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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삿15;14-20. 라맛레히와 엔학고레. 2026. 6. 28.  

작성자kuniko haizuka|작성시간26.06.23|조회수33 목록 댓글 0

삿15;14-20. 라맛레히와 엔학고레. 2026. 6. 28.  

  

상형문자 福은 보일 示와 한 一과 입 口와 밭 田의 합성어입니다. 이 합성어의 복이 의미하는 것은 보여 지는 밭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은 먹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의미가 깊지요?  여러분, 인생의 밭에서 소출되는 모든 것과 삶의 여정에서 생산되는 모든 것을 보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이 시간까지 뿌리고 심은 모든 것의 씨앗이 움이 돋고 싹이 돋아나야지요? 성장하고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야 하지요? 하지만 물을 주는 것은 우리가 할 수가 있지만 자라고 성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심고 뿌리신대로 다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까? 왜 이렇게 여쭈어 볼까요? 삶의 환경과 여건이 우리의 생각대로 만들어지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생각하지 못하고 꽃을 피울 수 없고 얻을 수 없는 열매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뿌리고 심었지만 쓴 뿌리와 엉겅퀴 때문에 싹은커녕 움도 돋지 않은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적당한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은혜가 지속되면 좋은데 비바람이 쏟아지고 거센 폭풍우와 휘몰아치는 태풍이 지나갑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여정인데 이런 모든 것을 뛰어넘어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그래서 그 꽃과 열매를 얻는 것이 보일 示와 한 一과 입 口와 밭 田의 합성어의 복입니다. 뿌리고 심은 뒤의 쓴 뿌리와 엉겅퀴가 있어도, 돌짝 밭과 길가와 수풀 속에 뿌렸을지라도, 적당한 이른 비와 늦은 비가 아닌 비바람과 거센 폭풍우와 휘몰아치는 태풍 속에서도 인생의 밭에서 얻는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이 보일 示와 한 一과 입 口와 밭 田의 합성어의 복입니다. 잠언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우리는 2026년을 시작하면서 다짐과 결단과 소망을 모아서 간절하게 사모하는 마음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송구영신과 신년 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의 길을 계획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일 예배가 정확하게 2026년의 반환점입니다. 끊임없이 만나고 관계를 맺고 심고 뿌린 지난 6개월이었습니다. 없는 물도 뿌리고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여호와입니다. 2026년의 나의 걸음과 나의 계획의 성패가 여호와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나의 시대는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자라게 하시고 성장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쓴 뿌리와 엉겅퀴를 제거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보일 示와 한 一과 입 口와 밭 田의 합성어의 복을 받을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환경과 여건과 상황을 만드는 것도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비바람과 거센 폭풍우와 휘몰아치는 태풍 속에서도 동남풍을 동원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지나온 삶을 뒤로하고 다시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은혜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오늘 본문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오늘 본문 15: 9, 14, 17, 19, 라맛레히가 나옵니다. Ramath-Lehi는 삼손이 나귀 턱뼈 하나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 1,000명을 죽였던 곳으로 턱뼈의 산이라는 뜻입니다. 삼손이 이룬 위대한 역사입니다. 여러분, 나에게 주시고 허락하신 영역을 어떻게 살아야할까요? 지금은 시온의 대로가 아닙니다. 나귀 턱 뼈 하나로 1000명의 용사와 싸워야 하는 상황이고 험난한 협곡입니다. 감당을 해야 하는데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고 펼칠 수 없는 관계의 상황입니다. 빠져 나와야만 하는 협곡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렇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들의 조상들을 애굽에서 탈출시키고, 홍해를 건너게 하고, 광야를 거쳐 요단을 건너게 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신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의지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눈앞의 현실과 세상과 타협을 했습니다. 현재의 상황은 불레셋, 세상입니다. 불레셋은 아낙자손의 후예입니다. 블레셋은 호전적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위협이 되었습니다. 약탈을 당했습니다. 있는 것 까지 빼앗겼습니다. 이러한 블레셋을 징계하고자 하나님은 태중에서부터 삼손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삼손은 태어나면서부터 나실 인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이 몰랐습니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평화유지를 위하여 블레셋의 요구에 응했습니다. 그래서 레히에 있는 에담 바위에 숨어 있던 삼손을 넘겨주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력으로 평화를 유지하며 안정적인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관계를 위해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습니다. 14절,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들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를 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그의 팔위의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그의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삼손은 에담 바위에서 3000명의 동족들에 의하여 결박되었고 블레셋에게 넘겨졌습니다. 이 때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에게로 나가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삼손에 대하여 분노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하나님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자 삼손을 단단하게 결박하고 있던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힘없이 그의 손에서 떨어졌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이 왜 블레셋의 위협에서 지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까?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위협적인 블레셋만 보였고 블레셋의 강함만을 두려워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함으로 상황은 반전되었습니다. 3,000명의 동족에게 결박되어 블레셋에게 넘겨졌던 삼손은 결박이 풀리면서 곁에 있던 나귀의 턱 뼈로 블레셋과 싸워 일천 명을 죽였습니다. 나귀의 새 턱 뼈라고 한 것은 오래 된 것은 삭아서 사용할 수 있지만 새 것이기에 단단하였다는 것과 하나님이 삼손의 무기로 나귀의 새 턱 뼈를 미리 준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일천 명과 싸우려면 칼이나 창과 같은 무기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삼손은 나귀의 새 턱 뼈로 블레셋의 용사 1000명과 싸워서 이겼습니다. 그런데 삼손이 여기서 실수를 합니다. 그 곳의 이름을 라맛 레히 라고 합니다. 아래의 난하 주를 보면 턱 뼈의 산이라고 합니다. 이 승리는 임마누엘하신 하나님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임마누엘 레히 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드러내는 명칭을 사용해야 하는 데 삼손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이레와 에벤에셀과 여호와 샬롬의 대한 감사와 영광의 의미가 항상 있어야만 합니다. 삼손에게 힘과 능력을 주지 않았다면 밧줄이 맥없이 풀리겠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나에게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면 불가능이 없습니다. 슥4:6,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하나님의 영이 지켜 주어야 능력이 나타납니다. 수1:9,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 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사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여러분, 우리에게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나홈 1:13 이제 네게 지운 그의 멍에를 내가 깨뜨리고 네 결박을 끊으리라, 시116:16. 주께서 나의 결박을 푸셨나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부터는 멍에가 깨지고 결박을 끊고, 풀리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부르짖는 사람의 샘이라는 엔하고레. En Hakkore입니다. 삼손은 레히에서 나귀 턱뼈로 블레셋 사람 일천 명을 죽인 이후에 목이 말라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샘을 터지게 하셔서 물을 마셨던 곳입니다. 그런데 삼손이 실수를 했습니다. 여호와 이레와 에벤에셀과 여호와 샬롬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영광의 의미가 없는 레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삼손에게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18절, 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삼손의 위기는 목마름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르짖었습니다. 여기서 부르짖다의 히브리어는 카라인데, 뜻은 외치고, 소리치며 절규하고, 젖 먹던 힘까지 다하여 외치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위기의 순간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카라로 부르짖어야합니다. 그러면 엔학고레가 주어집니다. 이 단어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2-1. 엔학고레는 지금이 은혜 받을만한 때라는 것입니다. 시 51: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다윗은 기도했고, 삼손은 부르짖었습니다. 카라 했습니다. 외치고, 소리치고, 절규하고, 젖 먹던 힘까지 다하여 외쳤습니다. 그랬더니 엔학고레가 나타났습니다. 위기에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렘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힘들고 어려울 때 낙심하지 말고 이리저리 방황하지 말고 카라로 외치고 기도해야합니다. 삼손이 블레셋을 물리친 뒤에 물이 없음을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삼손을 블레셋에게 넘긴 동족이 몇 명입니까? 11절, 유다 사람 3,000명입니다. 이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삼손에게 물을 주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상황이며 깊이 생각해야 할 상황입니다. 사람이 도와주지 않습니다. 동족이 삼손을 팔고 삼손의 위기 탈출의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삼손의 부르짖음을 듣고 한 우묵한 곳을 터트리심으로 삼손에게 흡족할 만큼의 물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3,000명도 해결하지 못한 갈증을 해갈시켜 주었습니다. 요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주님이 엔학고레의 샘물입니다. 주님은 진토에 붙은 영혼을 소성케 하고, 눌림에 있는 영혼을 회복시킵니다. 고통 받은 사람을 살리시고, 낙심에서 소성케 합니다. 다시 회복시켜 능력 있게 하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의 말씀은 엔학고레의 샘물입니다. 말씀을 읽고 들으며, 묵상하여, 그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는 것이 응답의 축복과 능력의 샘물이 됩니다. 마4;4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난날의 갈증과 시작의 갈증을 어디서 해결합니까? 계21:6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값없이 목마른 위기의 인생들에게 생명수 샘물을 주십니다. 주님만이 나의 삶과 영적갈증을 해갈시켜 줍니다. 나의 마음과 생각에 꽉 차 있는 갈증을 주님만이 해결 하십니다. 지금이 어느 때입니까? 나를 도와주는 그 무엇이 없고 나를 세상의 용사 1000명이 넘는 블레셋에게 넘기는 그런 위기의 상황입니다. 그 곳에서 당당하게 빠져 나와도 동족 3000명이 도와주지 않습니다. 관계가 무용지물입니다. 갈증의 위기를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쳐다보고 눈만 뻐끔뻐끔합니다. 모른척하고 안들은 척하고 못 본척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때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카라라는 엔학고레로 은혜 받아야만 하는 때입니다. 주님께 부르짖고, 해갈의 은혜가 있는 그래서 여러분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2. 카라는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역사입니다. 갈급과 목마름과 소망과 비전을 해소하는 엔학고레의 샘이 카라로 이루어집니다. 여러분, 2026년에도 무엇이든지 지나갈 것이고 무엇이든지 다가옵니다. 하지만 주님의 은혜를 경험한 믿음으로 세워진 인생은 주님께서 이 모든 것에 개입하시고 개입하신 주님께서 길을 여시고 책임져 주십니다. 놀라운 것과 중요한 것은 라맛레히와 엔학고레가 함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라맛레히는 턱뼈의 언덕으로 승리의 기념비입니다. 삼손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리한 곳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승리의 현장에서 삼손은 목말라 죽게 되어 하나님 앞에 울부짖어야 했습니다. 사자와 꿀이 한자리에 있었듯이 턱뼈의 언덕과 부르짖는 자의 샘물이 한자리에 있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놀라운 승리를 이룬 그 자리에서 바로 침체하게 됩니까? 승리로 흥분했던 것만큼 목말라 울부짖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블레셋 군인 천명을 상대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무장한 용사이기 때문에 정신없이 싸웠습니다. 숫자를 헤아리기조차도 힘든 1000명의 적들을 나귀턱뼈 하나로 대항하는 것은 죽는 것보다 힘이 들었습니다. 누구하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이 벌판에서 외롭게 혼자서 고군분투 했습니다. 처량하기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리의 기념비를 라맛레히에 세웠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싸울 때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갈증이 엄습했습니다. 광야 한 복판에서 타는 목마름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앞이 캄캄하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습니다. 버티고 서 있는 것 자체가 힘들었습니다. 피가 거꾸로 솟고 고통스러워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습니다. 어느 누구도 도와주지 않고 누구 하나 나서지 않았습니다. 괴롭고 외롭고 고독합니다. 하지만 살아야 하기 때문에 정신없이 싸웠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그렇지 않습니까? 능력 이상으로 싸워서 승리하게 하시더니 이제는 원수들 앞에서 목말라 죽게 하십니까? 삼손의 고백입니다. 목이 말라 탈진해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습니다.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여 힘이 다 떨어져서 부르짖다가 쓰러진다면 사사의 체면이 무엇이 되고, 하나님은 무엇이 됩니까? 사실 적들은 삼손의 능력에 혼비백산하여 다 도망갔습니다. 하지만 갈증으로 쓰러지면 적들이 또다시 삽시간에 달려들어 나를 죽일 것입니다. 어떻게 힘을 주셨으면 끝까지 함께하셔야지, 전쟁에서는 이기게 하시고 이제는 목말라 죽게 하십니까? 이토록 황당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배신한 동족이 비웃는 것은 물론이고 적들의 기고만장한 모습을 어떻게 봅니까? 능력과 힘을 주셨으면 끝까지 보호하시고 책임지셔야하지 않습니까? 갑자기 힘을 거두시고 목마름의 갈증으로 쓰러지게 하십니까? 무엇을 잘못하였습니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왜 이토록 고통 가운데 죽어 가게 하십니까? 사사로 세우신 것이 맞습니까? 나실 인이면 이렇습니까? 주시는 능력의 한계가 여기까지입니까? 언제 사사가 되겠다고 했습니까? 나귀턱뼈 하나로 싸우라 하시더니 왜 이러십니까? 기념비를 세운 것 때문에 진노하셨습니까? 블레셋에 겁을 주기 위한 것인데 나의 교만으로 보셨습니까? 천명을 죽였고 적은 아직 접근하지 못하고 있지만 여전히 가까운 곳에서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목이 말라 탈진하여 더 이상 견딜 수가 없고, 몸을 가눌 수가 없습니다. 만일 여기서 쓰러진다면 블레셋 사람들이 다시 몰려와 수치스럽게 죽일 것입니다. 필요에 따라 사용하시고 버리십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쓰러진다면 어떻게 그것을 능력이라고 합니까? 목마름 속에 어떤 능력을 기대해야합니까? 삼손은 이렇게 카라 했습니다. 여러분, 카라로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왜 능력이 엔학고레입니까? 엔학고레는 응답의 샘물이기 때문입니다. 엔학고레의 샘물을 마시면 영혼이 회복되고 육신이 소생합니다. 새 힘을 얻고 당당히 일어설 수 있는 능력을 얻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엔학고레의 샘물로 능력을 얻습니까? 어떻게 엔학고레의 샘물을 삼손에게 주셨습니까?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하나님께서는 삼손의 간절히 부르짖는 것을 보시고 응답으로 주신 것이 엔학고레의 샘물입니다. 하나님께서 레히에서 엔학고레의 샘물을 주셨습니다. 비록 슬럼프가 생기고 낙심도 되여 절망에 빠지고 위기가 되었지만 그래도 삼손은 하나님을 찾고 두드리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구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엔학고레의 샘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수입니다. 소생케 하는 생수는 다시 용기를 주고 다시 힘을 얻게 하는 샘물입니다. 다시 위대한 사사로 있게 한 회복의 샘물입니다. 2026년도 후반기가 항상 순탄하지 않습니다. 승리 뒤에 갈증과 목마름이 있습니다. 바로 이때에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카라와 능력을 통해서 여러분의 삶이 더욱 빛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3. 엔학고레는 나의 문제에 대한 해결의 최종 능력입니다. 여러분, 참으로 중요한 것은 슬럼프와 깊은 낙심의 고통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다가옵니다. 바로 그때에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고 하나님 앞에서 목이 마르고 못 살겠다고 아우성치는 것은 불신앙이 아닙니다. 기복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삼손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블레셋에서 자유케 하시려고 이미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때마다 하나님의 신령한 영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더하여 믿음뿐만 아니라 그 신령한 영에 의하여 삼손이 할 수 없는 영역을 감당케 하시고 나귀 턱뼈 하나로 1000명의 블레셋 용사들을 물리칩니다. 싸워서 일길 능력 또한 허락하셨습니다. 하지만 육체의 한계를 지닌 삼손이기에 엄청난 갈증을 했습니다. 목마름이 더하여 담즙이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육체적인 한계를 호소하는 삼손에게 엔학고레를 허락하시고  응답의 은총, 엔학고레의 샘물을 마시게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여전히 세상을 기대하기도 하고, 세상의 것들이 없어 졌을 때는 낙심하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내 안에 능력이 있음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세상 것에 의해서 하늘의 생명이 가려지고 희미해지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인생사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세상의 힘을 가진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인 엔학고레에 관심이 없습니다. 목마름의 호소도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부르짖어야 합니다. 인생 신호등에 빨간 불이 들어왔습니까? 왜 red sign이 나타났을까요? 잠시 멈추라는 것입니다.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서서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사인입니다. 푸른 신호등이 무엇입니까? 가야할 길을 가는 것 아닙니까? 주신 사명 감당해야 하는 길 아닙니까? 그 것 때문에 우리가 눈물을 흘리고 부르짖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삼손의 부르짖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으로 블레셋에게 승리하게 하셨지만 자신 역시 하나님께서 물을 주지 않으시면 죽을 수밖에 없음에 대한 부르짖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살려주지 않으시면 죽는다는 것, 이것이 바로 엔학고레 입니다. 삼손이 아무리 힘이 세다고 한들 물이 없는 곳에서 어떻게 물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의 힘과 능력은 한계에 이르렀습니다. 여러분, 세상은 자신의 힘을 자랑하고 힘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을 것처럼 생각하지만 물 없는 들판에서 물이 나오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힘을 바라보고 질주합니다. 왜 이렇게 무모합니까? 죽음 앞에 무력한 자신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삼손이라고 해서 사망의 위기가 없었습니까? 삼손 역시 하나님이 아니면 갈증과 탈진으로 죽을 사람입니다. 우리와 같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부르짖었습니다. 목말라 죽게 된 상황에서 만큼은 자신의 힘이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힘을 버리고 응답의 샘물을 위하여 부르짖었습니다. 목마른 인생 아닙니까? 어떤 문제로 갈급하십니까? 물질이 문제입니까? 질병이 문제입니까? 사업의 문제입니까? 관계 때문입니까? 그 어떤 문제이든 목마름을 해결하는 길은 능력의 생수, 엔학고레의 샘물입니다. 중요한 것은 갈증이라는 것이 물에 대해서 듣고, 기억하고 물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마셔야 합니다. 여름날의 생수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막9;23,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낙심하고 좌절한 그 자리에서 주님을 찾고 부르짖고 털어 놓으시면 됩니다. 부르짖고 찾고 두드리십시오, 주님만이 응답의 샘, 엔학고레의 샘물을 터트릴 수 있습니다. 삼손이 타는 목마름으로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죽음의 상황에서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바로 그 때에 물리 솟아오르게 했습니다. 어디서요? 턱뼈 하나로 만들었던 바로 그 현장 그 곳, 기적의 현장이었던  가득히 쌓인 레히입니다. 그 물을 마시고 삼손은 정신을 차리고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 샘의 이름이 엔학고레 이고, 부르짖은 자의 샘이 됩니다. 여러분, 잘 되고 잘 풀리고 승리했을 때 자만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승리 뒤에 더 큰 아픔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반대로 실패했을 때는 좌절하고 낙심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메시지는 승리나 실패나 아직 하나님의 일은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종종 모든 것이 끝났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그늘 아래 안주하려 하는 소극적인 삶을 보셨습니다. 리더십의 부족으로 홀로 고군분투하는 삼손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학 고레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응답의 능력과 은혜의 샘물은 고갈됨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승리의 라맛레히가 되시고 이 승리의 최종적 열매를 위하여 언제든지 부르짖을 때에 응답하시는 엔학고레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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