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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둘레길16구간 송정마을에서 가탄마을

작성자동연송|작성시간26.06.20|조회수3 목록 댓글 0

2026.6.20.~21 1박 2일

 

길을 잃은 덕분에 만난 풍경

지리산둘레길 송정마을에서 가탄마을까지

아침에는 비 소식이 있었다. 그러나 곡성의 조카 집을 나설 무렵에는 빗줄기가 이미 가늘어지고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조카가 웃으며 말했다.

고모는 역시 날씨 요정이네요.”

그 말에 나도 따라 웃었다. 며칠 전부터 일기예보를 확인하며 마음을 졸였는데, 어느새 하늘은 밝아지고 있었다. 비 내리는 지리산도 좋지만, 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비가 그쳐주는 것이 무엇보다 반갑다.

오전 910, 오늘의 숙소인 우리밀체험관에 도착했다. 짐을 내려놓고 가벼운 배낭만 챙긴 뒤 송정마을로 이동했다. 지리산둘레길을 이어 걷는 사람들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길보다 교통이다. 출발지와 도착지에 차량을 나누어 두고 다시 돌아와 산행을 시작해야 한다. 번거롭지만 한 구간씩 이어지는 길의 흐름을 온전히 느끼게 해주는 과정이기도 하다.

사실 이번 걷기는 포기할 생각도 했었다.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오른쪽 어깨 통증이 심했다. 팔을 들어 올리는 것조차 힘들어 옷을 입고 벗는 일마저 불편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자유롭게 움직이는 팔을 보며 인간의 몸을 다시 생각했다. 몸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회복한다. 상처를 아물게 하고 균형을 되찾는다. 때로는 어떤 정교한 기계보다도 더 놀랍고 신비로운 존재가 바로 우리 몸인지도 모른다.

송정마을에 도착한 뒤 먼저 온 네 사람은 둘레길 이정표를 따라 길을 나섰다. 그런데 시작부터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 오르막길을 따라 한참을 걸었는데도 둘레길 표식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이미 꽤 멀리 올라온 뒤였다.

결국 우리는 길을 잘못 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시 내려가 확인해 보니 둘레길 이정표가 펜션 안내판에 가려져 있었다. 길은 분명 그 자리에 있었지만 우리는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 순간 문득 인생도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이 없어서 헤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에 가려 길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을까. 욕심일 수도 있고, 편견일 수도 있고, 두려움일 수도 있다. 길은 늘 그 자리에 있는데 우리는 다른 것들에 시선을 빼앗긴 채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이미 산 중턱까지 올라간 산행팀과 합류하기는 어려웠다. 우리는 무리하게 따라가기보다 화개장터 방향으로 내려가 섬진강변을 따라 걷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그 선택은 뜻밖의 선물이 되었다.

오늘 구간은 지리산둘레길에서도 난도가 높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미리 여러 글을 읽고 겁을 먹고 있었는데, 오히려 섬진강을 따라 걷는 여유로운 길을 만나게 된 것이다.

강물은 비를 머금은 채 넉넉하게 흐르고 있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남도대교가 시야에 들어왔다. 비에 씻긴 산과 강, 그리고 다리가 어우러진 풍경은 한 폭의 수채화 같았다.

각자는 각자의 속도로 걸었다. 누군가는 앞서가고, 누군가는 꽃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었다. 누구도 서두르지 않았다. 강물도 그랬다. 천천히 흐르지만 쉬지 않고 바다를 향해 나아간다.

화개장터를 지나 십리벚꽃길로 들어섰다. 벚꽃은 이미 졌지만 길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초록으로 짙어진 나무들이 길을 덮고 있었고, 비가 지나간 뒤의 바람은 유난히 상쾌했다. 흙냄새와 풀냄새, 물냄새가 함께 섞인 바람은 도시에서는 쉽게 만날 수 없는 자연의 향기였다.

점심을 나누어 먹고 쉬다가 다시 길을 걸었다. 이번에는 역방향으로 법하마을 쪽을 향했다. 그곳에는 은퇴 후 내려와 살고 있는 친구 부부가 있다. 잠시 전화를 걸어 안부를 나누었다.

예전에 친구 집에 머물며 산책했던 길이 바로 지리산둘레길의 일부였다는 사실도 새삼 떠올랐다. 길은 앞으로만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사람을 추억 속으로 데려가기도 한다.

황차를 만드는 찻집을 지나고 야생 차밭 사이를 걸었다. 봄이면 사람들의 손길로 분주했을 고사리밭은 어느새 키를 높여 자라고 있었다. 돌담길을 지나 오르막을 오르자 숨이 차기 시작했다.

예전 같으면 가볍게 걸었을 길인데 몸이 무거웠다. 최근 몸 관리를 게을리한 탓이었다. 자연은 늘 정직하다. 관리한 만큼 몸이 반응하고, 소홀히 한 만큼 신호를 보낸다.

결국 무리하지 않고 다시 내려왔다.

가탄마을로 향하는 길목에서 화개천을 건너는 다리에 잠시 멈춰 섰다. 비가 온 뒤라 물소리는 더욱 힘찼고,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했다. 풀잎들은 바람에 몸을 맡긴 채 흔들리고 있었다.

지리산 능선도 말갛게 씻겨 있었다.

마치 온 세상이 세수를 마친 뒤 새 옷으로 갈아입은 것 같았다.

오후 네 시가 되어 산행팀과 다시 만났다. 모두 지친 얼굴이었지만 눈빛만은 밝았다.

힘들었지만 정말 좋았어.”

그 한마디에 오늘 산길의 모든 풍경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저녁은 마을의 작은 슈퍼에서 먹었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가게였지만 안으로 들어가니 작은 식당이 있었다. 주인 부부가 내어준 두부와 김치, 고사리나물은 정갈하고 깊은 맛을 품고 있었다. 특히 따뜻한 두부와 잘 익은 김치는 몇 번이나 더 손이 갈 만큼 맛이 좋았다.

그리고 하루 종일 걸은 뒤 마시는 시원한 맥주 한 잔.

그보다 더 좋은 보상은 없을 것 같았다.

숙소로 돌아온 뒤에는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수육과 위스키, 수박이 상 위에 놓이고 기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노래를 듣고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를 정리했다.

오늘 나는 길을 잃었다.

하지만 길을 잃은 덕분에 섬진강을 더 오래 바라볼 수 있었고, 비에 씻긴 지리산의 초록을 만날 수 있었으며, 오래된 추억과도 다시 마주할 수 있었다.

어쩌면 여행은 목적지에 도착하는 일이 아니라 길 위에서 자신을 만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가을이 오면 다시 이 길을 걸어 보고 싶다.

그때는 오늘 오르지 못한 길도 걸어 보고, 조금 더 가벼운 몸과 조금 더 단단한 마음으로 지리산의 바람을 맞고 싶다.

길은 잃어도 괜찮다.

다만 다시 걸을 용기만 잃지 않는다면.

2026621
동연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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