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리 송악마을
2. 제대리(堤大里)
화악산(華嶽山)에서 종남산(終南山)까지 높고 긴 능선이 이어지면서 고암산(高岩山), 우령산(牛齡山) 등의 산봉이 솟아 있는데 두 산맥이 접하고 있는 지점에 동남향으로 마을과 들이 잘 어우러저 있다. 제대리는 제대(堤大) 부락, 한골(대동:大洞) 부락, 송악(松岳) 부락 등 3동(三洞)으로 되어 있다.
고려시대에 박씨, 이조시대에 김씨, 장씨(蔣氏), 민씨 등이 존거(奠居)하기 시작하고부터 취락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일명 '못골'이라고도 한다. 옛날 진사(進士) 장건 등이 흥망제(興防堤)라는 큰 제방을 축조하여 관개 및 일상 생활의 용수로써 동민을 크게 도와 주었는데 그로 인해 못골, 또는 제대(堤大)라고 부르게 된 것이라 한다.
부내(府內)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을 뿐 아니라 일찍부터 동헌(洞憲 : 동리의 규약)을 제정하여 풍습을 바로 잡기도 한 마을이었다.
○ 제대(堤大) 본땀
일명 지동(池洞), 또는 제동(堤洞)이라고도 했는데 고암산록(高岩山麓)에 위치하고 있다. 임란(壬亂) 전에 장씨(蔣氏)가 많이 살고 있었다고 하나 난을 겪으면서 폐동(廢洞)이 되다시피 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중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백의종군(白衣從軍)으로 참전할 무렵 그의 휘하(麾下)에 입대하여 왜군(倭軍)에 항쟁(抗爭)하다가 전남 보성(全南 寶城)에서 전사(戰死)한 최씨 일가(一家)가 남부녀대(男負女戴)로 이곳 제대(堤大)에 정착(定着)하게 되었으며, 삼대(三代)로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은거하였다고 한다.
○ 제대중(堤大中)땀
이조(李朝) 세종조(世宗朝)에 장씨(蔣氏) 일가(一家)가 전거(奠居)한 후로 동세(洞勢)가 융성(隆盛)해졌으며 문무(文武) 관원(官員)들이 누대(累代)로 배출(輩出)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겪으면서 번화했던 동세(洞勢)는 간 곳 없고, 피란(避亂) 갔던 장씨(蔣氏) 후손(後孫)들은 일부는 청도군 각남(角南)으로, 일부는 부북면(府北面) 대항리(大項里)로, 또 일부는 삼랑진읍(三浪津邑) 숭진리(崇眞里)로 산거(散居)하고, 지금은 두서너 집이 남아 고토(故土)를 지키고 있다.
○ 분저(粉箸)곡
제대(堤大) 본땀과 중땀 사이로 고암산(高岩山) 계곡을 올라가면 분저골(분저곡:粉箸谷)이다. 왜 분저골이라고 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골의 막바지 주변을 노로실이라고 하는데, 옛날 사람이 살았다고 하나 지금은 골짜기만 남아 있다. 이곳 역시 왜 노로실인지는 알 길이 없다.
○ 한골 부락(대동:大洞)
이 마을은 고려(高麗) 때에 박씨(朴氏) 일족(一族)이 전거(奠居)함으로써 마을이 이루어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동구(洞口)에 비각(碑閣)과 비석(碑石)이 고색창연(古色蒼然)하게 서있고, 서쪽 산 중(中)허리에 잘 다듬어진 묘소(墓所)를 볼 수 있으니 이는 곧 유종(儒宗)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 선생(先生)의 신도(神道)이며, 그리고 선생의 부자(父子)분의 묘소(墓所)이다. 선생의 유적(遺迹)이 이곳에 있는 까닭은 선생의 출생지(出生地)이기 때문이다. 여기 선생의 일대기(一代記)를 간략(簡略)하게 소개(紹介)해 둔다.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 선생(先生)은 장인(丈人) 박홍신(朴弘信)의 도움으로 처가(妻家)인 이곳 한골에 전거(奠居)하게 되었다.1413년(세종(世宗) 13년)에 강호(江湖)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선생(先生)은 6세에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그의 총명으로 23세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29세 대과(大科)에 급제(及第)하였으며, 42세 시에 영남학파(嶺南學派)의 거유(巨儒)들이 선생(先生)의 문하(門下)에 모여들었으니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일(一)두 정여창(鄭汝昌) 등이 대표적이 문생(門生)이다.
59세에 형조판서(刑曹判書)로 승진(昇進)되었으며 문집(文集)과 국고문헌(國故文獻) 등 많은 저술(著述)을 남기고, 62세에 세상을 떠나셨다. 그의 아들 숭년(崇年)은 겨우 7세였으므로 그의 부인이 주상(主喪)이 되어, 상남면(上南面) 무량원(無量院)에 안장(安葬)하였다.
선생의 사후(死後) 6년이 지난 1498년에 간신(奸臣) 이극돈(李克墩), 유자광(柳子光) 등이 선생(先生)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대역모(大逆謀)로 몰아부쳐 선생의 묘소(墓所)를 파서 부관참시(剖棺斬屍 :죽은 자의 시신(屍身)을 토막내는 형벌(刑罰))하고 선생의 문도(門徒)들을 주륙(誅戮), 혹은 유배(流配)시켰다. 선생의 사후 15년이 지난 후에 무오(戊午), 갑자(甲子) 등 두 번의 사화에서 희생(犧牲)되었던 사류(士類)들이 거의 복작(復爵), 또는 추증(追贈)되었다. 따라서 선생의 유해(遺骸)도 수습(收拾)되어 한골 후산(後山)에 이전(移轉), 안장(安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후로 196년 후에(1689년) 영의정(領議政)으로 증직(贈職)되었으며, 다시 215년 후에는 문충공(文忠公)으로 사시(賜諡)되었음은 물론, 선생의 학문과 도덕을 숭모(崇慕)하여 예림서원(禮林書院)을 비롯한 6개 서원(書院)의 사우(祠宇)에 봉향(奉享)되고 있다. 그리고 이곳 한골 동구(洞口)에 있는 신도비(神道碑)는 1494년(성종(成宗)25년)에 조매계(曺梅溪)가 대제학(大堤學) 홍귀달(洪貴達)에게 청하여 비명(碑銘)을 새겨 마을 앞에 세웠는데, 연산군(燕山君) 무오사화(戊午史禍)에 절파(折破)되어 없어졌던 것을 그 후 중종조(中宗朝) 정묘년(丁卯年)에 구비문(舊碑文)대로 다시 세웠다고 한다. 그러다가 임진왜란(壬辰倭亂) 중에 파손(破損)되었던 것을 1635년에 다시 각자개수(刻字改竪)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 이곳에 있는 추원재(追遠齋)는 강호(江湖)의 전거지(奠居地)로 선생의 생가(生家)를 기념(紀念)하기 위한 건물이다. 강호(江湖) 선생의 외손(外孫)인 민씨(閔氏)가 이곳에 살았는데 누대(累代)로 문한(文翰)과 사환(仕宦)이 이어졌다고 한다. 그 후손(後孫)들이 상남면(上南面) 동산리(東山里), 하남면(下南面) 파서리(巴西里), 상동면(上東面) 매화리(梅花里)에 살고 있고, 이 마을에는 겨우 몇 호가 명맥(命脈)을 유지하고 있을 따름이다.
○ 날고개(일현(日峴), 또는 나현(羅峴))
오래 전부터 날고개로 불려졌는데, 날치, 또는 앞고개라고도 한다. 제대리(堤大里)에서 무안면(武安面) 마흘리(馬屹里)로 가는 길의 경계선이다.
옛날 현풍(玄豊), 창녕(昌寧), 영산(靈山) 등의 군현(郡縣)이 밀양(密陽)의 관할(管轄)에 있을 때, 사또나 이원(吏員)들이 자주 다니는 길목이 었다고 한다. 그 시절에는 관인(官人)들이 길을 가면서도 신분(身分)이 낮은 백성들 앞에 군림(君臨)했을 것이다.그래서 이 고개는 나으리들이 많이 다니는 고개라고 해서 나으리 고개라는 속명(俗名)이 생겼다고 한다. 날고개라는 이름은 나으리라는 말이 줄어서 어느새 날고개로 변해졌다고 한다.
○ 도적골
마흘리(馬屹里)로 오가는 행인(行人)을 상대로 하는 도적(盜賊)떼들이 자주 출몰(出沒)하였다고 하여 도적골이 되었으나 지금은 도적도 행인도 없이 잡목만 무성하다.
○ 삼박골
점필재(畢齋) 선생(先生) 묘소(墓所)가 있는 곳인데, 왜 삼박골이라는 이름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 선바위등
한골 뒷산의 등성이로, 이곳에 세 개의 바위가 있는데 가운데 우뚝 서 있는 바위는 사람들이 흔들면 흔들리기는 하지만 넘어지지 않고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선다고 하여 이 등성이를 선바위등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곳에도 지석묘군(支石墓群)이 있었는데(신도비(神道碑) 북방 100m 지점) 경지정리 때 묻혀지고 3기(基)만 남아 있다.
○ 풍류동(風流洞)
한골 안산(案山) 너머 흥방제(興防堤)의 못 서쪽에 위치한 것으로,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 풍류(風流)라고 말하는 것은 박준(朴浚)이라는 음악가(音樂家)가 이곳에 살았기 때문이다. 박준(朴浚)은 16세기 중엽(中葉)의 밀양(密陽) 사람으로 고려(高麗) 이래(以來)의 우리 나라 아악(雅樂), 속악(俗樂) 등 국악(國樂) 전반(全般)에 관하여 달통(達通)하고 악장가사(樂章歌詞)라는 책을 엮어낸 것으로 되어 있다. 이퇴계(李退溪) 선생(先生)의 어부사(漁父詞) 발문(跋文)에 잘 소개되어 있다. 한편 그는 글씨도 잘 쓰는 사람으로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의 부모(父母) 묘소(墓所)(칠원(漆原))에 명문(銘文)을 쓰기도 했다.
○ 송악부락(松岳部落)
원래 후사포리(後沙浦里)에 속했으나 왜정시(倭政時)에 제대리(堤大里)로 편입(編入)된 것이다. 기산(箕山), 풍정산(風亭山), 독산(獨山),풍정산(豊亭山) 등에 둘러 싸여 있으면서, 동으로 넓은 들이 있다.동명(洞名)에 송자(松字)가 있는 것은 고려(高麗)의 서울 송도(松都)의 송자(松字)를 따온 것이라 한다. 서울 송도(松都)의 송자(松字)를 따온 것에 대해서는 전술(前述)한 현포(玄圃) 부락에 상세히 기록하였으므로 생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