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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668(692). 만고의 역적 밀양사람 정병하

작성자도재국|작성시간18.06.19|조회수179 목록 댓글 0

밀양관아 앞의 "깨어진 정병하(鄭秉夏)의 비(碑)"에 대해서

밀양관아 앞에는 밀양군수.밀양부사, 경상도관찰사 등을 지낸 위정자들의 송덕비가 있다


그 중에서 맨 서쪽에 있는 비(碑)가 밀양군수를 하다가 중앙으로 발탁된 정병하(鄭秉夏)의 비다

그 비문은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통정대부 행도호부사 정후휘병하 애민송덕비(通政大夫 行都護府使  鄭侯諱秉夏  愛民頌德碑)

필자(도재국)가 역사적인 여러 문서를 볼 때, 그의 비문에 새겨진 "行都護府使"를, "行密陽郡守"로 새겨야 맞는 것 같다

즉, 그가 밀양군수로 발령을 받을 당시는 관제가 밀양도호부(密陽都護府)에서 밀양군(密陽郡)으로, 

그 수장은 도호부사(都護府使)에서 군수(郡守)으로 이미 변경되었다

생전에 송덕비를 세우는 것은 드문 일인데, 그 당시 그의 명성과 중앙(朝廷)의 후원이 대단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고,

그런 영향으로 관직을 "도호부사"로 새긴 것으로 보인다 


정병하는 1894년 7월에는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농상아문협판(農商衙門協辦)을 거쳐 

1895년에는  왕실재무를  책임지는  내장원경(內藏院卿), 농상공부협판, 대신서리(大臣署理)를  차례로  역임했다


그 비문의 상단 모서리가 도끼에 맞아 깨어져 있다

왜 깨어졌을까???


정병하가 중앙으로 발탁되어 근무할 때,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발생했고

정병하는 그 시해 사건과 처리 과정에서 만고 역적질을 한 사실이 있다


그는 만고 역적으로 되어 1896년 서울에서 참형에 처해졌다

그런데도 1907년 친일파와 일제에 의해 "충희"라는 시호를 받고 복권되었다


정병하의 송덕비는 밀양군수 재임 당시인 1892년(단기4225년, 고종29년, 壬辰, 명치25) 7월에 세워졌고

1895년 정병하가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연루되어 참형된 후, 성난 밀양민중에 의해 비문의 상단 모서리가 깨어졌다


밀양관아 앞에서는 최근에 해마다 일제에 항거한 밀양독립투사들의 항일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독립운동 행사를 재현하고 있다

밀양관아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는 밀양의 위정자들과 밀양의 독립운동사 관련 단체, 밀양시민들은

정병하의 만고 역적질을 아는지 모르는지 매우 궁금하다


정병하의 만고 역적질은 우리나라가 36년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는 여러 원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


여러 사람들이 정병하의 비를 없애야 한다 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도재국)는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마음 같아서는 정병하의 비를 뽑아버리고 싶지만

그 비를 뽑아 없애버리면 그의 역적질이 밀양시민의 뇌리에서 지워질 수 있다

그래서 그의 비를 뽑아 없애버리는 대신에, 그대로 두고

그 비문의 옆에 그의 공과(過)를 새긴 별도의 비를 세워 만인에게 알리는 것이

년년세세 백번 천번 "독립운동(만세운동) 재현" 행사를 하는 것 보다 더 효과적이다 라고 본다




 "3.13밀양만세운동 재현", 출처 밀양신문 [2013-03-19 오후 2:39:00]


밀양의 위정자들, 밀양의 독립운동단체 등은

밀양시민과 관광객 등에게 이런 사실도 모르고 정병하의 비석을 쳐다보게 해서는 안된다


아래는 밀양의 밀양의 근.현대사를 집중 조명하는 향토사학자 현용운 선생의 정병하에 대한 글이다


2018. 6. 19


밀양광장 카페지기 도재국(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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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 재악산(載嶽山=载岳山) 관련 글 <10>

만고의 역적 밀양사람 정병하
 
 글쓴이 : 龍雲(칠득이) | 등급변경


  | 조회 41 |추천 0 | 2013.08.17. 11:53

  http://cafe.daum.net/historymiryang/EvpM/43     


  만고의 역적  밀양사람 정병하   

  
  명성황후의 시해는 누구의 생각이었나??

  박영효와 정병하 일당인가? 일본공사 '미우라'인가?

  아니면 일본국의 사주를 받은 친일파와 일본인의 합작품인가?

 

  1895년 4월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중국의

  '요동반도'를 전리품으로 챙기며 중국을 압박하던 일본은 러시아,독일,프랑스

  삼국동맹의 견제로 인하여  다시 '요동반도'를 중국에게 되돌려 주어야만 했다.

 

  이를 비관한 일본 낭인출신 군인들 40명이 '할복자살'하여

  일본 전국을 뒤숭숭하게 만들어 놓기도 했다.

 

  그러자 그동안 눈치만 보던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는

  러시아측에 기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친일내각인  '김홍집내각'을 내몰고 '박정양내각'을 세운 것이다. 

  게다가 '명성황후'가 러시아에 기대어 다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손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미우라'공사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이미 '명성황후'로 부터 상당한 뇌물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명성황후'는 한 술 더 떠서 일본인 '소촌실'의 영리한 딸을

  자주 불러들여 가까이 두고 사랑해 주고 있었다. 
 

  번번히 명성황후의 손에 놀아났던 개화파(친일파)나 일본정부로서는

  러시아를 끼고 명성황후가 또 한번 세력을 잡을 경우를 상상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박영효'는 절박했다. '코너'에 몰린 것은 '미우라'공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들인 공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서로 힘을 합치는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배척당하고 있은지 오래된 '대원군'을 들러리정도로

  끌어들이기로 했다.  나중에 실패할 때를 대비해서라도 '대원군'이라는 존재는

  이용가치가 충분하다.   '명성황후'는 얼마 전부터 연극과 가곡에 빠져있었다.

  저녁이면 일본인'소촌실'의 딸을 불러 함께 연극을 즐겼다.

  '미우라'는 이를 이용하기로 했다.
 

  '소촌실' 딸의 하인으로 위장하여 낭인들을 궁에 딸려서 들여보내기 시작했다.

  궁의 지리와 '명성황후'의 얼굴을 익히는데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퇴궐 후에는 즉시 기억들을 더듬어 '명성황후'의 초상을 그려 나갔다.

  이렇게 해서 '황후'의 초상화가 수 십장 그려졌다.그리고 초상화가 완성되자...

  거사 날짜도 정해졌다. 1895년 고종 32년 음력 8월20일 이었다.
 

  그리고 미우라는 거사 당일의 대궐 당직인 개화파(친일파) 정병하에게

  황후의 얼굴을 모두가 알아볼 수 있게 대궐의 모든 햇불을 밝혀라 지시했다
 

  그 날 '대원군'은 공덕리(현재 마포 공덕동)에 있는 '아소정'별장에 있었다.

  딱 30년전 안동 김씨 김좌근으로부터 빼앗다시피 사드렸던 여름별장이다.

  이'아소정'으로 일단의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일본군들이 훈련시킨 조선군인들과

  일본의 낭인무사들 100여명이 이곳에서 야간 훈련을 한다는 명분이었다.

  그 날 저녁 때를 기다리던 이들은 곧장 '대원군'을 사인교(四人轎))에 태워

  경복궁으로 몰려갔다. 물론 그들의 소매 속에 '황후'의 초상화가 들어있었다.

  경복궁 앞에는 정병하와 미리 연통을 주고받은 '소촌실'의 딸이 정병하의 위엄을

  등에 업고 아무나 함부로 범접하지 못하는 대궐 문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궁궐 수비대장 '홍계훈'이 막아 섰다가 칼을 맞았다.

  중상을 입은 그는 사흘 후에 숨졌다.

  궁궐로 난입한 그들은 곧바로 '명성황후'를 찾아 나섰다.
 

  그 날의 결정적인 가이드가 바로 '소촌실'의 딸이었다.

  그녀는 낭인들을 곧바로 건청궁 '곤녕각'으로 이끌었다.

  궁전에는 이미 정병하의 지시로 밝혀놓은 밝은 횃불의 덕분에

  길에 다니는 땅강아지와 개미들이 다 보일 정도로 밝혀져 있었다.
 

  '곤녕각'안으로 들어가자 '이경직'이 나오고 있었다.

  그에게 황후의 소재를 묻자 '모른다'는 대답이었다.

  그러면서 이경직은 두 팔을 벌려 일본낭인들의 진입을 막아 섰다.

  이를 본 낭인이 그의 한 팔을 잘랐다. 그러자 이경직이 다시 한 팔만으로

  막아 섰다. 낭인이 다시 한 팔마저 잘라버렸다.
 

  이경직은 피 속에서 죽음을 맞았다. 낭인들은 '황후'의 초상화를 들고서

  일일이 대조해 보고 다녔다.. 결국 벽 속에 걸어놓은 옷 속에 숨어있던

  '황후'를 찾아냈다. '황후'는 자신이 그렇게 사랑해주던

  '소촌실'의 딸을 보자 말을 걸려고 했다.
 

  그 순간 낭인들의 칼이 '황후'의 몸을 난도질 하기 시작했다.

  '황후'는 자신의 유일한 혈육인 세자의 이름을 외쳐 부르며 죽었다.

  완전히 죽은 것을 확인한 후 낭인들은 검은 색 긴치마에

  황후의 시신을 둘둘 말아 근처 녹산으로 가져가 석유를 붓고는 불을 붙였다.

  남겨진 몇 개의 뼈 조각은 근처 행원정 연못에 던져 버렸다.


  그 날 '경복궁'의 당직사령은 누구였는가?

  그렇게 많은 외부인들이 무기를 들고 난입을 하여

  조선의 황비를 시해한 대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당직사령은 누구였고 뭐를 하고 있었는가? 
 

  당일의 당직은 '내장원경(內藏院卿)'직을 맡고 있던 '정병하(鄭秉夏)'였다. 

  당시 47세의 장년이었다. 더우기 '내장원경'이라는 직책은 왕실의 재정을 맡고

  있던 자였다. 그는 1882년 김옥균이 일본에 사찰을 갈 때 수행하여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 이후 그에게는 일본이라는 나라는 대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그는 김옥균을 따라 철저한 개화파 추종자가 되었다.
 

  그러나 왕실의 재정담당을 할 정도의 머리를 가지고 있어 자신의 내심을 표출을

  철저히 조정할 능력 또한 가지고 있었다. 명성황후 시해 전날인 19일...

  '황후'가 '정병하'를 찾았다.
 

  그리고는 걱정스러운 이야기를 꺼냈다. 최근 일부에서 자신을 살해하겠다는

  루머들이 퍼져있는데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지난 번 임오군란 때도 궁궐을

  구사일생으로 빠져나가 민가에 숨어 몇 달간 내야 했던 기억이 새로웠다.

  그 때는 '대원군'이 주도하여 국상까지 치를 뻔했다. 자신에 대한....

  이러한 황후의 걱정스런 질문에 정병하 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 마마. 일본군이 몇 명이 대궐에 들이닥치더라도

  성심 껏 성궁(황후)을 보호하겠습니다.

  신에게 다 대비책이 있아오니 조금도 의심하거나 근심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미우라 공사와 내통하여  침입자들에 대비한다며

  대궐에 불을 대낮같이 밝혀 낭인들이 황후를 쉽게 찾게한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당직인 그는 그날 황후시해 사건의 결말을 알고

  혹시 피아를 구분 못하는 낭인들의 칼날을 피해 안전한 곳으로 숨어 있었다

  그 증거로는 그 날 당직사령이 어디에 있었는지의 기록은 그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다. 
 

 '정병하' 는 '황후'가 죽자 이틀만에 일본 '미우라'공사의 사주를 받아

 '황후'에 대한 '폐비(廢妃)'를 주장하고는 스스로 '폐비조칙' 을 작성했다.

 '황후'의 온갖 악덕을 이유삼아 황후를 폐비로 만든 것이다.
 

 '폐비조칙'은 고종이 지시하는 형태인데 내용중에는

 '황후'가 궁에서 도망나가서 죽음을 자초한 것으로 명시하고 있어

  그 주도면밀한 교활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죽음을 극도로 두려워한 고종은 힘이 센자들이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다했다.

  세계가 일본이 자행한 황후시해사건을 주목하기 시작하자

  일본은 다시 '황후'를 복권시켰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난처한 입장에 빠지게 된 '미우라'공사는

  조선정부에 정식으로 '사건조사의뢰'서신을 보냈다.

  궁궐에 일본인들 복장으로 난입했다고 하는데 이를 조선정부가

  자세히 조사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이를 받은 '김윤식' 이 얼마 후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답신을 '미우라'에게 보냈다.
 

  "우리 군대를 조사해보니 대궐로 들어갈 때 시위대와 충돌을 염려하여

  스스로 일본인 복장을 하도록 했던 것이지 일본인들은 아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는 황당한 내용이었다. 하기는 '김윤식' 또한 사전에 이미

  시해계획을 훤히 꿰차고 있었던 것이다.
 

  '폐비조칙'을 작성했던 정병하는 그해 11월에 '단발령'포고에서

  다시한번 실력을 발휘했다.  궁궐주변에 포탄을 장전한 포를 빙둘러 세워놓고는

  '유길준'과 '조희연'이 고종을 압박하여 '단발령'을 포고하게 하고는

  고종이 먼저 시범을 보여야 국민이 따라한다고 욱박질렀다.

  결국 '정병하'가 고종의 머리를 자르는 불충을 저질렀다.
 

  이러한 '정병하' 의 목숨도 불과 몇개월 가지 못했다.

  다음해 2월 1일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역적으로 처단되어

  경무청앞에서 순검들에게 참살되었고 그 시신은 종로에 전시되었는데

  군중들이 그 시신을 향해 돌을 던지고 칼로 다시 찢어서 절단냈다고 한다. 
 

  성난 군중들에 의해 부관참시된 이 만고의 역적 정병하는

  일제가 완전히 득세하던 1907년 일제의 주구들에 의해

  쇄신도화라는 명분으로 죄를 벗게 해주었으며,

  시호는 충희라고 지어 주었는데...
 

   해방후 미국에 빌붙어 득세한 밀양의 친일무리들 때문에

   아직까지 서울 백성들에 의해 부관 참시된 그의 죄를 묻지도 따지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정병하가 밀양군수로 있을 때

   밀양을 위해 영남루를 중수했느니 무봉암을 보수했느니 하며

    그의 송덕비가  복원된 밀양 관헌 앞에

   "통정대부  행도호부사  정후휘병하  애민송덕비" 라는  이름으로 

    충절의 고향 밀양을 비웃고 있다.
 

    정병하의 공덕비를 보고 칭송하는 무리나

    정병하가 밀양을 위해 많은 일을 했어니 그 공과 실을 따져보자는 무리나

    이것을 자랑스럽게 밀양관헌 앞에 전시한 밀양시청 돌대가리들이나

    모두 한구덩이에 넣고 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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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하 : 1849(철종 즉위년)∼1896

 1994년에  밀양문화원에서  발간한  밀양지명고에는  정병하가

 산내면  용전리  용암의  한골(大谷)  출신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1849년  中人가문으로  태어나  1881년에  金玉均의 

 신사유람단에 통상사무아문(通商事務衙門)의  관리로  동행했다.

 이후  그는  철저한  개화파  추종자로  바뀌었다.

 1886년에  주사(主事)에서  사관(仕官)으로  승진하고,

 1888. 5부터  1894. 7까지  밀양군수로  재직했다.

 밀양군수로  재직중일  때  낙동강의  둑을  막아  농토를  확장하고,

 30만냥의  미납세금을 해결하였으며, 농정촬요(農政撮要)를  지었으며,  

 밀주장정(密州章程)을  만들기도  하였다.

 1894. 7에는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농상아문협판(農商衙門協辦)

 1895년에는  왕실재무를  책임지는  내장원경(內藏院卿), 농상공부협판, 대신서리(大臣署理)를  차례로  역임한다. 
 

 더 상세한 밀양 친일파들의 자료를 보시려면 클릭:=>  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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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봉인 일제 잔재 천황산(天皇山)을 민족 산명인 재악산(載嶽山 = 載岳山)으로 복원시킵시다 !!!


제2봉인 왜곡된 산명인 재약산(載藥山)을 수미봉(須彌峰)으로 변경시킵시다 !!!


≪재악산(載嶽山=載岳山) 산명복원 범국민운동 추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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