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노동가요

인터내셔널가 (최도은)

작성자성남철(대의원)|작성시간10.03.17|조회수613 목록 댓글 0

 

 

 

 인터내셔널가 (최도은)

 


이 노래는 "국제저항노래"의 "인터내셔널가 모음(32곡)"이라는

앨범에 수록된 14번째 최도은님이 부른 것입니다.

 

이 앨범엔 각국의 인터내셔널가가 수록되어 있어 좋은 자료가치도 있답니다.

개인적으로 최도은님의 굵직하면서도 무게감있는 목소리를 좋아하기에

최도은님의 목소리를 선택해서 올립니다. 제 동생이기도 하구요...

아마 모두들 오랜만에 들어볼 것 같은데....

대학시절을 생각하면서 잘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The International

1
깨어라 노동자의 군대 굴레를 벗어 던져라
정의는 분화구의 불길처럼 힘차게 타온다
대지의 저주받은 땅에 새 세계를 펼칠 때
어떠한 낡은 쇠사슬도 우리를 막지 못해

들어라 최후 결전 투쟁의 외침을
민중이여 해방의 깃발 아래 서자
역사의 참된 주인 승리를 위하여
참 자유 평등 그 길로 힘차게 나가자

2
어떠한 높으신 양반 고귀한 이념도
허공에 매인 십자가도 우릴 구원 못하네
우리 것을 되찾는 것은 강철 같은 우리의 손
노예의 쇠사슬을 끊어 내고 해방으로 나가자

들어라 최후 결전 투쟁의 외침을
민중이여 해방의 깃발 아래 서자
역사의 참된 주인 승리를 위하여
참 자유 평등 그 길로 힘차게 나가자

3
억세고 못 박혀 굳은 두 손 우리의 무기다
나약한 노예의 근성 모두 쓸어 버리자
무너진 폐허의 땅에 평등의 꽃 피울 때
우리의 붉은 새 태양은 지평선에 떠 온다

들어라 최후 결전 투쟁의 외침을
민중이여 해방의 깃발 아래 서자
역사의 참된 주인 승리를 위하여
참 자유 평등 그 길로 힘차게 나가자
인터내셔널 깃발아래 전진 또 전진

 

 

전세계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민중가요라고 할 수 있겠다.
원래 곡은 프랑스어로 되어 있고 작곡자도 프랑스인으로 알려져있다.
이 지구상 어디서든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이 일어나는 곳이라면
반드시 불리는 노래이고 지구상 거의 모든 언어로 번안되어 있다고 한다.
(시애틀에서 프라하에서 서울에서.. 이 노래는 항상 불려졌다.
영화에서도 등장하는데 대표적인 두 영화가
'랜드 앤 프리덤'과 '에어포스 원 -_-;;'이다.)

'인터내셔널가'가 탄생한 건 100년 전쯤인데,
그 계기가 된 두 사건은 1864년 국제노동자협회(제 1인터내셔널)의 설립과
1871년 파리 꼬뮌의 결성이었다.
두 사건은 모두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으로부터 파생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본질적으로 부르조아 혁명이다.
봉건시대의 지주-농노라는 계급을 뛰어넘어 자본주의 사회의 필수 조건인
'자유로운 노동자'(여기서 '자유'는 자신의 노동력을 팔 자유를 뜻한다)가
대량으로 존재할 필요를 느낀 신흥 부르조아 자본가들은
이런 그들의 요구를 막는 봉건적 지주 및 도제적 수공업자들에 대항하여
'자유 평등 박애'라는 이념을 내걸고 투쟁하였고
지주의 살인적 착취에 고통받고 있던 노동자와 농민들도 부르조아들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르·샤브리에법(1791년)이 제정되고 자본가들이 권력을 잡은 뒤
1800년대에 들어서면서 노동자들은 자본가의 본질은 임금노예화를 통한
또 다른 착취일 뿐이라는 것을 자각하였다.
그들이 흘린 피는 모두 자본가들의 지위를 확고히 하는 데 쓰인 것이다.
노동자들의 이러한 자각은 1831년과 34년, 37년의 프랑스 노동자들의 봉기와
1839년경부터 시작된 영국 노동자들의 차티즘운동,
1836년경 결성된 독일의 의인동맹 등 각종 정치적 단체의 활동을 통해
나타난 것처럼 독자적 정치세력으로의 성장을 불러왔다.
(음.. 많이 다른 경우긴 하지만 1997년 노동법 대투쟁 이후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외쳤던 민주노조 진영의 모습을 보는 듯 하다..)
(차티즘 운동 - 1838년부터 1850년까지 계속된 영국 노동자진영의 운동.
              보통선거, 비밀선거, 의회선거 매년실시, 세비지급 등과
              10시간노동제를 목표로 한 투쟁이었다)
이런 각국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인 성장과 많은 투쟁 성과를 바탕으로 하여
1864년 제 1인터내셔널이 만들어지게 된다.
비록 자본가 계급의 탄압과 풍부하지 못한 경험에 인한 적전분열로
제 1인터내셔널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단명하게 되지만
전세계 노동자가 최초로 단결하여 범지구적 조직을 만들어냈다는 의의가 있다.

제 1인터내셔널이 만들어지고 난 직후
프랑스에도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가 만들어지는데
1869년에는 회원이 25만여명에 이를 정도로 성장하게 된다.
이 기간중 프랑스의 노동계급은 많은 대자본가계급 투쟁을 통해
파업권, 단결권, 노동시간 제한 등의 많은 성과를 이루게 되었으며
이런 프랑스에서의 노동 계급의 성장은 1870-1871년 보불 전쟁을
계기로 한층 고양되게 된다.
당시 신흥 자본주의 국가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던 프러시아는
프랑스의 많은 자원과 노동력을 얻기 위해 프랑스를 계속 침략하고 있었고
부정부패로 인해 프러시아에 대항할 수 없었던 프랑스 정부는
파리를 프러시아에게 내주고 후퇴를 감행한다.
그러나 전쟁초기부터 전쟁에 반대해왔던 노동자위원회와 인터내셔날 지부는
그간 쟁취한 자유 및 민주주의를 지키고
조국의 심장 파리를 사수하기 위한 프랑스 민중의 대중적 궐기를 호소하였고
이에 프랑스 시민과 대다수 노동계급이 호응하여
파리에 독자적인 권력, 파리 꼬뮌을 형성하게 된다. (1871년 3월)
이에 이미 프러시아와 결탁한 프랑스 임시정부는 프러시아의 원조를 받아
노동자들과 시민들이 지키고 있는 파리를 공격하였으며  
결국 72일만에 3만명의 희생자와 4만5천명의 체포자를 남기고
꼬뮌은 해체된다.
72일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단명한 파리 꼬뮌이었지만
자본주의 사회로 들어선 이후 최초의 노동계급으로 이뤄진 정권을
세웠다는 의미가 있다.

인터내셔널가는 파리 꼬뮌의 처참한 실패 직후의 침체된 분위기 속에서
그동안 노동계급들이 이룬 노동계급의 비약적 성장을 제시하며
계속되는 패배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 전진하자는
희망적인 메세지를 담아 만든 노래이다.

 

'인터내셔널가'에 얽힌 이야기들


“깨어라 노동자의 군대, 굴레를 벗어던져라...”
해마다 5월 1일이 되면 전 세계의 노동자들이 거리를 행진하며 해방을 향한 영원한 투쟁을

선언한다. 이 때 반드시 부르는 노래가 바로 “인터내셔널가”다.
인터내셔널가는 도대체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 걸까?



인터내셔널가의 아버지는 파리꼬뮌에 전사로 참여했던 프랑스인 외젠 포티에Eugene Pottier다.

 사회주의자였으며 운수노동자였고, 시인이었던 그가 파리꼬뮌을 기념하기 위해 1871년에

 쓴 시가 노래의 기원이 됐다.

당시의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들은 이 시를 프랑스 국가인 ‘라 마르세예즈’에 맞춰 불렀다.

그러던 중 1888년 역시 프랑스인인 피에르 드제이테Pierre Degeyter가 곡을 만들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인터내셔널가의 멜로디는 이때 처음 생겨났다.

 생각보다 그리 오래된 노래는 아닌 셈이다.

드제이테는 곡을 만들면서 운율 등을 고려해 가사를 일부 수정했다.

 따라서 포티에가 파리꼬뮌의 시기에 쓴 원작 시는 그 이후 프랑스 안에서도 점차 잊혀졌다.

지금은 자료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라 마르세예즈에 맞춰 부른 인터내셔널가는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참여했던

 제1인터내셔널의 주제가가 됐다.

그러나 첫 번째 인터내셔널은 이 노래가 나온 다음해인 1872년에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의 분열로 인해 사실상 문을 닫았다.

드제이테가 새로 곡을 붙인 인터내셔널가는 1889년 두 번째 인터내셔널이 결성되자

즉각 사회주의자들의 찬가로 채택됐다.

이후 유럽을 넘어서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고 알려지기 시작했다.

75종이 넘는 다양한 가사가 존재




▲ 1900년대 인터내셔널가 악보의 표지



아마 ‘생일축하’노래 정도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되어 불려지는 노래가

인터내셔널가일 것이다. 심지어는 같은 나라 안에서도 서로 다른 가사들이 존재할 정도다.

가장 많은 것은 영어로 된 인터내셔널이다. 영국에서만 두 가지의 다른 가사가 존재한다.

 큰 차이는 아니지만 확실히 다른 형태를 띠고 있다.

미국에서는 영국에서 수입된 가사를 부르다가 전국단일노조 운동을 벌였던

 아나코생디칼리스들인 IWW가 1900년대에 만든 새 가사가 표준이 됐다.

 이외에도 캐나다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부르는 조금 다른 형태의 영어가사가 존재한다.

이처럼 같은 영어권이면서도 서로 가사가 다르고 특히 인터내셔널의 영어 번역은

구어체의 문장과 딱딱한 단어들의 남발로 악명이 높았다.

 그래서 영국의 좌익 뮤지션인 빌리 브랙Billy Bragg은 1990년 미국의 저명한 포크가수인

 피트 시거Pete Seeger와 함께 새로운 영어 가사를 만들었다.

쉬운 단어와 현대영어에 맞춘 가사로 더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 세대들이 노래를 부르게 하기 위해서였다.

현재 영국에서는 빌리 브랙의 새 가사가 널리 통용되고 있으며 미국에서도

나이 많은 좌익들을 제외하고는 새 가사로 바뀌는 추세라고 한다.





클릭하시면 노래가 나옵니다.


Pete Seeger - International





Billy Bragg - International






Billy Bragg's Revision
First stanza



Stand up, all victims of oppression, For the tyrants fear your might!
Don't cling so hard to your possessions, For you have nothing if you have no rights!
Let racist ignorance be ended, For respect makes the empires fall!
Freedom is merely privilege extended, Unless enjoyed by one and all.
So come brothers and sisters, For the struggle carries on.
The Internationale, Unites the world in song.
So comrades, come rally, For this is the time and place!
The international ideal, Unites the human race.





이외에도 독일어나 이탈리아어, 에스파냐어 모두 대여섯개 이상의 다른 가사를 가지고 있다.

초기에 프랑스 가사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차이가 생기기도 했고,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들이 서로

 다른 내용을 집어넣으면서 차이가 생기기도 했다.

 에스파냐어의 경우 유럽과 라틴아메리카라는 지리적 차이 때문에 가사에 변형이 생기기도 했다.

반면 러시아어 가사는 하나뿐이다. 망명 중인 레닌이 초기 번역 중 하나를 선택해 ‘공인’한 이후

아무도 가사에 손을 대지 않았다.

 레닌의 권위 때문이었는지 당에 대한 공포였는지는 알 수 없다.




The choir and orchestra of Bolshoi Theatre - International






서로 다른 한글 가사도 3개나 있다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한글로 된 가사도 여러 개가 존재한다.

 ‘어, 우리말로 된 인터내셔널가가 또 있다고?’하며 놀라겠지만

 한국어 인터내셔널가는 모두 3종류다.

우선 일제시대에 ‘인터나쇼날’이라는 제목으로 불린 첫 번째 가사가 있다.

 정확히 인터내셔널가의 한글 번역이 언제 이뤄졌는지 알기는 어렵지만 대략

1922년 일본어 가사가 처음 만들어진 이후로 추정된다.

한글 가사와 일어 가사는 서로 내용이 달라 일본가사를 번역했다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일본 가사의 특이한 후렴구조가 한글 가사에서도 나타나는 것을 보면 일본가사를 참고했음 추정할 수 있다.

일제시대의 가사는 지금도 북한에서 불려지고 있다.

 다만 제목은 ‘국제가’ 또는 ‘국제공산당가’라고 한다.

주로 의전용으로 사용되며 북한 민중들이 일상적으로 부르는 노래는 아닐 것으로 보인다









일제시대-북한 가사



일어나라 저주로인 맞은
주리고 종된 자 세계
우리의 피가 끓어 넘쳐
결사전을 하게하네.
억제의 세상 뿌리 빼고
새 세계를 세우자.
짓밟혀 천대받은 자
모든 것의 주인이 되리.

[후렴] 이는 우리 마지막
판가리 싸우미니
인터나쇼날로
인류가 떨치리.
이는 우리 마지막
판가리 싸우미니
인터나쇼날로
인류가 떨치리

하느님도 임금도 영웅도
우리를 구제 못하라
우리는 다만 제 손으로
헤방을 가져오리라
거세인 솜씨로 압박 부시고
제것을 찾자면
풀무를 불며 용감히
두드려라 쇠가 단김에

[후렴] 반복

우리는 오직 전세계의
위대한 로력의 군대
땅덩어리는 우리의것이니
기생충에게는 없으리
개무리와 도살자에게는
큰 벼락 쏟아져도
우리의 머리 우에는
찬란한 태양이 비치리

[후렴] 반복






반면 한반도의 남쪽에서는 전쟁을 통해 좌익과 이에 연관된 모든 것들이 분서갱유 당했기 때문에

‘인터내셔널가’는 완전히 잊혀져 버렸다. 80년대 들어 민중음악 활동가들이 외국에서

 악보를 다시 들여오면서 복원됐다.





연세대 총학생회(한열아 부활하라!!) - 역사의 새주인






처음에는 영어 가사를 직역한 듯한 노래말로 매우 투박한 인상이었다.

 제목도 “역사의 새 주인”이었다. 이후 보다 매끄럽게 한글 가사를 다듬은 노래가

전노협 시기 노동운동 노래패를 통해 보급됐다.

이 가사가 지금 우리가 부르는 “인터내셔널가”다.





메아리 - 인터내셔널가






인터내셔널가의 어두운 면


인터내셔널가는 노동자 계급의 투쟁과 해방, 국제주의를 찬양하는 노래다. 하지만

 이 노래가 항상 영광 속에서만 불려졌던 것은 아니다.

우선 당연하게도 20세기 초반까지 대다수의 나라에서 인터내셔널가는 금지곡이었다.

이에 상관없이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들은 집회와 모임에서

노래를 합창했지만 이는 경찰의 단속 대상이었다.


1917년 혁명 이후 인터내셔널가는 소비에트연방의 국가가 됐다.

그러나 스탈린은 히틀러와의 전쟁 중인 1944년 이 노래 대신 새로 만든 ‘소련찬가’를 국가로 삼았다. 인터내셔널가의 국제주의를 소련찬가의 애국주의로 교체한 것이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코민테른(제3 인터내셔널)을 해체했다.





Red Army Chorus - International






그 이전인 1935년 모스크바는 프랑스 공산당에 프랑스어 인터내셔널가 중 군대에 대해

적대감을 드러낸 구절을 부르지 말라고 지시했다. 프랑스와 관계 개선을 추진하던

 소련이 프랑스 군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터내셔널가는 전 세계 노동계급과 사회주의자들에게 국제주의와 국경을 넘어선

 단결을 호소하는 노래다. 이념은 달라도 사회민주주의자부터 공산주의자까지

모두 이 노래를 부르지만 때로는 이념적 차이를 드러내기도 한다. 포르투갈에서는

지금도 공산당원들과 사회당원들이 서로 다른 가사의 인터내셔널가를 부른다.

칠레 사회당과 공산당의 인터내셔널가도 조금 차이가 있다.

인터내셔널가와 얽힌 비극적 기억 중의 하나는 1989년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 사건이다.

당시 광장에 모여 개혁을 요구하던 학생들은 운동가로 이 노래를 불렀다.

아마도 1980년 서울의 봄 때 서울역에 모인 대학생들이 많은 사람이 아는 고향의 봄이나

 애국가를 부른 것과 비슷한 이유로 중국의 학생들도 인터내셔널가를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은 ‘노동자 군대의 각성’을 노래하다 인민해방군이 보낸 탱크에 희생됐다.










영화를 통해 만나는 인터내셔널



▲ 영화 <랜드 앤 프리덤>의 포스터





인터내셔널가는 워낙 많이 알려진 노래고 또 노동운동과 좌익운동을 상징하는 노래인 만큼

 이런 주제를 다룬 영화나 기록 영상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앞서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서는 인터내셔널가가 자취를 감췄다고 했는데 한번

이 노래가 대중적으로 공개된 적이 있다. 65년 개봉된 영화 <닥터 지바고>에는

1분 정도 이 노래가 배경으로 깔리는 장면이 있다.

 아마 전쟁이후 인터내셔널가가 남한에서 공공연하게 공개된 첫 번째 사례이겠지만

이게 무슨 노래인지 알아챈 사람은 그리 만치 않았을 것이다.









러시아혁명을 취재한 미국의 공산주의자 언론인 존 리드의 삶을 다룬 영화 <레즈>에서는

 

 시종일관 이 노래가 흘러나와 인터내셔널가를 배우는 교재로는 딱 안성맞춤인 영화였다.

그러나 워런 비티 같은 인기스타가 나오고 아카데미 감독상까지 받은 영화임에도

1981년이라는 시대상황 속에서 국내개봉은 못했다.









인터내셔널가가 가장 인상적으로 사용된 영화는 켄 로치 감독의 <랜드 앤 프리덤>일 것이다.

스페인 내전을 다룬 이 영화에서는 세계 각국에서 모인 국제여단의 전사들이 파시스트들과의

전투에서 죽은 동지를 묻으며 장송곡 대신 이 노래를 합창하는 장면이 나온다.

국제주의라는 노래의 테마를 이보다 더 잘 살려낸 장면은 앞으로도 보기 드물 것이다.










인터내셔널가를 들을 수 있는 영화 중 가장 황당한 것은 <에어포스 원>이다. 해리슨 포드가

 테러리스트 잡는 대통령으로 나온 이 ‘무협영화’를 보면 러시아에 체포된 카자흐스탄의

 독재자 장군이 테러리스트들의 협박으로 풀려나는 장면에서 감옥 안의 죄수들이

독재자를 위해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반북집회에

모인 우익들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격이다.




인터내셔널가는 카피레프트일까?


많은 사람들이 인터내셔널가는 좌파의 노래고 오래된 곡이니까 저작권과 상관없이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이 노래는 지금도 저작권의 보호를 받고 있다.

프랑스에 한정된 이야기지만 인터내셔널가는 2014년까지 저작권을 보호받는다.

 이 노래를 작곡한 피에르 드제이테는 1932년 사망했다. 작가의 사후 70년 동안 저작권을

 인정하는 프랑스 법에 의해 2002년까지 보호를 받지만 두차례의 세계대전동안의 기간을

제하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2014년까지 보호되는 것이다.

실제로 2005년 프랑스의 한 영화 제작자가 이 노래를 사용하기 위해 1,000유로를 지불하기도 했다.

장석원 기자

 

글 출처: 레디앙에서

 우리나라 메이데이 역사

우리 나라에서 노동 계급이 형성된 것은 식민지 공업이 급격히 발전했던 1920년대부터였다.

우리 나라 노동자들은 세계 무대에 뒤늦게 등장했지만 1920년부터 동맹 파업, 시위, 행진 등을 벌이며 전 세계 노동자들과 함께 메이 데이를 경축해 왔다. 이제 막 형성된 우리 나라 노동 계급도 세계 노동 형제자매들이 70여 년 전부터(1856년 호주 멜버른 노동자들이 처음으로 8시간 노동 쟁취) 외쳐 온 8시간 노동제 쟁취?를 요구하며 전국 곳곳에서 메이 데이를 기념했다.

1921년 9월 부산 부두 노동자 5천 명의 파업, 1922년 3월 조선방직 노동자들의 파업, 1924년 3월 군산 도정 노동자들의 동맹 파업을 비롯해 1920~1925년에 3백35건의 파업이 있었다.

1923년 조선 노동연맹회는 메이 데이 기념 서울지역 동맹 파업을 결정하고 시가 행진을 계획했다. 일제의 행사장 봉쇄로 노동자들은 장충단에 집결하지 못했지만 양화 직공 조합, 인쇄 직공, 고무 제조소 등의 노동자들은 파업을 단행했다. 지방에서도 노동자들은 시가 행진을 벌이는 등 메이 데이를 기념했다.

일본 지배자들은 1924년 메이 데이를 앞두고 ?종래의 전례를 보면 재미없는 일이 많이 있으며 대개는 불온한 분자가 모여서 되지 못하게 떠드는 일이 많으므로 그 날[메이 데이]은 종래보다 더욱 강경한 태도로 단속하고 절대 허가하지 아니 할 방침?을 밝혔다. 그 뒤에도 해마다 5월이 되면 비상경계를 펴고 집결 예정지에 도착하는 노동자들을 모두 검거했다.

1930년대 들어 일제의 탄압은 한층 가혹해졌다. 치안유지법이 개악돼 노동운동 활동가는 최고 사형까지 당하게 됐다.

하지만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구호와 함께 시위?집회가 계속됐다. 일본 제국주의의 모진 탄압 속에서도 조선 노동자들은 ?5월 1일! 전세계 무산계급의 날! 환희의 날! 시위의 날! 이 날을 메이 데이 라고 한다. 선배 맑스에 의하여 절규되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표어의 실천적 표현의 날인 것이다.?(1929년 <중외일보>) 하고 메이 데이의 의미를 이어나갔다.

조선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제 쟁취?, ?노동자의 단결?, ?일본 제국주의 타도? 등을 외치며 파업, 시위, 리플릿 살포, 표어 부착, 강연회, 기념 야유회 등 여러 방법으로 메이 데이 투쟁을 벌였다.

1936년 메이 데이는 서울 자동차 회사 운전수 파업으로 시작돼 흥남 질소 비료 공장 노동자 파업과 함흥 철 공장 노동자 파업으로 이어졌다. 또, 함흥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노동자 3백70명은 만세 삼창을 하고 노래를 부르면서 메이 데이를 기념했다.

일본 제국주의와 자본에 맞선 투쟁의 맥은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살아남아 해방 이후 활화산처럼 다시 타올랐다.

◎ 활화산

미군정 하에서 노동자 투쟁은 폭발적으로 고양됐다. 노동자들은 일본인의 공장을 접수하여 공장자주관리 운동을 벌여 나갔다.
이에 힘입어 1945년 11월 5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출범했다.
1946년 메이 데이는 전평이 조직하여 조선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을 과시하며 성대하게 치러졌다.

전국 곳곳에서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제 즉각 실시하라!?, ?실업자에게 직업을 다오.?, ?공장폐쇄?해고 절대 반대!?, ?언론?집회?출판?결사의 자유 보장하라.?, ?국가 전액 부담의 실업보험을 즉각 실시하라.?,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가 행진을 벌였다.

노동자들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우리는 옛날의 못난 노동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제야 우리의 살 길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우리의 무기인 단결의 힘으로 파업을 할 줄 알고 싸울 줄 압니다.?(<전국노동자신문> 40호(1946년)).

미군정의 탄압, 대한노총의 테러, 감원, 일급제 등에 항의하여 1946년 9월 총파업이 벌어졌고, 1947년에는 전평 지도부 체포에 항의해 3월 총파업이 일어났다.

파업을 파괴하기 위해 미군 전차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경찰 3천5백여 명과 어용 대한노총의 회원 1천여 명이 동원됐다. 노동자들 여러 명이 죽고 수백 명이 부상당했다. 9월 총파업과 3월 총파업으로 각각 1천4백여 명과 2천여 명의 노동자가 구속됐다.

이런 탄압에도 불구하고 30만 명의 노동자들이 1947년 메이 데이 기념식에 참가해 ?해고?테러?폭압 반대 투쟁?을 결의했다.


미군정은 1947년 메이 데이 직후 전평을 불법화했고, 전평이 주최하는 메이 데이 집회를 금지했다. 전평이 붕괴되자 대한노총이 메이 데이 기념행사를 주관하면서 메이 데이의 정신이 훼손당했다.

1948년 메이 데이 기념식이 단독선거 지지 결의대회로 돌변했다. 또, 그 뒤에는 주한 미 국무부 노동고문이 기념사를 하기도 하고(1950년), ?북진통일 없이는 노동자의 살 길도 없다?는 결의문을 채택(1953~1955년)하기도 했다.

이승만은 1957년에 ?메이 데이는 공산 괴뢰 도당들이 선전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으니만치 반공하는 우리 대한의 노동자들이 경축할 수 있는 참된 명절을 제정하라?며 날짜 변경을 지시하여 메이 데이를 아예 없애 버렸다.

이승만 정권을 붕괴시킨 4월혁명의 함성 속에서 노동자들은 노조를 민주화하고, 노총을 배격하는 민주적인 전국 조직 건설을 요구했다.
새로 결성된 한국노동조합연맹(한국노련)은 노동자들의 열망에 고무돼 1961년 ?빼앗긴 메이 데이 원상 회복?을 요구하며 독자적인 메이 데이 기념 행사를 개최했다.

그러나 5?16 군사쿠데타로 메이 데이는 다시 한 번 군화발에 짓밟혔다. 박정희는 한국노련을 강제해산하고 수백 명의 노조 간부와 노동 운동가들을 체포?구금한 뒤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을 만들고, 메이 데이 대신 ?근로자의 날?을 제정했다.


◎ 군사독재

군사독재의 모진 탄압 속에서도 한국 노동자들은 힘겨운 투쟁을 다시 시작했다. 1979년 YH 노동조합 투쟁은 박정희 정권을 찌르는 비수가 됐으며, 1985년 구로 동맹파업은 연대 투쟁의 중요성과 조직의 필요성을 보여 주었다.

1985년 대우자동차 투쟁으로 불붙기 시작한 임금 인상 투쟁이 마무리될 무렵인 5월 1일 노동자와 학생 5백여 명은 서울 영등포 시장 로터리에 모여 메이 데이 기념행사를 치렀다.

1986년 5월 1일에는 출퇴근 시간에 구로공단 주변에서 가두 시위가 벌어졌다.
노동자들은 1987년 7~9월 대투쟁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진정한 힘이 노동계급에 있음을 만천하에 선언했다.

1988년 5월 1일 노동자들은 1947년 이후 처음으로 ?세계 노동자의 날 기념 노동3권 쟁취 수도권 노동자 대회?를 공개적으로 열었다.

1989년 1백회 메이 데이를 앞두고 노동자들은 ?근로자의 날을 노동자 불명예의 날로 규정?하고 ?노동형제들의 강력한 연대와 전투적 투쟁으로? 메이 데이를 치르기로 결의했다.

노태우는 기념 집회를 원천봉쇄했지만 전국 곳곳에서 노동자들은 파업과 거리 시위 등으로 메이 데이를 기념했고, 전국 40개 대학 학생들도 원천봉쇄 규탄 대회를 열거나 동맹 휴학에 들어가 노동자들에 대한 연대를 표명했다.

노동자 투쟁 속에서 메이 데이가 되살아나고 노동자들이 해마다 기념식을 치르자 김영삼은 1994년 ?근로자의 날?을 다시 5월 1일로 변경하고 휴일로 제정할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 투쟁이 메이 데이를 완전히 되찾은 것이다.
1994년 이래로 노동자 투쟁을 통해 합법성을 쟁취한 민주노총이 매년 5월 1일에 메이 데이를 경축해 왔다.

2000년 5월 민주노총은 노동시간 단축 투쟁을 벌였다. 2001년 메이 데이 집회는 전국에서 6만여 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해 김대중 정부의 개혁 파탄과 민생 파탄에 항의했다. 또, 노동자 계급의 삶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도전했다.


8시간 노동제를 쟁취하기 위한 미국 노동자들의 투쟁 정신이 100년이 넘어 한국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노동자들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노동시간 단축, 작업 환경 개선, 임금 인상 같은 공통된 요구가 제기됐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자본의 무자비한 지배에 대항하여 승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조직과 연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메이 데이는 전 세계 노동자들이 노동자 조직과 연대의 필요성을 되새기는 투쟁의 역사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