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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요21:7~14. 그 때나 이제나 2. 2021. 2. 21.

작성자이상열|작성시간21.02.20|조회수162 목록 댓글 0

요21:7~14. 그 때나 이제나 2. 2021. 2. 21.

 

신학자이고 철학자인 마르틴 부버(Martin Buber)가 쓴 나와 너라는 책에서 3가지 유형의 인간관계를 소개하는데, 첫째는 그것과 그것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인간관계를 물건처럼 서로 이용하다가 가치가 떨어지면 미련 없이 버려버리는 관계입니다. 물물 교환의 형태이고 쌍방 간의 인격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서로 속고 속이는 관계가 되기도 합니다.

두 번째 유형은 나와 그것과의 관계입니다. 상대방이 나를 물건처럼 대하더라도 나는 끝까지 인격적으로 상대방을 대한다는 것인데 역시 정상적인 관계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 혼자만 잘한다고 인간관계가 정상으로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유형은 나와 너와의 관계입니다. 상호인격적인 관계인데, 그럼에도 부버는 아무리 내가 상대를 믿어주고, 상대방이 나를 믿어줘도 항상 이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 아니고, 언젠가는 깨질 수밖에 없는 관계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관계가 계속 유지 되려면 반드시 필요 한 분이 있어야 하는데 바로 영원한 너라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통하여 서로를 알아가고 서로를 위하여 인격적인 관계를 넘어서 영원히 존재하는 관계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나와 너와의 이런 관계의 의미를 더하여 줍니다. 오늘 21장은 부활의 장인 20장과 연결이 되는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신 내용입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나타나셨을 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축복을 하시는데 샬롬이라는 평강이 어떻게 오게 되는가를 설명하셨습니다. 오늘 7명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음에도, 다시 이전의 어부로 돌아가서 고기를 잡으러 갈릴리 디베라 호수로 갔지만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처음 제자들을 부르시던 때처럼 예수님은 다시 제자들을 찾아가셨고, 많은 고기를 잡게 하십니다. 이 때 주님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의 역할이 돋보이지만 예수님의 최대 관심은 베드로와 제자들의 회복에 있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라는 표현이 두 번 강조됩니다. 첫 번째는 20:19절의 말씀대로 다른 제자들은 있었고 도마가 없었습니다. 두 번째는 20;26. 도마가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갈릴리 바다에서 내용입니다. 첫 번째 만남은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는 행위를 통해서 평강이란 새 창조의 사역을 암시하는데, 20;21.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내노라. 그런데 세상에 보내어지는 일은 제자들의 능력과 힘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열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 만남을 통해서는 믿음은 보고, 경험하고,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도마처럼 예수님의 상처에 손을 넣어 보고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써 주어지게 됨을 그림으로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는 표현이 두 번째 만남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오늘 세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12-1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원래 제자들에 의하여 깨질 수밖에 없는 관계였는데 주님은 첫 번째나 두 번째나 세 번째나 모두 주님을 통해서 알아가는 온전한 나와 너와의 관계를 만드십니다. 특별히 생명을 드려서 나와 너와의 관계를 만드는 첫 번째의 표현을 사용하시는데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1. 밥은 먹었느냐? 식사 하셨습니까? 대한민국사람들은 예전이나 지금도 가끔은 아침에 사람들을 만나면 하는 인사가 있습니다. 식사하셨습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오하요오고 자이마스의 인사가 밥을 드셨느냐 표현으로 만남의 시작을 합니다. 한국의 신 지혜의 밥은 먹었느냐? 시가 있습니다.

 

사람에게 이처럼 따뜻한 말이 또 있는가. 밥에도 온기와 냉기가 있다는 것. 밥은 먹었느냐 라는 말에 얼음장 풀리는 소리. 팍팍한 영혼에 끓어 넘치는 흰 밥물처럼 퍼지는 훈기. 배곯아 굶어죽는 사람들이 이 세상 어느 죽음보다도 가장 서럽고 처절하다는 것을 어릴 때 밥 굶어 하늘 노랗게 가물거릴 때 알았다. 권력과 완장 같은 명예도 아니고 오직 누군가의 단 한 끼 따뜻한 밥 같은 사람 되어야 한다는 것. 먹기 위해 사는 것과 살기 위해 먹는 것은 둘 다 옳다. 목숨들에게 가장 신성한 의식인 밥 먹기에 대해 누가 이렇다 할 운을 뗄 것인가? 공원 한 귀퉁이, 우두커니 앉아있는 이에게도, 연못가 거닐다 생각난 듯 솟구치는 청둥오리에게도 문득 새까만 눈 마주친 다람쥐에게도 나는 묻는다. 오늘 밥들은 먹었느냐.

 

여러분, 하나를 더 소개합니다. 어느 추운 눈 내리는 겨울밤이었습니다. 불을 끄고 막 잠을 청하려고 침대에 누었는데 누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프란시스코는 귀찮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찾아온 사람을 돌려보낼 수 없었기에 불편한 마음으로 잠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습니다. 문 앞에는 나병환자가 추워서 벌벌 떨며 서있었습니다. 흉측한 얼굴을 보고 섬 짓했습니다. 그래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중하게 물었습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죄송하지만 몹시 추워 온 몸이 꽁꽁 얼어 죽게 생겼네요. 몸 좀 녹이고 가게 해 주시면 고맙겠다고 애처롭게 간청을 합니다. 마음으로는 안 된다고 거절 하고 싶었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차마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마지못해 머리와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주고 안으로 안내했습니다. 자리에 앉자 살이 썩는 고름으로 심한 악취가 코를 찔렀습니다. 어떻게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니요 벌써 사흘째 굶어 배가 등가죽에 붙었습니다. 프란시스코는 식당에서 아침식사로 준비해 둔 빵과 우유를 가져다주었는데 이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빵과 우유를 순식간에 다 먹었습니다. 식사 후 몸이 좀 녹았으니 나가주기를 기다렸지만 이 사람은 가기는 커녕 기침을 하며 오히려 부탁을 합니다. 지금 밖에 눈이 많이 내리고 날이 추워 도저히 가기 어려울 것 같네요. 하룻밤만 좀 재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할 수 없지요. 누추하기는 하지만, 그럼 여기 침대에서 하룻밤 주무시고 가세요. 마지못해 승낙을 했습니다. 침대도 일인용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침대를 한센씨병 환자에게 양보하고 프란치스코는 맨바닥에 자려고 했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그 사람은 몸이 얼어 너무 추워서 잠을 잘 수 없네요. 미안하지만 제 몸을 좀 녹여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어처구니없는 이 사람의 요구에 당장 자리에 일어나 밖으로 내 쫓아버리고 싶었으나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 희생하신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며 꾹 참고 그의 요구를 들어 주었습니다. 도저히 잠을 못 이룰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꿈속으로 빠져 들어갔는데 꿈속에서 주님이 기쁘게 웃고 계셨습니다. 프란시스코야! 나는 네가 사랑하는 예수다. 네가 나를 이렇게 극진히 대접했으니 하늘에 상이 클 것이다. 아 주님! 나는 아무것도 주님께 드린 것이 없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꿈속에서 주님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자리에 일어났습니다. 벌써 날이 밝고 아침이었습니다. 그러나 침대에 같이 자고 있어야할 문둥병환자는 온데간데없었습니다. 사라졌습니다. 아! 주님이셨군요. 프란시스코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가 가장 사랑받는 프란시스코의 평화의 기도입니다. 여러분, 누군가 대신해야 합니다. 유대 랍비들은 함께 식사를 할 때 그들의 독특한 식사문화가 있습니다. 식사가 나왔고 그래서 식사기도를 하고 식사를 시작하려는데 랍비는 수저를 놓고 기다립니다. 왜 식사를 하지 않느냐? 식사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누구를 기다리는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식탁에서 조차도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통하여 서로를 알아 가는데 나와 너의 인격적인 관계를 만들어 갑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식탁문화는 마지막 한 사람까지 다 도착해야 식사를 시작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중에 오는 사람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은 왜 마지막 한 사람이 도착할 때까지 수저를 놓고 기다리는 일이 그들의 문화가 되었는가? 시147;11,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 도다. 그런데 바라다의 히브리어는 야ㅋ할 (יָחַל)로 기다리고 소망하고 기대하다는 의미입니다. 유대인들은 헷세드의 사랑을 기다리고, 은혜를 기다하고 오늘을 기대하고 이시간의 필요를 기대합니다. 치료와 회복을 기대하고 양식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기대하고 기다리고 소망하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줍니다. 그 필요의 가장 작은 시작이 밥은 드셨습니까? 식사는 하셨습니까? 입니다.

 

2. 이렇게 기대하고 기다리고 소망하는 사람들에게 먹이시고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먹이시고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다양합니다. 이 다양한 모습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되어 그 속에 하나님의 속성을 담았습니다. 출3;14, 야훼. 여호와는 항상 살아계시며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창16;13, 엘 로이는 감찰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창17;1, 엘로힘은 능력의 하나님이시고, 엘샤다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아도나이는 주님 되신 하나님이시고. 출17;15, 여호와 닛시는 나의 깃발과 승리의 하나님입니다. 출15;26, 여호와 라파는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삿6;24 여호와 샬롬은 여호와는 나의 평강이고 겔48;35, 여호와 삼마는 여호와가 거기 계시고, 창22;13-14, 여호와 이레는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이 다양한 이유가 있는데 하나님을 여러 면을 알아가도록 하기 위함이고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시9:10,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 하리니. 여러분, 하나님을 알게 됨으로써 그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되고 하나님의 이름은 나에게 견고한 요새가 됩니다. 왜 그럴까요? 뜻하지 않고, 원치 않았던 상황이 짓누를 때 우리가 알고 의지하는 하나님은 보호하실 뿐 아니라, 넘어진 자리에서 세우셔서 상황을 견디고 이기게 하시는 요새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은 먹이시는 주님입니다. 예수님은 마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먹고 마시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누구를 먹이시고 누구를 마시게 하시는가요?

 

2-1. 하갈을 먹이시고 마시게 하신 하나님입니다. 창16장에는 고통을 당하는 사라의 몸종 하갈이 등장을 합니다. 하갈은 사라에게 쫓겨났습니다. 물론 그 고통의 1차적인 책임은 하갈에게 있었습니다. 하갈이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을 낳자 자신의 주인인 사라를 멸시하고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하갈은 자신의 잘못과 교만으로 인하여 쫓겨났습니다. 공의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만든 고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연약한 여인의 고통과 슬픔을 달래주었습니다. 엄격함과 무자비함과 비판의 눈으로가 아니라, 이해와 용납과 사랑과 위로로 다가오셨습니다. 일반적인 공의가 아니고 공의를 드러낸 사랑으로 하갈을 챙기셨습니다. 비록 그녀의 주인인 사라는 하갈을 버렸지만, 하나님은 하갈의 부르짖음을 들으셨고, 품으셨습니다. 한때의 미숙함으로 인한 실수를 불쌍히 여기시고 하갈을 위로하시며 하갈에게 마실 우물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갈은 그 우물의 이름을 브엘라해로이라고 불렀습니다. 나를 살피시는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그때의 경험적 지식이 하갈을 성숙시켰고, 죽기를 원했던 하갈이 미래를 향하여 나아갑니다. 직접 살피시고 필요에 따라 하갈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에 대한 깊은 애정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위한 공의는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한데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으로 서로를 알아 가는 나와 너의 관계가 형성이 됩니다.

 

2-2.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 40년의 세월동안 먹이신 하나님입니다. 가장 기본적이고 필요한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했습니다. 반석에서 생수를 터트리고 그 생수로 마시게 하셨습니다. 출16;4절, 그 때에 야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약속대로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열고 만나를 비처럼 내려주셔서 아침에 일어나면 온 지면에 만나가 덮였습니다. 그것을 거둬들여서 그것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40년 동안 처음이나 나중이나, 그때나 이제나 일주일에 엿새 동안 만나가 내렸습니다. 만나를 거둬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번도 배고픔 없이 40년을 잘 이겨냈고 새로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출16;35절, 사람이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으니 곧 가나안 땅 접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만나를 매일 같이 내려 주셨는데 이는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고 만나를 통하여 생명을 연장시켜주시고 공급해주시는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살아가는 동안 세상의 것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믿고 따라가며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만나가 처음에는 꿀맛이었는데 얼마를 지나면서는 유과, 기름 섞은 과자 맛이 되고 광야 길의 끝 무렵에는 마실 물이 없으면 넘어가지 않는 식물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만나가 변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이나 나중이나 그대로입니다. 동일한 밥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되었는가요? 만나의 축복과 함께 물질을 공급해주시는 은혜의 충만함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말씀의 양식으로 됩니다. 신8;3절은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야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시작에 필요한 육신의 양식도 필요하지만, 영의 양식이 중요했습니다. 왜냐하면 만나로만 생명이 유지되고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고 난 다음 사탄에게 시험을 받을 때 이 말씀으로 사탄을 물리쳤습니다. 마 4;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그들이 말씀을 지켜 행하는지를 지켜보셨습니다. 만나에 대한 기준입니다. 출 16;19-20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매일매일 너희 가족 숫자대로 필요한 만큼만 거둬들여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것을 거둬들여서 너희가 일용할 양식으로 삼으면 내가 너희들이 필요한 그것을 매일, 매일 공급해줄 것이다. 이런 내용의 축복입니다. 얼마나 자상합니까? 그런데 육신을 위한 양식을 거두어들이는 것조차도 말씀대로 행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기본은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데, 사람들에게는 부족하고 마음에 흡족하지 못하지만 일어나고 쓰임 받는 시작의 양식이 아침 식사입니다. 그런데 이 내용을 그때나 지금이나 적용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통하여 서로를 알아 가는 나와 너의 관계를 생각했습니다.

 

2-3. 엘리야를 먹이시고 마시게 하신 하나님입니다. 왕상 19장에 보면, 죽기를 청하던 선지자가 등장합니다. 엘리야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갈멜 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기던 바알의 선지자 850명과 홀로 믿음으로 대항하여 믿음의 아이콘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엘리야의 기도에 불로 응답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참 신이심이 드러냈습니다. 이 일 후에 아합 왕이 급히 갈멜산에서 내려와서 부인 이세벨에게 갈멜산에서의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이세벨이 자기의 종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겁을 줍니다. 이세벨의 이 말을 들은 엘리야는 두려운 나머지 남유다 왕국의 최남단인 브엘세바까지 도망을 쳤습니다. 거기서 광야 하룻 길을 더 가서 로뎀나무 아래에 머물렀습니다. 거기서 하나님께 죽기를 구하며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왕상19;4,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합니다. 그런데 넉넉하다는 표현은 살만큼 살았고 할 일도 했다는 뜻입니다. 공동번역은 이제 다 끝났습니다. 그리고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다는 표현은 조상들에 비하여 더 못한 사람이라고 자기 인생을 비관합니다. 이제는 끝이 났고 조상들보다 못하니 빨리 죽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의 이런 모습이 상상이 되십니까? 어떤 사람입니까? 17;7, 3년 6개월 동안 하늘에 비가 내리지 않도록 했던 선지자입니다. 17;14, 사르밧 과부의 집에 복을 빌자 통의 밀가루와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도록 한 사람입니다. 17;22, 그녀의 죽은 아들을 기도하여 살려 주었던 사람입니다. 18;45, 갈멜산에서의 승리 후 하나님께 기도하여 3년 6개월만에 비가 내리도록 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자기를 죽이겠다는 이세벨의 말 때문에 도망을 하고 죽기를 구합니다. 말이 안 되고 이해가 안 됩니다. 혼을 내고, 꾸중을 해야지요. 때려서 정신을 차리게 해야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지 않고 사자를 보내어 자고 있던 엘리야를 어루만져 깨우시며 19;5, 일어나서 먹으라. 엘리야가 일어나서 보니 숯불에 구운 떡과 물 한 병이 있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광야에서 죽기를 구하며 잠이 든 엘리야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음식을 준비하셨습니다. 잠에서 깬 엘리야는 일어나 먹고, 다시 잠을 잡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또다시 다가와서 엘리야를 어루만지며 깨웁니다. 일어나 먹으라. 엘리야는 일어나 또 다시 차려진 그 음식을 먹었습니다. 두려움 속에서 죽기를 구하던 엘리야를 그냥 품고 품으셨습니다. 잘잘못을 따지며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지친 몸과 마음을 위하여 2번이나 숯불을 피워 떡을 굽고, 마실 물로 위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먹이시고 마시게 하셨습니다. 살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지친 엘리야를 위한 하나님의 위로가 가장 부드럽고 짠하게 드러난 부분이, 왕상19;5절과 7절속에 반복된 어루만지는 표현입니다. 어루만지는 히브리어는 נָגַע(나가입니다. 이 동사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을 어루만져 주실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루만져 주신 대상은 반드시 변화가 되었습니다. 이 특별한 만지심과 음식으로 기력이 회복된 엘리야는 19:8에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시내산이며 호렙산에 도착한 엘리야는 그곳에서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자신을 부르시는 그날까지 그때 받은 소명을 다 감당하고 하늘로 들려 올라갔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베푸신 음식은 사람으로 두려움을 딛고 일어서게 합니다. 어렵고 아프고 힘든 현실을 딛고 일어서게 합니다. 하나님의 손길은 걱정에 잠 못 드는 밤에도, 포기한 마음으로 잠이 든 밤에도 다가와 어루만지십니다.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시고, 따뜻한 음식으로 새 힘을 갖게 하시는데 엘리야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 지금도 여전히 그때나 이제나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2-4. 벳세다 광야에서 먹이신 예수님입니다. 눅 9;12절, 날이 저물어 가매 열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말씀을 듣다가 날이 저물어 가자 제자들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유하며 무엇을 얻게 하소서. 제자들은 해는 지고 무리들은 많고 빈들이기 때문에 먹을 것도 없고 숙소도 없으니 무리를 마을로 보내어 거기서 유하며 먹을 것을 사먹게 하자고 건의했습니다. 제자들의 제안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타당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에게 눅9;13,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을 마을로 보내어 유하며 먹을 것을 사먹게 하고자 하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제자들의 제안에 도리어 너희가 먹을 주라고 하셨을까요? 오늘 본문에는 그 이유가 나와 있지 않지만 요6:5-6절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제자들을 시험했습니다. 믿음을 시험했습니다. 사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많은 무리들에게 음식을 제공해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것을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특별한 교훈을 주기 위해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이 기회를 이용해서 제자들을 훈련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13b절,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는 할 수 없습니다. 막6:37,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입니까. 요6:7절 빌립이 대답하기를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 하리이다. 한 데나리온은 성인 남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화폐로 환산하면 몰려온 무리들을 조금씩 먹게 하더라도 족히 삼백만 엔의 큰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의 수가 성인 남자만 오천 명이 넘습니다. 여자와 어린 이이들을 포함하면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14절, 이는 남자가 한 오천 명됨이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오십 명씩 앉게 하셨습니다. 16-17,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 앞에 놓게 하시니 먹고 다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 열 두 바구니를 거두니라. 참으로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어떻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성인 남자만 오천 명을 먹일 수 있습니까? 배불리 먹고도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면 이 사건을 통해서 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이적을 행하실 때 이 사람들은 막6:34절의 목자 없는 양과 같았습니다. 이런 사람들 앞에서 지금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이 어떤 믿음에 있어야 하는 것인지를 알게 해 주셨습니다. 또한 제자들은 오병이어 이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만나를 먹이신 사건을 기억했습니다. 오병이어의 이적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이 오병이어의 기적은 목자 없는 양에게 목자와 양식이 필요하고 제자들의 깨달음에 필요했습니다. 먹이시고 마시게 하신 기적인데 출애굽하여 광야 길을 걸을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동일합니다. 먹이시는 주님을 보고 주님을 통하여 서로를 알아 가는 영원한 나와 너의 관계를 만들어 갔습니다.

 

3. 와서 조반을 먹으라.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고 식사하시는 것을 즐거워 하셨습니다. 얼마나 좋아하셨으면 예수님을 비방하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일컬어 눅7;34,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밤새도록 헛 그물질에 지친 제자들을 위하여 손수 아침 조반을 준비하셨습니다. 이른 새벽 모닥불을 피워 떡을 굽고, 생선을 손질하여 구운 후 지친 제자들을 불렀습니다. 미안함과 죄책감에 차마 수저를 들지 못하는 7제자들을 위하여 친히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떡과 생선을 건네주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먹은 음식은 단순한 떡과 생선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갈이 마신 우물이었고, 40년 광야의 길에서 한결같이 똑 같고 함께 모든 사람이 먹었던 만나와 생수이었습니다. 엘리야가 먹은 떡과 물이었습니다. 엘리야를 어루만지시던 하나님의 손길이었습니다. 새롭게 소명을 받는 하나님의 산 호렙 이었습니다. 벳세다 광야의 말씀에 사로잡혔던 그래서 배고픔과 추위도 잊었던 군중들이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배고픔을 달래고 다시 시작하는 흥분의 장소이었습니다. 아직도 주님을 주님으로 모르던 믿음이 별로였던 제자들이었습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는 주님의 말씀은 일어나 먹으라며 엘리야를 깨우시던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날 갈릴리 벳세다 광야는 단순한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상을 베푸시는 거룩한 광야였습니다. 제자들의 잔이 넘치는 광야의 식탁이었습니다. 그들의 평생에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따르는 그 시발점이었습니다. 부르시는 그날까지 받은 소명을 다하는 새로운 시작, 호렙산 이었습니다. 먹이시는 주님을 보고 주님을 통하여 서로를 알아 가는 나와 너의 관계로 만들어진 은혜의 식탁공동체 이었습니다. 그래서 이후에 주님의 양을 섬기는 제자들이 됩니다. 여러분, 내 자신에 대한 가치 결정에 따라 지나간 기회가 다시 오고. 주어지는 기회를 통해서 오늘의 삶을 만들어 갑니다. 합3: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부정적이고 귀가 얇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께서 친히 만드신 조반을 먹고 참여하는 그래서 부르신 소명을 다 이루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4. 적용입니다. 세상의 밥이 되어. 제자들을 먹이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줍니다. 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세상 속에서 존재해야 할지를 제시해 줍니다. 그것은 밥을 나누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세상을 위한 밥이 되는 교회입니다. 여러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들을 돕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이런 분들의 일상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나도 옛날에 이렇게 살았지, 이렇게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자극을 일상에서 많이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디서 받을 수가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영원하신 주님을 보고 주님을 통하여 서로를 알아 가는 나와 너의 관계가 됩니까? 치유의 시작이자 핵심은 일상의 기본인 밥을 먹는 것이고 식탁 공동체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런 면에서 지난 수요일, 2/17일부터 시작하는 사순절을 어떤 마음과 어떤 자세로 보내야 할까요? 올바른 금식은 고아와 홀로 사는 여인과 나그네를 위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이 것은 레위기에 있는 거룩하게 되는 한가지입니다. 우리 비전교회 교우들이라도 지친 사람들에게 조반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먼저는 누군가를 위하여 웃는 것보다 나를 보면서 웃는 것이 십자가의 중심입니다. 소명 때문에 주저앉지 않아야 합니다. 여러분, 빨리 왔으면 소망하는 것들은 자꾸 멀어져 가는 것 같고 오지 않았으면 하는 일들은 왜 이리 가까이 오려고 하는지요. 그래서 오늘도 비전교회와 주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주시되 묶인 것이 풀리고 닫힌 것이 열리고 막힌 것이 뚫리고 문제들이 해결되는 은혜를 사모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지치고 곤한 사람들을 위하여 친히 음식을 차려주시는 주님의 사랑과 슬픔에 잠든 어깨를 어루만지시며 토닥이시는 주님의 손길과 친히 생명의 빵이 되어 당신을 찢어 나누어 주신 은혜를 통하여 서로를 알아 가는 나와 너의 관계를 만들어 가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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