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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요한의 복음, 12;1-8. 바리새인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2. 2020. 9. 20.

작성자이상열|작성시간20.09.19|조회수2,120 목록 댓글 0

요한의 복음, 12;1-8. 바리새인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2. 2020. 9. 20.

 

향유옥합 사건은 사복음서에 다 나오는데, 26:6-13, 14:3-9, 7:36-50, 12;1-8에 나옵니다. 조금 차이가 있지만 요한복음은 유월절 엿새 전,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종려주일 하루 전날인 토요일에 일어난 사건으로 등장을 합니다. 여리고를 거쳐 예수님의 일행이 도착한 곳은 예루살렘과 3km 떨어진 감람산 동쪽 베다니였습니다. 베다니는 소외된 사람들의 마을입니다. 사회로부터 냉대를 받던 마을 사람들의 상황과 마음을 반영해서 슬픔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베다니로 불렸습니다. 1절 하반 절에서 베다니를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고 그곳에서 향유옥합 사건의 시작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설명하는데 2절에,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2절 맨 앞에 그래서 그들이 거기서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원인과 결과를 말 하는 그래서는 베다니에서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베푼 이유인데, 그 것은 나사로의 다시 살아남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사로의 가족들이 감사해서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잔치가 배설된 곳이 나사로의 집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이 베다니로 언급되었습니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와 누가복음에서는 초청한 사람이 이전에 나병환자였다가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바리새인 시몬이라 합니다. 잔치가 배설된 곳은 나사로의 집이 아니고, 나사로와 친분이 있는 시몬의 집입니다. 그런데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마르다는 여전히 섬김의 일을 잘 합니다. 손님 대접을 잘 하는 것을 잘 하는 것도 있지만 나사로를 살려주신 것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나사로는 예수님 옆에 비스듬히 기대어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왜 잔치 집에서 함께 즐기지 않았을까요? 그녀는 언니처럼 음식준비를 하지 않았고, 이전처럼 주님 앞에서 그 말씀을 듣지도 않았습니다. 무엇을 했나요? 3.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시몬은 모두가 부러워하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병에 걸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누구나 성인이 되면 하나님 앞에 자기 몫의 예배를 드림으로써 예배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영적 자부심을 갖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바리새인이라 할지라도 나병이 걸리면 높은 신분과 상관없이 그 사람은 예배의식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의 일행을 자기 집에 초청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그 일행은 시몬의 초청에 응하여 그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이는 시몬이 더 이상 나병환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 집에 초청한 나병환자 시몬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합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도 동일합니다. 그런데 눅7:39절에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였다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여기에서 그는 향유를 부은 마리아와 함께 예수님까지 마음으로 정죄를 합니다. 시몬은 나병을 고침 받은 사람으로서 그 잔치의 주인공 역할을 할 수 있었는데 주변사람으로 남았습니다. 왜냐하면 이전까지 받아왔던 그리고 계속해서 받는 은혜가 조금 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하여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에 최소한 풍습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마리아는 그 상황의 아픔의 눈물로 주님의 발을 씻겨 드렸습니다. 평화의 인사와 환영의 입맞춤을 받지 못하고 발 씻을 물을 제공 받지 못한 주님을 위하여 그 발에 입을 맞추고 아주 값비싼, 300데나리온, 오늘날 추산 3백만엔의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처럼 당당히 주님의 아픔과 주님의 고난에 함께 하려는 사람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주님의 모욕과 아픔 앞에서 눈물로 그 발을 씻기며 입맞춤함으로 주님의 마음을 위로하는 사람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여러분, 누가 주님이 받으시는 모욕과 슬픔을 읽으려 합니까? 누가 주님의 그 마음을 알아서 마리아처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감당하려 합니까? 여러분, 신앙인의 인생의 품격이 어디서 나옵니까요? 그리스도의 흔적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옵니다. 무엇입니까? 역경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배신을 당해도 섭섭한 시간으로 낭비하지 않고, 질타를 받아도 의기소침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향한 신앙과 믿음과 은혜에 대한 감사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어려움을 감내하는 것, 이 것이 마리아의 인생의 품격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비전에 뜨겁게 응원하고 행복에 힘차게 박수치고 아픔을 내 아픔처럼 여기고 활짝 웃음으로 온 주위를 밝게 했습니다. 사명인생을 바뀌지 않도록 했습니다. 여기에 비하여 시몬과 제자들은 계산적이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생각을 합니다. 이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1. 일어난 일은 이미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아파하고 미련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이 발생이 되었으면 어떻게 수습을 하고 어떻게 다시 시작을 할 것인가를 주님 앞에서 결정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7:37 이하에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생수를 마시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지금 목마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코로나로 다 목이 마릅니다.

그런데 빌 게이츠는 오늘의 현실을 보면서 코로나19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빌게이츠는 세상의 모든 일에는 그 것이 선이든지, 악이든지, 어떤 영적인 뜻이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코로나19는 발생이 되었습니다. 코로나 19로 이전에 무심코 지나가고 잊혀지고 알려고 하지 않았던 몇 가지를 알게 했다고 했습니다. 1) 코로나19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문화나 종교와 직업과 재정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평등합니다. 이 바이러스는 우리가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우리 모두를 평등하게 대합니다. 2) 코로나19는 모든 사람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바이러스는 여권이 필요 없고 사람들이 세워 놓은 가짜 국경선이 별 의미가 없습니다. 3) 코로나19는 단기간 억압함으로써 온 생애를 억압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가르칩니다. 그동안 인공 식을 먹고 화학 물질에 오염된 음료를 마시면서 건강을 무시해 왔습니다. 건강을 돌보지 않으면 병에 걸리게 마련이지요. 4) 코로나19는 인생이 짧다는 것과 해야 할 더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를 가르칩니다. 서로 도우며 고아와 홀로 사는 여인과 나그네를 위한 거룩의 한부분이 더 중요합니다. 5) 코로나19는 사회가 얼마나 물질 위주로 변했는지 가르쳐 줍니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정작 필요한 것은 식료품과 물, 약과 같은 본질적인 것이지 때로 필요도 없이 가치를 부여하는 사치품들이 아님을 깨닫게 합니다. 6) 코로나19는 가족과 가정생활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것을 얼마나 무시해 왔는지를 가르칩니다. 7) 코로나19는 진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가르칩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은 직업일 뿐입니다.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은 창조된 뜻대로 서로 보살피고 서로를 보호하고 서로에게 도움과 보탬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8) 코로나19는 우리의 자아상을 계속 점검하라고 가르칩니다. 스스로 대단하다고 생각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훌륭하다고 말을 해도 단 하나의 바이러스가 이 세상을 멈추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십자가의 본 뜻을 행할 자유 의지가 나의 손에 달려있다고 가르칩니다. 9) 코로나19는 인내할 수도 있고 공황장애에 빠질 수도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런 일이 역사상 여러 차례 발생했으며 이것도 지나갈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심리적 공황에 빠져서 세상 종말이라고 생각하고 결과적으로 선보다 악을 더 키워갈 수도 있습니다. 10) 코로나19는 이 시간이 종말이 될 수도 있고, 새로운 시작이 될 수도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은 성찰과 이해를 통하여 잘못으로부터 배우는 시간이 될 수도 있고, 배워야 할 것을 배울 때까지 계속 반복되는 회로의 시작이 될 수도 있습니다. 11) 코로나19는 이 지구가 병들었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모든 난관이 지나간 뒤에는 평온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공황에 빠질 일이 아닙니다. 이것도 지나갈 것입니다. 12)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19를 거대한 재앙으로 보지만, 살아온 중요한 교훈들을 일깨워주기 위하여 그것이 주어졌고, 그것들을 배울지 말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코로나가 발생이 되었지만 빌 게이트는 어떻게 수습을 하고 어떻게 다시 시작을 할 것인가를 주님 앞에서 결정을 합니다. 오늘 마리아는 주님을 위하여 가장 선한 것을 결정하고 행동을 합니다. 불평하지 않고 소리치지 않고 묵묵히 자기의 할 일을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과 문둥병자 시몬은 가장 나쁜 것을 결정하고 행동을 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해야 하나요? 맡기시고 허락하시고 주시고, 받은 은혜와 복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2017년 활동한 미국의 LPGA 한국선수 명단을 확인해 보았더니 53명이나 됩니다. 엄청난 인원입니다. 그런데 더 대단한 것은 2017년 봄까지 LPGA 투어에서 한국여자골퍼가 우승을 차지한 것이 무려 180승 입니다. 그 중에 2014년 에비앙챔피언십 첫날 61타를 치면서 메이저 역사상 18홀 최소타로, 그것도 메이저 첫 출전에 우승을 한 골프천재로 불린 선수가 있습니다. 1995년생 김 효주입니다. 2015년 이후 별다른 성적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어느 대회에서는 경기 내내 피로감을 호소하다 기권까지 했습니다. 한국의 삼성병원 스포츠의학센터에서 정밀검사결과 다른 선수들에 비하여 근육 량이 모자라는 체력이 약하다고 판정을 받았습니다. 특히 어깨와 팔의 움직임을 지탱하는 등 쪽 근육 량이 많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매니지먼트사는 선수와 상의해서 무리한 스케줄을 조정하고 체력강화 프로그램도 마련했어야 했습니다. 약점을 보완하며 기초를 단단히 해갔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 해 미국에서 25, 한국에서 5개 대회에 참가했습니다. 장거리 이동을 하며 일 년에 30개 대회에 출전했으니 체력이 약한 김 효주로선 심각한 후유증이 예상되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무리한 경기 출전으로 물 흐르듯 유연하던 스윙은 흐트러졌고, 자신감도 땅에 떨어졌습니다. 리디아 고와 함께 세계랭킹 1위를 다툴 것이라던 장밋빛 전망은 옛 날 이야기가 됐습니다. 아무리 천재성을 지닌 뛰어난 선수라 하더라도 관리를 부실하게 하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는 나는 내가 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인생 내내 지나치게 열심히 일했고 내 주변의 모든 유혹을 받아들여 즐겨도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돈과 명예 덕분에, 그 모든 것들은 내 주변에 항상 있었다. 그런데 이 모든 건 틀린 생각이었고, 나는 어리석었다. 3살 골프신동으로 시작하여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이력과 업적을 쌓았지만, 우즈는 그 속에서 변해가는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고, 관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베다니 시몬입니다. 문둥병에서 치료를 받고 완쾌가 되었지만 베다니입니다. 슬픈 사람들의 마을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입니다. 그래서 흔들리고 관리를 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목마르시지요? 힘드시지요? 누구든지 주님을 찾으면 이 상황에서도 주의 주실 은혜가 넘치시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제자에서 배신자로. 관리가 부실하면 아무리 큰 은혜를 받았다 하더라도 관리하지 않는 신앙은 변질되기 쉽습니다. 4복음서 말씀에는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은 나병환자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 고침을 받은 사람의 이름을 밝힌 것은 바리새인 시몬이 유일합니다. 그만큼 시몬에게 임한 주님의 은혜가 특별했습니다. 그는 분명 예수님에 대하여 놀랐으며, 감사했고, 감격했습니다. 하지만 얼마인지는 알 수 없으나 시간이 지났을 때 그는 예수님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흠을 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왜 그가 변심했는지? 그 이유를 밝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만, 그의 이름 앞에 나병환자라는 말과 더불어 붙어있는 바리새인이라는 수식어를 통하여 충분히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에 의해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의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모의 이후 그는 은혜를 입은 사람에서 체포에 동조하는 사람으로 입장을 바꾸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이라는 진영의 논리를 쉽게 벗어나기 어려웠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어떻습니까요? 주위에 많은 분들이 조직의 문화 때문에, 상명하달의 업무를 수행하다보면 처음 다짐을 했던 마음과는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쉽게 동조를 하고 합류를 하고 생각을 공유합니다. 그리고 행동을 하지요. 나병환자 바리새인 시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배은의 길을 주저 없이 걷는 나병환자 시몬입니다. 그러면 시몬만 그렇습니까?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예수님을 향한 공개적인 모욕주기가 행해지고 있는데도 제자들 중 어느 하나 나서며 항의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때 등장한 사람이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자기가 가장 사랑하고, 가장 존경하는 주님이 그런 무례한 대접을 받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라도 예법대로 주님의 발을 씻겨드리고, 마음을 다하여 환영하고 섬겼습니다. 슬픈 마음에 눈물을 흘렸고, 그 눈물로 주님의 발을 씻겨 드렸습니다. 그리고 아주 값비싼 향유를 부어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리아의 동기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고 행동 자체에 대하여 강하게 비판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마가복음은 어떤 사람들(14:4), 마태복음은 제자들(26:8)이라 하고, 누가복음은 침묵하는 대신 초대한 바리새인 시몬의 일탈(7:39)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그가 가룟 유다라고 분명하게 지적합니다. 복음서를 종합적으로 볼 때, 마리아의 행위를 비난했던 사람들은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과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왜 가룟 유다를 콕 찝어서 지명했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사도 요한의 보기에 마리아의 행위를 가장 싫어하고 가장 분노한 사람이 가룟 유다였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가난한 사람을 위한 의분으로 포장을 했지만, 실상은 6절에 횡령할 악한 목적이 있었음을 밝히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이 가룟 유다를 밝히면서 그의 이름만을 언급하지 않고, 왜 그가 제자 중 하나라는 사실과 함께 예수를 잡아줄 자, 배반할 자임을 언급했을까요? 이는 가룟 유다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는 이방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저자의 배려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입니다. 여기에 더더욱 깊은 메시지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마태복음이 언급하듯이 다른 제자들 중에도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내용이 무슨 뜻입니까? 아무리 예수님의 제자라 하더라도 주님과 다른 생각을 품을 수 있고, 심지어 배반할 수도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좋은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이 좋은 성적을 보장하지는 않고, 좋은 교회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이 좋은 신앙을 보장하지도 않고, 좋은 사람이 옆에 있다고 동행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곳에 소속되어 있다고 해서 저절로 거룩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요 며칠사이에 참으로 힘들고 어렵고 괴로웠습니다. 필요로 하시는 모든 것을 해결해 주려고 했는데 그리고 도와주고 살려주려고 했는데, 잘못을 하면 다 뒤집어 써야 하는 상황에서도 따라주려고 했는데, 해도 해도 변하지 않고 자기 생각을 말하고 자기의 뜻대로 하겠다고 하는 사람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기 때문에 미리 말을 하고 권면을 하고 조용하게 방향조정을 하려고 했는데도 결국에는 자기생각이라는 표현과 함께 자기 뜻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관여하지 않고 여기까지라고 했습니다. 목사가 옆에 있는데도 목숨이 경각간에 달렸는데도 자기 생각이고 자기 뜻입니다. 여러분, 자기관리가 부실하면 어떤 좋은 조건이 있다 하더라도 실패하기 쉽고, 거룩하게 시작했다가 추락하기 쉽습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의 12제자 중 하나로 시작을 했는데 사도가 되지 못하고 배반자로 마쳤습니다.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위대한 저술가이기도 하고, 정치가이기도 하고, 사회사업가이기도 하고, 발명가이기도 했습니다. 젊은 시절에 벤자민 프랭클린이 청운의 뜻을 품고 자기가 살고 있던 시골을 떠나서 큰 도시로 나갈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출석하고 있던 교회의 목사님을 찾아가서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이제 청운의 꿈을 가지고 도시로 나가려고 합니다. 인사를 드리려고 왔습니다. 목사님, 제가 꼭 기억해야 할 귀중한 말씀을 한 마디만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만 끔뻑끔뻑하면서 프랭클린을 한참 쳐다보았습니다. 시간이 한참 지났습니다. 그래도 목사님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멋쩍었겠습니까?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프랭클린이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럼 목사님, 안녕히 계십시오. 머리를 긁적긁적하면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프랭클린이 키가 좀 컸던 모양입니다. 나오다가 쾅! 하고 세차게 문지방을 들이받았습니다. 갑자기 들이받았으니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목사님이 프랭클린을 불러 세웠습니다. 여보게. 자네 어디를 가든지 앞으로 고개를 숙이며 다니고 아무리 언짢은 일을 당해도 인상 쓰지 말고 살게나. 이 두 가지를 명심하면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 안에서 승리할거야. 프랭클린은 목사님이 주신 이 두 가지를 마음에 깊이 새겼습니다. 좌우명으로 삼았습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내가 먼저 고개를 숙이고 겸손하게 살자. 아무리 나를 언짢게 하고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을 만난다 할지라도 절대로 얼굴색을 변하지 말고 환하고 기쁜 표정을 짓고 살자. 이 두 가지를 어디 가든지 잊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프랭클린은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에 한 사람으로 꼽히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받은 은혜와 복을 잘 관리하고 앞으로 받아야할 수많은 약속된 은혜를 잘 관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 거룩한 곳에서 다른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코로나로 지금 힘들지요? 여러 생각을 하게하지요? 어렵고 힘이 들지만 지금 주어진 이 시간을 값지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이 삶을 보람 있고 값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I am able to do all things in Him who empowers me 4:13. 여러분, 우리는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며 살아 낼 수 없는 삶을 살고 온유와 겸손까지도 뛰어 넘는 은혜의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이는 주님이 주시는 능력 때문입니다. 주님의 능력이 부여되고 확인이 되는 곳이 거룩한 곳입니다. 그런데 거룩한 그곳에서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행동을 합니다. 시온의 대로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생각해야 하는데 안 되고 막히고 뒤 돌아가는 것만 생각을 합니다. 부정적입니다.

 

1942년 영국 옥스퍼드의 주민들이 독일 나치 치하에서 고생하는 그리스인을 구호하기 위해 결성한 빈민구호단체가 옥스팜(OXFAM)입니다. 현재 14개 기구의 연합체로서 100여 개국에서 3,000여 개의 제휴 협력사와 함께 빈곤 해결과 불공정 무역에 대항하며 구호활동을 펼치고 있는 단체입니다. 그런데 이 단체가 아이티 대지진 현장에서 구호활동을 펼치던 중에 소장을 비롯한 구호대원들의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당시 중남미의 가난한 섬나라 아이티는 2010년 규모 7.0의 강진이 발생하여 20만 명 이상이 사망한 상태였습니다. 자연재해로 도움이 절실하고 취약한 사람들을 상대로 그들은 겉으로 인도주의적인 대응을 앞세우면서도 뒤로는 자신의 직위를 이용하는 범죄를 자행했습니다. 그런데 옥스팜이 이들의 그러한 비위사실을 알고도 은폐하려 했습니다. 옥스팜에 대한 이러한 보도가 이어지자 1971년 프랑스 의사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의료인도주의 봉사단체인 국경없는 의사회(Medecine Sans Frontieres)가 만들어 졌습니다. 국경 없는 의사회는 전 세계에 4만 명의 스태프를 둔 세계 최대 규모의 의료구호단체로, 주로 아프리카나 중동 등의 분쟁 지역에서 인도주의적인 의료 구호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1997년엔 북한에서 구호활동을 펼친 공로로 서울시로부터 서울평화상을 받았으며, 1999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던 구호단체입니다. 정치·종교·인종·이념을 초월한 봉사단체로서 고고한 목적을 위해서 일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봉사의 현장에서 인권을 유린했습니다.

여러분, 내가 거룩하고도 고고한 일을 하는 곳에 있다고 해서, 나 자신이 자연스럽게 거룩하게 되는 일은 없습니다. 남들이 나를 거룩하게 봐주는 일은 있을지라도 결코 저절로 거룩한 존재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옥스팜이나 국경없는 의사회는 아니다 하더라도 우리 생각에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거룩하고 괜찮은 존재로 세워 질 것이라는 착각을 갖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단호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줄 사람이 된 가룟 유다처럼 우리 또한 어느 틈엔가 그런 사람으로 서 있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4-7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 이러라. 여러분, 이 본문을 기록한 사도 요한이 어떨까요? 같은 제자로 거룩한 부르심을 받았음에도 다른 생각과 다른 행동의 길을 가는 동료를 바라봤던 사도 요한의 아픔입니다. 그것은 거룩한 자리에서 거룩한 일을 해 가고 있음에도 변질해 가던 가룟 유다의 모습 속에서 나의 모습을 보는 아픔입니다. 그런데 함께하는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고 행동하는 마리아입니다. 이 것이 거룩한 장소에 있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은혜의 장소와 거룩의 현장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 곳이 100퍼센트 나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 안에 있는 것이 나를 지켜준다는 사실을 꼭 믿음과 신앙 가운데 고백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4. 복합적 위기의 시대입니다. 4차 산업과 코로나19로 인한 여러 가지 위기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요? 주님은 밤새도록 기도하신 후 한명 한명을 따로 불러 제자로 세우셨습니다. 뽑힌 사람들은 제자였으며 이후 주님을 대신할 사도였습니다. 영광스럽고 감격스러운 부르심입니다. 이런 거룩한 부르심을 받은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을 배반할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어느 누구하나 가룟 유다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가룟 유다 자신도 그 자신이 그렇게 까지 갈 줄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누구는 끝까지 거룩하게 되고, 누구는 중간에 탈락하고 다른 길을 가게 된다고 정해져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관리하지 않으면 이 편에 설 수도 있고, 저 편에 설 수도 있습니다. 오늘 날 이 시대는 복합적 위기의 시대입니다. 어떻게해야 하나요? 벧전 5:8-9,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여러분, 복합적 위기의 시대입니다. 4차 산업과 코로나19로 인한 여러 가지 위기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런 위기의 시대를 모릅니다. 그래서 넘어집니다. 여러분, 이런 복잡한 이 현실에서도 그래도 미래에 대하여 계획을 세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20대를 변화시키는 30일 플랜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하버드대학교 심리학 연구소는 어느 사회에서나 65세 이상의 정년 퇴직자들이 3:10:60:27이라는 비율로 경제 피라미드를 구성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3%는 최고의 부를 누리고, 10%는 퇴직 전과 별 차이 없는 경제력을 갖고 있고, 60%는 간신히 생활을 유지해 나가고, 27%는 자선 단체의 도움으로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러면 왜 그런 차이가 있는가를 조사했는데,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3%는 젊었을 때부터 자신의 목표를 글로 적어 놓고 수시로 꺼내 읽는 습관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10%는 목표는 있었으되 글로 적고 수치로 꺼내 읽는 습관은 갖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60%는 목표가 수시로 바뀐 사람들이었고, 27%는 목표 자체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비슷한 조사 결과가 예일 대학교에서도 있었습니다. 예일 대학교는 1953년도에 졸업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지금 당신은 인생 목표를 구체적으로 적어 놓은 것이 있습니까? 3%의 학생이 그렇습니다, 97%는 아닙니다. 20년 뒤인 1973년도에 1953년도 졸업생들의 경제력을 조사했는데 그 결과 3%가 나머지 97%의 재산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재산을 모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목표를 정하고 계획을 세워 사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말해 줍니다.

 

여러분, 아무리 4차 산업과 코로나19로 인한 여러 가지 위기가 도사리고 있고, 아무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아다닌다고 하더라도 나머지 나의 삶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마귀에게 먹히지 않기 위하여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대적할 것을 권하는 사도 베드로는 가장 먼저 내가 해야 할 일 두 가지를 말했습니다. 그것은 근신하는 것과 깨어있는 것입니다. 물론 근신하고 깨어있는 것 쉽지 않습니다. 쉬우면 이야기를 안했겠지요. 그런데, 어떤 면에서는 아픔이 있고, 환난이 있으면 근신하고 깨어있기가 쉽습니다. 그렇지만 평안하여 긴장의 끈이 느슨해 질 때 나태해 집니다. 영혼의 잠에 빠져듭니다. 그리고 미래를 위한 마음을 다한 기도에도 별 변화와 응답이 없을 때 동력을 상실하고 느슨해집니다. 그런데 바로 이럴 때가 한 단계 크게 발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가 되지 않습니까? 기도하고 싶지 않습니까? 말씀을 읽고 싶지 않습니까? 말씀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까? 지금이 말씀 앞에 설 때입니다. 기도할 때입니다. 남은 미래를 위해서요. 아무리 나병환자 바리새인 시몬처럼 큰 은혜를 받았다 하더라도 관리하지 않는 신앙은 변질되기 쉽습니다. 아무리 거룩한 부르심을 받았다 하더라도 넘어지기 쉽상입니다. 마리아는 복합적 위기 앞에 주님만을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4차 산업과 코로나19로 인한 여러 가지 위기가 도사리고 있고, 아무리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아다니더라도 나의 남은 미래를 위하여 계획을 세우고 기도하시고 말씀으로 확신에 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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