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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조선시대 - 1488년 최부(1454~1504) 표류기

작성자선경나라|작성시간17.10.29|조회수1,577 목록 댓글 0

[중국에 표류한 조선 선비] 최부


4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에서

굴레와 같은 글자가 하나 있다.

황천과 조난을 상징하는 '표(漂)'


뜰 漂

흐를 流

기록할 記


표류한

경험담을

적은., 기록.


조선시대에 만 40여 차례

표류기(漂流記)가 전한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최부'의 중국 표류기는

망망대해 표류기는 물론이고

중국 대륙 곳곳에서 표류 기록이

전 세계적으로 관심사를 끌고 있다.


그를 "동방의

'마르코 폴로'"

라고.,부를 만큼.


.....................

.....................


오늘날까지 늘 순탄치 만은 않은 뱃길.

폭풍우를 만나 난파 위기에 처하기도 하고

간신히 살아 애초 생각도 않았던 곳으로 여행.


견디기 힘든 시련을 겪는 일도 다반사.

 

하지만, 이런 위기는 새로운 문물을 접하고

또 전파 계기가 되기도 했는데 이런 일련의

과정을 엿볼 수 있는 것이 '표해록' 표류기들.


조선시대 승정원 기록 기사로는

세조 2년(1456) 유구국에서 표류한

나주 출신 양성(梁成) 등의 표류, 성종 8년

(1477) 유구국에 표류되었다가 2년 3개월만에

제주에 돌아온 김비의 일행의 표류,


김종직(金宗直)이 작성한 성종 14년(1483)

중국 양주에 표류한 정의현감 이섬 일행 표류 등.

예조에서 기록한 것으로 연산군 5년(1499) 내섬시

소속 제주 거주 노비 정회이의 일본 표류기가 있다.


중종 29년(1534) 중국 회안부에 표류했던

김기손(金紀孫) 일행 표류기 등이 확인된다.


성종 18년(1487) 제주추쇄경차관으로 부임했다가

이듬해 부친상을 당해 돌아가던 중 중국에 표류했던

최부 표해록이나 중종 37년(1542) 유구국에 표류했다가

2년간 머문뒤 중국을 통해 귀환한 박손 일행의.,'유구풍토기'


제주 역관을 지낸 이제담(李齊聃)이 기록한

숙종 13년(1687) 고상영(高商英) 등이 안남국에

표류해 이듬해 12월 대정현으로 귀환한.,'표류견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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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해양문학의 백미로 알려진

것이 다름 아닌 장한철의 표해록.

조선조 영조 46년(1770) 애월 사람.

 

장한철(張漢喆)은 과거를 보아

벼슬길에 오른다는 큰 뜻을 품고

일행 26명과 함께 제주항을 떠나

한양으로 가다가 육지를 바라보는

지점에서 폭풍우를 만나 서북풍에

밀려 망망대해를 떠돌게 된다.


그의 일행은 마침내 유구열도(琉球列島) 중의

하나인 호산도(虎山島)에 표착하고, 여러 가지

봉변을 당하다가 결국 8명만 살아 귀환한다.


장한철 '표해록'에는

당시의 해로와 해류(海流),

계절풍 등에 관한 해양 정보가

정리돼 있어 해양지리서로서

문헌적 가치가 높다.


특히 제주도의

삼성(三姓) 신화와

관련한 이야기,


백록담과 설문대 할망의 전설,

유구 태자에 관한 전설 등 당시

제주의 전설이 풍부하게 기록되어

있는 설화집으로서의 가치도가 높다.


표류자의 심리를 상세하게 써놓은 것은 물론이고

습하고 정적인 해상(海上)에서의 생활 속에서 깊어진

 문학성 감수성 역시 충분히 녹여냈다.


무엇보다 극적인 해양 표류체험을 사실적으로 기술.

'체험 문학화'와 '해양문학'이란 결과물을 탄생시켰다.

표해록은 2008년 12월 제주도유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


현재 국립제주박물관에 보관.

표해록상징조형물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 김종호 전 애월문학회 회장)

주도로 지난해 애월 한담에

장한철 선생 표해록

기적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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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제주국립박물관이 일반에 공개한

양우종(梁佑宗·1863~1917)의 '표해일기'는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어 눈길을 끌었다.


조선시대 육군 절충부 절충장군 양우종은

1893년(고종 30년) 12월 17일 조천포를 출발.

한양으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일본 오키나와

지역에 표류했다가 이듬해 3월 10일 돌아오기

까지의 과정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했다.


장한철의 것만큼은 아니지만

표류 중 바닷물을 솥에 끓여

먹을 물을 마련했던 에피소드.


오키나와에서 돌아오는 길에

들렀던 섬들에 대한 상세한 내용 등

당시 해양 루트를 알수 있는 자료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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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같이 조선시대에 중국과 유구, 일본에

표류한 경우는 기록에 있는 것만도 40차례.


바람과 파도에 휩쓸린 사연은 같지만

경로 따라 부르는 명칭에 차이가 있다.


표류인(漂流人)은 제주 사람이 항해 중에

바람을 잘못 만나 중국, 일본, 유구 등지로

떠밀려 갔다가 다시 돌아온 사람을 지칭한다.


표도인(漂到人)은 외국 사람들이

제주로 떠밀려온 경우로 대부분 중국,

일본과 유구국 사람들로 이들이 제주 땅을

밟은 것만 20여 회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

.................


서양 사람들도 근해를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나 떠내려온 경우가 있다.

인조 5년(1627) 9월 얀 얀세 웰테부리

(Jan Janse Weltevree)가 제주에 상륙.


오우벨 켈크(Ouwer Kerck)호를 타고

일본으로 가다가 물을 구하려 선원 2명과

함께 보트로 상륙했다가 관헌에게 붙잡혔다.


이후 웰테부리는 나중 한국명

박연(朴淵)으로 고치고, 조선이

서양과의 교류에 도움을 줬다.


네덜란드 하멜(Hendrik Hamel)이 탄

스페르웨르(Sperwer)호가 태풍으로

대정현 해안에서 좌초한 일도 있었다.


하멜 일행은 1653년 8월 16일부터

1656년 3월까지 약 1년 9개월동안

제주에 머물렀다.「하멜표류기」는

이들이 한양압송 뒤 전라도 병영 등에

분산수용됐다가 일본으로 탈출,

귀국한 뒤 작성됐다.


제주에서 '표류'는 신화와 전설 등

인문환경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제주 최초 왕국인 탐라의 개국신화에서

벽랑국 삼공주는 목함을 타고 표류를 해온다.


제주도 무속 신앙 속 신들 중에도

표류를 통해 발 내린 사연이 적잖다.

바다밭을 관리하는 영등신은 해마다

먼 바다로부터 제주를 찾는 바람의 신.


전설에 의하면, 영등은 옛날 제주 어부들이

풍랑을 만나 외눈박이 거인이 있는 섬에

표류해 가자 바람을 일으켜 구해줬다가

대신 목숨을 잃은 인물이다.


조각난 시신이 파도에 실려

제주에 표류해오자 어부들이

이를 수습해 굿을 해줬다고 한다.


송당의 금백조 여신이나

내왓당의 천자또마누라,

한수리의 영등당,

우도 영등할망당 등은

바다를 건너온 신들이다.


칠성본풀이,

토산당본풀이,

차귀당본풀이

등은 뱀 신앙이

제주 토착 신앙이 아니라

바다를 건너 온 것임을 시사.


바다 저 너머에 있다는 이상향 이어도나

김복수라는 사람이 지금의 베트남인 안남에

표착후 돌아온 이야기.,민요 '오돌또기'도 있다.


바닷길인 해류를 타고

오가는 동안 삶의 이야기는

끊임없이 진화했고 신화가 됐다.

제주의 관점에서 봤을 때

표해록은 하나의 도전기다.

배에 의지해 바다를 개척했고

그 과정에서 겪은 고난 결과물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표해록이다.

단순한 기록 이상 가치도 충분하다.


동방의 마르코폴로, 최부의 표해록 알아보다



....................최부(崔溥).........................

1454(단종 2)∼1504(연산군 10). 조선 전기 문신.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 홍문관교리

대표작 : 금남표해록 3권


나주 출신.

본관 탐진(耽津).

자는 연연(淵淵),

호는 금남(錦南).

 

아버지는 진사 최택(崔澤)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78년(성종 9) 성균관에 들어가 신종호(申從濩)와 문명을 떨쳤고,

김굉필(金宏弼) 등 동학들과 정분을 두터이 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482년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곧 교서관저작·박사, 군자감주부 등 역임.

1485년서거정(徐居正) 등과 『동국통감』 편찬에 참여,

그 속의 논(論) 120편의 집필을 담당했는데,

그 논지가 명백하고 정확하다 하여 칭찬을 받았다.


그 이듬해에는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을

완성하는 단계에서 참여하였다.


이 해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했으며,

이어 홍문관교리로 임명되고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일으키기 위하여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하였다.


1487년제주 등 3읍의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임명되어 제주로 건너갔는데, 거기에서 다음 해 초에

부친상 기별을 받고 고향으로 오던 중 풍랑을 만났다.


이에 43인이 탄 배는 14일 동안 동지나해를 표류하다가

해적선을 만나 물건을 빼앗기는 등 곤욕을 치르고 결국

명나라 태주부 임해현(台州府臨海縣)에 도착하였다.


처음 왜구로 오인되어 몰살당할 뻔했으나

어둠을 이용, 빠져나와 조선 관원이라는 것을

간신히 승복시켜 일행은 북경으로 보내졌다가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상신(喪身)으로서 그동안 

어떠한 경우에도 상복을 벗을 수 없다고 고집해

그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유가의 예와

윤리의 원칙에 대한 타협을 거부하였다.


그가 귀국하자 성종은 8,000리 길을 거쳐온

중국의 견문을 기술하여 바치도록 명하였다.

이에 그는 남대문 밖에서 8일간 머무르며 기술.


이것이 『금남표해록(錦南漂海錄)』 3권.

그리고 곧 고향으로 달려가 여막을 지키다가

또 다시 모친상을 당하여 다시 삼년상을 지냈다.


1491년 지평에 임명되었는데

사헌부에서 서경(署經)을 거부.

1년 후에야 홍문관교리로서

경연관(經筵官)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말썽이 많아 결국

승문원교리로서 낙착되고 말았다.


말썽의 골자는 친상을 당한 그가 중국에서

돌아오는 길로 곧장 고향으로 달려가야 할 것인데도,

아무리 군명(君命)이라 할지라도 한가하게 기행문이나 쓰고

있었던 것은 도리에 어긋나기 때문에 관직을 맡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로

찬성과 반대가 들끓었는데,

성종의 두호에도 불구하고 

그의 임명은 관철되지 못하였다.

이것은 사헌부·사간원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행정부 및 홍문관의 세력과 대립한 데에서 빚어진 바 컸다.


그 뒤 그는 연산군 때 일찍이 중국에서 배워온

수차(水車) 제도를 관개(灌漑)에 응용하는 시도도 했고,

또 질정관(質正官)으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연산군의 잘못을 극간(極諫)하고

공경대신들을 통렬히 비판하다가 무오사화 때

화를 입어 함경도 단천으로 귀양갔으며 여기서

6년을 지내다 갑자사화 때 처형되었다.


그의 표류기는

우리나라에서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널리 읽혀졌다.


도쿠가와시대(德川時代)에

여러 가지 판본과 사본이 통용,

일본어 번역본까지 나왔는데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

이름으로 1769년(영조 45)에 간행.

시호는 충열(忠烈)이다.

................................


조선 선비 최부(崔溥, 1454~1504)

표해록으로 본.,중국 강남 견문


바람 따라 물결 따라

표류한 조선 선비      



목차


뜻하지 않은 표류, 무엇을 어찌해야 하나                       

풍랑, 원망과 갈등, 해적과 싸운 14일간의 표류                       

대운하를 거슬러 오르며 강남(江南)을 체험하다                        

최부가 피부로 느낀 ‘홍치신정(弘治新政)’                       

필담으로 나눈 정(情), 중국 관리들과의 교유                        

수차 제작법을 알아내다.                    

충과 효 사이에서의 갈등


절강성(浙江省)의 조용하고 아름다운 도시 영파(닝보)

절강성(浙江省)의 조용하고 아름다운 도시 영파(닝보)

냉동 아이스 시아시 도루묵

썰렁해서.....(1).


500년 전인 1487년(성종 18) 11월,

나주 출신의 선비 최부(1454~1504)는

'제주삼읍추쇄경차관'으로 파견되었다.


최부는 11월 11일 아침, 해남현 관두량(館頭梁)에서

배를 타 12일 저녁에 제주도 조천관(朝天館)에 도착했다.


최부가 제주도로 출장 온 지 두 달 반이 지난

1488년 1월 30일에, 고향 나주에서 상복을 가지고 온

종 막쇠에게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제주목사 허희(許熙)는 수정사(水精寺) 승려

지자(智慈)의 배가 관선(官船)보다 튼튼하고

빠르다며 배를 구해 별도포(別刀浦)에 대주었다.


허희는 최부에게 튼튼한 배를 구해주어

살아 돌아올 수 있게 한 공으로 훗날 성종에게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 성종 19년 7월 6일 정묘 -


최부는 윤1월 3일에 장례를 치르고자

고향 나주를 향해 제주도 별도포의

조천관에서 배를 타고 출발했다.


5리쯤 가서 영선(領船) 권산(權山)과

총패(總牌) 허상리(許尙理)가 바람이

고르지 못하니 별도포로 돌아가서

순풍을 기다렸다가 다시 떠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진무(鎭撫) 안의(安義)는

왕명을 받든 조신(朝臣)은 배가 표류되거나

침몰된 적이 드무니 다시 돌아가 시일을

끌 수 없다고 반대했다.


수덕도(愁德島)를 지나 배를 정박시킬

추자도(楸子島)를 향해 힘껏 노를 저었지만,

오히려 배가 뒤로 흘러 간신히 초란도(草蘭島)에

닻을 내리고 임시로 정박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한밤중에 배가 조금씩 바다 쪽으로

밀려나는 것을 느끼고 닻을 올려보니

닻줄은 이미 끊겨 있었다.


표류한 지 이틀째,

배는 비바람과 파도에 따라

기울어졌다 떠올랐다 하면서

서서히 서해로 밀려들어갔다.


동북쪽으로 까마득히 먼 곳에

흑산도가 탄환만 한 크기로 보였다.

최부는 안의를 시켜 취로(取露)하는 일과

배를 수리하는 일 등을 독려하도록 했지만

모두 절망감에 휩싸였다. 그들은 최부를 원망하면서

애를 쓰더라도 어차피 죽기는 마찬가지라고

떠들어대며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최부는 이들의 행동에 분개하다가

마침내 배에 같이 탄 사람들을 조사해보았다.

최부가 제주도로 출장 올 때 전라감사가 딸려

보내준 광주목의 아전 정보(程保) 등 수행원 6명과

안의 이하 항해와 관련된 제주 사람이 35명, 부친상을

알리러 온 종 막쇠와 최부 자신을 합치면 모두 43명이었다.


최부는 부친상을 당한 자신이 자식된 도리로써

오래 지체할 수 없어 길을 재촉한 점에 대해

먼저 모두에게 이해해줄 것을 청했다.


그러고는 살고 싶고 죽기 싫은 것은 모두가 똑같으며

배가 단단하여 쉽게 부서지지 않겠으니, 바람이 가라앉고

파도가 잠잠해진다면 비록 표류하여 다른 나라에

이르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독려했다.


표류라는

극한 상황에 맞닥뜨린

이들은 천태만상을 보였다.


어쩔 줄 모르고 배 안에 드러누운 이,

성내며 소리 지르는 이, 쉬지 않고 배에

들어오는 물을 퍼내는 이, 어지러워하며

쓰러져 죽기만 기다리는 이, 목을 매어 숨을

끊으려 하는 이 등 저마다의 본성을 숨기지 못했다.


표류한 지

사흘째가 되자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안개와 성난 파도가

산더미 같이 일었다.

 

마침내 막쇠와 권송이 형세가 급박하여 희망이 없으니

최부에게 의복을 갈아입고 죽음을 맞도록 권하였다.

이에 최부는 인장과 마패를 품에 넣고

상관(喪冠)과 상복을 갖추고는 벌벌 떨며

손을 비비면서 하늘에 빌었다.


최부의 절절한 축원이 끝나자

배 안은 온통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했고

모두 손을 모아 하늘의 도움을 구했다.


나흘째 되던 윤1월 6일에는

큰 파도 사이로 긴 행랑채만한

고래가 나타나 한동안 숨을 죽여야 했다.


표류 7일째에

풍랑이 잦아들자

이제는 굶주림과 목마름이

일행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식수를 싣고 본선을 따라오던 거룻배

(돛이 없는 작은 배)는 풍랑에 표류된

뒤로 놓쳐버렸고, 뱃사람들이 성난

용신(龍神)에게 바치고자 의복과 군기,

구량(口糧) 등을 바다에 던져버려

 마실 물과 밥이 없었다.


최부는 배에 남아 있던 황감(黃柑) 50여 개와

청주 두 동이를 손효자(孫孝子)에게 맡게 하여

극도로 입이 마른 사람에게만

조금씩 나누어 마시게 했다.


황감과 술이 모두 없어지니

어떤 사람은 마른 쌀을 잘게 쪼개 씹고

제 오줌을 받아 마셨지만, 얼마 안 가

오줌마저 나오지 않고 가슴속이 건조해져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등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때마침 비가 내려 최부는

간수해둔 옷 몇 벌을 찾아내어

최거이산(崔巨伊山)에게 비에 적신 뒤

이를 짜게 하니 몇 병이 되었다.


이 빗물을 숟가락으로 나누어 마시게 하여

가까스로 혀를 움직이고 숨을 쉴 수가 있었다.


표류 10일째에

큰 섬에 이르렀는데,

두 척의 배가 다가왔다.


최부는 중국말로

떠들어대는 사람들에게

종이에 글을 써 조선 사람임을 밝히고,

이곳이 절강성(浙江省) 영파부(寧波府)

관할의 하산(下山)이라는 섬임을 알게 되었다.


해적들은 칼로 최부의 옷고름을 끊고

옷을 벗겨 알몸으로 만든 뒤 결박하여 몽둥이로

때리며 금은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해적 두목은 최부의 머리채를 끌어당겨

거꾸로 매달고 최부의 목을 베려고 했다.


그러나 해적은 배 안에 금은이 없음을 확인하고

의류와 식량을 뺏은 다음 닻과 노 등을 끊어 바다에

던지고 큰 바다 가운데로 끌어다놓고 도망쳤다.

망망대해에서

다시 표류하기 시작해

나흘째 되던 날인 윤정월 16일에

동풍을 타고 산 위에 봉수대(烽燧臺)가

늘어서 있는 해안으로 밀려갔다.


어항(漁港)에선

6척의 배가 정박하고 있다가

최부의 배를 발견하고 이내 곧 둘러쌌다.


최부는 필담을 통하여

이곳이 절강성 태주부(台州府)

임해현(臨海縣) 우두산(牛頭山)

앞바다인 것을 알았다.


여섯 척의 배가 둘러싼 가운데

배 안에서 하룻밤을 지새운 다음 날 아침인

윤1월 17일, 최부 일행은 빗속을 뚫고

배를 버려둔 채 숲속으로 도망쳤다.


이로써 표류한 지 15일째에 중국 땅에 발을 내딛게 되었다.

최부는 일행을 모아놓고, 생사의 괴로움을 함께하여

골육과 다름없으니 이제부터 서로 보호하여

한 사람의 목숨도 잃어서는 안 되며,

앞으로 예의바르게 행동하여 단결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하자고 훈시했고,

일행은 분부대로 하겠다고 약속했다.


육지를 따라 6~7리를 가니 마을이 나왔는데,

그곳 사람들은 최부 일행을 해적으로 의심하여

마을에 머무르지 못하게 몽둥이와 칼을 들고

징과 북을 치면서 교대하며 호송했다.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이틀 밤낮을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내몰리면서 19일에

해문위(海門衛) 도저소(桃渚所)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최부 일행은 처음 배를 댄 곳이

사자채(獅子寨)의 관할지이며, 수채관(守寨官)이

최부 일행을 무고하여 왜선 14척으로 변경을 침범하여

약탈한 것으로 몰아 목을 베어 바침으로써 공을 세우려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국의 변경은 잦은 왜적의 침탈을

막기 위해 비왜도지휘(備倭都指揮)와 비왜파총관(備倭把摠官)을

두어 방비했으며, 만약 왜적을 잡는다면 모두 먼저

목을 베고 나중에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군사를 거느린 수채관이

최부를 잡아 목을 베려던 참에 최부 일행이

먼저 배를 버리고 사람이 많은 마을로 들어갔기 때문에

그들이 계략을 펴지 못했던 것이다. 만일 이때 최부 일행이

몰래 상륙하지 않았더라면 모두 몰살당했을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예나 지금이나 여행은 누가 언제 어디로

여행하느냐에 따라 느끼는 바가 달라진다.


특히

어떠한 여건과 상황에서

여행하고 있는가에 따라

그 맛과 색이 좌우된다.


15세기에

조선의 공식적인

국가 외교사절단인

연행사행이나

통신사행이 아니라면,

이국의 새로운 문물을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목숨을 담보로 한 표류였을 것이다.


표류한 이들은

자신들이 원했던 바는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세계여행을 떠난 셈이었다.


그렇다면 중국에 표착한 표류민으로서

서른다섯 살의 조선 선비 최부는

무엇을 느끼고 깨달았을까?


최부 일행은

윤1월 19일부터 22일까지

도저소에 머물러 심문을 받고 나서

비로소 왜구의 혐의를 벗었고,

이후 건도소(健跳所)와 영파(寧波)·

소흥(紹興)을 거쳐 절강성의 성도(省都)인

항주(杭州)로 이송되었다.


소흥에서 장강에 이르기까지

최부가 지나온 항주·소주·상주 일대는

중국에서 이른바 ‘강남’으로 불리는 지역이다.


경제와 문화가 가장 발달한 지역으로서

그곳의 우월한 지위는 최부가 이곳을 지나갔던

15세기 명대는 물론 19세기의 청대 말기까지 이어진다.


우리 속담에 “친구 따라 강남 간다”나,

“강남 갔던 제비”에서의 ‘강남’은

바로 이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항주에 수도를 두고 있던 남송시대만 하더라도

고려와 바다를 통한 교류가 빈번하게 이루어졌지만,

13세기 몽고족이 중국을 정복하여 원(元, 1271~1367)이

수도를 북경에 두자 사정은 달라졌다.


그 뒤 명(明, 1368~1662)이 남경(南京)을 도읍으로 삼았다가

1421년에 영락제(永樂帝)가 북경으로 천도하기까지의 50여 년이

조선에서 봉명사행(奉命使行)으로 강남을 기행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특히 명청시대에는

조공무역을 제외한

자유무역이 허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 사람들은

육로로 요동을 경유하여 북경만을

왕래했을 뿐, 황해를 통해

강남과 교류할 수는 없었다.


15세기 이후

실제로 강남을 둘러본

조선인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중국 강남은

조선 선비에게는

동경과 미지의 땅이었다.


조선 선비의 강남에 대한 동경은

‘강남열(江南熱)’과 ‘서호도(西湖圖)’로

표출되었고, 현실적으로 표류가 아니고서는

갈 수 없는 땅이었다.


그런 강남을 최부는

뜻하지 않은 표류로 인해 제대로

견문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항주에서 북경까지

최부 일행을 호송하는

사람들은 11~12명쯤 되었고,

구간마다 현지의 호송인들이

별도로 배치되어 있었다.


호송 책임자인 지휘 양왕은 문맹이었기에,

최부는 부책임자인 천호(千戶) 부영(傅榮)과

필담으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패현(沛縣)에 이르자 부영은 최부에게

“족하는 우리 대국의 제도를 보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부영의 이 질문에는 대운하에 대한 자긍심이 묻어 있었다.

대운하는 강남에서 북도(北都)에 이르기까지 한 줄기 맥락으로서

만 리를 수로를 통해 배가 다니는 데 안전을 보장하니

백성들이 그 편리함을 누리고 있었다.


최부는 부영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면서 말하기를,

“이 강의 수로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들은

기구한 만릿길에 온갖 고통을 겪었을 것인데,

지금 배 가운데 편안히 누워서 먼 길을 오면서도

전복될 근심이 없으니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라고 하였다.


최부는

대운하를 기록할 때

주(州)와 부(府)에 흐르는

강물의 방향과 합류 지점,

나아가 물 흐르는

기세까지 묘사했다.


중국의 수로에는

홍선[紅船, 홍유(紅油)로 칠한 배]이 있고

육로에는 포마(鋪馬, 마역(馬驛)에 갖춰놓은 말)가 있다.


왕래하는

사자(使者)·공헌(貢獻)·

상고(商賈)들은 모두

수로를 이용했다.


만약 가뭄으로 인해

갑하(閘河)의 물이 얕아져

배가 통행할 수 없거나

빨리 달려가서 급히 보고할

일이 있으면 육로를 이용했다.


최부는 15세기의

강남을 세밀하게

관찰했다.


특히

장강 이남을

이북과 대비시켜

자세히 기록함으로써

강남사회의 특수성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최부의 관찰 범위는

물산·산업·화폐·주택·음식·

복식·풍속·산천·교통·무기 등

중국 문화 전반에 두루 미쳤다.


강남 사람들은

글 읽기를 즐겨하여

비록 마을의 어린아이나

진부(津夫, 관에 속한 나룻배의 사공)와

수부(水夫, 뱃사람)일지라도

모두 문자를 알고 있었습니다.


신이 그 지방에 이르러

 글자를 써서 물어보면

산천·고적·토지·연혁에도

모두 환해서 상세히

알려주었습니다.


강북은 배우지 못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신이 물으려고 하면 모두 ‘나는 글자를 모른다’고

하였으니 곧 무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강남 사람들은

지소(池沼, 못과 늪)와

하천의 일로 직업을 삼으므로

거룻배에 종다래끼를 싣고 그물과 통발로

물고기를 잡는 사람들이 떼를 지었는데,

강북에서는 제령부(濟寧府)의 남왕호(南旺湖) 등지

외에는 물고기를 잡는 도구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또 강남의 부녀들은

모두 문밖을 나오지 않고

주루(朱樓)에 올라 주렴(珠簾)을 걷고

밖을 바라볼 뿐이며 길을 다니거나

밖에서 일하는 자가 없었는데,


강북은

밭 매는 일이나

노 젓는 일들을

모두 부녀자들이

직접 하였습니다.


서주와

임청 같은

지방의 부녀들은

화려하게 단장을 하고

몸을 팔아 생활을 하는

풍조가 있었습니다.


명조(明朝)의

제8대 황제로

홍치제(弘治帝)라 불리는

효종(孝宗)이

1487년 8월에

제위에 올랐다.


효종은 즉위하자마자

부황(父皇) 헌종(憲宗)의

재위 시절에 만연했던 폐정(弊政)을

혁파하기 위한 조처를 단행했다.


이 시기를 명사(明史)에서

‘홍치중흥(弘治中興)’ 또는

‘홍치신정(弘治新政)’이라고

 말한다.


최부는 1487년 9월 17일에

제주삼읍추쇄경차관의 임무를

받고 대궐에 하직했다. 그리고

11월 12일 제주도에 도착하여

업무를 수행하다가 1488년

윤 정월 3일에 표류했다.


아마도

최부는

효종의 즉위

사실 정도만

알고 있는 상태에서

표류하게 되었을 것이다.


윤1월 22일에

도저소로 끌려간

최부 일행은 파총관

유택(劉澤)의 심문을 받았다.


최부가 사실대로 작성한 공술서를 읽은 파총관은

하산에서 해적을 만난 일과 선암에서 구타당한 일

등 몇 대목을 삭제하고 새로 쓰도록 요구하였다.


최부가

공술서를 고치라는

요구에 불만을 표하자,

파총관의 부하 설민(薛旻)은

몰래 글을 써 보이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지금 황제께서 새로 즉위해서 법령이 엄숙하니

만약 당신이 전일에 진술한 공술서를 보신다면

황제께서는 틀림없이 ‘도적이 횡행하고 있구나’

 여기시고 변장(邊將)에게 죄를 돌릴 터이니

작은 일이 아닙니다. 당신을 위해 헤아린다면

살아서 본국으로 돌아갈 것만을 염두에 두어야지

일을 만드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이 말을

들은 최부는

곧 붓을 들어

몇 곳을 빼고

다시 썼다.


2월 4일

소흥부(紹興府)에 도착하여

관부(官府)에서 조사를 받을 때에도

공술서에 어긋나는 점이 있으면 최부에게

죄가 되므로 앞서 쓴 말을 베껴 쓰되 한 글자도

가감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들은 최부가 앞으로 항주에 가거나

북경에 도착하면 병부와 예부에서 다시

최부의 사정을 물을 것이니 그때에도

동일한 진술을 할 것을 요구했다.


이 관리들이

가장 신경을

곤두세운 것은

파총관 유택이 올린 보고와

최부의 진술이 일치하는 것이었다.


최부가 항주의 무림역(武林驛)에

2월 6일에 도착하여 2월 12일까지

머물렀을 때, 이 역의 사무를 맡은

고벽(顧壁)이란 자가 일이 돌아가는

상황을 이것 저것 전해주었다.


최부는

이곳에서

언어가 달라

자신이 장님이나

귀머거리 같으니,

듣고 본 대로 즉시

얘기해줄 것을 부탁했다.


고벽은

국법이 매우 엄하고

율조(律條)가 굉장히 무거워,

이인(夷人)에게 사정을 누설하면

새 법령에는 군호(軍戶)로 충당하게

되어 있다고 했다. 따라서 자신이 말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서는 안 되니

최부 혼자만 알고 있기를 당부했다.


3월 25일

최부 일행이

천진위(天津衛)를 지나

하서역(河西驛)에

이르렀을 때였다.


호송의 부책임자인 부영(傅榮)은

표문(表文)을 가지고 4월 1일까지

북경에 도착해야만 했다.


그런 까닭에

최부 일행과 헤어져

하서역에서 역마를 타고

북경으로 출발했다.


그는 최부에게

나중에 병부 앞에서

만날 때 읍례(揖禮)를 하여

서로 아는 내색을 해서는

안 된다고 일러주었다.


새 천자의 법도가 엄숙하기 때문에 혹시라도

빌미가 될 행동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의 모습에서

이제 막 기강을

세우기 시작한

새 황제의 문책에서

벗어나고자

신경을 곤두세웠던

현지인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최부는 1485년에 『동국통감(東國通鑑)』과

1486년에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편찬에 참여했던 조선의 엘리트.


최부의 중국 역사와 인물 등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중국 관리들과의 대화에서 남김없이 드러났다.

그들은 조선에 대한 궁금증을 막힘없이 설명해주고,

자신들에게 사례하는 시를 지어주며 두 번 절하는

예의바른 최부에게 마음을 열고 교류했다.


윤1월 24일

건도소 성에 이르니

천호인 이앙(李昻)이 최부에게

빈주(賓主)의 예를 행하고

이들 일행에게

술과 고기로 환대하며

순박한 인심을 드러냈다.


다음 날

이앙은 최부를 전송하며

천년 만에 만리 밖에서

한 번 만났다가 곧 헤어지니

다시 보지 못할 것을 아쉬워하며

작별의 손을 놓지 못했다.


최부도 배 위에서 작별을 고할 때

기약하기 어려운 만남을 슬퍼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들은 한 번의 만남으로도

마음을 터놓고 처음 보고도

옛 벗과 같이 친밀한 사귐을

가졌던 것이다.


대개 조선은 땅은 비록 바다 밖에 있으나

의관과 문물은 모두 중국과 같으니

외국으로 볼 수 없습니다.


하물며 지금

명나라가 통일을 이루어

북방의 호(胡)와 남방의

월(越)도 일가가 되었으니,

한 하늘 아래에서

모두가 형제입니다.


어찌 지역의 거리로 안팎을 나누겠습니까?

하물며 또 우리나라는 천조(天朝)를 정성으로 섬겨

공물 바치는 일을 게을리 아니한 까닭에 천자께서

예절로써 대우하고 인애로써 어루만져주셨으니,

감싸고 안정시켜주신 덕화(德化)는 지극하였습니다.


또 저는 조선의 신하요,

장군은 천자의 지방을 맡은 신하인데

천자의 자소지심(字小之心)을 체현하여

먼 나라 사람을 대우하심이 이처럼 지극하시니

이 또한 충(忠)이 아니겠습니까?


항주의 무림역에서 만난 고벽은

보고 들은 바를 최부에게 숨김없이 알려주어

최부가 상황을 판단할 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고벽은

항주부에서

앞으로 가야 할

각 부(府)·현(縣)·역(驛)에

최부 일행의 호송을 통지하는

공문을 최부에게 보여줄 정도였다.


최부는

성심껏 대해주었던

고벽과 작별할 때 두터운

은정(恩情)의 표시로 입고 있던

옷을 벗어주려고 했다.


이에 일행 중 정보는

옷을 벗어 고벽에게 주면

남은 것은 입고 있는 옷 한 벌뿐이니

머나먼 만릿길에 옷이 해지면

누가 고쳐 만들겠느냐며

만류했다.


최부는 옛날 사람 가운데

옷 한 벌로 30년을 입은 이가 있고,

뱀과 물고기조차 받은 은혜에 감격하면

이를 갚으려 하는 법이라며 기어코 옷을 벗어주었다.


고벽은 손을 내저으며 물리쳤으나

최부는 한유(韓愈)가 승려 대전(大顚)과

교류한 뒤 헤어질 때 의복을 선물로 준

고사를 들어 권유하였다.


결국 고벽은

최부와의 두터운 은정을

막을까 두렵다며 옷을

품에 받아갔다.


이러한 최부의

마음씀과는 달리

그 반대의 예도 있었다.


항주에 머무를 때

북경 사람 이절(李節)의

벗인 어떤 이가 『소학(小學)』

한 부를 최부의 소매 속에 넣었다.


그는

이절을 통해

최부의 시(詩)를

청하고자 했던 것이다.


최부는

자신은 시를

잘 짓지도 못하고

글씨도 좋지 못하다며

두 번이나 거절했다.


그러자

이절이 최부에게

“도리로써 사귀고 예절로써 대접하면

공자께서도 받았사온데, 어찌 그리도

심하게 물리치시는 것인지요?” 하였다.


최부는

“그 사람은 책을 기꺼이

주려는 것이 아니고,

시를 얻는 데 뜻이 있었습니다.

이는 도리로써 사귐도 아니고

예절로써 대접함도 아니니,

내가 만약 책을 받는다면

시를 값을 받고 파는 셈이므로

물리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제야 이절은

최부의 깊은 마음과

절의를 이해했다.


수차(水車)란 무엇인가?

낮은 곳에 흐르고 있는 하천의 물을

높은 지대의 논밭으로 끌어올리는 관개용 기구이다.


중국에서는

이미 고대부터

수차를 개발해 사용해왔고

송대(宋代)에 이르러 널리 보급되었다.


중국의 강남이

화북지역을 능가하며

농업 중심지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수차와 풍부한

수자원을 활용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고려 말부터

수차의 제작과

보급에 관심을 가졌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중국의 수차 가운데

가장 널리 쓰였던 것은

‘번차(飜車)’이다.


번차는

두판(斗板)으로 불리는

직사각형 모양의

네모 널빤지를

체인으로 연결해

기다란 홈통 속에서

끌어올리는데,

거기에 물이

끌어올려진다.


번차는

사람들이

발로 밟아

돌리기 때문에

‘답차(踏車)’라고도

부른다.


최부는

소흥부를 지날 때

호수 언덕에서 발로 밟아

돌리는 수차를 눈여겨봐두었다.


조선은

논이 많은데

가뭄이 자주 드니

수차를 이용하면

힘을 덜 들이면서

물을 많이 퍼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최부는

번차를 목격한 지

한 달도 더 지난 후

창주부(滄州府) 정해현(靜海縣)에

이르러서야 호송 부책임자 부영에게

수차 만드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청하였다.


부영은

수차 제작법은

목공이 아는 것이지

자신은 알지 못한다며

사양했다.


최부는

가우(嘉祐)연간(1056~1063)에

제주도 사람이 돛대가 부러져 표류하다가

소주의 곤산현(崐山縣)에 이르렀던 고사를 꺼냈다.


지현사(知縣事) 한정언(韓正彦)은

그에게 술과 음식을 접대하였는데,

돛대가 배에 박혀 움직일 수 없음을 보고는

공인(工人)을 시켜 돛대를 수리하여

전축(轉軸)을 만든 다음 일으키고

넘어뜨리는 방법을

가르쳐주도록

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기뻐하면서

두 손을 맞잡고 감사해

마지않았습니다


최부는

이 고사에 비유하여

부영의 마음을 움직이려 했다.


자신도

그 사람과 똑같이

제주에서 표류해왔으니,

부영도 한정언의 마음씀처럼

수차 제작하는 법을 가르쳐준다면

두 손을 맞잡고 기뻐할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부영은

수차는 물을 푸는 데만 사용될 뿐이니

배울 것이 못 된다고 거듭 거절의 뜻을 나타냈다.


최부는 이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수차 제작에 대해

한 번 말하는 부영의 수고가

조선에는 무궁한 이익이

될 것이라고 치켜세웠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부영도 더는 물리치기

곤란했던 모양이다.


마지못해 하는 말이

“이 북방은 사토가 많고

논이 없기 때문에 수차가

소용없으니 수부(水夫)들이

어찌 그 제작법을 알겠습니까?”였다.


결국 그는 잠시

생각해보겠다고 하더니

수차의 형태와 운용 방법에 대해

대략 이야기해준다. 아마도 최부는

‘옳거니!’ 하며 궁금증이 이는 정보들을

캐기 시작했을 것이다.


틀은 위아래를 통하므로 삼나무를 쓰고,

장골(腸骨)은 느릅나무를 사용하고

판은 녹나무를 사용합니다.


그리고

수레의 중심은

대쪽을 사용하여 묶고,

앞뒤 네 기둥은 커야 하고,

가운데 기둥은 조금 작아야 하며,

그 수레바퀴와 중심의 판자는

길이와 너비를 같게 해야 합니다.

만약

삼나무, 느릅나무, 녹나무를

얻지 못하면 모름지기 나뭇결이 단단하고

질긴 것을 사용해야만 될 것입니다.


부영이 알려준 수차는

최부가 목격했던 발로 밟는 번차가 아니라

한 사람만으로도 운전할 수 있는 손으로 돌리는 ‘발차(拔車)’였다.


최부는 이에 개의치 않고 소나무로도 만들 수 있는지를 물었다.

부영은 결국 수차의 각 부분에 들어가는 목재와 크기를 설명해주었다.


조선의 농업 현실을 알고

중국의 수차 제작법을 알아내려는

최부의 지혜가 이러하였다.


이 제작법대로

최부가 수차를 만들었던

사실이 『성종실록』에 보인다.


최부는

중국에서 돌아와

부친상을 치르기 위해

6월 22일 나주로 떠났다.


성종은 이틀 후인 6월 24일에

전라도 관찰사 이집(李諿)에게

최부의 지휘 하에 솜씨 있는 목공을 시켜

수차를 만들어 올려 보내도록 하였다.


성종의 명이

있은지 40여 일 만에

최부가 수차를 만들어 바쳤다.


『성종실록』에서

1488년 8월 4일의 기사를 보면

부영이 알려준 바와 같은 목재로

수차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의 기록을 보면

최부가 제작한 수차가

성공적으로 보급되어

활용된 것은 아니지만,

중국에서 기록해온

수차 제작법을

조선에 도입하여

 활용하려고

애썼던 것만은

확실하다.


1488년

윤 정월 3일에

표류되어 반년 만인

6월 14일에 한양 청파역(靑坡驛)에

도착한 최부에게 성종은 일기를 엮어

바치도록 명했다. 또한 아무 탈 없이

생환한 최부를 부친상을 마친 후에

서용(敍用)하도록 하고 우선 쌀과 콩

및 부물(賻物)을 내려주었다.


성종의 명을 받은 최부는

8일 후인 6월 22일에

일기를 써 바쳤다.


이렇게 하여

최부의 『표해록』은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성종은 부의(賻儀)로 베(布) 50필을 내리고

부친상에 분상(奔喪)하도록 말을 주어 보냈다.

그러나 충과 효 사이에 선 최부의 선택과

그에 따른 갈등은 이미 움트고 있었다.


최부는 일기를 쓰는 동안

청파역에 여러 날을 머물면서

옛 친구들의 조문을 받았다. 그런데

이를 바라보는 조정 대신들의 생각은 달랐다.


최부가 만약 임금에게 사례(謝禮)하고

부친상을 마친 후에 일기를 바치겠다고

했다면 임금도 이를 따랐을 것이라는 것.


그러나,


최부는

초상(初喪)이기 때문에

조문을 받지 않았어야 하는데

조문을 받았으며, 중국에서의 견문을

이야기할 때 조금도 애통해하는 마음이

없었다고 주위 사람들은 비방했다.


1491년 12월에

성종은 탈상(脫喪)한 최부에게

사헌부 지평의 관직을 제수하였다.


그런데 임명을 받고 한 달이 지나도

사간원에서 서경(署經)을 하지 않았다.


‘서경’이란 최부를

사헌부 지평에 임명하는 데에

아무런 하자가 없다는 일종의 동의서이다.


성종이 사간원에 그 까닭을 물으니

최부가 귀환하여 바로 부친의 빈소로

돌아가야 했는데도 서울에 머물러 있으면서

애통해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성종은 최부가 상중에 있다 하더라도

군명(君命)을 어길 수 없어 마지못해 한 것인데

사간원에서 이런 논의를 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계속되는

사간원의

반대에 부딪혀

최부는 지평을

맡을 수 없게 되었다.



해설

.

500년전 조선의 35세 관료가 일행과 함께

당시 중국 양자강 남쪽, 절강성에 표착하여,

필설로는 설명할 수 없는 처절한 상황에 처해

어떠한 행동과 규범으로 처신을 하면서 42명의

수행원을 통솔해, 중국 민․관․군을 감복시켰을까?

  

최부(1454~1504)는 조선 성종 때 문신,

본관 탐진(耽津), 호 금남(錦南), 나주 출생.

1454년에 출생하여 29세에 문과에 급제, 교서관․

군자감․성균관․사헌부․홍문관 등에서 관직을 역임.

동국통감․동국여지승람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제주에서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 : 당시 범법자들이

제주로 도망, 피신한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을 색출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특별 파견관)의 직을 수행하다가, 1488년

윤 정월에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듣고 수행원 42명과 

귀향 차, 배에 오른지 5리도 채 못지나 폭풍을 만나게 된다.

 

이 때부터 표류가 시작되고, 얼마 후

선박으로서의 기능이 완전 마비된 채,

근 15일간 서해 바다를 정처 없이 떠돌며

그는 생존본능 처절한 투쟁을 시작하게 된다.

 

절강성 임해현의 해안에 착륙할 때까지 이러한

사투 속에서도 43명 전원이 기적같이 생존하였다.

해안 상륙한 최부 일행은 해안침범 왜구 혐의로 체포.

 

왜구 누명을 벗을 때까지 언어불통 이국에서

그들이 당한 고초는, 최부 자신이 한탄했듯이

차라리 해상에서 죽었으면 편했을 정도로 막심.


그러나 최부는 필담으로 의사소통을 해가며

냉정과 의연함을 잃지 않고 해박한 지식으로

그 곳의 관헌과 주민을 설득해 나간다.


최부 일행은 8,800리의 남․북을 관통하며,

중국체류 136일 만에 전원 무사히 환국한다.

환국한 후, 최부는 임금의 명에 의해 그간 상황을

일기 형식으로 쓴 5만자 한문기록이.,최부『표해록』

 

중국 역사 상 3대 기행문.

어직도 그 중 하나로 꼽힌다.


최부(崔溥, 1454~1504)『표해록』 

마르코폴로(1254~1324)『동방견문록』,

일본 승려 엔닌(794~864)『입당구법순례행기』


중국 명나라 초년과 전기(前期)의 사회상황․정치․군사․

경제․문화․교통․중국의 언어학 및 시정(市井)풍정(風情)

등을 정밀하게 기록한 표해록을 문헌 등 다방면 가치로 보면

상기 두 개의 기행문보다 우월하다면서 현재까지 잘 알려지 있지

않은 사실에 대해 북경대학 갈진가 교수는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표해록』은 성종의 명에 의하여

찬술, 조정 내부에서만 열람하다가,

1573년에 이르러서야 최부의 외손인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에 의해 발간,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으며.

그 이후 근 400년만인 1979년,

최부의 후예인 최기홍에 의해

비로소 현대 한국어로 완역,

일반인들이 표해록의 존재를

알 수 있게 되었으며, 그 이후

표해록 연구의 기폭제가 되었다.

 

일본에서는 1769년에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

라 개명하여 청전군금(淸田君錦

:1721~85)에 의해 번역, 당시 일본

식자층에 널리 읽혀졌으며, 1965년에는

컬럼비아 대학교수인 John Meskill

에 의해 영어로 번역 간행되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북경대 갈진가(葛振家)교수가

표해록 본문에 표점(標點)과 주석을 붙여서,

1992년에 점주본으로 간행한 바 있다.

 

표해록에서 최부의 가치관과 사상이

작금 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되고 있지만,

전편에 흐르고 있는 최부의 효사상(孝思想)과

정의관(正義觀)은 우리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최부 동시대 유학자들이 신봉하는

윤리사상에 비추어 보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라고 할 수 있겠으나, 상중의

몸으로 생사기로라는 극한상황에 처한 최부가

천리(天理)를 근간으로 삼아 어떻게 처신했으며,

그 많은 부하를 설득하고, 중국 관리들을 감복시키며

위기상황을 극복해 나가는 대목은 실로 감동적이다.

 

그의 표해록에 기재된

몇 구절을 발췌해 본다.

 

해상에서 표류한지 며칠이 지나자,

승선한 배는 거의 난파선에 가까워,

더 이상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죽음이 임박

했다는 사실을 알고, 최부는 상관(喪冠)과

상복(喪服) 갖추고 두 손을 합장하여 하늘에

빌며 천리(天理)에 호소.(표해록, 권 1, 1월 5일)

 

“신 평생 오직 충효우애(忠孝友愛)만을 근본으로 삼고,

남을 속이지 않고……군명(君命)을 받들어 봉공하는 중

부친상을 만나 분상(奔喪)하고 있는 중입니다. 무슨 죄로

이와같이 벌을 당하는지 알길이 없습니다만 신의 허물이라면

얼마든지 감수하겠으나, 동승한 40여 명이 아무 죄 없이 익사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하늘이 이를 불쌍히 여겨 바람과 파도를

잠자게 해 주소서. 그리고 신을 재생케 하여 돌아가신 아버지를

장사 지내게 해주시고, 연로한 어머니를 봉양케 해주소서.”

 

눈물의 기도가 끝나자,

모두 통곡하면서 하늘을

우러러보고 도움을 내리길.,

 

최부 일행은 구사일생으로 해안에 표착하였으나,

해적선을 만나 다시 해상에 표류한다. 다시 등륙을

시도할 때, 해안에 배 6척이 정박해 있었다. 이를 보고,

부하와 문답을 한다.(표해록, 권1, 1월 16일)

 

“저번에는 관인(官人)의 위의(威儀)를 보이지 않아,

도적을 불러들인 것 같이 되어 죽을 뻔 했는데,

오늘은 관대(冠帶)를 갖춰 위의를 보이시죠.”

“자네는 왜

의(義)를 훼손하는,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가.”


“이처럼 죽음이 코앞에 왔는데, 어찌 예의만 차립니까.

임기응변으로 살길을 찾은 후, 예의를 갖추어

치상(治喪)해도 의를 해하는 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상복을 벗는다는 것은 바로 길(吉)이기 때문에 효(孝)가 아니다.

또한 거짓으로 남을 속이는 일은 진실이 아니네. 차라리 죽음에

이를지언정 효가 아니고, 진실이 아닌 처신은 못하겠네.

바르게 처신한 후, 그 다음 오는 일에 순응하겠네.”

 

최부는 이리저리

이끌려 다니느라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중국 관리의 엄한 문초를 받았다.

가까스로 왜구의 혐의를 벗어나

머나먼 환국의 호송길에 오르는데,

최부의 만신창이의 몸과 남루한 옷차림을 보고,

한 중국의 관리가 위로하며 몸을 추스르라고 권한다.

(표해록 권2, 2월 9일)

 

“막심한 고생으로 몸이 말이 아니군요.”

“내 벗겨진 피부가 회복되지 않은 것은

짠 바다 물에 찌들렸던 것이고, 맨발로

험한 길을 걸었기 때문에 발이 이렇게 상했소.


신체발부(身體髮膚) 불감훼상(不敢毁傷)이

효지시야(孝之始也)라 했는데, 이처럼

상하게 했으니 나는 참으로 불효자요.”


“만부득이해 그렇게

된 것이니 너무 상심마오.”

 

최부는 환국길 여정에서 들르는 곳마다

그의 충효관, 국가관, 정의관 그리고 해박한

지식으로 중국 관리는 물론, 주민들을 감동케 하였다.

 

급기야는 당시 명나라 조정에 알려져

명 황제를 알현하고 수상을 하기에 이른다.

상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길복을 입고 황제를

만나야 하는데, 최부는 상중의 몸이라 상복을

벗을 수 없다 하여 이를 완강히 거절한다.


그러나 명나라 관리의 집요한 설득과,

사세(事勢)의 핍박(逼迫)으로 최부는,

황제를 만나 수상할 때에는 길복으로

갈아입지만, 궐 밖을 나설 때는 상복으로

다시 갈아입는 다는 절충안을 제시하여

이를 관철시킨다.

 

지면의 제한으로 일부분만 소개하였지만

이 얼마나 청년 최부의 원칙의 고수인가.

 

최부는 1504년 연산군 갑자사화 때,

당대의 유학거물인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생이라는 이유로 51세 나이로 참수형을 당하였다.


최부를 체포하기 전 형리(刑吏)가

최부를 애석하게 여겨, 점필재의

문하생이 아니라고 한마디, 부인만하면

모면할 수 있다는 간청에도 불구하고, 최부는,

“이 세상에 그러한 유학자가 어디 있으며,

이러한 선비를 어디서 찾을 수 있겠소.”라며

자신이 김종직의 문하생임을 떳떳하게 밝혔다.


최부 금남선생행록;원작자 眉岩 유희춘

최부 금남선생행록;원작자 眉岩 유희춘



덧 말



....................김비의(金非衣).......................

조선 전기 유구(琉球)에 표류되어 귀환한 제주인.

1477(성종 8) 2. 1 김비의· 강무·이정·현세수.(玄世修)·

김득산(金得山)·이청민(李淸敏)·양성돌(梁成突)·조귀봉(曹貴奉)

등은 진상할 제주산 밀감을 싣고 항해하던 중 추자도 앞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출항 11일째에 김득산이 병사하고 14일 만에 어떤 섬

해안에서 파선되어 김비의 등 3명만 살고 나머지는 모두 익사하였다.


세 명은 나무판자에 의지하여 표류되어 유구에 도착.

유구에 도착하여 왕궁과 사찰 등을 두루 살펴보았다.

1개월 동안 객관에 머물면서 후한 대접을 받으며

기이한 섬의 풍물을 보고 1479. 6. 22 제주로 귀환.

.

조정에서는 김비의·강무·이정에게

2년간 부역을 면제, 반년의 녹봉과

바다를 건널 양식과 저고리 및 철릭(저고리와

치마가 붙은 형태 남성용 옷) 하나씩 내려 주었다.
.........................................................................


1477년, 제주 사람 김비의 일행의 첫 표착지

일본 오키나와(沖繩)현 요나구니(與那國)섬.

이곳의 '창세기'는 해양민 이미지로 덮여있다.


섬의 탄생 설화는 바닷길을 헤쳐나가

정주한 어느 남자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먼 옛날 남쪽 섬에서 육지를 찾아온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는 바다 한가운데 우뚝 서있는 언덕을 발견한다.

그 섬에 사람이 살 수 있는지 알아본뒤 가족을 데려와 정착한다.


어느날 섬에 큰 비가 닥친다.

비는 4개월 정도 계속 내렸다.

그 사이 산과 계곡이 생겨났다.

섬의 모습이 차츰 만들어졌다.

이런 전설도 있다.


구메(久米)섬에서

오키나와 본토를 향해

가던 배가 폭풍우를 만나 표류한다.

왕에게 바칠 곡물을 실은 배였다. 겨우

도착한 곳이 지금의 요나구니섬이다.


살기좋은 무인도에 그 일행이 발을

디디면서 섬은 사람사는 곳으로 변했다.
세금도 없고, 규칙도 없이 정말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는 요나구니.

몇차례의 재앙끝에 '노아의 방주'처럼

살아남은 자들이 결국 요나구니를

일궈나갔다는 전설은 새삼

섬의 운명을 일깨운다.


자연의 거대한 힘앞에

인간은 오만할 수 없었다.
7월 현재 섬의 인구는 1600명.

인구는 매년 감소하고 있다.


맑은 날이면 요나구니섬에서

내다보이는 타이완과 밀무역이

행해질 때는 1만명까지 살았다.


고등학교가 없어서

하나둘 섬을 뜨는

이들이 늘고 있다.


그래서인가.

섬은 쓸쓸했다.


차를 몰고 한나절 섬을 도는 동안

 '일본 최서단'에 발자국을 남기려는

관광객만 몇몇 만났다.

하지만 김비의 일행은 외롭지 않았다.

요나구니 어부들이 구조한 배에 타고

섬에 도착했을때 남녀 100여명이

맨처음 그들을 맞는다.


섬 사람들은 풀을 베어

바닷가에 초가를 짓는다.

장차 표류인이 살 집이었다.


뿐인가.


한 술 밥을 입에 넣지 못한 지

14일이나 된 김비의·강무·이정

세 사람을 위해 흰쌀죽과

마늘 뿌리를 가져와 먹인다.


그날 저녁부터 흰쌀밥,

탁주, 마른 바닷고기가

제주인들의 밥상에 오른다.

섬에 전해오는

이야기를 따르자면,

요나구니는 표류인이 정착해

온기를 불어넣은 섬이다. 그래서일까.


요나구니 사람들은

말이 통하지 않는

제주인을 극진히 살렸다.


표착지에서 7일을 머물렀는데,

차례를 정해 집을 옮겨가면서

음식을 제공한다.


한 마을을 다 돌고나면 다음 마을로 옮겨 밥과 술을 줬다.

한 달 뒤에는 세 사람을 세 마을로 분산해 살게 한다.

요나구니 사람들은 3명의 생존자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돌볼지 의논했을 것이다.


섬 사람들은 표류인들이

끼니를 거르는 법 없게

하루 세끼를 꼬박 챙겨줬다.


과연 김비의 일행이

표착한 지점은 어디일까.


요나구니에 얽힌 기록은

김비의 표류기가 담긴

'성종실록'이 가장 오래다.


그런데 성종실록에는

표류지점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


현재 요나구니섬은

소나이(祖納), 구부라(久部良),

히가와(比川) 등 세 개 마을이 있다.

김비의 표류 당시엔 세 마을이 없었다.

요나구니민속자료관을 운영하는

올해 아흔살의 이케마 나에(池間苗)씨는

"표류인 3명을 섬에서 도와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면서 표류인들이 아이들과

놀았다는 우물터, 물고기를 잡았다는 습지

등의 위치를 알려줬다.


김비의 표류기에는

"아이들을 아껴 비록

아이가 자지러지게 울더라도

손을 대 때리지 않는다"며 요나구니

사람들의 심성을 전하고 있다.


이케마씨가 언급한 곳은

요나구니에 전승되는

'여걸'인 상아이 이소바의

연고지 딘다하나타의

허리쯤이었다.


산호초 융기에 의해

형성된 단애(斷崖)로

오키나와현 지정 명승인

딘다하나타는 우리식으로 말하면

읍사무소가 있는 소나이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는 자연 전망대다.

요나구니초(町)

역사편찬위원회

요네시로 메구메

(米城惠·50)씨는

"고고학적 발굴 자료로 볼때

15세기 무렵 게다사키, 시마나카,

호안마을 등 세 곳이 있었지만

오래전 폐촌됐다"면서 "전승되는

내용을 감안할 때 지금의 구부라 마을

인근에 표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구부라는

일본 최서단

표지석이 있는 마을.

그는 소·중학교 자리에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봤다.

소나이 마을에서

동쪽길을 따라

히가와로 향하는 길,

바다를 향해 누운 무덤이

눈에 들어왔다.


소금기 품은 풀꽃이 솟아오른

모래밭에 자리한 거북등 무덤인

귀갑묘(龜甲墓)였다.


요나구니 사람들은 죽은 영혼이

결국 바다로 돌아간다고

믿었던 것일까.


바다의 무수한 사연을 품고 있는

파도가 무덤을 향해 밀려들었다

빠져나가길 반복하고 있었다.


김비의 일행이 탔던 배에 올랐다

숨을 거둔 제주인들은 무덤 너머

너른 바다에 잠들어있을 것이다.


김비의와 오키나와 (2)첫 표착지 요나구니

요나구니 섬.,거북등 무덤들


김비의 일행의 표류기는

'성종실록' 10년(1479년)

6월10일부터 6월20일까지.

'성종실록'을 토대로 김비의

일행의 표류 일지를 정리해본다.

▷1477년 2월 초하루

김비의 일행 등 8명 제주 출발.

현세수 김득산 이청민 양성돌 조귀봉

김비의 강무 이정은 감귤 실은 진상선에 오름.

▷1477년 2월 14일쯤

일본 오키나와 요나구니섬 표착.

김비의 강무 이정 등 3명만 생존.

6개월간 요나구니에서 생활.

▷1477년 8월

요나구니섬 주민 13명의 안내를 받으며

이리오모테로 이동. 5개월간 생활.

▷1478년 1월

이리오모테섬 사람 5명과 함께

작은 배를 타고 하테루마로 이동.

한달간 생활.

▷1478년 2월

하테루마섬 사람 5명이

제주 표류인을 데리고

아라구스쿠섬으로 이동.

한달간 생활.

▷1478년 3월

구로섬으로 이동.

이때도 아라구스쿠섬 사람

5명이 안내를 맡음.

한달간 생활.

▷1478년 4월

구로섬 사람 8명과 함께

한 배를 타고 타라마섬으로 이동.

한달간 생활.

▷1478년 5월

작은 배를 타고

이라부섬으로 이동.


타라마섬 사람 5명이

호송을 맡음. 한달간 생활.

▷1478년 6월

미야코섬으로 이동.

이라부섬 사람 5명이

작은 배를 타고 표류인들을

미야코섬까지 안내. 한달간 생활.

▷1478년 7월

미야코 사람 15명이

표류인들을 데리고

오키나와 본토로 이동.

3개월간 생활.


 (지금까지 김비의 표류기에 적힌 대로라면

제주 표류인들이 오키나와 본토를 떠난 달은

석달후인 10월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성종실록'에는

오키나와를 떠나 일본 본토로

이동한 날짜가 8월1일로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표류인들이 오키나와의 여러 외딴 섬에서

머문 기간을 실제 체류 일정과 달리

기억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1478년 8월 초하루

100여명이 큰 배 한 척을 타고

일본 본토 사츠마번으로

제주 표류인들을 호송.

이후 6개월간 일본

본토에서 체류.

▷1479년 2월

쓰시마로 이동.

2개월간 생활.

▷1479년 4월

울산에 도착한 후

서울로 이동.

2개월간 생활.

▷1479년 6월 20일

제주로 귀향.


요나구니 섬.


거북등무덤 귀갑묘가

바다를 향해 누워있다.

5백30년전 제주 표류인들은

무덤 너머 바다에 잠들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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