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연개소문(淵蓋蘇文)의 영류왕 시해사건
영류왕 25년 서부대인(西部大人 혹은 東部大人)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관리 180명과 영류왕을 시해한후 보장왕을 옹립시켰다.
연개소문은 왜 쿠데타를 일으켰을까...
통설에 의하면 강경파를 대표하는 연개소문이 영류왕의 굴욕적인 대당외교에 불만을 가져영류왕을 시해하고 정권을 잡았다고 한다.
하지만 위에서 보듯이 영류왕은 이미 전쟁준비 돌입하고 있었고, 당에 대한 정보수집에도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영류왕은 이때 까지 알려진 바 대로 온건파가 아니었단 말인가?
서병국교수는 <고구려제국사>에서 영류왕이 강경파이고 연개소문이 온건파라고 하였다.
연개소문의 온건파입장에서 영류왕의 전쟁준비가 탐탁치 않았기 때문에,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한다. 과연 영류왕과 연개소문의 외교적 입장이 그런 것 일까?
나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영류왕은 온건파도 강경파도 아니다.
한 나라를 이끌어 나가는 왕이 펼치는 외교술에 유화책만으로 기울수는 없고, 강경한 정책만으로도 흘러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외교란 어느한 방향으로만 흘러갈수 없다.
만약 극단적인 방향으로만 외교를 한다면 고구려는 영류왕이전 이미 망했을 것이다. 영류왕 이전에도 전쟁을 하다가도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것은 조공이라고 하기보단 전쟁에 대한 소기의 성과가 이루워져 더 이상의 전쟁이 필요없을 때나 적을 다독거릴 유화책으로 사신을 보내어 선물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류왕의 외교책(사신교환같은 온건책과 천리장성축조의 강경책 그리고 태자의 국학입학과 조공을 빙자한 사신파견등의 정보수집)은 군주가 지녀야 할 지극히 정상적인 정책인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연개소문도 마찬가지이다.
연개소문은 쿠데타를 일으키고 보장왕을 옹립시킨 그 이듬해(643년) 당나라에서 도교(道敎)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확실히 그 전대왕인 영류왕의 정책과는 다른 온건적인 색깔을 띤다. 나는 영류왕시해 사건 직후 연개소문의 이러한 행동이 연개소문의 영류왕시해 대한 직접적인 원인이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영류왕의 강경책이후 연개소문의 집권과 어울러 온건정책으로 변했다는 것은 연개소문과 영류왕과의 전쟁에 대한 시기적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고, 영류왕과 함께 죽인 180명의 귀족들은 연개소문의 반대파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은 단순히 영류왕과 연개소문의 입장적 차이가 아닌 귀족들간의 입장차이였을 것이고, 당과의 전쟁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영류왕의 정책에 반대하는 귀족들이 영류왕과 그를 따르는 귀족들까지 죽인 것 사건이 연개소문의 영류왕 시해사건이라로 할 수 있으며 이것은 당시가 비상시국이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영류왕과 왕을 따르는 귀족들과 연개소문을 대표로 하는 반대파 귀족들의 대립에서 파생된 것이 피비린내나는 시해사건으로 결말지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므로 연개소문의 도교수입은 고구려인에게 정신적 구심점을 새로이 만들게 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였을 것이고, 당과의 전쟁을 연장시키기 위한 정책중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사료
<三國史記>
<三國遺事>
<東國兵鑑>
<舊唐書 - 東夷列傳 高句麗傳>
<新唐書 - 東夷列傳 高句麗傳>
<資治通鑑>
○논문
<對隋唐戰爭을 통해 본 高句麗의 靺鞨支配> 동아대학교 석사논문 1993
<高句麗의 軍事力量과 對隋·唐전쟁> 조선대학교 석사논문 1996
<640년대 高句麗 對唐 戰爭의 戰爭尿素別 分析> 육군 제3사관학교 논문 46집 1998
<7世紀 高句麗의 隋·唐과의 戰爭에 관하여> 협성논총 11집 1999
<古代 北아시아 遊牧帝國과 中國王朝間의 政治關係 變化에 關한 硏究> 한국중동학회론총 20집 1999
○단행본
<한국의 명장> 육군본부 /육군본부 1978
<고구려 對 수·당 전쟁사>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91
<한민족 역대 전쟁사> 전쟁기념사업회 /행림출판 1992
<터키사> 이희수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93
<한민족 전쟁통사 1.고대편> 전쟁기념사업회 국방군사연구소 /국방군사연구소 1994
<한민족 전쟁사 총론> 김대중 /교학연구사 1997
<고구려제국사> 서병국 /혜안 1997
<중앙아시아史 槪說> 우덕찬 /부산외국어대학교출판부 1998
<고구려의 발견> 김용만 /바다출판사 1998
<주석 조선상고사> 신채호 /단재 신채호선생 기념사업회 1998
<고구려사 연구> 노태돈 /사계절 1999
<고구려사의 제문제> 손영종 /신서원 2000
<케임브리지 중국사> 패트리샤 버클리 에브리 /시공사 2001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김용만 /창해 2001
<한민족 전쟁사> 온창일 /집문당 2001
영류왕 25년 서부대인(西部大人 혹은 東部大人)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관리 180명과 영류왕을 시해한후 보장왕을 옹립시켰다.
연개소문은 왜 쿠데타를 일으켰을까...
통설에 의하면 강경파를 대표하는 연개소문이 영류왕의 굴욕적인 대당외교에 불만을 가져영류왕을 시해하고 정권을 잡았다고 한다.
하지만 위에서 보듯이 영류왕은 이미 전쟁준비 돌입하고 있었고, 당에 대한 정보수집에도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영류왕은 이때 까지 알려진 바 대로 온건파가 아니었단 말인가?
서병국교수는 <고구려제국사>에서 영류왕이 강경파이고 연개소문이 온건파라고 하였다.
연개소문의 온건파입장에서 영류왕의 전쟁준비가 탐탁치 않았기 때문에,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한다. 과연 영류왕과 연개소문의 외교적 입장이 그런 것 일까?
나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영류왕은 온건파도 강경파도 아니다.
한 나라를 이끌어 나가는 왕이 펼치는 외교술에 유화책만으로 기울수는 없고, 강경한 정책만으로도 흘러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외교란 어느한 방향으로만 흘러갈수 없다.
만약 극단적인 방향으로만 외교를 한다면 고구려는 영류왕이전 이미 망했을 것이다. 영류왕 이전에도 전쟁을 하다가도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것은 조공이라고 하기보단 전쟁에 대한 소기의 성과가 이루워져 더 이상의 전쟁이 필요없을 때나 적을 다독거릴 유화책으로 사신을 보내어 선물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류왕의 외교책(사신교환같은 온건책과 천리장성축조의 강경책 그리고 태자의 국학입학과 조공을 빙자한 사신파견등의 정보수집)은 군주가 지녀야 할 지극히 정상적인 정책인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연개소문도 마찬가지이다.
연개소문은 쿠데타를 일으키고 보장왕을 옹립시킨 그 이듬해(643년) 당나라에서 도교(道敎)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확실히 그 전대왕인 영류왕의 정책과는 다른 온건적인 색깔을 띤다. 나는 영류왕시해 사건 직후 연개소문의 이러한 행동이 연개소문의 영류왕시해 대한 직접적인 원인이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영류왕의 강경책이후 연개소문의 집권과 어울러 온건정책으로 변했다는 것은 연개소문과 영류왕과의 전쟁에 대한 시기적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고, 영류왕과 함께 죽인 180명의 귀족들은 연개소문의 반대파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은 단순히 영류왕과 연개소문의 입장적 차이가 아닌 귀족들간의 입장차이였을 것이고, 당과의 전쟁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영류왕의 정책에 반대하는 귀족들이 영류왕과 그를 따르는 귀족들까지 죽인 것 사건이 연개소문의 영류왕 시해사건이라로 할 수 있으며 이것은 당시가 비상시국이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영류왕과 왕을 따르는 귀족들과 연개소문을 대표로 하는 반대파 귀족들의 대립에서 파생된 것이 피비린내나는 시해사건으로 결말지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므로 연개소문의 도교수입은 고구려인에게 정신적 구심점을 새로이 만들게 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였을 것이고, 당과의 전쟁을 연장시키기 위한 정책중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사료
<三國史記>
<三國遺事>
<東國兵鑑>
<舊唐書 - 東夷列傳 高句麗傳>
<新唐書 - 東夷列傳 高句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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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句麗의 軍事力量과 對隋·唐전쟁> 조선대학교 석사논문 1996
<640년대 高句麗 對唐 戰爭의 戰爭尿素別 分析> 육군 제3사관학교 논문 46집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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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사> 이희수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93
<한민족 전쟁통사 1.고대편> 전쟁기념사업회 국방군사연구소 /국방군사연구소 1994
<한민족 전쟁사 총론> 김대중 /교학연구사 1997
<고구려제국사> 서병국 /혜안 1997
<중앙아시아史 槪說> 우덕찬 /부산외국어대학교출판부 1998
<고구려의 발견> 김용만 /바다출판사 1998
<주석 조선상고사> 신채호 /단재 신채호선생 기념사업회 1998
<고구려사 연구> 노태돈 /사계절 1999
<고구려사의 제문제> 손영종 /신서원 2000
<케임브리지 중국사> 패트리샤 버클리 에브리 /시공사 2001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김용만 /창해 2001
<한민족 전쟁사> 온창일 /집문당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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