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35:1~15 은혜의 베델, 제 자리로. 2014. 6. 1.
히브리서 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말씀합니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序詩)가 있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 가겠다. 여러분, 누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 수 있을까요? 힘이 들고 어렵겠지만 믿음으로 살면 가능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사는 의인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는 길이 있습니다. 그 것은 제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모세는 제자리를 지켰습니다. 윤동주도 제자리를 지켰습니다. 고베의 가가와도 제 자리를 지켰습니다. 사회부 대신을 마다하고 목사로서, 홈리스들을 돕고 세우고 지키는 제자리를 지켰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제자리를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의 생활 중에 어떤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사람은 물론이고 하다 못해 조그만 문구류 하나라도 제 자리에 두지 않으면 안심이 안 되는 트라우마입니다. 제자리에 없으면 불안합니다. 제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제 자리에 있지 않아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 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간단하게 지나갈 일이면 괜찮은데 그런데 자리를 지키지 못해 일어나는 일들은 뜻하지 않는 큰 재앙을 가져 온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제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단지 어떤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는 정도의 의미로 끝나지 않습니다. 분명히 사람은 있어야 될 제 자리가 있습니다. 거기 있어야 편하고 또 그 자리를 성실하게 지키는 것은 모두를 지탱해 주는 힘이기도 합니다. 제자리에 있어야 안정이 되고 지킬 것을 지키고, 세울 것을 바로 세우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제 자리로 돌아가기까지 영광과 아픔의 세월을 통과한 한 사람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확인해 보려고 합니다. 야곱을 통해서 신앙의 삶을 다시 한번 생각하는 것입니다.
1. 야곱의 20년 세월입니다. 요즘은 성경도 잘 나와서 웬만한 성경엔 다 단락이 나뉘어져 있고, 단락마다 그 내용에 적당한 소제목까지 붙어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엔 오늘 본문의 제목이 어떻게 잡혀 있나요? 제 성경엔 <하나님이 야곱에게 복을 주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야곱에게 복을 주신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닐 텐데 왜 다시 이런 제목이 붙었을까요? 먼저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오늘 야곱이 받게 된 복은 그냥 복이 아니라 제 자리로 돌아왔을 때 받은 복을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그 동안은 야곱이 제 자리에 있지 않았다는 이야기인데, 먼저 그동안의 상황이 어떤 내용입니까? 야곱이 사랑하는 집을 떠난지 20년 만에 거부가 돼서 가나안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야곱에겐 자신을 괴롭히던 큰 문제가 있었지요? 자기를 향한 형 에서의 오래된 원한인데 이것도 하나님 은혜로 잘 넘어갑니다. 그리고 형은 형대로, 자기는 자기대로 가나안 삶을 시작합니다. 사람이 항상 조심해야 될 것이 있는데 자기에게 일어난 큰 문제가 잘 해결이 되고 순조롭게 지나가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기 자리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자리라는 것은 장소의 개념 뿐 아니라 자기가 마땅히 수행해야 될 의무나 책임까지도 포함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불행히도 그는 그 일을, 20년 전의 일을 잊고 말았습니다. 완전히 잊었던지 아니면 급한 불을 껐으니 숨 좀 돌리고 하려고 했던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하지 않았다는 결과는 똑같습니다. 이야기를 20년 전으로 돌려 보면, 형의 장자권을 가로 챈 일 때문에 형에게 원한을 사서 외삼촌 집으로 피할 때였습니다. 집 떠난 인생은 아름다운 것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습니다. 언제나 외롭습니다. 그것도 형을 피하여 외삼춘의 집으로 향하는 야곱은 그 길이 너무나 힘이 들고 쓸쓸했습니다. 이전의 따스함이 없습니다. 가족이 없습니다. 인생 동행자가 없습니다. 지켜보고 박수 쳐 줄 사람이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부모 떠난 인생이 외롭습니다. 그래서 온 종일 광야 길에서 고독과 외로움 속에 전진을 합니다. 해가 지고 갈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야곱은 광야길 한곳에 보따리를 풉니다. 외롭고 지쳐서 쓰러진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자고 있을 때 하나님이 환상을 보여 줍니다. 환상을 보여 다음 하나님은 야곱에게 절대 변치 않을 약속을 합니다. 바로 그 말씀이 야곱을 평생 지켜 주었던 말씀이 됩니다. 물론 이 말씀은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중요한 말씀인데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창28:15) 이 말씀에 용기 백배해서 야곱은 한 달음에 외삼촌 집으로 가서 거기서 일하며 일가를 이룹니다. 그리고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지요. 하나님은 정말 야곱에게 말씀하신 대로 당신의 약속을 성실하게 지키셨습니다. 언약의 성취를 야곱의 생애 속에 드러내셨습니다. 늘 야곱과 함께 하셨고, 어디서든 지켜 주셨고, 늘 앞서 이끌어 주셨으며, 드디어 거부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20년 전 이 말씀을 받을 당시 야곱도 감격해서 하나님께 약속을 드렸던 일이 있습니다.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창28:20~22) 이것은 하나님이 강요하신 일이 아니라 야곱 스스로 서원한 일입니다. 믿음으로 살겠으며, 하나님의 집- 즉 성소- 를 짓겠으며, 반드시 십일조를 드리겠다는 겁니다. 자기를 지켜주고 이끌어 주고, 약속하신 축복을 허락하시면 ...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거부가 되게 했습니다. 한떼, 두떼, 열두떼를 이루게 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으로 잘 돌아왔지요? 그러면 돌아온 지금, 그는 다른 것보다 이 약속을 최우선으로 지켰어야 합니다. 지체 없이 약속한 장소로 가서 서원한 일을 행해야 합니다. 성경에 한번 서원한 것은 끝까지 지키라고 합니다. 단 예외가 있습니다. 가족이 있을 때 그 가족이 모르게 서원한 서원은 인지한지 24시간 안에 해약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주신 하나님의 법입니다.
이 경우 말고는 서원을 지켜야 합니다. 야곱이 지켜야 했습니다.
2. 돌아온 자리가 은혜의 자리가 아니였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돌아온 그의 행보가 이상합니다. 세겜이라는 곳에 왔을 때 거기서 그는 땅을 삽니다. 그것도 거의 부동산 투기라 할 만큼 큰 땅이었지요. 그리고 자료를 보니 가나안으로 들어 온 이래 그곳에서 1년 이상을 머물렀더라구요. 그러면 한 번 생각해 보시지요. 야곱의 직업이 뭐지요? 좋은 목초를 찾아 짐승에게 꼴을 먹이는 유목민입니다. 집도 필요 없고 땅도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땅을 샀고 일년 이상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약속의 장소는 벧엘이라는 곳인데 그곳까지는 좀 더 가야 합니다. 무엇입니까? 야곱은 세겜 땅에서 아예 정착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산 땅이 벧엘이라면 이해가 가는데 세겜이라는 곳은 이방 땅에 가까운 곳입니다. 결론적으로 그 자리는 야곱이 있어야 할 제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나 사물이나 제 자리가 중요합니다. 약속을 이행하지 않아도 제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서원한 것 잃어버려도 할 수 없어도 제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 옛날 그 외롭고 처량한 모습이 아닙니다. 거부입니다. 서원을 지킬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었습니다. 그런데도 은혜의 제자리, 서원한 자리로 가지 않습니다. 약속했던 제 자리로 가지 않습니다. 은혜의 자리로 가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딸 디나의 일이 터집니다. 디나가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리고 그 일로 야곱의 둘째 셋째 아들이 세겜 족속의 남자를 모조리 죽이는 대 참극이 벌어집니다. 레위와 시므온이 살인극을 벌입니다. 한 대 맞고 두 대를 때리는 것입니다. 집안 꼴이 어떻게 되지요? 아들 들은 흉악무도한 살인자가 됐지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은 어려움을 당했지요, 더 이상 그 땅에서 살 수 없으니 비싼 돈 주고 산 땅들을 다 놓게 됩니다. 야곱의 심경이 어떻다는 건 나오지 않지만, 아마 야곱이 이 일을 당하고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이런 일이 왜 일어납니까? 이 모든 일을 방지할 수 있었지요? 오늘 읽은 본문의 시작은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서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강제 집행하시기 전에 야곱이 자진해서 지키고 감당했어야 되는 일입니다. 가나안에 도착하자마자 벧엘로 가서,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했다면 모두 막을 수 있는 비극입니다. 이 비극은 야곱 스스로 자초한 일입니다. 은혜의 자리, 서원의 자리, 베델이 아니였습니다. 그래서 인생 고비고비마다 고통과 아픔을 겪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을 들으시면서 가장 먼저 “있어야 될 자리에 없게 되니까 저렇게 어려움을 겪는구나!”메씨지를 이렇게 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메씨지는 언제나 심판과 저주의 메씨지가 아니라 복된 메씨지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해서라도 열 두 지파의 조상으로 흠이 없는 야곱을 만드시고 싶으셨습니다. 그 과정으로 이런 일을 벌이신 거지 “저 놈이 한 번 된통 골탕을 먹어봐야 정신 차리지!”그런 마음이 아니십니다. 반드시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길을 여십니다. 시온의 대로를 여시는데 그 방향이 아닐 때에, 원래의 방향으로 돌려 놓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 과정에서 세상이 주는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야곱이 이 일을 겪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먼저 자신을 돌아봤습니다. 그 동안 자기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엇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왔는지 그는 아버지였고, 남편이었고 또한 주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니 자기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 성공의 도구로만 취급되어져 왔지, 뭐 돌보거나 사랑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아내들, 자녀들 방에는 여기저기 이방 신상이 세워졌습니다. 돌아보니 자기 집은 자기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는 집이 아니였습니다. 그는 가장으로서도, 집안의 제사장으로서도 실패했습니다. 그는 가장이었지만 가장의 직무를 유기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그는 집 안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몸에 걸쳤던 모든 장신구들을 모아 상수리 나무 아래 묻지요. 그리고는 가족들과 약속의 땅 벧엘로 올라갑니다. 그 사이 자녀들에게 모두 얘기했겠지요? 자기가 서원했던 것을 지키지 못했던 거며, 자기 조상의 하나님을 멀리 떠나있었던 거며, 자녀들을 사랑하지 못했던 거, 이런 것들을 정직하게 얘기했습니다. 그리곤 벧엘에서 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그는 진정한 아버지로, 남편으로, 주인으로, 제사장으로 돌아왔습니다. 사실 한 가정의 가장은 그 최우선의 책무가 제사장입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아버지나 남편의 역할보다 더 우위에 있습니다. 가정 안에서 예배를 집례하는 영적 권위가 있어야 그 집은 제대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아내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도 남편이 가정의 제사장으로 서기에 부족함 없도록 도와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 자리로 돌아와서 복된 신앙의 가정을 이뤄 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은혜의 베델, 은혜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납니다. 자기 자리로 돌아 온 야곱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시지요? 사실 있어야 될 자리에 꼭 있어야 되는 이유는 거기 있지 않아서 발생하는 저주스런 문제 때문이 아니라 있기만 하면 복 받게 되는데 그 복을 받지 못하는 아쉬움이 더 큽니다. 여러분! 자기가 의당 누려야 될 복과 권리도 그 은혜의 자리에 없으면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다는 것 아시고 언제나 있어야 될 자리에 있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야곱을 보시지요. 하나님이 제 자리로 돌아온 야곱에게 복 주실 것을 약속하시는데 그게 보통 복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11절,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야곱은 결국 이 말씀대로 복을 받습니다. 생육하고 번성을 합니다. 백성의 왕이 야곱의 허리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어디에 있습니까?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오늘 이 복이 중요한 이유는 이 복이 창조 때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던 복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차제에 복에 대해서 여러분이 꼭 아셔야 될 게 있는데, 복이란 창조 때와 똑 같은 상태로 회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아시는 대로 창조 때 아담과 하와가 누렸던 복은 그 이상 다른 무엇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최고 최선의 복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 하셨을 그 당시에는 너무나 완벽하게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 이상 다른 복이 더 필요 없는 완전한 세계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죄가 들어오고 난 후 그 모든 피조세계는 훼손되고 말았습니다. 자연도 파괴되고 인간성도 파괴됐습니다. 생명도 영원히 갈 수 있었는데 죄로 인해서 제한되어져 버렸습니다. 이래서 완전무결했던 복은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사실 우리들이 지금 복이라고 하는 것은 새로 생기는 게 아니라 원래 인류가 태초로부터 부여 받은 것입니다. 그 태초 때의 모습으로 회복되는 게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의 개념입니다. 이렇게 보면, 엄밀한 의미로 볼 때 지금 우리가 받는 복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After Service’입니다. 어떤 제품에 대해서 ‘After Service’를 한다는 것은 원래 상태로 회복시켜 주는 것을 말하지요? 우리 역시 하나님께 복 받으면 태초의 상태, 즉 완전한 최고 최선의 품질로 회복되게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치아를 금이나 백금이나 등등 좋다는 것으로 바꿔 해 놓아도 원래 치아에는 못 미치는 것처럼 우리 복이 제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태초에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셨던 그 복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제 자리로 돌아오는 사람에게는 그 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신명기 6;10-12.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너에게 주리라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시고, 너가 쌓지 아니한 성읍을 주고, 너가 건축하지 아니한 집을 주고, 너거 모아 들이지 아니한 각종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채워주고, 너가 심고, 뿌리지 아니한 아름다운 소산의 열매를 주고, 사시사철 열리는 가종 과실과 열매를 주리라. 여러분, 제자리에 있을 때, 은혜의 자리에 있을 때 주시는 것입니다.
이 뿐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저와 여러분의 신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아 저 하늘나라에 본향을 둔 사람으로 바뀝니다. 물론 지금 말씀 드린 복들이 너무나 추상적이라서 구체적으로 어떤 건지 헤아리기 쉽지 않으실 테지만 분명히 피부로 느끼실 수 있는 복을 우리 하나님은 마련해 두셨습니다. 야곱이 그 복을 받고 우리도 그 복을 받습니다.
여러분,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생육하고 번성하고 이스라엘의 조상이 됐습니다. 한떼, 두떼, 12떼를 이루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선언하신 대로 그로부터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사의 시작이 됐습니다. 성경의 다음 이야기는 바로 그 이야기로 끝까지 이어져 갑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야곱처럼 제 자리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그리는 자신 만의 제 자리가 있습니다. 돌아가야 하는 그 제 자리를 우리가 모르지 않습니다. 내가 결정해야 될 라이프 스타일, 내가 결정해야 할 마음의 태도, 내가 결정해야 될 영혼의 자리, 그 모두가 있어야 될 제 자리입니다. 제 자리에 있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그 자리를 이탈해 있는 한, 우리는 우리의 소명이 뭔지, 심지어는 살아갈 이유가 뭔지조차도 알 수 없게 됩니다. 우리 중에는 마땅히 있어야 되는 자리를 복의 자리로 생각지 않는 분이 있습니다. 사실 그 자리여야만 그게 가장 빠르고 편하고 안전한 길인데 별 것 아닌 자리로 여깁니다. 내가 지금 내 자리에 있는 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 자리에 있는 건가? 뭔가 일에 진척이 없고 방향이 잡히지 않는다면 바로 이것부터 점검해야 합니다. 야곱이 벧엘로 올라갔습니다. 우리도 벧엘로 올라가야 합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란 뜻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자”그 말씀에 다름 아닙니다. 이제 구체적인 제 자리 찾기는 여러분 각자의 숙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쓰시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우리 모두 정확한 제 자리에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때 거기서 신명기 6장의 축복이, 그리고 나의 인생길에 있어야 될 잔이 넘치는 필요가 채워질 것입니다. 제 자리에 있음으로 창조 때의 모습으로 회복시키는 그 일을 위해 우리에게 오신 분이 계십니다. 흠없고 완전한 의인으로 오셔서 우리의 깨진 심성을 회복하고, 태초의 아담과 하와로 부활시키기 위해서 아낌없이 자신을 내 던지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제 자리를 찾지 않는 한, 우리가 반드시 거해야 될 그 곳에 있지 않는 한 그 분의 십자가는 의미가 없습니다. 십자가 속에 우리 자리가 있고 십자가가 속에 우리가 선택할 자리가 있습니다. 마땅히 그것을 부여잡고 씨름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진정한 주의 자녀로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제자리로 돌아 와야 복을 받습니다. 베드로도 갈릴리 바다로 돌아 왔을 때 새로운 사명과 시각을 가지고 시작이 됩니다. 갈릴리바다, 나사렛 그 곳에서 다시 일어납니다. 룻기에 나오는 나오미도 모압지방을 떠나 그의 아름다운 자리 베들레렘 으로 돌아 왔을 때 너의 생명의 회복자, 너의 노년의 보양자,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가 낳은 아들, 룻이 출생을 시켰지만 나오미기 낳은 아들이라는 복을 받습니다. 제자리 은혜의 자리가 축복을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제 자리를 찾음으로 창조 때의 복을 받고 늘 주님 오시는 날까지 늘 승리하며 사시는 저와 여러분의 평생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목사로서 출발의 시점에서 신앙과 마음으로 결심하고 다짐했던 가사를 다시 한번 기억하면서 찬양을 드립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 찾아 나의 주님 이 죄인을 찾으셨도다. 양을 위해 생명 바친 목자의 음성 그 사랑을 잠시라도 잊지 말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