을 숙청한다.
재상이 있던 중서성을 폐지하고
6부를 황제직속으로 하여 독재체제
그러나, 1398년 홍무제가 죽자
명나라 2대 황제였던 손자 '건문제'와
그 숙부였던 홍무제의 아들들 사이에서 불화
북경 중심으로 북방방비 담당 연왕(홍무제 4남 주체)이 반란
1402년 주체는 수도 남경을 점령하고 건문제에게서 제위를 찬탈
제3대 영락제 즉위로 인해 정치의 중심은 다시 북경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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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제는 북경천도후, 홍무제의 신중책을 바꿔,
왕성하게 세력을 넓혔고 북쪽으로 후퇴한., 원 잔당
북원(北元)은 1388년 토곤 티무르에 의해 왕통이 단절.
영락제는 원정을 감행해 이들을 제압.
만주 여진족을 복속시켜 위소제에 조직
남쪽은 베트남 '진조의 내란'을 틈타 정복.
거기에다가 동남아시아, 인도양까지 위신을 넓히기 위해
정화가 이끄는 대함대를 파견해 메카, 아프리카 동해안까지
도달한 대원정의 결과, 다수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게 되었다.
영락제 사후, 몽골에 대한 원정과
동남아시아의 함대 파견은 중지되고,
베트남에서는 여조가 명에서 독립했다.
그러나 영락제 아들 홍희제,
손자 선덕제 2대 황제 재위때
국력은 최고 전성기를 맞이했다.
한편, 몽골 고원에서 서 몽골의 오이라트가 힘을 얻어
몽골을 제압하고 명나라에 침공을 가하자 1449년 영종은
환관 '왕진'의 부추김으로 원정에 나섰다가 포로가 되었다.
오이라트 족장 에센 칸이 내분으로 살해되어 위기모면.
후에 귀환해 복위한 영종 이래 역대 황제는 자금성에서
나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정치에 소홀한 황제도 많았다.
그로부터, 국운이 서서히 기울었던.,명나라
16세기 왜구가 중국인 밀교역상인과 연대하여
활동을 시작해 명나라 국경 해안지역을 위협했다.
거기에 몽골 쿠빌라이 칸의 자손이라고 칭한 다얀 칸이
즉위하여 오이라트에 대항해 몽골의 재통일을 이룩했다.
오르도스 지방에 분봉된 다얀 칸의 손자 알탄 칸은
16세기 중기부터 빈번하게 중국에 침입하여 1550년에는
북경을 포위하는 경술의 변을 일으키기도 했던.,왜구와 몽골
이를 가리켜, 북로남왜(北虜南倭)라고 불렀다.
.....................북로남왜(北虜南倭).......................
명대(明代)의 수군 제독, 외교관.,정화(마삼보 :馬三保).
해상 영향권과 상권을 인도양 연안국가까지 확대시켰다.
1424년 영락제 사후 등극한 홍희제(洪熙帝)
영락제의 정책을 바꿔 해상원정을 중단시켰다.
정화는 원정군 해산을 위해 난징 위수사령관으로 임명
정화는 1431년 겨울 마지막 원정을 떠나
동남아시아·홍해 방문 1433년 귀국,1435년 운명
그는 영락제 외교사절 중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이다.
정화의 해외원정 결과 명은 반세기 이상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
명의 해외이민이 늘어 동남아에 식민지 건설.
19세기까지 지속된 명나라 조공무역 원조.
영락제가 야심차게 주도한 ‘남해원정’이었다.
정화는 19세기 영국의 최대전함보다 세배 이상 큰배를 타고
15세기 인도양 넘어 아프리카까지 누비며.,대규모 해상무역
그러나, 그후 명은 정화의 사업성과를 제대로 계승하지 못했다.
정화 제독의 항해기록들은 대부분 유실되었고
언제 어디에 묻혔는지 모른채 500년간 잊혀졌다.
막대한 재정부담으로 명 유학자들의 거센 반발 탓.
.
명나라는 그후 북쪽 몽골과 장기간 전쟁.
한편, 남쪽 왜구 퇴치에 나선., ‘북로남왜’
하여, 해외원정에 눈돌릴 여력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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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3년 명의 마지막 남해원정이 끝난 65년 뒤
포르투갈 바스코 다가마가 이끄는 소규모 함대
아프리카 희망봉을 거쳐.,인도 캘리컷에 도착했다.
명이 민간상인들의 해외진출을 금지하는 ‘해금(海禁) 정책을
수백년간 유지하는 동안 캘리컷은 유럽인의 앞마당이 되었다.
콜럼버스 이후 물밀듯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몰려간 유럽은
짧은 기간 안에 아메리카 전역을 식민지화하면서 아메리카에서
채굴한 막대한 은을 바탕으로 유럽은 산업혁명의 토대를 쌓았다.
19세기 초까지 세계 제일 산업국가였던.,명, 청 왕조
재정 부담을 무릅쓰고 먼 바다로 나갈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산업을 비롯해 내세울게 없던 변방 유럽은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해외로 나가야 했다.
일확천금을 꿈꿀 수밖에 없는 유럽의 절박함과
명, 청 대에 아쉬울 것 없던 동남아시아의 풍족함.
절박함과 풍족함의 차이가 역사의 시계추를 바꿨다.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선진국이었던.,동양
변방 유럽제국이 발돋음하며 선진국이 된.,서양.
세계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은 동양이 아닌.,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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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5년 정덕제가 즉위한 이후 엄청난 쇠퇴를 거듭하던 중,
1572년 10살 만력제 즉위 10년간 내각대학사 장거정이 정권 장악
국정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장거정 사후 황제가 직접 정치를 시작했다.
그러나, 황제는 정치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재위는 48년 동안 누렸으나, 일본에게 침공 당한
조선 원정 전쟁비용으로 인해 재정은., 파산지경.
만력제 사후에도 태창제는 즉위후 곧바로 급사하여
천계제는 총신인 환관 위충현(魏忠賢)에게 국정을 위임
7년 치세 후 죽고, 숭정제가 즉위하며 말기 증상을 보였다.
숭정제 즉위후 기근과 반란이 차례로 발생하고,
거기에다가 후금군의 침공도 나날이 격해져갔다.
명장 원숭환(袁崇煥)이 후금군의 침공을 방어했으나,
후금 홍타이지 책략에 걸린 숭정제가 원숭환을 의심 주살.
뒤이어 도적 고영상이 백성들을 규합, 틈왕(闖王)이라 자칭,
그 뒤를 이은 이자성(李自成)이 서안을 점거하고
국호를 대순(大順)이라 칭하고 북경에 육박했다.
1644년 이자성군의 포위 앞에 숭정제는 자살하였고,
명나라는 멸망후, 화남으로 남하해 '남명'을 수립했다.
같은 해,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바꾼뒤, 이자성까지 격파.
청은 베이징 점령 후, 중국 지배를 선언
명나라 황족과 관료들이 세운 남명은 청나라에 계속 저항
운남에서 미얀마까지 도망쳤던 영력제를 최후로 멸망했다.
복건에서도 정성공(鄭成功)이 타이완을 점거하고
저항했으나, 정씨 왕국은 후에 청나라에 진압되었다.
1724년 명나라의 대왕 주이의 손자, 주지련이
청나라 옹정제로부터 1등 연은후의 작위를 받고,
이후로부터, 이 자손은 명나라의 제사를 이어갔다.
'명말청초' 변혁기 속에서 일부 한족들은
정씨 왕국이 지배하는 대만으로 가기도 했고,
일부는 조선, 또 다른 부류는 일본 나가사키 행
이들은 에도 막부가 지정해주는 장소에 모여 살았고
이것이 오늘날 나가사키 차이나타운의 기원이 되었다.
원나라 말기의 해이해진 정국을 경계한
홍무제와 정난의 변으로 황제에 등극한 영락제
모두 정권을 안정화하기 위해 강력한 공포정치를 실시.
그전까지 강력한 권세를 누리던 신하도
황제의 명령에 위반되는 경우, 즉시 숙청
명나라 시대의 관료제는 발달했지만,
아무리 강력한 권신(權臣)과 환관(宦官)도
황제의 뜻에 따라 언제든지 제거가 가능했다.
하여, 명나라 시대 이전의
한나라, 당나라, 송나라 시대
정치와는 확연히 다른 면모였다.
역사학자들은 당시의 정치제도는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관료제로 정의
황제 전권을 견제할 수 있는 기구도 발달.
'황제 독재를 저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라는 식으로 명대의 정치제도를 설명했다.
하지만, 명나라의 정치적인 통치 특징은
훌륭한 평가를 받았던 황제의 치세는 짧고,
나쁜 평가를 받은 황제의 치세는 길었던 현상.
홍무제는 환관의 정치 참여를 경계했지만
정작 자신도 환관을 정치활동에 사용했다.
영락제는 그가 황제에 등극한 방법이 부당했기에,
환관을 이용하여 신하를 억누르는데 사용하였는데,
명나라 시대에 환관의 정치개입 횡행은 이때부터 비롯
제5대 황제 선덕제부터 정치 일선에 나서기 시작한.,환관들
정치를 타락시켜 명나라가 멸망하는 큰 원인 중의 하나가 되었고
황제의 눈과 귀를 가리고 부정부패를 저질러 백성들의 원성을 들었다.
천계제 시절 대내총관태감(조선 판내시부사와 같음.) 위충현
자신을 구천구백세(九千九百歲)로 지칭하였는데 자신을 황제인
만세(萬歲)보다 낮고 모든 사람들보다 높은 자리에 있었다고 생각.
천계제 막강한 총애에 힘입어 위충현은 공개적으로
대소 신료들에게 뇌물을 요구했고 황궁을 사실상 장악
하지만, 명나라 시대의 환관은 한나라나 당나라와는 달리
권세를 누리던 환관이라고 하더라도 황제의 말 한마디에
언제든지 제거가 가능하였다는 점이 독특한 점이다.
이는 명대에 환관은 한나라나 당나라의 환관과는 달리
권력의 기반이 오로지 황제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유근, 위충현 등 권세 환관들은 황제가 마음먹은 순간.,제거.
명나라 중기 부터는 지식인층이 지방 지도자로 지위 확립
신사(紳士)라 불리는 새로운 신분층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지식인이었고,
관위(官位), 학위(學位)를 가진 관료.
지방의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은 지도자
정부의 지방관과 협조해 지방정치에 적극 관여했다.
그러나 당나라 이전의 귀족과는 달리, 혈연을 기반으로
권세가문을 이루지 못했고, 신사는 세습되는 신분이 아니라
아버지가 신사라도 자식이 과거에 합격 못하면 의미가 없었다.
자료의 부족으로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역사학자들은 신사의 족보에 대한 연구를 통해
신사로의 진입과 탈락이 활발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당시 누구나 상류층 진입이 가능
명 사회 내에 유동성이 컸음을 보여준다.
명나라의 중앙관제에는 네가지.,분명한 특징.
1. 승상제도를 폐지.
명 초기에는 원의 제도를 따라 중서성과 승상을 두었다.
홍무 13년(1380) 명 태조는 원말 승상의 권력이 황제를 폐위
또는 옹립할 만큼 비대해졌던 것을 거울삼아 명의 승상 호유용이
권력남용으로 정치를 어지럽히자 그를 죽이고 즉각 중서성을 폐지 후,
그 사실을 호유용이 선포하는 동시에 승상을 파면하고 설치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오랫동안 중국 역사상에 존재했던 재상제도 폐지
명청 500여년 동안 재상이 없는 군주전제체제를 추진하였다.
승상 폐지후 명조의 중앙기구는 다시 조정하여 육부를 기본으로
府,部,院,寺(司)가 정무를 분담하여 처리하는 행정골격을 형성했다.
2. 내각제 확립.
명 태조는 승상 폐지후, 육부와 백사(百司)를 지휘
친히 독단하였지만 사실은 무척 처리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비서처(秘書處)’를 두어
황제를 도와 정사를 처리해야 했다.
명 중엽 이후로 각의 업무를 주재하는
내각대학사를 수보(首輔) 라고 불렀으며,
나머지는 차보(次輔)․군보(群輔) 라고 했다.
내각의 직책은 “황제에게 옳고 그름을 주청하는
고문(顧問)역할을 하고, 비답(批答)을 초안하는 것."
홍무 15년(1382)에 명 태조는 송조 제도를 모방
화개전(華蓋殿)․무영전(武英殿)․문화전(文華殿)․
문연각(文淵閣)․동각(東閣)에 대학사(大學士)를 두고
전각대학사(殿閣大學士) 라고 통합하여 불렀다.
이후 인종(仁宗) 홍희제(洪熙帝)는
또 근신전대학사(謹身殿大學士)를 증설
세종(世宗) 가정제(嘉靖帝) 때
화개전을 중극전(中極殿) 으로
근신전을 건극전(建極殿) 으로
바꾸니 모두 4전 2각이 되었다.
그러나 홍무 때의 <전각대학사>는
고문일뿐 정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명 성조 영락제가 즉위한 후에야
황제와 육부 사이에 내각이 성립
각(閣)은 문연각을 가리키며, 오문(午門)의 안,
문화전(文華殿) 남면에 있었고, 그 위치는 궁 안
각의 신하는 또 황제를 전각의 아래에서 항상 보필
재상의 이름을 피하였기 때문에 내각(內閣)이라고 칭
처음에는 한림관(翰林官)을 선출해 입각시켰고
점차 학사와 대학사로 승진되었으며 보통 5~7명.
후에 상서․시랑 이 전각대학사에 제수되어
문연각에 들어가 일처리 하며 지위가 높아졌다.
3. 환관 관아가 정부기구를 능가.
명조 환관기구는.,"24 아문"
12감 4사 8국으로 구성되었다.
.....................................12감...........................................
사례감(司禮監), 내관감(內官監), 어용감(御用監), 사설감(司設監),
어마감(御馬監), 신궁감(神宮監), 상선감(尙膳監), 상보감(尙寶監),
인수감(印綬監), 직전감(直殿監), 상의감(尙衣監), 도지감(都知監)
.................4사..............
석신사(惜薪司), 종고사(鐘鼓司),
보초사(寶鈔司), 혼당사(混堂司)
...................................8국................................................
병장국(兵仗局), 은작국(銀作局), 완의국(浣衣局), 건모국(巾帽局),
침공국(鍼工局), 내직염국(內織染局), 주초면국(酒醋麵局), 사원국(司苑局)
.....................................................................................................
태감은 명조에서 가장 높은 일급의 환관을 가리켰고,
그 아래 소감(少監)․감승(監丞)․봉어(奉御) 등이 있었다.
인장을 관장(掌印)하는 직무이고
기타 직무명칭에는 제독(提督)․병필(秉筆)․수당(隨堂)․
관리(管理)․장사(掌司)․사자(寫字)․첨서(僉書)․감공(監工) 등
사례감은 또 동창과 금의위(錦衣衛)를 통제했다.
동창(東廠)은 정탐과 체포를 관장하는 특무기구
영락 18년(1420)에 처음 설치되었다.
금의위(錦衣衛)는 홍무 15년(1382)에 설치
'친군위'에 속했고, 아래로 17개 천호소 관할
황제가 신임하는 훈척(勳戚) 도독이 통솔했다.
금위위 아래에 또 북진무사(北鎭撫司)를 두고
조옥(詔獄, 칙명에 의해 죄수를 다스리는 일)을 주관
명조 환관기구의 방대함과 설치의 완벽함은 전무후무하다.
관료기구와 서로 필적하기에 충분할 만큼
황제가 다소간 간섭하는 상황 아래 두 계통은 서로 견제
한편, 황제가 저울질하는 역할을 통해 황권을 강화하였다.
반대로 황제가 정사를 게을리 하거나
권력남용할 때, 곧바로 상호보완 작용
환관은 설사 권신이 조정을 통제하고 있다고 해도
환관의 힘 단결력을 유지하여 관료기구의 힘에 눌려
황제와 환관들의 힘이 쇠진해지는 법이 명대에 없었다.
하지만 황제의 가노(家奴)였기에
황제와 가깝다는 점에서 유리했지만
유일한 권력의 기반이 황제였기 때문에
황제의 지지가 사라지면 즉시 제거 되었다.
4. 북경과 남경에 각각.,중앙기구.
중국 역대왕조는 주로 양경 혹은 다경제(多京制)를 시행
명조도 양경제를 시행하였는데, 명 성조가 북경으로 천도하자
남경은 남겨진 도읍지라는 의미에서 유도(留都)라고 불리웠다.
전대와 다른 점은 남경에 완벽한 중앙기구를 남겼다는 점
양경기구에 같은 점은
남경에는 내각을 설치하지 않은 것.
그것을 제외한 오부, 육부, 도찰원, 대리시,
통정사사 등의 기구를 두었던 것이 같으며,
북경과 남경의 관원의 품계도 각각 같았다.
다른 점은 남경 각 기구 정원이 북경보다 적었다는 것
정관은 일반적으로 보좌직을 두지 않았다. 예를 든다면,
육부에 좌시랑을 두지 않았는데,
도찰원에 좌도어사를 두지 않은 것과 같았다.
남경에는 속관으로 둔 관원의 숫자도 적었을 뿐만 아니라
전부 두었던 것도 아니었고 책임과 권한도 북경보다 작았다.
지방 관제
원나라 시대의 행중서성(行中書省)이 지나치게 강력한 권한을 가져
원말의 정치를 혼란하게 만든 원인이라 생각해, 이를 경계하고 대신
지방자치의 민정, 재정 담당만을 담당하는승선포정사사(承宣布政使司),
사법, 감찰담당 제형안찰사사(提刑按察使司),군사담당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
등 3개 기구로 분할 설치.
승선포정사는 약칭하여 포정사라고 하는데,
포정사는 한 성의 민정과 재정을 주관하였고,
좌우포정사(布政使), 좌우참의(參議), 좌우참정(參政) 등
정관을 두고 제형안찰사사(提刑按察使司)는 안찰사(按察司)라고 약칭
안찰사는 한 성의 사법과 감찰을 주관하였다.
안찰사(按察使), 부사(副使), 첨사(僉使) 등 정관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는 도사(都司)로 약칭하였다.
도사는 위소를 관장하였다.
명조의 도포안 삼사는 각각 지방-군정-사법 업무를 관리
그것들이 중앙의 기구의 지방사무소 정도의 의미에 있지,
지방에 권한을 나누어준 것은 아니어서 원조의 행중서성처럼
모든 것을 다 거느렸던 것과는 다르다.
삼사 사이는 서로 관할하거나 예속되지 않았는데,
포정사는 주로 이부․, 호부에서 명령을 받았고,
안찰사는 주로 도찰원, 형부에서 명령을 받았으며,
도사는 오부에 관할되어 병부에서 명령을 받았다.
성급 이하는 부․주․현의 세 등급을 나누었는데,
행정구역이자 관서의 명칭이기도 하였다. 그 중 주에는
산주(散州, 속주)․직예주(直隸州)의 구분이 있었다.
“속주는 현으로 보고,
직예주는 부로 보았지만,
품계는 서로 같았다”
부, 주, 현에는 각각 지부, 지주, 지현을 두어 장관으로 삼았다.
북경의 소재지를 순천부(順天府), 남경의 소재지를 응천부(應天府)
장관을 윤(尹)이라고 하였고 그 외에도 명조는 총독(總督)과 순무(巡撫)를 통해
지방 통제를 강화했다.
이 관직은 정식 편제는 아니었지만
황제의 특파관의 의미가 있었다가
나중에 정식 제도화 되었다.
영락 연간에 조정신하를 파견
하여, 지방을 순시하게 했는데
이때부터 순무제도가 생겨났다
명초에 현 아래의 향촌을 이갑제로 조직.
...............................이갑제 & 보갑제........................
10개 호와 1개 갑수호(甲首戶)로 구성된 11호가 1갑(甲)으로,
10갑이 1리(里) 조직으로., 징세와 부역 목적인 인위적인 편제.
도시는 리(里)가 아니라 방(坊)으로, 도시 부근은 상(廂)으로 조직
방과 상 아래에는 모두 도(圖)로 편성.
명 중엽 이후 사회의 유동성이 증가하고
인구이동이 잦아지면서 본래의 이갑제는 붕괴
자연촌락 중심으로 보갑제(保甲制)가 추진되었다.
..................................................................
군사 관련기구로는.,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와 태복시(太僕寺)
명초 대도독부를 설치했는데, 원조 추밀원(樞密院)에서 발전된 것
승상폐지 후, 대도독부는 중, 좌, 우, 전, 후 오군도독부(약칭 오부 : 五府)
오부는 각각 좌우도독, 도독동지(都督同知),
도독첨사(都督僉事) 등의 정관을 설치하고
병적 및 천하의 도사위소(都司衛所)를 관장
오부는 병부와 권력을 나누었는데
병부는 군정 인사이동과 출병에 관여
구체적으로 군대를 다스리지는 않았다.
오군도독부는 병적을 관할했으나
군대를 움직일 수는 없었고, 전시에는
황제가 총병관(總兵官)을 파견하여 통솔
태복시는 마정(馬政)을 관장하는 기구로서,
경(卿), 소경(小卿), 사승(司丞) 정관을 두었다.
명대의 군인은 일반 백성이 등록되는 민적과
군인의 호적인 군적(軍籍)이 분리되어 있었다.
군적에 등록된 군호(軍戶)는 세금 대신 병역의무.
'군사 편제' 위소는 5,600명을 1위(衛), 1,120명을 천호소(千戶所),
112명을 백호소(百戶所)로 설치하고, 각각 위지휘사(衛指揮使)․천호(千戶),
백호(百戶) 등의 관직을 두어 관장했고 백호소는 백호, 천호소는 천호가, 담당
위의 최고 지휘관은.,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
.................조세 제도................
이갑제도 해를 거듭할수록 부과되는 노역,
세금의 사무작업과 항목이 복잡화되면서
부담과중으로 불공평한 상황이 심각해졌다.
이에 대해 만력제 시대의 재상 장거정은
명 중엽 후, 조세개혁을 통일한.,일조편법.
모든 항목들 단일화하여 납부하게 한 방식
장거정이 죽은 뒤,
만력제의 사치로 인해
그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과거 제도......................
홍무제는 명나라를 건국하고 곧이어 과거를 시행
과거에 응시하려면 국립학교 생원이 되어야만 했다.
홍무제는 수도에 국자감 국립학교를 설립
지방에도 각각 부, 주, 현에 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나 뒤에 과거자격을 얻기 위해 재적
공부를 하는 장소로는 사용되지 않았다.
민간에서는 사숙 사립학교가 존재해
책 읽는 법, 계산하는 법을 가르쳤다.
생원이 되면 시기에 따라 시험이 있으며,
제1차 지방시험인 향시에 합격한 자는 거인
제2차 중앙시험인 회시를 받아 합격하면 진사.
진사가 되면 관료가 될 자격을 얻는다.
이어 황제 앞에서 전시 시험이 있었으나,
이 과거는 떨어지는 일은 없는 시험이었다.
관료가 되려는 사람의 숫자는 매우 많아,
생원만 50만 명에 이르렀다는 말이 있다.
이에 반해 합격자는 매번 3~400명에 불과
여러차례 시험을 보는 동안에
백발이 된 응시자들도 있었다.
.........................................
홍무제는 많은 공신들을 숙청
한편, 아들들을 각지에 파견했다.
주로 국경지역에 파견하여 몽골 등
외적에 대한 침입을 막기 위한 목적.
이 파견된 아들들을 왕으로 봉해 공신의 병권을 빼앗아
공신권한을 축소시키고 아들들이 외적을 막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홍무제 사후 건문제 때에 문제가 되었는데,
황제 측에는 공신들이 거의 숙청되어 지략가가 별로 없었고
병력을 거느릴만한 인재도 적어, 번왕 측의 병권리 상해졌다.
이러한 이유로 번왕 세력이 황제를 위협할 수 있게 되자,
건문제는 삭봉책 시행으로 번왕들을 귀양, 서인으로 강등.
그로인해 주원장의 4남 주체(후의 영락제)를 위협하게 되자,
반란을 일으켜 황제가 된후, 지방병권을 회수해 중앙집권 정책.
영락제는 황제즉위 후, 다시는 반란이 없도록 왕부의 권력을 통제.
황태자를 제외한 15세를 넘은 모든 황태자는 지방에 거주하며
평생 그곳을 벗어나는 것이 금지시켰고 아무런 권력을 갖지 못했고
상업 종사하는 것도 금지되었으며, 지방의 관료들과 교류하는 것조차 통제
....................사회 및 경제......................
10세기 이래 곡창 강남지방에서 직물업 등 공업 발달.
쑤저우와 항저우 등지가 견직물업의 중심도시가 되었고,
송강(松江) 일대는 명나라 면직물업의 중심도시가 되었다.
강남이 공업중심지로 발전하자, 인구가 증가하고
농경지는 상품작물 재배지가 되어 미곡 생산이 부족
명 말, 양자강 중류가 곡창지대가 되어 경제적 분업화
상업의 발달은 상인 집단을 배출하였는데,
특히 산시 상인과 신안 상인의 활동이 컸다.
이들에 의해 강남의 수공업 제품이 각지로 팔려 나갔고,
각 지역 특산물과 쌀, 면화 등 원료가 강남지방으로 유입.
쌀, 소금, 직물, 도자기, 차 등이 전국적인 교역품이었다.
명대 중엽 이후로 상업의 발달이 특히 두드러졌으며,
강남지역 생산품 구입을 위해 서양 상인들이 찾아왔다.
마카오에서 활동하던 포르투갈 상인을 필두로 에스파냐,
네덜란드 상인들이 명나라로 와서 중국의 상품을 구입했다.
명대의 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은에 대한 수요도 증가
유럽 상인들은 견직물, 차, 도자기 대가로 은을 지불했다.
유럽 상인들은 중국 상품을 구입하기 위한 은을 마련하기 위해
멕시코 은을 약탈, 중국 상품을 구입해 유럽에 되파는 삼각무역 전개.
명나라 시기에 조세제도인 일조편법은 조세의 일원화를 추구한 것이다.
..........................문화 및 교육................
명나라 초기에는 국수주의적인 풍조가 강했지만,
주자학은 관학화하여 학문적연구에서 멀어져 있었다.
명대 사상을 대표하는 왕양명(王陽明)
'인간의 마음이 곧 천하만물 이법.
마음을 함양하는 것으로 충분하고
따라서, 학문을 연마할 필요가 없다.'
1582년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명나라를 방문
서양 과학을 전해왔고, 서광계가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
그외, 서민문화의 성행에 따라 연극 외에 통속소설이 유행
수호전, 삼국지연의, 서유기, 금병매 등 소설이 널리 알려졌다.
명나라 학제는 송·원의 학제를 계승
교육행정은 중앙의 국자감(國子監)과
지방 유학제거사(儒學提擧司)가 각각 관장.
중앙에는 국자감과 종학(宗學)의 두 학교가 있고,
지방에는 부학(府學)·주학(州學)·현학(縣學) 및 위학(衛學)
과거제도는 송·원 제도를 계승해 향시(鄕試)·회시(會試)·전시(殿試)
과거제에서는 정형화된 형식의 답안을 요구
팔고문이라는 형식의 독특한 문장이 유행했다.
이 폐단으로 말미암아 사상이 경직되는 단점이 발생
하지만, 명 중엽 이후 상업이 발달하고
서적에 대한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이에 부응
학문과 사상이 보다 자유로운 분위기가 널리 퍼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