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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호12구간 푸른비단길이 넘실넘실 넘는다

작성자동연송|작성시간26.06.07|조회수8 목록 댓글 0

푸른 비단길에서 만난 시간

― 대청호 오백 리 길 12구간을 걷다

대청호 오백리길 12구간, 푸른 비단길을 걸었다. 청마리에서 안남행정복지센터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지난 11구간에 이어 걷는 길이라 더욱 정겹다. 아침부터 유월의 햇살이 따갑지만, 길 위에 서는 순간 마음은 이미 초록빛 풍경 속으로 들어간다.

초여름은 향기로 먼저 다가온다. 인동초가 하얀 꽃으로 피어 노란 꽃으로 생을 이어간다. 금은화라는 이름처럼 흰빛과 황금빛이 한 몸 안에서 어우러진다. 담장 아래 선인장은 온몸에 가시를 두르고도 노란 꽃을 피워 올렸다. 꽃은 늘 자신의 방식으로 삶을 증명한다.

산길로 접어들자 보랏빛 야생화들이 시선을 붙든다. 엉겅퀴를 닮은 꽃들이 무리를 이루어 피어 있고, 망초꽃은 신록 사이에서 하얀 바람을 맞고 있다. 된비알을 한참 오르는데 어느 순간 길이 사라졌다. 작은 골짜기를 바라보며 한동안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잘못 들어선 길이었다. 결국 다시 내려와 길을 찾는다. 산은 때때로 사람을 시험하고, 그 과정에서 겸손함을 가르친다.

깊은 숲속에서는 으름덩굴을 만났다. 대학 입학하기 전 호롱불을 켰던 진안 산골에 빠져서 1년 정도 잠시 살던 시절, 가을이 되어 열매가 벌어져야 비로소 눈에 띄던 으름이다. 그런데 어린 열매를 매단 채 힘차게 덩굴을 뻗어 오르는 모습을 보니 반가움과 신비로움이 함께 밀려온다.

숨을 헐떡이며 오르막을 넘자 시원한 바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얼려 온 수박 한 조각을 입에 넣으니 더 바랄 것이 없다. 저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메마른 강물 위로 놓인 다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마치 이승과 피안을 이어 주는 다리처럼 고요하게 누워 있다.

임도에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 길을 덮고 있었다. 붉은 열매를 주렁주렁 매단 접골목, 일명 딱총나무가 눈에 띈다. 가지를 꺾으면 딱 소리가 난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포도송이처럼 달린 열매들이 햇빛을 받아 작은 보석처럼 반짝인다.

한참을 걷다 보니 농부 소설가 할머니가 살았다는 집터가 나타난다. 푸른빛과 갈색빛만 남은 집은 세월 속으로 천천히 기울어 가고 있었다. 녹슨 함석과 무너진 창고, 온갖 잡풀에 묻혀 흔적만 남은 길. 한때는 사람이 살고 웃음소리가 흘렀을 공간이 이제는 자연에게 조금씩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무성한 풀숲을 헤치며 걷는 길은 마치 정글 탐험 같다. 칡넝굴은 사방으로 뻗어 있고, 유월의 풀내음은 바람을 타고 코끝을 스친다. 그렇게 한참을 지나 숲을 빠져나오자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정갈한 마당과 꽃밭을 가진 집들이 이어지고, 장미와 보랏빛 으아리 같은 꽃들이 집 입구에서 화사하게 피어 있다. 아름다운 꽃 앞에서는 누구나 걸음을 멈추게 된다.

처음 보는 귀리가 보리밭 같이 눈에 들어오고 귀리 농장 앞을 지나는데 울타리에 걸린 문장들이 눈길을 붙든다.

"함께 걸어가는 아름다운 인생길"

"멀리 흐르는 강물이 포옥 내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너의 눈은 해가 되어, 너의 피는 꽃이 되어"

신영복 선생의 글씨체를 닮은 문장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누군가의 삶의 철학이 담긴 그 글귀들이 오늘 걷는 길과도 잘 어울린다.

유월의 들판은 황금빛과 초록빛이 함께 물든다.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와 밀은 바람을 따라 물결치고, 막 모내기를 끝낸 논은 초록빛 바다처럼 반짝인다. 어린 모들은 아직 제자리를 잡지 못한 듯 비스듬히 서 있고, 빠진 자리를 메우기 위한 모판도 보인다.

그 풍경을 바라보는 순간 어린 시절 기억이 되살아난다. 논물에 발을 담그고 허리를 굽혀 모를 심던 사람들, 흙냄새와 물냄새가 뒤섞인 여름날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지금의 푸른 논은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노동 위에 자라고 있다.

금강의 긴 물줄기를 따라 향수100리 자전거길이 이어진다. 동호인들이 바람처럼 지나간다. 강물도 사람도 저마다의 속도로 흘러간다. 어느 것이 빠르다거나 느리다고 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멈추지 않고 흐른다는 사실이다.

유월의 또 다른 선물은 열매들이다. 검붉게 익어가는 오디와 붉은 보리수 열매가 길손의 발길을 붙든다. 깨달음의 나무라 불리는 보리수에는 빨간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푸른 잎 사이에서 반짝이는 붉은 빛깔이 유난히 아름답다.

청보리의 계절이 지나간 들녘에는 연보랏빛 수레국화가 길가에 피어 있다. 우리는 꽃 곁에 모여 사진을 찍는다. 오늘 하루를 기억하기 위한 작은 의식이다. 차를 피해 논길로 들어서서는 두 팔을 벌리고 걷는다. 초록 물결 사이를 춤추듯 걷는 순간, 누구나 어린아이가 된다.

걷는 내내 뽕나무를 만나면 오디를 따 먹었다. 오래된 나무마다 검붉은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모두가 아이들처럼 달려가 손으로 따고 입으로 옮긴다. 달콤한 맛 속에는 어린 시절의 여름이 숨어 있다.

강바람이 불어오는 정자에서는 우리들만의 점심상이 펼쳐진다. 만오님의 전설 따라 삼천리 이야기를 들으며 잠시 쉬어 간다. 웃음소리가 강물 위를 건너간다.

오늘 걸은 길은 13킬로미터 남짓. 숫자로는 짧을 수 있지만 그 안에는 꽃과 열매, 강물과 숲,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무엇보다도 사라져 가는 농촌의 풍경과 오래된 기억을 다시 만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대청호 12구간 푸른 비단길.

멀리 흐르는 강물은 어느새 내 마음속으로 들어와 잔잔한 물결을 만들고 있었다. 길은 끝났지만 그 물결은 오래도록 가라앉지 않을 것 같다.

202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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