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 무신정권 하의 사회변란, 계층과 지역갈등의 혼합

명종의 치세 중 전반기는 반란의 시대였다. 반란의 주체는 지역민ㆍ도적 등 계층적으로 하급층까지 확산되었다. 망이·망소이,만적,김사미는 이를 대표하는 반란의 주체다.
망이·망소이의 난은 1176년(명종 6) 공주 명학소(鳴鶴所)에서 일어났다. 이것은 특수행정구역인 소(所) 지역의 반란으로 유명하다. 후에 이들은 예산현·충주·아산·청주 부근까지 진출했다가 항복하였다.
노비 출신 만적은 1198년(신종 1)에 개경에서 노비들을 불러 모아 반란을 시도했다. 이들의 시도로 처음에 수백 명이 모였지만, 다시 모이기로 한 후에 발각되어 100여 명이 죽게 된다. 이 반란은 사회신분의 해방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김사미의 난은 1193년(명종 23)에 경상도 청도에서 일어났다. 김사미는 농민 출신의 반란군 지도자다. 이 때 김사미의 반란은 경상도 초전(울산)에서 일어난 효심의 반란과 연계되었고, 규모 역시 컸다. 특히 이 반란은 후일 신라부흥운동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1) 망이·망소이의 난

- 남적의 대표격, 망이·망소이의 난
이 난은 공주 명학소에서 발생하였기에 지역 이름을 따서 ‘명학소의 난'으로 부르기도 한다. 무신정권이 세운 명종대에는 사회적 갈등이 모두 반란으로 드러났다. 1174년(명종 4) 조위총을 비롯한 서북 지역의 반란을 ‘서적(西賊)', 남부 지역의 반란을 ‘남적(南賊)'으로 불렀다. 이 난은 후자의 대표격이다.
- 공주ㆍ예산현ㆍ충주까지 점령해 간 반란
1176년(명종 6) 정월 망이·망소이는 자신을 산행병마사라고 부르면서 공주를 함락시켰다. 당시 조위총의 난으로 고전하던 고려 정부는 처음에는 회유하려 했지만 실패하였다. 이에 대장군 정황재(丁黃載)와 장군 장박인(張博仁) 등은 3천 명을 이끌고 진압에 나섰으나 패배하였다. 결국 고려 정부는 명학소를 충순현(忠順縣)으로 승격시키고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이를 통해 조세 등에서 일정한 혜택을 입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망이·망소이는 이후 예산현을 공격하여 점령한 이후에 다시 충주까지 나아갔다. 지금의 중부 지방에 중요 거점을 점령한 셈이다. 정부는 대장군 정세유(鄭世猷)와 이부(李夫)를 남적처치병마사(南賊處置兵馬使)로 임명해 토벌작전을 시작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조위총의 반란이 일정하게 진압되었기 때문이다.
- 강경한 토벌책으로 마감된 반란
1177년(명종 7) 정월에 망이·망소이가 강화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한 달 뒤 망이·망소이 등은 다시 봉기해 가야사(충청남도 덕산)를 경유하여, 3월에는 홍경원(弘慶院 : 천안 직산)을 불태웠다. 이들은 고려 정부가 자신들을 기만하고 가족들을 가두었기에 재봉기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아주(아산)를 함락시키고, 청주를 제외한 청주목 관할의 모든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에 정부는 강경한 토벌책을 구사하였다. 결국 6월에 망이가 사람을 보내어 항복을 요청했고, 7월에 망이·망소이 등이 정세유에게 붙잡혀 청주옥(淸州獄)에 투옥되면서 반란이 마감되었다. 이후 이들이 어떻게 처리되었는가에 대한 기록은 없다.
2) 김사미의 난

- 일반인 출신의 반란군 지휘자
김사미(金沙彌)는 1193년(명종 23) 경상도 청도를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의 출신 성분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청도 지역의 일반 농민 또는 이름에서 보이듯이 불교 사찰에서 일했던 인물로 보인다. 일반인 출신으로 반란군 지휘자가 되었다는 것은 반란의 양태가 이전과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중앙정계나 지역에서의 우두머리가 아닌 모든 계층으로 사회적 갈등이 표출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청도 지역에서 운문(雲門 : 운문사 주변)에 근거지를 두고 떠도는 농민들을 모았다. 당시 경상도·전라도·양광도는 기근으로 인해 많은 농민들이 자신의 근거지를 떠나고 있었다. 1190년(명종 20)부터는 무엇보다 동경(東京 : 경주)에서 일어난 민란으로 인한 ‘남적'의 활동이 크게 퍼져가고 있었다.
김사미의 반란은 확산된 남적 가운데 대표적 경우였다. 그가 지휘하는 농민반란군은 초전(울산)에 근거지를 둔 효심(孝心)의 반란군들과 연계하기도 하였다. 이들의 연계는 이전까지의 지역반란이 특정지역만을 위주로 이루어졌던 것과는 달리 서로 다른 세력간의 연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후 경상도 지역을 바탕으로 한 신라부흥운동으로 연결되는 중간 단계로 보이기 때문이다.
남적 토벌을 위해 고려 정부는 대장군 전존걸(全存傑)과 장군 이지순(李至純), 이공정(李公靖), 김척후(金陟侯), 김경부(金慶夫), 노식(盧植) 등을 파견하여 이들을 진압하게 하였다. 여기에는 후일 『동국이상국집』으로 이름을 떨치는 이규보가 하급 막료로 참여했다. 토벌작전은 순조롭지 못했다.
당시 집권자는 이의민(李義旼)이었으며, 토벌군에 참여한 장군 이지순은 그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작전의 실패에 대해 당시 기록에는 이지순이 김사미ㆍ효심 등과 서로 내통하여 작전을 누설할 뿐 아니라, 반란군에게 의복ㆍ식량ㆍ신발ㆍ버선 등을 지원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이의민이 신라부흥운동을 통해 새로운 왕조를 만들려는 야심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당시 사령관 전존걸은 이지순의 이러한 행동을 알고 있었지만, 이를 처벌할 수 없었다. 이지순을 처벌하면 이의민이 자신을 죽일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전존걸은 토벌에 성과를 얻지 못하는 가운데 고민하다가 자살하였다.
김사미의 반란은 그 해 11월에 상장군 최인(崔仁)이 남로착적병마사(南路捉賊兵馬使), 장군 고용지(高湧之)가 도지병마사(都知兵馬使)가 되어 토벌에 참여하면서 다른 양상을 가져와 다음해 2월, 김사미가 항복하였다. 이들의 반란은 지역의 농민주체 반란이 가져올 수 있는 최상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3) 만적의 난
- 노비들의 신분해방을 위한 반란
만적(萬積)은 1198년(신종 1) 개경에서 노비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이들의 봉기 배경에는 무신집권시기에 천민 출신 인물들의 출세가 많아졌다는 점이 깔려 있다. 또한 지역사회에서 계속적인 농민과 천민봉기가 신분해방을 위한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1182년(명종 12) 전주에서 일어난 관노(官奴)들의 봉기가 그 사례다.
1198년(신종 1) 5월 개인 노복인 만적, 미조이(味助伊), 연복(延福), 성복(成福), 소삼(小三), 효삼(孝三) 등 6명은 개경 북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공·사 노예들을 모았다. 이들은 무신난 이후 천한 노예 출신이 높은 관직에 오르니 자신들도 가능하다고 주변을 선동했다.
이들은 갑인일에 흥국사(興國寺)에 모여서 궁궐로 가기로 하였다. 계획은 궁궐의 환관과 노예들을 참여시킨 후, 최충헌과 자기 주인들을 죽이고 자신들의 호적을 불사르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약속한 날에 수백 명 밖에 오지 않아 4일 후에 다시 보제사(普濟寺)에 모이기로 했다. 그때 율학박사 한충유(韓忠愈)의 종 순정(順貞)이 이를 주인에게 고발하여, 만적 등 1백여 명이 체포되어 죽었다.
이 반란은 실패했지만 당시 신분해방을 목표로 한 천민반란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다. 이후 1200년(신종 3)에 진주 공·사 노예들의 반란, 밀성(密城)의 관노(官奴) 50여 명의 민란 합세와 같은 천민반란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 원고 작성 : 김인호 (광운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 교정 및 윤문 : 상명대학교 문화콘텐츠 창작소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