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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예배]마태 28;1-10. 새벽 미명에 하신 주님의 3마디 말씀. 2017. 4. 16.

작성자이상열|작성시간17.04.15|조회수79 목록 댓글 0

마태 28;1-10. 새벽 미명에 하신 주님의 3마디 말씀. 2017. 4. 16.

 

주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세상의 기준을 무너트리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아멘. 무덤을 찾아갔던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마리아가 무덤에 이르렀을 때에 이미 주님은 무덤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20장에서는 시몬 베드로와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먼저 도착을 했고 곧 이어 다른 제자들도 도착을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6절에 천사가 예수님이 여기 계시지 않고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 나셨다. 그리고 여기 무덤을 보라고 확인을 시켜줍니다. 여러분, 주님의 시신은 보이지 않지만, 주님의 모습은 없지만 이들이 얼마나 놀랐을까요?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런데 이런 와중에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은 새벽 미명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3마디 표현, 3마디 메시지입니다.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늘 여러분을 만나주시는 귀한 시간, 만나서 말씀해 주시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3마디 표현, 세 마디 메시지의 중심이 되는 단어가 무엇일까요? 평안과 갈릴리와 성령입니다. 가장 귀중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물론 오늘 본문 마태복음 속에서는 평안과 갈릴리 두 마디 단어입니다만 같은 장면의 예수님은 성령에 관한 부분을 또한 말씀하시는데 이는 요한복음에 나옵니다. 그러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왜 이 세 마디, 세 메시지를 말씀 하셨을까요? 여러분, 얼마나 반갑고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요?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내가 살아난다. 몇 번 씩이나 말을 했는데 귀담아 듣지 못하고 마음에 두지 않았느냐? 관심이 그렇게 없었느냐? 다른 사람들은 어디 갔느냐? 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평안하뇨?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 내가 먼저 갈릴리로 가겠다. 또 한 마디는 요20;22에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아라. 이 세 가지 표현을 합니다. 여러분, 보고 싶던 사람 만나면 어떻게 합니까? 이런 표현 아니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가장 사랑했던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 그리고 베드로와 사랑하는 제자 요한과 또 다른 제자들을 만나서 전혀 다른 표현을 합니다. 새로운 의미를 부여합니다. 왜 그럴까요?

 

1.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 메시지는 평안입니다. 왜 평안일까요? 몇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는 시작과 매듭이 평안입니다. 어제 저녁에 쉼을 얻고 주일 이 아침에 일어나서 살아 있음에 평안입니다. 4월 한 달의 시작도 평안을 위해서 4월 첫 주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일 년의 시작도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면서 평안이었습니다. 시작도 평안이고 매듭도 평안입니다. 언제나 평안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어느 집을 들어가든지 그 집의 평안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모든 것의 시작과 매듭이 평안입니다. 시작이 평안이면 주안에서 마침도 평안입니다. 오늘 마태복음은 시작의 평안을 말씀합니다만 요한복음은 아침과 저녁사건을 말씀하면서 아침과 저녁이 평안입니다. 누가 복음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두 여인에게 나타나고, 베드로를 만나시고, 슬픔에 잠겨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와 함께하고 떡을 잡수시면서 부활하신 주님,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낙심하여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평안을 주었습니다. 제자들과 여인들을 처음 만날 때마다 주님은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 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저녁에 제자들이 웅성거리면서 문을 단단하게 잠그고 모여 있는 장소에 들어오셔서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여러분, 주님께서 부활의 첫 선물이 평안입니다. 왜 평안입니까? 제자들이, 사람들이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장차 다가올 그들의 앞날과 무슨 일이 일어날 줄 모르는 불안과 피해, 현실과 내일의 문제 때문에 안절부절 못하던 때입니다. 유대인들의 적대감 때문에 모여서 향후 진로를 생각하던 때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새벽 미명의 소식 때문에 다시 모였지만 놀라움과 소망과 두려움이 뒤범벅이 된 때, 어리버리한 때, 문도 열어 주시지 않았는데 주님이 직접 들어오셔서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 하셨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평안입니다. 그런데 지금 부활 하신 주님의 첫 멧세지 평안과 살아생전에 제자들과 친밀한 대화 속에서 하시던 내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하시던 말씀의 의미가 다릅니다. 여러분, 이 불안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가장 먼저 있어야 할 축복이 무엇입니까? 바로 평안 아닙니까? 그 평안을 부활한 직후 첫 번째로 주셨습니다. 오늘 at the end와 같은 불안한 현실 가운데서도 모두에게 우선은 평안입니다. 두려움을 달래주는 평안입니다. 지금까지 어찌할 줄 모르는 불안과 걱정, 근심을 거두는 평안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 닫고 걸어 잠근 그 불안함에서의 평안입니다. 여러분, 닫아놓은 삶의 문이 있습니까? 닫아야만 하는 불안이 있습니까? 내일이 불안하십니까? 주님의 위로와 용기와 격려가 있는 아침과 저녁의 평안이 여러분들에게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두 번째는 목적을 염두 해 둔 평안입니다. 두려움 이상의 삶의 현장에서 무엇인가 하도록 부르심을 받는 일에 대한 용기와 격려와 목표에 대한 평안입니다. 그래서 요20;21절의 평안 뒤에 덧 붙여서 나도 너희를 이 땅에 보낸다는 말씀하십니다. 다시 보냄입니다. 제자들은 이미 주님 안에서 할 일이 있었습니다. 이 것을 압니다. 그런데 모두 내려놓았습니다. 3년 이전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목표와 목적과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까요? 우리의 삶의 목표를 어떻게 이루어 갈까요? 제자들은 주님이 안 계신 것 때문에 모든 목표를 내려놓았습니다. 목적을 내려놓았습니다. 해야 할 일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이 먼저는 두려움과 의문 속에서 평강을 주시고, 두 번째로 소망과 목표 속에서 이루어 갈 것에 대하여 평안과 평강을 주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축복을 위하여 사명을 부여받는 것에 평안을 주십니다. again start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19절의 평안으로 복을 받으시고 그리고 21절의 평안으로 새롭게 전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 두 번째는 주님이 먼저 갈릴리로 간다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에게 내가 갈릴리에 갈 것이니까 갈릴리로 오라고 합니다. 무슨 말씀일까요? 이 말씀은 처음 시작을 하던 곳에서 다시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장소의 개념입니다. 꿈을 가졌던 그곳, 그러나 살아가면서 실패한 곳, 그 곳에서 다시 시작입니다. 부활하면 갈릴리로 가겠다. 하지 않았느냐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빨리 알려서 갈릴리로 가서 거기서 주님을 만나라, 그 말씀입니다. 그런데 새벽 미명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험한 여인들은 이 모든 일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경황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곧 여인들은 자기들에게 있었던 일들을 제자들에게 알리고 제자들은 삶의 터전이었던 갈릴리 호수 연변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납니다. 그러면, 왜 하필 부활하신 주님은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기 원하셨을까요? 부활과 신앙이 진정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이것이 우리의 삶 속에 녹아져야 합니다. 그러면 갈릴리와 부활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왜 예루살렘이 아니고, 왜 여리고가 아니고 왜 사마리아가 아니고 하필 갈릴리입니까? 몇 가지가 있습니다.

 

2-1. 현재 있는 자리에서 시작함이 갈릴리입니다. 장소 개념입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실패의 자리이기도 하고, 권태로운 자리이기도 하고, 마지못하여 있는 자리일 수 있지만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내 자신의 삶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예수님의 부활 기사를 보면, 제자들은 갈릴리로 가기 전에 적어도 한 번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면 다시 만난 그 자리에서 무엇인가를 시작해야 되는데,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는 갈릴리에서 만나기까지 짧지 않은 공백이 있습니다. 그러면 왜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도 그대로 그들의 삶의 현장일까요?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했어야 할 제자들이 왜 이렇게 의기소침해 있을까요? 사실 한 성격하는 제자들의 모습이면,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를 쳐야 하지 않습니까?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빌라도, 예수님 대신 바라바를 불렀던 군중들 앞에 서서 무엇인가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것은 없고 오히려 제자들의 모습은 대체로 침울합니다. 그리고 3년 전에 하던 어부 일을 다시 시작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로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 자기들의 잘못 때문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함께 생사고락을 같이 했지만, 예수님이 잡혀 가시자 모두 도망을 갔습니다.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까지 모두들 벌벌 떨며 숨었습니다. 바로 그런 때에 돌아가셨던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시니까 기쁨보다는 뵐 면목이 없습니다. 양심의 가책과 함께, 자기들 스스로 이미 제자로서 자격을 잃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제자들을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먼저 만나 주셨습니다. 바로 그들의 되돌아간 삶의 현장 속으로 주님이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그들의 하던 어부 일을 도와주시고 함께 식사를 하시며, 용서함으로 그들의 허물을 덮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역시 실패와 실수를 딛고 지금 있는 자리에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놓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 하셨지요? 바로 그 땅 끝의 시작이 갈릴리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위대한 꿈을 품었어도 시작은 언제나 현재의 자리입니다. 답은 언제나 지금 있는 자리에 있습니다. 만약 지금 있는 자리가 답이 아니라면 주님은 떠나라는 싸인을 주십니다. 떠나는 것은 그때 떠나도 늦지 않습니다. 갈릴리는 지금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시고 이 자리에서 시작을 하십시오.

 

2-2. 갈릴리는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고, 인생 밑바닥입니다. at the end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늘 자책하는 것이 있지요? 시대를 읽어내는 판단미스와 게으름과 무능 때문에 언제나 계획했던 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속상함이 있고 후유증이 있고 아픔이 있고, 괴로움이 있습니다.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낙심하지요. 그런데 신앙과 부활이 가장 크게 적용되어야 할 곳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그런 면에서 어제 하지 못했던 일을 억지로 하지 마십시오. 안 된 것 복구하지 마십시오. 억지로 돌려놓으면 무엇인가 한 것 같은데 나중에 보면 이루어 놓은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새 날이 있고, 새 달이 있고, 새 해가 있는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만약 오늘 못한 것이 있다면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새 날은 어제 일을 잊고 다시 시작하는 날입니다. 새 달은 지난달을 잊고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새 해 역시 지난해는 잊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지 못하면 과거에 얽매이게 되어서 한 치 앞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방법을 찾고, 우선순위를 잃어버립니다. 그러면서 자기 상황에 합리적 해석을 가미해서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복이고 은혜라고 자위합니다. 밑바닥에서 해야 할 일을 감당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러면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까요?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을 하면 됩니다. at the end에서 다시 시작을 하면 됩니다. 갈릴리는 인생 밑바닥입니다. 자존심이 무너지고, 수치가 드러나고, 아픔의 고통이 이중 삼중으로 오는 그 밑바닥입니다. 갈릴리와 나사렛은 밑바닥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나 돈 많은 사람, 권력이 있는 사람이 비웃던 곳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거기서 다시 시작을 합니다. 갈릴리로 오래요. 여리고로 가지 말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고, 갈릴리로 오래요. 인생 구렁텅이입니다.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이 들지 않는 곳입니다. 죽는 곳입니다. 내 모습이 다 드러나는 곳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기 싫어합니다. 안 가려고 수단 방법 다 동원합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은 갈릴리로 오래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갈릴리에서, 인생 밑바닥에서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책임져 주시기 위하여 갈릴리로 부르셨습니다.

 

2-3, 갈릴리는 처음 원칙으로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갈릴리는 처음의 장소입니다. 꿈을 심었던 곳이 갈릴리입니다. 비전을 가졌던 곳이 갈릴리입니다. 예수님께서 3년간 먹이시고 입히시고 기적을 보이시고 사람을 살렸던 곳입니다. 인생 풍랑도 잔잔케 하신 곳이 갈릴리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의 역사도 갈릴리바다, 게네사렛 호숫가, 벳세다 광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시작을 했으면 결과는 예루살렘이어야 하잖아요? 자리 하나씩 차지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무엇이 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부활 하셔서 오늘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고 여리고로 가시면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갈릴리로 오래요. 왜 그럴까요? 답은 처음 원칙에서 더 큰 것을 보게 합니다. 여러분,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물을 씻었습니다. 바다 깊은 곳입니다. 그런데 주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더니 배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제자가 됩니다.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됩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늘 갈릴리에서도 제자들에게 배 오른편이라고 합니다. 거기서 그물이 찢어지도록, 그래서 다른 배에 옮겨 싣는 경험을 합니다. 153이 여기서 나옵니다. 3척이 동원이 됩니다. 갈릴리, 원칙에서 다시 시작을 하니까? 처음 갈릴리보다 더 큰 놀라운 역사를 경험합니다.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사람이 되고 오늘 이후로 가르쳐 지키게 하는 능력자들이 되는데 갈릴리에서 만들어집니다. 여러분, 어디로 가시렵니까? 처음 원칙의 갈릴리 아닙니까? 말씀을 의지해서 순수하게 순종했던 그 신앙, 그 믿음입니다. 주님은 이 시간 처음 원칙의 갈릴리로 부르십니다. 그 갈릴리에서 주님께 부르짖으면 됩니다. 29;11-1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처음 원칙의 갈릴리에서 부르짖으면 해결이 됩니다.

 

2-4. 사명을 발견하는 곳이 갈릴리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이 땅에 계셨던 것은 40일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부활 하셨으니까, 훨씬 더 큰 권능으로 힘 있게 일하실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대신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고 분부하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유언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주님의 하실 일을 제자들에게 모두 위임하셨습니다. 바로 이 위임하신 일을 하는 것이 부활의 신앙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 원래 죄인이고 죽었던 존재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를 살리셨고 소명하여 불러 주셨고 거기에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저나 여러분 모두는 사명이 있습니다. 여러분, 사명이 무엇입니까? 사명은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존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저나 여러분에게 살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나 때문에 살아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살린다는 것 쉽지 않습니다. 너무 부담스럽습니다. 나 때문에 어떤 사람이 예수 믿고 영생을 얻는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나 때문에 주변이 조금이라도 변하고 공동체가 변한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이 살리는 일에는 조그마한 관심, 한 마디의 격려, 한 줄의 메일이 때로는 사명이 될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직분이 무엇입니까? 장로, 권사, 안수집사, 집사, 평신도, 선교사입니다. 그럼에도 여러분을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세우셨습니다. 어디서 확인이 될까요? 갈릴리입니다. 갈릴리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고 사명 따라 살 수 있습니다. 아직 끝이 아닙니다. at the end가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at the end 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생은 주님 앞에 설 때에 판결이 납니다. 거기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이 여러분을 위해서 한 순간에 일을 만드시고 매듭지을 수가 있습니다. 갈릴리에서 매듭을 만듭니다. 소산의 열매는 주님이 허락하시면 단 한 번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열립니다. 전능하신 주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갈릴리에서 사명을 재발견하시고, 힘 있게 감당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5. 중요한 것인데 실패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잘못을 하고, 주님에게 십자가를 다시 지게 했다하더라도 갈릴리입니다. 언제나 갈릴리입니다. 죽어도 갈릴리입니다. 여러분, 엠마오 도상에서의 두 제자와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갈릴리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빠져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가롯 유다입니다. 가롯 유다는 새로운 갈릴리에 없습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 자리에 없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혹시 지금 하시고 있는 그 일이 이후에 잘못으로 드러날 때에 가롯 유다와 같은 길이라 해도 낙심하지 마시고, 자포자기 하지 마시고, 자학하지 마시고, 갈릴리를 기억하고, 갈릴리로 가셔야 합니다. 처음의 갈릴리는 한 사람이 낙오 했지만 새로운 갈릴리, 소망의 갈릴리, 부활의 주님이 계신 갈릴리에는 낙오자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비전교회 교우들은 어떤 경우에도 갈릴리를 찾으시는 복된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 세 번째 표현은 성령 충만 입니다. 성령을 받으라. 입니다. 여러분, 새로운 갈릴리에서 새롭게 인식을 하고 보아야 합니다. 다시금 주님이 내 곁에 있는 것을 확인해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시대를 읽고, 사람을 읽어 내야지요. 사건과 일을 해석해야지요. 왜냐하면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야 되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주님이 지금까지는 함께 있었지만 이제는 육체의 주님이 아닙니다. 육체는 공간의 제한을 받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아야 영으로 함께 하시는 주님을 성령의 조명에 따라 순간순간 바라보고 목표를 향하여 헤쳐 나갈 수가 있습니다. 인도하심이 성령입니다. 이끄심이 성령입니다. 기적을 이루는 것도 이제는 성령입니다. 여러분, 삶의 현실과 현장은 관계 아닙니까? 그런데 그 관계하는 일로 우리가 비전을 이루기도 합니다만 나에게 피해를 주고 나를 넘어뜨리는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탄을 어떻게 할까요? 광명 성으로 위장하고 다가오는 사탄과 세상 어두움을 어떻게 가려 낼 수가 있을까요? 이런 것들을 어떻게 다루고 어떻게 해야 목표한 삶을 이룰 수가 있을까요? 여러분, 내 자신과 타인을 용서하고 용납을 해야 시온의 대로가 열릴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왜 부활하신 예수님의 세 번째 말씀이 성령을 말씀하십니까?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가 있기 때문에 성령을 받으라 합니다.

 

3-1. 성령을 받아야 다시 주어지고, 이미 주어진 사명을 실천할 수가 있습니다. 20;21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보냄을 받기는 하는데 실천을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유가 3가지입니다. 자아가 죽지 않았기 때문에, 중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령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가지를 충족할 때 보냄이 이루어집니다. 어렵습니다. 그래서 20;22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 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그렇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아야 전도할 수 있고 참된 평안을 얻을 수 있고, 죽을 수가 있고 비전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성령을 받지 않으면 우리의 자아는 죽지 않습니다.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분노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원망과 불평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비교가 끊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신앙인들이 제일 많이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 상처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상처를 받습니까? 자아가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믿음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 살아있는 자아를 죽는 것입니다. 죽어야 거듭납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자아를 죽일 수 없기 때문에 성령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8;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성령이 임해야 자아를 죽이고 참된 평안을 누리며 나의 삶을 위대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시며, 내 쉬셨습니다. 불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아라! 취하고, 붙잡고, 놓지 않는 것입니다. 숨을 내 시며, 이 표현은 푸시케입니다. 받으라는 표현은 취하고, 붙잡고, 놓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푸시케 성령을 취하고 붙잡고 꽉잡는 것입니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주시는 목적을 20;21절에 보냄, 파송, send입니다. 주님은 막1:38절에우리가 다른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면 가까운 곳에서부터 출발해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파송이 되어 집니다. 1:8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주님이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속에 파송을 받고 세상 속에서 나에게 주어진 일에 감당이 되려면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3-2. 두 번째는 허물의 문제 때문에 성령입니다. 20;23절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이 말씀은 인간을 구원하기위하여 선결되어야할 문제가 허물인데 이제 성령께서 그 문제를 친히 해결하십니다. 허물이 있어도 성령이 충만하면 해결이 됩니다. 그런데 성령이 없으면 허물은 누적이 됩니다. 누적이 되면 방향도 모르고 진실이 무엇인지 모르다가 나중에 알게 됩니다. 그런데 그 때는 이미 아픔을 겪고 난 이후입니다. 여러분, 풀 수 있는 권세, 하늘과 땅을 움직일 수 있는 권세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주님이 주셨습니다. 성령을 받아야 용서가 됩니다. 성도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의 세 번째 표현, 성령을 받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3. 새로움과 안내의 문제 때문에 성령입니다. 정확한 분별입니다. 여러분, 거짓 정보가 얼마나 무서운지 아십니까? 지금 세상에 거짓 뉴스가 판을 칩니다. 그런데 우리 중 누구도 이런 위험으로부터 면제된 사람이 없습니다. 거짓 교리와 거짓 교사들의 뒤에는 마귀, 사탄이 있습니다. 베드로는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마귀와의 싸움에 있어서 늘 정신을 차리고 경계를 해야 합니다. 마귀는 어떤 때는 정면 공격을 해오지만. 어떤 때는 은밀히 공격을 해서 잘 모릅니다. 어느 때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오고, 달콤한 말로 다가옵니다.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합니다. 돌이 떡덩이 되게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을 접할 때 지혜롭게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무엇으로 분별을 할까요? 성령으로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저와 여러분을 주님이 이끄시고 성령님이 조명하십니다. 그리고 반드시 새로움과 정확한 안내를 받습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이 평안입니다. 갈릴리입니다. 성령을 받아라. 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이 본문인 만큼 제 이야기를 조금 하겠습니다. 제가 정식 절차에 따라 히메지로 온지도 벌써 2002322일이니까? 16년째입니다. 설교를 부탁받고 온지는 19991213일이니까? 19년째입니다. 그 때에 어떤 비전을 보고 일본에 왔을까요? 먼저 3년 동안 인턴 쉽을 하면서 일본의 상황을 보았습니다. 히메지와 가고가와 타가사고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강남 금식 기도원에서 10흘 간 금식기도를 하면서 한국이냐? 일본이냐? 아시아나 대한항공의 직원들이 있는 엘리트 교회냐? 히메지냐? 임지를 놓고 기도를 했습니다. 일본의 여기저기서 많은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이 오셔야 히메지가 바로 세워지고, 교회가 바로 세워지고 일본의 목회자들이 바로 세워지고, 교우들이 복을 받습니다. 반드시 오셔야 됩니다. 그런데 기도 중에 응답이 히메지였습니다. 그 이후로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헌신과 물질을 드리고, 이지메를 당하고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교우들의 잘못까지도, 모든 십자가를 제가 스스로 졌습니다. 교회만 바로 세울 수 있다면, 교인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 갈 수만 있다면, 교우들이 복 받은 사람이 된다면 어떻게 하든지 교회와 여러분을 주안에서 섬겼습니다. 그런데 이일에 동역할 사람이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이모로 저모로 동역 자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교우들이 잘 되는 일이라면 모든 것을 드려서 섬기고 길을 열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여러분들을 섬기고, 어떻게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을 섬겼는지 주님이 아십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사람을 얼마나 사랑하고 어떻게 섬겼는지 개인은 다 아십니다. 어느 때는 괴로웠고, 불안했습니다. 왜냐하면 힘들고 어렵고 아프고 낙심할 그 상황에 있는 성도님들에게 더 이상 해 드릴 것이 없어서 괴로웠던 때도 있었습니다. 주님께 불평한 적도 있고, 주님께 묻기도 했습니다. 이분들을 보시고, 이 현장을 보십시오. 어떻게 하시렵니까? 그런데 이제는 주님께서 평안과 갈릴리, 성령받게 하십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이렇게 살아야 하고, 십자가의 푯대를 향하여 전진하라. 이런 신앙의 굴레를 씌우지 않기로 했습니다. 복 받으려면 이렇게 하시고, 어려워도 주님을 따르고, 갈릴리로 가세요. 라는 믿음의 멍에를 씌우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냥 축복하고 그냥 기도 하고, 잘잘못을 말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부활의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가시는 그 길에 부활의 주님이 보이시면 갈릴리에 가십시오. 부활의 주님이 계신 그곳으로 가야 합니다. 거기서 주님을 뵙고 평안을 얻고, 갈릴리를 가고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여 성령을 의지하면 승리는 여러분의 것이 됩니다. 그렇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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