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이유수의 천황산일식명설고찰(天皇山日式名說 考察) (한글 워드 문서)
출처 : 蔚山鄕土史硏究會 1998년 발행 第9집(輯) 蔚山鄕土史報
天皇山日式名說 考察 (李有壽)
=== 목 차 ===
1. 머리말
2. 東國輿地勝覽의 기록
3. 輿地圖書의 기록
4. 輿地圖의 山名
5. 文獻備考
6. 大東地志
7. 天皇山과 載藥山
[ ●이유수 기고문 "1. 머리말" ]
○고을 서쪽은 태백산맥이 남쪽으로 흘러 수다한 명산들이 솟아 있다. 白雲山을 필두로 高巘山 雲門峴, 石南山, 陵洞山, 肝月山, 神佛山, 鷲棲山, 天皇山 들이 그것이고,
밀양 쪽으로는 載藥山이 있고, 또 옛산 이름으로 穿火峴이란 산도 있었다.
○이러한 산들은 다 명산 답게 신령스러운 산의 뜻들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근자에 와서 이들 가운데 天皇山은 일본색이 짙은 산이라 하고, 또 그 산을 天皇山이 아니라 載藥山이라 하는 주장이 일어나고 있다.
○이와 같은 주장은 密陽쪽에서 싹트더니 울산에서도 이에 동조하는 분들도 있는 것 같고, 또 사회적으로 지정된 요지군(窯址群)이 그 산에 있기 때문에 자연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는 산이다.
○그러므로 옛부터 불러오던 穿火峴을 비롯하여 天王山, 天皇山, 載藥山 등은 어떠한 관계에 있으며, 과연 天皇山이란 일본 이름인가 하는 것을 잠시 살펴 보고, 가마터들의 소재지도 載藥山에 있는지도 아울러 훑어볼까 한다.
[● 이유수 기고문 "2. 東國輿地勝覽의 기록" ]
[ 사진 30 (위) ] 한글의 옛글 표시 (蔚山鄕土史報 50, 51, 52, 53 페이지)
○현전하는 地誌가운데 경상도지리지는 경상도 조에서 태백산등 11개의 명산을 등재하였고, 彦陽縣 條에는 鎭山으로 獻山과 名山으로 鷲棲山 밖에는 실어놓지 않았으며, 세종실록지리지는 彦陽縣에 鷲棲山, 密陽府에 華嶽. 靈井山 등이 보일뿐 간략한
○그러나 東國輿地勝覽에서는 비교적 자세한 기록 방식을 취하여 여러 산들이 올라 있어 이것을 본다면 다음과 같다.
○彦陽縣, 高巘山, 在縣北十里鎭山, 鷲棲山 在縣南二十里 一名 大石山, 石南山 在縣西十二里, 穿火縣 在縣西二十八里 密陽府界, 夫老山 在縣南五里, 松洞 在縣北二里
○密陽府, 華嶽山 惑屯德山 在府北十九里 鎭山, 推火山 在府東五里, 琵瑟山 在豊角縣西北三十里, 牛齡山 在府西十里, 載嶽山 在府東四十一里, 萬魚山 載府東二十里, 慈氏山 在府東十五里, 龜齡山 在守山縣北十五里, 實惠山 載府東三十一里, 穿火峴 在府東九十三里, 胡法山 在府西北三十七里, 鈴峴 在府西十五里, 羅峴 在府西十五里, 高巖山 在府西九里, 龍頭山 在府東四里.
○이에 두 고을의 산을 검토하여 보면 彦陽縣西 28里의 穿火峴과 密陽府 東93里의 穿火峴은 그 위치나 거리 등으로 보아 같은 산이라는 알 수 있는데, 더구나 彦陽의 穿火峴은 密陽府界라는 것을 본다면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載嶽山의 위치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彦陽과의 경계에 있는 穿火嶺이 府東 93里라 한데 대하여, 오늘날의 지도상에 나란히 있는 載嶽山은 府東41리에 지나지 않아 52리나 차이가 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본다면 이때의 載嶽山과 금일의 載藥山은 그 위치가 같지 않은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穿火峴이 가지고 있는 그 산의 뜻은 무엇인가 한번 구명하여 볼까 한다.
○穿火峴은 「◆(1)」의 한자 바꿈한 것으로 보고자 한다. ◆(2)은 「◆(3)」등으로 互轉되는 「神」의 옛말로 「王」의 古訓 「尼叱今, 寐錦 내지 上監」에 그대로 쓰였는데 그 借字로는 「解慕, 蓋馬, 乾馬, 金馬, 儉, 錦, 今, 黑, 熊」 등이었다고 하였다 [❶梁柱東 增訂 古歌硏究]
○이와 같은 견해에 따라 「穿」은 그 뜻이 「구무」이니 그 준말 「굼」은 곧 神 또는 王의 옛말「◆(4)」으로 봄직하다. 또 「火」는 「◆(5)」으로 보고자 한다. 「◆(6)」은 광명 또는 국토의 뜻으로 古史에 「發, 伐, 弗, 沸, 不, 夫餘, 夫里, 火, 原, 平, 坪, 評, 赫, 昭, 明,」 또는 「白, 百, 伯, 貊, 泊, 朴, 瓠」등 자로 國名, 地名, 族名 人名 등에 借字됨은 주지의 사실이라 하였다 [❷梁柱東 增訂 古歌硏究].
○이렇게 神明하다는 뜻을 가진 지명은 穿火縣의 인근에서도 더러 찾아볼 수 있다.
○즉, 肝月山 神佛山과 박어리산 火穿(登億)등이 그러하며, 배내(利川) 또한 그러한 것이다.
○배내의 「배」도 「◆(7)」이 변한 말이라 한다 [❸梁柱東 增訂 古歌硏究].
○그런데 지금과는 달리 彦陽에서 密陽으로 넘어가고, 密陽에서 彦陽으로 오는데는 모두 穿火峴을 통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彦陽邑에서 동과 남, 북으로는 大路가 열려 있었고, 서쪽으로는 小路가 穿火峴을 넘어 密陽으로 통하고 있었다. [❹輿地圖書 彦陽縣之地圖].
○이와 같은 험준한 산길을 가고 옴에는 남달리 길손들의 마음에는 이 산을 畏敬하는 마음이 자리잡고 있었기에 「◆(8)」라는 이름이 생겨 났을 것이다.
[ ●이유수 기고문 "3. 輿地圖書의 기록" ]
○여지도서라 함은 영조 36년(1760)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圖와 書로 이루어진 것인데 여지승람을 보완 개수한 것이다.
○ 이 여지도서에 수록된 언양과 밀양의 관계되는 산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 彦陽縣, 穿火峴 在縣西二十八里 密陽境卽石南山西麓.
○密陽府, 穿火嶺 在府九十三里 來自淸道雲門山, 載嶽山 在府東四十里 來自穿火峴.
○위와 같은 여지도서의 기록을 본다면 載嶽山은 오늘의 載藥山과는 분명 그 위치가 다름을 알 수가 있다. 또 載嶽山의 설명에 來自穿火嶺이라 하여 載嶽山은 穿火嶺으로부터 흘러온 산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이때의 載嶽山은 밀양 쪽으로 훨씬 가까운 곳에 자리잡은 산이었으며,
載嶽山은 穿火嶺의 뻗은 한 가지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다시 한편으로는 오늘의 지도상에 있는 載藥山은 穿火峴의 한 봉우리에 지나지 않았다.
○載嶽山의 산명에 대하여 梁柱東의 그럴듯한 해설이 있어 살펴 볼 만한다.
○그는 宰嶽山(慶尙道地誌 咸昌)과 採藥山(永川南 저?역 뫼) 助藥島(조약섬) 등이 모두 小石의 뜻 「◆(9)」의 借字라 하였다 [❺梁柱東 增訂 古歌硏究]
○載嶽山도 이렇게 볼 수 있다면 어느 산과 대비하여 작은 산(小山)이라는 데서 유래된 이름인지 모르겠다.
[ ●이유수 기고문 "4. 輿地圖의 山名" ]
○여지도는1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지도이다, 이 여지도는
書는 없고 圖만 있을 뿐인데 彦陽縣圖를 보면 밀양과 경계에는 단지 石南嶺만 있을 뿐 종전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한편으로 密陽府圖에는 언양쪽에 伽智山, 石南嶺이 있고, 종전의 穿火嶺 자리에는 天王山이 보인다.
○이와 같은 지도를 본다면 穿火嶺이 天王山으로 바꾸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오늘의 天皇山名이 여기에서부터 싹트기 시작한 것인데, 天王山이란 이름은 다소 앞서부터 穿火嶺을 일명 그렇게도 불러온 것으로 짐작된다.
○하늘(天)의 原語 「◆(10)」을 火로도 借字되었으니 火가 天으로 변한 것이고 또 神의 原語 「◆(11)」도 王으로 互轉함을 볼 때 天王이란 산명은 「◆(12)」을 倒寫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天王을 말하여 山神이라 하는 견해가 있다.
○우리 민간 신앙에 山神을 在天에는 天王이요, 下山에는 山王이라 한다 하여 山神이나 天王이나 山王이 모두 같은 일신동체라 하였다. [❻金鍈遂 智異山聖母에 就하여].
○그러하므로 天王山이라는 것은 天王이 하늘에서 내려 계시는 山이라 하여 天王山이라 한 것이며 옛 사람들은 하느님이 인간세계에 내려오실 때 제일 높은 산에 내려
○그러니 高山은 下界로 내려 오는 사다리라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아 왔다.
○肝月山의 최고봉 丹鳥峰도 언양지방 사람들은 이를 왕배이(王峰)라 하여 왔다.
○天王山이란 산명은 비단 이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智異山 산신의 所住峰을 天王峰이라 하였고, 俗離山 산신의 소주봉도 天王峰, 伽倻山 山神의 이름을 正見天王, 俗離山 神名을 大自在天王이라 한다.
○이 天王이란 말은 하늘의 임금으로 다분히 불교색을 띄고 있는 말이다.
○◆輿地圖 密陽府 (이 위치에 사진이 있음).
[ ●이유수 기고문 "5. 文獻備考" ]
○文獻備考에서도 언양과 밀양의 산천을 볼 수 있다.
○언양현에서는 여전히 서쪽 28리 되는 곳에 穿火峴이 있다.
○한편으로는 밀양부 條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載嶽山 在東 四十里 有金剛庵 巖壑奇勝 左右瀑布 遊賞坌至 臼淵 在穿火嶺下 周百餘尺.
○위와 같은 기록을 보았을 때 여전히 載嶽山은 밀양 동쪽 40里에 있고 金剛庵이라는 절이 있다.
○한편으로는 穿火峴의 직접적인 기록은 없으나 구연 條에서 臼淵이 穿火峴의 아래에 있다 하여 간접적으로 표시하고 있는데 臼淵은 오늘날의 호박소로 보여진다.
[ ●이유수 기고문 "6. 大東地志" ]
○古山子 金正浩가 꾸며낸 大東地志의 기록을 다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들을 볼 수 있다.
○彦陽縣, 嶺路 穿火峴 西二十八里 密陽界,
○密陽府, 載嶽山 東四十五里 靈井寺 金剛庵 巖壑奇勝 左右有瀑布, 穿火峴 東九十三里 彦陽界, 載嶽川 源出穿火峴西流 經載嶽之陰入于凝川.
○大東地志에서는 다른 地誌들과 마찬가지로 언양이나 밀양 모두가 각기 穿火峴을 기록하고 있고, 그 위치나 거리가 다름 없다.
○반면에 밀양에서는 載嶽山과 載嶽川에 대한 설명이 뒤따르고 있다. 載嶽山을 설명하되 靈井寺와 金剛庵이 있고 좌우에 폭포가 있다 하였다. 또 載嶽川은 穿火峴에서 서쪽으로 흘러 載嶽山을 지나 凝川으로 들어간다 하였다. 그러므로 穿火峴은 載嶽山의 동쪽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별첨한 大東輿地圖를 자세히 본다면 穿火峴은 市界에서 迦智山의 가지가 南走한 것을 알 수 있고, 載嶽山은 密陽府 안에서 東西로 뻗어있는 것을 알 수 있다.
◆大東輿地圖 密陽都護府(사진이 이 위치에 있음).
사. 이유수 기고문 "7. 天皇山과 載嶽山"
○이제까지 다섯가지 자료를 가지고 天皇山名을 검토하여 보았다. 이로써 얻어진 것은 穿火峴 또는 穿火嶺이 일명 天王山이라고도 부르다가 天皇山으로 변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天皇山이라는 것이 日式名일까 하는 것을 검토해야 겠다. 다시 말하면 이것이 일제시대에 그렇게 고쳐졌던 이름이었을까?
○신라는 물론이고 조선조에도 대륙에서 일어났던 帝國들의 황제 諱를 피하여 이쪽 이름을 고치는 일이 없지 않았다. 한 예를 들면 신라 太宗의 왕호가 당나라 太宗 皇帝의 帝號와 같다 하여 이를 고치라는 일이 있었다.
○神文王때 당의 고종이 사자를 신라에 보내어 이르기를 나의 聖考는 魏徵 李淳風 등의 현신을 얻어 서로 心德을 화합하여 천하를 통일하였음으로 太宗 皇帝라 하였거니와 너의 신라는 해외의 작은 나라로 太宗의 칭호를 사용하여 天子의 名器를 참람히 함은 그 뜻이 不忠하니 속히 고치라 하였다. [❼三國遺事 太宗春秋公].
○이때 神文王은 글을 올려 신라가 비록 작은 나라이나 聖臣 김유신을 얻어서 삼국을 통일하였음으로 太宗이라 한 것이라 변명을 하였더니 당나라 高宗이 그 글을 보고 전에 자기가 태자로 있을 때 하늘에서 부르짖어 三十三天의 한 사람이 신라에 태어나서 유신이 되었다고 하는 것을 자기가 책에 적어 둔 것을 생각하여 꺼내어 보고는 놀래기를 마지 아니하며 다시 사람을 보내어 太宗의 칭호를 고치지 아니해도 좋다하여 어려움을 모면 하였을 정도였던 것이다.
○그 당시 국제 관례가 이러하였는데도 일제때 식민지였던 朝鮮의 한 작은 山의 이름을 그들의 王名과 같은 天皇山으로 붙일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아마 이러한 일은 불경하다 하여 용납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사정이 이렇다면 天皇山名의 등장은 일단 大韓帝國 시대의 소산으로 보고자 한다.
○신라는 祀典을 정하매 스스로 唐나라에 대하여 諸侯國으로 자처하여 大祀에 天地祭를 지내지 아니하고 다만 국도 중심의 가장 주요한 神山 3곳만 大祀에 편입하였다.
○또 朝鮮에 와서도 天에 대한 제사가 논란 거리로 등장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국가적인 祀神에 있어서 天子國과 맞설 수 없으며, 諸侯의 禮에 준하여 祭天儀禮였던 圓丘祭의 폐지를 보았다.
○이는 자기 비하를 말하는 것이며, 자주와 독립의 전통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조선조는 그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쳐 말기에는 동학농민항쟁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때 청나라와 일본의 두 나라는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여 그 결과 청일전쟁이 이 땅에서 일어나 청나라 세력은 물러나고 일본세력은 강화를 보았으나 그 뒤 러시아 세력이 들어와서 차츰 친일파를 몰아내고 친러정부를 세우게 되었다.
○이때 나라에서는 자주 자존의 국민의식이 발흥하여 1897년에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光武, 왕을 皇帝, 황제의 자기 표현을 朕이라하여 독립국가로로서 새로운 출발을 하였다. 그리고 圓丘壇을 설치하여 祭天儀式도 행하였다.
○이때의 皇帝라는 王稱은 진시황이 제정한 것이었지만은 중국 태고 때의 三皇의 皇과 五帝의 帝를 서로 땄던 王稱이었다. 이 무렵 민간에서도 독립정신이 무르익어 1896년에는 독립협회에서도 서울에 독립문을 세울 정도에 이르렀던 것이다.
○나라 안에 이와 같은 독립의 기운이 펴져나갈 때 天王山이라고 불러왔던 산 이름도 天皇山이라 고쳐 불렀는데 俗離山의 天王峰도 天皇峰이라 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天皇이란 것은 중국의 三皇 가운데의 天皇氏로써 三皇의 으뜸가는 존재였던 것인데, 三皇은 天皇氏. 地皇氏. 人皇氏인 것이다.○그런데 오랜 文化圈이 같았던 중국 태고의 神 天皇氏를 따온 이름일지언정 오랑캐視 하여 왔던 섬나라 日王의 칭호를 따지는 아니하였을 것이다.
○다음으로 현행 지도에 나타나는 載藥山을 검토해 볼까 한다. 이 載藥山은 한마디로 말해서 이제까지 살펴본 다섯가지 地誌에 나타난 載嶽山 바로 그것으로 50여리나 동쪽으로 이동하여 붙여진 산명인 것이다. 이를 달리 표현한다면 예로부터 불러온 穿火峴 또는 穿火嶺.天王山이라 하던 山塊의 이름 없었던 산봉에 지나지 않았던 것을 현행 지도를 만들 때 훨씬 서쪽에 있었던 天王山의 한 지맥을 따와서 붙인 이름인 것이다.
○해발 1115m나 되는 높은 봉우리가 이름도 없이 天皇山의 屬山으로만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靑良面의 靈鷲山이 靑凉山 또는 文殊山이라고도 하다가 현행 지도상에는 文殊山과 南巖山으로 분화된 것과 같은 류일 것이다.
아. 이유수 기고문 "8. 맺는말"
○이제까지 여러 각도로 天皇山名의 과연 日本名인가 검토하여 보았으나 日本王名과는 우연의 일치일 뿐 이는 중국의 三皇中 天皇氏에서 따온 것으로서 자주적인 입장에서 山格을 높인다는 데서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즉, 天王山을 天皇山으로 높혔던 것이다.
○이에 몇 가지 요구됨을 덧붙여 본다.
1) 경솔한 산명의 교체는 피해야 하지만은 설사 바꾼다고 가정하더라도 본 이름이었던 天王山으로 되돌아감이 바람직하다. 穿火峴이나 穿火嶺은 이두 독법이 사라진 금일의 이름으로는 알맞지 않다.
2) 載藥山으로 고쳐야 한다는 견해도 있으나 그렇게 되면 載藥山이 두 곳에 있는 격이 되며, 영영 山名을 없앨 경우에는 1189m의 高山이 1115m이 載藥의 屬山이 되는 것도 천년 가까이 불러온 산의 내력을 전도하는 것이 되어 바람직하지 못하다.
3) 窯址群은 天皇山에 있으니 山名을 바꾸지 않는 한 고쳐 부를려고 하는 것은 피해야 할 것이다.
○(주)손흥수.도재국 :
이유수 씨의 위 글에 있는 한글로 변환이 잘 되지 않는 "옛글 : ? 표시 등"과 각 쪽별 하단에 기재된 "주서(注書)"와 "고지도(2개 : 輿地圖와 大東輿地圖)"는 사진으로 찍은 천황산일식명설고찰을 참고하기 바란다. 그리고 확대한 輿地圖와 大東輿地圖는 아래 항목의 검토 의견에 자세하게 올려 놓았으므로 같이 참고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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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천황산일식명설고찰 검토 의견서
1. 손흥수.도재국의 머리말
가. 山名과 봉우리 명칭에 제1峰, 제2峰 표시 사유
○손흥수.도재국이 본 기고문을 적어면서 아래와 같이 수없이 언급하는 載嶽山(제1봉), 載岳山(제1봉), 獅子峰(제1봉), 天王峰(제1봉), 天皇山(제1봉), 載藥山(제1봉), 載藥山(제1봉), 載藥山(제2봉), 須彌峰(제2봉)의 명칭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제1봉과 제2봉을 다르게 불렀다. 그래서 시대별로 다르게 불러온 제1봉과 제2봉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아보기 위해서 산명 또는 봉우리 명칭의 앞 또는 뒤에 필요한 경우에 위의 괄호 안과 같이 "제1봉 또는 제2봉"으로 적는다.
○다시 말하지만 위와 같이 제1봉 또는 제2봉을 표시하는 이유는 시대에 따라, 또 그 시대의 위정자 (爲政者) 등이 재임할 때 영향을 받아 각 봉우리에 붙여진 산명에 따라 제1봉 또는 제2봉의 명칭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위의 "위정자(爲政者) 등" 이란 왕조(王朝), 靈井寺(절)의 주지, 밀양시 무안면 表忠祠(表忠祠堂)의 대표자, 밀양시 단장면 表忠祠(祠堂)의 대표자, 表忠寺(절)의 주지, 조선총독부 총독, 사당(서원)의 대표자, 유림의 간부, 해당 지역의 군수.시장.광역시장.도지사, 국가(국립지리원, 국토지리정보원) 등을 말한다.
○위와 같이 제1봉 또는 제2봉을 같이 기록하지(병기 倂記) 않으면 너무나 혼란스러워서 시대에 따라 이 두 개의 산에 대한 어느 명칭이 제1봉 또는 제2봉에 해당되는 지를 웬만한 전문가가 아니면 도저히 알 수가 없기 때문이고, 또 위와 같이 기록하지 않으면 34년째 이 2개의 산에 대해서 조사.연구하고, 산의 현장을 직접 오르내리고 있는 손흥수와 도재국 조차도 헷갈리기 때문이다. 이 모든 혼란의 책임은 산명을 이렇게 혼란스럽게 해 놓은 위에 언급한 위정자들 때문인데, 그 위정자들과 그 후대의 책임자들은 아무도 산명을 바로잡을려고 노력하지 않음에 대해 통탄을 금할 수가 없다.
○본 기고문은 독자들이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산명(山名)과 봉(峰)우리 명칭의 옆(앞 또는 뒤)의 수백 곳에 제1봉(峰) 또는 제2봉(峰)을 표시함을 양지해 주시기 바란다. 특히 표충사에서 2017년에 일주문과 산문에 제1봉이 재악산(載嶽山, 載岳山)이라고 현판을 붙여놓고, 또 표충사삼층석탑에서 1995년에 출토된 재악산영정사삼층석탑개수비(일명 改修塔記碑)를 2017.10.31 국가보물 제1944호로 지정하고 나니까 돌연 제2봉인 수미봉을 載嶽山(載岳山)이라고 주장하는 글들이 인터넷 등에서 유포되고 있다. 이는 이유수 씨가 1998년에 쓴 천황산일식명설고찰에서 제2봉이 載嶽山(載岳山)이라고 언급한 이후에 22년 동안 거의 수면 아래로 묻힌 그 주장이 갑자기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2017년에 개수탑기비의 보물 지정과 산문과 일주문에 載嶽山(載岳山) 현판을 부착하기 이전까지 표충사 등이 제1봉을 재약산(載藥山)으로 주장하던 것과는 상반된 주장이다. 문화재청이 載嶽山(제1봉 載岳山) 산명이 새겨진 개수탑기비를 국가보물로 지정하고 , 또 표충사가 산문과 일주문에 載嶽山(載岳山) 이라는 표충사의 배산(配山)의 명칭을 바로잡아 현판에 편액하였데도 제2봉이 載嶽山(載岳山)이라는 주장이 갑자기 유포되고 있는 것은 표충사가 그런 소문을 퍼뜨리고 있지 않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알 것이다. 과연 누가 이런 엉터리 소문을 유포하고 있을까!!! 삼척동자도 짐작을 할 것이다.
○산명과 봉우리 명칭을 한글과 한문(漢文)으로 같이 적거나 漢文으로만 적는 이유는 재악산(載嶽山)과 재약산(載藥山)이 한글 또는 한문(漢文), 시각적으로 발음적으로 비슷하여 많은 사람에게 혼동이 생기기 때문이다. 또 재악산(載嶽山)과 재악산(載岳山)은 같은 산명인데 한문이 다른 것은 嶽의 약자(略字)가 岳이기 때문에 嶽(岳) 자(字)가 붙은 雪嶽(岳)山.冠嶽(岳)山.母嶽(岳)山.雉嶽(岳)山.黃嶽(岳)山.楓嶽(岳)山(金剛山) 등등 악(嶽) 자(字)와 악(岳) 자(字)를 혼용해서 사용하므로써 정자(正字)와 약자(略字)를 잘 모르시는 분을 위해서 필요한 때에 괄호 안에 같이 적었음을 양지해 주시기 바란다.
나. 천황산일식명설고찰의 평가(요약)
①이유수 씨가 쓴 "천황산일식명설고찰"은 민족의 지리문헌에 기록된 載嶽山(載岳山,제1봉)의 사자봉(제1봉) 위치를 부정하고 있고, 또 독도(讀圖) 내용이 사실과는 다르게 하여 일반인이 보기에 너무나 혼란스럽기 때문에 손흥수.도재국은 여러 사람들에게 좀 더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글의 분석과 검증을 비슷하지만 중복적으로 다양하게 하는 점을 서두에 밝힘을 양지해 주시기 바란다.
②이유수 씨가 쓴 "천황산일식명설고찰"의 요지는 다음(❶~❺)과 같다.
❶50페이지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해석하면서, "이에 이 두 고을의 산을 검토하여 보면 彦陽縣西 28里의 穿火峴과 密陽府東 93里의 穿火嶺은 그 위치나 거리 등으로 보아 같은 같은 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더구나 彦陽의 穿火峴은 密陽府界라는 것을 본다면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載嶽山의 위치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彦陽과의 경계에 있는 穿火嶺이 府東 93里라 한데 대하여 오늘날의 지도상에 나란히 있는 載嶽山은 府東 41里에 지나지 않아 52里나 차이가 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본다면 이때의 載嶽山과 금일의 載藥山은 그 위치가 같지 않은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이다.
❷52페이지 : 輿地圖書를 해석하면서 "위와 같은 輿地圖書의 기록을 본다면 載嶽山은 오늘의 載藥山과는 분명 그 위치가 다름을 알 수가 있다. 또 載嶽山의 설명에 來自穿火嶺이라 하여 載嶽山은 穿火嶺으로부터 흘러온 산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이 때의 載嶽山은 密陽 쪽으로 훨씬 가까운 곳에 자리잡은 산이었으며, 載嶽山은 穿火嶺의 뻗은 한 가지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다시 한편으로는 오늘의 지도상에 있는 載藥山은 穿火峴의 한 봉우리에 지나지 않았다" 라고, 했다.
❸53페이지 : 輿地圖를 독도(讀圖)하면서 "한편으로는 密陽府圖에는 彦陽쪽에 伽智山, 石南嶺이 있고 종전의 穿火嶺 자리에는 天王山이 보인다. 이와 같은 지도를 본다면 穿火嶺이 天王山으로 바꾸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오늘의 天皇山名이 여기에서 부터 싹트기 시작한 것인데 天王山이란 이름은 다소 앞서부터 穿火嶺을 일명 그렇게 불러 온 것으로 짐작이 된다" 라고, 했다.
❹57페이지 : 天皇山과 載藥山, "이제까지 다섯까지의 자료를 가지고 천황산명을 검토하여 보았다. 이로써 얻어진 것은 천화현 또는 천화령이 일명 천왕산이라고도 부르다가 이것이 천황산으로 변한 것을 알 수 있었다" 했다
❺59페이지 : 天皇山과 재약산(載藥山), "다음으로 현행 지도에 나타나는 載藥山을 검토하여 볼까 한다. 이 재약산(載藥山)은 한마디로 말해서 이제까지 살펴본 다섯 가지 지지에 나타난 재악산(載嶽山) 바로 그것으로 50여리나 동쪽으로 이동하여 붙여진 산명인 것이다. 이를 달리 표현한다면 예로부터 불러온 천화현(穿火峴) 또는 천화령(穿火嶺). 天王山이라 하던 산괴(山塊)의 이름 없었던 산봉(山峯)에 지나지 않았던 것을 현행 지도를 만들 때 훨씬 서쪽에 있었던 天王山의 한 지맥을 따와서 붙인 이름인 것이다. 해발 1115m나 되는 높은 봉우리가 이름도 없이 天皇山의 속산(屬山)으로 로만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②평가(요약) :
❶이른바 "천황산일식명서고찰"은 객관적으로 검증받은 논문이라기 보다는 이유수 씨 자신의 아주 주관적인 이야기를 적어놓은 글에 불과하며, 이유수 씨가 스스로 제시한 동국여지승람과 여지도서. 여지도. 문헌비고. 대동지지 등을 종합하면 재악산(載嶽山=載岳山)이 제1봉인 사자봉의 위치로 명백하게 기록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부정하고 있다. 그의 글의 중요한 일부는 특이하게도 주로 “ ~ 하면 ~ 일 것이다. ~ 짐작이 간다. ~ 모르겠다.” 라는, 가정(假定)으로 시작하여 여러 고문헌의 종합적이고도 연결된 전개가 부족한 상태에서 가정(假定)으로, 또는 부정으로 마무리를 하고 있다. 본 글의 목적은 載嶽山의 위치를 규명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데, 그런 목적 달성을 위한 글의 본질과는 거리가 있는 옛글로써 지명의 유래를 전개하여 적용시키려 하는 것이 일반 대중들에게 이해하기 곤란하고, 마음에 다가오지 않는다. 산과 지맥은 태고로부터 지금까지 그 자리에 있는데, 지리문헌에 거리 등이 잘못 적혀 있는 것을 자기 주관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해석하고, 지지에 기록된 글을 또 주관적으로 해석하므로써 일반인이 수용할 수 없는 상황으로 글이 작성되어 있다.
❷그의 글은 우리 민족의 천여년(千餘年)이 넘게 사용하고 수많은 지리문헌에 증명되어 온 재악산(載嶽山=載岳山)이 제1봉이다 라는 것을 부정하고, “제2봉(수미봉)이 재악산(載嶽山=載岳山)이다” 했다
❸이는 동시에 민족의 귀중한 지리문헌에 기록된 “제1봉인 재악산(載嶽山=載岳山)이다” 라는, 것을 1998년에 한 순간에 정면으로 부정하였다.
❹참으로 안타깝다.
❺재악산(載嶽山=載岳山)을 사랑하는 손흥수. 도재국. 정대재 등은 지역민과 국민. 민족의 힘을 모아 일제가 조작한 천황산(天皇山)을 척결하고 자랑스러운 민족의 영원한 재악산(載嶽山=載岳山) 산명을 복원하는데 신명을 바칠 것이다.
2. 천황산일식명설고찰의 고문헌별(古文獻別) 검토 의견
가. 이유수 기고문 "1. 머리말"
○고을 서쪽은 태백산맥이 남쪽으로 흘러 수다한 명산들이 솟아 있다. 白雲山을 필두로 高巘山 雲門峴, 石南山, 陵洞山, 肝月山, 神佛山, 鷲棲山, 天皇山 들이 그것이고, 밀양 쪽으로는 載藥山이 있고, 또 옛산 이름으로 穿火峴이란 산도 있었다.
○이러한 산들은 다 명산 답게 신령스러운 산의 뜻들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근자에 와서 이들 가운데 天皇山은 일본색이 짙은 산이라 하고, 또 그 산을 天皇山이 아니라 載藥山이라 하는 주장이 일어나고 있다.
○이와 같은 주장은 密陽 쪽에서 싹트더니 울산에서도 이에 동조하는 분들도 있는 것 같고, 또 사회적으로 지정된 요지군(窯址群)이 그 산에 있기 때문에 자연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는 산이다.
○그러므로 옛부터 불러오던 穿火峴을 비롯하여 天王山, 天皇山, 載藥山 등은 어떠한 관계에 있으며, 과연 天皇山이란 일본 이름인가 하는 것을 잠시 살펴 보고, 가마터들의 소재지도 載藥山에 있는지도 아울러 훑어볼까 한다.
가. 이유수 기고문 "1. 머리말"에 대한 검토.의견
●1-01. 이유수 "머리말"에 대한 손흥수.도재국 의견
위에서 “고을”이란 옛 울산도호부(蔚山都護府)의 속현이었던 언양현(彦陽縣)을 가리킨다.
●1-02. 이유수 "머리말"에 대한 손흥수.도재국 의견
①이유수 씨의 이 항목의 글은 언양현(彦陽縣)을 기준으로 작성되어 있다
②옛날이나 지금도 두 고을 사이의 경게계는 태산에 의해 변함없지만 옛날의 密陽府와 彦陽縣의 경계의 산들을 잘 모르는 일반인들은 이 글을 보면 "고을의 서쪽"이라고 언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밀양 쪽으로" 라는 글이 뒤에 잇따라 나오므로 얼핏 보기에는 "백운산을 필두로" 라는 글은 언양현 중심으로 작성되었다 라고 보인다. 이처럼 짧은 문장 하나에도 선입감이 그렇게 들도록 하면서 글을 시작하면 곤란하다.
③언양현을 기준으로 보이도록 표현한 “白雲山을 필두로 高巘山 雲門峴, 石南山, 陵洞山, 肝月山, 神佛山, 鷲棲山, 天皇山 들이다” 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④표현이 적절하지 않는 이유는 백운산(白雲山)은 조선시대에 밀양도호부(密陽都護府)에 속했으며 언양현에는 경계에도 접하지 않았다. 현재에도 밀양시 산내면 삼양리에 속하는 산으로 울주군 상북면과는 경계에도 접하지 않는 밀양시 영역(領域) 안의 산이다. 이러한 산을 대부분 彦陽縣 영역의 산으로 보여지게 나열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1-03. 이유수 "머리말"에 대한 손흥수.도재국 의견
①"高巘山, 雲門峴, 石南山, 陵洞山, 肝月山, 神佛山, 鷲棲山, 天皇山에 대해서도 알아본다". 조선시대에 위의 산들은 어느 군현에 속했는지 또는 경계에 접해 있는지 다음과 같이 알아본다.
②고헌산(高獻山)은 경주부(慶州府)의 산내(山內)와 언양현(彦陽縣)의 경계에 있다.
③백운산(白雲山)은 위에서 설명한대로 전 구역이 밀양도호부(密陽都護府) 영역 안에 속한다.
④운문현(雲門峴)은 운문산(雲門山)으로 알아본다. 운문산은 청도군과 밀양도호부의 경계에 위치하며, 언양현에는 접하지 않는 산이다. 이유수 씨가 산을 소개하면서 왜 고개의 명칭인 운문현(雲門峴)으로 설명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밀양에서는 옛날부터 운문현(雲門峴)보다는 “아랫재(고개)”라는 지명으로 많이 알려져 있고 옛날에는 아랫재는 도래재(回嶺)과 함께 밀양 표충사와 청도 운문사를 연결하는 산중대로(山中大路)에 있는 큰 고개였다. 운문산은 운문사(雲門寺)의 남쪽에 있으며 배산(配山) 명칭을 산문에는 호거산(虎踞山)으로 편액했다. 운문산과 호거산은 산명은 다르나 같은 산이다.
⑤석남산(石南山)은 국립지리원에서 현재 가지산(迦智山)으로 지명고시했다. 가지산(迦智山)은 불교적인 색채를 띠는 산명이다. 가지산(迦智山)은 밀양도호부와 청도군, 언양현의 경계에 있다.
⑥능동산(陵洞山)은 하나의 독립된 산군(山群)이라기 보다는 재악산(제1봉,載嶽山) 정상에서 穿火峴으로 이어지는 능선상에 위치하며 뚜렸한 산봉우리 모양이 보이지 않고 또 인근의 산군과 뚜렸한 구분이 좀 모호하다. 손흥수와 도재국은 능동산(陵洞山)의 산명 유래를 알려고 노력하고 있으나 알 수가 없다.
⑦간월산(肝月山)은 언양현에 속한다.
⑧신불산(神佛山)은 언양현(현재는 울주군 상북면)과 양산군의 경계에 있다.
⑨취서산(鷲棲山)을 국립지리원에서 영축산(靈鷲山, 영취산)으로 변경했다. 이 산은 양산 통도사(通度寺)의 배산(背山)으로 언양현과 양산군의 경계에 있다
●1-04. 이유수 "머리말"에 대한 손흥수.도재국 의견
❶천황산(天皇山)은 민족 왕조의 지리문헌에 전혀 기록되지 않은 일제가 조작한 산명으로 없애야 할 산명이다. 또 재약산(載藥山) 또한 위작된 재약산영정사고적에서 나타난 산명으로 왕조의 지리문헌에는 등재되지 않은 산명이다. 그래서 이유수 씨가 우리 왕조의 지리문헌에 기록된 산들과 같이 이 두 산을 소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❷이유수 씨가 나열한 여러 산 중에서 天皇山의 본래 산명은 천여년 전인 신라시대부터 재악산(제1봉,載嶽山=載岳山)이다.
❸위 ❷의 재악산(제1봉,載嶽山=載岳山)은 1839년에 密陽府 무안 영취산(靈鷲山, 밀양과 창녕의 경계에 있는 산임) 동록의 백하암 있던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기허대사의 신위를 모시던 표충사(表忠祠:사당)를 영정사 주지였던 월파천유(月坡天有)가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載嶽山(載岳山) 靈井寺”로 옮기면서 산명을 載嶽山(載岳山,제1봉)에서 載藥山(제1봉)으로, 절의 명칭을 영정사(靈井寺)에서 표충사(表忠寺)로 변경했는데, 산명의 유래를 위작(僞作)된 소위 재약산영정사고적(載藥山靈井寺古蹟)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지만 載藥山(제1봉) 은 우리 왕립지리문헌에 등재되지 않은 산이다.
❹월파천유가 변경한 제1봉 載藥山을 또 일제가 식민통치를 하면서 1925년에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조선의 관리와 백성을 일제 天皇의 신하와 백성으로 만드는 정책)를 위해서 천황산(天皇山)으로 조작해 버렸다. 이렇게 되자 배산(配山)을 빼앗긴 표충사에게 조선 제3대 총독(사이토 마코토)은 제2봉인 수미봉(須彌峰)을 載藥山으로 조작하여 표충사의 배산으로 삼게 했다. 식민지 조선의 사찰 주지 임명권을 틀어쥔 총독의 명을 표충사의 대처승 주지는 거역할 수 없었다.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표충사는 제2봉을 배산으로 삼았다. 즉, 조선 총독이 하나의 산군(山群)인 재악산군(載嶽山群)의 최고봉을 천황산(天皇山,제1봉, 해발 1189.2m)으로 조작하고, 산덩어리를 둘로 나누어 새로운 산군(山群)인 재약산군(載藥山群)을 만들어 그 산군의 최고봉인 수미봉(해발 1119m)을 재약산(載藥山,제2봉)으로 조작해버렸다. 최고봉에 붙었던 載藥山(제1봉)이 결국은 일제에 의해 제2봉인 수미봉으로 밀려버렸다.
❺1961년 정부(국립지리원)은 일제가 조작한 지명을 바로잡고, 국토개발을 위한 수준점과 지명정비를 위해 전국적으로 약 20만 건의 지명을 정비하여 최종적으로는 약 15만 건을 지명고시하면서 일제가 조작한 산명을 그대로 취하면서, "산명의 유래"는 누가 보아도 맞지 않고 이해하기 힘들게 조작해 버렸다. 즉, 제1봉은 "주변에서 제일 높은 산이므로 천황산(天皇山)"이라 했다. 제2봉은 위작(僞作)된 재약산영정사고적의 일부분을 인용하여 재약산(載藥山)이라 했다. 일제 잔재지명을 정비한다면서 도로 일제식 지명을 법적으로 완전히 고착시켜 버린 비극의 사건이었다. 재약산영정사고적이 위작(僞作)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다음 호(號)에서 밝힐 것이다.
❻재악산(제1봉,載嶽山=載岳山) 산명의 비극의 연속은 계속되었다. 1998년 울산의 향토사학자 이유수 선생(이하 “이유수 씨”라 칭한다)이 한민족이라면 어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소위 말하는 천황산일식명설고찰(天皇山日式名說考察, 천황산이 일본식 명칭인가를 고찰한다)이라는 논문(以下 약칭 "글" 이라고도 칭한다)을 작성하여 천황산(天皇山)이 우리 민족의 산명이라고 주장하였다. 주된 내용은 “대한제국시대에 민족의 독립심을 고취시키기 위해서 천왕산(天王山)의 격(格)을 높혀 재악산(제1봉,載嶽山=載岳山)을 천황산(天皇山)으로 했다” 라는 것이다. 이런 내용은 대한제국의 역사기록 그 어디에도 없다. 한민족에게는 일제 천황의 수하들로부터 36년간 참혹한 식민지 강탈과 강제징용 등으로 우리 민족 수백만명이 사상(死傷)을 당하고 천문학적인 민족자산을 강탈당했다. 천황(天皇)이라는 말만 들어도 글자만 보아도 치가 떨린다. 이런 "天皇"이라는 글자를 민족의 고유한 산명인 재악산(제1봉,載嶽山=載岳山)을 대신하여 天皇山(제1봉,해발 1189.2m)으로 했다니 참으로 어이없는 주장이다. 만약에 이전부터 천황산 산명이 있었다면 척결해야 할 판국에, 일제가 조작한 이 천황산 산명으로 "우리 민족의 독립심 고취" 운운하는 것은 참으로 황당하다. 이유수 씨의 그러한 주장을 울산의 향토사학계와 관계(官界) 등의 일부 사람들이 믿고 있다.
❼2015.12.4 국토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 산하 국가지명위원회 회의에서 울산 측의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여 밀양시 지명위원회와 경상남도 지명위원회에서 인정한 제1봉의 재악산(제1봉,載嶽山=載岳山)을 천황산으로 심의하여 인정한 국가지명위원회 위원 11명의 행위를 규탄하며, 그 심의를 손흥수.도재국.정대재 등은 절대로 인정할 수가 없어 “재악산(제1봉,載嶽山=載岳山) 산명복원 범국민운동 추진위원회”를 구성하면서 재악산(제1봉,載嶽山=載岳山) 산명복원을 위해 오늘도 노력하고 있다. 2015. 12. 4 국가지명위원회에서 재악산(제1봉,載嶽山=載岳山) 산명을 인정해주신 4분의 위원님께는 깊은 감사를 드린다.
●1-05. 이유수 "머리말"에 대한 손흥수.도재국 의견
高巘山, 雲門峴, 石南山, 陵洞山, 肝月山, 神佛山, 鷲棲山, 載嶽山(天皇山) 산군은 백운산 산군에 비하면 규모가 훨씬 크고 산의 높이도 거의 다 1000m 이상이다. 현재의 행정구역 체계 하(下)에서의 백운산과 같이 있는 인근의 산의 경계와 높이 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백운산(白雲山), 891m, 경남 밀양시 산내면 삼양리에 위치함.
②석남산(石南山)→가지산(迦智山), 1240m, 경남 밀양시 산내면,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경북 청도군 운문면의 경계에 위치함.
③운문현(雲門峴)→운문산(雲門山), 1188m, 경북 청도군 운문면, 경남 밀양시 산내면의 경계에 위치함.
④천황산(제1봉,天皇山)→재악산(제1봉,載嶽山,載岳山), 1189m, 경남 밀양시 단장면,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의 경계에 위치함. 일제가 조작한 산명임, 이유수 씨가 산명유래를 대한제국 때 독립심을 높이기 위해서 천황산으로 했다 라고 또 조작함.
※정상은 밀양시 단장면 구천리 산 1-1번지에 위치함.
⑤능동산(陵洞山), 983m, 경남 밀양시 산내면,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의 경계에 위치함.
⑥재약산(제2봉,載藥山)→수미봉(제2봉,載藥山), 1119m, 경남 밀양시 단장면,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의 경계에 위치함. 일제가 1925년 하나의 산군을 두 개로 나누어 재약산(제2봉)으로 조작했음. 1998년경 이유수 씨가 載嶽山이라 조작함.
⑦신불산(神佛山), 1159m,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경남 양산시 하북면의 경계에 위치함.
⑧고헌산(高獻山), 1034m, 울산시 울주군 두서면, 상북면,경북 경주시 산내면
⑨취서산(鷲棲山)→영축산(靈鷲山.영취산), 1081m, 경남 양산시 하북면 원동면,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삼남면의 경게에 위치함.
⑨-1,간월산(看月山), 1037m,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에 위치함.
⑨-2, 따라서 “백운산(白雲山)을 필두로 高巘山 雲門峴, 石南山, 陵洞山, 肝月山, 神佛山, 鷲棲山, 天皇山 들이 있다”를
"載嶽山(제1봉,소위 천황산)을 필두로 “白雲山, 高巘山 雲門峴, 石南山, 陵洞山, 肝月山, 神佛山, 鷲棲山들이 있다”로 표현해야 적절한 표현이 된다. 손흥수.도재국이 보기로는 이유수 씨의 표현은 밀양 쪽에 명산(名山)들이 별로 없는 듯한 인상을 준다. 우리나라의 모든 왕립 지리문헌에는 載嶽山(제1봉)이 밀양도호부 영역 안의 산으로 기록하고 있다.
●1-06,이유수 "머리말"에 대한 손흥수.도재국 의견
❶이유수 씨는 또 “밀양 쪽으로는 載藥山이 있고 ~” 라고, 적었다.
❷소위 재약산(載藥山)은 재악산군(載嶽山群) 속의 제1봉인 재악산(載嶽山=載岳山)에 딸린 제2봉인 수미봉(須彌峰)을 말한다.
❸이유수 씨는 “또 옛산 이름으로 穿火峴이란 山도 있었다” 라고 적었다. 이는 참으로 잘못된 표현이다. 바로 적어려면 “옛 고개의 이름으로 穿火峴이 있었다” 라고, 해야 한다. 고개(嶺.峴.峙)를 산(山)으로 적어면 안된다.
●1-07. 이유수 "머리말"에 대한 손흥수.도재국 의견
①이유수 씨는 또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런데 근자에 와서 이들 가운데 天皇山은 일본색이 짙은 산이라 하고, 또 그 산을 天皇山(제1봉)이 아니라 載藥山(제1봉)이라 하는 주장이 일어나고 있다”
②위에서 “근자”란 이유수 씨가 이 "글"을 쓴 1998년경으로 보이며, 그 당시는 밀양시와 표충사.경상남도가 일체가 되어 제1봉인 載嶽山(소위 天皇山,제1봉)을 載藥山(제1봉)으로 변경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고 있었다. 이 당시 밀양시와 표충사.경남도는 재악산(제1봉 載嶽山=載岳山) 산명의 역사적인 수많은 증거를 정확하게 조사하지도 않은 채 재악산(제1봉 載嶽山=載岳山)과 제2봉인 수미봉(소위 載藥山)을 통털어서 재약산(제1봉,載藥山)으로 변경시키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 무렵 밀양시가 보고한 지명변경신청서에 경상남도지명위원회가 제1봉이 載藥山도 天皇山도 아니고 載嶽山(載岳山)이라고 주장하였데도 불구하고 경남도에서 최종적으로는 제1봉을 載藥山으로 심의하여 국립지리원에 보고를 하였으나 중앙지명위위원회가 결국에는 제1봉은 天皇山이고 제2봉은 載藥山이라고 울산 측의 주장을 인정하였다. 이 당시에 밀양시와 경상남도지명위원회가 제1봉과 제2봉을 통털어 載嶽山(載岳山)이다 라고, 최종적으로 심의.확정하여 국립지리원에 보고를 하였더라면 아마도 그 때에 제1봉은 載嶽山(載岳山, 獅子峰), 제2봉은 수미봉(須彌峰)으로 산명이 복원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참으로 안타깝다.
③이 당시 손흥수 씨는 밀양시에 “제1봉이 載嶽山(載岳山, 獅子峰), 제2봉은 수미봉(須彌峰)” 이다. 라고, 여러 번 주장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경남도청까지 찾아가서 같은 주장을 했으나 그곳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08. 이유수 "머리말"에 대한 손흥수.도재국 의견
①이유수 씨는 또 “이와 같은 주장은 密陽쪽에서 싹트더니 울산에서도 이에 동조하는 분들도 있는 것 같고, 또 사회적으로 지정된 요지군(窯址群)이 그 산에 있기 때문에 자연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는 산이다” 라고, 했다.
②이유수 씨는 위에서 “密陽쪽에서 싹트더니” 라는, 내용은 "1995년경 부터 제1봉과 제2봉을 통털어 載藥山으로 변경하기 위한 밀양시와 표충사. 경남도의 행정행위 시작을 말한다. 손흥수.도재국의 여러 의견에서 그러한 행정행위의 잘못을 지적하므로 참고 바란다.
③이유수 씨는 “또 사회적으로 지정된 요지군(窯址群)이 그 산에 있기 때문에 자연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는 산이다” 라고, 했다.
이 말은 載嶽山(제1봉 載岳山, 獅子峰) 정상에서 능동산으로 가는 능선 쪽의 지금의 얼음골 케이블카 상부의 동쪽 능선에 국가사적지로 지정된 요지군(窯址群)이 있는데, 이 요지군(窯址群:도자기를 굽는 가마터)의 사적 명칭이 "천황산 요지군(天皇山窯址群)"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이다.
④산명이 일제식으로 조작되어 이것을 바로잡지 못하고 방치하니까 조작된 산명에 부속된 국가사적지의 명칭마저 일제식 명칭을 사용하게 되어 손흥수.도재국은 수십년 동안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⑤이유수 씨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와 같은 주장은 密陽쪽에서 싹트더니 울산에서도 이에 동조하는 분들도 있는 것 같고 ~”
⑥사실상 이 당시에 대부분의 울산 사람들도 제1봉의 산명인 天皇山이 일제가 조작한 산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1995년경부터 밀양시와 표충사.경남도가 載藥山으로 변경하려는 계획에 많은 울산 사람들이 동조하고 있었다.
⑦제1봉을 울산 측이 天皇山이라 주장하고, 밀양시와 표충사.경남도는 載藥山이라 주장하는 가운데 손흥수와 도재국 두 사람이 載嶽山(載岳山)이다 라고, 주장하니 손흥수.도재국 단 2명의 載嶽山 산명복원운동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였고, 3파전은 두 골리앗과 다윗(◇손흥수.도재국)의 싸움 꼴이었으나, 손흥수와 도재국은 載嶽山(載岳山) 산명을 복원하기 위해서 두 개의 거대한 두 개의 세력에게 수많은 인터넷 게시판 등에 증거를 제시하고, 밀양향토사연구회에서 매년 발행하는 "밀양이야기" 책과 개인적으로 작성한 전단지 등으로 홍보하고 수십년간 만나는 사람마다, 모이는 장소마다 오늘날 까지 산명복원을 위해 34년째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⑧골리앗이란 제1봉을 天皇山으로 주장하며 제1봉의 載嶽山을 부정하는 100만 명의 시민을 가진 울산 측과 제1봉인 載嶽山을 부정하며 제1봉을 載藥山이라 주장하고 동조하는 "밀양시청 +표충사 +경남도청 +밀양시민 + 경남도민 + 전국 불교신도 + 표충사 신도 + 재악산을 등산하는 전국의 등산객 + 밀양의 각종 사회단체 등"의 수백만명의 시.도민과 국민을 말한다. 손흥수와 도재국은 34년째 이 거대한 세력과 맞서 제1봉을 載嶽山으로 복원하기 위해서 일제시대 독립운동보다 더 어렵고 힘들고 처절하게 외롭게 심혈을 기울인 결과 2017년에 표충사 일주문에 재악산 표충사라는 현판을 달게 하는 초석을 마련했고, 또 산문에 재악산문 이라는 현판을 달게 하는 초석을 마련했고, 또 재악산영정사삼층석탑개수비(일명 표충사삼층석탑개수비, 약칭 改修塔記碑 또는 改修碑)를 보물 제1944호로 지정하게 하는 초석을 마련하여 결국 표충사와 정부(문화재청)는 사실상 제1봉을 載嶽山(載岳山)으로 복원한 셈이나, 울산 측의 반대로 국토지리정보원에서 載嶽山(載岳山) 산명 복원이 되지 않고 있어 손흥수.도재국.정대재 등은 전국의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오늘도 노력하고 있다.
나. 이유수 기고문 "2. 동국여지승람의 기록"
○현전하는 地誌가운데 경상도지리지는 경상도 조(條)에서 태백산등 11개의 명산을 등재하였고, 彦陽縣 條에는 鎭山으로 獻山과 名山으로 鷲棲山 밖에는 실어놓지 않았으며, 세종실록지리지는 彦陽縣에 鷲棲山, 密陽府에 華嶽. 靈井山 등이 보일뿐 간략한 기록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東國輿地勝覽에서는 비교적 자세한 기록 방식을 취하여 여러 산들이 올라 있어 이것을 본다면 다음과 같다.
○彦陽縣, 高巘山, 在縣北十里鎭山, 鷲棲山 在縣南二十里 一名 大石山, 石南山 在縣西十二里, 穿火縣 在縣西二十八里 密陽府界, 夫老山 在縣南五里, 松洞 在縣北二里
○密陽府, 華嶽山 惑屯德山 在府北十九里 鎭山, 推火山 在府東五里, 琵瑟山 在豊角縣西北三十里, 牛齡山 在府西十里, 載嶽山 在府東四十一里, 萬魚山 載府東二十里, 慈氏山 在府東十五里, 龜齡山 在守山縣北十五里, 實惠山 載府東三十一里, 穿火峴 在府東九十三里, 胡法山 在府西北三十七里, 鈴峴 在府西十五里, 羅峴 在府西十五里, 高巖山 在府西九里, 龍頭山 在府東四里.
○이에 두 고을의 산을 검토하여 보면 彦陽縣西 28里의 穿火峴과 密陽府 東 93里의 穿火峴은 그 위치나 거리 등으로 보아 같은 산이라는 알 수 있는데, 더구나 彦陽의 穿火峴은 密陽府界라는 것을 본다면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載嶽山의 위치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彦陽과의 경계에 있는 穿火嶺이 府東 93里라 한데 대하여, 오늘날의 지도상에 나란히 있는 載嶽山은 府東41리에 지나지 않아 52리나 차이가 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본다면 이때의 載嶽山과 금일의 載藥山은 그 위치가 같지 않은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穿火峴이 가지고 있는 그 산의 뜻은 무엇인가 한번 구명하여 볼까 한다.
○穿火峴은 「◆(1)」의 한자 바꿈한 것으로 보고자 한다. ◆(2)은 「◆(3)」등으로 互轉되는 「神」의 옛말로 「王」의 古訓 「尼叱今, 寐錦 내지 上監」에 그대로 쓰였는데 그 借字로는 「解慕, 蓋馬, 乾馬, 金馬, 儉, 錦, 今, 黑, 熊」 등이었다고 하였다 [❶梁柱東 增訂 古歌硏究] .
○이와 같은 견해에 따라 「穿」은 그 뜻이 「구무」이니 그 준말 「굼」은 곧 神 또는 王의 옛말「◆(4)」으로 봄직하다. 또 「火」는 「◆(5)」으로 보고자 한다. 「◆(6)」은 광명 또는 국토의 뜻으로 古史에 「發, 伐, 弗, 沸, 不, 夫餘, 夫里, 火, 原, 平, 坪, 評, 赫, 昭, 明,」 또는 「白, 百, 伯, 貊, 泊, 朴, 瓠」등 자로 國名, 地名, 族名 人名 등에 借字됨은 주지의 사실이라 하였다 [❷梁柱東 增訂 古歌硏究] .
○이렇게 神明하다는 뜻을 가진 지명은 穿火縣의 인근에서도 더러 찾아볼 수 있다.
○즉, 肝月山 神佛山과 박어리산 火穿(登億)등이 그러하며, 배내(利川) 또한 그러한 것이다.
○배내의 「배」도 「◆(7)」이 변한 말이라 한다 [❸梁柱東 增訂 古歌硏究]
○그런데 지금과는 달리 彦陽에서 密陽으로 넘어가고, 密陽에서 彦陽으로 오는데는 모두 穿火峴을 통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彦陽邑에서 동과 남, 북으로는 大路가 열려 있었고, 서쪽으로는 小路가 穿火峴을 넘어 密陽으로 통하고 있었다. [❹輿地圖書 彦陽縣之地圖] .
○이와 같은 험준한 산길을 가고 옴에는 남달리 길손들의 마음에는 이 산을 畏敬하는 마음이 자리잡고 있었기에 「◆(8)」라는 이름이 생겨 났을 것이다.
나. 이유수 기고문 "2.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대한 검토.의견
●2-01. 이유수 “동국여지지승람의 기록”에 대한 손흥수.도재국 의견
①도재국은 20여년이 넘은 오래 전에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 분류별 >고전국역총서 > 인터넷 사이트에서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을 6개월 넘게 다운로드한 결과 그 분량이 A4용지(글자크기 12포인트)로 무려 2,300여 페이지에 해당하였다.
②이것을 도재국 본인이 운영하는 “daum cafe 밀양광장(카페지기 도재국)”에 아래과 같이 게시판을 만들어 중앙(朝庭)을 포함하여 전국 334개 군현별(郡縣別)로 그 내용을 올려놓고 사흘이 멀다 하고 내용을 살펴보고 있는지가 어언 20여년이 넘었다.
또 이것을 각 도별(道別)로 책으로 제본하여 개인적으로 소장하면서 또 사흘이 멀다 하고 살펴보고 있다.
●2-02. 이유수 “동국여지지승람의 기록”에 대한 손흥수.도재국 의견
①도재국은 감히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비록 세계기록문화유산에 지정은 되지 않았지만 그에 버금가는 세계기록문화유산이다“
- 도재국의 위와 같은 말을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다 읽어본 사람은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이 만큼 “동국여지승람과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인류문화 발전에 모범적인 지리문헌으로서의 우리 민족의 귀중한 보물이다.
②국역신증동국여지승람은 다음과 같이 편제되어 있다.
❶서 문(序文)
❷경 도(1개)
❸한성부(1개)
❹개성부(1개)
❺경기도(37개 郡縣)
❻강원도(26개 郡縣)
❼충청도(54개 郡縣)
❽전라도(58개 郡縣)
❾경상도(68개 郡縣)
❾-1.황해도(24개 郡縣)
❾-2.함경도(22개 郡縣)
❾-3.평안도(42개 郡縣)
❾-4.발문(跋文)
❾-5. 합계 334개
③민족 최고의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과 신증동국여지승람 밀양도호부 편에는 영정사의 배산(配山)을 載嶽山이라 기록하고 있다. 영정사는 지금의 표충사 이전의 명칭이다. 위 두 권의 지리문헌과 범우고 등에는 조선팔도의 수많은 절의 명단이 나오는데 그 절의 앞에 배산을 전부 기록해 놓았는데, 그 배산이 전부 그 절이 속한 산군에서 제2봉이 아닌 제1봉을 지칭한다. 이것 하나만 보더라도 이유수 씨의 천황산일식명설고찰이라는 글은 허구라는 것이 증명이 된다.
※참고 : 검은 동그라미 ❾다음에 “다시(-) 부호”를 붙여 1부터 아라비아숫자를 순차적으로 부여하는 이유는 한글문서프로그램에서 “글자겹치기”로 “검은 동그라미 숫자”를 무한대로 만들 수 있으나, 이렇게 만든 “검은동그라미 숫자”를 카페 게시판에 붙여넣기를 하면 “검은 동그라미 안의 10부터 숫자”는 변환이 안되므로, 이 기고문의 “❾의 다음 숫자”부터의 모든 숫자는 위와 같이 ❾ 다음에 “다시(-) 부호”를 붙여 아라비아숫자를 1부터 순차적으로 부여함을 양지바라며, “하얀 동그라미도 안의 숫자”도 21부터는 같은 상황임을 알린다.
●2-03. 이유수 “동국여지지승람의 기록”에 대한 손흥수.도재국 의견
①위와 같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조선 유림의 종장(宗匠)이었던 밀양 출신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성종대왕의 명(命)을 받아 최종적으로 감수(監修)를 하였으며, 손흥수와 도재국이 34년째 복원할려고 노력하는 재악산(載嶽山=載岳山)의 산명이 기록된 시문(詩文)이 두 편이나 점필재 선생의 문집(文集)에 실려 있다. 즉, 점필재 선생이 지금의 밀양 표충사 뒤편의 제일 높은 산명을 재악산(載岳山)이라 했다. 성종대왕(成宗大王)은 점필재 선생에게 “신증동국여지승람”을 감수할 때 특히 “산명(山名) 등에 대해서 잘 살펴보라” 라는, 지시까지 하였다. 선생이 태어난 고향인 밀양도호부의 영정사(靈井寺,표충사의 옛 명칭)의 배산(配山)을 유람하면서 성종대왕의 명(命)을 마음속 깊이 새기면서 민족의 보물로서 인류의 보물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감수(監修)를 철저히 했을 것이다. 라는 것은 두 말 할 필요도 없다. 사실이 이러하기 때문에 민족의 명산(名山)으로서 밀양의 명산인 선생의 고향의 여러 산 중에서 가장 큰 산인 載嶽山을 눈여겨 보고 철저히 조사했을 것이다. 이유수 씨가 당시의 점필재 선생이었다면 영정사의 배산이었던 재악산 산명을 지금 자신이 쓴 글에 오늘내리도록 문제가 될 정도로 허술하게 조사하는 않았을 것이다.
②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선팔도의 각 군현별로 등재된 산명이 무려 3,000개가 넘는다. 3,000개가 넘는 산명 중에는 이유수 씨가 주장하는 천황산(天皇山)은 단 한 개도 없다. 또 위작(僞作)된 소위 “재약산영정사고적” 속에 등장하는 재약산(載藥山)이라는 산명은 단 한 개도 등재되지 않았다.
③이유수 씨가 주장하는 그의 글인 “천황산일식명설고찰” 속에 등장한 天皇山 산명은 1925년 일제가 조작한 산명이다. 그는 1998년경에 그 산명만을 그대로 취하고, 그 산명의 유래를 "민족의 산명"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내용은 그가 아주 주관적으로 작명한 허구의 산명 유래일 따름이다.
●2-04. 이유수 “동국여지지승람의 기록”에 대한 손흥수.도재국 의견
①다시 말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선팔도의 각 군현별로 무려 3,000개가 넘는 산이 등재되어 있는데, 그 모든 산명은 "제2봉"이 아닌 "제1봉"에 붙여져 있다. 대한민국의 모든 지리학자에게 다 물어보아도 똑같은 답이 나올 것이다. 그 이유는 "제1봉"에 산명을 부여하는 것이 기본이고 철칙이기 때문이고, 사실상 한반도 전역의 어느 산군(山群)이라도 "제1봉"에 산명을 붙여 부르기 때문이다.
②사실이 이렇게 명백한데도 이유수 씨는 그의 천황산일식명설고찰(以下 필요에 따라 줄여서 “글”이라고도 칭한다)에서 우리나라의 수많은 왕립(王立) 지리문헌 등에 기록된 “제1봉의 載嶽山(載岳山)의 위치"를 지금의 "제2봉인 수미봉(須彌峰, 밀양시에서 2002년경에 載藥山이라고 커다란 돌로 만든 표지석이 있는 곳)"에 해당한다” 라고, 적어놓았다. 참으로 황당하기 이를 데 없다.
●2-05. 이유수 “동국여지지승람의 기록”에 대한 손흥수.도재국 의견
①사실이 위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이유수 씨의 글에서 동국여지승람을 언급하였기에 그의 글이 허구라는 것을 증명하지 않을 수 밖에 없어 아래와 같이 계속해서 검토.분석하여 독자들에게 밝힌다.
②이유수 씨의 글에 “현전하는 地誌가운데 경상도지리지는 경상도 조(條,目次의 項目)에서 태백산 등 11개의 명산을 등재하였고, 彦陽縣 條에는 진산(鎭山)으로 헌산(獻山, 고헌산을 말함)과 名山으로 취서산(鷲棲山, 영축산으로 변경됨) 밖에는 실어놓지 않았으며, 세종실록지리지는 彦陽縣에 鷲棲山, 密陽府에 華嶽. 靈井山 등이 보일뿐 간략한 기록으로 되어 있다” 라고 적어 놓았다.
③도재국 본인도 이러한 고문헌을 소장하고 있기에 위②의 내용은 사실이다.
④이유수 씨의 글에 “ ~ 이에 두 고을의 산을 검토하여 보면 彦陽縣西 28里의 穿火峴과 密陽府 東 93里의 穿火峴은 그 위치나 거리 등으로 보아 같은 산이라는 알 수 있는데, ~” 로 적혀 있는 내용은 손흥수.도재국도 동감이다.
⑤이유수 씨는 위 穿火峴(해발 755m 정도, 편리상 以下 해발 755m 로 표기한다)을 산(山)이라 적었는데, 山이 아니고 가지산(해발 1240m)과 재악산(제1봉,해발 1189.2m) 사이의 고개(해발 755m)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가지산과 능동산(해발 983m) 사이의 제일 낮은 부분인 고개이다.
⑥광의(廣義)의 山 개념에서 보면 고개(嶺.峴.峙)가 山으로 포함되지만 협의(狹義)의 개념에서는 고개가 결코 山으로 포함될 수가 없다. 이유수 씨가 輿地圖의 밀양부 載岳寺와 그 부근을 독도하면서 穿火峴의 위치를 輿地圖에 표기된 天王山과 동일한 위치로 주장하는데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서 천화현(穿火峴)을 산(山)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천화현은 밀양도호부와(밀양시 산내면)와 언양현(울주군 상북면)과의 경계에 위치한다.
밀양쪽에서는 천화현을 일명 천화령.석남령 등으로도 부른다.
穿火峴과 天王山은 절대로 동일 위치가 아니다. 이유수 씨는 이 위치를 주장, 고수하면서 제1봉의 載嶽山을 말살시키고, 제2봉을 載嶽山이라 주장 하는데 천부당 만부당하다.
⑦이유수 씨 글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리고 載嶽山의 위치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彦陽과의 경계에 있는 穿火嶺이 府東 93里라 한데 대하여, 오늘날의 지도상에 나란히 있는 載嶽山은 府東41里에 지나지 않아 52里나 차이가 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본다면 이때의 재악산(載嶽山)과 금일의 재약산(載藥山)은 그 위치가 같지 않은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이다.“
⑧손흥수.도재국이 확인한 결과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밀양 관아에서 穿火嶺까지는 93里 라고 적혀 있고, 밀양 관아에서 載嶽山(제1봉)까지는 41里라고 적혀 있다.
⑨밀양 관아에서 천화령까지의 경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지금의 국도 24번 노선과 거의 동일하고, 또 밀양 관아에서 載嶽山(제1봉)까지의 경로는 국도 24번을 따라 밀양시 산외면 금곡삼거리 까지는 같고, 금곡삼거리에서 부터는 지금의 표충로(表忠路)와 거의 동일한 경로로 해서 표충사를 경유해서 載嶽山(제1봉) 정상에 오른다.
⑩따라서 천화현과 載嶽山(제1봉)의 위치와 경로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이유수 씨가 “52里(93里-41里)가 차이가 난다” 라는 등식(等式,계산)은 절대로 적용할 수가 없다. 지리문헌과 고지도와 고지도의 주기에 기록된 거리를 살펴보면,
❶동국여지승람 에는 천화현 까지를 93里, 재악산까지 41리
❷여지도 주기 조(條)에는 중동면 후경(後境)까지 제일 먼 곳이 70里,
❸해동지도에는 언양계 까지가 80里 등등 같은 지점까지의 거리를 각각 다르게 적어놓았다.
이유수 씨 게산대로라면 93里에서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載嶽山 까지의 거리 41里를 공제하고 나면 52里가 차이가 나는데, 구명을 한 번 해 볼까한다.
손흥수.도재국은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한다. 밀양부 고나아에서 천화현 까지와 재악산 까지 가는 길이 다르기에 [ 93리 - 41리 = 52리 ] 등식은 절대로 성립할 수 없다. 이에 대한 경로 표시 지도와 거리 환산 지도로 이유수 씨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아래의 2장의 사진을 증거로 제시한다.
52里 만큼을 대동여지도에 표시된 載嶽山 위치(이유수 씨는 이 위치를 穿火峴에서 뻗은 하나의 가지인 支脈으로 칭함)에서 동쪽으로 산괴가 이동하여 간 곳이 수미봉(須彌峰, 밀양시에서 載藥山이라는 큰 표지석을 세워놓은 곳)의 위치라 주장한다. 이는 얼토당토 않은 주장이다.
[ 사진 30 (위) ] 다음(Daum) 지도로 천화령 까지 측도한 실질적인 거리 37.81km(95里)
[ 사진 31 (위) ] 다음(Daum) 지도로 載嶽山(제1봉) 까지 측도한 실질적인 거리 26.9km (68里)
●2-06. 이유수 “동국여지지승람의 기록”에 대한 손흥수.도재국 의견
①이유수 씨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러한 것을 본다면 이때의 載岳山(제1봉)과 금일의 載藥山(제2봉)은 그 위치가 같지 않은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이다”
②손흥수.도재국이 보면 다음과 같이 적을 수 있다
즉, “대동여지도상의 載岳山(제1봉)과 금일의 載藥山(제2봉)은 그 위치가 당연히 다르다. 인공위성지도에서 獅子峰(載岳山,제1봉)과 須彌峰(제2봉,載藥山)을 직선으로 거리를 측량해보면 대략 1,600m 이다. 당연히 차이가 나는 것을 이유수 씨가 왜 이렇게 적었는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대동여지도에 표시된 재악산은 잘못 표시되었다. 잘못 표시된 위치를 근거로 거리 계산을 하는 것은 또 다른 잘못을 발생시킨다. 잘못 표시된 것은 그 선에서 더 이상 다른 논리로 대입해서는 안된다.
●2-07. 이유수 “동국여지지승람의 기록”에 대한 손흥수.도재국 의견
①이유수 씨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러면 穿火峴이 가지고 있는 그 산의 뜻은 무엇인가 한번 구명하여 볼까 한다. ~ 「◆(8)」라는 이름이 생겨났을 것이다”
②위의 글은 이유수 씨가 한글의 옛글로써 穿火峴을 설명하고 있는데, "어문학적으로 천화현의 뜻을 규명"하는 것은 "산의 위치를 규명"하는 데는 큰 의미가 없다고 본다.
●2-08. 이유수 “동국여지지승람의 기록”에 대한 손흥수.도재국 의견
①밀양 지명의 대사전(大辭典) 격인 밀양지명고(密陽地名攷)에는 穿火山, 穿火峴, 穿火嶺, 穿火面, 穿火山內面 등 천화(穿火)에 대한 내용이 자세하게 적혀 있다. 이유수 씨의 옛글의 어문학적 분석보다 밀양지명고 등에 적힌 천화(穿火)와 관련한 내용이 穿火峴(천화고개)의 위치와 지명 유래를 이해하는데 더 유용할 것으로 본다.
②천화현(穿火縣,해발755m)은 산(山)이 아닌, 밀양부(密陽府)와 언양현(彦陽峴)사이에 있는 고개 즉, 볼록 솟은 산(山)이 아닌, 산봉우리와 산봉우리 사이의 가장 낮은 푹 꺼진 안부(鞍部)를 말하며, 이 고개를 언양현(彦陽縣) 쪽에서는 천화현(穿火縣)이라 하고, 밀양부(密陽府) 쪽에서는 석남령(石南嶺) 또는 석남고개라 하는데, 그 이유는 지금의 밀양시 산내면을 옛날에는 천화면(穿火面) 또는 천화산내면(穿火山內面)이라 했고, “고개마루의 명칭의 설정 기준”은 가는(向하는) 방향에 있는 특정한 지명을 지칭한다. 언양에서 천화산내면(穿火山內面)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므로 천화현(穿火峴) 또는 천화령(穿火嶺)이다. 또 밀양에서 언양으로 넘어가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상징물이 영남의 대찰(大刹)로서 비구니승(比丘尼僧)의 대표적인 사찰인 석남사(石南寺)이며, 그래서 석남고개 또는 석남령이라 한다.
③여기서 천화령(穿火嶺) 또는 천화현(穿火峴)은 언양현에서 밀양부(밀양도호부) 쪽으로 넘어 오면서 밀양부(密陽府) 경내(境內)의 대표적인 지명 또는 지형물을 목표물로 지칭하는 것이며, 그 특정하는 지명은 천화(穿火)이며, 이 천화(穿火)의 지명 유래가 어디서 왔는지를 규명하면, 태고적에 이 지역에 화산이 분출(穿)하여 불(火)이 하늘로 치솟았다. 즉, 화산(火山)이 뚫고 나왔다는 뜻에서 유래되었으며, 이에 기인하여 천화현(穿火峴) 또는 천화령(穿火嶺)의 지명 유래가 명백하게 확인되는데도 불구하고, 이유수 씨는 이상하게도 “옛 한글”에서 어문적(語文的)으로 찾고 있는 것은 별 효과가 없다고 본다.
④“천화(穿火)”는 밀양도호부 관내의 엄연한 옛 지명이기 때문이며, 손흥수.도재국은 이 지역의 향토사학자로서, 언양현의 옛 지명을 참고하면서, 언양현(彦陽峴)과 밀양부(密陽府) 천화산내면(穿火山內面)의 경계의 천화(穿火)의 지명 유래를 조사해 왔다.
⑤이런 것은 향토사학자로서 기본 상식인데, 누구든지 이를 모르거나, 아니면 억지로 감추고, “옛 한글의 어문학적 접근”을 거론하여 천화면(穿火面 또는 穿火嶺)을 알아보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보여진다.
●2-09. 이유수 “동국여지지승람의 기록”에 대한 손흥수.도재국 의견
[ 사진 31 (위) ] 다음(Daum) 지도로 천화령 까지 측도한 실질적인 거리 37.81km(95里)
[ 사진 32 (위) ] 다음(Daum) 지도로 載嶽山(제1봉) 까지 측도한 실질적인 거리 26.9km (68里)
① 지도(측도 구간 및 경과지)로 측도한 거리
○ 밀양부(密陽府) 관아(官衙) ~ 천화현(穿火峴) : 37.81 km (약 95里)
○ 밀양부(密陽府) 관아(官衙) ~ 재악산(제1봉,載嶽山) 정상 : 26.90km (약 68里)
○위와 같이 현대의 과학적 방법에 대략 접근하여 거리를 인공위성사진을 인터넷으로 대략 측도해 보면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천화현(穿火峴)과 재악산(제1봉,載嶽山) 정상까지의 거리”가 맞니, 안맞니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 진다.
○따라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載嶽山과 밀양부(密陽府) 관아(官衙)와의 거리가 차이가 난다고 해서 “그 산이 그 산이 아니다” 즉 “그기에 그려진 載嶽山(제1봉)이 지금의 소위 天皇山(제1봉)의 위치가 아니다” 라는 식의 접근과 단정은 매우 잘못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비교, 분석, 측도한 여러 지도가 아래 "속성"에 있다
●2-10. 이유수 “동국여지지승람의 기록”에 대한 손흥수.도재국 의견
[ ①이유수 씨 주장 ]
❶『穿火峴』은 [ 사진 30 ]의 『◆(1)』의 한자 바꿈한 것으로 보고자 한다.
❷『神明』 하다 라는, 뜻을 가진 지명이 『穿火峴』이다
❸천화현이나 천화령은 이두 독법이 사라진 금일의 이름으로 알맞지 않다.
[ ①손흥수.도재국 의견 ]
❶천화현. 천화령 이라는 지명은 우리나라에서 이곳 뿐인 고유지명이다.
❷지명은 보통명사가 아닌 특정한 지역을 나타내는 고유명사로 제정되고 쓰여지고 불려져야 한다.
❸이유수 씨 주장대로 한다면 "穿火峴"을 "神明한 고개" 즉 "神明峴"으로 제정되고 쓰여지고 불려져야 한다. 21세기에 一千餘 年 전의 신라시대 이두 독법으로 지명을 옛글로 유사한 글자로 借字하여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또 혼란을 가중시킬 것이다.
다. 이유수 기고문 "3. 여지도서의 기록"
○여지도서라 함은 영조 36년(1760)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圖와 書로 이루어진 것인데 여지승람을 보완 개수한 것이다.
○이 여지도서에 수록된 언양과 밀양의 관계되는 산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彦陽縣 穿火峴 在縣西二十八里 密陽境卽石南山西麓.
○密陽府 穿火嶺 在府九十三里 來自淸道雲門山, 載嶽山 在府東四十里 來自穿火峴.
○위와 같은 여지도서의 기록을 본다면
○載嶽山은 오늘의 載藥山과는 분명 그 위치가 다름을 알 수가 있다.
또 載嶽山의 설명에 來自穿火嶺이라 하여 載嶽山은 穿火嶺으로부터 흘러온 산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이때의 載嶽山은 밀양 쪽으로 훨씬 가까운 곳에 자리잡은 산이었으며,
載嶽山은 穿火嶺의 뻗은 한 가지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다시 한편으로는 오늘의 지도상에 있는 載藥山은 穿火峴의 한 봉우리에 지나지 않았다.
○載嶽山의 산명에 대하여 梁柱東의 그럴듯한 해설이 있어 살펴 볼 만한다.
○그는 宰嶽山(慶尙道地誌 咸昌)과 採藥山(永川南 저?역 뫼) 助藥島(조약섬) 등이 모두 小石의 뜻 「◆(9)」의 借字라 하였다 [❺梁柱東 增訂 古歌硏究]
○載嶽山도 이렇게 볼 수 있다면 어느 산과 대비하여 작은 산(小山)이라는 데서 유래된 이름인지 모르겠다.
다. 이유수 기고문 "3. 여지도서의 기록"에 대한 검토.의견
●3-01. 이유수 “輿地圖書의 기록”에 대한 손흥수.도재국 의견
①密陽府 穿火嶺 在府九十三里 來自淸道雲門山.
輿地圖書의 원문에 위①과 같이 기록되어 있는데, 穿火嶺이 淸道 雲門山에서 연결되어 있는 것은 맞으나, 그 중간에 石南山(迦智山)을 경유해서 穿火嶺에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원문을 바로 기재를 하면 다음 ②와 같다
②穿火嶺 在府九十三里 來自密陽淸道界雲門山密陽淸道彦陽界石南山.
석남산을 생략하고 천화현으로 적은 것은 육상교통이 발달하기 전에 山中大路를 통할 때 고개(穿火峴)를 중시하여 그렇게 적은 것 같으나, 지맥이 연결된 상황을 적을 때는 태산(泰山)으로서 명산(名山)인 石南山을 생략해서는 안된다.
●3-02. 이유수 “輿地圖書의 기록”에 대한 손흥수.도재국 의견
[ 사진 33 (위) ] 여지도서(輿地圖書)를 주관적으로 해석한 결과로 "제1봉 재악산(載嶽山) 말살"
①천화령 ~ 능동산 ~ 載嶽山(제1봉 사자봉, 소위 천황산) ~ 수미봉(제2봉, 소위 載藥山) 구간은 9.85km (25里)이다
②지리문헌인 “輿地圖書”를 잘못 해석하면 큰 문제가 생긴다.
○울산향토사보 52페이지 위에서 첫째(1)줄부터 열한번째(11)줄 까지에 보면
○“載嶽山 在府東四十一里 來自穿火嶺“의 문장이 있는데,
○이유수 씨는 “載嶽山은 穿火嶺으로부터 흘러온 山이다“ 라고, 하면서
○그 아래에 부연 설명으로 “載嶽山은 穿火嶺의 뻗은 한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했다.
③위 ②의 41里는 착오로 잘못 기록된 거리이다. 바로 측도하면 다음과 같이 밀양부 관아에서 제1봉인 재악산(사자봉, 현재 소위 天皇山 표지석 위치) 정상까지 68里가 된다.
[ 사진 32 (위) ] 다음(Daum) 지도로 載嶽山(제1봉) 까지 측도한 실질적인 거리 26.9km (68里) 참조.
○대동여지도에 표시된 載岳山 부근의 마을에 가서 모든 주민에게 다 물어보아도 그 위치나 주변에는 載岳山이 없다는 것이 확인된다. 즉, 載岳山 표시가 잘못되었는 증거이다. 따라서 41里는 잘못된 거리이다.
따라서 輿地圖書를 다음과 같이 해석해야 바른 해석이 된다.
❶載嶽山(대동여지도에 표시된 載岳山)은 穿火峴의 뻗은 한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 穿火峴에서 이어진 지맥(능선)에서 다시 갈라져 나온 작은 지맥(능선)의 한 위치에 載岳山이 있다. ("흘러온"을 "이어진"으로 해석해야 한다)
❷오늘날의 지도상에 있는 載藥山은 穿火峴의 한 봉우리에 지나지 않는다 → 오늘날의 지도상에 있는 載藥山(수미봉)은 穿火峴에서 이어져 온 지맥(능선)에 있다. 載藥山(수미봉)은 載嶽山(사자봉 = 제1봉)의 한 봉우리에 지나지 않는다.
●3-03. 이유수 “輿地圖書의 기록”에 대한 손흥수.도재국 의견
①양주동 씨의 글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❶載嶽山의 산명에 대하여 梁柱東의 그럴듯한 해설이 있어 살펴 볼 만한다. 그는 宰嶽山(慶尙道地誌 咸昌)과 採藥山(永川南 저?역 뫼) 助藥島(조약섬) 등이 모두 小石의 뜻 「ㅈ?악」의 借字라 하였다 [❺梁柱東 增訂 古歌硏究]
❷宰嶽山(慶尙道地誌 咸昌)과 採藥山(永川南 저?역 뫼) 助藥島(조약섬) 등이 모두 小石의 뜻을 가진 이유를 손흥수와 도재국은 이해 할 수가 없다.
❸“載嶽山도 이렇게 볼 수 있다면 어느 산과 대비하여 작은 산(小山)이라는 데서 유래된 이름인지 모르겠다.” 라는, 말도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다.
❹이유수 씨는 소석(小石)을 “작은 산”이라 했다. 그러나 조선시대 載岳山 山名의 유래를 밝혀 정립한 경일동계(敬一東溪)의 동계집(東溪集)에는 “載岳山은 백두산에 뿌리를 두고 백두대간을 따라 뻗어내려 청도.밀양. 언영. 밀양땅을 휘감는 거대한 산”으로 표현하고 있다. 조선시대 대선사(大禪師)인 경일동계(敬一東溪)의 동계집(東溪集)에는 載嶽山이 작은산(小石)에서 유래된 것이 아닌,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산인 민족의 혼이 서려 있는 백두산(白頭山)에서 유래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유수 씨의 천황산일식명설고찰이 민족의 명산인 제1봉인 載嶽山을 어떻게 말살하고 , 어떻게 폄하하는지, 또 얼마나 허구인지를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한다.
❺이유수 씨는 59페이지 맨 끝 줄에 소위 천황산(실재로는 제1봉인 載嶽山임)을 큰 산으로 묘사하고 있다(제2봉 1115m를 높은 봉우리로 보았으므로 소위 천황산은 1189.2m 더 큰 산이다). 사실은 제1봉 재악산은 영남알프스의 중심에 위치하며 제일 큰 산이다.
❻그런데 조약섬 등이 소석(小石)의 뜻 "?악"의 借字라 하면서 載嶽山도 “작은 산”이라는 데서 유래 했는지 모르겠다. 했다.
❼이 山이고 저 山이고 간에 山은 자기 위치에서 한발짝도 이동없이 서 있다. 그래서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다. 작은 천화현에서 유래했으니까 작은(小石) 데서 유래했다 라는 것을 비교하는데 이런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❽그런데 이유수 씨는 일반인이 이해할 수 없는 글(양주동씨의 글 등)을 인용해서 또 스스로도 결정을 내릴 수 없는 부정적(否定的)이고도 가정법(假定法)적인 결론은 더욱 이해하기 힘든다
라. 이유수 기고문 "4. 여지도의 山名"
○여지도는1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지도이다, 이 여지도는 書는 없고圖만 있을 뿐인데彦陽縣圖를 보면 밀양과 경계에는 단지 石南嶺만 있을 뿐 종전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한편으로 密陽府圖에는 언양쪽에 伽智山, 石南嶺이 있고, 종전의 穿火嶺 자리에는 天王山이 보인다.
○이와 같은 지도를 본다면 穿火嶺이 天王山으로 바꾸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오늘의 天皇山名이 여기에서부터 싹트기 시작한 것인데, 天王山이란 이름은 다소 앞서부터 穿火嶺을 일명 그렇게도 불러온 것으로 짐작된다.
○하늘(天)의 原語 「◆(10)」을 火로도 借字되었으니 火가 天으로 변한 것이고 또 神의 原語 「◆(11)」도 王으로 互轉함을 볼 때 天王이란 산명은 「◆(12)」을 倒寫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天王을 말하여 山神이라 하는 견해가 있다.
○우리 민간 신앙에 山神을 在天에는 天王이요, 下山에는 山王이라 한다 하여 山神이나 天王이나 山王이 모두 같은 일신동체라 하였다. [❻金鍈遂 智異山聖母에 就하여]
○그러하므로 天王山이라는 것은 天王이 하늘에서 내려 계시는 山이라 하여 天王山이라 한 것이며 옛 사람들은 하느님이 인간세계에 내려오실 때 제일 높은 산에 내려 오시는 것으로 보아 왔다.
○그러니 高山은 下界로 내려 오는 사다리라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아 왔다.
○ 肝月山의 최고봉 丹鳥峰도 언양지방 사람들은 이를 왕배이(王峰)라 하여 왔다.
○天王山이란 산명은 비단 이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智異山 산신의 所住峰을 天王峰이라 하였고, 俗離山 산신의 소주봉도 天王峰, 伽倻山 山神의 이름을 正見天王, 俗離山 神名을 大自在天王이라 한다.
○이 天王이란 말은 하늘의 임금으로 다분히 불교색을 띄고 있는 말이다.
◆輿地圖 密陽府 (이 위치에 사진이 있음)
라. 이유수 기고문 "4. 여지도의 山名"에 대한 검토.의견
[ ●4-01. 이유수 “4. 輿地圖의 山名의 기록”에 대한 손흥수.도재국 의견 ]
①이유수 씨의 글에는 “여지도는 1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지도이다, 이 여지도는 書는 없고 圖만 있을 뿐인데 彦陽縣圖를 보면 밀양과 경계에는 단지 石南嶺만 있을 뿐 종전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라는, 글은 맞다.
②이유수 씨는 “한편으로 密陽府圖에는 언양쪽에 伽智山, 石南嶺이 있고, 종전의 穿火嶺 자리에는 天王山이 보인다.” 라고 적고(읽고, 讀圖하고) 있다
③그런데 “종전의 穿火嶺 자리에는 天王山이 보인다.” 라고 말한데 대해서는 잘못 적고 있다. 왜야 하면 輿地圖의 密陽府圖에는 “穿火嶺의 자리에 天王山이 있는 것이 아니고, 天王山 자체가 載岳山이다. 이 載岳山은 지금의 제1봉인 獅子峰의 위치이다.
다시 말하면 穿火嶺의 위치는 密陽府圖上의 석남령 위치이고 이것을 더욱 명확하게 확인해주는 것이 밀양부도상의 彦陽界 라는 기록이다. 천화현을 석남령이라고도 불렀다. 같은 고개이다.
④穿火嶺이 石南嶺이고, 天王山이 載岳山이라는 더욱 명백한 증거가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 중인 원문자료, 해동지도(海東地圖)의 밀양부의 中二同面(지금의 밀양시 단장면) 영역에 기재된 載岳寺, 天王山, 中初同面(지금의 산내면) 영역의 石南嶺, 彦陽界 등을 보면 알 수가 있다. 지명 다음에 “界”를 붙이면 주로 그 위치에 고개가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지도 하나만 보더라도 이유수 씨가 천황산일식명설에서의 천황산이 민족의 산명이라는 주장이 허구라는 것이 증명된다. 이유수 씨는 동국여지승람 등에 기록된 밀양부 관아에서 천화현 까지 거리 93里를 주장하지만, 동국여지승람 등 보다 더욱 자세한 내용이 있는 것이 이 해동지도이다. 해동지도에는 밀양부 관아에서 彦陽界까지를 80里로 기록하고 있다. 93里도 확정된 숫자가 아닌 것이다. 인공위성지형도 등으로 측도하면 95리가 나온다. 여지도 주기 중동면 후경은 70리로 기록하고 있다. 제각각 다르다.
⑤80里 증거 해동지도 등 속성 :
⑥여지도(輿地圖) 밀양부(密陽府) 재악사(載岳寺) 부분 확대
[ 사진 34 (위) ] 출처: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輿地圖, 繪畵式, 密陽府, 載岳寺 영역, 편집:프린트스크린, 80% 축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