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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시 23; 1-6, 목자, 막대기, 잔2 2020. 7. 5.

작성자이상열|작성시간20.07.04|조회수182 목록 댓글 0

23; 1-6, 목자, 막대기, 2 2020. 7. 5.

 

이제 새로운 7월입니다. 지난 6개월의 시간 속에서 서글프고 외롭고 아프고 고통과 고난과 낙심의 모든 것들은 지난 시간과 이 시간 주님께 묻고 새롭게 다시 시작하기 위한 믿음의 결단과 결심이 있으면 됩니다. 그 걸음에 주의 은혜가 있고 복된 동행이 됩니다. 오늘은 지팡이와 막대기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1. 팔레스타인 지방의 푸른 초장과 맑은 시냇물입니다. 오늘 본문에 푸른 초장과 맑은 시냇물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목양의 환경이 아닙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은 양을 목양하는 환경이 사실 척박합니다. 푸른 초장과 맑은 시냇물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목자들은 계절에 따라 양을 먼 산간 푸른 초장으로 이끌어 갑니다. 중동지방에 푸른 초장과 맑은 시냇물은 산악과 계곡에 있습니다. 거기서 양들은 풀을 뜯으면서 매일 천천히 이동을 하는데, 산간이기 때문에 무척 힘들고 위험하고 목자 또한 바쁩니다. 목자는 이러한 환경 때문에 신경을 써야 하고 양에게 충분하게 먹이를 공급해야 합니다. 그래서 목자들은 양을 한곳에 머무르게 하지 않습니다. 양을 위하여 푸른 초장을 찾아서 이곳저곳으로 이동시키면서 신선한 풀을 먹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이동할 때에 늘 옳고 평탄한 길만을 가지 않습니다.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위험한 길을 갈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더구나 양들은 양들의 습성과 습관이 있는데 목자가 가는 길을 잘 따라가지 않고, 절제도 되지 않고, 방향도 모르고, 갔던 길을 되 돌아올지도 모르고, 자기를 보호할 그 무엇을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게 되면 낭떠러지로 떨어지기도 하고, 가시덤불에 걸려 길 잃은 양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양들은 먹이를 위해서 야산을 통과해야 하고, 목마름을 해소해야 하니까? 시내를 건너고, 험한 골짜기를 지나며, 높은 산을 오르게 됩니다. 그래서 수많은 위험이 따르는데, 독성이 강한 식물의 위험이 있고, 맹수의 습격이 있고, 폭풍우와 산사태와 시내의 범람과 같은 위험이 항상 따르게 됩니다. 그러면 무리에서 떨어지게 되고 또 맹수의 좋은 먹이 감이 되지요. 그래서 목자는 어느 때든지 지팡이와 막대기를 사용합니다. 양이 잘못된 길을 갈 때는 바닥을 쳐서 위협을 하고, 말을 듣지 않을 경우에는 양을 때려서라도 바른길로 인도 합니다. 왜냐하면 외부로 부터의 습격과 양들의 습관과 부주의로부터 죽음을 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것이 양을 살리고 지키기 위한 목자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기간과 우리인 울타리 안에 있는 동안이라도 목자는 한시도 양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양떼의 곁에서 밤낮으로 정성껏 양들을 보살펴야 합니다. 그러면 목자들이 왜 양떼를 골짜기로 인도할까요? 풀이 있는 곳에 오르려면 골짜기를 통과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 때문입니다. 모든 산에는 골짜기가 있습니다. 반드시 골짜기를 통과해야 합니다.

 

그리고 골짜기는 가장 훌륭한 급수로이기 때문입니다. 푸른 초장만 있으면 무엇 합니까? 양들은 먹이를 먹고, 여행을 할 때에 심한 갈증을 느낍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자와 양들은 이 골짜기에서 신선하고 맑은 물을 찾게 됩니다. 골짜기에 흘러내리는 시원한 물을 마시게 될 때, 타는 듯한 갈증이 사라지고, 양들은 다시 원기를 회복합니다. 목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루에도 알게 모르게 수많은 위험들이 얼마나 많이 밀어닥칩니까? 코로나 사태를 누가 알았습니까? 오늘 우리는 질병의 위험과 온갖 재난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실패의 위험과 전쟁의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험하고 위험한 인생의 골짜기를 거닐지라도 주님은 항상 그의 백성과 함께 동행 하시며, 눈동자처럼 보호해 주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아, 원기를 회복하고 생기를 회복할 수 있었던 때가 언제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생의 골짜기에 서 있을 때입니다. 실패의 골짜기와 낙심과 재난의 골짜기와 어둡고 쓰라린 생의 골짜기와 불안과 걱정의 골짜기입니다. 그러나 그 골짜기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생수를 마실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러분, 왜 목자가 그의 양떼를 골짜기로 인도해야 합니까? 이유는 높은 산봉우리로 오르려면, 먼저 반드시 골짜기를 통과해야만 하는 필연성 때문입니다. 푸른 초장이 있는 언덕에 오르려면 골짜기를 통과해야 합니다. 그리고 골짜기가 가장 풍부한 급수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높은 신앙의 봉우리로 올라서기 위해서는 생의 골짜기를 통과해야 합니다. 그 생의 골짜기에서 때로는 가장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떤 골짜기 가운데 있습니까? 아무리 어두운 생의 골짜기 가운데 처해 있을지라도, 절대로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원히 그 골짜기 가운데 서 있지 않습니다. 잠시 통과해야 할 골짜기입니다. 그 골짜기를 빠져나오면 높은 산봉우리로 오르는 길이 있고, 그 골짜기에서 주님의 은혜를 생수처럼 마시고, 영혼의 생기와 삶의 용기를 되찾으면 됩니다.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입니다. 지팡이와 막대기는 기계화된 수송 장비의 혜택을 누릴 수 없었던 당시의 목양에 반드시 필요한 장비입니다. 그런데 목자는 자기 몸과 자기 힘에 맞는 지팡이와 막대기를 소유합니다. 그래서 목자는 지팡이와 막대기 감이 될 만한 나무를 고른 다음 온갖 정성을 기울여 그것을 깎고 다듬습니다. 막대기의 손잡이는 부드럽고 둥글게 쥐기 쉽고 잘 던질 수 있도록, 자기 손에 정확한 크기로 깎습니다. 지팡이 또한 그렇습니다. 그런데 목양을 할 때에 지팡이와 막대기의 사용 용도가 조금 다릅니다.

 

2-1. 목자가 들고 있는 지팡이입니다. 지팡이는 어떤 의미에서 목자가 휴대하는 어떠한 장비보다, 목자의 신분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양을 관리하고 양을 안내하고 양을 보살피기 위해서만 사용되는 도구입니다. 지팡이는 일반 동물에게는 적합하지 않고, 오직 양에게만 필요해서 고안되고 만들어진 것입니다. 목자의 지팡이는 세 가지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양들을 한데 모아 친밀한 관계를 유지시켜 주는데 사용됩니다. 목자는 새끼 양들이 흩어지는 경우, 저들을 어미 양에게 몰고 가기 위해서 지팡이를 사용합니다. 암양들은 저들의 새끼 몸에서 사람의 손 냄새가 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손을 사용하지 않고 지팡이를 사용합니다. 또 양들을 인도하고 안내 하는데 사용합니다. 목자는 늘 항상 푸른 초장과 맑은 시냇물을 양에게 공급해야 하기 때문에 새로운 길을 가고, 이전에 경험했던 길을 가야 합니다. 늘 같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위험하고 좁은 길로 양떼를 몰고 갈 때가 많은데, 그 때에 지팡이로 양들의 옆구리를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양들은 목자가 원하는 길로 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지팡이의 용도는 안내와 방향입니다.

 

2-2. 막대기는 보호와 지킴과 단련의 용도입니다. 왜 막대기가 필요할까요? 내부적으로는 단련을 위해서 사용이 되고 외부적으로는 보호와 지킴을 위해서 사용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의 조건이 모두 양의 습성과 양의 습관 때문입니다.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양들은 분별이 안 되어서 제 길로 갑니다. 모든 양이 그렇습니다. 자기의 습관과 습성에 따라 행동을 하고 생각을 하고 푸른 초장과 맑은 시냇물 가로 갑니다. 그래서 목자는 이럴 때에 항상 막대기를 사용합니다. 막대기는 지지한다, 의지한다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본문이 말하는 막대기는 지팡이보다 긴 것으로서, 옛날 목자들은 자신의 키보다 더 길며 그 끝이 굽어져 있는 것을 사용했습니다. 막대기의 기능은 이중적인데 짐승들이 양들을 공격할 때 그것으로 짐승들을 내리치거나 던져서 쫓아내는, 양들을 보호하는 용도였습니다. 양떼들이 잘못할 때나 엉뚱한 길로 갈 때, 이 막대기로 그런 양들을 가볍게 때려서 바른 길로 이끌었고, 양들이 곤경에 처했을 때 끌어올리는데 사용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다른 길로 가는 양을 지팡이의 구부러진 끝을 사용하여 잡아당겼습니다. 그러면 언제 사용을 할까요?

 

첫째로 막대기는 양을 조사하고 양의 수효를 세는 일에 사용합니다. 무엇을 조사합니까? 양은 털이 무성하기 때문에 질병이나 상처를 살피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양의 피부와 건강 상태를 측정하기 위해서 막대기로 양의 가르마를 탑니다. 막대기로 양의 털을 가르면서 검진을 하게 되면 감추어진 질병이 드러나고, 치료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20:37에 내가 너희를 막대기 아래로 지나게 하며. 무슨 말씀입니까? 막대기 아래로 지나간 양은 막대기로 목자의 세심한 조사를 받은 양을 뜻합니다. 모든 양은 막대기 아래로 지나가야 합니다. 목자는 살펴야 합니다. 세심하게 주의해서 자상하게 보아야 합니다. 다윗은 양을 목양하는 동안 막대기로 양을 살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139:23, 24에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시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여러분! 이 얼마나 귀한 기도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목자로 삼은 다윗은 하나님의 막대기로 살펴주시기를 소원했습니다. 여러분, 왜 목사가 여러분을 시시콜콜하게 간섭을 하고 여러분을 살필까요? 왜 여러분을 조사를 하는 것같이 할까요? 그래서 기분이 나쁘고, 너무 한다고 하고, 다른 사람은 나보다 더하는데 목사님은 왜 나한테만 그러나고 합니다. 왜 이렇게 할까요? 목자의 손에 막대기가 들려있기 때문입니다. 손에 들려진 막대기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런데 막대기를 용도에 맞게 사용하지 않으면 선한 목자가 아닙니다. 선한 목자의 손에 들려진 막대기는 자신이 목양하는 양에게만 허락이 됩니다. 그래서 다른 양에게는 가르마를 하지 않고 살피지 않고, 간섭하지 않고, 조사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로 막대기는 양들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때에 보호하는 도구이고 그리고 외부의 침입자에 대한 도구입니다. 보호이고 지킴입니다. 막대기는 양떼를 괴롭히고 노리는 이리와 곰과 사자인 맹수들을 쫓아 버리고 때리는데 사용되는 아주 훌륭한 무기입니다. 그 때문에 양들은 자신들 곁에 목자가 있고 목자의 손에 들려져 있는 막대기를 보면 안심합니다.

 

세 번째는 양들을 구출하는데 사용합니다. 양은 완고한 동물이어서, 종종 엉뚱한 짓을 잘 합니다. 한 입밖에 되지 않은 풀을 욕심내고, 가파른 낭떠러지 가까이 가고, 강물에 빠지기도 하고, 깊은 구덩이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 때에 양을 구원할 유일한 도구가 바로 목자의 지팡이입니다. 물속에서, 구덩이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양을 건져낼 수 있는 것은 굽은 손잡이가 있는 지팡이 뿐입니다. 앞의 두 다리를 걸기도하고 뒷다리를 걸기도 하고 급하면 목을 걸어서라도 건져 올리고, 끄집어냅니다. 그래서 목자의 품에 안고 목덜미에 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갑니다. 양으로 비유된 저와 여러분은 분명히 양의 성질과 양의 근성과 양의 습성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물질을 따라, 세상을 따라, 정욕을 따라, 곁길로 가기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목자를 떠난 양이 얼마나 생존하겠습니까? 맹수의 밥이 되어 비참하게 희생이 됩니다. 그래서 삼하7;14,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을 들어서 다윗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을 사용하셨습니다. 왜 사용을 하셨나요? 그대로 놔두면, 반드시 사탄의 발톱에 찢기고, 멸망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막대기를 사용해서 깜짝 놀라 깨닫고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채찍을 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12;5-6,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여러분, 막대기를 사용하심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경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낙심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왜 그러해야 합니까? 주님께서 여러분을 진심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참으로 위험하고, 참으로 잘못된 것은, 품안을 떠나고, 신앙을 떠나는데도, 아무런 어려움이 닥치지 않고, 모든 일들이 잘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그러합니까? 내버려두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무관심 속에 그대로 내버려두시는 일보다, 더 큰 위험과 더 큰 잘못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한 삶에 무슨 의미가 있고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징계의 막대기와 사랑의 채찍의 의미를 잘 깨닫고 이 막대기를 통해서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막아 주시고 살려주시고 건저주시는 은혜를 깨닫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여러분, 가장 중요한 부분이 있는데,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다윗을 보호하는 것이 주목적이 아니라 안위한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목자의 지팡이와 막대기의 사용 용도가, 다윗이 평생에 경험한 지팡이와 막대기가 일종의 보호의 의미이었는데, 오늘 본문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안위, 나함이라는 말은 애석해 하다, 유감으로 생각하다, 위로하다(comfort)는 의미입니다. 안위는 다른 사람에 대하여 슬픔과 동정과 위로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다윗은 힘들고 어려울 때 목자이신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떠올렸고 그때마다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사방에서 적들이 공격해 올 때와 부하들이 자신을 배신할 때와 자녀들 때문에 속이 썩을 때와 스스로의 허물로 인하여 괴로울 때 자신이 얼마나 무기력하게 보입니까?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어요. 여러분, 사실 이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다윗은 자신이 인생의 골짜기에서 깊고 어두운 날을 보낼 때마다, 자신의 목자가 되셔서 지팡이와 막대기로 자신을 돌보신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길을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고 또 찾으시는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곁에 계신다는 것 때문에, 그는 정말로 크고도 놀라운 위로를 받았고, 그 위로로서 다시 일어설 수가 있었습니다. 때로는 세상이 더 커 보이고, 사람이나 원수의 공격이 더 강해 보이고, 자신의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순간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그는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자신을 위로하고 있다는 것을 믿었고, 그 믿음은 그대로 다윗의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안위하신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지 푸른 초장과 맑은 시냇가가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볼 때마다, 사용되어질 때마다 괴로움과 두려움과 아픔과 기피가 아니라, 안위가 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4. 자존감과 자신감입니다. 다윗은 늘 생각을 했습니다. 무엇을 생각했나요? 하나님 안에서의 다윗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여러분, 오늘 지금이 얼마나 힘이 드시고 어렵습니까? 자존감이 무너지고 존재의 의미도 잃어버리시지는 않는지요? 그런데 아무리 환경과 여건이 어렵고 힘이 들고 고통과 아픔이 있더라도 신앙인은, 믿음의 사람은, 절대로 피해야 할 4가지가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목자이시기 때문에 목자가 이끌고 목자가 안내하고 목자가 지키고 목자가 주시는 푸른 초장과 목자가 허락한 쉴만한 물가로 만족했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절대로 피한 4가지가 무엇입니까?

 

4-1. 다윗은 자신의 한계를 설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신의 한계를 설정하면 앞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한계를 설정하는 것은 실패를 한 것 때문에 다시 뛰지 않는 것입니다. 다윗의 아버지는 이새입니다. 8번째 아들입니다. 어머니가 다른 막내아들입니다. 그래서 몇 마리가 안 되는 양을 목양하는 사람, 목자가 되었습니다. 부모에게도 잊혀 진 존재입니다. 집과 멀리 떨어진 광야에서 양을 목양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을 끌어 올려서 사무엘을 통하여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붓습니다. 장차 이스라엘의 다음 왕이 되는 예언의 순간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요? 곰의 발톱과 사자의 입에서 양을 구하기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바친 다윗입니다. 물맷돌을 돌려서 양을 보호한 다윗입니다. 철저하게 양의 울타리와 우리가 되어 주었고 양을 지키고 양을 보호했습니다. 그런데 골리앗과 대면한 이스라엘의 사울 왕과 이스라엘의 군사와 용사들이 블레셋 군대에게 벌벌 떨고 백성들을 구출할 생각을 못합니다. 하나님을 모욕하는데도 그냥 듣고만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여호와의 신에 크게 감동이 된 이후에 다윗은 바로 13-14살 된 어린 아이일 때 전쟁에 참여합니다. 아버지 이새의 부탁으로 형들의 안부를 위해서 전쟁터에 갑니다. 그런데 바로 이 때에 모든 이스라엘 왕과 용사와 백성들이 모두 두 손을 들고 항복하는 그 순간에 어린 다윗이 삼상17;26, 이 할례를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인데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가? 17;32, 사울 왕에게 블레셋 사람으로 인하여 낙담하지 말 것이라. 17;37,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 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저내시리라. 17;47,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여호와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위대한 말을 남깁니다. 그리고 전쟁은 다윗의 승리로 끝이 납니다. 다윗은 어려서부터 늘 믿음 가운데서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온 사람이고, 다윗의 생각 전체에 주님이 있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때마다 위기마다, 어려움 속에서도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자존감과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한계를 설정하지 않았습니다.

 

4-2. 포용력이 없이 경쟁만 하지 않았습니다. 너 죽고 나 살자고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으로부터 다윗은 한 순간도 쉼을 얻지 못하고 계속해서 도망을 다닙니다. 애매하게 누명을 쓰고 10년이 넘도록 사울 왕을 피하여 도망을 다닌 사람입니다. 일부러 죽게 만들려고 블레셋 용사의 양피 100명을 요구 했지만 다윗은 200 명의 양피를 가져옵니다. 사울이 던진 단창에 맞을 뻔 했습니다. 그럼에도 악신이 걸린 사울 왕을 치료해줍니다. 라마 나욧으로 도망을 가고, 사울 왕이 쏜 활에 죽을 뻔 하고 놉 땅으로 도망을 가고, 자기가 물리친 블레셋 땅으로 망명하여 들어갑니다. 삼상 21;13, 에서는 다윗이 미친체하고 대문짝을 그적거리고 침을 일부러 수염에 흘리기도 했습니다. 삼상22;1 아둘람 동굴로 피신을 했는데 아무 것도 없는 환난을 당하고 빚을 지고 마음에 원통한 불쌍한 사람들 400명이 다윗에게 옵니다. 혼자서 도망을 다니기도 힘이 드는데 이들은 바로 600명이 되어서 유다 땅 헤렛 수풀로 도망을 합니다. 도액이라는 에돔 사람에게 배반을 당합니다. 그일라로 피신을 합니다. 십 황무지로 도망을 하고 다시 마온 황무지로 도망을 합니다. 안 다닌 곳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어려운 일을 당하며 사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자신을 절제합니다. 포용력이 없이 경쟁만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오늘 상황이 어렵습니까? 다윗만큼 10년이 넘도록 도망을 다니고 위험했던 순간들이 있습니까? 다윗보다 더 합니까? 어려움을 통과하는 가운데서도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모습인지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결국 다윗은 지팡이와 막대기로 잔이 넘치는 사람을 삽니다.

 

4-3. 그저 성실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면 아니 됩니다. 성실한 것 위에 탐색하고 기회를 포착하고 어떤 시각과 사고가 있어야 합니다. 다윗이 위대한다는 것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달란트를 끊임없이 사용했습니다. 다윗만한 시인이 없고, 다윗만한 작곡가가 없고, 다윗만한 연주가가 없고, 다윗만한 연출가가 없고, 다윗만한 장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냥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얼마나 뼈를 깎는 노력을 했습니까? 성실로 식물을 삼아야 합니다만 자기의 성실이 아닙니다. 주의 성실입니다. 그래서 모든 상황에서 다윗의 규례가 기준이 됩니다. 다윗은 항산 어떤 상황이든지, 무엇을 하든지, 탐색하고 기회를 포착하고 주님 시각과 사고로 삶을 삽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요?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 때문입니다. 목양으로 성실하게 삶을 살았지만 다윗은 기회가 주어지면 기회를 포착합니다. 탐색을 했기 때문에 북쪽 이스라엘의 왕으로 7년을 보내고 유다의 여러 장로들에게 전리 품을 나누어 주고 그리고 마침내는 헤브론에서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을 삽니다. 그랬더니 삼상18:12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사울과 세상과 세상의 사람들이 두려워하게 됩니다.

 

4-4. 잘못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 일을 하면 아니 됩니다. 인정해야 더 길이 보이고 소통이 됩니다. 물론 잘못을 인정하려면 용기가 필요해요. 나단 선지자의 지적에 용서를 구합니다. 침상이 썩고 마르도록 인정을 합니다. 인생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다스리는 잘못을 인정합니다. 34;4,6.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가 아닙니다. 어제의 내 모습과 비교해서 주님 앞에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전진이 되었으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목자이신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의 위력을 충분히 경험했습니다. 여러분, 생각한다는 말이 영어로 무엇입니까? think입니다. 말하기에 앞서서, 행동하기에 앞서서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think를 철자대로 풀어서 의미를 부여하면 ttruth, 과연 내가 말하고, 행동하고자 하는 것이 진실 된 것인가? 잘못되고 거짓된 것은 아닌가? 이것입니다. hhelp 입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고 내가 이렇게 행동함으로써 내게 도움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가? 깊이 생각 하는 것입니다. iimportant입니다. 이 것이 중요한 일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nnecessary로 이 말을 지금 꼭 해야 하는가? 이 행동을 지금 꼭 해야 하는가? 그 필요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필요 없으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kkind입니다. 친절입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고, 내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거나 아프게 하는 것은 아닌지, 친절한 행위인지를 생각하면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은 사무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아버지 이새의 집에서부터 세상을 떠 날 때까지, 왕위를 밧세바의 아들 솔로몬에게 양위를 할 때까지, 블레셋의 아기스에게 망명 할 때 까지,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유다를 비롯한 통일 왕국의 왕이 될 때까지 이렇게 think를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었습니까? 주님 때문입니다. 그리고 안위가 되시는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면서 한 사람의 유명한 말로 결론을 맺으려고 합니다. 18세기 초의 영국의 유명한 문필가였던 조셉 애디슨(Joseph Addison)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he grand essentials to happiness in this life are something to do, someone to love, and something to hope for. 무슨 말입니까? 인생에서 근본적으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주님 안에서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something to do, 무엇인가 해야 할 일이 있고, 두 번째로, someone to love, 누군가 사랑해야 할 사람이 있고, 세 번째로, something to hope for, 무엇인가 바라고, 기대할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합니다. 사랑해야 할 대상이 분명합니다. 내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면서 살아가야 할 존재입니다. 그리고 소망이 있습니다. 해 아래 이 세계에서만 집착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해 아래와 해 위의 세계와 영원한 세계를 소망하는 삶 가운데서 소망과 목표를 바라보며 그리고 이루며 살아가는 부족함이 없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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