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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요한, 12;1-8. 바리새인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3. 2020. 9. 27.

작성자이상열|작성시간20.09.25|조회수259 목록 댓글 0

요한사도의 복음, 12;1-8. 바리새인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3. 2020. 9. 27.

 

향유옥합 사건은 벳세다 광야에서의 오병이어의 사건과 동일하게 사복음서에 다 나옵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은 말씀을 사모하는 현장에서 일어난 기적의 사건입니다. 하지만 향유 옥합사건은 주님의 마지막을 어떻게 섬기고 어떻게 헌신하는가에 대한 마리아의 섬김과 헌신의 내용입니다. 벳세다 광야에서는 주님께서 주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베푼 엄청난 축복을 말씀하지만 마리아의 섬김은 베다니입니다. 이렇게 4복음서에 모두 등장하는 것은 그 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베다니는 소외된 사람들의 마을입니다. 사회로부터 냉대를 받던 마을 사람들의 상황과 마음을 반영해서 슬픔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베다니로 불렸습니다. 1절 하반 절에서 베다니를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고 그곳에서 향유옥합 사건의 시작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설명하는데 2절에,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2절 맨 앞에 그래서 그들이 거기서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원인과 결과를 말 하는 그래서는 베다니에서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베푼 이유인데, 그 것은 나사로의 다시 살아남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나사로의 가족들이 감사해서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잔치가 준비된 곳이 나사로의 집이 아닙니다. 베다니로만 언급되었습니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와 누가복음에서는 초청한 사람이 이전에 나병환자였다가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바리새인 시몬입니다. 그 잔치가 배설된 곳은 나사로의 집이 아니고, 나사로와 친분이 있는 시몬의 집입니다. 그런데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도 마르다는 여전히 섬김의 일을 잘 합니다. 손님 대접을 잘 하는 것도 있지만 나사로를 살려주신 것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나사로는 예수님 옆에 비스듬히 기대어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왜 잔치 집에서 함께 즐기지 않았을까요? 그녀는 언니처럼 음식준비를 하지 않았고, 이전처럼 주님 앞에서 그 말씀을 듣지도 않았습니다. 무엇을 했나요? 3절.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그런데 잔치집의 주인인 시몬은 모두가 부러워하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병에 걸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누구나 성인이 되면 하나님 앞에 자기 몫의 예배를 드려서 예배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영적 자부심을 갖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바리새인이라 할지라도 나병이 걸리면 높은 신분과 상관이 없이 그 사람은 예배와 공동체의식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격리되어야 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의 일행을 자기 집에 초청했고 예수님과 일행은 시몬의 초청에 응하여 시몬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시몬이 나병환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 집에 초청한 시몬은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합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도 동일합니다. 그런데 눅7:39절에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였다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여기에서 시몬은 향유를 부은 마리아와 함께 예수님을 마음으로 정죄를 합니다. 왜냐하면 이전까지 받아왔던 그리고 계속해서 받는 은혜가 조금 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하여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에 최소한 풍습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비하여 마리아는 그 상황의 아픔의 눈물로 주님의 발을 씻겨 드렸습니다. 평화의 인사와 환영의 입맞춤을 받지 못하고 발 씻을 물을 제공 받지 못한 주님을 위하여 그 발에 입을 맞추고 아주 값비싼, 300데나리온, 오늘날 추산 3백만엔의 향유를 부었습니다. 마리아는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당당히 주님의 아픔과 주님의 고난에 함께 했습니다. 주님의 모욕과 아픔 앞에서 눈물로 그 발을 씻기며 입맞춤함으로 주님의 마음을 위로했습니다. 여러분, 누가 주님이 받으시는 모욕과 슬픔을 읽으려 합니까? 누가 주님의 그 마음을 알아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감당하려 합니까? 여러분, 신앙인의 인생의 품격이 어디서 나옵니까요? 그리스도의 흔적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옵니다. 무엇입니까? 역경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배신을 당해도 섭섭한 시간으로 낭비하지 않고, 질타를 받아도 의기소침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향한 신앙과 믿음과 은혜에 대한 감사를 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어려움을 감내하는 이 것이 마리아의 인생의 품격입니다. 그는 주어진 삶의 사명인생이 바뀌지 않도록 했습니다. 여기에 비하여 주인공인 시몬과 제자들은 계산적이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생각을 합니다. 이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3번째로 이 내용이 주는 의미가 무슨 의미입니까?

 

1. 위선으로부터의 보호입니다. 여러분, 위선이 무엇입니까? 아서 쾨슬러는 <한낮의 어둠>이라는 소설을 통해서 신념에 담긴 자멸의 위험성을 보여줍니다. 한낮의 태양처럼 그 믿음이 절정에 오를수록 그것이 몰고 올 어둠은 더 파괴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올바르고 건전해 보이는 신념 속에도 이와 같은 독이 든 싹이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종교적 실천과 믿음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주의 뜻을 빙자하고 사리사욕을 채우며 가까운 사람의 괴로움조차 외면하는 신앙인의 위선이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4가지의 위선이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일까요?

 

첫 번째 위선자들은 하나님 앞에는 얼마만큼도 봉헌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이 봉헌하는 것은 시기 질투하는 사람들입니다. 몸 바쳐서 봉사 한번 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이 봉사하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깎아내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첫 번째의 위선자들입니다.

 

두 번째는 무관심하고, 무책임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위선자입니다. 무관심은 내 가장 가까운 이웃에게 최소한의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 잘 아시지요? 온 몸이 헌데 투성이인 나사로를 부잣집 문 앞에 버렸습니다. 동네사람들이 책임 떠넘긴 거지요. 그런데 부자는 밥 먹기 전에 식빵으로 손을 닦고 그리고 식탁에 버리면 개들이 와서 주워 먹었는데 부자는 손 닦고 버린 식빵으로 문간 앞에 있는 나사로를 먹여 살리면서 여호와여, 저 나사로는 나 아니면 죽을 사람이지만 내가 먹여 살렸습니다. 나중에 죽어서 부자는 지옥에 떨어졌고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지요. 부자는 다니면서 나사로에게 욕설을 한 적도 없고 발로 찬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는 나사로에게 악을 베풀었기 때문이 아니라 적극적인 선을 베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관심이 무섭습니다.

 

세 번째 위선자는 하나님의 법보다 자기 자신의 법에 더 얽매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의 생김새가 다르듯이 지가 가지고 있는 잣대가 다 다릅니다. 그 잣대를 가지고 가까운 사람을 재고, 이웃을 재고, 목사를 재고. 그런데 재는 것은 괜찮은데 문제는 그 잣대가 맞는 눈금이냐? 이 말입니다. 맞지도 않는 눈금을 가지고 모든 사람을 다 잽니다. 그런데 자기 법에 얽매여 사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는데 늘 다른 사람들을 많이 판단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런 사람일수록 콤플렉스가 많기 때문에 가슴 속에는 분노와 화가 많습니다. 상처가 많습니다. 어떻게 해야 될까요? 내 자신의 생각과 법은 성령의 불로 태워서 예수 그리스도의 법이 그 안에 들어가야지요? 예수님의 법은 사랑과 용서와 관용입니다.

 

네 번째는 정당성을 부여해서 착취하는 사람들이 위선자입니다. 유대인들은 19세 이상이 되면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성전에 들어가려면 그냥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입장료, 성전 세를 내야 합니다. 성전 세는 당시 노동하는 사람들의 이틀 임금인데 문제는 일반 화폐로는 성전 세를 내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전화폐 1000엔짜리로 바꾸려면 일반화폐 3000엔을 주어야 하니까 환전상들이 폭리를 취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성전 안에 들어오면 자기를 위하여 대속 물을 바쳐야 하는데 서민들은 비둘기를 집에서 일 년 내내 정성스럽게 키워서 안고 오면 그것을 검사하는 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이 장사꾼이랑 짜고 아, 이 비둘기 부정 탔네요. 퇴짜, 염소 뿔이 부러졌네요. 퇴짜. 밖에서 가지고 오는 짐승들은 거부를 하고 장사꾼들이 파는 짐승을 사야만 통과를 시켰어요. 문제는 비둘기 한 마리 값을 시중의 10배 이상 받으면서 독점과 폭리와 횡포와 부정이 성전 뜰 안에서 공공연히 행해졌습니다. 이런 것이 위선입니다. 이 4가지는 평범함의 범위 안에서 평범함의 범위 밖의 있는 사람들에 대한 지적입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향유옥합 사건은 이러한 평범함의 범위를 넘어선 한 사람에 대하여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시몬과 제자들과 가롯 유다는 비싼 향유를 현금화하지 않고, 예수님을 위하여 사용한 마리아를 비난합니다. 마리아의 행동을 허락했던 예수님에 대해 불평을 했습니다. 마 26:8을 보면 제자들의 말과 행동을 보다 명확하게 묘사합니다.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제자들은 분개했습니다. 분개는 단순히 화를 내는 것이 아닙니다. 격분하여 크게 화를 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도 아닌 제자들이 분개하며 먼저 물었던 것은 마리아의 의도입니다. 이해하기 위한 목적이 아닙니다. 이해의 범위를 벗어난 것에 대한 힐책이고 반문입니다.

 

또 그들은 왜 허비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사용한 허비라는 단어 ἀπώλεια(아포레이아)는 낭비라는 뜻을 훨씬 넘어선 단어입니다. 허비는 말씀 속에서 파괴와 손실과 멸망 과 영원한 파멸이라는 보다 심각한 뜻을 지닌 채 사용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무슨 허비냐?”라고 물으며, 영원한 파멸과 멸망에 대하여 말한 대표적인 사람이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의 의도와 말이 다른 제자들에게 급속도로 전염되었습니다. 이어 가룟 유다는 마리아를 추궁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5절,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가롯 유다의 말은 이웃을 사랑하고, 가난한 이를 생각하는 이의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요한은 단호하게 그가 도둑이고, 평소에도 공금을 유용하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겉으로는 공공의 덕을 이야기하고, 사랑을 말하지만, 사실은 이것을 이용해서 자신의 사적이익을 추구한 도둑이었습니다. 6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 이러라. 여러분, 이런 일이 당시만 그렇습니까? 코로나19로 힘든 상황과 아픈 현장인 지금도 이런 일은 비일 비재합니다. 경건해 보이고,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더 높은 가치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시대입니다. 인본주의자로 가식과 위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흔합니다. 그래서 놀라지도 아습니다. 여러분, 왜 저희교회는 재정부장과 회계가 직접 재정을 감당합니까? 사실 수고하시는 이분들도 부담이 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제직회를 통해서 공개를 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정직하다는 것을 스스로 자랑하기 위함일까요? 여러분, 사람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물질 앞에서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적어도 물질적인 부분에서의 위선과 가식으로부터 비전교회와 자신들을 스스로를 지키기 위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신앙인으로 살아가시렵니까? 기도하기는 우리 비전교회를 섬기며 신앙생활을 하시는 여러분은 마리아처럼 그래서 주님이 인정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결정이었다는 복된 멧세지가 들려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거룩한 낭비입니다. 이는 위선을 넘어서 주님을 신앙한 마리아의 섬김과 헌신입니다. 여러분, 근로자의 1년 연봉과도 맞먹는 엄청난 금액의 향유를 쏟아 붓는 행위는 분명 낭비이고 허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금화하여 자선사업에 사용하는 것이 더 타당했다는 가룟 유다의 지적은 논리적이고, 이성적입니다. 하지만 훗날 가식의 커튼이 걷혀지고 나니 그때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 같았던 가룟 유다의 말은 위선이었습니다. 욕심과 욕망을 위해 유용하고 착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혀 아닌 것처럼 그렇게 꾸미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여러분, 물질에 대한 욕망의 노예가 된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과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은 절약의 대상이 아니고, 낭비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키우면서 낭비 없이 어떻게 양육할 수 있습니까? 자기욕망을 꼭 움켜쥐고 있는데 어떻게 다른 누군가를 품고 안을 수 있습니까? 가룟 유다는 값비싼 향유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고 헛되이 낭비했다고 꾸짖습니다. 왜요? 사랑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지만, 정작 주님의 사랑하는 법을 몰랐습니다.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해마다 사순절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자주 듣게 되는 음악이 있습니다. 그 곡은 바흐의 마태 수난곡입니다. 마태 수난곡은 마태복음 26장과 27장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오라트리오, 가수들이 연기 없이 줄거리 중심으로 노래하는 서사적 음악입니다. 마태 수난곡은 한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붇는 사건으로 시작합니다. 이 사건에서 제자들의 대사를 담고 있는 합창곡을 보면,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다. 는 가사가 있는데, 바흐가 마태 수난곡을 만들 때 사용했던 1545년 루터 성경은 오늘날 우리말 성경과는 조금 다릅니다. 제자들의 대사를 조금 더 과격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Wozu dient dieser Unrat’은 번역하면 이 쓰레기를 이제 어디다 쓴단 말인가? 제자들 입장에서 귀한 향유는 예수님께 부어진 순간 쓰레기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제자들의 눈에는 모든 존재가 돈으로 환산되었습니다. 이것이 사랑을 모르는 그들의 본심입니다. 하지만 이 마리아가 드린 향유는 이 세상에서 지금까지 사용되고, 소비되었던 그 어떤 향유보다도 가장 귀하게 쓰임 받은 쓰레기가 되었습니다. 바흐는 이 부분을 여인의 눈물로 표현했습니다. 알토 아리아는 나의 눈물방울이 모여 향기로운 향유가 되었습니다. 부디 나에게 허락하소서. 나의 눈에서 넘쳐흐르는 눈물 한 방울 한 방울을 당신의 머리에 뿌리게 하소서. 노래합니다. 2대의 플룻이 스타카토로 연주하면서 바로 이 부분. 향유와 여인의 눈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장면을 회화적으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독일의 신학자이자 루터교 목사였던 폴 틸리히는 마리아의 행동을 거룩한 낭비라며 다음과 같이 표현을 했습니다. 교회는 이처럼 계산이 아닌 거룩한 낭비와 희생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거룩한 희생 없이는 교회가 교회될 수 없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섬김과 봉사와 헌신이 비전교회를 비전 교회가 되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주님을 섬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후로부터 더욱 주의 선하신 은혜와 복을 감당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간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은 마리아가 임박한 주님의 죽음을 미리 준비했다고 두둔하셨습니다. 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주님은 비난받는 마리아를 그냥 두고, 마리아에게 비난하는 것을 멈추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장례할 날을 위하여 향유를 간직하고 보관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하다 보면, 앞서 주님을 위해 다 소비해 버려 이미 쓸모없는 쓰레기가 되어 버린 향유를 남겨서 보관하라는 말씀이 문맥상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에서 다소 의역이 필요합니다. 알렉산드리아 사본과 이후 KJV버전은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녀를 내버려 두어라. 그녀는 나의 장사 날을 대비하여 이것을 간직하여 왔다. Let her alone, against the day of my burying has she kept this. 무슨 의미입니까?

 

3-1, 마리아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눅10;39에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주님이 하시는 말씀에 늘 귀를 기울였습니다. 예루살렘이 가까우면 인자는 팔릴 것이고, 십자가를 지게 될 것이라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던 그 주님의 음성을 기억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이유가 없고, 상황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각자의 사정이 있고, 그 형편에 따라 살아갑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 순간 자신의 상황에 따르지 않고, 마리아가 들었던 예수님의 말씀에 반응을 했습니다. 그 결과 주님의 죽으심을 준비했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슬기롭게 살기 위해서는 더 많이 합리적이고, 더더욱 이성적이 될 것을 권유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주님의 음성에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요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3-2, 사람의 동기를 승화시켜 주시고, 인정해 주시는 주님입니다. 향유를 붇던 마리아의 행동이 결과적으로 주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그 비싼 300데나리온의 가치가 있는 향유를 모았던 것은 이런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주님에게 자신이라도 대접하기 위하여 그동안 모았던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 결과 그것이 주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미래를 위하여 모으고 준비했던 그 삶은 주님을 위하여 간직해 온 것이 되었습니다. 이 것을 주님께서 인정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마리아가 주님께 부어 드린 향유는 단순한 향유가 아니었습니다. 한 인간으로서 끝내 붙들고 있던 집착하는 마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선한 동기와 의지가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님께서는 이것을 아름답게 받아 주셨고, 승화시켜 주셨습니다.

 

3-3, 그러면 오늘 나는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간직하고 있는가? 오늘 날 일부 교회는 복음 대신에 상식과 합리성과 균형이 강조합니다. 물론 상식과 합리성과 균형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내, 자신도 모르게 가장 아름다운 기적과 가장 위대한 기적인 거룩한 낭비를 잃어버리지는 않나요? 사랑의 근본을 잃지는 않나요? 여러분, 죄송합니다. 벌떼처럼 일어나 마리아를 비난하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스스로 합리적이고 균형 있다고 생각하며 비판하기 좋아하는 의로운 크리스천의 모습을 봅니다. 효율과 합리성의 울타리에 사로잡혀 있는 신앙인을 봅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한 번도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해 본 적이 없는 그런 그리스도인 말입니다.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되어 있고, 자기 의로만 충만해 있기 때문에, 거룩한 낭비를 모른 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님의 죽음을 준비한 마리아의 모습은 많은 것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자기초월의 표상이며, 거룩한 낭비의 정점인 십자가를 향하여 자신을 내어주신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이 코로나19의 위기 상황에서 여러분은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간직하며 살고 있습니까?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간직했습니까?

4. 가난한 사람들은?

4-1.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내내 밀착 동행했던 제자들 사이에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현금화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와 질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그 향유를 사용치 않았다며 질책하는 제자들과 가룟 유다를 향하여 주님은 8절에,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주님께 드려야 할 헌신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 대한 돌봄보다 우선함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신 주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은 지극히 작은 사람에게 베푼 선의가 주님께 베푼 것이라 하셨습니다. 냉수 한 그릇 대접한 것이 주님께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눅 10장에, 나사로 집에서 예수님이 모임을 가지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언니 마르다는 발바닥에 불이 날 정도로 뛰어다니며 음식 장만과 손님 대접에 정신이 없는데, 여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언니가 얼마나 속상하고 화가 났던지 예수님께 직접 요청합니다. 동생 마리아더러 일어나 언니를 도와주라고. 이때 예수님은 그 일을 요청하는 마르다에게 눅 10:41-42.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주님의 이 말씀은 손님을 섬기고 대접하는 것이 필요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무엇에 더 우선순위를 두어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것은 바른 신앙 위에 비로소 바른 헌신이 가능함을 말씀한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눅18;19, 신앙이 선행되지 않고, 신앙이 전제 되지 않은 구제와 도움은 자기 의로 이어지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때 신앙은 입으로 믿음을 고백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수준이 아닙니다. 주님에 대하여 어떤 자세에 대한 믿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면 의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헬라문화에서는 예의 바르고 관습과 법규를 지키는 사람입니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이 뿌리를 두고 있는 구약에서 말하는 의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구약에서 의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과 이웃과의 관계를 정하는 기준입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의로운 사람은 윤리 규범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 바탕에서 주변 사람들과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선지자 미가는 미 6:6-8,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 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과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인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서 그에 합당한 반응을 하라, 그에 반응하는 삶을 살라는 요구입니다. 받은 바, 구원의 은혜는 수천 마리 숫양과 수만의 강물 같은 기름으로 갚기에도 부족하기 때문에 이웃 사람들과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겸손은 자신의 위치와 처지를 아는 것입니다. 자신의 수준과 받은 은혜를 알기 때문에 자신이 의롭다고 믿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행위는 할 수가 없습니다. 얕보는 행위는 할 수가 없습니다. 이웃을 향한 선한 행위는 시혜자의 입장에서의 베푸는 것이 아니고, 수혜자의 입장에서 빚을 되갚는 행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말씀을 잘 헤아리고 깨닫는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의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4-2. 8절,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구제를 부정하심이 아니고, 주님을 믿는 신앙행위에 더 집중하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가는 시점에서 그 흐름이 어떻게 가고 있는지를 살피라는 의미입니다. 지금의 이 시대가 교회를 향해서 무엇을 바라는지 읽으라는 말씀입니다. 무엇보다도 그 근본 바탕에 있는 교회의 의로움과 거룩함이 무엇인지를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관점입니다.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을 돕고 나누는 행위는 더 풍성해야 하고, 지속되어야 합니다. 그분들이 늘 우리의 관심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께 인정받는 교회여야 합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교회는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아 섬겨가는 그런 곳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관점에서는 주님의 때를 읽는 신앙인이여야 합니다.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준비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주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는 그리스도인이어야 합니다. 제자들은 십자가라는 특별한 사건과 구원의 시간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향유를 부은 마리아에 대하여 분개하며 책망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제자들을 잘 알고 계셨던 주님은 당신의 십자가와는 무관하게 의로운 시혜자가 되어 있는 제자들을 보셨습니다. 교만이었고, 주님이 없는 삶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룩한 구제를 이야기하던 의로운 제자들에게 먼저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가난한 이들을 포함한 모든 이들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실 예수님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장례를 위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제자들을 향한 마음과 주님의 때를 분별치 못하는 제자들에 대한 책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예배를 드리시는 모든 분들이 주님께서 다시 오실 주님이시며 그 때와 시기를 분별하고 그래서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함께 부활의 소망으로 마음 다하여 신앙생활 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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