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거래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잉여를 주고받는 것이다. 말하자면 100을 쓰는데 110을 생산했을 때 필요한 100을 쓰고 남은 나머지 10 만큼을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그 대신 내가 필요로 하는 역시 상대방에게 있어 남는 다른 것 10을 가져오는 것이 상거래의 시작이다. 단지 화폐경제로 오면서는 직접적으로 생산물을 받는 것이 아닌 다른 생산물을 살 수 있는 '수단'으로서 화폐를 대신해 받는 것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산업혁명 이전까지 인간사회에서 생산이 소비를 초과한 적이 사실 거의 없었다. 중국의 강남이나 동남아시아의 곡창지대와 같이 농사에 유리한 지역에서도 식량생산이 늘어난 만큼 인구도 늘어 항상 어디선가는 농사를 지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굶주리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럼 도대체 근대 이전에는 무엇으로 상거래를 했다는 것일까?
그거야 아주 간단하다. 잉여가 없으면 잉여를 만들면 된다. 잉여가 없어도 잉여를 만들 수만 있다면야 그것으로 얼마든지 다른 가치있는 재화로 바꿀 수 있게 된다. 그럼 잉여를 어떻게 만드느냐...
잉여를 만드는 데 있어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은 역시 약탈이다. 당연한 것 아닌가? 100의 사람이 80을 생산하고 다른 100의 사람이 70을 생산했으면, 다른 100을 모조리 죽여버리거나 그 생산물을 모두 약탈해 오면 100의 사람이 150을 쓸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흔히 전쟁을 두고 인간이 가장 처음으로 했던 경제활동이라고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원래 전쟁이라는 것은 약탈을 목적으로 시작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약탈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당장 주위에 아무리 약탈할 곳이 많아도 계속해서 약탈하다 보면 결국 고갈되어 더 이상 약탈할 곳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약탈이 아니더라도 잉여를 만들어낼 수 있는 다른 수단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노예제다.
노예제라는 건 간단히 말하면 자신이 생산한 것을 모조리 주인에게 바치는 존재다. 그 대신 인신상의 안전과 약간의 쓸 것을 제공받는다. 원래대로라면 자신이 생산한 만큼을 누릴 수 있어야겠지만 노예라는 이유로 아주 최소한의 것만이 허락되는 것이다. 그러면 남은 것은? 당연히 주인의 몫이다. 그것이 잉여이고.
하지만 노예는 또 관리에 너무 많은 비용과 노력이 들어간다. 먹여야지 입혀야지 도망치지 않을까 감시해야지 더구나 생산한 것들을 모두 빼앗기니 의욕조차 없다. 그래서 뒤이어 나온 것이 토지에 묶어둠으로써 생산에만 종사하게 하는 대신 일정분량의 생산물을 강제로 거두어 잉여로 삼는 이른바 세금이었다. 필요로 하는 일정량의 세금을 제외하고는 마음대로 써도 좋다는 것인데, 어차피 필요로 하는 수준만 확보할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니 지배자 입장에서는 오히려 이쪽이 더 편리하기도 했었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지배계급은 항상 잉여를 확보하는 게 골몰해 왔는데, 정작 이렇게 잉여를 만들더라도 결국 그것을 혼자서 다 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뭔가 가치있게 쓰려면 어딘가에서 다른 것으로 바꾸기는 바꾸어야 한다. 바로 수요의 존재다. 어디선가 이것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잉여를 확보해 보았자 말 그대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짐덩이로 썩어갈 뿐이다. 그럼 어디에서 이것들을 소비하게 될까?
사실 고민할 것도 없다. 앞서 말했듯 전근대사회에서 생산물은 항상 부족했다. 생산이 소비를 초과하는 것이야 산업화시대 이후의 현상이지 그 이전에는 오히려 항상 소비가 생산을 초과해서 문제였다. 따라서 팔 물건이 없어 문제고, 살 돈이 없어서 문제지 필요로 하는 곳은 얼마든지 있었다. 특히 생산에 종사하지 않는 인구는 잉여생산물을 필요로 하는 가장 중요한 시장이었다. 예를 들어 도시라든가, 아니면 귀족이라든가, 아니면 군대라든가...
도시가 무슨 생산에 종사하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전근대사회에서 생산이란 곧 농업을 의미했다. 경제 가운데 가장 큰 부분은 농업이었고 상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극히 미미했다. 프랑스만 하더라도 17세기 이후 유럽의 패자로 군림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넓고 비옥한 토지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농업생산물에 있었으며, 무역으로 먹고 사는 경우는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과 같은 경제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은 경우에 한정되었다. 한 마디로 도시가 있어 거기서 상공인들이 아무리 많은 물건을 생산해도 전근대사회에서 그 비중은 극히 미미했다는 말이다. 또한 그것들에 가치를 메기는 자체도 농업생산을 기준으로 하고 있었고 말이다.
일본에서도 전국에서 생산된 쌀을 최종적으로 소비하는 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인구 100만의 도시 에도였다. 참근교대로 인해 각 번의 번주와 무사들이 항상 모여들어 거주함으로써 인구는 많았는데, 정작 농사지을 땅은 없으니 당연히 쌀을 밖에서 사먹어야 했고, 그로써 쌀을 주된 경제수단으로 삼던 각 번주들은 쌀을 팔아 번을 운용할 재정을 마련하곤 했었다.
물론 아무리 도시가 있어도 생산하지 않는 계층으로 가장 대표되는 것은 역시 귀족을 들 수 있었다. 귀족이 농사짓는 것 봤는가? 귀족이 목공일 하는 것 봤는가? 몰락하지 않고서는 대장장이 일도 거의 할 일이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지닌 바 권력으로 항상 사치를 누린다. 그 돈은 어디서 나올까? 당연히 세금에서 나온다. 그러면 그 사치를 누리는 물건들은 어디서 나올까? 사치품이 생산되는 곳에서 사들여 온다. 그러면 그 사들여 오는 건 누굴까? 바로 상인이다. 지중해를 누비던 이탈리아 상인이나, 동남아시아며 일본을 누비던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상인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지리상의 발견이 있기 전 중국과 유럽을 이어주는 중계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던 것도 이슬람의 상인들이었다.
마지막으로 나오는 것이 군대다. 예나 지금이나 군인은 생산은 않고 먹기만 많이 먹어대는 조직이라, 만들고 운용하는 데든 막대한 비용이 소비된다. 먹이는 것도 먹이는 것이려니와 입히고 무장하는 데에도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분량의 피륙과 철, 나무 등의 자원이 필요하다. 더구나 전쟁이라도 한 번 하려고 하면 그때에는 더 많은 무기와 더 많은 식량과 더 많은 군수물자로 인해 평시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많은 물자를 필요로 하게 된다. 당연히 군인 자신이 그것을 생산할 수 없으니 외부에서 사들여와야 하고. 여기에서 그러한 물자들을 공급하는 상공업자의 존재가 등장한다. 전국시대 일본에서 상인들이 부쩍 세력을 키운 것도 그러한 한 예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는 것이 군사독재시절 그리 했다고 왕이 그러자고 한다고 다 그리 될 거라고 하는 것이다. 거기다 상공업이 갖는 가치를 너무 과장해 생각하고 있다. 전근대 아직 농업이 지배하던 시대 상공업이 발달해 봐야 거기서 거기다. 중국이 강대국이던 이유는 상공업이 아니라 강남에서 무려 삼모작까지 해가며 생산해내는 막대한 식량에 있었다. 그것으로 당시로서는 거의 불가능이었던 1억의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고, 1억의 인구는 생산에 종사하는 인구 말고도 많은 잉여수요를 만들어냈다. 이들은 식량을 구입하기 위해 다른 분야에서 노동에 종사해야 했고, 그러한 구조를 통해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하는 시장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거기다 부호들은 사치가 심했고, 조정은 세계최대의 군대를 운용하고 있었으며, 시시때때로 군사원정까지 하고 있었다. 상공업이 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그런 체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경우는 중국처럼 생산력에서 남다른 것도 아니었고, 따라서 인구가 많은 것도 아니었으며, 대도시라고 해봐야 평양과 한양에 20만 정도가 있는 것이 고작이었으고, 지배층인 양반은 상대적으로 금욕적이었던데다, 군에 대해서도 크게 투자를 하지 않고 있었다. 말하자면 생산력도 부족한데, 소비는 더욱 부진한 말그대로 상거래가 발생하기 가장 어려운 환경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일부러 물건을 멀리 내다 판다는 것은 오히려 낭비였을 것이다. 설사 조정이 그렇게 하라고 한다고 해도 별로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조선에서 상공업이 발달하지 않은 것은 조선이 조정차원에서 특히 상업을 억압한 것도 있지만 여건 자체가 충분히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고려만 하더라도 상공업이 발달했다고는 하지만 고려시대에도 돈은 그리 널리 쓰이지 않았다. 돈이 일반에게까지 널리 쓰이게 된 것은 조선 숙종 이후부터다. 생산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상황에서 지배층의 사치를 위해 쥐어짜듯 무역을 했던 고려와 충분산 생산력이 확보된 상태에서 잉여생산을 가지고 상거래를 하던 조선의 근본적인 차이라 할 수 있었다. 에도시대 일본 역시 명색은 사농공상 - 혹은 병농공상이라고도 부른다. - 이라는 신분의 구별이 있어 상인을 농민보다 낮은 신분에 두었지만, 워낙 일본의 상황이 그렇다 보니 상인들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여 거의 최상위 신분인 무사들과 견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즉 여건이 안 되면 무역을 해봐야 결국 자기들만의 리그로 끝날 뿐이고, 여건이 성숙되고 나면 하지 말라고 해도 어차피 자연스레 상거래라는 건 성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 조선후기 본격적으로 상공업이 발달하게 되는 과정을 보더라도 그러한 것이 확실히 드러난다. 당시 조선의 상공업이 발달하게 된 촉매제는 역시 대동법을 통해 쌀로 거둬들인 것들을 현물로 바꾸는 과정에서 수요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는데, 대동미는 잉여생산이고 대동미로서 현물을 구입하는 것은 잉여수요라 할 수 있었다. 당연히 물건을 팔려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들을 중심으로 하는 상권이 형성된다. 여기에 조선후기 농업생산의 증가 등으로 한양으로 잉여인구가 몰리기 시작하면서 바야흐로 한양에도 시장이라는 것이 형성되었으니 - 그 시장이 아니라 그 시장이다. - 여건이 성숙된다는 건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당시 조선은 상공업이 발달할만한 충분한 생산도, 상공업의 발달을 유도할만한 충분한 소비도 없었다. 당시 조정에는 생산은 어떻게든 늘릴 생각은 있었지만 소비를 늘릴 계획은 전혀 없었고. 말하자면 조선 조정의 책임이라 할만한 것은 상공업의 발달을 유도할만한 어떠한 부양책을 마련하지 않은 것 뿐인데, 아다시피 인위적인 경기부양은 반드시 그 피해가 국민 개개인에게로 돌아가게 되어 있고 보면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 더없이 당연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후손된 입장에서야 그렇게 해서라도 부국강병을 이루었으면 좋았겠지만, 결국 당시를 살아가야 했던 당사자는 선조들 자신이었으니.
한 나라의 경제라는 것이 원래 하루아침에 어떻게 뚝딱거려 어쩔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물며 아직 모든 것이 미흡했던 조선시대는 말할 것도 없다. 만일 조선이 하고 싶다고 상공업을 일으키고, 그것으로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었다면 아마 조선은 유럽을 대신해 근대를 열고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을 것이다. 유럽조차 근대 이후에나 그것이 가능했는데 하물며 조선임에야. 조선은 조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그 누구도 아닌 조선일 뿐인 것을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