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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 제주도.,'가시리 갑마장길'

작성자선경나라|작성시간17.08.30|조회수1,089 목록 댓글 0

제주맛집, 궁중요리 대동강초계탕


조선시대 '군마사육목장' 녹양평(綠養坪).

의정부 녹양역 지명은.,'녹양평'에서 유래.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에 의하면

녹양평 규모가 동서7리 , 남북12리.


현재 흥복산에서 호원동 다락원까지 광대한 지역에 걸쳐 있었다. 
이곳 목장은 세조때 폐지되었는데 호랑이가 출몰하여 목장의 말을

해치는 일이 자주 발생하면서 결국 목장을 폐지하기에 이르렀던 것. 

녹양동주민센터는 역사적 사연을 살린

녹양평군마축제를 격년마다 개최해 온다.


...축제프로그램..

왕실 행차 퍼레이드,

경기도해병기마대 승마체험,

편자던지기 등으로 구성해 지역의

역사를 알리고 주민 자부심 고취에 기여. 
.......................................................


조선시대 국영 말목장이 설치된 지역은

맹수 피해가 없는 섬 또는 해안에서 방목.

한양 인근 해안가, 도서지역, 그리고 제주도.


마장동(馬場洞).

조선 초기부터

'국영목마장' 터


모진동

(毛陳洞)은

살곶이벌에

방목 양마장.


방목된 말이 실족하여 건국대학교 정문 근처

수렁에 빠져 죽으면 이곳 여인들이 수렁 위에

널빤지를 띄워 놓고 들어가 죽은 말을 건져 내어

말고기를 나눠먹었다 하여, 인근주민들이.,"모진년"


강진 마량(馬良)은

'고려~ 조선' 시대

탐라국(제주도)에서

배타고 온 제주마들이

휴식을 취하며 살찌운 곳.


조선시대에는 전쟁과 내란이 잦아

남자들은 군역, 성쌓기 노역에 동원

여자가 목자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양에서 가까운 경기만 도서지역을 비롯해

전국의 해안가는 조선시대 국영 말목장 흔적.

조선은 전세계에서 'No 1' 군마 생산국이었다.


우리나라 여성 프로 골퍼가

세계 무대를 휩쓸고 있는 건

절대 우연이 아니고 필연이다.


조선시대 목자

 DNA(유전자)가

계승된 결과이다.


.............골프 유래.............

'골프'는 카우보이 목동들 간에

소똥 말똥 치우기 시합에서 유래.


드넓은 목장 목초밭에 널려진 소똥 말똥을

18군데 모아 말리는 목자 간에 똥치우기 시합

목장주들이 상금을 내걸고 유능한 목자 선출대회.


목자들은 소속된 목장의 명예를 걸고 대회출전.

 

목장 내 18개 목초밭이 오늘날 '필드'가 되었고

18개 소똥 말똥 말리는 장소가 '그린'이 되었고

목초지 똥 치우는 막대기가 골프채로 진화된 것.


스코틀랜드에서 고안되어

영국에서 스포츠로 발전

.................................


조선시대 목자 일을 여자가 대신하긴 힘에 벅차

대신, 멀리서도 정확하게 막대기로 똥을 치웠던 것.

말을 먹이고 재우고 목욕시켜주는 일은 여자가 우세.


조선시대 제주관기들은 승마에 능숙.

제주관아에 신관사또 부임 때 기마 쇼.

묘기에 가까운 다양한 기마술을 펼쳤다.


그당시, 말 뿐만 아니라 소. 나귀. 노새도

양반 신분이 아니면, 법적으로 탈 수 없었다.

백성이나 천민이 타면, 압수 당하고.,곤장 80대.


경국대전에 못 밖은., 중벌에 해당.

곤장을 맞다가 죽는 경우가 허다했다.

다만, 기생이 말을 타는 것은 예외로 인정.


양반가 규수들은

다리를 벌려 말 타는

행위를 금기로 여길 정도.


그러므로, 조선시대

기생이 말 타는 모습은

신관 사또에게 귀한 볼거리 


당시 말 한필 가격은

하급관리 반년치 봉급.

남자 관비 2~3명의 가치.

여자 꽃관비 1명의 값어치.


조선시대 제주관기는

평양기생에 견불 만큼

한양에서도 명성 높았다.


조선시대 관기는

법적으로 8천민 신분이면서

고관대작과도 어울리는 특수한 존재.


제주관기 출신으로서.,김만덕 거상.

제주 대흉년때 궁휼미 500석을 내놓아

정조 임금의 부름을 받아 한양으로 상경


'의녀반수' 직위까지

신분 상승한.,김만덕.


조선시대 출륙금지령.

제주에서 뭍으로 나왔던

여성은 공식적으로.,처음.


그당시 강진 마량에서 한양까지

50 가까운 나이에 파발마로 달려와서

한양도성은 물론  조정 대신들도 놀랐다.


한양도성은 그녀를 보려는 백성들로.,인산인해

조정대신들은 말탄 그녀를 우러러보며 반길 정도.

그녀는 한양에서 말을 타고 설악산 유람을 다녀와서

다시 제주도로 돌아갈 때에도 파발마를 타고 귀향했다. 


제주도는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 내내

'공출용 군마'를 가장 많이 생산한 산지.

고려 말 13~14C '원나라 공출용' 군마 산지.

조선시대 '명나라, 청나라 일본' 공출마 산지. 


제주도는 고려 말, 몽골대제국 백년 지배때 

전세계 정복용 군마생산에 심혈을 기울인 곳.

특히, 일본 정벌에 사용할 군마를 사육했던 산지. 

  

....표선 ~가시리갑마장 가는 길....

 조선시대 제주도에서는 일반적으로

4,000~1만 필 내외 말이 사육되었으나,

대부분 중앙 정부에 공물로 진상되었다.


제주 목사-감목관(제주 판관· 정의 현감· 대정 현감)

- 마감 - 군두 - 군부 - 목자로 이어지는.,마정 조직.

'1392~ 1910년까지' 조선왕조 내내 지속된.,군마공출 .


제주는 독립성을 상실한채 중앙정부 지배를 받았다.

말의 특산지로 부각되면서 과중한 수탈이 이뤄졌다.

제주도 중산간 지역을 목장으로 만들어 개간을 금지.

해변 지역의 일부 땅만을 이용해 농사를 지어야 했다.


따라서 도민들은 좁은 경작지에다

척박한 농업 환경과 흉년이 겹쳐

굶어죽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왕조 500년간 제주인구 5만 내외.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고 나아가

감귤 진상, 전복 등 해산물 진상, 약재 진상

등 온갖 진상과 잡역· 잡세에 시달려야 했다.


이에 제주도민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출륙하거나 민란을 일으켜, 중앙정부에 저항.


임진왜란기에 제주도민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전마(戰馬)를 국가에 헌납함으로써 임진왜란을

승리에 일조, 대표인물이 산마장 개척자 김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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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선 비취 해변

표선해수욕장 나들이~

표선 민속촌

표선 민속마을

표선 민속마을 맛집 한라식당 흑돼지 주물럭

흑돼지 주물럭

표선 민속마을 맛집 한라식당 흑돼지 주물럭

성읍민속마을

                                                                                           성읍 민속마을.

제주도여행 성읍민속마을


..........성읍민속마을(城邑 民俗마을).................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국가민속문화재 제188호)

제주 성읍마을은 제주시에서는., 남동쪽으로 약 34㎞,

표선에서 북쪽으로 9㎞ 떨어진.,해발 125m 중산간 마을.


성읍마을은 1416년(태종 16) 성산읍 고성리에

설치되었던 정의현청이 1423년(세종 5) 지금의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로 옮겨진 이래 1914년

군현제 폐지때까지 500년간 정의현에 의해 관리.


유형·무형 문화유산들이 보존된.,성읍마을.

옛마을 민속 경관은.,중요 민속자료 제188호.


1935년 동중면은 표선면으로 개칭 하여

1946년 군제 실시에 따라 남제주군에 속.


5세기 간 장구한 세월을 현청 소재지로서

성읍은 군현 폐지후 면사무소 소재지로서

명맥은 유지해 왔으나, 1934년 면사무소마저

표선으로 옮겨 성읍 마을은 잊혀지게 되었다.

..........................................................


성읍마을을 감싼 높이 4m성(城)은.,길이 900m.

조선 세종 때 성을 쌓고 동헌을 이곳으로 옮긴 후

정의현 중심지였지만, 20세기에는 작은 시골 마을.


성안에는 현재 90여 채 한옥이 있지만,

생활 제약 탓에 빈채로 사람을 맞는다.


벽랑국 세 공주를 여기까지 모셔와

탐라국을 세운 것도 아마도 바람일 것.

민속문화 연구가에게 성지 같은 제주도.

.

'무더운 중산간 지대에 왜 이리

앞뒤로 꽉 막힌 집을 지었을까?'


제주도 겨울이 바람타고 온다는 것을

곰곰 생각해 보면 궁금증은 쉽게 풀린다.

제주도 바람은 매섭기가 여간 아니기 때문.


이엉으로 지붕을 덮은 제주 한옥은

집으로 들어가는 대문부터 특별하다.

대문에 해당되는., 이문(간)과 정살문.


'정살문의 정주석에 거는 통나무'

'정낭'의 개수를 조정하여 집주인은

자신이 집에 있는지, 나갔는지 알린다.


통나무 3개가 정주석에 꽂혀 있으면

먼 곳에 갔으니 기다리지 말라는 의미,

1 꽂혀 있으면 가까운 곳에 나갔으니 곧

돌아온다는 뜻이고 가축도 그 신호를 감지.


올레로 이어지는 정낭은 신민이 바람이며

가축들과 어떻게 소통하며 살았는지 대변.


성읍마을 한옥들은 대체로 19~20c 초에 지어졌다.

그러나 그 때문에 집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 시계바늘이 그대로 멈춘듯한.,시간 여행지.


성읍민속마을

성읍민속마을

성읍민속마을

제주도 산책로, 성읍민속마을 걷고 찍고 보고

조선시대 - 제주 정의현.,'성읍 민속 마을'.

제주 성읍민속마을

제주 성읍민속마을

제주 성읍민속마을

제주도여행(파라솔 2013.2.10) >성읍민속마을과 '갈마못'식당<-니콜라이 촬영

제주도여행(파라솔 2013.2.10) >성읍민속마을과 '갈마못'식당<-니콜라이 촬영

제주도여행(파라솔 2013.2.10) >성읍민속마을과 '갈마못'식당<-니콜라이 촬영


성읍민속마을, 제주의 초가집

성읍민속마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성읍 민속 마을.

 

조선시대 행정체계 상으로

전라감영 관찰사의 관할 지역은

전라도와 제주도에 있는 산하 관청들.

 

조선시대 제주도 내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

3곳 관청은.,전라감영 소속 .

 

1416년(태종 16)성산읍 고성리에 설치되었던 정의현청이

1423년(세종 5) 지금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로 옮겨진 이래

1914년 군현제가 폐지 될 때까지 500여 년간 정의현에 의해 관리.

 

성읍 민속 마을은 유형, 무형의 문화유산들이 보존되어 있고,

옛마을의 민속 경관이 유지되고 있어 민속자료 제188호로 지정.

 

성읍 민속 마을은 제주시에서 남동쪽으로 34㎞,

표선리에서 북쪽 9㎞, 해발 125m의 중산간 마을.

 

표선해비치해변 백사 대축제

제주도는 대부분의 용천수가 해안에 분포되어 있어,

유서 깊은 자연 취락은 대개 해안변 따라 발달해 있다.

해안에서 8㎞ 떨어진 중산간 마을은 제주에서는 드문 편.

 

고려 후기 원, 명 교체기에도 탐라에 큰 전란이 있었다.

목호의 난이었다. 이때 제주도 목호를 토벌하기 위하여

최영 장군 2만 군사들이 명월포를 통해 목호의 난을 평정.

 

...................목호의 난(牧胡의 亂)........................

고려 공민왕 23년(1374년), 원나라 목장이 있던 제주도

말을 기르던 몽골인 목자들이 일으켰던 반란.,'목호의 난.'

 

삼별초 항쟁이 여몽 연합군에 의해 평정된 1273년.

원나라는 탐라국에 군민총관부를 설치하여 다스렸다.

충렬왕(忠烈王) 3년(1277년) 탐라에 원 황실 방목장 설치.

 

탐라가 충렬왕 21년(1295년)에 고려에 반환된 뒤에도

원나라 황실 방목장이었는데 이곳 몽골인이.,목호(牧胡).

목호의 숫자는 많을 때는 1,400명에서 1,700명에 이르렀다.

 

약 1백년 간 제주도 현지 주민들과 섞여 살면서

말 기르는 기술을 전수하고 탐라 여인과 혼인하여

자식을 두었고, 고려에 대항하여 반란을 획책하였다.

 

공민왕의 즉위와 더불어 반원정책이 시행되면서

제주에서 목호와 고려 관리의 대립은 더욱 심해져

목호들이 고려 관리를 살해하거나, 원 본국에 요청해

만호부를 다시 설치하여 줄 것을 요구하는 일도 있었다.

 

원(元)이 북쪽으로 밀려난뒤 고려와 새롭게 수교한 (明).

고려에게 북원(北元)을 치는데 필요한 제주마 2천 필을 요구.

 

제주 목호 지도자.,하치(哈赤) 석질리필사 초고독불화  관음보

등은 이에 반발하여 "우리가 왜, 세조(世祖) 황제(쿠빌라이 칸)께서

방목하신 말을 적국 명에 보내야 한단 말인가?"라며 350필만 내주었다.

 

 명(明) 사신의 항의에 고려 조정에서

탐라국을 정벌하며 일어난.,'목호의 난'.

........................................................

 

탐라는 목호의 난 이후 완벽하게 고려에 귀속되었고,

제주는 예전보다 더 많은 마필 공납 요구에 시달렸다.

 

우왕(禑王) 5년(1379년)부터 공양왕 4년(1392년) 고려 멸망까지 

에 바친 약 3만 필의 말 가운데 2만 필 이상이 탐라국 말이었다.

 

목호의 난에는 탐라에 와있던 몽골인뿐 아니라

반(半)몽골화된 탐라인들도 상당수 가담하였으나,

반명 반란에서는 탐라 주민이 거의 동참하지 않았다.

 

제주 토착세력이 반명 반란을 진압하고

탐라인들은 점차 '목호.' 잔당을 배척하고,

과거, 몽골과 어울려 살았던 사실조차도 부정.

 

'목호의 난.' 당시 개경에서는 공민왕이 시해되었고,

명의 사신은 호송을 맡았던 고려관리 김의에 의해 피살,

명이 고려에 일방적으로 철령위(鐵嶺衛) 설치를 통보하였다.

 

그리하여, 최영 등에 의해 요동 정벌 시도가 촉발되었다.

이때 팔도도통사로써 직접 군사를 지휘하려는 최영을 우왕은

"선왕(공민왕)이 시해된 것은 경(최영)이 제주로 정벌하러 나가

 개경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라며 자신의 곁에 붙잡아두려 하였다.

 

결국 최영 대신 요동정벌군을 지휘한 이성계.

위화도 회군으로 개경으로 쳐들어와 최영을 처형.

우왕을 폐위시킴으로써, 조선 건국의 단초를 마련한다.

 

조선 태종 17년(1417년)부터 세종 2년(1420년)까지

'대정현 판관'이었던 하담(河澹)은 목호의 난을 가리켜

"우리 동족도 아닌 것들이 섞여들어 목호의 난을 불러왔다."

"칼과 방패가 바다를 뒤덮었고 간과 뇌수로 땅을 발랐으니,

말하자면 목이 멘다."고 하며 치열하였던 전란을 술회하였다.

 

이후, 원의 세력은

제주도에서 축출되었다.

그러나 성씨, 언어, 문화 등에서

몽고 100년 지배 잔재는 남아 있었다.

 

탐라국은 조선에 합병되며 해체.

탐라국의 귀족들은 평민화 되었고

제주도는 '전라감영'의 제주목에 편입.

 

그래서, 조선시대 제주목 대정현 주민과

서귀포 정의현 주민과는 혼인하지 않았다.

 

정의현에서는 '대정현의 며느리를 맞이하면

치마에 뱀신을 품고와 가문을 망친다.'며 구박하고.

대정현에서는 탐라를 망친 근거지가 정의현이라며 비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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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의 100년 잔재가 유독 많은.,'중산간지역.' 정의현.

조선시대 제주도에 대정현정의현을 따로 둔 이유는

제주목의 행정력을 섬 전역에 미칠 수 있도록 의도한 것.

 

행정 상, 전라감영에 속한 제주목

'전라감영'에 소속된 제주목사 아래

'대정현'의 군수  및 '정의현'의 군수.

 

정의현성이 있었던 고성리 지역이

제주도 동남부 지역을 관리 하기에는

지리적 위치가 적절치 않은 것으로 판단.

 

성읍민속마을,제주 성읍민속마을,제주도 민속마을

정의현

성읍민속마을,제주 성읍민속마을,제주도 민속마을

 

지금의 성읍으로 행정 중심을 옮기게 된 것.

이렇게 고성 지역에 정의현성이 있었던 기간이

1416년(태종 16)에서 1423년(세종 1)까지 겨우 7년.

 

14세기 초 고려시대에., 동도현을 두었던 지역.

조선 초까지, 본래 탐라국의 영역이었던.,정의현.

서귀포 성읍마을은 조선이 개창하며 만든 행정구역.

 

역사서에는 제주도민의 필요에 의해 관청이 세워졌다지만

당시 제주도민에게 관청이 필요한 이유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조선의 관청이 없이도 잘 지내왔던.,'남제주 중산간지역' 정의현.

 

1273년 여몽연합군에 의한 삼별초 토벌후

제주도는 원나라의 직할령으로 편입되었다.

 

원명교체기 제주도의 목호의 난이 진압될 때까지

약 100년 동안 원은 이곳 제주도를 목마장으로 삼고

대제국 경영의 전초기지화를 시도하다 다시 고려에 환속.

 

100년간 몽고의 제주 지배는 언어, 풍속,

목마 등 고유한 자취를 남긴.,정의현 일대.

 

조선 초, 기록에는 관청이 너무 멀리 떨어져있어

관청을 세워달라는 민원이 자자했기 때문이라지만

고려때 원나라 직할령이었기에 조선 조정에 대한 반발.

 

하여, 조선이 정의현을 장악하기 위해 만든.,성읍 민속마을.
제주 성읍 지역에서는 1914년 조선의 군현제가 폐지될 때까지

약 500년간 정의현청의 관리를 받아온 유서깊은 마을이기도 하다.

 

성읍민속마을,제주 성읍민속마을,제주도 민속마을

 

1864년(고종 원년) 8월 정의현대정현으로 승격하였을때.

성읍마을은  제주목 관할에서 벗어나서, 전라도 관찰사의 관할.

 

정의현과 ·대정현에 각각 변지군수를 두니

제주도의 특수한 지정학적 사정으로 말미암아

제주목과 양군간의 체통이 문란하여 행정상 불편.

 

그리하여 1880년(고종 17년) 2월에는 양읍을 다시

현으로 환원하고 과거 방식대로 현감을 두게 했다.

1895년 (고종 32)에는 지방 제도 개편에 따라

제주를 부(府)로 고쳤으며 목사를 관찰사로 바꾸고

판관 제도를 참사 제도로 고쳐 군수를 겸하게 하였다.

 

아울러, 제주부 경무청도 신설하였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관제가 개편됨에 따라

종래의 좌·우 포도청을 합쳐 설립한 관청의 하나.

 

대한 제국기,

경찰과 감옥에 관한

일을 맡아본.,제주부 경무청.

1906년(광무 10년)에는 1896년(고종 33) 부활했던 목사제도 폐지,

군수를 두었으며 1914년 정의, 대정 2군을 폐지하여 제주군에 합병.

1423년(세종 5) 이후 '정의현 도읍지' 성읍은 현청 소재지 역할을 마감.

1915년 5월 1일을 기하여 제주군 제도가 폐지되고

도제(島制) 실시로, 현재 표선면이.,동중면(東中面).

성읍리는 동중면 면소재지가 있는 하나의 리(里)로 전락.

1935년 동중면은 표선면으로 개칭하게 되었으며

1946년 군제 실시에 따라 남제주군에 속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5세기 동안 장구한 세월을 현청 소재지로서

번화롭던 성읍은 군현 폐지 이후에도 면사무소 소재지.

 

1934년 면사무소마저 표선으로 옮겨짐에 따라

성읍 마을은 행정 중심 마을에서 잊혀지게 되었다.

성읍 민속 마을은 제주도 동남쪽 중산간 지대

해안에서는 9㎞, 해발 125m의 높이에 위치한다.

 

성읍 마을의 성곽의 크기는

동서로 160m, 남북으로는 140m

규모로 귀 죽인 네모꼴을 하고 있다.

 

제주 성읍민속마을

 

성은 객사의 대문을 중심으로 정남축 축상에

남대문, 내대문, 기두정(장군대)를 일치시키고,

동서 대문도 객사 대문과 동서 버금축을 함께 한다.

성읍 민속 마을정의현의 도읍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성읍 주변이 여느 마을들과 다른 풍수적 여건을 갖춘 때문.

마을의 북쪽으로  한라산 영주산이 병풍처럼 애워싸고 있다.

 

성읍 마을에서는 천미천 건너로 남산봉이 다가서며,

한라산을 조산으로 하고 영주산은 진산, 남산봉은 안산.

 

모지오름· 따리비오름· 설오름 ·갑선이오름.,우백호

남산봉 밖으로는 풍수지리상 좌청룡으로 연결된다.

 

동헌 앞 나무그늘이 가장 크고

사람들도 많이 모이는 장소이며,

그 다음은 길이 만나는 벌원 방죽.

 

성읍 민속 마을

성읍 민속 마을의 가옥들은 길에 면한 경우에는

짧은 올레를 두었고, 살림집은 길과 비켜서 앉혔다.

길 안쪽 집은 긴올레를 두고 문을 두지 않기도 하였다.

 

성읍 민속마을

일반적으로 긴올레는 농촌에서 많이 이용되는 방식인데,

짧은 올레가 많은 성읍은 도시형 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성읍 민속 마을정의현성 안에는 약 110호 가옥이 있다.

 

제주도 여행 l 오감만족 체험여행, 제주도 가족여행 코스

 

성 밖에도 많은 가옥들이 있는데

성읍 마을은 오백년 동안.,도읍지.

유형 무형의 문화재가 꽤 많이 있다.

 

성읍민속마을,제주 성읍민속마을,제주도 민속마을

 

천연기념물 제161호.,느티나무  & 팽나무

중요 민속 문화재로 조일훈 가옥, 한봉일 가옥,

고평오 가옥, 이영숙 가옥, 고상은 가옥이 있다.

 

제주도 지정 문화재로 정의향교일관헌 등 건축물

민요와 돌하르방, 초가집 등 숱한 문화유산들이 있다.


이러한 지정 문화재 이외에도, 정의현성의 성곽과

남산봉의 봉수대, 풍부한 전설, 고유의 민속 자료 등

아직도 보호하고 보존해야 할 가치 있는 유산들이 산재.

 

성읍민속마을,제주 성읍민속마을,제주도 민속마을

성읍 민속 마을은 조선 시대 도시주거의 모습.

성읍의 가로 체계 및 주요 시설물의 배치 방식 등은

당시의 도시 계획의 원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또 마을 내 많은 문화재와 유산 등이 있어

그 자체를 잘 보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성읍민속마을 '뒷산'은 영주산(瀛洲山: 326.4m).

말발굽 분화구 형태를 지니고 있는.,오름측화산이다.

대부분 초지이고 동쪽 기슭에.,성읍 민속마을 공동묘지.

 

베락 맞은 처녀는 영주산, 총각은 무선돌로 변했주

 

..................영주산(瀛洲山: 326.4m)................

성읍민속마을 북쪽 약 1.8㎞ 지점에 위치한.,"뒷산."

면적 1,338,920㎡, 둘레 4,688m, 표고 326.4m, 비고 176m

분화구 동쪽 안사면의 능선에는 용암노두가 노출되어 있다.

 

오름 동쪽 기슭에는 동쪽으로 터진 소형 분화구가 딸려 있다.

영주산 서녘 기슭을 흐르는 천미천에는 '가매소'라는 못이 있다.

 

오름 전체에 걸쳐 억새가 우점하고 있는 영주산. 

가을철에 억새가 풍부하여 찾는 탐방객들이 많다.

 

성읍 민속마을에서 수산리 방향 700m 지점에 승마장.

그곳에서 북쪽으로 600m 더 올라가면 오름 입구에 도착.

정상까지 30분 걸리며 목장, 성읍민속촌, 성산일출봉.,조망.

 

원래는 한라산을 영주산이라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중국의사기』에서 비롯되었다.

바다 가운데, '봉래, 방장, 영주' 삼신산(三神山)

 

'불로불사(不老不死) 약초가 있어

신선들이 살고 있다고 하는.,삼신산.

기원전 서불이 불로초를 찾으러 왔던 곳.

 

시로미(암고란) [crowberry]의 효능

제주도 영주산.,시로미.

[제주] 영주산

 

그때 서불이 찾은 곳이 성읍민속마을의 뒷산.

이곳 영주산 연못도 신선들이 흰 사슴을 타고

노닐다가 물을 마시게 하던 곳이라 하여.,백록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영주산'의 속명은 '영모루'

정의현 북쪽 4리에 있으며 산 북쪽은 곧 정의  김녕 등.

옛 기록에 '정의 · 김녕 · 함덕에 신선이 많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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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성읍민속마을 여행정보

 

과거의 훌륭한 유산을 보존하는 것은

현재 그곳에서 생활해야하는 주민들의 삶과

어떻게 조화롭게 할 것인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

현재, 차량이 마을 중심을 관통하는 점.

슬레이트 가옥이 여전히 혼재하고 있는 점,

시멘트 도로가 민속경관과 어울리지 않는 점.

 

성읍 민속 마을의 구조를 이해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는 문제점이기도 하다.

 

또한 본래 성읍 마을이 가지고 있던

주요 도로 및 쉼팡과 같은 휴게 시설,

연자방아 등은 현재에도 높은 인지도.

 

제주 성읍 민속마을의풍경-3

제주맛집추천, 성읍민속마을 맛집 한라식당

 

박근혜/투우/세계의여군/최인호/종북척결/정주영/老人考/성읍민속마을축제 

 

제주도 성읍민속마을 여행정보

 

[전통건축답사] 서귀포 표선면 성읍민속마을 정의현객사, 정의골 돌하르방

 

제주도 성읍민속마을 여행정보

 

정의현(旌義縣)의 도읍지 &quot;제주 성읍민속마을&quot;

 

성읍민속마을에서는 매년 초가을

초가에 엉을 얹는 날에는 굿을 한다.

 

뱀을 무서워하면서도 신성시 여긴 고려시대 이곳 주민들.

뱀신(칠성신)을 모신 밧칠성을 집안에 두었다고 전해온다.

조선 초, 이곳 하례리 481번지는 '알당들왓' 밧칠성 당굿 터.

 

하례리 밧칠성, 위미리 마메기동산, 보목리 '조노기'.
각각 예촌본당, 위미마매기본당, 보목리 조노기 본당. 

해마다 15살 마을처녀를 뱀신에게 바쳤다던.,알당들왓.

 

조선왕조의 숭유억불정책 음사철발령에 따른 1702년

제주목사가 절500, 당500을 없앴다는 말과 연관이 깊다.

 

1515년(중종 10) 3월 제주판관 서린(徐燐)이

뱀신을 퇴치한 김녕굴 전설을 형상화 한.,조각.

김녕굴 & 만장굴은 세계에서 가장 긴.,용암동굴.

 

#숨어있는제주설화 : 커다란 뱀이 살았던, 김녕뱀굴(김녕사굴)

김녕사굴

김녕사굴 .

웅대한 '지하궁전'…만장굴

만장굴

 

성읍 민속마을 

 

...............인근 볼거리................

김녕굴 & 만장굴, 성산일출봉, 한라산.

천지연폭포, 비자림, 표선 해수욕장 등.  

성읍민속마을에서 1시간 내 차량 이동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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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김녕굴 및 만장굴

김녕굴

제주도추천여행지 만장굴

만장굴

성산일출봉

성산 일출봉

제주도 여행 / 비자림

비자림

비자림

천년숲 비자림

제주 가시리 유채길, 군항제 옆마을 벚꽃길 일품

제주 가시리 유채길.

제주 가시리.jpg

제주가시리 녹산로길의 꽃구경

제주 가시리 녹산로길.

제주가시리 녹산로길의 꽃구경

제주 가시리 유채길, 군항제 옆마을 벚꽃길 일품

.

나름 제주를 안다는 뭍사람도 남동쪽 표선에서

중산간쪽에 거친 생태를 탐한 사람은 많지 않다.


가시리 벚꽃, 유채길

                                                                                가시리 벗꽃 유채길.


표선 해변에서 한라산을 바라보면서 걷다가

세화리와 역지동을 지나면 말이 뛰어오르는

모양의 조각상과 함께 가시리를 만난다.


12월제주/가시리풍력단지,유채꽃프라자

가시리 풍력단지


조선시대 국내 최고 말목장(목마장)

갑마장과 녹산장이 모두 이곳에 있다.


갑마장이 있던 가시리 공동목장에는

조랑말 박물관, 승마장, 캠핑장 등이

어우러진.,조랑말 체험공원이 있다.


제주 가시리 마을 (2)

>제주< 가시리 유채꽃 축제


국궁장, 큰사슴이오름, 유채꽃프라자, 가시천,

따라비오름으로 이어지는 갑마장길은 제주만의

특별한 숲길인 곶자왈은 물론이고, 억새로 유명.


제주 곶자왈.

곶자왈

에코랜드, 제주 곶자왈

따라비오름 억새 절정!! 제주 오름 추천 0순위

따라비오름

따라비오름 억새 절정!! 제주 오름 추천 0순위

따라비오름.,억새

가을...가시리마을 산책

따라비오름 억새 절정!! 제주 오름 추천 0순위


가시리에는 국영목마장 경계를 표시한 돌담 ‘잣성’.

목장 경계를 이루던 돌담을 따라 걷는 편백 숲길은

국내에서 대표적인 생태 힐링 산책로이다.


잣성

잣성.,돌담길


4월이면 길의 시종점인 녹산로를 따라

 벚꽃터널과 유채꽃밭이 장관을 이룬다.


이곳에는 가시리 마을 공동체가 운영하는 숙박,

체험 시설인 유채꽃 프라자, 붉은 오름 자연휴양림,

서재철 사진작가 갤러리는 옛 가시초등학교터에 위치.


제주가시리 녹산로길의 꽃구경


'가시리 갑마장길 종점' 따라비 오름은 ‘오름의 아버지’.

주변에 모지오름, 장자오름 등을 낀., 가장 격인 오름.

가을...가시리마을 산책

가시리마을.,산책

가을...가시리마을 산책

[공유] 제주도 가볼만한곳: 예술같은 가시리마을


가시리 주민들은 문화예술인 창작지원센터를 만들어

국내외 예술가들이 이곳에 살며 창작활동을 할수 있는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그러다 보니 온 동네에

예술인들이 개설한 다양한 교육, 주민 동아리 활동이 활발.


제주 가시리 유채꽃 축제


마을사무소 ‘더 재미진 마을 가시리’

팻말이 마을 공회당 간판을 대신한다.


[공유] 제주도 여행지 역사와 문화가 살아있는 제주 가시리마을


코스는 조랑말체험공원~가시천(곶자왈)~따라비오름

~잣성길~큰사슴이오름~꽃머체~조랑말체험공원이다.

.

(캘리그라피) 제주 추억_가시리 조랑말 체험공원



조선시대 - 제주도.,'가시리 갑마장길'

.

.

제주의 제주마(천연기념물 제 347 호)

제주마(천연기념물 제 347호)

제주마방목지

제주의 마스코트, 제주마 - 키 작다고 놀리지 말아요!

한라산 노루와 제주마

제주도 제주마(濟州의濟州馬)

제주마방목지

제주마 올해 첫 방목

제주마방목지, 제주도 가을여행의 시작

제주마축제 4일부터 ‘이럇!’

제주마축제·입춘굿놀이·정의골 한마당 ‘우수축제’

제주마 방목지교배행동(2)

목마장에서 뛰놀고 있는 제주마

렛츠런파크 제주 '2014 제주마 축제' 연다

>경마<제주마 모의경주, 14일 서울서 시행

태강릉 초안산 궁중문화제

[공주의남자] 승유-세령의 승마강습! 오늘 밤 09시 55분 공주의남자 2부도 많은 시청 바랍니다^^

해변승마(오션호우스)

대중화 된 귀족 스포츠 승마

조선시대 - 제주 의녀 김만덕 & 출륙금지령.

[10월] 우리나라의 말 문화를 빛낸 위인들 – 마정의 숨은 영웅, 목자(牧子)

제주도승마체험 성읍랜드

 

......................조선시대 제주도.......................

조선시대 독립성을 상실, 조정의 지배를 받았던 제주.

특히, 말 특산지로 부각되며 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인식되어 중앙 정부에 의해 과중한 경제적 수탈이 이루어졌다.

제주도 중산간 지역을 목장으로 만들어

개간을 금지했기에 제주인들은 해변 지역의

일부 척박한 땅만을 이용해 농사를 지어야 했다.


따라서 도민들은 좁은 경작지에다

척박한 농업 환경과 흉년이 겹쳐

굶어죽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따라 조선 519년간 제주 인구는

5만명 내외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나아가 감귤 진상, 전복 등의 해산물 진상,

한라산 곳곳에서 생산되는 약재 진상 등

온갖 진상과 잡역·잡세에 시달려야 했다.


이에 도민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출륙하거나 민란을 일으켜 조정에 저항.


조선이 개창된 이후 조정은 1392년(태조 1) 제주 향교 설치.

1394년(태조 3) 우마적을 작성, 1404년(태종 4) 노비적 작성.

1408년(태종 8) 공부(貢賦) 정하기 등을 통해 강력한 통치력.

아울러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하기 위해

제주 목사 겸 도안무사 오식(吳湜)의 건의를 수용.

1416년(태종 16) 삼읍[제주목· 대정현· 정의현]을 설치.


이에 따라 수령으로 제주목에는 목사[정3품],

정의현과 대정현에는 현감[종6품]이 파견되었다.


특히, 제주목에는 제주목사 부관에

해당하는 판관이 파견되기도 했다.


조선 전기에 관권과 토착 세력 간에 갈등이 나타나면서

조정은 토관 세력에게 토관직을 주어 회유하기도 했다.

아울러 제주의 유력층을 서울에 올라오게 하여

재경사족(在京士族)으로 삼아 회유하기도 했다.


그당시 재경사족(在京士族))으로 대표적인 인물은

고봉지(高鳳智)와 그의 아들 고득종(高得宗)이었다.

고득종은 명나라 사신으로 2회,

일본 통신사로 1회 파견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의 서울특별시장인 한성부 판윤을 역임하는 등

조선 시대 제주인으로서는 가장 높은 관직에 오른 인물이다.

조선 전기 제주 교육을 담당한 관학 교육 기관으로

제주 향교·정의 향교· 대정 향교가 있었으며, 이들 향교들은

문묘 중심으로 교화기능과 명륜당 중심으로 한 교육 기능을 담당.

대표적인 사학기관 서원에는

국가가 공인한 사액 서원으로

귤림 서원삼성사가 있었다.


제주서원은 선현에 대한 제사와 인재 양성

및 향촌민 교화라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 전기 제주는 지역이 좁고 인구가 적은 데 비해

잡역·잡세가 많아 도민이 져야할 역(役)이 매우 많았다.

특히 이중 도민들이 가장 꺼렸던 역으로는 소위 6고역(苦役)


목자역·

과원직·

선격역·

답한역·

포작역·

잠녀역


따라서 도민들은 이러한 고역에서

벗어나기 위해 경상도 해안에 정착.

13~16세기에는 왜구 침입에 대비

방호소, 봉수와 연대를 설치· 정비.


1555년(명종 10) 6월 제주 을묘왜변이 발생.

60척 선박에 분승한 왜구들이 화북포에 상륙,

제주성을 둘러싸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제주 을묘왜변은 단순한 약탈의 성격을 떠나

제주를 왜구 본거지로 삼으려는 계획적인 침략.


이에 제주에서는 더욱 튼튼한 방어를 위해

9진성을 설치, 25봉수, 38연대(煙臺)를 정비.

조선 전기에 제주 역사 상에서

목장사(牧場史) 비중은 매우 높다.

제주 역사가 곧 목장의 역사인 셈이다.


15세기 초 고득종의 건의에 의해

토대가 마련된 국영 목장[10소장]을

관리하기 위해 중앙 정부는 의정부-병조-

사복시-전라도 관찰사-제주 목사-감목관

[제주 판관·정의 현감·대정 현감]-마감-군두

-군부-목자로 이어지는 마정 조직을 만들었다.

조선 시대를 통틀어 제주도 목장에는

일반적으로., '4,000~1만필' 말을 사육.

대부분 중앙 정부에 공물로 진상되었다.


국영목장 우마를 훔쳐 팔아먹는 우마 도적이 발생하자

중앙정부는 이들을 색출하여 평안도로 집단 이주시켰다.

제주도는 조정에서 멀리 떨어진 절해고도.

그리하여, 조선시대 대표적인 유배지였으며,

제주에 유배된 사람은 대략 200명 내외로 추정.

제주인들은 고기잡이, 미역 채취,

제주도 연안 항로를 이용한 물품 운반,

감귤이나 말 등의 공물 운반, 과거 응시나

장사 등을 위해 육지로 가다가 중국· 일본·

오키나와· 안남 등지에 표류하기도 했다.


당시 표류인들의 견문은 『표해록』으로 전해져

주변국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했다.


1477년(성종 8) 귤 진상을 위해 한양을 향해 출항했던

김비의(金非衣) 일행이 태풍을 만나 '유구국'에 표류해

유구국(오키나와)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조선시대 이국인들의 제주 표도가 나타나기도 했다.

이국인들은 남동풍·남서풍이 부는 여름에 표착하였다.


표류인은 중국· 일본· 유구국· 안남국(화란)

1627년에는 네덜란드인 J. J. 벨테브레( 박연),

1653년에는  H. 하멜] 등 서양인들이 표도하였다.


임진왜란기에 제주도민들은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던

전마(戰馬)를 국가에 헌납해 임진왜란 승리에 일조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산마장 개척자인 김만일(金萬鎰)이었다.

임진왜란 영향으로 제주에는

1601년 소덕유 길운절 역모 사건,

이로 인해 호남원병이 폐지되고 말았다.


소덕유 ·길운절 역모 사건은 1589년 정여립 사건에 가담했던

소덕유가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말을 산다는 구실로 청포(靑布)를 갖고

길운절과 함께 제주도에 들어와 일으킨 사건이다.


호남 원병은 본래 제주 방어를 위해

전라도에서 제주에 파병된 군인들로,

군인 수 감소로 인해 제주도에서는

파병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선 후기 제주도에는 조선 전기와 같이

1목 2현 행정 체제가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그 이하는 면리제(面里制)로써 수령[지방관]을

통한 간접 통치가 이루어졌다. 관청 조직은 수령과

그 예하 조직으로서 6방 체제의 이청(吏廳), 군사기구인

장청 및 지방행정 보좌기구인 향청(鄕廳)으로 삼분되었다.

그 밑에는 면리임(面里任)과 최하단위

오가작통(五家作統)으로., 연결되었다.


극심한 생활고와 고역 등으로 출륙하는 도민들의 수가 증가.

조정에서는 제주도민들의 출륙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1629년(인조 7)부터 출륙 금지령[1629~1823]을 내리기도 했다.

1813년(순조 13) 12월에 제주인 양제해는

1811년(순조 11)에 홍경래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자극받아 변란을 도모했고 조선 후기

제주 지방군은 아병(牙兵)[제주 방어영의 대장을

수행하여 부대의 후미를 경비하는 친병]과

마대(馬隊)[마병], 속오군으로 구성되었다.

제주도의 수취 체제는 토지를 대상으로 하여

곡물을 부과하는 조세인 전세(田稅), 제주영에

소속된 영둔전에 대한 세금인 영전세, 산전(山田)을

새로 일구어서 세금을 거두는 가경세,

그리고 장세미·화전세 등이 있었다.

제주도에는 예외적으로

대동법이 시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남정 1인당 매년 전미(田米)[좁쌀] 5되씩을

대동미(大同米)로 대신 받았다.


제주인들은 요역과 군역에 시달려야 했으며,

환곡(還穀) 운영에 따른 폐단 때문에 고통을 당했다.

환곡 운영을 위해 사창(司倉)[군량미의 비축과

진휼 재원을 보관]과 민고(民庫)[진휼 목적으로

환곡 대여와 수취를 통해 운영]를 설치·운영했다.


17세기 중엽의 『탐라지』에는 제주목

제주사창·동별창[별방]·서별창[명월],

정의현에 정의사창, 정의 서별창[서귀],

대정현에는 대정사창 등 6개 창고가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제주도 내의

환곡 제도는 부실하게 운영되었다.


제주 고을 수령들은 자비곡을 마련한 다음,

그것을 본전으로 하여 민고를 설치·운영했는데,

진휼창·보민창·고마고·목자고·견역고·장세고 등이 대표적.


18세기 말 흉년과 가뭄 등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

김만덕은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뭍에서 쌀을 사다가 구휼.


조선 후기에도 제주도는 여전히 유배 지역이었다.

왕족이나 고관현직 사람은 주로 제주성 내에 안치.


대정현에는 광해군 때의 정온, 헌종 때의 김정희,

정의현에는 광해군 때의 김덕룡, 인조 때의 원종,

제주목에는 중종김정, 명종보우, 인조광해군,

숙종송시열·김춘택, 고종 때의 최익현·김윤식·박영효 유배.


제주도에 있어서 19세기는

오랜 잠에서 깨어나는 자각의 시기요,

온갖 부조리와 억압에 저항해나가는 변화의 시기.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이 태동하면서

전국 곳곳에서 오랫동안 억압당했던

농민들의 울분이 민란으로 분출했다.

제주도에서도 1862년 강제검·김흥채 등이

주동한 임술(壬戌) 농민 봉기를 시작으로,

1890년에 김지가 주동한 경인(庚寅) 민란,

1896년 강유석과 송계홍  주동 병신(丙申) 민란,

1898년에는 방성칠이 주동한 무술(戊戌) 민란,


1901년에는 이재수의 난[신축 천주교란]이 발생.

특히 이재수의 난은 프랑스 함대, 일본 함대까지

끌어들여 한때 제주도에 전운이 감돌기도 했다.

19세기 말엽

제주도에 대한

일본어업 침략은

매우 위협적이었다.


이때 한·일간 조일 통상 장정(朝日通商章程)과

조일 통어 장정(朝日通漁章程)이 성립되었다.


그런데 이를 빌미로

일본 어선들이 제주 근해에서

조업을 하면서 행패를 부렸고, 이에

제주도민들은 거세게 집단적으로 항의.

....................................................


조선시대 - 제주 정의현.,'가시리 갑마장길'

...................... 

가시리 갑마장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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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축문화 숨결 간직한 명품 트레킹 코스 / 표선면 가시리 갑마장길

제주 표선 가시리 갑마장길

                                                                                제주 표선.,가시리 갑마장길.

가시리 쫄븐 갑마장길

제주 가시리 갑마장길

가시리 쫄븐 갑마장길

                                                                                      가시리.,쫄븐갑마장길.

 

1274년(원종 15년) 공녀 역사 시작과 더불어

1276년 원나라 직할령이 된.,탐라 국영방목장.

고려시대 방목장 역사가 시작된.,'가시리 갑마장.'

 

조선시대에는 제주도 정의현 10소장 중에서

가장 우수한 말들을 모아놓은.,갑마장(甲馬場).

 

제주도에서는 선사시대부터 이미 갑마장을 두어

산마들 가운데서 골라낸 품질이 가장 뛰어난 '갑마'를

따로 관리하여 교잡을 통해 최우수 품종 종자마로 개량.

 

몽골말과 서역마(西域馬)의 교잡을 통하여 개량된.,제주마.

제주마는 제주 재래마 '조랑말.'이란 이름이 더 친숙하다.

'상하 진동없이 매끄럽게 달리는 주법.' 조로모리(몽골어).

 

'조로모리' '조랑말' '제주마'.,'과하마(果下馬).

 

"'제주에서는 선사시대부터 말을 기르고 있었고

과일나무 아래로 지나갈 수 있을 만큼, 키가 작았다.'

'5세기 경, 과하마(果下馬)라 불렀다.'는.,벽랑국 품종.

 

"나는 동해 벽랑국(東海 碧浪國) 의 사자로

우리 임금께서 三女를 낳아 장성하게 되자

배필을 구하지 못함을..." - 탐라국 탄생 설화 - 


'그 사자가 승천하며 남겨진

백마 발자국이 온평리..'황루알'

그후

오곡을 심고

우마(牛馬)를 길러

탐라국(耽羅國)을 이루었다.

 

'과연, 탐라국의 탄생 설화 속

벽랑국은 어디에 있던 나라일까?'

 

1. 대마도(大馬島),

2. 일본 북규슈

3. 전남 강진.

 

역사 학자들 사이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1,2,3, 다 벽랑국일 가능성이 높은 탓.

 

'즐길 耽, 그물 羅, 나라 國., 탐라국(耽羅國)

'푸를 碧, 물결 浪, 나라 國'., 벽랑국(碧浪國)

 

1. '탐라~ 대마도 ~ 우산국(울릉도) ~발해.' 교역 항로.

2. '탐라 ~ 일본 북규슈'는  7세기 이전 백제와의 교역 항로.

3. '탐라 ~ 탐진(전남 강진) '은., 7세기 이후 통일신라 교역로.

 

 

상고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중국, 일본, 오키나와, 대만, 등을 잇는

동북아시아 해양문화 교류의 축.,제주도.

 

조선시대 공출된 제주마가 선적되었던.,제주시 화북포구.

'육지의 첫 기착지' 강진 인근의 '마량'을 연결한.,고대 항로.

 

마량(馬良)이란 제주에서 장시간 배 타고 건너온 말들이

육지에 적응하기 위해서 일정 기간을 머물게 하던 곳이다.

이에 따른  온갖 시설이 마량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마량은 공출된 제주마에게 없어서는 안될 지역.

제주마를 돌보며 많은 경제적 혜택을 받았던 곳.

 

제주도민은 '마량~제주' 간 조선시대 항로가

벽랑국'을 찾는 계기가 될 것을 기대하고 있고

탐라국의 기원을 옛 탐진(강진) 지역에서 찾는다. 

 

...........강진군 마량면(馬良面)............

1908년 완도군 고금면을 분면하여 대구면.

1989년 4월 1일, 전남 강진군 마량면으로 분면.

................................................................

 

가시리 갑마장 길, 명품 녹색길로 자리매김한다

가시리 갑마장길.

 

제주도의 목축문화는 다른 지방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하고 다양한 전통적인 목축방식을 갖고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특징은 울타리 없는.,방목장.

 

1980년대 한라산 백록담 근처에서까지

들판에서 뛰노는 소와 말을 볼 수 있었다.

 

가시리 갑마장길(가시리 방문자 센터 - 당목천 - 따라비오름 - 큰사슴이오름 - 행기머체)

 
한라산 목축, 특히 말의 사육은 탐라국 역사와 같이 한다.

제주도 시조가 삼성혈의 구멍에서 솟아난 후 이들과 결혼하는

벽랑국 3공주가 오곡 씨앗, 송아지, 망아지를 들여왔다고 전한다.

 

제주 성산읍 혼인지마을이라 불리는 온평리.

혼인지는 탐라의 옛 신화 중 하나인 '삼성신화'.

한라산 북쪽 고, 양, 부 삼신인과 혼인을 맺었다. 

 

조선이 개창하며, 탐라를 지배할 때 만들어진.,전설.

기록 상으로, 탐라국의 역사는 전설보다 구체적이다.

 

신라(B.C57∼A.D935)에 입조한 '탐라국'

그후, '고을나 15대 후손 3형제 (후, 청, 계).

벽랑국 3공주와 혼인을 맺었다.'는.,역사 기록.

 

탐라국은 우산국과 더불어.,해상 소국.

 

삼국시대 발해의 '주요 교역국'인 탐라국.

'1105년 고려에 예속되어 탐라군이 되었으나,
왕통은 그대로 존속하여 통치하였다.'는., 탐라국.

 

탐라(제주)에 말 국영 방목장이 처음 운영된 시기는

여몽연합군이 탐라에 들어와 '삼별초의 난'을 평정할 때

고려군과 함께 온 몽골군이 그후 탐라를 지배하면서부터이다. 

 

가시리 방목장은 고려 충렬왕 2년(1276년)에 설치.

1933년에 116개소 '마을공동목장'이 결성될 때까지

국영 방목장으로서 무려 658년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제주 가시리 갑마장길 2. 따라비오름에서 큰사슴이오름앞까지

 

'세계 역사 상에서

'국영 방목장'으로서는

전무후무한 기록이 아닐까?'

 

지금도 몽골의 초원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듯한

고려 때, 원나라 국영 방목장.

 

제주도에는 맹수가 없고

겨울철에도 날씨가 온화해

연중 방목이 가능한.,자연 환경.

 

제주 조랑말 外...

 

1276년 원나라가 일본 침략 전진기지로 설치한.,방목장.

그당시에는 고려의 왕자가 원나라에 가서 살아야만 했고,

원나라 공주와 혼인이 되어야만, 고려왕 즉위가 가능하였다.

 

 약 1세기 동안, 원나라의 속국이었던.,고려.

 

충열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

고려의 25대왕부터 30대 왕까지는 충자로 시작된다.

31대 공민왕은 왕자때 원나라에서 10년을 살아야 했다.

 

원나라에 인질이 된 고려 왕자가

원나라 황실에 충성을 맹세해야만

귀국 후, 고려왕 즉위가 가능한 시기.

 

놀멍쉬멍 제주의 오름 [바람개비 따라! 쫄븐갑마장길과 따라비오름]

가시리 갑마장.,'방사탑

 

....... 방사탑((防邪塔 : 제주도 민속자료 제8호)........

마을 어느 한 방위에 불길한 징조가 비친다거나 허하면

그것을 막아야 마을이 평안하게된다고 하여 쌓아 올린 탑.

 

탑을 쌓아 올릴 때는 그 속에 밥주걱이나 솥을 묻고,

그위에 돌담을 사람 키 이상 쌓아야 된다고 전해온다.

 

밥주걱을 묻는 이유는 솥의 밥을 긁어 담듯이

외부의 재물을 마을 안으로 담아 들이라는 뜻이요,

솥을 묻는 것은 불에도 끄덕 없이 이겨내라는 뜻이다

 

방사탑은 속칭 '거욱대', '거욱', '거왁', '극대' 라고 하며,

마을에 따라서 탑과 다소 다른 의미로 구분하기도 한다.

 

풍수지리적으로 남북이 허하다 하여 '南坮北塔(남대북탑)'

즉 남쪽에는 '거욱대'를 세우고 북쪽에는 '방사탑'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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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고종 때부터 7차례에 걸찬 원나라의 고려 침략.

고려는 강화도로 천도한 후, 무신정권 삼별초로 항쟁.

고려 국토는 쑥대밭이 되고, 쿠빌리아 칸에게 항복한다.

 

1259년, 고려 태자(원종)는

몽골 제국과 강화를 하기 위해

칭기즈칸 손자 쿠빌라이를 찾았다.

 

그는 다음과 같은 약속을 받아 내고

당당한 고려인 복장으로 귀국하였다.

 

"복식은 고려의 풍속을 따르고

몽골식으로 고치지 않도록 하겠다."

 

그로부터, 원나라 지배를 받게 된 고려.

1271년, 원에서 귀국한 고려 세자(충렬왕).

몽골식 개체 변발을 하고 호복을 입고 있었다.

 

개체변발은 정수리부터 앞이마까지 머리를 빡빡 깎고

가운데 머리카락은 뒤로 땋아 내리는 스타일., ‘겁구아’

당시 세자의  모습을 본 고려 사람들은 탄식하며 울었다.

 

충렬왕은 원나라 세조 '쿠빌리아 칸'의 사위.

당시 세자는 강제로 원나라에 머물다가 왔는데,

그러는 동안에 몽골식 복장이 익숙해졌던 것이다.

 

이때부터 폐하는 전하로, 태자는 세자로

황제에게 부르는 만세는 천세로 바뀌게 된다.

 

족도리도 고려 때 몽골에서 들어온 것.

원래 몽골 여인이 쓰던 외출용 모자로서,

원나라 황태후가 고려 왕비에게 보낸 선물.

 

왕과 왕비 등 궁중 최고 어른에게 붙이는 ‘마마’,

세자와 세자빈을 ‘마누라’, 임금의 음식은 ‘수라’,

궁녀를 뜻하는 ‘무수리’ 등은 본래 몽골 궁중 용어.

 

몽골어가 궁중 용어로 쓰인 것은

원나라 제도를 수용한 탓도 있지만,

1백여 년 동안 7명의 원나라 공주가

고려 왕비로 생활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원나라 공주에게서 태어난 왕자와 공주는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몽골어를 사용하였고,

원나라 궁중에 들어가 생활하여 몽골어에 익숙했다.

 

벼슬아치, 양아치, 가파치, 등의 '치.'는

몽골 집정관 '다루가치'의 ‘치’에서 온 것이다.

치는 임무, 직업을 뜻하며 고려왕 경호군이 '홀치',

 

청소부를 가리키는.,조라치,

거지를 가리키는 말.,화니치,

매를 길들이는 이.,시파치 등.  

 

족두리 쓰고 연지 곤지 찍고 시집가는 풍습

사랑하는 연인끼리 떠나며 증표를 주는 풍습.

상추쌈, 고기를 튀기거나 지지는 등 조리 방법.

 

만두를 뜻하는 ‘쌍화’는 몽골어를 한자 음으로 표기한 것.

만두는 몽골족 주식으로 고려 여성이 몽골에서 배워 전파.

 

원나라의 속국이 된 고려는 원종15년(1274년)부터

고려 처녀를 원나라에 바치는 공녀 역사가 시작된다.

고려에서 보낸 공녀로서 원나라 황후까지 오른.,기황후.


로맨스 소설 >공녀< 가상캐스팅~!! 완전 내 맘대로ㅋㅋㅋ

[공유] 공녀와 환관 중에서, 기황후(기철 동생)

기황후 지창욱(타환), 공녀로 끌려 온 하지원(승냥) 정체 알아채

기황후 지창욱(타환), 공녀로 끌려 온 하지원(승냥) 정체 알아채

>기황후<, 끝나지 않은 논란

양하영-가시리(청산별곡,국악)

[공유] 가시리

가시리... / 작가미상.

가시리 가시리 잇고 / 이명우

[고려] 공녀, 백 년의 눈물 1부 - 역사채널e

〔晛星帝國淸성격신청서─────서민공녀 안유〕

[고려] 공녀, 백 년의 눈물 1부 - 역사채널e

[고려] 공녀, 백 년의 눈물 1부 - 역사채널e


당시, 원나라 황실 자금성은 고려궁녀, 내시가 장악.

원나라 황실에서는 거꾸로 고려 풍속이 유행하였다.

 

고려시대 공녀와 함께 원나라에 보낸 공물은

고려청자, 도자기, 인삼, 산삼, 홍삼, 백삼 등.

원나라는  답례품으로 고려에 비단을 보냈다.


가시리... / 작가미상.

 

원나라 황실에서는

고려의 풍습이 유행.

 

그당시 원나라 고관 대작 이라면

고려 여인을 한 두명 쯤은 거느려야

명문 가문으로 행세할 수 있었을 정도.


[공유] 가시리

가시리... / 작가미상.

 

보통 설렁탕은 선농단에서 제사를 지낸 다음

그 제사에 올렸던 소를 잡아 우려낸 ‘선농탕’에서

비롯되어 설렁설렁 삶아 먹었다고 해서 ‘설렁탕’이다.

 

설렁탕도 몽골어인 ‘슐루’에서 왔다.

비슷한 음식으로 만주에서는 ‘실레’.


설렁탕 경성 패스트푸드 설렁탕의 유래와 변천사

 

몽골인이 초원을 떠돌다 물가에 이르러서

양을 잡아 적당히 뜯은 다음 삶아먹는 음식.

매사냥, 산길 길가에 돌무더기를 쌓는 풍습.

 

우리나라에서는 들녘에서 일하다가

먹는 첫 음식을 숟갈로 떠서 던지며

 ‘고시레’하고 외치는 것도 몽골 풍습.


"고시래"의 유래 이야기

 

몽골에서도 한 사람이 ‘고수레’하면

다른 사람도 함께 외치고 술잔을 든다.


명인 안동소주, “2013 샌프란시스코 국제주류 품평회” 더블골드메달 수상

 

몽골에서 들어온 것으로 소주가 있는데,

안동 소주는 원이 일본 정벌을 준비하면서

이 지역 몽골군에게 소주를 공급하면서 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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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의종 24년(1170)부터 원종 11년(1270)까지

100년간 무신들에 의해 수립된 무신정권 고려 정부.

문치주의에 입각한 고려의 귀족정치는 무신시대에 몰락.


삼별초(三別抄) 항쟁

 

1225년 고려가 몽골사신 '저고여'를 암살한 사건을 빌미로

'1231년~1259년' 강화할 때까지 고려를 6 차례 침략한 몽골.

1259년 고려 종속 후에도, 삼별초는 항복하지 않았다.

 

.........................삼별초(三別抄)......................

삼별초는 약 40년 간 지속된 대몽 항쟁의 핵심부대.

이들은 원나라에 굴복해 강화를 맺은 정부에 반기를 든

1270년(원종 11) 최씨 무신정권(武臣政權) 사병(私兵) 조직.

 

좌별초(左別抄) 우별초(右別抄) 신의군(神義軍).

경찰, 전투 등 공적(公的) 임무를 수행한 군사조직.

 

원래는 하나의 단일한 단체가 아니었다.

다른 반란군과는 달리 원래는 비정규군인데

정규군으로 재편된 뒤, 삼별초의 난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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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72년 1월 진도에서 삼별초를 토벌한

몽고인 백양(白羊)이 원나라로 개선 행군.

그 행렬에는 고려 부녀자들도 섞여 있었다.

 

원나라 개선장군 백양은 마치 전리품을 취하듯

고려의 부녀자들을 오랏줄로 꽁꽁 묶어 끌고 갔다.

그녀들은 개경을 지날 때 구해달라 소리치면서 통곡.

 

“도와주세요.

우리는 강화도에서

삼별초에 강제로 끌려간

고려 관리의 부인들 입니다.”

 

부녀자들은 개경에 이르자

사람들을 향해 울면서 하소연

그러나, 고려인들은 몽골군에게

끌려가는 부녀자들을 모두 외면했다.

 

그녀들은 강화도에서 배중손에 의해 진도로 끌려갔다가,

배중손이 패하자 몽고군에게 포로가 되어 끌려가고 있었다.

1270년 삼별초 항쟁을 이끌었던 배중손은 삼별초의 지휘관.

 

삼별초가 진도로 남천한 이후에

진도정권 수령으로 추대된 배중손.

 

그녀들은 진도에서부터 걸었기에

입은 옷은 누덕누덕 해어져 있었고

날씨는 살을 에일듯 추운 겨울인데도

그녀들은 신발조차 신지 못하고 있었다.

 

밤이면, 몽고 군사들에게 겁탈을 당하였고

낮이면, 고된 행군으로 죽는 여자도 많았다.

 

삼별초-몽골침략에 맞서다?

 

1270년부터 1273년까지 3년간 강화도를 중심으로

몽골군과 맞서 싸웠던 '삼별초'는 탐라에서 최후의 일전.

고려가 원에 복속된 이후에도 탐라국에 배수진을 폈던.,삼별초.


삼별초는 오키나와로 갔는가

 

삼별초는 일본, 유구국, 등

동남아 해상국들과 연합전선을 모색하면서

원나라와 마지막 결전을 모색하지만 실패로 끝난다.


삼별초 항쟁

 

삼별초와 연합하기로 밀약한 일본은

몽골군 전투력이 워낙 강하자 물러선 것.

 

1271년(충렬왕 1년) 고려는 원 강요에 의해

다시 여몽연합군을 결성하여 일본 정벌을 시도.

태풍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고난 후, 패퇴하였다.

 

『POSCO』[한국사X파일 -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 10월 태풍, 여몽연합군을 삼키다 (2012.06.28)

 

1274년 10월에 여몽연합군을 실은

고려 전함 9백 여척과 2만 5천 군사.

 

원나라는 고려 충렬왕 2년(1276년) 탐라에

몽골식 목마장(牧馬場)을 처음 설치하였고

말 160필과 목호를 탐라로 보내어 기르게 한 것.

 

일본 정벌을 위한.,말 방목장.

1281년(충렬왕7) 여몽연합군은

제2차 일본 정벌도 태풍으로 실패. 

 

여몽연합군은 2만 5000명 동원.

 

합포(合浦 :현재 창원)을 출발한지

이틀 만인 10월 5일에 대마도에 도착하였고.

10월 14일 전투 끝에 일기도(一岐島)를 점령하였다.

 

여몽연합군은 일본 본토인 규슈의 하카타만으로 진격하였고

규슈의 일본인들은 대대적으로 무사를 동원하여 방어에 나섰다.

10월 20일 하카타만에 상륙한 여몽연합군은 일본군과 치열한 접전.

 

일본의 무사들은 방어하기 위해 처절한 전투를 벌였으나

여몽연합군이 화약까지 사용하는 바람에 대패해 퇴각했다.

곧 밤이 오자 여몽연합군이 전함으로 퇴각해 전투가 멎었다.

 

“군사들을 배에서 내려 상륙하게 해야 한다.”

고려의 장수들이 원나라 장수들에게 말했다.

 

“군사들을 상륙시키면 기습을 받을 수 있다.”

원나라 장수들은 고려 장수들의 건의를 묵살.

 

하카타만 앞바다에는

여몽연합군을 태운 병선 

900여 척이 포진하고 있었다..

 

여몽연합군은 일본군이 예상하던 것보다 훨씬 강해서

하카타만에서 죽은 일본군의 병력은 절반이 넘어섰다.

날이 밝아 전투가 다시 벌어지면 전멸을 당할 것이 분명.

 

쇼니 대장을 비롯하여 일본인 무사들은 옥쇄를 각오.

저녁도 먹지 않고 침통한 분위기일때.,서풍이 불어왔다.

나뭇잎이 검푸르게 마구 흔들리자 일본군은 화색이 돌았다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점점 거세어져

자정 무렵 태풍으로 변해 기와가 날아가고

나무가 뿌리째 뽑힐 만큼 강한 태풍이 불었다.

  

바다는 캄캄하게 어두웠고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면서

산더미와 같은 파도가 밀려왔다.

 

폭풍우가 거세게 몰아치고 해일처럼 덮치는 파도소리

이튿날 아침, 하카타만 여몽연합군 전함은 대부분 파손.

난파선 조각과 여몽연합군 시신만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고려 정예군 8000명, ·수수( 수군) 6700명.

전함 900여 척 중 절반이 태풍 피해를 입었고

여몽연합군 1만3천 500명이 바다에 수장되었다.

 

고려군 원수 김방경은

생존한 병사들 만을 이끌고

고려로 귀환할 수 밖에 없었다.

 

고려와 몽고군은 계절풍 때문에 일본에 패한 것.

일본은 신이 보내준 바람 때문에 이겼다고 생각하여

그때부터 10월에 부는 바람을 가미카제(神風)라 불렀다

 

&quot;전쟁 비참함 기억하겠다&quot;.. 70년前 모습 복원한 日가미카제 훈련장

가미카제 특공대

"전쟁 비참함 기억하겠다".. 70년前 모습 복원한 日가미카제 훈련장

 

그로부터 아주 먼 훗날에, 일본은 제주 송악산을

태평양 전진기지로 만들고 가미카제 특공대를 배치.

청일전쟁 때 중국 본토를 쑥대밭으로 만들면서 앙갚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일본은 최후의 항전을 시작.

가미카제 자살 특공대 전투기를 미국 군함과 충돌시켜 전사.

미국의 일본 히로시마 & 나가사키 원폭 투하로 일본 천왕은 항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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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여몽 연합군의 2차례에 걸친 일본 정벌 원정.

당시, 일본을 풍전등화 위기에서 구해낸.,가미카제 태풍.

 

이후 약 100년간 탐라는 원나라 직할령 방목장으로서,

이곳에서 생산된 말은 다시 몽골로 징발하여 갖고 갔다.

 

당시 기마병을 주축으로 지구전을 펼치며

유럽 대륙까지 진출하였던 몽골 기마병들이

탔던 말 중에서 상당수가 탐라에서 생산된 것. 

 

제주도 전체를 방목장으로 개척하였던.,몽골.

이곳에서 생산된 품질이 우수한 말들을 이용하여

유럽은 물론 전 세계를 경영하려 했던.,방목장 흔적들. 

 

탐라가 충렬왕 21년(1295년), 고려에 반환된 뒤에도

제주도는 그대로 원나라 황실의 방목장 기능을 했는데,

이 목장에서 말을 치는 몽골인들을 목호(牧胡)라 불렀다.

 

이런 와중에 원나라는 국력이 기울고

남경 한족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에 밀려

몽골 초원으로 쫓겨나고 원나라는 결국 명망.

 

그 무렵에 원나라의 노국공주와 결혼한 이후에 

고려왕에 오른 공민왕은 원나라 말, 배원정책을 실시.

친원파를 몰락시키고 계혁을 추진하던 중 노국공주의 죽음. 

 

그로 인한 상심이 커서, 국정을 소홀히 한데다가

홍건적과 왜구의 잦은 침략으로 인해 국운이 기울어

결국, 이성계에 의해 조선왕조가 탄생하는 계기가 된다.

 

조선시대 서귀포 성읍마을이 속한 관청.,정의현.

조선 개창 후, 탐라국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관청.

그당시 탐라인들은 관청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기 旌, 옳을 義, 고을 縣.,정의현((旌義懸).

 

조선시대 정의현은 행정 관리에게는 좌천의 땅이었고

조정에서는 반란이 염려되는 '통제의 땅'이기도 하였다.

하여, 한양에서 파견된 관리는 민심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정의현(旌義懸)....................

조선 초, 정의현(旌義懸)은 본래, 탐라국 영역.

14세기 초, 고려 때 동도현(東道懸)을 두었던 곳.

고려시대에는 탐라국의 동쪽을 관할하던.,행정구역.

 

1416년(태종 16년)에 '제주 안무사'의 건의에 따라

한라산의 남쪽을 동서로 나눠 동쪽에 정의현을 두고

1864년(고종 1년)에는 정의군(旌義郡)으로 승격되었다.

 

1895년에는 제주부, 1896년에는 전라남도 소속.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제주군에 병합되었다.

 

1935년 정의면이 성산면으로, 동중면이 표선면으로,

서중면이 남원면으로, 우면이 서귀면으로 개칭되었다.

 

1946년에 제주도가 전라남도로부터 분리되었고

도로 승격되면서 설치된 남제주군의 일부가 되었다.

2006년 제주특별자치도 남제주군은 서귀포시로서 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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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국영목장은 조선 시대에도 계속된다.

말을 방목하기 적합한 환경을 갖추고 있는 섬

기후가 따뜻하고 풀이 무성하며 맹수가 없는 점.

 

조선시대에는 한라산 둘레에 '10소장'을 운영.

말 뿐만 아니라 소를 기르는 우목장도 있었다.

 

제주목 황태장, 대정현 모동장,

가파도 별둔장, 정의현 천미장 등. 

제주마 품질은 명(明)까지 명성 높았다.

 

제주 조랑말 천연기념물 되려면 “외모도 반듯해야”

 

'10소장' 외에 눈길을 끄는 목장으로는 산마장.

조천읍과 표선면, 남원읍 등 한라산 중턱.,산마장.

산마(山馬)를 전문으로 방목하는 아주 예외적인 목장.

 

 산마장의 시작은 임진왜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600년 임진왜란 직후에 김만일과 '그의 아들' 김대길이

군마 500필을 바치자 조정에서 10소장 내 동서별목장을 설치.

 

이어, 1658년 김대길과 그의 아들이

또 다시 군마 208필을 조정에 바치자,

임금이 제주목사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동서별목장을 산장으로 만들어

김대길을 산장감목관으로 임명하고

그의 자손들이 그 직을 세습하게 한 것. 

 
조선시대 이렇게 생겨난 산마장은

그 범위가 한라산 정상에까지 이르렀는데,

숙종 28년 침장, 상장, 녹산장(鹿山場)으로 개편

나중에는 녹산장에 갑마장(甲馬場)이 설치되었다.

 

갑마장은 산마 중 최고의 말을 사육하는 방목장.

가시리., 번널오름, 따라비오름, 큰사슴이오름 초지.

1794년부터 약 100년간 조선 최고의 명성을 유지하였다.

 

1276년부터 성산읍 수산리 수산평 일대 '탐라목장'을 설치.

몽골말과 서역마(西域馬) 간에 말의 교잡이 이루어진.,결과.

 결국, 5세기 이전부터 제주 기후와 풍토에 맞는 '제주마' 탄생.

 

갑마장 길 위의 봄

 

.....................천연기념물 '제주마'............................

평균 키 : 암놈 119cm, 숫놈 122cm. 평균 체중 230~330kg.

대체로 몸 앞쪽이 뒷쪽보다 낮고, 머리가 체구에 비해 크다.

눈이 머리에 비해 커서 귀엽고 온순한 인상인데다가 영리하다.

성격이 온순하고 끈질겨 하루 32km씩 22일 간 걸어도 잘 견딘다.

 

병에 대한 저항력이 강한 게 장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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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체험도 가능한 가시리 갑마장 길 조성사업 완료

 

놀멍쉬멍 제주의 오름 [바람개비 따라! 쫄븐갑마장길과 따라비오름]

 

약 730년 간의 목축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가시리.

농림부 지원을 받아 조랑말체험공원 & 갑마장길 조성.

갑마장길은 전체를 한바퀴 도는 20km코스, 쫄븐(짧은) 코스.

 

제주도여행 가시리 갑마장 길 트래킹 준비중이에요

 

쫄븐 코스는 조랑말 체험공원에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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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리마을.

 

[우먼 동아일보] 제주 올레길이 지겨워진 당신에게~ 가시리 '갑마장 길'

 

2km는 울창한 숲사이 비좁은 '가시천' 길.

구불구불한 가시천을 건너기도 하는 산책로.

 

갑마장 길 위의 봄

 

제주 올레길에 싫증 난 여행객에게는

적극 추천하고 싶은.,'가시리 갑마장길'.

 

쫄은갑마장 

 

가시천이 끝나는 지점에 3곳 분화구를 품은 '따라비오름'

'땅할아버지' 이름이 붙은 것은 알오름을 품고 있는 어머니.

 

'모지오름' '장자오름' '새끼오름'이

따라비오름과 더불어 마치 한가족 같다.

따라비오름은 부드러운 능선과 억새가 유명.

 

따라비오름에서 내려다보는 갑마장 터는 광활하다.

조선시대 최고의 말들을 사육하였던 갑마장(甲馬場)

오늘날에는 밭과 목초지로 이용되는 드넓은 평원이다.

 

따라비오름 아래 무덤 하나가 눈길을 끈다.

'헌마공신 김만일' 9대손.,감목관(監牧官) 묘.

 

갑마장 길 위의 봄

 

김만일은 고향인 남원읍 의귀리에서

조천읍 교래리까지 이르는 지역에서

1만 마리의 말을 키웠고 임진왜란 이후

선조, 광해, 인조 때 전란이 있을 때마다

4차례에 걸쳐 1300여필의 말을 국가에 헌납.

 

그 공로로 '헌마공신' 칭호를 받았다.

이후 김만일의 개인목장은 산마장으로 관리.

200년간 그 자손들이 '산마감목관'을 세습하였다.

 

따라비오름을 내려서면 삼나무 숲길과 잣성길.

갑마장길 잣성은 '갑마장과 10소장'경계.,간장(間牆)

6km에 걸쳐 남아있는 제주 최대 규모이고 제일 긴.,간장.

 

유채꽃 광장을 지나 '쫄븐 갑마장길'이 끝날 무렵.,'꽃머체.'

'머체.'는 제주어로 돌무더기를 뜻하며 '지하 용암동'이란 뜻.

지하에서 굳은 용암이 오랜세월이 흐르는 동안 겉으로 드러난 것.

 

크립토돔(지하 용암동)은 세계적으로 희귀한 것.

우리나라에서는 가시리에 만 분포되어 볼 수 있다.

'꽃머체'는 '아름다운 꽃이 피는 돌무더기'라는 뜻말.

 

갑마장 길 위의 봄

.

'높이 6m, 지름 14m' 크립토돔(지하 용암동)에

구실잣밤나무와 제주참꽃나무가 자생하는.,'꽃머체'.

이곳에서 100m 떨어져 있는 높이 7m, 지름 18m.,'행기머체.'

 

동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머체 위에 '행기물(놋그릇에 담긴 물'

이 있었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행기머체.'

 

....................

.....................

 

표선면 가시리에서 걷기 코스로 개발한 갑마장길.

녹산장 내의 갑마장을 둘러보는 코스라 할 수 있다.

'따라비오름~대록산' 잣성은 제주도 최고를 자랑한다. 

 

잣성은 조선시대에 제주지역의 중산간 목초지에

목장 경계용 돌담으로., '잣' 혹은 '잣담'이라 한다.

 

갑마장 길 위의 봄 

 

............................잣성...................................

제주는 고려 원 간섭기에 대규모 목마가 시작,

조선 시대에는 최대의 말 공급지로서 부각되면서

사람보다 말 중심의 ‘마정(馬政)’ 체계를 갖추었다.

 

그러나, 조선 초 말을 키우기 위한 방목장이

섬 전역의 농작물에 큰 피해를 주고 있었다.

이에 고득종한라산 중턱으로 목장을 옮기고

'방목장 경계 돌담' 잣성을 쌓을 것을 건의하였다.

1429년(세종 11) 8월 중산간 지대에 목장 설치가 착수.

 

이듬해 2월에 완성된 목장을 10구역으로 나누어 관리.

'국영 목장 10소장' 위·아래 경계에 쌓은 돌담이.,잣성.

방목장의 잣성은 하잣성, 상잣성, 중잣성 순으로 건립.

 

하잣성은 15세기 초반부터 축조되었고,

상잣성은 18세기 후반부터 축조되었으며,

중잣성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축조.

 

해발 150m~250m 일대.,하잣성,

해발 350m~400m 일대의 중잣성,

해발 450m~600m 일대의 상잣성.

 

초원으로 봄맞이 나온 제주 조랑말

하잣성은 방목장의 말들이 농경지에 들어가

농작물을 해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쌓은 돌담,

 

상잣성은 말이 한라산 삼림지역으로 들어가

얼어죽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중잣성은 하잣성과 상잣성 사이에 쌓은 돌담.

 

방목장 잣성들은 대체로 두 줄로 쌓은 겹담 구조이다.
축담 후 말들이 장내가 좁아 마음대로 뛰어다닐 수 없고

먹을 풀이 모자라 야위고 죽는 일이 자주 발생하기도 하였다.

 

하여, 말들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목장 사이 돌담을 군데군데 허물고

나머지 대부분 돌담은 그대로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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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마장 말은 품질이 우수해 어승마를 비롯해

조정의 대신들, 심지어는 명나라까지 보내진다.

그 성질이 억세고 기운이 왕성하여 전투용에 적합.

  

한라산 소와 말의 방목은 일제강점기까지도 계속된다.

초대 제주도사를 지낸 이마무라 도모의 기록에 의하면

일본에서 들소가 있는 곳은 오오시마(大島), 그리고 제주.

 

제주도 방목장에서 도망하여 퇴화한., 준들소, 준들말.

들소는 1차세계대전 당시 가죽 가격이 비쌀 때 거의 포획.   

 

가시리 / 이명우 

 
1933년 마을단위로 116개소 마을공동목장이 결성.

제주에서의 우마 방목은 일대 전환점을 맞게 된다.

 

마을단위로 바뀌었는데 예를 들면 노형동 경우

한라산에서 방목하는 오립쇠(野牛)는 '99 골에서

백록담에 이르는 '상산'에서 방목하였다.'고 전한다.

 

가시리에서 한라봉과 사랑에 빠지다~

 

구체적으로 정존 마을은 아흔아홉골 부근에서,

광평마을은 '큰두레왓'이나 '장구목' 너머에 있는

'왕장서들' 아랫부분인 '도트멍밭'에서 방목하였다.

 

이곳에서는 오라동과 이호동, 도두동,

연동 주민들도 함께 이용하였다고 한다.

 

또 광평이나 월산마을인 경우는

어승생 서쪽의 '서평밭'과 만세동산,

백록담에 이르는 '웃중장'에서 방목하였다.

 

일반 소는 '알중장'에서 방목해 소를 보러 가기 위해서는

첫 닭이 울 무렵 집에서 출발해야만 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한라산에서의 방목(放牧)은 4.3사건 이후 또다시 재개되는데

1970년대 초 국립공원 지정 이후 10년간 환경문제 논쟁의 대상.

 

1975년 7월 한라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에서는

공원구역 희귀식물이 훼손되어 가축방목을 금지.

무단출입, 방목일체를 불허하고 위반자는 사법처리. 

 

1976년 7월 제주도는 국립공원에 들어가는 가축에 대해

관계법을 적용하여 방목행위에 쐐기를 박겠다고 밝혔다.

 

공원관리자들은 해마다 여름철이면

백록담 산속에서 5~6마리씩 떼를 지어

다니는 방목 가축들로 골치를 앓아 왔다.

 
1980년 7월 한라산 1500고지 이상에서의 방목행위를 단속.

1984년 7월 개정된 이후 1985년 5월에는 도내에서는 처음으로

국유림내의 공동방목을 허용, 한라산 방목은 1988년을 기해 금지.

 

한편, 한라산에서의 방목을 금지한 이후

1990년대 중반 제주조릿대가 기하급수로 번식

시로미, 털진달래 등 식물이 고사위기에 놓였다.

 

이는 방목을 금지했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라며

방목을 허용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제주도의아름다운풍경 

 

실제로 제주조릿대 군락지 시험포에 제주마를 방목한 결과

조릿대 잎사귀뿐만 아니라 줄기까지도 먹는 것으로 나타났다.

'방목금지' 득과 실을 비교 분석하여 대책을 세울 필요가 있다.

 
한편, 목장 야초지에 방앳불 놓기 또한 환경파괴 논란의 대상.

 

1965년 5월로 진드기 구제를 위해 목야지를 태우는.,화입행위

1966년부터 금지한다는 내용이고 이후 1967년의 기록에 의하면

1966년 한 해 화입으로 소실된 산림은 10만 그루에 해당한다는 기록.

 

제주 가시리 갑마장길 2. 따라비오름에서 큰사슴이오름앞까지

 

1970년부터 화입은 금지되었는데

1977년 3월 표선면 가시리 임야에서

자기 임야에 불지른 농민이 처음 구속.

 

1990년 8월 애월읍 금덕리 마을공동목장에서 15년 만에 화입. 

1995년 7월에 야초지 및 방목지에 대한 화입이 전면 허용된다. 
 '방앳불 놓기' 전통문화를 현실에 맞게 축제로 재현한.,들불축제.

 

새별오름 등지에서 들불축제와 관련하여

그 연원을 모르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들불축제의 뿌리에는 '방앳불 놓기'가 있다.

늦겨울에서 초봄 사이에 들판에 불을 놓는 전통풍습.

화입(火入)은 해충을 없애고 양질의 목초를 얻기 위한 것.

 

과거 목축문화에서 생겨난 풍습이

오늘날, '들불축제'로서 탈바꿈한 것.

 

'갑마장길'의 출발 지점이었던.,'조랑말 체험공원.'

제주 목축문화와 역사를 볼 수 있는.,조랑말 박물관.

조랑말을 직접 만져 보고 탈 수도 있는.,조랑말 승마장.

몽골식 텐트 게르에서 숙박을 할수 있는.,조랑말 캠핑장.

 

 
 

 

몽골 유목민들은 1년에도 몇번씩 유랑과 정착을 반복.
자유화,개방화 소용돌이 속에서도 이어가는 유목 전통
유랑과 정착의 삶은 몽골을 더 몽골답게 만들어주는 관습.

 

오늘날, 몽골에서는 한글날에 큰잔치가 열리며,

한국은 형제의 나라이고 '사돈의 나라'라고 여긴다. 

구리, 은, 주석, 석유 등 세계 10대 천연자원 보유국.

 

대초원과 가장 깨끗하고

맑은 하늘을 가진 환경대국.

 

세계 역사 상,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했던 나라.

공산권에서 제일 먼저 한국과 국교를 맺은 나라.

우리나라의 중요 교역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나라.

 

수도인 올란바타르 시내 차량 대부분이 한국산 자동차

2,000 한국인이 학교, 병원, 상사주재, 관광업, 건축업,등

또한 2만 몽골인들도 한국에서 꿈을 갖고 생활하고 있는 실정.

 

상호 많은 역사적, 문화적,

민속적인 연관성이 있는 관계. 

 

요즘, 우리나라에서 몽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평화롭게 살아가는 징기스칸 후예들.

그들의 삶은 그곳을 찾는 여행자에게 동경을 주기도 한다.

 

광활한 초원에서 펼쳐지는 유목민들., '삶의 여정'.

꾸밈 없는 생활 풍습에서 배어나온., '삶의 즐거움'.

영혼의 밑바닥 심연을 울리는듯한., '초원의 바람소리'.

 

낯선 소리를 통한 바람 여행.

인디언의 숨결이 느껴지는 몽골

무엇인가 모를 핏줄과 같은 동질감.

 

어쩐지 동질감이 느껴지는., 몽골 풍습 .

 

'하얀' 뜻말., ‘차강’  '달'을 뜻하는 말 ‘사르.’

'하얀 달'이란 뜻말 '차강 사르'는 몽골의 구정.
몽골은 농경 사회가 아니라 음력의 개념이 없다.

 

집안 어른들께 인사 가고, 손님을 맞이하여
회포를 푸는 것이 몽골족.,'차강 사르.' 풍습.  

 

"가난과 전쟁의 공포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몽골 밖에 있다. 

고원 안에서 아귀다툼 만 할 것이 아니라 고원 밖으로 나가자.

그래야만 모두가 잘 살 수 있고 더 이상 동족상잔을 피할 수 있다."

 

칭기스칸의 삶은 유라시아 광활한 초원에서 시작되었다.
그가 속한 부족은 황무지를 떠돌아 다니는 유목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글을 몰랐다. 쉽게 말해, 야만인이었던 것.

 

'칸'이 정복한 땅은

777만 평방키로미터.


알렉산더 대왕 348만 평방,

나폴레옹 115만 평방,

히틀러 219만 평방.

 

세 정복자가 차지한 땅을 합친 것보다 넓다.
글도 모르고 들판에서 떠돌아 다닌 야만적 기질

그 무식한 잔인함으로 큰 일을 해 낸걸까? 아니다. 

성공 비결은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꿈'이다.
그들은 한 사람이 꿈 꾸면 꿈으로 끝날지 모르지만,

만인이 꿈을 꾸면 현실로 가능하다는 신념을 지녔다.

 

미래를 향한 비전을 함께 지니면 얼마든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걸 그들은 깨우쳤다. 
열린 사고로 꿈을 공유하고 실현해 나간 그들.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 꿈꾼다.

내 꿈도 있고 남의 꿈도 있다.
심지어 가축들에게도 있다.

 

하지만  나만을 위한 것이라면
'꿈의 공유'는 결코 이룰 수 없다.

모두가 함께 공유하는 꿈,

꿈속에 있는 희망과 미래

그것이 칭기스칸의 생각.

 

............칭기스칸(1162~1227)............

성을 쌓고 사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며

끊임없이 움직이는 자 만이 살아 남을 것이다.

 

집안 탓을 하지 마라.

난 9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내가 살던 마을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난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하였고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일이었다.

 

좌절하지 말라.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도 제국을 건설했다.

 

배운게 없고 힘이 없음을 탓하지 말라.

나는 이름 석자도  쓸 줄을 몰랐지만

남의 말에 귀를 귀울이면서부터

현명해지는 방법을 터득했다.

 

적은 밖에 있는게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나는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을 깡그리 제거했다.

나는 나를 극복하는 순간 칭기스칸으로 거듭 태어났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음을 탓하지 말라.

그림자 말고는 친구가 없는 황야에서 자랐고

백성들이라고는 아이와 노인을 합쳐 2백만이었다.

...................................................................

 

오늘날까지 몽골의 정신적 지도자.,칭기스칸.

 

초원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몽골유목민에게
음악은 그들에게 있어서 낭만과 생활을 표현
멀리 나가 있는 가축을 부르는데에도 사용된다.

말머리 형상이 달린 전통 악기 ‘마두금’,
뱃속 깊은 곳의 소리를 끝어내는 창법 ‘흐므’.
마두금이 있는 곳에 노래와 사랑이 있다는 그들.
 
초원에서 음악을 즐기는.,몽골.

 

몽골반점 그리고 우리 문화의 시원(始原)과 맞닿는 나라.

오늘날, 몽골의 국토면적은 남한의 16배이고, 한반도의 7배,

대구시와 비슷한 250만 인구를 가진 세계 제일의 저밀도 국가.

 

언어.풍습이 같은 몽골과 한국은 동족..연방국가건설해야

 

바다가 없는 내륙국가 중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몽골.

 

매년 7월 11, 12, 13일에 걸쳐 국가적인 축제
고구려 시조 주몽 설화에 나오는 활쏘기 말타기
몽골족은 지금도 생활 수단으로 중요하게 여긴다.

말타기 활쏘기 씨름으로 자웅을 겨루는「나담 」
여기서 우승한 사람은 영웅으로 대우 받는다.
부족을 이끌 영웅이 갖춰야할 전투력 완비.
 
나담은 원래 ‘놀다’ 라는 뜻의 몽골어에서 유래
씨름, 활쏘기, 말타기를 겨루는 마을 놀이
징기스칸 이전부터 몽골의 여름 축제.

 

여름은 일년 간 식량을 비축할.,유일한 기간.
그러므로, 몽골에서의 여름 방학은 무척 길다.
초등학생 쯤 되면, 200~300 마리 양떼를 돌본다. 

 

몽골에 여름이 오면 사람들은 집을 떠난다.
야성과 진취적인 정신을 살리기 위해 야영.
양을 돌보고, 말젖을 짜려고 초원을 찾는다.  

 

언어.풍습이 같은 몽골과 한국은 동족..연방국가건설해야 

 

가시리마을 문화지도

 

제주특별자치도에서는 "서귀포시 '가시리'가

농림축산식품부에서 공모한 ‘봄꽃 나들이 가기

좋은 농촌체험마을 10선’으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서귀포 '가시리 마을'은 진입로부터 10km구간에

유채꽃과 벚꽃이 어우러져 펼쳐지는 드라이브 코스.

 

노란 유채꽃과 벗꽃이 어우려진 환상적인 가시리 녹산로 꽃길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가시리 녹산로.

조선시대 최고의 목마장이던 녹산장과 갑마장을

관통하는 길로 제주도에서 손꼽히는 유채꽃길이다.

 

노란 유채꽃 향기를 맡으며.,

가족, 연인이 함께 '봄나들이'.

 

제주도여행 가시리 갑마장 길 트래킹 준비중이에요

  

가시리 체험마을은 2013년 농촌체험마을로 지정.

‘갑마장길’ 등 트래킹 코스 및 체험 프로그램도 개발.

‘똣똣한 화롯가 수다방’ 등 다양한 문화교실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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