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여진족과 만주족은 우리민족인가?
글쓴이 : 나도 사랑을 했으면 번호 : 9032조회수 : 832007.04.01 22:13
사용자 PC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스크립트를 차단했습니다. 원본 글을 보시려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37. 과연 여진족과 만주족은 우리민족인가?(동북공정관련)
37번 주자 : condeskas ( 2006-09-26 21:11:13 작성 ) 신고하기 | 이의제기
평점 : +3 (13명 평가) 나도 평가하기
최근 우리나라 학계에서도 금나라, 청나라의 역사를 한국사로 편입시키자는 주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민족의 개념에 대한 정의이다. 에르네스트 르낭에 따르면, 동일 민족을 구성하는 요소로 단일 정치체, 혈연, 언어, 문화, 동류의식 등을 꼽았다. 이에 따라 양 집단간에 위의 항목 중에 겹치는 항목이 많을수록 완전한 민족이 되고, 한 두가지 사항이 다를 경우(예 : 재외동포) 느슨한 민족의 형태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서양에서 나온 민족주의를 동아시아에 곧바로 적용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한 예로 단일 정치체의 조건으로 르낭은 공화정과 같은 근대 국민국가(nation)의 성립을 들고 있다. 왜냐하면 유럽 중세 봉건제도하에서는 민족의 개념이 없었고 근대에 들어서면서 민족의식이 싹텄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건에 따르면 우리 민족의 성립은 1945년 광복 이후가 되어 버린다. 따라서 동아시아에서 민족을 구분할 때에는 역사적인 정치 공동체와 그에 따른 자타 구분 의식이라는 항목을 더 추가하여 고려하고 있다.
하지만 말갈족이 과연 위의 항목들에서 우리 민족과 일치하는지 검토하여보면 과연 그러한지 심각한 의문에 싸이게 된다. 그럼 각 항목에 대해 조목조목 살펴보도록 하겠다.
1. 단일 정치체 및 역사적 단일 공동체
고구려의 팽창과 더불어 말갈족(말갈은 시대에 따라 물길, 여진, 만주족 등으로 명칭이 바뀌지만, 본 글에서는 통칭 말갈족이라고 하겠음)이 고구려에 편입되어 고구려 주민의 일부가 된 것은 이제 거의 학계의 정설이 된 것 같다. 이에 따라 대수·대당전쟁에 말갈기병이 고구려병사로 동원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흑수말갈의 경우 전황에 따라 지지세력을 바꾸는 등 고구려로부터 이탈하려는 측면도 보인다.
이러한 말갈족이 고구려주민으로서 ‘느슨한’ 형태의 민족 구성을 이룬 상태는 발해 정권이 지속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이다.
발해가 거란에 망한 후 발해 유민의 일부는 거란의 중심부로 끌려갔으며 일부는 고려로 망명하였으며, 일부는 거란에 항전하다가 점차 사라져갔다. 말갈족도 각기의 부락을 옮겨가며 뿔뿔이 흩어졌다.
이 후 거란이 쇠퇴하면서 거란을 멸망시키고 금나라를 건국하였으며, 금이 멸망한 후 다시 원래대로 각기 부락 생활을 영위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다 명말에 이르러 세력이 강해져 명을 멸망시키고 결국 청을 건국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청나라 때에는 현 남북한의 전신인 조선이 있었고, 금나라 때에는 조선의 전신인 고려가 있었다. 이를 보더라도 반만년의 우리역사상에서 우리와 말갈족이 역사적으로 단일 정치체를 이룬 시기는 극히 일부였음을 알 수 있다.
2. 혈연 및 언어
인류학적으로 말갈족과 한국인은 중국인에 비해 서로 비슷한 형질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호란 때 끌려간 조선인 노예들의 사례도 있으므로 혼혈이 생긴 경우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혈연만 갖고 같은 민족임을 논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 민족이 중국인에 비해 말갈족과 비슷한 만큼 일본인과도 비슷하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오히려 역사적으로 만주족에 끌려갔다 돌아온 죄없는 조선 여인들을 두고 화냥년이라고 욕하며 배척하였던 사실을 상기시켰으면 한다.
언어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청이 들어서자 이 후 조선은 만주어 역관을 두었다. 같은 말을 사용하였다면 과연 통역관을 둘 필요가 있을까?
3. 생활문화
말갈족의 기본적인 생활은 유목을 기반으로 부수적으로 수렵과 농경생활을 영위해 나갔다. 하지만 우리나라 역사상에서 그나마 수렵과 유목 생활의 요소가 있었던 국가는 고구려·발해뿐이었다. 그나마 이 두 나라도 중심적인 생활은 ‘농경’이었다.
이후 고려·조선시대에 들어서면 완전히 농경중심의 문화를 영위하였다. 역으로 만주족의 경우 명나라를 멸망시킨 후 많은 땅을 획득하였지만, (역사적 용어로 이를 기지(旗地)라고 한다) 이 땅에 가축을 방목하는 등 농경문화를 제대로 영위하지 못하였다.
4. 동류의식
민족의 문제에서도 가장 중요한 문제가 바로 동류의식이다. 이 동류의식이 있으면 비록 민족을 구성하는 몇 가지 요소가 이질적이더라도 이를 통합해나가려는 계기를 제공한다. 하지만 이 동류의식이 없으면 두 집단은 점차 이질화의 길을 걸어갈 뿐이다.
그렇다면 한국인과 말갈족은 역사적으로 서로 어떻게 인식하였을까? 아쉽지만 둘 다 동족으로 보지 않았었다. 삼국시대에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으므로 고려와 조선시대만을 위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우선 고려는 말갈족을 변방을 괴롭히는 오랑캐 정도로만 인식하였다. 그래서 고려는 윤관의 여진정벌의 예에서 보듯이 그들을 ‘정벌’의 대상으로만 여겼다. 또한 금나라가 화북을 정벌하고 고려에 입조할 것을 명하자 고려 대신들 중에는 ‘오랑캐’를 섬긴다고 반발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만약 같은 민족으로 보았다면 이렇게 반발하였을까? 설령 반발을 하였더라도 그들을 오랑캐라고 운운하면서까지 반대하였을까?
이러한 모습은 청나라가 건국할 때에도 여실히 보여준다. 오랑캐인 청의 연호를 받들기 싫어하였던 조선의 관료들은 연도를 표시할 때 명조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崇禎帝)의 연호를 따서 숭정사거이래모모년(崇禎死去以來某某年)이라고 썼다. 그 외에도 청을 청려국(淸藜國)이라고 하는 등 그들을 오랑캐로 비하하여 부르는 예는 수도 없이 많다. 청도 마찬가지로 조선을 단지 충순한 조공국으로만 인식했을 뿐 동족으로는 인식하지 않았다.
이렇게 민족을 구성하는 제 요소를 살펴보아도 우리 민족과 말갈족은 유사한 점 보다는 상이한 점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만주지역에서 일어난 금나라와 청나라의 역사가 한족 정권의 역사가 아닌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고 그들의 역사가 과연 한국사인지 되묻고 싶다.
물론 말갈족과 우리민족간의 친연성에 대한 주제 자체는 흥미롭고 의미있는 것이긴 하다. 하지만 문제는 한국사로의 편입이라는 관점에서 금사와 청사를 연구하는 일부 학자들의 자세이다. 요컨대 그들은 ‘한국사로 편입시키기 위해 금사와 청사를 연구한다’라는 것인데, 이러한 관점은 도대체 ‘중국사로 편입시키기 위해 고구려사·발해사를 연구한다’는 동북공정의 연구방침과는 뭐가 다른가?
나 또한 한국인으로서 우리나라를 사랑하고 우리 민족의 역사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고 아니라는 것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단지 기원이 같다고 우리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더 나아가서는 ‘황인종의 역사는 모두 우리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해 조선족을 중국인으로 만들기 위해 역사를 연구하다가 역사왜곡의 길을 걸어간 것을 볼 때, 과연 한국은 한국사로서 금사·청사를 연구하다가 자칫 연구가 왜곡된 방향으로 흘러갈 가능성은 없겠냐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혹시 지금 나의 주장에 대해 반대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고 싶다.
1. 우리 민족과 말갈족이 고대로부터 같은 정치공동체를 이루어오면서 역사를 이어왔다고 생각하는가?
2. 우리 민족과 말갈족이 같은 뿌리라고 생각하는가?
3. 우리말로 지금의 만주족과 대화할 수 있는가?
4. 우리 민족과 만주족의 문화에 차이가 없다는 점을 증명할 수 있는가?
5. 한국인과 만주족을 같은 민족으로 보는가?
내용출처 : [직접 서술] 직접 서술
목차로 돌아가기 이전 | 다음
의견 13개 평가 :
내용 추가 다른 의견
타인의 명예 훼손,무단 광고, 불법 정보 유포 게시물에 대한 민형사상의 책임은 게시자에게 있습니다.
byunggl
2006-12-01 16:09 dlgmlcjf777님 뭔가 잘못 알고 계시네요. 간도를 100년이 지나면 우리가 받는 것이 아니고 일본과 청나라가 100년 전에 한 불법조약에 우리가 영토 이의 제기를 100년안에 해야만 그 땅을 찾을 수가 있어요. 100년이란 기간 동안 이의제기가 없으면 영토는 현재 점거자에게 넘어가는 거죠.
gimh6611
2006-11-14 23:15 위 글에 반대 합니다. 1000년이 흐른 지금 언어가 통하지 않다고 해서....... hcp님 의견에 찬성합니다. 우리는 오랑케로 봤지만 말갈(여진족)인들은 우리를 동족으로 보았읍니다. 현재도 일부 만주인들은 우리와 같은 민족으로 보고 있답니다...
dlgmlcjf777
2006-11-13 10:28 내용추가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동북공정이라는 것은 중국이 만주지방하고 간도지방 일대의 문명을 중국 자신의 하류의 문명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1909년에 맺어진 중-일간의 간도협약은 철도부설권들을 일본이 얻는 대신 우리나라의 영토인 간도를 중국에게 일본이 넘겨준 것인데 이것은 국제법상 100년이 지나면 원래 소유주인 대한민국이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이 이것이 통일 전후의 대한민국 소유로 넘어가지 않도록 부단한 노력을 함과 동시에 백두산까지 자신의 영토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중국의 이런 행각 중 우리가 가장 주목해서 볼 점은 중국의 역사 왜곡이다. 중국은 전 세계에 고구려사 뿐만아니라 발해, 고조선사까지 중국사로 알려지게 만들었다.
우리의 자랑스런 역사들을 중국의 역사로 바뀌고 우리나라는 고대역사에서 항상 중국의 변방소국으로 전락하게 되는 피해가 생긴다.
또한 영토역시 한강이남이 중국의 고대영토가 되어 중국이 수복해야 할 땅으로 바뀌게 된다.
hcp99
2006-10-25 12:24 원래 가장 옛날로 돌아가 보자면 한족이외에는 모두 한민족이였습니다. 본시 우리민족은 유목민족이라고 보면됩니다. 삼국시대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는 서로 같은 민족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나라가 다른 서로 적국이었죠. 그리고 고구려와 백제는 통역이 필요하지 않지만 신라는 통역관을 두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고구려와 말갈은 통역을 할필요가 업었습니다.
말갈은 고구려 부흥운동에 참가한 민족입니다. 당연히 고구려와 같은 민족이며 발해(대진) 그리고 정안국도 함께 세웁니다. 발해인들은 결국 여진이라는 이름 하에 다시 모여서 부족으로 살아가며 이렇다 할 나라를 세우지 못하고 유목민족이 되어가죠. 그리고 신라의 입장에서도 말갈은 변방의 오랑캐였습니다. 그시대에는 나라만 다르면 같은 민족이라 생각안했습니다.(그래서 서로 전쟁을 했죠).
확실한 건
고구려는 발해의 전신이며,
발해는 여진의 전신
여진은 만주족의 전신인겁니다
현 대한민국이 신라의 바톤을 넘겨 받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겁니다
leeooeuensuk
2006-10-08 15:31 다른의견 '12345-중국의 역사공정-동북공정은 민족 개념보다 더 큰 틀, 그것이 무리가 있다면 어떠한 민족 개념이든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보다는 있다는 것을 증명하며 보다 좀 더 큰 틀로서 대안을 제시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그럼 박은식 선생님께서 꿈속에 누르하치가 나타나자 절을 했다 이것은 뭐죠? 박은식선생님이 생쇼한것도 아닌데 ㅡㅡ;; 그리고 김부(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는 만주로 가서 여진에 합류했고 또 그 후손들은 완옌부를 통일시켜 한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그니까 박은식 선생님께서는 신라혈통을 믿는 셈이죠. 기록을 보면 여진족의 선조는 고려인, 신라인이다. 이런 기록이 있는데 결론은 신라인이고 고려때 왓다 이런결론을 내릴수 잇죠 01/06 00:25
한세충
민족의식은 그 범주가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 당시 민족주의 사학자분들은 민족의 범주를 좀 넓게 잡는 경향도 있었고요.
이는 또한 서양에서 전해 온 민족주의의 인식이 동양에서 제대로 정착되고 성숙되지 않았던 시대 상황도 반영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예로 '민족주의'는 영어로 'nationalism'이라고 쓰는데, 여기서 근간이 되는 'nation'이라는 단어는 번역과정에 따라 "국가"로 번역되기도 하고, '민족'이라고 번역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nationalism'도 '국가주의'라고 번역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비교해보면 굉장히 다른 어김인 듯 하지만 따지고 보면 같은 단어를 번역한 말입니다. 여기서부터 동양의 민족주의는 더 많은 갈래로 나뉘어지게 되는 것이지요. 01/06 00:46
말갈,여진,만주족의 실체 | 통합 Q/A 2007.01.01 20:25
애플(hisstu) 장군 http://cafe.naver.com/booheong/8554
고전적 통설 중에 숙신-읍루-물길-말갈-여진-만주 단일계통설이 있죠. 예전에 가장 널리 받아들여졌던 설이 아닌가 싶네요. 이 설이 맞다면, 오랜 세월동안 많은 종족융합이 있었겠지만, 그래도 혈통-문화적 주류는 숙신에서 만주까지 이어진다고 볼 수 있겠죠.
근데 근래 한국학자들 중에는 이에 반론을 펴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고구려 멸망 직후 남만주~한반도 북부에 살던 그 많은 고구려유민들이 대부분 타지로 이동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발해인의 다수가 고구려 유민이었다는 설을 받아들일 때, 발해 멸망 직후 그 많은 발해인들이 대부분 타지로 이동하여 그 넓은 땅이 순식간에 여진(말갈)화되었다는 것 역시 납득하기 어렵죠...
여기서 여러 의문점이 발생합니다.
1. 말갈은 숙신의 후예인가?
가설1)
흑룡강~송화강 일대에 거주하던 숙신(읍루)이 대거 남하하면서 말갈이라 불리게 되고, 고구려 멸망 후에는 소수의 잔존 고구려 유민을 흡수하여 만주~한반도 북부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가설2)
말갈은 중국 동북방에 살던 사람들을 도매금으로 넘기는 비칭이다. 즉 그 중에는 고구려인들도 포함되어 있다.
2. 여진은 어떤 종족인가?
-여진은 5대 및 고려시대에 갑자기 등장합니다.(맞죠?) 한 종족이 갑자기 탄생할 수는 없고, 이전 말갈의 후예라고 생각할 수 있겠죠. 문제는 그 말갈이 숙신의 후예인가, 숙신+발해인(고구려유민)인가 하는 문제가 있겠죠.
3. 생여진과 숙여진은 같은 종족인가?
-경제/문화적으로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던데... 혹시 생여진이 숙신의 후예, 생여진은 발해인의 후예로 볼 수 없을지? 양자는 동질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이전 발해시대에 그리고 발해멸망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양자의 융합의 결과가 아닐런지?
-만약 숙여진이 발해인의 후예 또는 발해인의 혈통/문화가 상당 부분 남아있는 종족이라면, 왜 고려는 (발해는 동족의 예로 대우했으면서) 숙여진은 오랑캐로 멸시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 건 사실입니다.
이에 대한 관심자들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태그저장 | 취소
애플(hisstu)
안녕하세요. 애플의 블로그입니다.
백염 그들은 전부 인간이다. 이외의 것은 아니다. 이상...-_- 01/01 21:16
로빈 크핫 01/01 21:31
마법의활
제가 아는 단편적인 사실만 말해봅니다.
1, 가설 2와 1 둘다 근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2. 여진은 말갈의 후예지만 그러므로..
3 생여진과 숙여진은 다른 종족입니다. 생여진은 그 흑수말갈 계통이고,
숙여진이 발해계열, 즉 고구려계 종족들을 이르는 말입니다. 01/01 21:46
마법의활
제 생각으로는 역시 국가 의식이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고려에서 생여진, 숙여진 딱 잡아서 오랑캐 취급하진 않았던 거 같고, 여진 하면 아 쟤들 야만인..이런 식이 아니었을지... 그리고 저는 단일 계통설 자체가 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_- 01/01 21:48
마법의활
말갈중에 속말 말갈 (바로 대조영이 속해있었던)이라는 부류는 부여계 종족이지만, 나머지 말갈은 우리와는 좀 약간 거리가 멀다고 합니다. 속말 말갈 + 나머지 부여계가 생여진이 되었고, 흑수 말갈들은 숙여진으로 일컬어졌다고 생각합니다. 01 01/01 21:49
팩맨
아직까지 말갈족의 각 부족에 대한 혼혈비율을 연구한 자료는 없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흑수말갈이 여진의 조상이며, 그외의 말갈족은 고구려에 복속했던 신민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구려인에 복속민까지 집어넣는다면 그 가설은 맞는 것이 될것 입니다. 하지만 고구려 시기에 흑수말갈이 부족째 복속되었다는 기록이 없으며, 발해 일부 시기에는 복속되었다고 하지만 그것이 일시적인 것이었는지, 지속적인 것이었는지, 그리고 전체인지 일부분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01/01 21:54
팩맨
고려의 숙여진에 대한 태도는 기록으로 분명히 남아있어 전합니다. 고려 태조 왕건 때에는 여진족 전체를 발해처럼 동족의 예로 대우했습니다. 심지어는 여진족중 고려 개국공신이 있을 정도입니다. 고려 개국공신인 그 사람의 동생이 여진족 유력부족의 추장이었으며, 그 사람은 태조 왕건의 의형제였죠. 그래서 고려에서도 적극적으로 말갈족들을 고려화 시켜 흡수하려는 정책을 폅니다. 하지만, 거란(요)의 세력이 고려에 이르르게 되자 발해유민들 중 많은 수가 거란의 지배층으로 흡수되었고 이후 거란에 흡수된 말갈족과 고려에 흡수된 말갈족들이 서로 충돌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고려는 여진을 오랑캐로 멸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01/01 21:57
팩맨
이와 마찬가지의 일이 조선 건국초에도 벌어집니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그 자신이 고려인인지 여진족인지 혼동될 정도로 여진족 사이에서 세력기반이 확실했고, 이성계의 의형제 역시 여진족 추장입니다. 조선도 초기에는 여진족을 흡수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나, 세조 이후로 서서히 멀어지더니 점점 오랑케로 멸시하게 되고 나중에 이 오랑케가 후금을 세우고 청을 세워 조선에 처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01/01 21:58
애플
1.고려는 왜 윤관정벌 전까지 '동족'(특히 옥저인의 피가 많이 남아 있을)인 숙여진이 살고있는 영역으로의 확장을 시도하지 않을까요?
2.윤관북벌시 왜 언어-풍속이 유사했을 숙여진을 축출하여 필사적 반격을 불러일으켰을까요? 01/01 22:05
애플
팩맨 // 님의 덧글은, 숙신->흑수말갈->생여진, 고구려인->발해인->숙여진, 즉 여진은 숙신과 고구려유민의 결합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인지요? 01/01 22:07
팩맨
http://cafe.naver.com/booheong/5626
이 글에서 제가 예전에 말갈족에 대해 간단히 정리했었습니다.
참고가 되시기를~. 01/01 22:08
팩맨
우리나 중국은 그들을 전부 말갈족이라고 불렀지만, 이미 고구려에 복속했던 말갈족과 그렇지 않았던 말갈족들은 많은 차이가 나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하지만 역사는 우리에게 고구려에 복속하지 않았던 말갈족들이 이후 역사상에서 주력이 된다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즉, 혼혈상으로 여진은 고구려 유민세력과 흑수말갈로 이루어지겠지만, 지배계층은 흑수말갈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흑수말갈은 고구려에 거의 복속된적이 없었던 사람들이구요. 지배계층을 놓고 보면 고구려 유민으로 보기 힘듭니다. 01/01 22:13
팩맨
하지만, 언제나 전체 인구수를 놓고 보면 지배계층은 소수이고 피지배계층이 다수입니다. 그래서 인구수로 혼혈비율을 놓고 보면 고구려유민의 피가 많이 있었겠죠. 제가 알고 있는 지식의 범주 내에서도 고구려 유민세력의 후예들-발해 유민들이 요나라나 금나라의 이름으로 중국 대륙으로 진출해 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뭐 고구려 유민이 당나라에서도 절도사까지 해 먹었으니 하물며 발해에 있어서는 더 말 할 것도 없겠죠. 그리고 일부는 몽골제국의 군대로도 싸웠으며 발해 유민과 고려가 전쟁을 한 것도 알고 있습니다. 결국 문제는 피지배계층이 아니라 지배계층이 아닐까요? 01/01 22:16
애플
저 북쪽에 살던 흑수말갈이 남만주, 심지어는 한반도북부까지 내려와서 숙여진의 지배층을 이룰 수 있었을까요? 하긴 게르만족이동 등 다른 역사를 보면 멀리 떨어진 지역의 지배층이 되는 경우가 여럿 있긴 하지만...
그렇다면 '숙신의 후예, 흑수말갈에 의한 잔존 발해유민 정복'으로도 볼 수 있을 듯 하군요. 01/01 23:27
grifos
간단히 말하면 이 민족들은 특정 지역에 살던 사람의 통칭입니다. 예를 들어 말갈족이란 말갈이라 불리던 지역에 살던 사람이라고 볼 수 있고 여진족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01/02 09:27
grifos
한마디로 이것은 중국의 분류일 뿐입니다. 여진족의 경우 만주(만주란 명칭은 누르하치가 이 지역을 이렇게 부른데서 시작된 것입니다)에 살던 사람들의 통칭입니다. 그 당시에는 여진 지방이라고 불렸죠. 01/02 09:30
팩맨
흑수말갈에 의한 잔존 발해유민 정복으로 볼 수도 있겠죠. 고구려 패망 당시 당나라로 끌려간 사람들의 후손이 오늘날 중국사람이 된 것 처럼 말입니다. 01/02 16:23
세크윈드
발해가 멸망한 뒤 요나라 태종이 발해인을 가르켜 여진으로 불렀다 합니다(고구 "려" 대"진"). 그러한 여진은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모셧지만, 고려의 기득권은 점점 신라계인사들로 넘어가고 완안부가 금나라를 세우게 되지요
만주원류고를 보게되면 그들은 자신의 뿌리는 부여이고 고구려와 발해의 후손이라구 하죠 읍루와 물길은 더 북쪽에있는 민족인 듯 싶구여 01/02 17:26
팩맨
그게....현재는 고구려나 고려의 "여"자가 아니라 여진할 때의 "여"자는 계집"녀"를 쓰는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음차해서 쓰다보니 그럴 가능성이 있지만, 아무튼 계집녀 입니다. 01/04 14:16
[한사모]한국사를사랑하는모임 카페에서 공개한 게시글 입니다.
출처 : [한사모]한국사를 사랑하는 모임 cafe.daum.net/cjwhc
z4mPRPVStiyfclhDfm4dUQ00&dataid=9032&fenc=G5A3EOnYTy90&docid=CDc8ZaQ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