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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8. 악산(嶽山) 정대재, *세월(歲月)이 흐르면 세상이 바뀌고 인심이 달라지듯이, 유행(流行)도 바뀌기 마련이다.(옮김)

작성자도재국|작성시간20.12.08|조회수163 목록 댓글 0

★1568. 악산(嶽山) 정대재, *세월(歲月)이 흐르면 세상이 바뀌고 인심이 달라지듯이, 유행(流行)도 바뀌기 마련이다.(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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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에 있는 《嶽山 정대재 선생님》의 글을 다음과 같이 옮깁니다

●●●*세월(歲月)이 흐르면 세상이 바뀌고 인심이 달라지듯이, 유행(流行)도 바뀌기 마련이다.

그래서 시대에 따라 생겨나는 대중가요(大衆歌謠)만을 콕 찍어서 유행가(流行歌)라 부르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무상(無常)한 세월(世月) 속에서도 당시대의 유행(流行)을 타고 변하기는커녕 오히려 우리들의 간절한 그리움으로 남아서 아련히 손짓해 오는 것이 있으니 그게 바로 젊은날의 추억(追憶)이 아닌가 싶다.

누구에게나 젊은날의 추억하면 떠오르는 장소와 대상(對象)이 있기 마련이다.

먼 남쪽 밀양(密陽)의 산골 출신인 나라고 해서 수도 서울에 젊은날의 추억이 어린 곳이 있지 말라는 법이 없는 것이다.

내 대학 시절에 명동(明洞)초입의 을지로(乙至
支路) 2가에는 중소기업은행 본점이 있었고, 그곳 라운지 구내 레스트랑에는 중학교 시절에 밀양 읍내에서 나랑 자취(自炊)를 하였던 고향집 이웃의 형님이 사무장(事務長)으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당시 젊은이들의 양지(陽地)였던 명동(明洞) 일대는 우리 고향 친구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기도 하였다.

뜻이 있으면 가는 길이 있고, 발길이 잦다 보면 거기엔 필시 추억거리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특히, 시골 출신인 나에게는 서울의 손꼽히는 번화가였던 명동은 초등학교 시절인 1960년도에 서울로 수학여행(修學旅行)을 왔을 때부터 일찍이 웃지 못할 추억의 장소로 남아 있는 것이다.

지금은 예술극장(藝術劇場)으로 바뀐 시공관(市公館)이 거기에 있었고,

우리 수학여행단 스무명 전원이 남산 기슭에 있던 일본식 적산가옥(敵産家屋)인 유풍여관(裕豊旅館)에서 나와 지금의 신세계(新世界) 백화점 건물에 있던 동화(東和) 백화점을 거쳐서

네온싸인 불빛이 휘황찬란하게 번쩍이는 명동 야시장(夜市場) 구경에 나섰다가,

호기심이 유별나던 내 친구 한 녀석이 혼이 둘러빠진 나머지 한눈을 팔다가 길가의 전봇대에 부딪혀 이마에 밤톨만한 혹이 생기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진 곳이기도 하였다.

명동에 얽힌 추억담(追憶談)은 그것을
시발점으로 하여 서울로 유학을 왔던 대학시절로 이어졌던 것이다.

내 대학 시절에는 그곳 번화가엔 젊은이들의 소문난 미팅 장소인 <실버타운>이란 음악다방이 있었고, 저녁마다 <편지>라는 듀엣송으로 한창 인기를누렸던 어니언스가 고정 출연을 하던 곳이어서 지금도 명동 하면,

그 노래가 바로 어제의 일인 듯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이다.

'말 없이 건네주고 달아난 차가운 손
가슴속 울려주는
눈물 젖은 편지
하얀 종이 위에 곱게 써 내려간 너의 진실 알아내곤
나는 그만 울어 버렸네
뻥 뚫린 내 가슴에
서러움이 물 흐르면
떠나버린 너에게 사랑 노래 보낸다'

어디 그 뿐이랴.
명동에서 가까운 무교동(武橋洞)에는 주니어 미들급 세계 권투 챔피언이었던 김기수(金基洙) 선수가 운영하던 <월드컵>이란 극장식 유음식점이 있었는데, 그곳 또한 나에게는 젊은날의
아릿한 한 토막의 추억 거리가 남아있는 것이다.

그 당시 <월드컵>에는 훗날 SBS 예술단장을 역임한 김정택 악단이 진을 치고 있었는데,

하루는 중소기업은행 본점 레스뜨랑의 사무장으로 있던 고향 이웃집 형님이 한턱 내겠다고 하기에 고향 친구랑 무심코 따라갔다가,

그 당시 <마포종점>으로 인기가 높았던 듀엣 가수 은방울자매 중의 한 명인 우리 밀양 출신의 김향미(金香美)씨를 우연히 만나게 되는 바람에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칙사 대접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분은 KBS 부산방송국의 전속 가수(專屬歌手)로서 <스타 탄생>이란 공전의 히트곡을 내는 등으로 활동하다가,

박경애라는 동료가수와 함께 '은방울자매'라는 예명(藝名)으로 듀엣을 결성하여 한창 인기를 구가(謳歌)하고 있었는데,

우리의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고정 개스트로 무대 위에 나타는 사촌 누나인 그 김향미씨를 발견한 고향 친구가 반가운 마음에 "아, 우리 누나다!"하고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달려가는 바람에 일정이 바쁜 그녀가 <마포 종점>과 <쌍고동 우는 항구>를 비롯한 히트송을 열창(熱唱)한 뒤,

우리가 진을 치고 있던 2층까지 달려왔던 것이다.

그러나 연이은 공연 스케줄 때문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던 김향미 가수는 그 대신 우리 모두가 코가 비뚤어지도록 마시고도 남아서 카운터로 찾아가 현찰로 환급 받을 정도의 맥주와 각종 안주를 푸짐하게 주문해 주고는 다음 공연장(公演場)으로 황황히 떠나갔던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세상이 달라지고 유행마저 달라지기 마련이라,

일반 대중들이 즐기는 가요(歌謠)릍 유행가(流行歌)라고 부르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서울에서 대학을 나온 사람들 중에 명동과 관련된 추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디 한 둘이랴만,

내가 명동 거리에 유독 마음을 두고 있는 까닭은 사실 다른 데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첫아들인 우리 형이 세살 때 홍역을 앓다가 죽은 뒤에 누나를 낳고 상심이 컸던 우리 어머니의 간절한 불공(佛供)의 공덕(功德)으로

호국사찰(護國寺刹)인 재악산(載岳山) 표충사(表忠寺) 인근의 사하촌(寺下村)에서 태어남으로써 숙명적(宿命的)이고도 태생적(胎生的)인 불교(佛敎) 신자가 되었던 내가

천주교(天主敎) 신자로 개종(改宗)하게 만들어 준 것이 바로 지금의 가톨릭회관 자리에 있었던 명동성모병원(明洞聖母病院)과 남다른 인연(因緣)이 있었던 것이다.

대학시절에 학교 앞 이발소에서 귀청 제거 서비스를 받은 것이 화근(禍根)이 되어 얻었던 중이염(中耳炎)이 십년이 넘도록 완치(完治)와 재발(再發)을 반복하는 바람에 병균이 뇌로 침투하기 직전에 여덟 시간 동안의 오랜 수술 끝에 나를 살려낸 것이 바로 명동성모병원이었다.

그리고 은평구의 서부병원에서 우리 집사람의 목숨을 건 세번째나 되는 제왕절개 수술 끝에 손위 두 누이들에 이어서 어렵게 태어난 우리 막내아들이 폐의 미발육으로 인하여
호흡 곤란 증세를 보이면서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태로 앰블런스로 이송되었을 때, 그 핏덩이의 목숨을 살려낸 것도 또한 명동 성모병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 큰딸애가 다섯 살이 되던 해에 신부전증(腎不全症)을 앓았을 때,

재발(再發) 없이 깨끗이 치유시켜 준 곳 또한 명동 성모병원었기 때문에, 그 뒤바라지에 노심초사(勞心焦思)하였던 우리 집 사람의 마음인들 오죽했을까!

하지만 우리 식구들이 그렇게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을 두고 명동성모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마다 그곳 마당 가에 서 있던 하얀 성모 마리아 상 앞에서 수없이 절을 하며 간절하게 올렸던 자기의 기도 덕분이라며 나더러 천주교로 개종하기를 수없이 간청하는 집사람의 끊임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요지부동이었던 내가 어느 날 스스로 서초구의 잠원동 성당을 찾아가 그곳 교리 학습반에 등록함으로써 천주교로 개종을 단행하게 된 것도 1980년 5월부터 강남 시대를 연 서울성모병원 때문이었으니,

나로서도 성모병원에 대해서는 남다른 감화를 느끼게 된 결과임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명동성모병원이 강남의 반포동으로 이전하여
1,350병상의 서울성모병원 시대를 연 이후에도 끈질기게 이어진 성모병원과의 남다른 인연 때문이라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은평구 녹번동에 살 때는 명동 성모병원이 우리 식구들의 구세주가 되어 주었고,

우리 큰딸애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되던 해에 반포동으로 이사를 온 이후에도 나의 간농양 수술, 대장천공 절제 수술에다 신장결석 레이저 파쇄술이며, 전립선 비대증 절제 수술 등등ᆢ 수없이 많은 나의 위중한 수술해 준 것 또한 강남성모병원 시절을 거쳐서 1,350 병상의 서울성모병원으로 었으니,

우리 집사람의 오래고 끈질긴 설득에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던 목석 같은 나로서도 어찌 태생적인 불교 신자로 독야청청(獨也靑靑)할 수가 있었으리!

그러나 내가 태생적인 불교 신자에서 가톨릭 신자로 개종할 수 있도록 만든 주된 원인은 사실 다른 데에 있었던 것이다.

인생이란 새옹지마(塞翁之馬)란 말이 있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생 참 오래 살고 볼일이라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는 것이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집 사람의 오랜
간청과 설득에도 요지부동이었던 내 스스로 서초구 잠원동 성당으로 찾아가 천주님을 믿겠노라는 뜻을 전하고 그곳 교리 학습반에 들어가게 된 것은 명동 시절부터 반포동 시절에 이르기까지 성모병원과 뗄래야 뗄 수 없는 한결같은 인연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무슨 얘기인고 하니 성모병원과의 인연이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우리 둘째 딸이 가톨릭 의대를 나오고, 이 아이의 배필인 사위도 같은 의과대학 출신의 안과 전문의를 사위로 맞아들였기 때문이다.

성모병원에서 받았던 연이은 의료적 혜택과, 집사람의 오랜 간청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았던 나의 신앙적 고집에 결정타를 가한 것이 바로 내 딸자식 내외가 서울 가톨릭 의대를 나왔다는 점이었음은
물론이다.

세상이 바뀌고 서울의 지도마저 달라지곤 하는 무상한 세월 속에서도
연말이 가까워질 때마다 내 마음이 나 자신도 모르게 어느 새 명동 거리로 달려가게 되는 것도 성모병원과의 오랜 인연(因緣)이 처음으로 맞닿은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명동 성모병원 하면 떠오르는 또 하나의 추억 어린 딘상(斷想)이 있고, 거기에 얼킨 노래가 있다.

중이염 수술로 입원해 있던 그 시절에 나와 같은 입원실의 동료였던 어느 낙천적인 간암 환자 할아버지와 그분의 휴대용 트랜지스트 라디오에서 하루에도 몇 차례나 흘러나오곤 하던 주현미의 데뷔곡이자 당대의 최고 히트송이었던 <비 내리는 영동교>가 바로 그것이요,

무교동의 <월드컵>에서 들었던 은방울자매의 <마포 종점>과 명동의 음악다방 <실버타운>에서 들었던 어니언스의 <편지>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 걸 보면, 내 생명(生命)의 은인(恩人)이나 다름 없었던 명동(明洞) 시절과 반포동(盤浦洞) 시절의 성모병원(聖母病院)보다도

더욱 애잔한 그리움으로 죽는 날까지 내 영원한 추억으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 다름 아닌 그때 그 시절에 풍미(風靡)하였던 이들 대중가요(大衆歌謠)가 아닌지 모르겠다.

////////

●《악산 정대재 선생》의 글을 이곳에 옮겨 오면서(도재국 씀)

저희들과 《재악산(載嶽山=載岳山) 산명복원 범국민운동》을 같이 하시는 《악산(嶽山) 정대재 선생님》이

고향을 영원히 지켜주는 재악산으로부터
밀양읍내 중학시절과
부산에서의 고교시절을 거쳐

대학시절과 직장을
서울에서 시작하셔서 파란만장한 인생을 명동대성당과 인연을 갖게 되셨고

자녀분들을 모두 의료인 등으로 키우시고 외손자들도 모두 영재로 키우시면서

서울의 명문고등학교에서 평생을 수많은 후학들을 키워 나라의 수많은 동량을 만드시고

인생의 전 기간을 문학작품인 향토애가 진하게 배어 있는 작품을 집필하셨고, 또 고향 밀양의 독립운동사를 그린 대하장편소설 《떠오르는 지평선》을 심혈을 기울여 제2부까지 모두 8권의 대하소설을 집필하셔서 고향의 향토신문 등에 기고하시면서 일제에 항거한 민족정신을 키워주시고

만년에는 저희들과 고향의 산, 표충사의 배산인 재악산(載嶽山)을 복원하는데 동참하여 많은 활동을 하시는데 대해서

《재악산 산명복원운동》을 같이 하는 저희들로서는 《악산 정대재》선생님께 정말로 고맙게 생각합니다

저는 어제 저녁에도 《재악산 산명복원》을 위해서, 양산과 울산, 부산을 무대로 향토사의 넓은 무대에서 활동하시는 교육계와 불교계의 모 유명 인사와 전화로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악산 정대재 선생님의 젊은날의 사연이 담긴 그 애창곡들을 저도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명동대성당》의 육중하고도 고전적인 전경은 언제 보아도 큰 믿음과 함께 저에게 평화롭고 희망을 주는 존재로 다가옵니다

선생님의 좋은 글을 우리들의 카페의 《재악산 산명복원 게시판》에 공유합니다

대단히 고맙습니다

2020. 12. 8

虛竹 都在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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