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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 거제도 & '일본인 마을' 왜관

작성자선경나라|작성시간17.08.28|조회수1,980 목록 댓글 0

이방원이가 왕씨들 몰살시킨것 처럼 김일성가문 싹 죽는다는 예언~!



조선시대 - 거제도 & '일본인 마을' 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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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원이가 왕씨들 몰살시킨것 처럼 김일성가문 싹 죽는다는 예언~!

그 많던 왕씨는 어디로 사라졌나?


조선 건국 직후 1394(태조 3년) 무렵에 일어났던,

전대 왕조 고려의 국성 왕씨 일족을 학살한 사건.


고려시조 태조 왕건은 후삼국 통일을 위해

각 지역의 호족을 포섭하기 위해 무려 28명의

부인을 두어.,많은 자손 생산, 사성정책을 남발.


하여, 자신과 전혀 인척관계 없는 사람들에게도

왕씨 성을 하사하여 서류 상의 인척으로 만들었다.

.

이때문에 고려 초, 많은 사람들이 왕씨 성을 하사받아

자신의 성을 바꾸게 되었고 그리하여 고려시대 당시에

왕씨는 21세기 현대의 김씨처럼 가장 흔한 성씨가 되었다.


당시 고려에 왕씨가 얼마나 흔했냐면

개성에는 두집 건너 한집이 왕씨와

친척 관계에 있었을 정도였다 한다.


고려가 건국되고 470년 지나

조선이 건국된 시점에서 왕씨는

대부분 이미 왕실과는 전혀 무관한

평범한 삶을 우리나라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의 왕씨 학살 결과,

대부분 왕실과 전혀 관계가 없는

개성 왕씨 씨족들이 거의 사라졌다.


그 많던 왕씨는 어디로 사라졌나?


특히 왕씨가 많던 개성에서 피해가 심했고,

이 때문에 개성에서 이성계를 증오하는 민심은

500여년이 지나 조선 망국 때까지 지속될 정도였다


왕건이 세운 고려가 이성계에 의해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조선은 고려의 옛 충신들

때문에 골치를 앓게 되는데 이들이 개성왕씨들.


바로 전대 왕조의 왕성인 개성 왕씨들이었는데,

이성계의 무력 찬탈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많았다.


고려 건국의 경우 단일된 국가 하에서 왕조가 교체된

'고려~조선' 교체 과정으로 건국된 조선과는 달리 당시

이전 왕조였던 신라는 '후삼국시대'라는 분열기를 거쳤다.


후삼국시대에는 후백제와 태봉 등으로 갈라지고

지방 각지에 호족이라는 군벌 세력들이 할거하면서

몰락하기 시작한데다 왕건이 태봉의 궁예를 몰아내면서

태봉을 갈아엎고 고려로 왕조를 교체하는 등 오히려 태봉

내부에서 일어난 역성혁명으로 인하여 고려는 건국되어졌다.


왕건이 집권한 뒤 고려는

신라 조정이 자진 항복할 때까지

수십년간 신라를 적대하지 않고 후백제와

공조해 거부감을 꾸준히 줄이고 명분을 쌓았다.


외려 고려 내부에서 고려-조선의 왕조 교체 과정처럼

신라 내부에서 다른 성씨 가문이 김씨나 박씨등 기존의

신라 왕실 가문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조로 교체하는 등.


고려는 신라에서 새 왕조로 멸망교체되는

역성혁명 방식으로 국가가 건국되지 않았다.


당시 신라 왕실의 위상은

민심과 국가분열로 인해서

통치력을 이미 상실한 상태.


신라는 후백제 공격으로 회생불능 상태로 떨어져 있었고,

고창 전투, 운주 전투 이후에 한반도 내의 주도권이 고려에게

몰리게 되자, 후백제 건국왕 견훤이 자진해서 고려 왕건에게 귀순.


신라 측에서도 질세라 먼저 왕건에게 귀순해

신라는 고려로 흡수 합병하면서 신라왕조 소멸.


왕건은 삼국 통일 이후에도 모든 특권을 중앙이 독점해

구 백제, 고구려 유민을 완전히 동화시키는데 실패했던

신라와는 달리 지방세력들에게 상당한 특권을 부여했다.


고려왕조는 대대로 경주김씨 일족 우대

신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김부(경순왕)를

경주 사심관으로 삼아 지역민심을 보살피게

하는 등 일정 권한을 보장해 큰 반발이 없었다.


왕건의 융화정책으로

고려는 별 반발이 없이

신라를 흡수할 수 있었다.


.......................

.......................


하지만, 조선 왕조는 동북면 천호출신이자

고려의 장군 이성계가 쿠데타로 세운 왕조라

고려때 구 정권 측에 반감이 클 수밖에 없었다.


또한 무안군 이방번이

'공양왕의 형' 정양군(定陽君)

왕우의 딸과 결혼하는 등 조선 왕가에도

왕씨의 피가 섞여 있었기에 더욱 복잡해졌다.


중국 한나라의 후한 광무제처럼 나라가 한 번 멸망한 후

전대 왕조의 왕족이 다시 찬탈자를 물리치고 국가를 재건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에 건국 초기 이성계 일파로서는

조선의 미래를 위해 고려 부흥의 싹을 잘라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것.

.

태조 1년 왕우를 귀의군으로 봉해

개성 고려종묘에서 고려 왕실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는데, 이를 근거로 초기에 이성계가

왕씨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으나,

왕우는 이성계와 사돈지간[2]이었기에 화를 면한 것이었다.


이렇게 이미 왕실과 전혀 관계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던 개성왕씨를 몰살시켜야 했던

가장 큰 원인은 이성계 본인 스스로 제공했다.


이성계의 즉위가 어정쩡한 형태였기 때문이다.

일단 고려 왕실의 적통은 이미 창왕에서 끊겼다.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닌 신돈의 아들이라는

소문을 활용해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그것까지는 이성계 의도대로 지만 문제는 공양왕이었다.


그가 정말 이성계의 의도대로 순과 우의 고사를 본받아

공손히 양위했다면 명분상 흠될게 없으니 왕씨를 경계할

필요성이 크게 줄었을 것이나 이성계가 사돈 집안이었던

왕요를 왕위에 올린 이유도 구슬려 선양하기 쉬울거란 의도.


그러나, 막상 왕위에 오른 공양왕 왕요는

이성계의 사전 의도와는 다르게 움직였다.


공양왕은 자신과 그 후손에게 이어질

왕조를 유지하기 위해 암중모색했던 것.


공양왕은 이성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왕과 창왕을 죽이도록 직접 명령하여

왕실 적통의 대를 완전히 끊어 놓았던 것.


뒤이어 이성계의 정적 정몽주에게 크게 힘을 실어줬다.

이런 와중에 1392년 3월 이성계가 황주에 갔다가 낙마하여

와병으로 거동을 못하고 지방에서 요양하고 있을 때 이성계의

부재를 틈타 공양왕의 지지를 등에 업은 정몽주는 이성계의 최측근

정도전, 조준, 남은, 윤소종, 남재, 조박 등을 모두 탄핵해 귀향보냈다.


정몽주는 그들을 처형하려고 했으며 내친김에

이성계까지 제거하려 했으나 공양왕이 이를 주저.


그 사이에 이방과, 이방원, 조영규, 조영무 등이 작당

백주대낮에 정몽주를 격살했고 개경으로 복귀한 이성계는

마침내 공양왕을 폐위하고 자신이 스스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성계의 즉위는 왕을 무력으로 끌어내린 반정도 아니고

절차를 거쳐 왕위를 받은 선양도 아닌 형태를 띄게 되었다.

이로 인한 명분 부족은 구왕조 반란의 불안감을 남겨 놓았다.


지방의 전승이나 정황증거를 배제하고

실록에 남아 있는 정사 만을 신뢰한다면,

실제로 왕씨가 조선을 들어 엎으려고 했다는

왕씨의 역적모의 사건들이 대체로 근거가 빈약.


조선왕조 개창 직후 왕씨 몰살은

왕씨 세력의 불온한 움직임에 대한

처벌이 아니라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

조선 조정에서 억지 구실을 갖다 붙여서

치밀하게 계획을 짜서 왕씨를 몰살시킨 것.


조선왕조 개창 때에는 건국이념 유교사상에 근거해

과거 멸망시킨 왕실의 명맥은 보전해주던 고사를 본받아

고려 왕실의 명맥은 보전하게 하자는 방침이던 조선 조정이

태조 3년 갑작스럽게 전원 학살이란 극단적인 방침으로 급선회.


왕씨 몰살 사건은 다소 여러모로 의아스러운 사항으로,

조선시대 관련된 실록의 내용도 곡필이 심한 왕조 초기의

기술이니 만큼 보다 심도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조선 태조 3년에 왕씨는 물론이고

고려왕실을 포함한 고려 구정권 지지세력은

'강화도 삼척 거제도' 3곳에서 몰살을 당했다.


공양왕과 추종세력은 유배지 삼척에서 몰살 당했고

왕씨들은 강화도 거제도에 분산 집단수용 후에 수장.

이때 탈출했거나 살아남은 왕씨는 성을 바꿨다고 한다.


조선 개국공신들은 강화도,거제도 등의 섬으로

왕씨들을 유배보내시 시작했고 고려의 적통인

공양왕의 아들들도 유배지 바다물 속에 수장.


왕씨들에게 살기좋은 곳으로 보내준다고 회유하여

강화도 앞바다에서 배에 구멍을 뚫어 수장했다는 說.

그당시, '거제도 집단수용' 왕씨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경상남도 통영 갈도 좌사리도 다이빙

좌사리도

경남 통영 >갈도 '도치골 직벽'<

[캠핑] 2006년의 여름 휴가 ~ 통영 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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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통영 >갈도 동쪽 '똥여(똥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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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통영 >갈도 서남쪽 '긴여(너부렁여)' <

경남 통영 >갈도 동쪽 '똥여(똥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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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갈도 뽈락 루어 낚시

통영 갈도 긴꼬리벵에돔 조행기(광복절 기념품 ?! ^ㅑ^)..

긴꼬리뱅에돔

갈도 뽈락

회원이신 현빈님 통영 갈도에서 82cm 참돔

갈도 참돔

통영갈도 매섬 포인트

통영 갈도

거제도 여행


 .....................거제해금강(巨濟海金剛)......................

경상남도 거제시 남부면 갈곶리에 있는 명승지. 명승 제2호.

거제도 최남부 갈곶~ '작은 돌섬' 갈도는 한려해상국립공원.

................................................................................


거제해금강은 해금강마을 남쪽 약 500m 해상 무인도로

지형이 칡뿌리가 뻗어 내린 형상을 하고있어.,갈도(葛島).

'갈도'보다는.,'바다의 금강산' 해금강(海金剛)으로 더 유명.


해금강에는 중국 진시황제(秦始皇帝) 재위 당시

불로장생초를 구하기 위해 서불이 동남동녀 3천명과

함께 찾아와 서불과차(徐不過此) 글씨를 남긴.,약초섬.


2월21일(토)거제 내도 & 해금강둘레길-'봄의 전령 동백꽃'

갈곶도

 

원래, 약초가 많아 "약초섬"이라 불리웠으나

현재, '徐不過此' 암각의 흔적은 지워져 있다.

해금강은 1971년 명승지 제2호로 지정되었다.


해금강(섬 면적 0.12㎢) 주요경관으로는

십자동굴, 사자바위, 일월봉, 신랑신부바위,

촛대바위, 거북바위가 있으며, 자생식물로는

굴거리나무, 해송, 굴참나무, 떡갈나무, 후박나무,

동백나무, 돈나무, 기린초, 춘란 등 70여종 식물 자생.

 

해금강

★해금강 >해금강(갈곶도)~다대<포인트까지(지도)


해금강

★해금강 >해금강(갈곶도)~다대<포인트까지(지도)


대진고속도로가 통영까지 연결된 이후,

해금강 주변명소를 찾는 관광객 수 증가.

.

거제 해금강(巨濟 海金剛),미륵바위,십자동굴,용굴,사자바위,촛대바위,선녀바위,망부석바위

사자바위 & 미륵바위.

경남/ 거제도/ 외도/ 거가대교/ 바람의언덕/ 신선대/ 몽돌해변/ 해금강/

'해금강 최고 절경' 십자동굴(十字洞窟), 석문(石門)·

사통굴(四通窟)·부처바위·토끼바위·금관바위·촛대바위·

조서방바위 기암괴석을 유람선 타고 해상관광할 수 있다.


해금강(海金剛)

바다의 금강산, 해금강.

거제도 해금강, 외도 보타니아

해금강 십자 동굴

십자동굴

해금강 십자동굴

거제 해금강(海金剛)

석문

해금강 촛대바위

                                                                                    촛대바위

거제 해금강


학동 몽돌해수욕장, 구조라해수욕장·

외도· 매물도 등을 연계한 유람선 운항.


거제시는 남부면 갈곶리 9·2번지 일대에

남해안 관광벨트 사업의 일환으로 체류형

관광지 조성을 위한 해금강 집단시설지구

조성사업을 추진하였으며, 2004년에 주차장·

원형광장· 상수도· 조경녹지 등 기반시설 조성.


민자유치 지연으로 사업 진척이 부진한 상태였으나,

해금강집단시설지구 문화재보호법과 자연공원법 등

규제완화로 숙박· 상업시설 등의 조성사업 추진 계획.


거제도 나들이,,,

푸른 바다에 빛나는 자연 경관의 거제도

 

제주도 다음

한국에서.,큰 섬.

주위에 유인도.,10

무인도 52개 부속섬.


'외도.,해상농원'.

장사도 해상공원

'해금강' 등이 유명.


거제도에는

약 10개 해수욕장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김영삼 전 대통령.,생가.

문재인 대통령 생가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두번째로 큰섬

거제도에서 2분 대통령을 배출.


★★문재인 생가복원,이건 과잉충성의 본보기!박그네따라하기

2017.5. 17 '문재인 대통령 생가'

거제시 거제면 명진리 남정마을

★★문재인 생가복원,이건 과잉충성의 본보기!박그네따라하기

문재인 대통령 생가 복원 유보

2017.5.25

거제 김영삼생가

거제도 1박2일 - 펜션과 김영삼 생가

통영 미륵산 케이블카, 거제 김영삼대통령 생가

거제도여행/김영삼 대통령 생가, 기록전시관【15년10월8일】

거제도여행/김영삼 대통령 생가, 기록전시관【15년10월8일】

부산 가덕도를 연결하는 거가대교 / 김영삼 생가

거제 김영삼생가


 

..............김영삼 전 대통령.,생가....................

경남 거제시 장목면 옥포대첩로 743-1 (외포리).

'지형이 닭의 모습과 흡사하다.' 하여.,대계마을.

우리나라 제14대 김영삼 대통령이 태어난 곳이다.

 

13살까지 성장한 곳.

논 8ha, 임야 13ha이며,

아담하고 작은.,포구마을.

....................................

 

거제 김영삼생가

대계마을 김영삼대통령 기록전시관/ 생가

 

그곳 마을 앞 갯바위 낚시.

수평선을 넘나드는 갈매기.

거제도 어촌마을의 평화로움.


황혼의 가슴을 흔드는 거제도

거제도

황혼의 가슴을 흔드는 거제도

거제도

거제도여행코스 -거제도가볼만한곳

거제도.,바람의 언덕.


원래, 이곳은 염소 방목지였는데

염소가 이곳 나무를 모두 갉아먹어

풍광이 좋은 바람의 언덕이 되었단다.

,

[고은치과]남해 여행 코스 추천! 거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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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차몽돌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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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대명 리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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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외도 풍경~~~~

거제도., '섬속의 섬' 외도

거제도 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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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장사도해상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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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장사도해상공원★

통영 - 거제도 / 장사도해상공원 별에서 온 그대 / 김수현 전지현 도민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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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가볼만 한곳 꼭 가야할 BEST장소

장사도.,해상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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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거제도 포로수용소

거제도 포로수용소

거제도 가라산

거제도 가라산

거가대교 개통에 즈음하여


거제도(巨濟島)는 경상남도 남부 해상에 있는 섬.

제주도 다음 큰섬이며 거제시 면적이 대부분을 차지.

가조도를 비롯, 크고 작은 섬들이 주변에 흩어져 있다.


한려해상국립공원에 속한

해금강의 아름다운 경관은

관광객 발길을 사로잡는다.


2010년 거가대교의 개통으로

부산·통영으로의 육로 교통편이

더 편리해져 관광객이 많이 증가.


 거가대교-침매터널 아름다운 밤풍경


거제도 인근에 60여 개

크고 작은 섬들이 밀집.

해안선이 매우 복잡하다.


해안과 맞닿은 장평동과 아양동 등지에

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 조선소 밀집.

거제도 조선업은 거제도 지역경제를 주도.

 

한편, 거제대교와 거가대교 개통 이후

기존 뱃길은 끊어지고 육로 교통량 활발.


한때 거제~통영, 거제~부산간

일반 여객선과 쾌속정 수시 운항.

1971년 거제대교, 2010년 거가대교

개통으로 더 이상 운행되지 않고 있다.


거가대교 개통후 부산과의 통행 거리는

기존의 140㎞에서 60㎞로, 통행 시간은

130분에서 50분으로 단축되었다.

 

[거제] 거가대교.... 

거가대교-침매터널 아름다운 밤풍경 

이씨종친회 청장년부, 단합 나들이 "거가대교" 

이씨종친회 청장년부, 단합 나들이 &quot;거가대교&quot; 

뉴스-거가대교 개통식 

거가대교와 해무 

 아름다운 거가대교

 

 

거제도(巨濟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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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거제도 여행 - 김영삼 대통령 생가(대계마을), 옥포대첩로

 

거제도는 삼한시대 변한 12국 중 독로국(瀆盧國).,영역.

그후, 신라에 속하였다가 757년(경덕왕 16) 거제군 편제.

 

고려시대 기성현 또는 거제현.

조선시대 제창현 또는 거제군.

 

제주도 다음으로 큰 섬.

진해만 입구에 놓여 있다.

 

62개의 부속섬을 가지고 있는데,

이들 가운데 유인도는 10개 정도.

면적은 380.1㎢ 해안선 길이는 275.1㎞

남쪽 일부는 한려해상국립공원에 속한다.

 

섬의 남단에 위치한 가라산(580m)이 가장 높은 산봉우리이며

남 천장산(276m), 동 옥녀봉(555m), 북 대봉산(258m)· 대금산(438m).

여러 산이  섬 전체에 고루게 산재되어 있으며, 전반적으로 산이 많은 섬이다.

 

해안선은 굴곡이 심하여 지세포·장승포·옥포·율포·죽림포 등

작은 만이 많고, 양지암각·수제봉·색암말 등의 돌출부도 많다.

 

북쪽과 동쪽 해안은 대체로 험준한 해식애 지형.

남쪽과 서쪽 해안은 낮은 편이고 해안선 곳곳에는

모래가 많이 쌓인 사빈해안 해수욕장이 분포해 있다.

 

기후는 온화하여 겨울에도 결빙점 이하 날씨가 거의 없고,

여름 기온도 25℃ 내외여서 추위와 더위를 피하기에 알맞다.

1월 평균기온은 2.5℃, 8월 평균기온은 25.6℃, 연 강수량 2,007㎜.

 

소철·종려나무·석란·풍란·팔손이나무·

동백나무 등 아열대식물이 주로 자란다.

 

1896년에 경상남도 거제부에 속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통영군(統營郡)

1953년에 통영군에서 나뉘어 거제군이 되었다.

 

1989년 장승포시(長承浦市)로 승격,

1995년에 장승포시와 거제군이 통합

거제시가 되어 현재는 거제시에 속한다.

 

2010년 기준으로 거주 인구는 22만 5270명.

남 11만 7980명, 여 10만 7290명, 8만 5010세대.

 

고현동에 가장 많은 사람이 살고,

섬 남단 남부면 인구가 가장 적다.

 

섬의 동남부 와룡반도와 운곶반도 사이의

도장포만 일대에는 해금강(海金剛)이 위치.

천태만상 기암 해식애 비경지대 관광지이다.

 

이밖에 해당화로 유명한 명사백사장을 비롯하여

국사봉· 장관대· 동백터널· 지심도· 옥포대 승첩기념탑·

지성관· 포로수용소 등의 여러 관광 명소가 눈길을 끈다.

 

이전에는 육지와의 연결이 불편하였으나

1971년 통영반도와 거제도 간의 견내량(見乃梁)

해협에 길이 740m의 거제대교가 놓이면서 교통이 편리.

 

관광객을 위한 여객선과 쾌속정이

통영을 정기적으로 운항하고 있다.

 

2010년가덕도(加德島)를 잇는 거가대교 개통

거제∼부산간 통행거리와 시간이 단축되었다.

 

이를 계기로 앞으로 남해안관광벨트 조성의 핵심 인프라

(부산∼거제∼통영∼남해∼여수∼완도∼목포)를 구축할 것.

 

옥포만과 신현읍에는 1973년부터 대형조선소가 건설되어,

거제도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조선공업지역으로 손꼽힌다.

 

거제도 조선해양문화관 정원에는 거북선 모형이 하나 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을 고증을 통하여 복원한 것

 

길이 25.6m 폭 6.87m 높이 6.06m 구조 3층

선체부분인 1층에는 병사들의 휴식처와 창고

2층은 노역 3층은 전투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 지휘 아래

세계 4대 해전 중의 하나인 한산대첩을 비롯하여

여러 해전에서 승리를 이끌었던 유명한 배.,거북선.

 

조선시대 전선 판옥선에 둥근 지붕 개판을 설치하여

배 앞부분에 용머리를 달아 거북과 비슷하게 만든 배.

개판 위에 적군의 침입을 막기 위한 칼과 송곳을 꽂았다.

 

선수와 좌, 우현의 방패판과 개판에 총포 구멍

개판에 대포까지 장착하여 강력한 화력을 지녔다.

거북선은 돌격선으로 적의 함대를 돌파하여 좌충우돌.

 

대포와 유황불을 쏘아 적을 혼란에 빠뜨려 공격하였다.

그후 지속적인 개량을 거치면서, 조선 수군의 주요 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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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포대첩...................................

옥포대첩 기념공원은 경남 거제시 팔랑포2길 87에 위치.

임진왜란 중인 1592년 5월 7일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과

경상우수사 원균 장군이 공동작전으로 왜선 50척 중 26척 격침.

 

현, 대우조선해양이 위치한 옥포만

옥포해전은 임진왜란의 첫 승첩이며,

전황을 유리하게 전개한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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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선은 17세기 조선시대에 만든 배.

임진왜란 이후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들이

사용하였던 배로 화려하게 장식한 것이 특징이다.

 

배를 만드는 과정도 알수 있도록 모형들도 전시.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때 함대 기함.,산타미라아호.

 

이집트 대형 무역선은 고대 이집트에서

지중해 연안 여러 국가들과의 해상 교역용.

 

이집트 나일강 유역에 서식하는 갈대를 엮어

만든 배로 기록된 인류 최초의 배.,파피루스선.

 

거제도 조선해양문화관에는 전망을 볼 수 있는 곳.

로비로 들어가 리셉션에서 2층을 본 후 1층을 보고

5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타면 전망대가 있다.

 

사실, 그렇게 굉장한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쌓여있는 거제도를 여행하다보면

이런 풍경들은 어렵지 않게 흔히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조선해양문화관은 배의 기본원리 및 다양한 항해 간접체험

배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주고 호기심을 유발시킬 수 있는 곳.

해금정책을 썼던 조선 해양문화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갖게한다.

 

'임진왜란 이후부터, 조선의 해양문화는

일본에 비하여 차츰 낙후되어갔던 것일까?'

 

통영과 거제도를 잇는 두 연육교.

거제대교와 신거제대교가 있는데,

마치, 통영과 거제도 사이의 바다에

허리띠 두 개를 옥죄이듯 두른 듯하다.

 

육지와 가장 가까운 곳에

다리를 건설한 때문일까?

 
신거제대교를 지나자마자 오른쪽에 ‘폐왕성(廢王城)’ 표지판

가로수에 걸려 안내판이 잘 보이지 않아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표지판 안내를 받아 우회전을 하면 비포장도로로 이어지는 산길.


폐왕성은 고려 제18대 왕인 의종(毅宗)의 유배지.

무신의 난으로 폐위된 왕이 이곳에 유배되어 ‘폐왕성’.


무신들에 의해 폐위되었다 해서 연약한 왕으로 여겨지지만

굳셀 의(毅) 자를 쓴 것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오만하고 독선적이고 포악한 성격의 왕이였을 가능성이 크다. 

 

고려에서 방종한 정치를 한 왕으로 첫손가락에 꼽는.,의종.

1146년 고려 제18대 왕으로 나이 20세 때 즉위한 인종의 장남.

제2비 공예왕후 임씨 소생으로 1127년에 태어나 16세에 태자 책봉.

 

그가 왕의 자리에 앉을만한 인물이 못됨을 안 인종은

태자의 지위를 박탈하려고 한 적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생모 공예왕후도 둘째아들을 후계자로 세우려 하였다.

그러나, 인종의 신임이 두터운.,예부시랑 정습명.

인종은 임종 때 “정습명의 말을 따르라” 남긴 유언.

정습명은 태자 현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하였다.

의종은 정습명을 두려워하여

방종의 정치를 할 수 없었으나

재위 5년 정습명의 벼슬을 박탈.

정습명은 분하여 극약을 먹고 자살.

 

그로부터  방종의 정치를 일삼았던.,의종.

재위기간 24년 동안 별궁을 만든 것이 32개.

의종 곁에는 아첨하는 문신과 환관만 있었다.

 

당시 과거에 급제하여 내시직을 제수받은 김돈중이

촛불로 무신의 수염을 태울만큼 얕잡아본 문신과 환관

 

이때 힘이 장사였던 무관 정중부는 환관 김돈중을 붙잡아

흠씬 두들겨 패주었는데, 김돈중의 아버지 김부식이 분노

의종의 신임을 받고있던 대장군 정중부의 죄를 묻게 할 정도.


정중부는 구데타를 일으켜 의종을 폐하고

의종의 아우 익양공 호(晧)을 9대 왕으로 추대.

한편 폐위된 의종은 거제도 '기성현'에 유배되었다.

 

의종이 거제도로 유배당해 거처한 곳은

거제시 둔덕면 거림리 산 93번지 우봉산성.

거제도는 고려때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곳이라,

그들을 방어하기 위하여 산성을 많이 쌓았던 섬.

폐왕성은 의종이 유배온 뒤 쌓은 산성일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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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 둘레 550m, 최고 높이 4.85m,

동서남북 중 3곳에 성문이 있었다.

동남북 방면은 석성, 서남쪽은 토성.

 

큰 규모는 아니지만 매우 견고하였던 성.

성 주위의 마을에 둔전과 마장을 두었다.

둔전 마을에서는 농사, 마장에서 군마 양육.

 

산성 서북쪽에 오량성을 쌓아 군영을 두고 해상을 감시.

당시 의종은 군사력을 기르며 복위를 꿈꾼 것으로 보인다.

폐왕성은 유배당한 의종이 ‘작은 왕국’의 군주로 행세한 흔적.

 

그는 거제도 주민들을 산성 쌓은 일에 동원,

작은 왕국의 경영을 위하여 세금을 걷었으며,

성을 방위하기 위하여 군사를 징집했던 것이다. 

 

안으로 들어가 남쪽으로 향하다 보면

집터로 보이는 돌담이 무너진 채로 있고

그 옆에 작은 샘터가 잡초 사이로 보인다.

 

당시 의종이 마시던 우물.,‘천지못’

산 정상에 있는 우물이 신기하지만,

그 물이 마르지 않는 것도 놀라운 일. 

 성 서남쪽으로는 통영시가 내려다보인다.

의종은 그곳에서 통영 앞 바다를 바라보며

무신세력 자객이나 공격에 대비한 산성 방비.

 

통영과 거제도 사이의 바다가 더 멀었으면.,

그 초조함이 마음 속에 늘 도사리고 있었을듯.

성 북단 높은 곳에서 기우제와 산신제를 지낸.,의종.

 

그곳 산성에 쌓은 돌탑 수십 개는

그당시 군졸들이 망보는 모습 같다.

누군가 산성의 무너진 돌로 쌓은 탑들.

지금도 통영시와 거제도를 잇는 바다인

‘견내량’ 수로변에는 ‘전하도목’이란 지명.

그 ‘전하’는 바로 고려 의종을 이르는 말이다.

 

또 의종 유배시절 왕을 모시던

반씨 성을 가진 장군의 후손들이

아직도 둔덕면에 살고 있다고 한다.

 

인근 ‘고려골’에는 당시 왕을 모시던 고려인들의 무덤.

아직도 그 존재감을 느끼게 하는 거제도 의종의 발자취.

그가 유배올 때 재위시절 추종세력이 몰래 따라론 흔적들.

 

그들은 다시 군사를 모으고 튼튼하게 성을 쌓아

혹시 불시에 들이닥칠지도 모를 무신세력들을 방비

이곳 산성에서 철통같은 경비를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의종이 노린 것은 무신정권을 반대하는 세력들과의 연계.

하여, 군사를 훈련시키고, 군마를 기르며 때를 기다렸던 것.

그가 기다리던 바로 그 때는 유배당한지 불과 3년 만에 왔다.

 

당시만 해도 그 때가

자신의 목숨을 가져갈

저승사자가 오는 때 임을

의종은 알지 못하였던 것 같다.

명종 재위 3년 8월 동북면 병마사 간의대부 김보당이

정중부와 이의방을 토벌하고 의종을 복위시키려고 시도.

 

이에 호응하여

 

동북면 지병마사 한언국이

녹사 장순석을 거제도로 보내

의종을 경주로 호위하여 왔다.

이때 이의방 휘하 장수 이의민은
경주로 내려가

일격에 난군을 제압하고 의종을 포박하였다.

 

이의민은 의종을 곤원사(坤元寺) 연못가로 데려가

술을 두어잔 마시게 한후, 죽여 그대로 수장시켰다.

1173년 10월 1일의 일로, 그때 의종의 나이 47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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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제18대왕., 의종.........................

재위 1146~1170으로 이름 현(晛), 자는 일승(日升)이다.

1127년 인종의 장남으로 태어나 인종 21년 태자로 책봉

약관 20세 때 왕위를 계승,재위기간 24년 동안 방종한 정치.

 

정중부, 이의민 등이 주동이 된 무신의 난 때 폐위.

무신들에 의해 폐위되고 거제도 유배 3년 만에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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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때 거제도 유배 대표적 인물은 제18대.,의종.

조선시대 거제도 유배 대표적 인물은.,우암 송시열.

'고려 ~조선'시대 408곳 중 2위로 유배인이 많던 곳.

 

'고려 ~조선' 시대 800년간 위리안치 적거지.,거제도.

탱자나무 가시 울타리에 갇히는 유배지 형벌.,위리안치. 

거제도는 탱자나무 자생지이자 뭍과 철저히 격리된 유배지.

 

위리안치는 종신형 유배로 사형에 버금가는 중죄인 형벌.

유배인이 복직될듯 여겨지면, 주민들이 아부하며 후한 인심.

복직될 기미가 보이지 않을 경우, 능멸과 모욕을 당하기 일쑤.

 

'고려~조선'시대 최고 지식인들의 대표적인 유배지.

정서, 이행, 송시열 등 이들은 이곳에서 왕에 대한 충정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 거제 풍광과 서정 1400여 작품을 남겼다.

 

이러한 유배문학은 거제도 변방의 독립성과

특이성을 띤 역사와 학문, 문화 구축에 기여.

연산군때 우찬성 최숙(崔肅). 숙종때 송시열 등.

 

조선 개국 때

모두 다 사라진 

고려왕조 王씨성씨.

 

옥(玉)씨 가구가 많은.,거제도. 

이는 이곳 유배문화와 무관하지 않다.

조선 개국 초, 고려왕조 왕씨가 이주한 흔적.

 

王에 ' 하나 찍어.,玉씨성씨로 개성(開性).

살아 남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 아니었을까?

개성 왕씨는 '王' 성씨로 그 유래가 장구하다.

 

지금으로부터 약 5천년 전.,BC 2704년.

고대 하(河)나라 황제의 11대 손., 신갑.

 

고조선 평양 일토산(一土山) 아래에 살며

一土를  합쳐 王을 성씨, 이름은 조명(祖明).

먼 훗날, '田, 全, 申, 車, 玉' 성씨 시조가 된다,

 

조선 개국 초, 극소수 인원을 제외한 모든 왕씨들.

강화도와 거제도에 이주하도록 왕명을 내린.,이성계.

王氏의 수난은 이성계와 개국공신에 의해 비롯되었다.

 

명나라 황제의 승인도 받지 못한.,조선왕조 개국.

왕씨의 존재에 대하여 불안감을 느겼던.,태조 이성계.

1394년(태조3년) 1월 21일 사헌부, 사간원, 형조의 상소.

 

'왕씨를 제거하라.'는 빗발치는 개국공신들의 합동 상소.

이성계는 민심을 잃을까 두려워 십여 차례 반려 후에 시행.

이성계의 사돈이던 '공양왕의 동생' 왕우 3부자만 목숨 부지. 

 

당시 왕씨들은 강화도 거제도 삼척에 집단으로 거주.

이성계는 측근들을 3곳으로 보내어.,모두 수장시켰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왕씨를 수색 색출하여 목을 배었다.

 

이어, 고려때 왕씨 성을 하사받은 성씨는

모두 다, 본래의 성씨로 되돌아가도록 왕명.

일반 왕씨는 모두 어머니 성씨로 바꾸도록 엄명.

 

왕씨의 관직 진출도 금지시켰던.,태조 이성계.

 

1413년 태종은 의정부에 명을 내려 전국 사찰을 수색.

15~40세 중들의 출생지와 조상을 샅샅이 조사하였다.

왕씨 색출은 물론 불교계의 고려 동조를 막으려는 조치.

 

그러나, 이 문제를 다루면서 생각이 바뀌었던 태종.

"역성혁명 후, 전조의 후손들을 멸한 역사가 없었다.

앞으로 왕씨 후손들을 보호하겠다. 그것이 왕의 도리."

 

그 지시는 태조 이성계의 조치를 뒤집는 발언.

 

신하들이 벌떼처럼 반발을 하자 태종은 꾸짖는다.

"이씨왕조가 도가 있다면, 어찌 왕씨를 걱정하겠는가?

이씨왕조가 도를 잃으면, 백성이 천명을 받아 일어날 것."

 

그러나, 조선왕조 500년간 왕씨가

과거에 급제한 기록은 고작 17명 뿐이다.

단종에게 사약을 가지고 간 왕방연이 최고직.

 

조선왕조 500년간 왕씨중용론을 밝힌 이는 대원군뿐.

그 뜻은 고종에게까지 이어져 조선 말에 벼슬길이 열렸다.

그러나,  조선 패망 직전에야 길이 열려 빛을 보지 못하였다.

 

고려가 이룩한., 동아시아 해상왕국의 명성.,"KOREY".

조선은  500년간 해금정책으로  "KOREY" 명성을 잃었다.

KOREY 명성을 일궈낸 고려의 후손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조선의 해금정책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그들은

조선에 남아있지 않았을듯..

 

동아시아 어느 나라에서든지

해상무역에 종사하지 않았을까?

분명한 사실은 조선을 떠났다는 것.

 

'1950년부터 1953년까지 포로수용소가 있었고

조선시대 3포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은.,거제도.

오늘날, 세계 제1의 조선소가 몰려 있는.,거제도.

 

옥포 조선소

 

조선시대 고국을 떠났던.,그들.

그 후손들이 되돌아온.,증거일까?

조상 대대로 전래된 DNA 때문일까?

 

동아시아 해상왕국의 명성을

다시 되찾을 날이 멀지 않은듯.

거제도의 조선소들은 역동적이다.

  

거제도 대우 조선소 파노라마..나이트스케이프,거제도에서 가볼만한곳,야경찍기좋은곳,

옥포조선소 / 대우조선

옥포조선소.

옥포조선소 / 시추선

 

'설문응답자 90%이상 거가대교 통행료조정 필요하다'

 .................거가대교(巨加大橋)...................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덕도동에서 가덕도를 거쳐

거제시(거제도) 장목면을 잇는 터널 & 사장교 다리.

 

 2010년 12월 13일에 개통되었으며., 3.5km의 2개 사장교

 3.7km의 침매터널, 1km 육상터널로 총길이는 8.2km이며

도시고속도로거가대로(부산광역시도 제17호선)를 구성.

 

거가대교를 포함한 거가대로 개통으로

부산~거제(부산 사상~거제 고현터미널)

기존 140㎞에서 현재 통행거리 60㎞로 단축.

통행시간은 130분에서 50분으로 단축되었다.

 

이로써 광역도로망이 구축되어,

동남광역권 산업, 항만, 물류 담당.

물류비용을 종전보다  절감할 수 있다.

 

대전-통영, 대구-부산고속도로와 연결되어

남해, 경부고속도로의 교통량 또한 분산될 것.

거가대교 개통으로, 부산과 거제는 하나의 생활권.

 

그뿐만 아니라, 통영, 고성 등을 포함한

10개 지역(인구 673만)이 부산광역경제권.

거가도로  승용차 통과비용 : 만원(2015.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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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마을' 왜관.

 

 

남산 조선신궁 자리 한양도성 복원

일제강점기.,남산 신궁.

전국의 일제신사 - 남산신궁, 부산신사 등

일제시대 남산신궁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주둔한.,이태원(梨泰院)

배 다른 혼혈아가 많이 태어난.,이태원(異胎院).

조선에 귀화한 일본인들의 마을.,이타인(異他人).

 

원래, 이태원(梨泰院)은 비구니 사찰.

조선 효종 때 배나무가 많아.,이태원.

 

일본인이 신사 참배를 하던 곳.,남산(南山) 신궁.

현재,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108계단 위' 신궁터.

 

6.25 전쟁 당시 서울 남산 신사 1000계단

 

 1920년부터 6년에 걸쳐 남산에 세운.,조선신궁(朝鮮神宮).

 '국사당 조선신이 일본 최고의 신을 내려다 보게 할 수 없다'

하여, 남산 정상에 있던 국사당을  무악재 인왕산으로 강제 이전.

 

이태원 옆마을이 1945년 8.15 이후.,해방촌.

 

조선시대 통신사길 : 남대문~한강나루~일본.

후암동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살았던 마을.

일제때 삼판동(三坂通)이라 불리웠던 일본인마을.

 

지금은 동부이촌동이 대표적인 일본인마을.

 

이촌동에 있는 일본인 마을

 

서울 용산구 이촌1동(동부이촌동)의 일본인 마을은

1000명 넘는 일본인이 거주해 ‘리틀 도쿄’로 불리운다.

얼핏 보면, 일본의 거리 모습을 찾아내기는 쉽지가 않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40년 넘은 일본인마을 답게

곳곳에 숨겨져있는 일본인들의 삶을 발견하게 된다.

이곳 마을은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생겨났다.

 

걸어서 골목길을 다녀 보면 ‘일본어 상담 가능’ 

문구를 적어 놓은 일본인 대상 부동산중개업소,

일본어를 병기한 안내표지판이 심심찮게 보인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자그마한 선술집(아지겐)

우동집(미타니야) 등 일본인마을 답게 보인다.

 

한국에 중장기적으로 머무는 일본인들은

동부이촌동 한강변 교통이 편리한 이곳에

모여들면서 지금까지 집단 거주하고 있다.

 

상사 주재원, 대사관 직원과 그 가족들 등.

 

2012년 8월 20일 남해일본인 마을 조성에 잉!! 뱀이 득실????

 남해군 `일본마을 조성사업.,부지.


 

 [정보]쇼킹~경남 산청군:일본인 마을 조성:(2012년 3월 06일)

 

남해군 `일본마을, 휴양단지 조성사업`은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 등으로 고향을 떠난

재일교포의 고국 정착을 지원하는 관광단지

 

남해군은 그동안 독일마을, 미국마을 등

휴양단지를 만들어 관광단지 개발에 성공.

 

산청 일본인마을 조성비 70%는 국고로 보조.

포항 구룡포, 경주, 산청(2015년착공 완료) 등.

정작, 재일교포가 살고 싶어하는.,전주 한옥마을.

 

"일본인마을"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정작, 뿌리는 알고보면.,재일교포 후손.

역사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단일민족.

 

'고조선, 부여, 백제, 가야'의 후손.,일본인.

 

조선과 일본, 초량왜관에서 만나다

 

..........................왜관(倭館)..............................

일본인이 조선에서 통상을 하던 무역처·숙박처·접대처.

고려 말 이후 조선 초기까지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태조와 태종이 회유책을 써서 왜인의 왕래를 허락하였다.

 

조선 성종 때부터 낙동강 하류에서

뱃길을 따라 올라온 왜물(倭物)  보관창고

왜물고(倭物庫)가 위치한데서 생긴 이름이다.

 

태종은 1407년 동래 부산포, 웅천 제포(薺浦)를 개항,

1418년(태종 18)에는 울산 염포, 고성군 가배량을 개항

이듬해(세종 1)에는 대마도 정벌을 계기로 개항장을 폐쇄.

 

그뒤 대마도 도주 소(宗貞盛, 都都熊丸)의 간청으로

1423년 부산포, 제포, 1426년 염포.,삼포가 개항되었다.

삼포 개항장에 설치된 왜관은 교역·접대 일을 맡아보는 곳.

 

왜관은 개항장의 설정과 변천에 따라 설치와 폐지를 거듭.

 

한편, 한양에 온 왜인을 위하여

남산 북쪽 기슭 남부 낙선방(퇴계로)에

동평관(東平館)이라는 왜관을 설치하였다.

 

이곳에 감호관(監護官) 녹사(錄事) 금난관(禁亂官)

등의 관원을 두어 사무와 경비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일본사절의 상경이 거부되면, 왜관에서 행해진 외교 무역.

 

그러므로 왜관에는

대마도주의 주재원이 상주.

왜관은 특이한 외교 기관이 되었다.

 

삼포 왜관의 경우 농번기에 왜인이 오면 접대로 인한 폐해가 심해,

동래와 김해의 관리가 그릇과 미곡 등을 준비하였다가 접대하였다.

 

이와 같이, 입국하는 왜인에 대해 양곡을 지급했기 때문에,

왜인 중에는 미곡을 더 받으려 서장에 실제 인원보다 많이 기재

이를 대조하면, 먼저 도착한 왜인을 불러 수를 채우는 폐해가 많았다.

 

그리하여 왜관과 왜막의 주위에 목책을 설치하고

밖에는 성(城, 倭城)을 쌓아 주변과의 접촉을 차단하고,

그 안에 상주 거류민과 공청(公廳)·시장·상점·창고 등을 두었다.

 

1439년 조선 전기 입국 왜인 수가 한해에만 6,000여 명.

성종 때에도 왜인들이 많이 와서 왜관이 빈 날이 없었다.

삼포 개항 초기부터 왜관 중심으로 조선상인과 무역이 성행.

 

삼포는 점차 항만 도시로 발전하였다.

삼포의 왜관 주변에 상주하는 왜인들은

일본상선이 입항할 때 상행위 또는 근해 어업.

 

부근 공사전(公私田)을 입수해 경작

또는 밀무역의 중개자 노릇도 하였다.

 

대마도주는 대관(代官)을 시켜 이들을 지배했고

이들에게 면포(綿布) 등을 세금으로 바치게 하였다.

.....................................................................

 

3포 전체와 각 포에는 각각

대마도주가 파견한 대관이 있어

왜인을 관할하였으며 항왜호로부터

 매년 면포 2필(대호)에서 1필(소호)을 징수

 

본국에 수납하였는데

 

왜관을 통한 교역에서는

실용품 유출, 사치·소비품 유입.,폐단.

장점으로는 왜로부터 유입된 은·동·유황이

대청무역 결재와 동전· 무기 제조에 크게 기여.

 

임진왜란 후에는 일본인들을 위하여 관리.

부산 두모포, 절영도, 가배량 및 초량 등과

낙동강을 이용하는 중간 숙소 소규모 왜관

칠곡군 약목면 관호리, 왜관읍 금산리 강창,

김해, 창원, 화원 등 5개소 도합 10개소 설치.

 

현재는 기록만 남고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으나,

칠곡군에만 ‘왜관’이란 지명이 오늘날 남아 있다.

칠곡은 대구와 인접하고 영남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교통이 편리하며 인적·물적 왕래가 많아 상업이 발달할 입지.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면 칠곡군 왜관읍 금산리 강창에 창고.

 

칠곡군 약목면 관호리석적읍 중지리 창마에 창고를 두고

낙동강 수운을 이용하여 조세와 군량을 수송하고, 왜국과 무역.

 

에도 바쿠후 막부.,제8대 쇼군 집권(1716-1745)

그당시 일본에서는 조선 인삼 투기열풍이 불었다.

조선 인삼은 거부가 아니면 살 수 없었던 값비싼 약재.

 

그런데 제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1646-1709)

집권시절(겐로쿠·1688-1703) 무렵부터 일반서민들도

관심을 갖기 시작하더니 요시무네 시절에 인삼 투기붐.

 

18세기 초, 일본에 몰아친.,인삼 투기 붐.

 

 

에도(도쿄)의 인삼 소매가격은 1700년(숙종 26년)부터 폭등.

요시무네 시절에 인삼 1근(600g) 가격이 은 1관440돈(금 24냥).

인삼은 아무리 비싸도 공급자가 거래를 좌우하는 독점품목이었다.

 

당시 일본내 공급자는 일본 바쿠후가 지목한

대마도(쓰시마) 지배자 소씨 집안(종가)이었다.

1674년(현종 15년) 에도에 설치된 대마도 직영 인삼좌 앞에는

수많은 낭인이 전날 밤부터 순서를 기다리는 장사진이 펼쳐졌다.

 

 인삼좌는 품절을 염려하여

미리 정해놓은 하루 매상고가

팔리면, 한낮에도 문을 닫았다. 

 

'부모의 병을 고치려는 효녀가

인삼을 구하기 위해 몸을 팔았다.'

"집 주인 어르신께 드릴 말씀이 없다"

 

주인 대신 줄 섰던 낭인들의.,자살소동.

따위의 일들까지 벌어지고, 소문도 무성.

1721년 대마도에 파견되어 있던 조선 역관들.

 정사 최상집을 주범으로 65명의 역관사 전원이

공모한 한일 양국사상 최대 규모 인삼 밀무역 사건.

 

은 102관(금 2251냥), 금 21냥, 인삼 80근 등

총 200근의 인삼에 해당하는.,물품들이 압수.

 

1720년 에도 인삼좌 총소매량이

550근이었으니, 엄청난 규모였다.

17세기 말, 일본이 조선에서 집중적으로 수입해간 물품은

중국산 백사(고급 생사)와 견직물, 그리고 조선 인삼이었다.

 

수입액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중국산 백사(50%)와 견직물이 80%,

그외, 나머지 20%가 조선 인삼이었다.

 

1691년 대마도가 '한.일' 사무역을 통하여

거둬들인 연간 수익금은 금 7만냥에 이르렀다.

 

일본은 조선에 은·구리·납·유황 등 광산물과

여우 너구리  가죽류, 물소뿔· 단목 후추  담배

안경 등 동남아시아산 물품들(조선 상류층 필수품).

 

무기 등도 팔았으나 수출액 대부분은 광산물이었다.

그 가운데서도.,은 한품목이 66%를 차지하고 있었다.

교역 지불수단은 에도 바쿠후가 주조한 순도 80% 은화.

 

'경장정은' 은화의 90%가

이러한 국제무역을 통하여

조선 중국 등으로 빠져나갔다.

'바쿠후 중흥의 영주' 요시무네 쇼군이

조선에 밀사들을 파견하여 30여년에 걸쳐서

조선 동식물 조사에 착수하고 인삼 모종을 입수.

극비작전에 돌입한데는 이런 배경이 깔려 있었다.

 

'요시무네'는 허준의 동의보감을

일생 동안 곁에 두고 살았을 만큼

조선약재와 의학 따라잡기에 큰 관심.

 

인삼 재배기술을 확보하여,

은의 대량유출을 막는 것도

국가의 정책 목표로 삼았다.

 

그는 이와함께 조선의 관료제도와

조세징수법, 인구, 관직 종류와 봉급,

도량형 등 국가기밀 조사를 진행시켰다.

 

이때 역관, 한의사 등 다수의 조선인들이

돈을 받고 일본에서 파견된 밀사를 도왔다.

 

밀무역죄로서 중형을 받게 될 최상집 등

역관사들의 범행을 조선조정에 알리지 않고

대신 조사에 협조하도록 얽어넣는 수법도 동원.

조선과 일본의 사이에서 이러한 공사거래와

기밀조사 중개를 도맡다시피한 역대  대마도주.

소씨 가문의 조선 내 활동거점이 바로 왜관이었다.

 

메이지 시대 초기인 19세기 후반까지도 존속됐던 왜관.

조선시대 한반도~일본 간 교통의 거의 유일한 창구였으며,

진상·공무역·사무역 등의 다양한 거래형태를 통해 사람과 재화,

문화, 정보가 자유롭게 대규모로 넘나든.,열린 공간이기도 하였다.



조선에 밀사를 보내어.,

인삼모종 입수를 시도.

 다시로 가즈이 게이오대 교수

2002년에 '근세 한일관계사' 출간.

조선은 왜 일본사람들을 가두었을까?

 

원제 : '왜관 - 쇄국시대.,일본인 마을'.

 

다시로 교수는 왜관을 드나들었던 배와 사람 숫자,

대마도 사절들의 조공의례 조선국왕 숙배 등 공식행사,

거래량 등은 물론 갖가지 요리에 들어간 양념들, 남녀밀회,

살인사건, 호랑이 사냥, 밀사들 행적 등을 손금을 보듯 재생.

 

이를 가능하게 한.,'대마도종가문서'.

 

수백책 분량의  방대한 고문서 중 일부.

1926년 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로 넘어갔고

1970년대 후 일반 연구자들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지금 과천의 국사편찬위원회에 원본과 함께

마이크로필름으로 보존돼 일반인에게도 공개.

왜관은 조선 건국 직후인 15세기 초.,동평관.

일본인 사절 접대를 위해 한양에 설치한 객관.

 

당시 한양에는 중국사신을 위한 태평관,

여진인 사신을 위한 북평관 등도 있었는데,

충무로 쪽에 있던 동평관을 왜관이라고 통칭.

 

 왜관은 한때 한양뿐만 아니라

부산포, 제포(진해만 웅천), 염포(울산)

등의 항구에도 조선시대 설치된 적이 있었다.

왜관은 대마도 경제의 젖줄

삼포왜란(1510)과 임진왜란(1592) 등을 거치며

흥망성쇄를 거듭하던 왜관은 1607년 조선통신사

일본 방문을 계기로 부산포에 만 정식으로 다시 설치.

 

부산포 왜관은 부산광역시 수정동 일대 바닷가.

두모포왜관, 고왜관이라 불렀는데, 오늘날 '고관'.

 

1678년에는 지금의 부산 용두산 일대 10만평 부지에

연인원 125만명이 투입된 한일 합작 대역사 끝에 완공.

초량왜관은 메이지 정부가 접수할 때까지 200년간 존속.

 

“조선통신사 길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왜관은 17세기 '쇄국령'이 내려진

일본의 유일한 해외 일본인 마을이자

대마도 도주 가문의 경제를 좌우하는 젖줄.

 

17세기 말, 부산왜관을 통한

'일본' 은의 수출 물량은

중국 무역선을 통한

물량의 7배 이상.

 

대마도는 주식인 쌀을 대부분 조선에서 수입.

왜관에는 평소 500명의 남자 일본인 만이 거주.

 

이는 대마도 장년층 남자 20명 중 1명이

조선의 초량왜관에 가 있었던 꼴이라 한다.

왜관을 알고나면, 한일 관계사도 보일 것 같다.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1876년(고종 13)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불평등조약

공식명칭은 '조일수호조약', '병자수호조약'이라고도 한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을 단행한 일본은

이미 외교관계를 맺었던 영국·프랑스·미국

등에 왕정복고를 통고하는 한편, 대마도주를

외국사무국보로 임명하여 조선에 국교재개 요청.


조선은 서식과 직함이 다르다 하여 국서접수 거부.


그러나 일본은 메이지 유신 과정에서 생겨난

사족들의 불만을 밖으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


또 구미 제국과 맺은 불평등조약을 개정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다른나라 문호를 개방시키려 했으며

조선을 그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한편 국내에서도

개화세력들에 의한 문호개방의식이 자라고 있었다.


민씨정권으로서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외국과 분쟁을 피하고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청국도 조선에 미국·프랑스와의 국교수립 권고.


일본의 대만정벌 소식을 접하고

조선은 대일본정책의 전환을 추구.


이러한 시세에 편승한 일본은 부산항에서 함포시위를 벌여

조야에 충격을 준 후, 강화도에서 운요호사건을 유발함으로써

마침내 1876년 2월 27일 전권대신 신헌(申櫶)과 특명전권판리대신

구로다 기요다카[黑田淸隆] 사이에 12개조로 된 강화도조약을 체결.

............................................................................................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 체결로 인해

조선 내에서 '일본인 마을'왜관은 사라졌다.

조선 전역에서 일본인 상인들이 자유롭게 활동.


 ................강화도조약 주요내용............................

제1조, 조선은 자주국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제5조, 조선은 부산 외 두 항구를 20개월내 개항해 통상허용

제7조, 조선은 일본의 해안측량을 허용한다.

제10조, 개항장에서 일어난 양국인 사이의 범죄사건은

속인주의에 입각하여 자국의 법에 의하여 처리한다.

영·일조약(1858)을 모방한 이 조약의 체결로 조선은

일본에 부산·원산·인천의 3개 항구를 개방하고(제5조)

치외법권을 인정했으며(제10조), 일본화폐의 통용과

무관세 무역을 인정했다(통상장정).

...............................................

제1조의 내용은 조선과 청국과의 관계를 끊고

일본이 조선에서의 우위를 차지할 저의가 담긴 것,

제7조는 군사작전시 상륙지점을 정탐하려는 것이었다.


이후 일본의 적극적인 조선진출을 견제하려는 청국의 주선으로

미국과도 통상조약을 체결하고(1882),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과

우호통상조약을 맺으면서 조선은 세계자본주의 질서에 편입되어갔다.


청나라가 영국에게 무참하게 무너지자

조선에서는 큰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

서양의 강대국들 중에서 가장 먼저 조선에게

개항을 요구한 나라는 프랑스와 미국이었는데
1866년, 조선 실권자 흥선 대원군은 천주교 금지령.


“서양의 종교인 천주교를 믿는 사람은 모두 처벌하라.”

이로 인해 불과 몇달 사이에 프랑스 선교사 9명과

천주교를 믿는 한국인 8,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프랑스는 이 사건을 계기로 강화도 침공.,‘병인양요’

1866년 7월에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 호가 평양 출현.

미국은 통상을 요구했지만 평양 왕릉군 도굴이 주목적.

미국인들은 항의하는 조선 관리에게 총까지 쏘아 댔지만

평양 백성들은 제너럴셔먼 호에 불을 지르고 모두 죽였다.

그로부터 5년 후, 미국은 이 사건을 트집잡아 강화도 침공.

1871년 미국은 한달 만에 강화도에서 철수한 사건 ‘신미양요’.
프랑스 미국의 통상요구를 거부한 조선은 극단적인 쇄국 정책.

“앞으로 조선은 서양 강대국들과 절대 접촉하지 않겠다.

서양 오랑캐들이 이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경계하라.”


이처럼 조선은 프랑스와 미국의 통상요구를

막아냈지만 일본의 통상 요구를 막지 못했다.
1876. 2. 27 조선이 일본과 맺은., 강화도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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