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4. 12
삼랑진읍 용성리 청용마을 소재, 문화류씨 영사정 <1>
(영사정기 및 의비 義婢 연개비 蓮介碑 번역문, 망주석)
영사정기
영사정은 밀양시 삼랑진읍 용성리에 있는 문화유씨재실이다.
영사정은 副正 柳昌茂공의 11세손 瑩右가 여러 일족과 의논하여 성묘할 때의
재숙소로 1918년에 창건한 집이다.
이 집은 원래 부정공의 아들 찰방 光胤이 藏修하던 장소로 1637년에 창건하였는데
오래되어 무너지고 그 터에 세운 것이며 부정공 이상 6대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1973년 경내에 如在閣을 창건하였다.
부정공 유창무는 진사 凝의 손자이다.
靑春의 유복자로 명종때 생후 7일만에 어머니 趙氏의 명에 따라 義婢 蓮介의
등에 업혀 외할아버지 진사 趙連의 집인 今音勿里(지금의 용성리)로 옴으로서
밀양에 들어 왔고 무과에 급제하여 訓練副正을 지냈다.
영사정기는 1926년 입추절에 小訥 盧相稷이 지었다.
(이하는 밀양문화원에서 발간한 밀양누정록을 참조하였다)
조상의 제사를 모시는 자는 조상을 생각한 다음에라야 그 재계하여 섬기는 이를
계신 듯 뵐 수 있다.
유씨의 정자 이름은 아마 그 조상에 대한 다섯가지 생각에서 얻은 것이 있음이로다.
거처하고 웃고 말하며 뜻하고 즐기시던 다섯가지도 오히려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면
하물며 이보다 더한 것이야 생각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밀양에 있는 유씨는 훈련부정 諱 창무로부터 시작하였다.
읍지를 살피건대 훈련부정은 進士壯元 조련의 외손으로서 금음물리에 우거하였다.
대개 유씨는 崑山君 益貞을 중시조로 하여 대대로 壽洞에 살았는데 진사 諱 凝에 이르러
金陵의 活川에 터를 잡아 아들 하나를 두었으나 요절하였고 훈련부정은 곧 그 유복자였다.
태어난지 이레만에 어머니 조씨는 유씨가문의 운이 쇠하였다고 스스로 아이를 기르려
아니하고 여종 蓮介에게 명하여 금물 친정으로 아이를 보냈다.
조진사가 거두어 길러서 무과에 발탁되고 벼슬하여 훈련부정에 이르렀으며
향리에서 존중받았다.
공 또한 일찍 죽고 아들 光胤이 있었는데 문과를 거쳐 찰방을 지내고 점필재와 남명 두 분
선생의 서원을 중건할 적에 그 논의에 참여하였다.
아아 !
이 정자를 지은 것은 훈련부정공의 묘사를 위해서이다.
유씨집안사람들의 사모하는 생각이 어찌 다만 조상께서 거처하시던 모습과 생각하시던 뜻에만
그치겠는가?
어린 아이로 외가에 가서 귀하게 되었으나 장수하지 못하였음은 자손들이 모두 애통하게
생각하는 바이다.
어찌 오랜 세월 생각지 않을 수 있겠는가?
훈련부정공의 묘소는 沙器店 서편 언덕에 있고 부인 河氏의 묘소는 武屹山에 있는데
모두 정자와 거리가 멀지 않다.
先代人의 묘소는 삼랑의 통창동에 있고 찰방의 묘소는 鯉山에 있는데 모두 이 정자에서
재계하여야 합당하다.
진사공 및 조부인의 묘소는 활천에 있는데 제사는 비록 같은 날에 하지 못하지만
훈련부정공을 제사할 즈음에 그 사모하는 마음은 또한 절로 그만 둘 수 없다.
후손 善坤은 나를 따라 노닌지 오래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유씨의 조상에 대하여 상세히 아는데 선곤이 내게 기문을 요청하였다.
가만히 스스로 생각하건대 훈련부정공이 태어 나면서 유씨의 골육이 바로소 이어졌고
자신은 冠冕의 씨족이 되었고 아들이 이어서 대부가 되었으며 후예들이 詩禮의 가법을
지키고 있으니 공은 儒州에 있어 중흥의 조상이라 이를만하다.
이미 이 조상을 위하여 이 정자를 세웠으니 이 정자에 노닐면서 이 조상을 더럽히지 않을
방도를 생각한다면 조촐한 제수를 올리는 것은 오히려 나중의 절차이다.
효도하고 우애하고 삼가고 미더우며 인자한 이를 가까이 하고 글을 배우는 일이
밥 먹을 때나 쉴 때 어찌 스스로 늦출 일이겠는가 !
또한 가만히 듣건대 연개가 공에게 충직하였던 일은 자손들로서는 잊을 수 없는 일이다.
정자앞에 연개를 위하여 돌비석을 세워 지나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연개가 지극한 정성으로
주인을 섬긴 사실을 알게 한다면 공의 혼령이 필시 기뻐하시리라.
번역문 출처 : 변호사 및 향토사학자 박순문
연개비 번역문
연개의 비문은 1925년에 小訥 盧相稷 선생이 지었다.
제목과 찬자의 이름을 빼고 본문만 655자에 이르는 방대한 양이다.
실제 비문과 소눌선생문집, 柳連桓씨가 2009년에 펴낸 義婢蓮介傳을 참조하였다.
옛적 上舍 柳凝에게 계집종이 있었는데 이름이 연개다.
상사는 어리고 고아라서 부모님의 보살핌을 기대할 수 없었다.
연개는 자기 스스로 어린 주인에게 많은 자식이 있기를 기도하였다.
상사는 八거에서 김해 活川의 裵袗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다.
활천은 배씨의 거주지이다.
연개가 지성으로 10여년 상사부처를 모셨으나 靑春이라는 아들 하나만
남긴채 상사부처는 모두 사망하고 말았다.
연개는 함께 곡하고 울었다.
그리고 장례절차를 끝낸 뒤 청춘을 찰방 趙連의 딸에게 장가들게 하였다.
그러나 청춘은 몇년만에 寒疾을 만났다.
趙氏부인은 대를 이을 자식 하나 얻지 못함에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조씨부인은 예에 따른 장례절차도 잊은채 먹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았다.
연개가 강하게 진언하였으나 조씨부인은 물만 마시고는 작정한바
단지 장례만 치루기를 촉구할 뿐이었다.
연개는 조씨부인이 남편을 따라 죽을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소인이 지난달 빨래할 때 보니 부인이 임신한 사실을 알았는데
유씨 일점혈육이 거기에 있습니다.
부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유씨의 제사도 끊기고 맙니다.
그러면 나중에 죽어서 낭군의 얼굴을 어떻게 볼 것입니까?" 라고 하였다.
이에 크게 깨달은 조씨부인은 산달을 기다려 아들을 낳은뒤 7일만에
연개에게 이르기를
" 유씨에게 복이 엷으니 모자가 서로 떨어져 있으면 혹 액을 물리칠 수
있을지 모르니 너는 아기를 안고 나의 부모님에게 아이를 맡기도록 하라" 라고
말하였다.
부인의 말에 따라 연개는 밀양의 今音部曲에 이르러 찰방에게 울면서 부인의
뜻을 고하고는 돌아와서 부인을 모셨다.
그래도 아이가 걱정되어 3일에 한번은 아이에게 다녀 왔다.
하루는 가서 보니 아이가 문밖을 기어 다니고 있어 끌어 안았는데
한쪽 무릎을 자세히 살펴 보니 좋아 보이지 않았다.
연개는 무릎을 핥아 본 뒤 무언가 잘못된 것을 알고 울면서 즉시
의사에게 해부하게 하여 조그만 사기조각을 찾아 내었다.
그리고는 좋은 약을 얻어 상처난 곳에 완전하게 바른 뒤 사기조각을
씹은 후 뱉어 버렸다.
그 후 십여년이 지나 조씨부인은 세상을 버렸고 아이는 자라 이름이 昌茂인데
활쏘는 것과 말타는 것을 익혀 무과에 급제하고 벼슬에 나아가 副正에 이르렀으나
두 아들만 남긴 채 일찍 사망하고 말았다.
큰 아들 光胤(후에 문과에 급제하여 찰방을 지냈다), 둘째아들 慶胤은 아직 미관이었다.
연개는 주인 3대가 모두 일찍 죽음을 비통해 하였으나 주인집에 다다라서 울면서도
어린 두 주인을 부정공이 어렸을 때처럼 대하듯이 모셨다.
두 아이들도 연개를 어머니처럼 대하였다.
그러다가 임진란을 만났는데 두 아이는 아직 미관이었으나 연개는 이미 90여세가 되어
연개를 등에 업고 위험을 피하고자 關東까지 피란을 갔다.
난이 끝난 뒤 연개를 등에 업고 돌아 오던 중 연개가 도중에 사망하였다.
그 시체를 업고 오다가 경주의 汝甫驛에 이르렀을 때 형제의 어깨가 붓고
발이 부르터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 갈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길옆에 묻고 돌을 모아 조그만 언덕을 만들어 표시를 해 두었는데
뒤에 시체를 찾아 조씨부인의 묘아래에 이장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成泰贄가 이른바 蓮介傳 일편을 지었고
상사의 후손인 善坤이 相稷에게 전하여 보여 주며 말하기를
"아무런 보답도 못했는데 옛 동네에 돌을 세워 연개의 은혜에 보답하고 싶다.
후손을 이어주고 오늘의 우리집안이 있게 해 준 것은 오로지 연개가
순수한 마음으로 주인집을 섬긴 것에 연유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 !
魯公子의 보모가 자신의 자식으로 하여금 공자를 대신하여 죽여서
노나라 사람들이 그를 높게 기려 義保라고 말한다.
또 魏公子의 유모가 몸으로 공자를 가려 공자와 함께 죽자 秦나라 왕이 卿에
대한 예로서 장례를 치루게 하였는데 이름하여 節乳母라고 한다.
연개는 천한 노비이고 保乳에 불과하지만
유씨삼대를 충심으로 섬겼고 유씨의 대를 이어 준 유씨집안의 의로운 비이다.
성태지의 연개전에 말하기를 "유씨가 존재하는 한 연개의 이름도 존재할 것이요,
유씨가 세상에 크게 드러 나면 연개의 이름 역시 크게 드러 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연개의 족적이 300년이나 길게 드러나니 유씨는 장차 크게 나아 갈 것이다.
나는 이 비에다 아래와 같이 글을 새겨 두노라.
"상사" 는 진사를 말한다.
" 팔거"는 오늘날의 대구 북구 칠곡을 말한다.
"금음부곡"은 오늘날의 삼랑진 용성리이다
"관동"은 오늘날의 강원도이다
"여보역"은 경주 두서면 인보리에 있던 역인데 "느보"(仍甫, 仍弗)를 말한다
원래 長水道 소속이었으나 1785년에 黃山道 소속으로 바뀌었다.
"(孝)의보" 는 魯孝公 稱의 보모이며 藏氏의 어머니이다.
과거에 효공의 할아버지 武公이 그의 두 아들인 括과 戱를 데리고 周宣王에게
조회를 갔다. 선왕은 무공의 둘째 아들인 희를 노나라 태자로 삼았다.
무공이 세상을 뜨자 희가 무공의 뒤를 이어 제후가 되었다.
이 사람이 바로 懿公이다.
이 때 의공의 아들 효공은 공자 칭이라 불리웠는데 형제 가운데 나이가 가장 어렸다.
그래서 의보는 자신의 어린 아들을 데리고 궁으로 들어 와 공자 칭의 보모가 되었다.
무공의 큰 아들인 괄에게 伯御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는 노나라의 불만분자들과 함께 난을 일으켜 숙부인 의공을 살해하고 스스로
제후가 되었다. 그리고는 궁에 있던 공자 칭을 죽여 없애고자 하였다.
의보는 백어가 칭을 죽이려는 것을 알고 자기 아들에게 칭의 옷을 입혀 칭의 처소에
누워 있게 하였다. 백어는 의보의 아들이 칭인줄 알고 죽여 버렸다.
그 때 의보는 칭을 안고 궁을 빠져 니왔다.
의보는 칭의 외숙인 노나라 대부를 만나게 되었는데 대부가 "칭은 죽었소"라고 묻자
"죽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 아이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대부가 어떻게 살아 남을 수 있었느냐고 묻자 의보는 자기의 아들과 바꾸어 뉘었다고
대답하였다. 의보가 칭을 데리고 도망한지 11년이 되었다.
노나라 대부들은 공자 칭이 아직 살아 있음을 알고 주나라 천자에게 품하여 백어를
죽이고 공자 칭을 노나라 임금으로 옹립하였는데 그가 바로 효공이다.
장과부는 孝義保로 책봉되었다.
""절유모"는 진나라가 위나라를 격파하고 위왕을 죽인 뒤 여러 공자들을 살해했는데
한 사람만 잡지 못했다.
이에 공자를 잡아 오는 사람에게는 황금 천일을 내리고 숨겨 주면 일족을 멸하겠다고
포고를 내렸다.유모는 공자를 안고 大澤으로 달아 났다.
진나라 군대가 추격하여 화살을 쏘니 공자와 함께 화살에 맞아 죽었다.
진나라왕이 충의를 갸륵하게 여겨 卿禮로 장례를 치루어 주었다.
번역문 출처 : 변호사 및 향토사학자 박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