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고분과 고분 벽화
고구려는 초기에 주로 돌무지무덤을 만들었으나, 점차 굴식 돌방무덤으로 바꾸어 갔다. 돌을 정밀하게 쌓아올린 돌무지무덤은 만주의 집안(지안) 일대에 1만 2000여 기가 무리를 이루고 있다. 다듬은 돌을 계단식으로 7층까지 쌓아올린 장군총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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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무지무덤: 돌로 쌓아 만든 무덤인데, 청동기 시대부터 삼국 시대까지 만들어졌다.
굴식 돌방무덤: 돌로 1 개 이상의 방을 만들고 그것을 통로로 연결한 무덤으로, 일반적으로 앞방과 널방으로 구분하고, 벽에 그림을 그려 넣기도 하였다.
장군총: 장수왕릉으로 추정. 바닥의 한면이 31.5m, 높이가 12.4m의 장대한 피라미드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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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식 돌방무덤은 돌로 널방을 짜고 그 위에 흙으로 덮어 봉분을 만든 것이다. 널방의 벽과 천장에는 벽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이런 무덤은 만주 집안, 평안도 용강, 황해도 안악 등지에 널려 있다.
고분 벽화는 당시 고구려 사람의 생활, 문화, 종교 등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초기에는 주로 무덤 주인의 생활을 표현한 그림이 많이 있고, 후기로 갈수록 점차 추상화되어 사신도 같은 상징적 그림으로 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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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장천 1호분 : 예불도
오회분 4호묘 : 남성 모습의 해의 신과 여성 모습의 달의 신
오회분 5호묘 : 소의 머리를 하고 있는 농사의 신
무용총 : 무용도, 수렵도
각저총 : 고구려 하층민의 씨름도, 별자리 그림
모두루총 : 피장자 묘지의 기년묵서 명문
<평양 인근>
• 안악 3호분(황해도 안악) : 북한에서는 미천왕이나 고국원왕이라고 주장, 남한에서는 대부분 동수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동수는 326년 고구려에 귀화한 중국인이다 - 영화 13년이라는 동진의 연호, 대행렬도(고구려 지배층의 행차 모습으로 250명의 큰 행렬이 그려져 있다), 부엌과 고깃간, 우물가 등의 벽화
• 쌍영총(평남 용강) : 기사도, 서역의 영향을 받은 2개의 팔각기둥, 말각조정 - 고구려 건축양식을 알 수 있는 네 귀퉁이의 기둥, 두공, 동량
• 덕흥리 고분(황해도 안악) : 견우직녀도 - 남자가 밭갈고(농경과 관련된 소), 여자는 베짜는 모습은 농경사회에서 생업과 직분을 권장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 수산리 고분(평남 강서 수산리) : 교예도 - 높은 나무다리 위에서 교예를 하고 있는 모습으로 바퀴 굴리기, 공던지기 등의 벽화, 신분에 따라 사람의 크기를 달리하였다.
• 강서 고분(평남 강서 우현리) : 사신도 - 정열과 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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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한강 유역에 있던 초기 한성 시기에 계단식 돌무지무덤을 만들었는데, 서울 석촌동에 일부가 남아 있다. 이는 백제 건국의 주도 세력이 고구려와 같은 계통이라는 건국 이야기의 내용을 뒷받침하고 있다.
웅진 시기의 고분은 굴식 돌방무덤 또는 널방을 벽돌로 쌓은 벽돌무덤으로 바뀌었다. 벽돌무덤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완전한 형태로 발견된 무령왕릉이 유명하다. 사비 시기에는 규모는 작지만 세련된 굴식 돌방무덤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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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
무령왕릉은 1971년에 송산리 고분군의 배수로 공사 중에 우연히 발견되었다. 그래서 고구려나 백제의 다른 무덤과는 달리, 완전한 형태로 빛을 보게 되었다. 중국 남조의 영향을 크게 받아 연꽃 등 우아하고 화려한 백제 특유의 무늬를 새긴 벽돌로 무덤 내부를 쌓았다. 무덤의 주인공이 무령왕과 왕비임을 알려 주는 지석이 발견되어 연대를 확실히 알수 있는 무덤이기도 하다. 왕과 왕비의 장신구와 금관 장식, 귀고리, 팔찌, 지석, 매지권, 진묘수, 양나라 동전(오수전) 등 3000여 점의 껴묻거리가 출토되어 백제 미술의 귀족적 특성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무덤이다.
묘지에 사마왕 붕(崩)이라 쓰여있는데, 사후에 주어진 시호인 무령왕의 표현은 보이지 않는다. 관재에서 일본열도에서만 자라는 금송이 검출되었다. 절대 연대가 확실한 최초의 백제고분이며, 도굴이 안된 왕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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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돌방무덤(능산리 1호분)과 벽돌무덤(송산리 6호분)에도 벽과 천장에 사신도와 같은 그림을 그려 넣기도 하였다.
신라는 거대한 돌무지덧널무덤을 많이 만들었으며, 삼국 통일 직전에는 굴식 돌방무덤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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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무지덧널무덤: 신라에서 주로 만든 무덤으로 지상이나 지하에 시신과 껴묻거리를 넣은 나무덧널을 설치하고 그 위에 냇돌을 쌓은 다음에 흙으로 덮었다. 도굴이 어려워 많은 껴묻 거리가 그대로 남아 있다.
천마총 : 장니(障泥)에 그려진 천마도, 기마인물도(자작나무 껍질), 금관, 금관식, 계란껍질
황남대총 : 금관(사슴뿔 모양), 방추차
호우총 : 경주 호우총에서 발견된 청동합(청동으로 된 제기)의 바닥에는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이라는 광개토대왕의 묘호가 새겨져 있다. 이 청동합은 광개토대왕릉비보다 1년 뒤인 415년에 만들어졌으며 같은 서체(예서체)로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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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신라 시대에는 불교의 영향으로 화장이 유행하였고, 고분 양식도 거대한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점차 규모가 작은 굴식 돌방무덤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봉토 주위를 둘레돌로 두르고, 12지 신상을 조각하는 독특한 양식이 새롭게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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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지 신상(十二支神像): 12지를 상징하는, 얼굴은 동물이고 몸은 사람인 상. 12지는 쥐, 소, 범,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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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지역에서는 토광묘(목관, 목곽)와 석곽묘가 주류를 이룬 묘제이다. 그러나 가야 후기나 말기에 석실분이 출현하여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일본의 전방후원분에 영향을 준 원방형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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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령 고아동 고분(6세기 경으로 추정) 고분 : 횡혈식 석실 - 천장에 연화문의 벽화 발견
• 고령 지산동 45호분, 창녕 교동 3호분 : 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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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에도 도읍지를 중심으로 많은 무덤이 남아 있다. 이 중에서 정혜 공주묘(돈화 육정산 고분, 문왕의 둘째 딸)는 굴식 돌방무덤으로 모줄임 천장 구조가 고구려 고분과 닮았다. 이 곳에서 나온 돌사자상은 매우 힘차고 생동감이 있고, 묘비문을 통하여 발해 시대 지식층의 한자문학의 수준이 상당한 수준임을 짐작할 수 있다.
정효 공주 묘(화룡 용두산 고분, 문왕의 넷째 딸, 벽돌식 무덤)에서는 묘지와 벽화가 발굴되었다. 무덤에서 나온 이런 유물은 발해의 높은 문화 수준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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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墓誌) : 죽은 자의 생애와 가족 관계 등을 기록하여 관과 함께 묻은 유물이다. 돌에 기록하기도 하고, 석관에 기록한 것도 있으며, 조선 시대에는 백자로 만들기도 하였다.
정효공주 묘지(墓誌) : 4.6 변려체 양식이고, 문왕의 존호가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으로 되어 있어, 문왕이 불교의 이상적인 제왕인 전륜성왕(轉輪聖王)을 자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발해가 그만큼 세력이 강한 국가였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 "황상은 조회를 파하고 크게 슬퍼하여(皇上罷朝興慟)"라는 글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발해에서는 문왕을 중국의 황제와 동등한 자격으로 인정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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