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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유적 답사방

중원문화의 중심 충주지역 역사유적답사(260620)

작성자뒤뚜루(오동철)|작성시간26.06.20|조회수56 목록 댓글 0

2026년 춘천역사문화연구회 역사문화유적답사 4번째 답사로 중원문화의 중심 충주지역 불교유적과 충의 유적답사를 진행했습니다. 

2011년 7월 처음으로 답사를 시작했으니 만 15년이 되어 갑니다. 이제는 몇회째인지도 기록을 안하는지가 5년이 되어 가니 몇차례나 이런 답사를 했는지 숫자의 의미를 잊은지 오래입니다. 2021년 76차 답사를 했던 것만 기억에 흐릿합니다.

그동안 정말 많은 곳을 답사하며  여러 유적들을 보아 왔습니다. 주로 춘천지역 답사가 많았지만 2019년에는 3.1운동 100주기를 맞아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뤼순감옥을 찾아가는 다렌 답사도 진행했습니다. 수년전 부터 춘천지역외 답사와  지역답사는 병행하며 우리지역과 다른 자치단체들이 역사유적을 대하는 태도와 지역자산으로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를 보면서 춘천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아온 것이 마음에 깊이 응어리로 남고 있습니다. 

 

제천을 가면 거의 모든 의병장 묘역마다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부러워 했고, 충주 중앙탑 공원을 보며 왜 춘천에는 이런 중앙공원 하나 가지지 못했을까를 한탄하기도 하였습니다. 경기도 지역의 서원을 찾아가며 왜 춘천은 강원도 최초의 사액선원인 문암서원조차 복원하지 못할까 한탄을 합니다. 우리나라 근대수교역사의 첫발을 내딛은 신헌묘역이 춘천에 있다는걸 모르는 이가 태반이고 조엄이 일본통신사로 가며 고구마를 가져온 이야기는 하는데 그걸 기록하기 위해 따라갔던 제술관 남옥은 다른 나라 사람처럼 춘천에서는 기억조차 안합니다. 

 

강진 다산초당 마당앞에 있는 다조(사실 따지고 보면 그냥 앉아서 차마시던 장소일 것이고 그 흔적은 아무것도 없지만)가 지역의 자긍심이 되고 관광객들에게 이곳을 찾는 이유가 되는데 900년전 그토록 차를 사랑했던 진락공 이자현 거사가 만든 찻물터(백번 양보해서 기록에 나오는 돌우물이라고 해도)유적은 900년이 넘는 세월동안 완전한 흔적으로 남아 있지만 손발을 씻던, 심지어 목욕을 하던 곳이라는 말도 안되는 유학자들의 조리돌림을 인용해 세수터라고 떡하니 안내판이 서있는 현실...물깊이가 10cm안되는 억지로 찻물이나 길을 만한 돌우물을 목욕을 하던 곳이라고 그걸 그대로 인용하는 현실앞에 아무리 문헌적 근거라고 해도 받아들여야 할 것과 비하하기 위한 말들까지 그대로 인용해야 하는지.... 

 

15년간 답사를 진행하며 목도하는 현실을 지역에서 실행해나가고자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간절하지만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현실을 답사에 참여하는 시민들과 공감해가며 언젠간 바뀔 미래를 꿈꾸는게 답사가 아닐까 합니다.  

 

서설이 다른 곳으로 한참을 가서야 어렵게 돌려 세워봅니다. 

오늘의 답사는 중원문화의 중심이라는 충주지역을 찾으며 꼭 많은 이들이 보았으면 하는 유적으로 하늘재(계립령) 옆 미륵대원지와 보릿고개를 넘기위해 산을 잘라 농토를 넓히고자 했던 곳이 유명한 명소가 된 수주팔봉, 신라시대 마애불 9기가 조형된 대소원면 봉황리 마애불상군, 중앙탑으로 불리다가 2011년 탑평리사지 칠층석탑으로 명칭이 변경된 중앙공원 7층 석탑, 아직도 논란이 많은 신립장군의 순국지 이며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했다는 탄금대와 8천고혼위령탑 답사일정으로 잡았습니다. 

첫번재로 찾은 곳은 수안보면 미륵리에 있는 미륵대원지입니다 입구에는 무너진 당간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미륵대원지 불당으로 가는 길입니다. 27명 선생님들께서 함께 하는데 자유롭게 이동을 합니다. 답사는 억지로 무엇인가를 주입하려 하기보다는 스스로 보고 느껴야 한다는 생각으로 설명은 최소화 하고 무엇이 중심인지 방향만 제시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귀부가 아닐까요? 조선중기 이후의 양식으로 미완성 귀부입니다. 현장 안내판에는 그런 내용이 없는데 이 귀부를 왜 완성하지 못했을까를 생각해보면 원석의 문제로 보입니다. 귀부의 오른쪽 등을 보면 원석에 금이 가 있고, 뒤쪽 꼬리쪽에도 균열이 보입니다. 이런 경우 조각을 하다가 중단된 사례는 답사과정에서도 많이 보입니다. 양양 서림리 불상도 이런 경우지요. 서림리 분교에 있는 불상과 분교에서 조끔 떨어진 산 자락에 있는 조성하다가 중단된 불상도 원석의 균열로 인해서 폐기되고 다른 원석으로 완성을 한 사례지요. 

답사는 이런 관찰과 상상과 상상의 근거가 결합되어 잊혀진 역사의 한자락을 완성해 나가는 것이겠죠. 

거대한 여래입상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아닌 미륵부처님이죠. 많이들 아시는 것처럼 미륵부처님은 현재의 부처가 아닌 미래의 부처님을 말한다고 합니다. 

이 어마어마한 부처님을 실내에 모시기 위해서 얼마나 큰 지붕을 올렸을지 ....

이 부처님이 바라보는 방향은 북쪽입니다. 보통 사찰에서의 방향과는 전혀 맞지를 않지요. 더구나 이 사찰이 고련전기 사찰로 알려지는데 북향의 사찰이라니 아이러니죠? 태조왕건이 훈요10조를 세우면서 지적한 내용중 1조와 2조가 불교와 관련한 내용인데

 

      제2조 : 신설한 사원은 (신라 말의) 도선(道詵)이 산수의 순(順)과 역(逆)을 점쳐놓은 데 따라 세운 것이다

     (즉『도선비기(道詵秘記)』에 점쳐놓은 산수순역에 의하여 세운 것이라는 뜻). 그의 말에, “정해놓은 이외의

     땅에 함부로 절을 세우면 지덕(지력)을 손상하고 왕업이 깊지 못하리라” 하였다. 후세의 국왕·공후(公侯)·후비

     (后妃)·조신 들이 각기 원당(願堂)을 세운다면 큰 걱정이다. 신라 말에 사탑을 다투어 세워 지덕을 손상하여 나

     라가 망한 것이니, 어찌 경계하지 아니하랴.

 

고했는데 산수와 역행하는 곳에 절을 지었다니......

 

이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미래에 우리에게 올 부처님이니 미륵부처님이 현생 부처님으로 환생하여 불국토가 완성될 때는 고구려의 혈통을 이은 고려가 북방으로 영토를 확장해나가려는 바람을 담아 북쪽을 바라본다는 설이 있고, 불상의 앞쪽 오른편에 있는 원터와 연관하여 북방으로 배치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잇습니다. 사실 원터와 하늘재를 생각해보면 미륵부처님은 하늘재를 넘는 사람들을 지켜주는 수호신이 아닐까 합니다. 고개를 넘어 가는 이들이나 넘어오는 이들이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형상이었을 가능성이죠. 북쪽으로 배치된 것은 앞을 지나는 사람들에게는 정면인 것이죠...마의태자와 관련한 전설도 있지만 그것은 전설일뿐이고....   

이곳이 바로 원터입니다. 사찰과 원터의 결합이라니 상상되는 것이 많다는 생각 안드시나요? 

미륵대원지에서 하늘재 옛길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길옆에 있는 미완성 불두입니다. 고려양식으로 알려지는 불두는 머리부분만 당시의 것이고 몸은 근래에 붙인것입니다. 일반적인 부처님과는 많이 다른 형식이라 사람들이 의아해 합니다. 어느나라 불상이지?....

이런 의문이 들게된 이유는 불두의 꼭대기가 없기때문 아닐까요? 바로 나발부분이 없으니 이런 모양이 나온것이겠죠...바로 옆에는 몸을 만들다가 중단된 원석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충주시 살미면 팔봉리에 있는 수주팔봉입니다. 인근에 팔봉서원이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겠죠. 우측의 노적봉과 좌측의 물레산에서 내려오는 능선을 잘라서 물길을 돌려서 인공의 폭포가 만들어진 것이죠. 이물은 석문동천이라고 월악산에서 내려오는 물이겠죠...아래의 물은 속리산에서 발원해 남한강에 합류하는 달천이고...이 산을 절단한 이유가 1963년에 농지를 만들기 위해서였다니 보리고개를 넘기 위한 눈물겨운 현장이 아닐까 합니다. 최근에는 영화촬영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오토캠핑족들의 성지가 되었지요.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마애불상군이 아닐까 하는 중앙탑면 봉황리 마애불상군 답사입니다. 5~6세기경 조성된 불상이라는데 고구려에 불교가 들어온 것이 372년이고 신라에 전파된 것이 이차돈이 순국하는 527년 이후이니 고구려 마애불상이라고 보는게 타당하겠는데 설명은 당시 이 지역을 관할하던 신라가 제작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형식은 고구려계 형식이라하고 그럼 시기가 5세기라는 것은 맞지 않을텐데..... . 

주불에는 불두 위로 화불이라부르는 작은 불상 5기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주불보다 아래쪽에 있는 보상상들입니다. 맨 우측의 반가사유상을 포함해 8기의 불상이 부조되어 있습니다. 반가사유상을 보면 로뎅이 생각하는 사람을 조각할 때 반가사유상을 보고 따라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반가사유상 이라는 명칭 자체가 반가부좌를 틀고 사유(생각)하는 모습이라는 것일테니까요...반가사유상이 이런 모습을 하는 이유는 중생을 어떻게 하면 구제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도......로뎅의 생각하는 사람과 딱 맞지 않나요?   

웅장함과 조형미가 끝장인 칠층석탑입니다. 원래 중앙탑이라고 불리다가 이곳에서 탑평사라는 명문이 발견되며 2011년 공식명칭이 탑평리사지칠층석탑으로 바뀌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파손을 우려해 복원을 하는 과정에서 시기를 달리하는 사리공과 기록들이 발견되었다고 하지요....

충주에서 아시안게임 조정경기가 열릴때 경기장으로 쓰던 물위를 걷는길입니다. 올해 5월초 왔을때도 조정경기장 레인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철거가 되었네요.

마지막 답사지 탄금대로 가는 길입니다. 주말에는 대형버스 출입금지라고 하여 도로에서 내려 걸어올라갔는데 비가오는 날이라 그런지 주차장이 넉넉해 버스는 혼자 올라왔습니다. 

충장공 신립장군과 8천고혼의 혼을 달래는 8천고혼 위령탑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신립장군이 8천의 군사를 이끌고 이곳에 배수의 진을 치며 고니시유키나카(소서행장)가 이끄는 18,000명의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가 전멸하고 자신은 자결한 전투이죠.

신림장군이 이곳에 배수의 진을 친 이유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란이 많습니다. 어쩔 수없는 선택이었다. 전략적 실패다 이런것이죠..여기서는 논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척후병이 이미 일본군이 조령을 넘었다는 보고를 하자 허위 보고를 했다는 이유로 처벌을 한 행위는 유인석 의병장이 지원군을 보내지 않은 것에 대해 양반에게 대들었다고 김백선 의병장을 처형했던곳과 닮아서 좀.....   

바로 이자리에서 신립장군의 배수의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했다는 열두대이며 신립장군이 순국한 자리라죠.....지금은 안개가 자욱히 내리는 남한강의 운치만.....

이런분들과 6월 답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왜 남자분들을 포함한 열여섯분들은 안보일까요? 

역사유적 답사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느끼고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굳이 주저리 주저리 설명하지 않더라도 눈으로 보고 만져보면 분명한 메시지가 전해지는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서 얻어지는 정보들이 지역에 접목되었을 때 더 나은 역사적 자긍심이 생겨나겠지요. 

그런날이 오기를 기대하며 이번달 역사유적 답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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