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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삼국 간의 항쟁 (12/25 수정)

작성자백준기|작성시간11.02.25|조회수827 목록 댓글 8

삼국 간의 항쟁

 

 중앙 집권 체제를 정비한 삼국은 5 세기에 접어들면서 대외 팽창을 꾀하였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의 내정 개혁을 바탕으로 광개토 대왕 때에 만주 지방에 대한 대규모의 정복 사업을 단행하였고, 이어 신라와 왜·가야 사이의 세력 경쟁에 개입하여 신라에 침입한 왜를 격퇴함으로써 한반도 남부에까지 영향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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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왜 격퇴

(영락) 9년(399) 기해에 백제가 서약을 어기고 왜와 화통하므로, 왕은 평양으로 순수해 내려갔다.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에게 말하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성을 부수었으니, 노객은 백성 된 자로서 왕에게 귀의하여 분부를 청한다.”고 하였다. …… 10년(400) 경자에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 관군이 이르자 왜적이 물러가므로,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렀다. 성이 곧 귀순하여 복종하므로, 순라병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신라의 □농성을 공략하니, 왜구는 위축되어 궤멸되었다.          - 광개토 대왕릉 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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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장수왕 때에는 흥안령 일대의 초원 지대를 장악하는 한편(479, 유연과 함께 지두우 분할 점령), 중국 남북조와 각각 교류하면서, 대립하고 있던 두 세력을 조종하는 외교 정책을 써서 중국을 견제하였다. 또,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427), 뒤이어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하고 한강 전 지역을 포함하여 죽령 일대에서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그 판도를 넓혔다. 이러한 고구려의 한강 유역 진출은 광개토 대왕릉비와 중원 고구려비에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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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의 정복 활동

 

광개토대왕은 먼저 4만의 군사로 백제를 공격하여 임진강 일대를 차지하였다.

 

이어 북쪽의 거란을 원정하여 많은 촌락을 파괴하고 가축을 빼앗았다. 그것은 모용씨가 세운 후연을 공략하기에 앞서 그 배후의 거란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백제를 다시 공격하여 여러 성을 함락한 후, 한강을 건너 백제의 수도에 육박하였다. 이에 백제가 굴복하고 일시적이나마 고구려에 복속하기를 맹세하여 고구려는 한강 이북의 땅을 모두 점령하였다. 또, 5만의 군사를 신라에 보내어, 당시 신라를 침입한 왜군을 낙동강 유역에서 물리쳤다.

 

남쪽의 후환을 없앤 고구려는 서북쪽의 후연을 격파하여 오랜 숙원이던 요동 지방을 포함한 만주 대부분의 땅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동북쪽의 부여와 동쪽의 말갈을 굴복시켰다.

 

이리하여 광개토대왕은 남북으로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어, 일생 동안 64개 성 1400여 촌락을 차지할 정도로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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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계속된 대외 팽창으로 고구려는 동북 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였다.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정치 제도를 완비한 대제국을 형성하여 중국과 대등한 지위에서 힘을 겨루게 되었다.

 

 

백제는 5세기 이후 장수왕의 고구려의 적극적인 남하 정책에 밀려 비유왕 때에 신라(눌지왕)와 동맹(433)을 맺으며 대처했으나, 개로왕이 전사하며 수도(한성)을 뺐기며, 문주왕 때에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기면서(475) 대외 팽창이 위축되었다. 더구나 중국과 일본 지역의 정세 변화에 따라 무역 활동도 침체되어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세력이 국정을 주도하였다.


 5세기 후반 동성왕 때부터 백제는 다시 사회가 안정되고 국력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동성왕은 신라와 동맹을 강화하여(493, 신라 소지왕과 혼인동맹) 고구려에 대항하였고, 무령왕은 지방의 22담로에 왕족을 파견 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이로써 백제 중흥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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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 백제의 제 25대 왕(재위 501∼523).

 

웅진으로 천도 후 혼란한 백제를 안정시키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구 귀족세력을 등용하여 신구 세력 간의 균형을 유지하며 왕권을 안정화시켜 나갔다. 또, 22담로에 왕족들을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대외 관계에 있어서 고구려에 대해서는 공격적인 입장을 취했다. 즉위하던 해인 501년에 달솔 우영을 보내 고구려의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하였고, 이듬해에도 고구려의 변경을 공격했다.

 

512년 중국 양나라에 조공하였으며, 같은 해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가불(加弗)·원산(圓山)의 두 성을 빼앗겼으나 친히 군사 3,000명을 거느리고 위천(葦川)의 북쪽으로 진출해 고구려 군사를 크게 무찔렀다.

 

521년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를 깨뜨려 다시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선언하였다. 이에 양나라의 무제(武帝)는 무령왕을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에 책봉하였다.

 

1971년 무령왕과 왕비가 합장된 능이 충남 공주에서 발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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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왕은 대외 진출이 쉬운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기고(538),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면서 중흥을 꾀하였다. 성왕은 중앙 관청과 지방 제도를 정비하고, 불교를 진흥하였으며, 중국의 남조와 활발하게 교류함과 아울러 일본에 불교를 전하기도 하였다(노리사치계 파견). 한편, 성왕은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서 신라와 연합하여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을 부분적으로 수복하였지만 곧 신라에게 빼앗기고, 자신도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에서 전사하고 말았다(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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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의 체제 정비
성왕은 중앙 관청을 22 부로 확대 정비하고, 수도를 5부로 지방을 5 방으로 정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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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는 6 세기 진흥왕 때에 이르러 내부의 결속을 더욱 강화하고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다.

 이를 토대로 진흥왕은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고령의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다. 특히,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경제 기반을 강화하고, 전략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황해를 통하여 중국과 직접 교역할수 있는 유리한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는 이후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신라가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진흥왕의 정복 활동에 관한 사실은 단양 적성비와 4 개의 순수비를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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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 관련 비석>

 

단양 적성비(진흥왕, 550,551): 적성점령에 대한 포상과 그 지역에 대한 대민회유 무마책

창녕비(진흥왕, 561): 척경비 또는 순수비. 창녕 비화가야 정복

북한산비(진흥왕, 555~568년경): 순수비, 한강 하류 정복, 김정희 고증

황초령비(진흥왕, 568): 순수비, 함경도, 김정희 고증

마운령비(진흥왕, 568): 진흥왕 순수비 중 가장 뚜렷한 관직, 인명이 나타나고, 신라인들의

                                      충효사상을 바탕으로 한 유교 사상이 나타남. 최남선 고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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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연맹도 5 세기 초에 크게 변하였다. 전기 가야 연맹이 해체되면서 김해, 창원을 중심으로 하는 남동부 지역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반면, 그 동안 낙후 지역이었던 북부 지역의 고령, 합천, 거창, 함양 등지의 세력은 자신의 영역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5 세기 후반에 고령 지방의 대가야를 새로운 맹주로 하여 후기 가야 연맹을 이룩하였다.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가야연맹은 5세기 후반에 크게 성장하여 그 세력 범위를 소백 산맥 서쪽까지 확장시켰다. 또, 중국 남조에 사신을 보내 교통하였으며, 고구려의 침입을 받은 신라를 백제와 함께 구원하기도 하는 등 6 세기 초에 대가야는 백제, 신라와 대등하게 세력을 다투기도 하였다.

 

그러나  6세기에 이르러 가야연맹은 백제와 신라의 중간에서 두 나라의 압력을 계속 받아 위축되었다. 이는 한강 유역을 잃은 백제가 그 보상을 가야 지역에서 찾으려 하였고, 신라도 이에 자극을 받아 가야지역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백제와 신라가 이미 중앙 집권 체제를 마련한 것에 비하여 가야연맹은 각 소국이 독자적인 정치 기반을 유지했으므로 그 지배력을 집중시키지 못하였다. 따라서, 가야연맹은 지역적으로 백제와 신라의 중간에 위치하여 두 나라의 세력다툼을 위한 전장이 되었으며, 이들 나라의 압력을 받으면서 불안한 정치 상황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왜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든지, 대가야는 신라와 결혼 동맹(

522년, 이뇌왕-법흥왕)을 맺어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려 하기도 하였다.

 이후, 신라와 백제의 다툼 속에서 후기 가야연맹은 분열하여 김해의 금관가야가 신라에 정복당하였고(532), 가야의 남부 지역은 신라와 백제에 의하여 분할 점령되었다. 결국, 대가야가 신라에 멸망하면서(562) 가야 연맹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결국 국력이 서로 비슷한 수준이었던 가야연맹은 결국 통일 왕국을 이루지 못한 채 멸망한 것이다.

그러나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발전하였던 가야 문화는 뒤에 신라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 또. 가야의 일부 세력이 일본에 진출하여 일본의 고대 문화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

 

 

 


 

 

             - 5 세기 고구려 전성기의 세력 판도 -

 

 

 

 

 

 

              - 신라 진흥왕 때의 영토 확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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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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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alswls | 작성시간 12.05.29 감사합니다 ^^
  • 작성자brava | 작성시간 12.06.28 감사합니다.
  • 작성자sау Уоц ŀоцё мё_。 | 작성시간 13.01.08 정말좋은자료입니다.
  • 작성자parkju6448 | 작성시간 13.01.17 정말감사
  • 작성자fnffnf | 작성시간 14.05.24 드디어 사진이 보여요!!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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