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국시대를 천하통일하고 스스로 시황제라 칭한
진시황은 변방 왕들을 거느리며 그 위세를 펼쳤다.
자신의 호령 한마디에 영웅과 미녀는 무릎을 굽혔고,
이 세상 모든 것을 자신의 손에 넣었다고 생각한 진시황.
오랫동안 권세를 누릴 수 있도록
장수하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신하들을 방방곡곡의 영험한 곳으로 보내어
제를 올리고 자신의 무병장수를 밤낮으로 빌게 했다.
그의 신하 중 서복(서불)이라는 방사(方士)가 있었다.
정부의 정사를 처리할 뿐만 하니라 의약,
연단술, 점성술, 항해술에도 식견이 있었고,
황제와 귀족들 뿐만 아니라 평민들과 접하며
고충을 헤아리는 마음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시황제는 특별히 서복을 총애하고 있었지만
점점 의심이 많아져 가는 시황제가 언제 변덕을
부려 자신을 해할지 서복은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하루는 시황제가 서복을 궁전으로 불러들였다.
“내가 얼마나 살 것인지, 그대는 알 수 있는가?”
“폐하, 온 나라의 백성들이
밤낮으로 기도하고 있사옵니다.
어찌 하늘이 그 뜻에 무심하겠사옵니까.
그리고 마침 삼신산에 있는 불로초에
대해서 진언하려던 참이었습니다.”
“불로초가 있단 말이냐!
당장 그것을 대령하도록 하라.”
“폐하, 그 약은 이 대륙에는 없사옵고
저 동해바다 멀리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 이렇게 삼신산에 있다고 합니다.
짐승도 꽃도 새도 순백색의 신성한 것들로
불로초도 항상 향기로운 구름과 안개가 둘러싸여
속인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하옵니다.”
“그러해도 방법을 가리지 말고 어서 구해오도록 하라!
“폐하, 고정하시옵소서.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옵니다.
불로초는 신선들의 음식으로 속인의 눈에는
불로초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동남동녀 오백명과 그들을 태우고
갈 배를 주소서. 신이 목숨을 걸고 구해오겠나이다.”
그는 황제가 없는 곳으로 떠나서
살 궁리를 오래 전부터 하고 있었다.
영생불사를 할 수 있다는 욕심에 황제는 크게 기뻐하며
곤륜산의 천년 묵은 고목들을 베어 큰 배를 여러 척 만들고,
몇 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식량과 물품도 준비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중국 각 지에서 뽑은 동남동녀
오백을 태우고 배는 동해로 출발하였다.
서복선단은 발해를 지나
오랜 항해 끝에 영주산을 찾아내었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그곳은 해중의 섬이면서 산.
.
“이 곳이 영주산(지금의 한라산)임이 분명하구나.
저 산봉우리가 하얗고 하늘에 닿아 있지 않는가.
저기 뛰노는 사슴 중에는 신선들이 타고 다니는 백록도 있으리라.
모두 내려서 천천히 구경도 하고 불로초를 찾아보도록 하여라."
조천읍 조천포(朝天浦)

제주도 해상관문., 조천진성
그들은 제주섬 기슭
조천포에 닻을 내렸다. .
...................조천포.................
조천(朝天)이라는 명칭은 14세기 초
조천관(朝天舘)이 설치된 이후 생긴 것.
조천(朝天)이란 ‘육지로 나가는 사람들이
순한 바람을 기다리는 곳’이라는.,뜻 지명.
..............................................................
.
동남동녀들은 절경을 보며
불로초를 구했지만 서복은 중국을 떠날 때
이미 다시는 황제에게 돌아갈 마음이 없었다.
.
서복은 제주를 떠나면서 조천포와 정방폭포의
암벽에 서복 일행이 이곳을 지나갔다는 서불과차.
(徐市過此), 또는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글귀를
새겨두고 동쪽을 향하여 떠나고, 그들 일행은 동쪽
어느 땅에 정착하여 그들만의 나라를 이루었다 한다.
전설, 그 장소를 찾아서
- 정방폭포와 서복전시관 -
정방폭포 위에는 서복의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한 서복전시관이 있다.
또한 오늘날 또한 오늘날 북제주군 조천은
서복이 아침 기운을 헤아려 포구에 조천이라
새겼다는 유래가 전해 내려오는.,'전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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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산 시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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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시로미
...................정방폭포(正房瀑布).......................
서귀포시 서귀동.,폭포(높이 23m, 너비 8m, 깊이 5m)
폭포 절벽에는 중국 진나라 때 진시황의 사자인 서불이
한라산에 불로초를 캐러 왔다가 구하지 못하고 서쪽으로
돌아가면서 새겨놓은 '서불과차' 각자가 있으며, 서귀포라는
지명도 여기서 유래했다고 한다. 해변 따라 서쪽으로 300m 가면
잘 알려지지 않은 해식동굴이 있으며 내부에는 큰 석불좌상이 있다.
서귀포 동쪽해안에 위치.
동양에서 유일한.,'해안폭포'
폭포수가 바다로 직접 떨어진다.
하늘에 하얀 비단을 드리운 것 같아.,정방하포.
예로부터 영주12경 가운데 제5경으로 유명하다.
배타고 먼 바다에서 바라보는 모습이 아름다우며
앞바다 숲섬· 문섬· 새섬· 범섬에는 난대림이 울창.
남국의 정취를 느끼게 하는.,정방폭포 앞바다 풍광.
..........................................................................
문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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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정방폭포 앞바다.,문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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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정방폭포 앞바다.,범섬
멀리 한라산 정상이 바라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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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정방폭포 앞바다.,범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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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섬., 해식애동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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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섬 낚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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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섬 스쿠버 다이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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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섬 스쿠버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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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정방폭포 앞바다.,범섬 바다 속

범섬 인어아가씨
범섬 앞바다.,갈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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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방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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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길 제6코스
서복전시관
064-763-3225
서귀포시 정방폭포 위.
.
"불로초를 찾아오면
진나라 절반을 주겠다." - 진시황 -
.
서불은 불로초를 찾아서
제주도 영주산까지도 올랐다.
영주산 불로초 '시로미' .'영지버섯'.
서불과
동남동녀들은
제주시 조천포에서
한라산을 횡단하여
영주산을 오른 다음에
서귀포 정방폭포로 하산.
.....................영주산(326.4m).....................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산18-1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산18-1 (지번).,"영모루"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오름.
해발 고도가 326.4m인 오름으로, 성읍 민속 마을
북쪽 약 1.8㎞ 지점에 위치한., 성읍 마을의 "뒷산".
분화구는 화산체의 남동쪽으로 터진 말굽형이다.
오름 사면
대부분 초지
조선시대 제주목사가 성읍리[당시 진사리]를
정의현 읍치(邑治)로 삼을 때 풍수지리적으로
영주산(면적 1,338,920㎡)을 주산으로 삼았다.
영주산은
둘레 4,688m,
표고 326.4m,
비고 176m이다.
영주산은 원래 봉래산·방장산과 더불어 삼신산의 하나,
신선이 살아 신령스럽다고 하여 ‘영모루’ 또는 ‘영머리’.
한자 영지(瀛旨)로 표기 후, 영주산(瀛洲山)으로 바뀐 것.
'신증동국여지승람'
『탐라지』 등에도
영주산(瀛洲山).
분화구 동쪽 안사면의 능선에는 용암 노두가 노출되어 있다.
오름 동쪽 기슭에는 동쪽으로 터진 소형 분화구가 딸려 있다.
영주산 서녘 기슭을 흐르는 천미천에는 '가매소'라는 못이 있다.
오름 전체에 걸쳐 억새가 우점하고 있다.
성읍 1리 민속촌에서 수산리 방향으로
700m 지점에 위치한 승마장에서 북쪽으로
600m를 더 올라가면 오름 입구에 도착하며,
정상까지는 30분 정도 소요된다.
영주산 오름 동쪽 부분은 경사가 완만해 등산로로 이용되며,
정상에서는 목장과 성읍 민속촌, 성산일출봉을 조망할 수 있다.
가을철 오름 전사면에 억새가 풍성해 오름 찾는 탐방객들이 많다.
오름 정상에는 삼각점과 산불 감시 초소가 있으며,
동쪽 아래 기슭에 성읍 민속 마을 공동묘지가 있다.
오름 기저부는 개간되어 농경지로 비올 때 토양 유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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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읍민속마을 뒤로
멀리 보이는., 영주산
성읍마을에서 약 1.8km.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산18 - 1 영주산
영주산은 나즈막한 오름이며.
6월에는 '산수국'이 가득하다.
..........조천읍(朝天邑)............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의 읍이다.
면적은 150.64㎢이며, 인구는 외국인을 제외하고
2010년 12월 31일을 기준으로 8,143세대 21,061명.
조선시대 제주목 좌면에 속.
1874년 조선 고종 1년 좌면이
신좌면과 구좌면으로 분리되었다.
일제 강점기인 1935년 4월 1일
신좌면에서 조천면으로 개칭하였다.
1961년 8월 6일 대흘리가 대흘1ㆍ2리로 분리.
1985년 10월 1일 읍으로 승격하였으며,
2006년 7월 1일에는 제주특별자치도가
출범함에 따라 제주시 조천읍이 되었다.
교래리
대흘리
북촌리
선흘리.,곶자왈 동백동산.
신촌리
신흥리
와선리
와흘리
조천리
함덕리
신촌현대식 화훼단지
만세동산
동백동산
고두기 언덕
신촌향사
달여도
함덕 해수욕장
제주항일 기념관
산굼부리
연북정
제주미니미니랜드
조천연대
함덕연대
제주삼다수 공장
.......................
조천읍은 지도 상으로 보면, 작아 보이지만
막상, 그안으로 들어가면.,바다 같은 대평원.
동서남북 바다가 보이지 않는.,끝 없는.,구릉지.
'선흘리 마을' 그 주변 일대를 다니다 보면
가도 가도 끝없는 깊고 깊은 대평원의 연속.
인적 끊긴 곳에서는 꿩이 사람을 보고 반긴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당시 북제주군 선흘리는 경운기가
겨우 힘겹게 다닐 정도의.,돌밭 외길.
산굼부리 방향에서 집입로가 유일한 길.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나간 후
2017년 선흘리는 관광지로 변모.
2017.5.22
선흘리 동백동산 마을
.,람사르 시범마을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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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흘리 동백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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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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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흘리 곶자왈., 원시림.
선흘리 곶자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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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꾼과 선녀'
전설(傳說)의 고향.,
선흘리 곶자왈.,테마공원
'서불과차' '한라산 종주'
옛 루트를 따라., 신혼여행.
요즘 여행객에게도 인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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곶자왈 동백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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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흘마을 - 동백동산 말고도.,용암동굴(길이 : 4,481m)
세계적으로 가장 복잡한 미로형 동굴이며 지표에서 가까워
함몰된 입구가 여러 곳이며 만장굴과 함께.,세계자연유산 등재.
.
1948 남한 만의 단독정부에 반대한.,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봉기, 4.3 항쟁. 민주항쟁 등
제주의 뼈아픈 역사를 볼 수 있는.,역사의 현장.
곶자왕 동굴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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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산 해바라기 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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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영주산.,'천국의 계단' 영주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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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알프스.,영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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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산 ~ 산굼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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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체왓 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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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 '탐라국'이었던.,제주도
.
.
탐라국(耽羅國, 기원전 2337년 ~ 1402년)은 제주도의 왕국.
통일신라때까지 한반도의 나라들과 교류하고 후삼국 시대에
고려가 삼국통일한 뒤 현으로 복속되었다가, 조선 태종때 병합.
탐모라국(耽牟羅國)· 섭라(涉羅)·
담라(儋羅)· 탁라(乇羅)라고도 표기.
삼국시대부터 고려 및 조선 초기까지
오랫동안 불려졌던 칭호.,탐라국(耽羅國)
탐라국을 세운.,
3 신인(神人) 신화.
고씨는 고구려계,
양씨는 양맥족이
부씨는 부여계가
남하한 것이란.,설.
1928년 제주시 산지항 공사 때
공사장 부근 용암(熔岩) 아래에서
우연히 중국 한대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화폐로는 오수전(五銖錢)·화천(貨泉)·
대천오십(大泉五十)·화포(貨布)가 발견.
.
오수전은 전한 무제 때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왕망의 신(新)나라 때에도 사용되었으며 화천·
대천오십·화포 등은 모두 왕망 때 만들어진 것.
따라서 산지항 부근 유적의 성립 시기는
왕망 시대 이전으로는 소급할 수가 없다.
...................
...................
제주시는 탐라국의 중심지였으며,
탐라국은 일본, 백제와 교류하였다.
5 ~10세기 백제·중국·일본 등과 국제교역을 하면서
‘국(國)’을 형성 기반으로 하였던 제주의 옛 정치체.
탐라국은 ‘섬나라’라는 의미로서,
섬에 위치하여 오랫동안 독자적인
국가 형태로 존속하였던 국가이다.
제주목 관아는 1416년(태종 16) 제주도가
제주목·대정현·정의현의 삼읍으로 나누어지기
이전 탐라국의 관아터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
탐라국이 사서에 등장한.,'삼국사기' '백제본기'.
"476년(문주왕 2) 백제 문주왕에게 방물을 바쳤다."
그후 탐라국은 고려 전기인 1162년(의종 16) 현령관이
고려 중앙에서 파견되어 올 때까지 국내 사서에 10회 정도,
중국 사서와 일본 사서에서 각각 7회와 19회 존재를 드러낸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탐라국에는 왕, 왕자,
그리고, 백제 중앙관위 은솔(恩率)이라든지
좌평(佐平) 직책을 가진 존재들이 있었던 것.
탐라국 내부에 그 구성원들이 위계적으로 배치.
상당히 계층 분화된 사회 체제와 그것을 통제하는
상부구조가 백제 임은 해외국가로부터 공인된 사실.
탐라국은 하나의 ‘국(國)’으로서
동북아시아라는 당시 국제 사회에서
상당히 높은 국제적인 위상을 갖고 있었다.
그 예를 보면, 『자치통감(資治通鑑)』
고종 인덕 2년조(665년)에 신라·백제·탐라·
왜국 사자들이 중국 태산에 모여 제사를 지냈다.
.
7세기 시점에서 사자들의 서열을 살펴보면,
탐라국의 지위가 일본보다 앞서고 있었으며
다른 세 나라들과는 거의 대등하게 보여진다.
또한, 실례로서 신라 27대 선덕왕이 황룡사 구층탑을 세워서
외국 침략을 막으려했을때 탐라는 신라의 잠재적 적대국 중 4위.
따라서, 당시 신라도 탐라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
.................
김해김씨좌승공파
입도조 척제 金萬希신도비,
2세김혁추모비, 3세김례묘
소재지 : 제주시 애월읍 곽지리
좌향 : 甲坐庚向(3세 김례묘)
형국 : 선인기국형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할 무렵
'하늘에 두 태양이 있을 수 없듯이
백성에게 두 임금이 있을 수 없다.'
天無二日, 民無二王는 성리학의 원칙을
지키려 정몽주 같은 분은 죽기도 하였다.
‘신하가 두 임금을
섬기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는
不事二君의 성리학 정신을 지키다가
한천, 이미, 김만희 등 3분이 제주에 유배.
이 세 사람을 두고 고려 말에 끝내 지조를
지켰다고 하여 제주 三節臣이라고 부른다.
고려 공양왕 밑에서 오늘날 수상급 도첨의 좌정승을 지낸
김만희(金萬希, 호 척재惕齋)는 고서산에 들어가 숨어버렸다.
개국 후 태조는 옛 유신들을 조정에 나오도록 명을 내렸지만
충신은 불사이군이라 하여 여전히 고서산에 머물렀고 그 결과
제주 유배형, 고령인 점을 감안하여 가족이 따라가는 것을 허락.
김만희는 손자 김예, 증손자 김봉과 함께 애월포구에 도착.
이때가 1393년(태조 2년)10월로 그의 나이 81세 고령이었다.
애월 포구 가까운 곽지에 적거.
그는 11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다.
그는 신하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여 이름을 바꾸었는데
그 죄가 만만하여 밝은 사리를 거울삼아 하늘에 바랄 뿐
(不臣改名 萬萬有罪 希天監昭昭也) 뜻에서 만희로 고쳤다.
그의 나이 91세에 유배가 풀려
고향인 황해도로 돌아가면서
손자 예(禮)를 남기고 갔다.
김예는 곽지에서 밀양박씨 부인과 혼인해 제주에 머물렀다.
1792년 정조 18년 제주의 대기근을 해결한 의녀 김만덕은
김만희의 15대손이며 김구오는 추사 김정희가 유배왔을 때
추사체를 전수받은 3인 중 1인이며 그도 김만희의 후손이다.
3.1운동 때 태극기에 혈서로 대한독립만세를 쓰고
독립운동에 앞장을 섰던 김필원도 김만희의 후손이다.
김만희는 김해김씨 좌정승공파(左政承公派) 제주입도조.
종친회에서는 입도조 묘가 북녘에 있어
참배하지 못함을 안타까이 여긴 나머지
1981년 12월에 入島 3세 김예(실제 입도조)와
부인 밀양박씨(密陽朴氏) 묘가 있는 곽지악 기슭에
高麗三重大匡僉議左政丞金海金公萬希神道碑와
2세 赫의 壇享碑를 세워 성역화하고 있다.

..................산굼부리 분화구..................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비자림로 768
천연기념물 제263호(1979년 6월 18일에 지정) .
제주도 368개 기생화산은 대접을 엎어놓은 분화구 형태.
그러나, 둘레 2km 산굼부리 분화구 만은 구멍 만 남았다.
제주도에서 유일하게 용암이나 화산재의 분출이 없이 폭발.
그곳에 있던 암석을 모두 날려
분화구 구멍 만이 남게된 것이다.
한국에 하나밖에 없는.,마르(Maar)
세계적으로도 아주 희귀한 화산이다.
특히, 산굼부리 밑바닥에는 틈이 많아서
물이 모두 스며들기 때문에 이 화구 안에는
식물의 생태계가 위치에 따라 특이하게 분포.
분화구 내부높이에 따라 '온대와 난대' 지역형성.
햇빛 일사량과 일조시간에 따라 다양한 분포를 형성.
그러니까 햇볕이 잘 드는 북쪽벼랑은
난대지역을 이뤄 붉가시나무를 비롯해
후박, 구실잣밤나무, 센달 등 상록활엽수군
그 아래층에는 '희귀식물'인 금새우란.
자금우, 겨울딸기 등이 분포되어 있다.
또한, 햇볕이 잘 들지 않는 남쪽벼랑에는
북쪽과는 판이한 분포를 이루는 상수리나무.
졸창나무, 산딸나무, 단풍나무, 곰솔 온대성낙엽수.
그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왕쥐똥나무군락, 상산 군락, 제주조릿대군락,
복수초군락, 변산바람꽃군락등이 매우 화려하고
완벽하게 보존되어 학술적으로도 연구 가치가 높다.
그리고, 노루와 오소리 등의 포유류를 비롯해서
조류, 파충류 등 야생동물 서식처로도 유명하다.
봄에는 분화구 바닥에서 구름이 형성
위로 올라가는 모양이 신비에 가까우며
쑥부쟁이를 비롯하여 무룻과 용담, 물매화 등
천연색 꽃과 더불어 이 산굼부리에는 사시사철
산굼부리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신비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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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연풍연가(戀風戀歌) 촬영지.,산굼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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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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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구석기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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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남단의 제주도는 한라산을 중심으로
368 기생 화산과 180 여 동굴들로 이뤄진 화산섬.
한라산(1950 m)은 정상의 화구호 백록담,
가파른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영실기암,
368개 오름(기생 화산)들이.,독특한 경관.
한라산 주변에는 수차례 분화가 이뤄지며 쏟아져 나온
현무암질 용암이 지표를 따라 해안으로 흘러가는 동안에
생성 시기가 30만~10만년전 사이로 추정되는.,180여 동굴.
제주도는 수려하고 아름다운 경관과 한라산 및
그 주변 동굴들, 성산일출봉 같은 독특한 지형들.
2007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등재된데 이어
2010년 세계 지질 공원으로 인증을 받았다.
.

탐라국 탄생 역사의 특징이라면
세 왕자가 원시 수렵생활을 시작으로
농경문화를 열어가는 가운데 세 공주가
오곡과 송아지 망아지를 앞세우고 상륙하는
시대 상황을 자연스럽게 기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탐라국 탄생 신화의 신뢰감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이것은 탐라국 탄생역사의 생명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화의 생명력은 진실성을 바탕으로 한 친화성에 있다.
즉, 신화는 사실적 접근이 가능할 때 생명력이 이뤄진다.
단군신화, 고구려· 신라· 가락국의 난생(卵生)신화 보다도
탐라국 신화는 신선함과 신비감을 더 깊이 간직하고 있다.
탐라국 탄생 역사의 시작과 중심에는
‘혈(穴)’이란 공간이 있는데 다시 말하면
신인 3 사람이 땅 속에서 솟아났다는 것이다.
또한 3신인과 결혼할 벽랑국 세 공주가 갖고 온 예물 가운데
망아지 송아지가 포함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3 공주가 상륙했다는 남제주 성산읍 온평리.,‘연혼포(延婚浦)’.
벽랑국 세 공주의 첫 발자취를 더듬어 볼수 있는.,해안가.
이곳 서쪽 조금 떨어진 곳에 세쌍이 혼례를 올렸다는 혼인지.
이처럼 신화의 현장들이 남아 있어 벽랑국은 더 흥미를 갖게된다.

조선시대 - '탐라국'이었던., 제주도



탐라국입춘굿놀이 기원은 탐라국시대
탐라 왕이 몸소 쟁기를 잡고 백성 앞에서
농사시범을 보였던 세시풍속이자.,풍농굿.
.
.................탐라국입춘굿..............
하늘의 1만 8천 신이 지상으로 내려와
‘새철 드는 날’(입춘날)에 제주목 관아에서
제주목사를 비롯한 관리들과 무당들이 다 함께
행하던 굿놀이판을 현대에 재현한.,민속놀이 축제
입춘 국수와 막걸리를 무료로 맛볼 수 있고,
해금·거문고 산조의 전통문화 마당, 제기차기,
팽이치기, 미숫가루와 떡을 직접 만들어 먹는
체험마당 등 다양한 행사가 마련되어 있는 잔치.
................................................................
조선시대 제주목사가 전도 심방을 모아 비용을 대고
제주(祭主)가 되어., 벌이는 굿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마을 원로 호장이 쟁기를 잡고 낭쉐[木牛]를 끌고 가면
전도에 흩어져 있던 심방들과 마을의 걸궁패가 뒤따랐다.
.
그 뒤를 백성들이 따르면서
관덕정에 모여 굿판을 벌였다.
......입춘 전야제.......
1. 거리굿으로 정화하다
입춘 전날 목우를 만들어
낭쉐코사(木牛告祀)를 지내기 전에
걸궁패가 하는 거리굿·잡색놀이·풍물판굿·문굿
등을 걸궁이라 하는데, 입춘굿을 위한 모금과 함께
관청과 사가는 물론 거리마다 부정을 씻고 살을 물리쳐
액을 막아주는 거리도청제(거리굿)와 문굿으로 이루어진다.
2. 낭쉐코사(木牛告祀)로 풍농을 기원하다
낭쉐코사는 농사의 풍요를 바라는 동민들의 신성한 의식.
그러므로 목우를 만들기 전 앞고사를 지내고 금줄을 친 뒤
잡인의 출입을 막고, 목우가 완성된 뒤에는 막고사를 한다.
그때마다 걸궁은
악기를 울려 신명을 부추겨야 하며,
목우를 만드는 사이에는 집집마다 돌며
'문굿'을 쳐주고, '인정(기부금)'을 받는다.
제주도에는 소나 말을 기르는 테우리와 둔주가 주도하여
마소를 위한 고사로 넥인(烙印)코사·귀페(耳標)코사·테우리
명절 등이 있었는데 입춘굿 역시 풍농굿으로 예로부터 입춘 전날
나무로 소를 만들고 금줄을 쳐서 부정을 막는 고사.,낭쉐코사[木牛告祀].
이 고사를 지내기 위하여 만드는 낭쉐[木牛]는
입춘 날 탐라 왕이 백성들 앞에서 직접 밭을 갈던
입춘춘경(立春春耕) 또는 친경적전(親耕耤田)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특별히 제작한 신성한 소다.
낭쉐를 만들면 금줄을 치고 부정을 막아 신성한 장소에 보관.
낭쉐는 탐라왕이 끌던 신성한 소이자 소의 신,
목축의 신 테우리 신의 하위 신이기도 하다.
그러니 낭쉐도 농경 신의 일종인 것이다.
3. 영감놀이로 전국의 영감신을 불러들이다
낭쉐코사가 끝나면 낭쉐 주위에 금줄을 쳐 부정을 막고,
참여한 관중들은 종이탈을 쓰고 횃불을 들고 판을 만든다.
심방이 집전하는 영감놀이를 위해서이다.
영감놀이는 제주도의 대표적인 종이탈굿놀이로서
팔도의 명산을 차지한 영감신들은 팔도를 유람하며
제주에 온 막내 동생을 찾아온다.
막내동생은 낮에는 연불, 밤에는 신불을 들고 나타나는 도깨비 신
이며 “술 잘 먹고 소리 잘하는 신” 곧 예술의 신이자 축제의 신이다.
따라서 전야굿의 영감놀이는 축제의 영감신들이 제주에 찾아와 입춘굿에
한바탕 신나게 놀고 잘 대접받아 축제의 신명을 불러 일으켜 달라는
시민들의 기원을 담고 있는 제주도 특유의 종이탈놀이굿이다.
4. 한바탕 난장의 전야굿을 벌이다.
영감놀이가 끝나면 팔도에서 들어온 팔도 풍물패와
제주의 풍물패, 탈패, 마당놀이패들이 서로 어우러져
한바탕 난장의 판굿과 잡색탈놀이를 벌이게 된다.
한 해 농사의 풍년을 비는 농경 의례와 탈놀이 마당,
관아를 돌며 문굿을 쳐주고 부정을 막는 문전고사(문굿),
그리고 마을 걸궁패의 가장 행렬 또는 길놀이로 이루어진
걸궁 등이 종합적으로 어우러진 놀이 한마당이었던 것이다.
..........입춘날 본제.............
1. 거리굿으로 본굿을 준비하다
입춘날이 되면 시청 후문에 매어둔 낭쉐 금줄을 풀고
낭쉐를 이끌고 나와 걸궁패의 대오를 점검한다.
300여 명이 시청 앞을 출발하여 광양로, 남문로,
중앙로터리를 지나 관덕정에 들어온다.
관덕정을 한바퀴 돌며 원을 만들고
호장이 목우를 끌며 밭가는 시늉을 하면,
호장 뒤를 따르는 농부들이 씨를 뿌리고
땅을 고르는 등 각종 무언의 동작을 한다.
풍물굿을 벌인 후에 각종 기와 배역들이
자리 잡아 마당에 앉으면 본굿으로 들어간다.
2. 본굿이
진행되다
1)초감제
2)새림
3) 오리정 신청궤
4) 본향듦
1) 초감제: 입춘굿의 초감제는 신구세관(新舊歲官)이 갈리는
‘신구간’이 지나고 새봄맞이 준비를 하는 ‘새철 드는 날’에
옥황상제의 명을 받아 새로 부임하는 1만 8천 신들의 지상 강림을
기원하는 청신의례(請神儀禮)이다.
그러므로,
탐라국입춘굿놀이 초감제는
제주도 ‘큰굿’의 규모로 한다.
수심방은 서서 굿을 진행한다.
태초에 천지가 창조되고
인간 생활이 시작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베포도업침’,
굿을 시작하는 때와 장소를 알리면서 굿을 하는 곳이
세계의 중심이자 우주의 중심이라는 ‘날과 국 섬김’이 끝나면,
굿을 하는 까닭을 설명하는 ‘연유닦음’에 들어간다. 연유닦음에서는
입춘굿의 오랜 내력과 사연을 이야기하는 데,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입춘굿은 탐라국 시절부터
탐라 왕이 백성들 앞에서
직접 쟁기를 잡고 소를 몰며
밭을 갈던 고유 풍속이었다.
제주의 풍속을 마구 파괴하던
그 어려웠던 이형상 제주목사 시절에도
입춘굿만은 아니할 수가 없어 기영저영 끌어오던 참에
신축년 난리가 나서 관덕정은 성교꾼들의 피로 물들고
자원장두 이재수는 죽어 입춘굿을 더는 할 수 없었다.
그 뒤에도 이눈치 저눈치 몇번 하다 말고,
일본 놈 시국 되니 조선 사람의 신구간이나
신구간이 끝나서 하는 입춘굿은 미신이라 하여
굿하면 막 잡아들인다 하니
하지 못하다가 해방이 되니
“성님 옵서 우리 홀목 잡앙 관덕정에 강 1만 8천 신전님들
옵서 옵서 청해영 입춘굿이나 큰굿으로 해 봅주허연 이 공론
저 공론 했주마는 무자·기축년 사태 만낭 굿 한 번 못해 본 것이
이거 몇 해우꽈 80년을 넘겼습니다”며 입춘굿의 내력을 엮는다.
그래도 다행히 ○○년 ‘새철 드는 날’에
대주 제주시장 ○○를 초헌관으로
역가를 바치게 되었다는 이야기,
입춘굿은 태조 시절에 제주목사가 관청의 액을 막고
만민단골에 궂은 액을 막아주었다는 이야기를 한후.
입춘굿을 통해 제주민이 기원하는 바를 이야기한다.
“오늘 우의로 하는 옥황신전님들 청하고
자청비 세경할망을 청하여 하는 이 공서 옷이 없어
밥이 없어 옷 줍서 밥 줍서 하는 공서 아닙니다.
옷과 밥은 빌어서도 얻어서도 밥입니다.
새철 드는 날 높고 높은
1만 8천 신전님들을 청하여
제주민들 오곡풍성 육축번성 만민백성
넋날 일 혼날 일 막아주십센 올리는 공삽니다.
제주시에서 올 금년사업 계획대로 잘되게 해줍서 하는 공삽니다.
모든 1만 관청 건물에도 궂은 액을 막아줍센 드리는 공삽니다.
제주읍성 만민단골에도 궂은 액을 막아줍센 올리는 공삽니다”
‘연유닦음’이 끝나면 심방은 감상기와 신칼을 들고
매우 격렬한 춤을 추어 ‘군문열림’을 한다.
‘군문열림’은 굿문을 열어
하늘의 신들을 내려오게 하는 청신의례,
‘하늘 신궁의 문을 여는 제차’이다.
하늘의 도성문이 열림으로써
하늘에서 1만 8천 신들의
하강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2) 새림
신들이 하늘에서 내려오고 하늘에서 내려온 신들을
5리 밖에까지 가서 모셔오기 전에 굿판의 부정을
말끔히 씻는 것이 ‘새림’이다.
소무가 동해 바다 은하 봉천수를
사발 그득 떠다가 물을 뿌리며 제장의 부정을
씻는 물에 의한 정화의식(淨化儀式)이다.
3) 오리정 신청궤
오리정 신청궤는 하늘에서 내려온 1만 8천 신들을 5리 밖까지 가서
심방이 안내하는 감상관이 되어 모셔오는 청신의례 중 하나다.
하늘의 신들을 모셔오는 지상의 신은
본도지관[土地官]이라는 본향당신이다.
심방이 쌀을 든 그릇을 들고
신칼로 쌀을 사방에 캐우리며 춤을 추는 것은
하늘의 신을 맞이하는 본향당신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심방의 안내를 받아 굿판으로 들어오는 신들의 행렬은
높은 신에서부터 낮은 신으로 이어진다. 이때 쌀을 캐우리는 것은
1만 8천 신의 웅장한 행렬 맨 마지막에 따라오는 군병(軍兵)이라는
잡귀, 잡신, 배고픈 귀신들에게 하는 대접이다.
입춘굿의 오리정 신청궤에는
신들을 제장으로 모시면서
특히 제주도의 농경 신 세경할망 자청비를
모셔 들이는 ‘세경할망 청함’이 있다.
세경할망을 모시는 오리정 신청궤를 심방이 외치면
할망은 지팡이를 짚고 요란하고 무시무시하게
신의 위엄을 과시하며 제장 안으로 들어온다.
이때 제주도의 농경 신
세경할망 자청비의 신상을 그린
걸개 그림이 하늘에서 내려와 건물 벽에 걸린다.
4) 본향듦
제주읍성 안의 마을 본향당신들을 청해 들이는 과정이다.
제주읍성 안에는 시내 내왓당, 운주당, 각시당, 궁당,시락당,
칠머릿당, 물할망당 등 제주시 관내에는 40여 본향신들이 좌정.
이 당신들을 청해 들이려면 팔에 화살통을 차고
‘팔찌거리’를 하여 활을 쏘며 굿판에 들어오는
무서운 당신의 모습을 재현하며
본향당신을 청하는 제차인
‘본향리’를 한다.
본향당신들을 다 모시고 좌정시킨 뒤에는
제주시장을 초헌관으로 삼헌관을 젯상 앞에 앉히고
절을 시키고 ‘음복지주잔’이라는 명과 복을 이어주는
제물을 음복한 후, 신에게 한 해의 사업이 잘 되게 해달라는
소원을 기원하는 ‘소지(燒紙)’를 태우고
환자의 몸에서 잡신을 쫓는 ‘푸다시’를 한다.
........서귀포 입춘 풍습.............
서귀포 지역에서는 입춘날이 되면
새해가 시작되었다 하여 쌀밥을 해 먹고
집안에 입춘축을 써서 붙인다.
입춘날 여자가 남의 집에 가는 것을 금하는데,
이는 여자가 찾아간 집에는 그 해 밭에
김이 무성하게 되어 농사가 안된다고 한다.
수염이 많은 사람이 남의 집을 방문하는 것 또한 금하는데,
수염이 무성한 것처럼 밭에 김이 무성하게 된다고 하며,
털 돋은 짐승이 이 날 집안으로 들어오면
그 해 밭에 김이 무성하다고 한다.
반대로 입춘날 상주를 보면
그 해 운수가 대통하다고 믿는다.
입춘날 여자들이 물들인 치마를 입고 다니는 것도 금한다.
입춘날 보리밭에 가서 보리 세 개를 뽑아 뿌리가닥을 보고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친다. 보리뿌리가 세 개 이상이면
풍년이 될 것이라 하고, 뿌리가 하나이면 흉년이 된다고 한다.
입춘날 새끼를 꼬면 집에 뱀이 많이 나타난다고 하며,
바느질을 하면 바다에서 독가시치에 찔리게 된다고 한다.
입춘날 물건을 사고 팔면 일 년 내내 쓸데없는 지출을 하게 되어
손해본다고 하고, 입춘날 바람이 불면 일년 내내 바람이 많다고 한다.
............................................................................................
탐라국 입춘굿.
탐라국 입춘굿.




제주 농악 걸그룹.,팔산대

![[스크랩] 제주의소리 | 봄을 부르는 흥겨운 소리 '탐라국입춘굿'](http://ph.jejusori.net/news/photo/201502/157974_178368_2051.jpg)
탐라국 입춘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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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주의소리 | 봄을 부르는 흥겨운 소리 '탐라국입춘굿'](http://ph.jejusori.net/news/photo/201502/157974_178368_205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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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혼포.
.........신양 해안도로.,연혼포......
성산 일출봉 배경.,신양 해안도로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이 일품이며,
활 모습 신양 해수욕장이 펼쳐져 있다.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한 섭지코지가 있는
신양리 해안 입구에서 시작하여 신산리까지 연결된다.
신양 해수욕장과 초원과 바다, 파란 하늘과 기암괴석 등
해안절경이 아름다운 성산포에서 대표적 비경지 섭지코지.
신양 해안 도로의 3.4km지점부터는 환해장성이 시작되며,
해안 도로 중간의 약 4.5km 지점에서는 탐라 개국 시조인
고·양·부 삼형제가 벽랑국(碧浪國)의 세 공주를 맞이한 곳인
황루알의 몰[馬]발자국이 남아 있다는 연혼포(延婚浦)와
혼인지로 갈 수 있고, 약 400여 미터를 더 가면 온평 포구에
이어 환해장성의 끝이 나오는 해안 도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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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국은 삼국시대부터 고려 및 조선 초기까지
그리고, 고조선 이전까지 오랫동안 존재했던 나라.
탐라국의 역사는 설화 상으로 고조선보다 4년 앞선다.
'BC 2337 ~1402' 제주도에 존속했던.,고대왕국.
발해연안 옛 고조선의 해양 거점이었던.,탐라국.
제주도 역사의 기원이며.,'사라진 왕국' 탐라(耽羅).
.......고조선의 해양거점.,탐라국.............
BC 15c 전후, 청동기시대 존재했던 탐라국.
만주 요서 고조선이 남방 해양국과 교역할 때
탐라국이 고조선의 중요한 해양거점 역할을 했다.
즉, 고조선의 해양교류 중계 거점.,탐라국.
고을나(高乙那)왕의 왕세보가 전해지고,
고려사 권57에 이와 관련된 기록이 있다.
'제주도가 동아시아 해양교류 거점 역할.'
.
'단군세기'는 단군시대 연대기로 1대 단군왕검에서부터
47대 고열가 단군에 이르는 역대 단군의 이름과 제위 연수,
업적과 사건 등이 기술되어 있고 경제적 측면에서 조개화폐인
'패전'의 제조와 사용, 세금제도, 고조선 국가경제체계 정보 제공.
BC 15c 요녕성 조양시 출토., '카우리조개' 화폐.
대만, 팽호도와 필리핀 인근해역에서만 서식한다.
3500년 전 '오키나와 제주도' 서식 가능성이 높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는 신석기시대 포경활동을 입증.
창녕 비봉리 유적 8천년전 통나무배는 배만들기 입증.
고조선 대표유물 빗살무늬토기, 고인돌, 비파형동검은
모두 발해만을 중심으로 환발해만유역에서 발견, 분포
.
고조선은 발해만을 자유로이 이동할 수 있는
해양기술로 인해 당시 동아시아 패권국으로서
상당히 오랜기간 평화를 유지했을 것이라는 주장.
제주도는 대만에서 오키나와를 거쳐 북상하는
쿠로시오 난류가 서해와 동해로 갈라지는 길목에 있어
중간 기착지로 일찍부터 문화가 발달했을 가능성이 높다.
고조선은 대륙 북방의 유목문화와 농경문화가
반농반목으로 결합되었고, 여기에 발해만을 낀
해양문화와 융합되어 있으며, 제주 설화에서도
그러한 '반농반목' 융합문화의 특징이 발견된다.
벽랑국 3공주가 오곡, 가축을
탐라국에 가지고 왔다는 이야기는
3지 문화의 고조선 式 융합성을 시사
조선 중종 때 왕실 찬수관을 지낸 이맥이 저술한
'태백일사' 탐라국 기록을 검증할 필요성이 있다.
'BC 1632년 탐라인이 평양 부단군 을아왕에게
말 30필을 헌상했다.' - 태백일사 기록 -
청동기 말기, 말뼈가 출토된.,제주도 고인돌.
'태백일사' 상기 기록은 사실 여부를 알 수 있다.
즉, '태백일사'는 위서(僞書) 아닌 사실 기록인듯.
...................................................................
.
탐라국
역대 왕.
.
부족국가
.
을라왕(乙那王)
건왕(建王)
삼계왕(三繼王)
일망왕(日望王)
도제왕(島濟王)
언경왕(彦卿王)
보명왕(寶明王)
행천왕(幸天王)
환왕(歡王)
식왕(湜王)
욱왕(煜王)
황왕(惶王)
위왕(偉王)
영왕(榮王, 기원전 105년 ~ 기원전 58년)
고대국가
후왕(厚王, 기원전 58년 ~ 기원전 7년)
두명왕(斗明王)
선주왕(善主王)
지남왕(知南王)
성방왕(聖邦王)
문성왕(文星王)
익왕(翼王)
지효왕(之孝王)
숙왕(淑王)
현방왕(賢方王)
기왕(璣王)
담왕(聃王)
지운왕(指雲王)
서왕(瑞王)
다명왕(多鳴王)
담왕(談王)
체삼왕(體參王)
성진왕(聲振王)
홍왕(鴻王)
처량왕(處良王)
원왕(遠王)
표륜왕(表倫王)
형왕(逈王)
치도왕(致道王)
욱왕(勖王)
천원왕(天元王)
호공왕(好恭王)
소왕(昭王)
경직왕(敬直王)
민왕(岷王)
성주시대(星主時代)
고말로(髙末老星主)
고유성주(髙維星主)
고조기성주(髙兆基星主)
고정익성주(髙挺益星主)
고적성주(髙適星主)
고여림성주(髙汝霖星主)
고정간성주(髙貞幹星主)
고순성주(髙巡星主)
고복수성주(髙福壽星主)
고인단성주(髙仁旦星主)
고수좌성주(髙秀佐星主)
고석성주(髙碩星主)
고순량성주(髙順良星主)
고순원성주(髙順元星主)
고명걸성주(髙明傑星主)
고신걸성주(髙臣傑星主)
고봉례성주(髙鳳禮星主
자견왕(自堅王, 기원후 933년 ~ 938년)
진수(陳壽, 233년 ~ 297년)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魏書 東夷傳)의 한(韓)에 따르면
有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 주호(州胡)가 있는데,
‘마한’ 서쪽 바다 가운데 큰섬이며 배로 ‘韓中’과 교역.
탐라국왕세기(耽羅國王世紀)에 의하면 BC 2337년
시조 고을나왕(髙乙那王)이 제주도에 세운 고대왕국.
탐라국(耽羅國)은 전해진 바에 의하면 인구는 10만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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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와 관계...........................
지운왕(指雲王, 483~508) - 8월, 백제가 탐라를 치려고
무진주[(武珍州 : 광주(光州)]까지 내려옴. 탐라, 사신을 보내
화의(和議)하고 백제군을 회군(回軍)시킴. 탐라, 백제의 간섭으로
신라 및 고구려와 교역을 중단함. 백제의 내법좌평(內法佐平)
고진노(髙眞老), 탐라의 산천지형을 시찰함.
다명왕(多鳴王, 533~558) - 10월, 백제는
신라에 반격하려 탐라군(耽羅軍)의 출병 요구.
............고구려와 관계............
지운왕(指雲王, 483~508) - 특산물
가[(珂 : 진주(珍珠)]를 고구려에 보냄
.....................신라와 관계........................................
후왕(BC58~BC7) - 고후(髙厚), 고청(髙淸), 고계(髙季) 삼형제
신라에 입조하여 성주(星主), 왕자(王者), 도내(徒內) 작호를 받음
담왕(聃王, 453~483) - 신라에 가는 탐라의 조공선(朝貢船),
가야포(伽倻浦)에서 가락군(駕洛軍)에게 약탈당함.
그후 검산포(劒山浦)에서는 백제군에게 약탈당함
........중국과 관계....
체삼왕(體參王, 583~608)
수(隋)의 전함 1척, 태풍으로 탐라에 표착함.
수(隋)의 전함과 병사를 백제를 경유하여 돌려보냄.
처량왕(處良王, 658~683)
삼신인(三神人)의 고도지형(古都地形)을
당(唐)의 오도독부(五都督府) 유인원(劉仁願)에게 바침.
당(唐)의 진수사(鎭守使) 유인궤(劉仁軌)의 안내로 태산천제(泰山天祭)에 참석함
........................일본과 관계...................................
익왕(翼王, 243~293) - 일본 사신 갈나고(曷那古) 탐라에 옴
처량왕(處良王, 658~683) - 667년 7월, 일본에 사신을 보냄,
이 무렵 탐라와 일본은 백제(百濟) 부흥운동(復興運動)에 협조.
.................원나라와 관계..................
몽골 연구자 라그바는 13~14세기 몽골인과
한국인은 유사한 단어를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고려와 관계...........................................
민왕(岷王, 908~933) - 고려에 사신을 보내 방물(方物)을 바침
자견왕(933~938) - 12월, 태자 고말로(髙末老)를 고려에 입조케함.
태조(太祖) 고말로(髙末老)에게 성주(星主), 왕자(王者) 작위를 제수함.
궁실(宮室)을 성주청(星主聽)이라 개칭함.
............................조선과 관계..........................
성주 고봉례(星主 髙鳳禮, ?∼1411) - 고려말에 탐라가
여러번 모반(謀反)하므로 이를 회유하려는 조정에 의하여
1386년 전의부정(典醫副正) 이행(李行)과 대호군 진여의(陳如儀)가
탐라를 위무하고 돌아올 때 함께 개경으로 들어와서 1388년
제주축마 겸 안무별감(濟州畜馬兼安撫別監)이 되었다.
태조 때는 빈번히 군마를 바치는 등 성의를 다하였다.
1402년 탐라성주 재직시에 신라 이래로 제주를 지배한
고씨(髙氏)와 양씨(梁氏)가 세습한 성주(星主)와 왕자(王者)의
명칭이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개정하여줄 것을 청하여,
성주는 좌도지관(左都知管), 왕자는 우도지관(右都知管)으로 개칭되었다.
1407년 5월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 1410년경에는 제주안무사가 되었다.
1411년 8월 아들 상온(尙溫)에게 세직(世職)인
제주도주관좌도지관(濟州都州官左都知管)을 승습시켜
줄 것을 청하여 승계시키고 한성에서 돌아가셨다.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제주를 안무함에 큰 공이 있었고,
태종의 지극한 은총을 받았다.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
1273년(원종 14) 원나라가 탐라를 근거지로 항쟁을 벌였던
삼별초군을 토벌한 직후, 그 잔군(殘軍) 토벌과 항복민에 대한
초무(招撫)를 위해 탐라에 설치한 탐라국초토사에서 비롯되었다.
원나라는 삼별초 항쟁이 있기 이전부터 탐라를
일본과 남송(南宋)의 정벌을 위한 전초기지로 여기고
삼별초 항쟁을 계기로 직할령으로 삼고자 탐라국초토사 설치.
원은 곧 탐라국군민도 다루가치 총관부
[耽羅國軍民都達魯花赤摠管府]라고 명칭을
탐라를 목마장으로 이용했는데 1284년(충렬왕 10)에
다시 관청명을 탐라국군민안무사로 바꾸었다.
1294년 원에서 세조가 죽고 성종이 즉위하면서
고려 요청을 받아들여 탐라를 고려에게 반환했다.
고려는 탐라를 제주로 고치고
제주목사를 파견하게 되었지만,
이후에도 원은 공마를 계속 요구.
1300년 원은 다시 탐라군민총관부를 설치했는데,
고려가 경상도의 합포만호부나 전라도 전라만호부의
예에 따라 탐라를 고려에 소속시키고 진수기관(鎭守機關)인
만호부로 바꾸어줄 것을 원에 요구함에 따라
탐라만호부로 이양하는 조처가 취해졌다.
그러나 이후에도 탐라가 여전히 목마장으로 사용됨에 따라,
원·명이 교체되는 1374년(공민왕 23)에는 제주말을 명나라로
보내는 문제를 둘러싸고 말·소의 사육을 맡아온 목호(牧胡)들이
반란을 일으켜 고려의 조정에서 최영(崔瑩)을 제주로 보내
토벌하게 하는 사태도 벌어진 바 있다.
...................................................

탐라진수군(耽羅鎭守軍)
고려 후기 몽골의 탐라 지배기 때
탐라에 주둔했던 고려군과 몽골군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 '탐라진수군'이다.
몽골은 1273년(원종 14) 탐라 삼별초를 정벌한 뒤
상당수 고려군과 몽골군을 탐라에 주둔토록 했으며,
이들 탐라진수군은 100여 년 동안 유지되었다.
이들은 몽골의 탐라 지배를 가능케 함과 동시에,
탐라가 일본과 남송 정벌의 전초 기지로서., 경영.
1273년 원(元)은 탐라에 몽골군 5백 명과 고려군 1천 명을
주둔케 하였으며, 삼별초 평정 2개월 이후에는 탐라국초토사
(耽羅國招討司)라는 관부도 설치했다.
소용대장군(昭勇大將軍) 실리백(失里伯)은 탐라국초토사의 장관인
초토사로 부임하면서 병사 약 200명을 거느리고 옴으로써
탐라 주둔군은 종전의 약 1,500명에서 약 1,700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이 탐라진수군으로서 원의 탐라 지배를 가능케 한 기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탐라진수군의 유지비는 고려가 떠맡았으며, 1274년(원종 15) 원의 제1차 일본 정벌 때
탐라 주둔 고려군 1천 명도 함께 차출되어 참전하였다.
제1차 일본 정벌 실패 이후 탐라 다루가치가
고려 조정에 사람을 보내 탐라진수군에 대한 증원을 강요했는데,
이에 따라 “탐라에 수자리 사는 군사[戍卒]가 적음으로 사람을 모집해
작(爵)을 주어 보냈다”라는 기록처럼 탐라진수군에 충원할 사람을 유인하는
조처가 취해졌으며, 왕은 측근 신하까지 차출케 하여 4천 명의 병력 충원을 명했다.
1279년(충렬왕 5) 남송 정벌을 마친 원은
몽한군(蒙漢軍) 1,400명을 탐라에 더 보냈다.
원은 자기 나라 군사 400명 이상과 고려군 1천명이
탐라에 주둔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몽한군 1,400명을
추가로 보내 일본의 탐라 침략에 대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는 일본 정벌의 가장 중요한 기지이자 출발항이기도 했던
합포(合浦)[경상남도 마산]에 일본 침략을 대비키 위하여 증파했던
원군이 약 640명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대단한 규모이다.
원이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탐라에 대규모 원군을 증파해
일본 침략에 대비하려던 조처는 직할령으로 삼은 탐라의 가치를
높이 평가해 계속 원의 영역으로 유지해 나가려는 의도를 보여주는 것.
고려 왕은 제2차일본 정벌군 동원을 고심하다
원에 탐라진수군 1천 명의 차출을 두 번이나 건의해
허락받기도 하였는데, 이렇게 탐라진수군에 대한 권한이
전적으로 원에 있었다는 점은 일본과 남송 정벌의 전초 기지로서
탐라가 경영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1281년 고려와 연합한 원은
제2차일본 정벌에 나섰으나
이 역시 실패로 끝났다.
원은 제2차일본 정벌을 실패한 다음해인
1282년(충렬왕 8)에도 합포에 군사를 보내
주둔시키는 한편, 고려의 요청에 의해 금주(金州)
[경상남도 김해]와 전라도 지역인 전주·나주 등의 연해처에
군사를 주둔시켜 지키는 진변만호부(鎭邊萬戶府)를
설치하는 등 여러 군사적 조치를 취했다.
1282년 이후부터 원은 고려가 관리를 파견해
탐라 주둔의 고려군을 통할토록 조처했다.
이에 따라 고려가 보낸
탐라 군관의 관할이 시작되었으나
탐라 군관의 가렴주구도 만만치 않게 행해졌다.
그럼에도, 고려의 탐라진수군에 대한
최고 통솔권은 원이 계속 지니고 있었다.
결국 탐라 주둔 고려군의 관할이 고려로 넘어온 조처는
원이 흔히 구사했던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 가운데 하나로서
탐라가 양국에 이중적으로 귀속되어 탐라민이
이중 곤욕을 치르게 하는 상황만을 초래했다.
제2차일본 정벌
실패 이후, 탐라진수군에는
고려군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탐라에는 원의 직할령이 되는
1273년부터 약 700명의 원군이 와 있었는데,
이들 가운데 최소한 약 400명 이상이 제2차일본 정벌 실패 후
3년이 지난 1284년(충렬왕 10)에도 계속 남아 있었다.
더욱이 원은 1284년 도리첩목아(闍梨帖木兒)로 하여금
병사를 거느려 탐라에 와 지키도록 하는 한편,
같은 해 약 400명의 탐라 주둔 원군을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조처하였다.
본국으로 돌아가는 400명의 원군은
‘오랫동안 와 있었던 원군은 교체하라’는
탐라 다루가치 탑자적(塔刺赤)의 2년 전 건의가
원 황제에게 받아들여져 실행에 옮겨진 것이었다.
1284년 원군 병력 중 약 400명이 본국으로 귀환함에 따라
탐라진수군은 최소한 약 1,800명에서 1,400명으로 감축되었다.
원은 1290년(충렬왕 16)에도 탐라에 주둔하고 있던
고려군 1천명을 합단(合丹)의 난 토벌에 동원하라는
명령을 고려에 내리기도 하였다.
탐라진수군 1,400명의 병력 규모는
원이 일본 정벌을 완전히 포기하는
1294년(충렬왕 20)까지 유지되었다.
원의 병력 약 1,400명은 탐라 주둔 고려군 1천 명과 더불어
원의 탐라 지배를 뒷받침한 무력적 기반의 양축이었다.
탐라진수군 상당수는 원의 탐라지배 100년간
탐라에 머물러 살면서 생애를 마쳤을 것이다.
이에 따라 원군은 원의 죄수와 관료로서 탐라에 왔었던 유배인,
몽고족으로 원의 탐라 국립 목장을 관할하던 목호(牧胡) 등과 함께
탐라 여자와 혼인이 이루어졌으며 그 양상은 드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반(半) 몽골족화의
탐라민이 상당수 태어남에 따라
탐라의 인구 규모가 확대되었음과 동시에
탐라 몽골족의 세력 기반도 확장될 수밖에 없었다.
..............유적발굴.......................
1997년 耽羅國 형성기 집터.돌 담장 발굴
2011년 제주해군기지 현장서 송국리형주거지 등 발굴
제주해군기지 건설 현장에서 탐라국시대 성립기에 형성된
송국리형주거지와 유구 등이 대량 발굴됐다.
2012년 문화재청(청장 김 찬)은 26일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동 2696-2번지 일대 선사유적지와 지석묘
3기를 포함한 21필지(10,279㎡)의 ‘제주 용담동 유적’을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으로 지정 예고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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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까지 제주도에는 곳곳에
원나라 옛 풍습이 많이 남아있다.
제주도 방언, 원나라 식.,지명. 음식,
..............................탐라국(耽羅國)....................................
탐모라국(耽牟羅國)·섭라(涉羅)·담라(儋羅)·탁라(乇羅)라고도 표기.
삼국시대부터 고려 및 조선 초기까지 오랫동안 불려졌던 칭호이다.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제주도 3성(姓) 시조신의 하나인 고을나.
(高乙那)의 15세손 고후(高厚)·고청(高淸)과 그 아우 등 3형제가
바다 건너 탐진(耽津)에 이르렀는데, 때는 신라 성시(盛時)였다.
3형제가 들어와 조공하자 신라왕은 이를 가상히 여겨 맏아들에게는
성주(星主), 둘째에게 왕자(王子), 막내에게 도내(都內) 작호를 하사.
이어, 국호를 '섬나라' 뜻말인 탐라(耽羅)라고 명명.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이므로 문무왕 때로 추측된다.
그전까지는 3성씨족의 공동연맹체적인 체제로 보이며,
신라의 삼국통일기에 이르러 3성 가운데 세력이 강성한
고씨(高氏) 씨족이 군장(君長)으로서 국주(國主)가 된 것.
'처음에는 고을나·양을나(良乙那)·부을나(夫乙那)
3성의 시조가 모흥혈(毛興穴, 三姓穴)에서 나타나
그 자손들이 나라를 이루고 살았다.'는.,설화.
기록에 의하면, 사람은 키가 조금 작고 언어는 한(韓)과 같지 않으며,
개나 돼지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소와 돼지를 잘 기르며 또
노루와 사슴이 많으며, 풍속은 질박하고 비루하며, 여름에는
초옥(草屋)에 살고 겨울에는 굴실(窟室)에 산다고 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한조(韓條)에는
“주호(州胡)"라고 지칭하면서 배를 타고 중국과
한(韓)에 내왕하며 교역을 한다고 하였다. 최근에도
오수전(五銖錢)·화천(貨泉) 등의 중국화폐가 발굴되었다.
대외관계는 제일 먼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백제와 밀접해
476년(문주왕 2) 4월에 사신을 파견해 방물(方物, 토산물)을 바치고
그 사신은 좌평(佐平)의 관등을 받았다. 498년(동성왕 20) 8월에는
공부(貢賦)를 바치지 않다가 백제동성왕이 친히 정벌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사과하고 공부를 바칠 것을 약속하였다.
고구려와는 가옥(珂玉)을 수출하는 등 교역했으나
백제에 복속된 이후로는 교섭이 두절되었다. 한편, 신라와는
662년(문무왕 2) 2월에 탐라국주 좌평 도동음률(徒冬音律)이 와서
항복함으로써 이때부터 신라의 속국이 되었다. 그리고 뒤에 일본과
가깝게 지내다가 678년 2월에 신라 사신의 경략을 받았다.
이 뒤로는 신라와 활발하게 교섭하였다.
한편, 중국 당나라와는 661년 8월에 왕 유리도라
(儒李都羅)가 사신을 보내기도 하였다. 또, 일본과는
661년 당나라에서 귀국하던 일본사신의 배가 풍랑을 만나
탐라국에 대피했다가 귀국할 때, 왕자 아파기(阿波伎) 등 9명이
이들을 따라 일본에 간 일이 있은 뒤로 매우 교섭이 활발해
많은 왕자와 좌평이 일본을 다녀왔다.
또 680년 9월과 686년 8월에는
일본에서 사신이 왔다는 기록도 있다.
신라 말기에는 점차 복속관계에서 벗어나,
신진세력인 고려에 우호관계를 맺고자 하여
925년(태조 8) 11월 사신을 파견해 방물을 바쳤다.
938년 12월에는 탐라국주 고자견(高自堅)이
태자 말로(末老)를 파견해 입조하고, 고려로부터
신라의 예에 따라 성주·왕자의 작위를 받아 고려의 번국으로
독립적인 체제를 유지해 나갔다. 그 후 1105년(숙종 10)고려의
지방행정구획 1개군으로 개편되면서 반독립적인 체제는 사라졌다.
1153년(의종 7)탐라군은 다시 격하되어 탐라현이 된 뒤로는
고려조정에서 파견된 현령이 탐라의 행정업무를 관장했다.
이에 탐라국 체제는 없어지고,
성주와 왕자의 관직만이 남아
상징적 존재로 유지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
1404년(태종 4) 5월에 성주는 좌도지관(左都知管),
왕자는 우도지관(右都知管)으로 개칭되어 존속하다가,
1445년(세종 27) 6월에 이것마저 폐지되어 이 때부터
탐라의 귀족계급은 완전히 평민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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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내코.,원앙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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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내코" 제주어 지명 유래....................
예로부터 이 지역에 멧돼지가 많이 출몰하여.,'돗드르'.
'돗드르'는 지금의 토평마을의 지명 유래가 되고 있다.
제주어로 '돗'은 돼지, '드르'는 들판을 가리키는 말이다.
때문에 '돗드르'에서 멧돼지들이 물을 먹었던
효돈천(孝敦川 : 쇠소깍) 입구라 하여.,'돈내코.'.
'코'는 입구를 내는 하천을 가리키는 제주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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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소깍'은 소가 누워있는 형태라 하여 '쇠둔'이라는 지명.
효돈천 담수와 해수가 만나 깊은 웅덩이를 만들어.,쇠소깍.
'쇠'는 소, '소'는 웅덩이, '깍'은 끝이라는 의미이며 '쇠소'는
'한라산 용암이 서귀포까지 흘러내리면서 굳어져 형성된 계곡.'
쇠소
'쇠소' + 깍(효돈천 하구' = 쇠소깍.
존자암.,사리탑.

탐라국 옹관묘
올인 드라마 촬영지.,섭지코지
'올인 드라마'가 해외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세계 각국에서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붐비는 섭지코지.
섭지코지는 올인 촬영지 이전까지는 인적이 끊겼던 오지.
올인 드라마 촬영지로 명성을 얻은.,섭지코지.
섭지코지로 인해 세계적인 관광지가 된.,제주도.
특히, 중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제주도 섭지코지.
드라마 ‘올인’. ‘단적비연수’, ‘이재수의 난’, ‘천일야화’ 촬영장.
섭지코지(코지곶: 재주 방언)는 코 끝처럼 삐죽 튀어나온 지형.
위치 상으로는 '서귀포시 성산읍 신양리 해안'에 돌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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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일출봉 옆.,섭지코지
홍콩 미녀들의 제주 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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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지코지 설화............
선녀가 밤마다 내려와 목욕을 하고
새벽이 오면, 늘 하늘나라로 돌아가던 곳.
그러던 어느날 용왕의 막내아들이 훔쳐본다.
날개옷을 해안가에 벗어두고
섭지코지에서 목욕하는 선녀들.
선녀의 아름다움에 반한 용왕의 막내아들.
욕심을 내어 더 가까이 다가가서 보려는데
인기척을 느낀 선녀들은 누구인가 자신들이
목욕하는 모습을 훔쳐본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
날개옷을 제대로 입지도 못한채 하늘로 올라갔다.
허둥지둥 흐트러진 모습인 선녀들을 보고
화가난 옥황상제는 섭지코지 금족령을 선포.
이런 사실을 모르는 용왕의 막내아들은 매일밤
섭지코지를 찾아가 오지않는 선녀들을 기다린다.
그러나, 선녀들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선녀들의 모습이 떠올라
슬픔에 잠겼다가 마음의 병을 얻어 앓아 눞게된다.
결국, 용왕인 아버지에게 마음의 병을 고백하고
선녀와 결혼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을 드린다.
"섭지코지에서 백일기도를 올리면
백일되던 날, 선녀가 내려 올 것이다.
그때 혼인을 시켜줄 것이니 일어나거라."
그날부터 용왕의 막내아들은 섭지코지에서 치성.
백일되던 날에 갑자기 파도가 일고 오지 않는 선녀.
"지극정성을 다했는데도 갑자기 하늘이 이처럼 성내니
이는, 하늘이 혼인을 허락 않는 것, 그만 단념하라." - 용왕
더욱 낙심한 막내아들은 그곳에서 몸이 굳어져 바위로 변했다.
...................................................................................
"그로부터 사랑을 이루지 못한 그곳을 찾아
남녀가 굳은 사랑을 맹세하고 신들에게 빌면
결혼을 하게 되고 훌륭한 자녀도 얻을 수 있다."
그러한 설화가 동남아까지 소문나
해외에서도 많은 연인들이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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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여행지.,제주
탐라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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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붉고 푸른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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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만리]황금빛 햇살 비추는 그 곳, 탐라의 가을이 탐나도다](http://t1.daumcdn.net/news/201511/04/akn/20151104110014414wtdw.jpg)
남한에서는 제일 높은., 한라산(해발 1950m)
'은하수 (漢)'가 손에 '잡힐(拏)'듯 높은 산(山)'.
누구나 정상에 오르면, 마치 신선이 되는듯한 명산.
태평양 바다 기압골이 봉우리에 걸려 운무에 쌓인 백록담(白鹿潭)
능선 둘레는 약 1.7㎞, 화구호 깊이 110여m. 분화구 면적은 약 6만평.
'백록담'은 '흰 사슴이 살았다는 호수'라는., 전설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옛날에 사냥꾼이 흰 사슴을 향하여 활시위를 당겼는데
빗나간 화살이 자기 궁둥이에 맞자 화가 났던, 옥항상제.
한라산 봉우리를 뽑아 사냥꾼에게 던졌는데 그것도 빗나가
바닷가로 날아가 산방 산이 되었고 봉우리 뽑힌 자리는 백록담.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산방산 & 용머리 해안.
제주도 산방산 & 용머리해안.
산방산은 75만년 전., 백록담은 2만 5천년 전., 바다에서 솟았다.
지질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백록담의 생성 역사는 의외로 짧다.
즉, 제주도 일대는 서해 저지대의 일부분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라산이 백록담 분화구를 통해 형성되기 전까지는
제주도에서 산방산 일대가 가장 높았던 고지대였다.
제주도는 구석기시대의 유물이 출토되는 지역이다.
지리 상으로 구석기시대 남해 저지대에서의 중심지.
제주도는 제 4 빙하기 이후에 대홍수 당시의 피난처.
이어도~ 마라도~가파도~ 용머리 해안~한라산.
제주도는 중국 산동반도와 일본을 오가는., 중간 기착지.
백록담의 '유래 및 전설'을 살펴보면, 남방 불교의 도래지.
옥황상제와 목욕하는 선녀들에 관한 전설은 남방불교 특징 .
고려시대에는 제주에 사찰이 많았었지만
조선시대 유교관에 의해 모두 다 멸실되었다.
그래서, '목욕하는 선녀의 전설'만 전해오는 제주.
.......................백록담 전설...............................
옥황상제 신임이 가장 두터웠던 산지기 산신령이 관리.
그곳 정상 호수는 선녀들이 목욕하는 동안은 금남의 성역.
어느 날 선녀들 목욕 끝날 시간에 맞춰 그곳에 갔던 산신령.
그곳에 혼자 남아 목욕하는 선녀 미모에 넋 잃고 사랑에 빠짐.
그후부터 그 선녀가 목욕할 때면 훔쳐보며 홀로 애태운 산신령.
옥황상제 노여움을 산 산신령은 그 벌을 받아 흰 사슴이 되었다.
흰 사슴이 된 산신령은 그후에도 늘 그 호수 가를 맴돌며
오지 않는 선녀를 기다리다가 사냥꾼 화살에 맞아 숨졌다.
흰사슴이 죽어가며 흘린 피자국마다 분화구 진달래 꽃 되어
그 혼이 해마다 그리움 호소하듯 5월이면 피어난다고 하는데
그 흰 사슴이 살았던 곳이라 하여 백록담이라 부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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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한 옛날, 한라산 북녘 삼성혈에서 솟은 3 신인.
첫째는 고을나, 둘째는 양을나, 셋째를 부을나, 3인.
세 사람은 비범한 생김새에 가죽옷을 입고 육식 위주
사냥을 일삼아 가정을 이루지 못했던 어느 날.
한라산에서 동해를 바라보니, 해변에 자줏빛 나무상자.
3 신인이 산에서 내려와 안개에 싸인 상자를 열어보니,
그 안에 푸른 옷을 곱게 차려입은 선녀 같은 처녀가 셋.
나이는 십오륙 세쯤 되고 얼굴과 태도가 범속하지 않았다.
기품은 그윽하였고 얌전하게 앉아 각자 화장하고 있었는데
그 상자 안에는 송아지 망아지 오곡의 종자 등이 들어있었다.
"세 공주는 하늘이 우리에게 내려 주신 것이다."
3 신인이 반기자 옥함 속 사자가 3신인에게 말하길,
"저는 동해 벽랑국에서 온 사자입니다.
우리 임금님께오서는 세 딸을 두셨는데
배필을 구하지 못하여 여러 해를 보내던 중에
임금님께서 자소각에 올라 서쪽 바다를 바라보니,
보랏빛 기운이 하늘로 이어지고 찬란한 서광이 한라산
높은 봉우리에 서려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삼신인이 솟아나
나라를 세우려 하지만, 배필이 없어 저에게 세 공주를 모시고 가라.
임금님께오서 말씀 하셨으니 혼례를 치르시고 부디 대업을 이루소서."
'그 사자가 승천하며 남겨진
백마 발자국이 온평리..'황루알'
삼신인은 제물을 바쳐 하늘에 제사 지내고,
온평리에 있는 연못에서 목욕재계를 한후 혼례
물맑고 비옥한 곳으로 활을 쏘아 영역을 결정한다.
이들이 활을 쏘았던 곳이 '활쏜디왓'
제주시 화북동 지방기념물인 <삼사석>.
활을 쏘아 고을나가 정한 주거지는 <일도>.
양을나 주거지 <이도>., 부을나 주거지 <삼도>.
그후 오곡을 심고 우마를 길러 탐라국을 이루었다.
석기시대 유물 타제석기 골각기 등이 출토된 동굴.
인간이 제일 먼저 만들었을 원시적인 도구로 보아 구석기시대.
시베리아 연해주 만주 일본 한반도 등등 동북아시아 공통적 유물.
특히 우리나라 신석기시대를 밝히는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고산리 선사유적(사적 제 412 호)를 비롯하여
탐라국 형성기 대단위 집자리 236기 (원형 173기)
당시 석축담장, 쓰레기장, 마을 도랑 유구가 출토된 곳.
주거지에서 토기(구멍띠토기, 점토대토기, 적갈색항아리)
석기(돌도끼, 대패, 갈돌, 숯돌) 와 철기 (철제도끼, 손칼),
청동기(동검, 검파두식 등), 곡식(콩,보리 등) 다양한 유물들.
청동기, 초기 철기시대, 송국리 유형의 문화말기
그 과정과 단계를 보여주는 국내 최대규모 유적지
동시에 탐라국 형성기의 제주 주민문화를 알리는
국내 유일의 마을 흔적이기도 한 중요 유적지이다.
기원전 1세기 무렵 동북아시아 마을 유적의 흐름
그 역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유적.
제주 삼양동 선사유적 (사적 제 416호)를 살펴보면
제주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 수 도 있을 듯 보인다.
현재, 제주대학교 박물관과 제주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유물
제주 전역에 분포된 청동기, 철기유물, 고인돌, 마제석기, 토기,
옹관묘(甕棺墓)의 귀중한 자료들은 제주의 역사를 알게 해준다.
제주도 옛 이름은 도이(島夷), 동영주(東瀛洲),
섭라(涉羅), 탐모라(耽牟羅), 탁라(羅) 등등이다.
옛 이름 중에서 '동영주'만 제외하고는 모두
<섬나라>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지명이다.
제주도 개벽신화 = <삼성혈과 고을라, 양을라, 부을라>
여기에 관해서는 또 다른 흥미로운 전설이 전해져온다.
삼성혈에서는 매년 4월 10일에 춘제, 10월 10일에 추제를 지낸다.
삼성(三姓)인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라는 삼신인(三神人)이 있다.
모흥혈(현재 삼성혈)에서 나와 가죽 옷을 입고 사냥하며 살았단다.
이들 삼신인들은 벽랑국(碧浪國)에서 온 삼 공주와 혼례를 올렸다.
삼공주는 오곡씨앗, 송아지, 망아지 등등을 갖고 목함을 타고 왔다.
삼공주가 제주도 동쪽 해상에서 들어올 당시에 갖고 왔던 오곡 씨앗.
그것으로 농사짓고 소와 말을 기르며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 삼신인의 주거지를 정하려 쏜 화살이 꽂혔다는 삼사석
현재 제주도 문화재로 남아있는 삼사석은 두 전설의 공통점.
그후 고을나 15대 후손 3형제 (후, 청, 계)가
신라(B.C57 ∼ A.D935)에 입조하여 '탐라국'
탐라국은 삼국시대에 예속되어 있으면서
외교관계를 맺어왔다고 역사기록에 있다.
1105년 고려에 예속되어 탐라군이 되었으나,
왕통은 그대로 존속하여 통치를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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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국(耽

제주도의 옛 나라 이름. 주호(州胡)·탐모라국.
섭라(涉羅) 담라(담羅)·탁라(탁羅)라로도 표기.
삼국시대 이전부터 고려 및 조선 초기까지 칭호.
탐라국은 고을나(高乙那)·양을나(良乙那)·부을나(夫乙那)
3신인(三神人)이 모흥혈에서 용출해 나라를 세우고 살았다.
신당서에 의하면 키가 작고, 개나 돼지 가죽으로 만든 의복.
소와 돼지를 잘 기르며, 노루와 사슴이 많으며,
풍속은 질박하고 비루하며, 여름에 초옥에 살고
겨울에는 굴속에 살며 배를 타고 한(韓)과 교역.
1928년 제주시에서 오수전(五銖錢)과 화천(貨泉)·
동경 등 중국 신나라 화폐와 거울이 발굴되었다.
<고려사> 지리지 기록에 의하면,
고을나 15대손 3형제가 배를 타고 바다 건너와 신라에 조공.
신라왕은 이를 가상히 여겨 '성주, 왕자 도내' 작호를 하사.
국호를 탐라라고 하였다고 한다. 탐라는 '섬나라' 라는 의미.
탐라국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문무왕 무렵.
그 이전까지는 3성 씨족의 공동연맹체제인 듯.
신라가 삼국통일을 했을 무렵 고씨(高氏)가 왕.
476년 탐라국은 백제 문주왕 2년 4월에 조공을 받쳤다.
백제왕은 탐라국 사신에게 좌평(佐平) 관등을 수여했다.
498년(동성왕 20) 8월에는 탐라가 조공을 받치지 않아
동성왕이 탐라 정벌에 나서자 사신을 파견하여 사죄했다.
고구려와 국교는 없었고 백제에 복속될 때까지 교역 성행.
한편 신라 662년(문무왕 2) 2월에 탐라국주 좌평이 항복.
이때부터 신라 속국이 되었고 탐라는 일본과 가깝게 교류.
678년에 신라로부터 경고를 받고나서는 신라 일변도 국교.
한편 신라 3국통일후 661년 탐라왕은 당나라에 사신 파견.
661년 당에서 일본으로 귀국하던 일본사신이 탄 배가 풍랑
탐라국에 대피하자 탐라 왕자 등 9명이 이들을 따라 일본행.
그후 일본과 매우 교섭이 활발했다.
탐라 왕자가 여러 차례 일본을 방문
680년과 686년 일본사신이 탐라 방문.
신라 말 점차 복속관계에서 벗어나 고려와 우호관계
925년(태조 8) 11월 사신을 파견하여 방물을 바치고,
938년 고려 후삼국 통일후 고려에 탐라국 태자를 파견.
고려는 신라의 예를 따라 성주 왕자의 작위를 수여.
이때부터 탐라는 고려 번국(蕃國)으로 독립적인 체제
1105년(숙종 10) 고려의 지방행정구획 1개 군으로 개편
1153년(의종 7) 탐라군은 다시 격하되어 탐라현으로 된 뒤
고려조정으로부터 파견된 현령에 의하여 행정 업무를 관장
탐라국 성주와 왕자는 관직만 남아 상징적인 존재로서 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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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모라국(耽牟羅國)·섭라(涉羅)·담라(儋羅)·탁라(乇羅)
삼국시대부터 고려 및 조선 초기까지 불려졌던 칭호이다.
탐라국은 조선시대 초기까지는 엄연히 독립된 왕조국가였다.
탐라국(耽羅國)이 조선에 흡수된 시기는.,세종27년.
1404년(태종 4) 5월에 성주는 좌도지관(左都知管),
왕자는 우도지관(右都知管)으로 개칭되어 존속하다가,
1445년(세종 27) 6월에 폐지되어 탐라 귀족은 평민화되었다.
세종 때 제주목사 기건(奇虔)이 초도순시하는데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겨울에 거의 벌거벗은 여인이
바다로 뛰어드는 모습을 보고 놀라 수행원에게 물었다.
“이것 참 큰일이구나.
이 엄동설한인데도 발가벗고
바닷물 속으로 떼를 지어 들다니
세상에 이런 변고가 다 있는가?
제주에는 왜 이리
미친 여자들이 흔한고.”
수행원들이 해녀의 삶을 자세히 알렸다.
목사의 상에 올려지는 전복, 소라, 미역 등은
해녀들이 목숨걸고 채취한 사실을 알게 된 제주목사.
그후부터 제주목사 '기연'은 재임하는 동안에
해녀들이 목숨 걸고 캐낸 해산물은 먹지 않았다.
정조도 수라상에 색다른 반찬이 눈에 띄어 물었다.
제주 해녀들이 목숨걸고 캔 진상품임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귀한 식품을 차마 먹을 수 있느냐?" 했다 한다.
..............제주도 연혁...................
탐라국(耽羅國)은 기원전 57~1402년 제주도의 왕국이었다.
백제, 신라, 고려에 복속되었다가, 15세기 초에 조선에 병합.
탐라국 시조 고을라왕(髙乙那王)이 제주도에 세운 고대왕국.
탐라국왕세기(耽羅國王世紀)에 의하면 기원전 2337년.
탐모라국(耽牟羅國), 섭라(涉羅), 탁라(乇羅),
담모라(耽牟羅), 담라(憺羅),라고도 지칭되었다.
삼국지 동이전에는 주호(州胡)라고 기록되어 있다.
有州胡在
馬韓之西
海中大島上
'주호(州胡)가 있는데,
'마한' 서쪽 바다의 큰섬.
'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중(韓中)과 교역한다.'
'상고시대 ∼ 삼국시대' 탐라 (탁라)국.
기록 상 3세기 중국 사서 삼국지에 첫 등장.
삼국사기 - 탐라가 498년 백제 동성왕에게 복속.
고구려와 가옥(珂玉) 수출 교역국이었으나
백제에 복속된 이후로 교섭이 단절 되었다.
660년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멸망.
그후, 탐라는 통일신라에 복속되었다
938년 (고려태조 21년)..탐라국 태자 고말로, 고려입조
1105년 (고려숙종10년)..탐라국호 폐지, 탐라군 설치
고려 고종(1192∼1259)..탐라군을 제주로 개편
1275년 (충열왕 원년).....탐라국으로 회복,총관부 설치
1294년 (충열왕 20년).....고려로 환속, 제주로 복호
조선조 초기 (태조년대)..제주목에 군안무사 겸 목사를 둠.
1392년(태조 1) 제주향교 설치, 1394년(태조 3) 우마적 작성.
1404년(태종 4) 노비적 작성, 1408년(태종 8) 공부(貢賦) 정하기.
제주목사 겸 도안무사 오식 건의를 수용 1416년(태종 16) 지배력 강화.
1416년 (태종 16년) 제주목에 정의·대정현 설치
즉, 탐라국에 삼읍(제주목·대정현·정의현)을 설치.
제주목사(정3품) 및 정의현 대정현 현감 종6품 파견.
'제주목사의 부관'에 해당하는 판관을 파견하기도 했다.
조선 전기에는 관권과 토착 세력 간에 갈등이 나타나면서
중앙정부는 토관 세력에게 토관직을 주어 회유하기도 했다.
탐라 유력층을 재경사족(在京士族)으로 삼아 회유하였다.
제경사족 대표인물은 고봉지(高鳳智)와 아들 고득종(高得宗).
고득종은 명나라 사신 2회, 일본 통신사 1회.,파견되었고
제주인으로서는 가장 높은 관직.,한성부 판윤을 역임했다.
조선시대 '한성부 판윤'은 오늘날, 서울특별시 시장에 해당.
1864년 (고종 1년).........정의, 대정 양현을 군으로 승격, 전라도 관찰사 관할에 둠.
1880년 (고종 17년)....... 다시 현으로 환원
1895년 (고종 32년)........제주목을 부로 개편, 관찰사를 둠
1906년 (광무 10년)........목사를 폐지, 군수를 둠
1910년 (융희 4년).........정의·대정군 제주군에 합군
1915년 5월 (일제시대)..군제 폐지, 도제(島制)로 개편
1946년 8월 1일.............도제 실시 (2군·1읍·12면)
1955년 9월 1일.............제주읍이 제주시로 승격 (1시·2군)
1981년 7월 1일.............서귀읍·중문면 통합, 서귀포시 승격
1997년 (현재)...............2시·2군·7읍·5면·31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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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말, 제주에 흉년, 가뭄,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
김만덕은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뭍에서 쌀을 사다가 구휼.
19세기에는 오랜 잠에서 깨어나는 자각의 시기.
온갖 부조리와 억압에 저항해나가는 변화의 시기.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이 태동하고 있는 가운데
오랫동안 억압당했던 울분이 민란으로 분출했다.
1862년 강제검·김흥채 등이 주동한.,임술(壬戌) 농민봉기.
1890년 경인민란, 1896년 강유석과 송계홍 등의 병신 민란,
1898년에는 방성칠이 주동한 무술민란, 1901년 이재수의 난.
제주도는 절해고도였기에 조선시대 대표적인 유배지
조선시대 유배된 사람은 대략 200명 내외로 추정된다.
조선후기 왕족, 고관현직은 주로 제주성 안치
대정현에는 광해군 때의 정온, 헌종 때의 김정희,
정의현에는 광해군 때의 김덕룡, 인조 때의 원종,
제주목에는 중종 때의 김정, 명종 때의 보우,
인조 때의 광해군, 숙종 때의 송시열. 김춘택,
고종 때의 최익현, 김윤식, 박영효 등이 유배.
제주인들은 고기잡이, 미역 채취, 연안항로로 물품 운반,
감귤이나 말 등의 공물 운반, 과거 응시나 장사 등을 위해
육지로 나가다가 중국·일본·오키나와·안남 등지로 표류했다.
1477년(성종 8) 귤 진상을 위해 출항한 김비의(金非衣) 일행
태풍을 만나 유구국에 표류해 남긴 기록이.,김비의 작 표해록.
이국인들은 남동풍·남서풍이 부는 여름에 주로 제주도에 표착.
대부분 중국, 일본, 유구국, 안남국 사람들이었다.
그외 화란인 J. J. 벨테브레(한국 이름은 박연, 1627),
H. 하멜(1653) 네델란드(화란인)이 작성한.,하멜 표류기.
제주 해녀는 남자나 일반 여자보다
겨울 차가운 물속에서도 덜 전율한다.
몸을 떨지않고 버티는 능력이 탁월하다.
옛부터 제주 해녀는 한달에 15일 이상, 물질하였다.
분만 직전까지도 물질하고 분만한 다음 3~4일 만에
또 다시 바닷물 속에 뛰어 들기도 하였다는 제주 해녀.
물질하는 동안 배 위에서 분만 사례도 적지 않았다.
생리학적으로나 의학적으로 볼 때 불가능한 사실이다.
배에서 낳은 아이를 ‘베선이’.
축항에서 낳으면 ‘축항둥이’,
물질하다 낳으면., ‘질둥이’
길에서 낳으면 ‘길둥이’
해녀들은 바다 어디에 어떠한 바위와 어장이 있고
어느 곳은 전복이 많이 난다는 것을 훤히 알고 있다.
바다는 해녀들의 밭이다.
위미리 해녀들의 밭은 마을 앞 ‘지꾸섬’ 지귀도(地歸島).
마을 앞 배로 25분 거리에 엄청난 해산물을 보유한 섬이다
위미리 어촌계 연간 소득원 대부분 이 어장에서 나온다고 한다.
소유 어장은 자신들의 밭이므로
어장 청소와 잡초인 ‘바당풀’을 제거
일년에 두세 번 어장 청소를 ‘개딲이’라 하는데,
이러한 작업은 모든 어촌계 회원들의 의무이다.
해녀들은 물질 하다가 돌고래 무리를 만나면
“물알로 물알로”나 “배알로 배알로”를 외친다.
돌고래 뒤에 상어가 뒤따르기도 하기 때문이다.
바다에서 물질 후 육지에 올라오면 장작더미를 태워 불을 쬔다.
불쬐는 장소를 ‘불턱’이라 하는데, 여기서 화제가 만발하게 된다.
요즘은 불턱이 거의 사라지고 현대식 탈의장이 해녀들의 휴식장소.
얇은 무명 천 하나로 몸을 감싼., 잠녀
깊은 물속에 들어 가는 것은 어려운 일.
잠녀들이 물 속에 오래 깊이 가라 앉기 위해서는
물의 저항을 줄이려 천조각 하나도 생략해야 했다.
그러므로., 겨울 바다에서도 속곳 하나 만 입어야 했다.
물 속에서 나오면 몸이 퍼렇게 얼었고,
모두 떨며 불가로 모여 몸을 쬐야만 했다.
" 예전에는 참 고생들 많이 했어.
겨울에도 맨 몸으로 물질 했으니..." - 제주 해녀 -.
제주해녀의 물질 기량이나 의지는 초인간적이다.
특별한 장비도 없이 바다 속으로 20m까지 들어가서
2분이나 견뎌내며 추운 겨울에도 각종 해산물을 캔다.
1960년대 미국 국무성에서 뉴욕주립대학
허만란 교수와 연세대학 홍석기 교수팀에게
한국과 일본 해녀를 비교 연구하도록 의뢰했다.
한국 해녀들의 탁월한 활동력의 원인을 찾아
심해공사 능률을 높이고 군사력 증강이 주목적.
해녀는 수련에 따라 기량이 달라 계층이 있다.
하군으로부터 중군, 상군, 대상군으로 올라간다.
해녀계층에 ‘군(軍)’자를 사용하는 것이 흥미롭다.
어린 소녀이면서도 기량이 뛰어나면 ‘애기상군’
해녀 사회에서는 ‘애기상군’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애기상군 제주해녀는 전설 속 선녀를 떠올리게 한다.
조선시대 제주도는 동아시아 해상 항로의 중간 거점.
풍랑을 만나 표류하는 외국 선박들이 많았던 고장이다.
이방인 표류인들은 제주 해녀의 보살핌을 많이 받았을듯.
남제주군 안덕면 사계리 .,하멜기념비.
화란인에 의해 최초로 씌어진 조선견문록.
하멜표류기는 서양인들에게는 지리 상 대발견.
출간 1년 뒤에 프랑스판, 독어판, 영어판 속속 출간.
1692년 향년 62세로 고국에서 세상을 떠난 하멜은 독신.
조선에 두고 온 아내를 잊지 못해 재혼을 하지 않았다 한다.
남제주군 안덕면 사계리.,하멜 기념비

하멜 기념비 뒷면
...'세종실록지리지' 151권 27장.,제주목.....
제주목은 전라도의 남쪽 바다 가운데 있다.
탐라 신인 세 사람이 땅으로부터 솟아 나왔다.
주산 북쪽 기슭에 모흥이라 하는
구멍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그곳이다.
15대손 3형제가 배를 만들어 타고 바다건너
탐진에 이르렀는데, 신라가 한창 번성할 때였다.
읍의 이름을 탐라라고 하니 신라 때 처음으로.,탐진.…
백제 476년(문주왕 2) 탐라국 사자에게 은솔 벼슬을 하사.
498년(동성왕 20)에 탐라에서 공부를 바치지 않는다 하여
왕이 친히 무진주(현:광주)에 이르자 탐라에서 죄를 빌어 중지.
고려 1105년(숙종 10) 탁라를 고쳐 탐라군, 의종 때 현령관
1270년(원종 11) 김통정이 삼별초를 거느리고 탐라에 들어가
난을 일으켰는데, 4년후 계유년에 시중 김방경이 토벌하여 평정.
1277년(충렬왕 3) 정축에 원나라 조정에서 목마장으로 삼았는데
1295년(충렬왕 21), 왕이 원나라에 들어가 탐라를 돌려주기를 요청.
원나라 승상 '완택'이 성지를 받아 이듬해 탐라를 고쳐 제주로 하였다.
..............................................................................................
덧 말.
제주도는 탐라국의 장구한 역사를 품고 있는 곳.
그러나, 밝혀지지 않은.,역대 왕의 행적 및 궁궐터.
최근 탐라국 왕궁터로 추정되는 서귀포시 강정동 유물.
2천년 전 무문토기에서부터 고려시대 기와, 도자기 파편들.
법화사지 버금가는 초석들은 화려한 기와 건물이 있었던 흔적.
서귀포시 하원동에는 왕자묘라고 알려져있는 3기의 무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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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탐라국) 법화사지...........................
통일신라시대, 해신 장보고(?~846)는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
해적을 소탕했으며, 제주 법화사를 비롯하여 중국 적산법화원,
완도 법화사 등 활동 근거지에 사찰을 건립하여 무사항해를 기원.
........................................................................................
현재, 탐라국 궁궐터로 추정되는 곳에서부터
법화사는 4km, 왕자 무덤 3기는 약 5km 거리.
서홍동 대궐터와는 약 5km 정도 쯤 떨어져 있다.
그외 ‘왕자골’ 과 그 속의 또 다른 ‘왕자묘’ 등
모두 반경 1km 내에서 발견되는 탐라국 유적지.
.
이 반경 일대에는 왕이 살던 궁궐, 귀족이 살던 궐터,
영곡 선생의 별서, 탐라국의 대찰인 법화사, 왕자묘 등
탐라국 역대 왕들은 제사장으로서의 역할도 한듯 보인다.
.
‘한라산 남쪽 큰 연못(바다)에서 상서로운 용이 태어났는데
머리는 뱀과 같고 몸은 거북과 비슷하다. 길조로움에 탐라왕이
백록을 바쳤다는 내용이다.’- 탐라국왕의 행적을 알 수 있는 대목-.
.
조선시대 '원대정군지.'
.
‘漢拏山南有大池中
有瑞龍生三卵二卵
爲龍一卵爲吉非其
形龜身蛇頭化爲三角
白鹿獻壽於耽羅王’.
.
.........당회요(唐會要) 권 100 .,탐라국(耽羅國) 기록.
“탐라는 신라의 무주 바다 위에 있다. 섬에는 산이 있고,
주위는 모두 바다에 접하여 북쪽 백제와는 5일 뱃길 거리.
왕의 성은 유리이고, 이름은 도라인데,
성황은 없고, 다섯 마을로 나뉘어 있다.
집은 동굴에 돌담을 둘러서 풀로 덮혔다.
8천호가 살며 활, 칼, 방패, 창이 있으나
적과 싸울 무기는 없고, 오직 귀신을 섬긴다.
백제 지배 아래 있었고,
용삭 원년(661년) 8월에
탐라국의 조공 사신들이
당(唐)나라에 이르렀다.”
백제 멸망후 신라 문무왕 2년에 탐라 왕이 신라에 항복.
그후 독립국이던 탐라국이 신라의 속국이 되었다고 한다.
탐라국 신화에 따르면, 제주의 역사는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3신인이 삼성혈(三姓穴)의 모흥혈(毛興穴) 3 구멍에서 솟아났다.
'가야, 신라, 부여'의 시조(始祖)가 알에서 태어난 것과 차이가 있다.
시조가 한 사람이 아니고,
'3신인'이라는 점도 다르다.
....................
.....................
<삼국사기> ‘백제 본기’ 중 서기 476년 4월.,기록.
“탐라국이 특산물을 바쳤으므로 임금이 기뻐하며
그 사자에게 ‘은솔(恩率)‘이라는 벼슬을 내려주었다.
삼국지, 위지, 후한서, 동이전 등 고문서(古文書)
제주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주호족‘이라 실려있다.
'육조 시대' 범엽이 지은 <후한서>에 실려 있는.,내용.
'마한 서해 큰 섬에
주호족은 몸집이 작고
언어는 한족과 같지 않으며
머리를 짧게 깎아 선비족과 비슷.
가죽옷을 입는데, 윗도리만 걸치고 아랫도리는 입지 않고,
소와 돼지를 잘 기르며, 배를 타고 한나라와 왕래하며 교역.'
...................................
....................................
.
조선시대 의병장 '고종후'가 의병을 모집.
세 성씨가 모두 같은 후손 임을 언급한 글이
유성룡이 지은 <난중잡록>에 실려 전해온다.
'주호족은 도서족 계통,
즉, 일본의 원주민이이었던
고루보그족 또는 아이누족 등.
그들은 일본 열도 전역에서 살았던 종족으로
체구는 작고 옷은 상의 만 입고 하의는 입지 않고
사냥, 고기잡이를 주업(主業)으로 삼았던 종족이다.
그들은 1세기쯤 한라산 화산폭발로 멸망하였다.
그후, 그들의 15대 후손.,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삼성혈 삼신인으로 등장하며 다시 시작된.,탐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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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국의 장구한 역사와 궁궐, 유적 등은
조선시대 거의 대부분 멸실된 것은 아닐까?'
강정동 4263번지 전(田)은 옛부터 '옥다루.'
이곳은 '가래현 감옥소.' 옛터로도 보여진다.
이 지방에서 나오지 않는 대리석 조각과
기와조각 등이 오늘날까지 발견되고 있다.
강정동 4264번지 전(田)은 옛부터 대궐터라는 곳.
이곳 궁궐 주춧돌 유편으로 보아지는 대리석 조각과
기와조각은 옛 가래현 현청사(縣廳舍) 옛터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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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7 연합뉴스
제주시 용담동 연립주택 신축 예정지에서
발굴된 탐라국시대 유적이 사적 지정될 전망.
제주시 용담2동 2696-2 일대 2필지 2258㎡
'BC 200 ~ 200년' 400년 동안 탐라국중심부.
해안으로부터 1.5㎞ 떨어진 용담동 유물산포지.

탐라국시대 수혈주거지 29기,
원두막 형식의 굴립주 건물지 2동,
부엌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불다짐소성유구 3기, 우물지 4개소,
수혈유구 56기와 다량의 토기 등.
우물.
마제석부, 홈돌, 갈돌, 갈판, 몸돌 등의 석기류,
방추차와 고배형 토기 등 토제품, 철제삼각만입촉 등
철제품, 장신구 관옥 등 학술적 가치가 높은.,출토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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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제주시 건입동은 제주도의 관문이었다.
수많은 물자가 오갔고, 그것을 중계하는 객주들이 들어섰다.
기녀 출신 김만덕의 객주도 그중 하나였다. 제주도에 큰 기근이 들었을 때,
그녀는 전 재산을 털어 쌀 500석을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기녀에서 거상으로,
다시 자선사업가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김만덕을 기리는 기념관이 2015년에 개관하였다.
김만덕기념관은 그녀의 업적을 알리는 거에 그치지 않고,
김만덕의 정신을 이어받을 수 있는 다양한 실천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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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항 인근.,김만덕 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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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항공 승무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