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상궁을 알려면 먼저 궁궐의 용어를 같이 알아봐야한다.
기본적으로는 궁궐에는 정궁과 이궁으로 나뉘어져있다.
-정궁(正宮)의 구성: 사는 곳이 「궁(宮)」대별된 여섯 곳을 「육궁(六宮)」이라 부른다. 육궁은 정궁(임금님의 침전, 정침), 중궁(왕비의 침전, 곤전), 동궁(왕세자의 침전, 춘궁), 서궁(대비의 침전, 자전), 빈궁(왕의 후궁의 침전, 후전), 빈궁(왕세자빈의 침전)
이들이 다 갖추어져 있어야 정궁이 된다. 경복궁이 이에 해당한다.
-이궁(離宮): 육궁을 다 갖추지 않아도 무방하였다. 창덕궁의 경우는 대비나 왕대비는 창경궁으로 처소를 옮겨 편안히 살 수 있는 시설이 갖추어져 있고, 동궁도 지금의 서울 의대 자리에 따로 있어서 창덕궁에 집중되지 않아도 지장이 없었다.
헌종은 국혼의 간택에서 탈락한 김씨가 마음에 들어 왕혼(王婚)을 하고 김씨 처소로 낙선재를 마련한다. 일종의 빈궁이 따로 조성된 에인데 「궁궐지」에는 낙선재를 창경궁 소속이라고 하였다.
■임금이 어디에 머무느냐에 따라 격과 그 명칭이 달라진다. 정궁과 이궁 외에 별궁이 있고 행궁이 있다. 별궁이나 행궁은 상시 머무는 곳이 아니라 잠시 기거하는 처소이다.
■시좌소(時座所)나 시어소(時御所)는 비상시에 머무는 처소의 일종이다. 이성계 태조가 건국을 하였으면서도 아직 자기의 궁이 없자 고려왕궁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는데 상주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따로 추동에 시좌소를 짓고 거기에 머물렀었다. 선조가 임진왜란 때 의주로 파천하여 머물던 처소를 행재소(行在所)라 불렀다. 임금들이 성묘를 가거나 할 때 잠시 머무는 건물이 있는데 이를 별관이라 부른다.
충주의 「예성별관」도 그 중의 하나이다.
■임금에 등극하기 전에 궐 밖에 살던 집을 「잠저」라 하거나 본궁(本宮)이라 부른다. 태조의 「함흥본궁」도 그 중의 하나가 된다. 아주 특이한 경우지만 삼간택에 든 규수를 임시거처의 궁을 짓기도 한다. 서울의 「안동별궁」이 그에 해당한다.
그 중에서 실제 머물지는 않지만 왕실사당을 보관하는 곳이 있다.
가령 선원전(역대 국왕의 어진이 보관된 곳이다. 현재 국립민속박물관의 위치가 선원전의 위치라고 한다.)이나 종묘가 이런 사당의 역할을 맡고 있다.
그런데 종묘에서는 왕과 왕비는 봉안되지만 후궁이 낳은 케이스는 종묘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부분이 있다. 그럴 경우 생모를 왕비로 추봉하거나 하는 방식으로 종묘에 넣으려고 애를 썼다.
대표적인 예가 광해군이다.
광해군의 경우 자신을 낳아준 공빈 김씨를 종묘에 넣고 싶었고 이에 공성왕후로 추봉해서 명에 책봉을 받아내는데 성공한다.
광해군일기[중초본] 27권, 광해 2년 윤3월 16일 신유 3번째기사 1610년 명 만력(萬曆) 38년
예조의 건의로 사묘 추숭의 일을 종묘와 효경전에 같이 고하도록 하다
예조가 아뢰기를,
"공성 왕후(恭聖王后)를 추숭(追崇)하는 뜻을 먼저 별묘(別廟)와 영모전(永慕殿)에 제사를 모시고 고해야 할 듯합니다. 또 팔도에 반교(頒敎)하는 일과 진전(進箋)·진하(陳賀)의 행사가 있어야 하는데, 이는 봉안(奉安)한 뒤에 거행해야 할 듯합니다. 그 선후가 마땅한지의 여부에 대해서도 아울러 대신에게 의논하여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종묘(宗廟)와 효경전(孝敬殿)에 같이 고해야 할 듯하다."
하였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09권, 광해 8년 11월 4일 신미 1번째기사 1616년 명 만력(萬曆) 44년
공성 왕후의 면복을 청하는 주문
근래에 삼가 들은 바에 의하면, 황조(皇朝) 내번(內藩)의 숭왕(崇王)이, 세종 황제(世宗皇帝)께서 형왕(荊王)의 모비(母妃)인 수씨(壽氏)의 책명(冊命)과 관복(冠服)을 준허하여 지급한 일을 인용하여, 그의 생모를 추봉해 주기를 청하였는데, 조정에서 그의 정상을 가련하게 여기어 책명과 관복을 준허하여 주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바로 헌종 황제께서 신의 선조이신 강정왕(康靖王)의 생모에게 고명과 관복을 지급해 주셨던 것과 같은 성대한 은전입니다. 전후의 성인(聖人)이 그 법도가 같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 성조(聖朝)에서 저희 나라를 보살펴 주시는 것은 안팎의 차이를 두지 않으시어, 칙유(敕諭)를 내리실 때에 매양 ‘내복(內服)과 같이 본다.’고 하셨으며 또한 ‘짐이 바야흐로 은전을 내리어 같은 문자를 사용하는 것을 가상하게 여긴다.’고 하셨습니다. 그 돌보아주시고 덮어 감싸주시며 구제해 주시고 생성시켜 주시는 융성한 은덕이 고금에 일찍이 없었던 바이며 천하에 둘도 없는 것입니다. 신은 선조의 왕업을 이어받아 공손히 제후의 도리를 지켰으며 예물을 바치는 의례를 중국 안의 제후들보다 못하지 않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어찌 감히 스스로 성상의 교화가 미치는 전복(甸服)을 벗어나겠습니까.
이에 삼가 내번(內藩)에 견주고자 하여 형왕(荊王)과 숭왕(崇王)의 사례를 끌어다 신청하는 바이니, 정리로 보아 참으로 불쌍히 여겨 주셔야 하며 예의로 보아 참으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 성상께서 즉위하여 왕도(王道)가 치우침이 없으시고 먼 나라 가까운 나라 할 것 없이 복종하는 나라들을 모두 포용하시니, 저희 나라를 품어주심에 또한 어찌 피차의 차별을 둘 수가 있겠습니까.
신이 감히 이전에 자주 내리셨던 은총을 믿고 앞으로도 그 은총을 내려주시기를 바라고자, 번독스럽게 해드리는 죄를 피하지 아니하고 호소하는 주문(奏文)을 누차 거듭 올립니다. 삼가 바라건대 자애로우신 성상께서는 마음을 두시고 신의 간절함을 굽어 살피시어, 멀리는 헌종황제께서 이미 시행하셨던 법식을 따르고 가까이는 형왕과 숭왕에게 베푼 전례를 비추어 해부(該部)에 특별히 명하여 곧바로 신의 어미의 관복을 아울러 지급하게 하소서. 그러면 죽은 자와 산 자가 모두 감격하고 기뻐할 것이니, 성상께서 옛 법식을 따르는 도리에 길이 신용이 있게 될 것이고 신이 근본에 보답하여 멀리 추모하는 예의에도 또한 유감이 없게 될 것입니다.
〈만력 44년 11월 4일 배신(陪臣) 의정부 좌의정〉 이정귀(李廷龜)와 〈공조 판서〉 유간(柳澗) 등을 〈차임하여〉 주문(奏文)을 가지고 가서 올리게 합니다."
하였다. 【민형남(閔馨男)의 행차에 은(銀) 1만여 냥을 싸가지고 가서 고면(誥冕)을 겸하여 청하게 하였는데, 허균(許筠)이 그 절반을 도용(盜用)하였다. 예부(禮部)에서 뇌물이 적은 것을 혐의로 여겨 허락을 하지 아니했다. 이 때에 이르러 다시 1만 수천 냥을 가지고 갔는데, 모두 역관(譯官)의 무리들이 예부의 낭리(郞吏)들과 이익을 나누어 가졌다. 】
광해군일기에서 보면 관련해서 묘소에 석물도 세우고 신주도 만들고 책봉을 받아서 명나라에서 옷도 받고 기뻤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 가지 못했다. 인조반정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인조실록 1권, 인조 1년 3월 18일 무신 1번째기사 1623년 명 천계(天啓) 3년
예조가 광해군 생모의 신주·고명 등의 처분에 대해 아뢰다
예조가 아뢰기를,
"선조 대왕의 후궁 김씨 【 광해의 생모인데, 중국에 주청하여 추존하고 부묘하였다.】 의 위호(僞號)를 이미 삭제하였으니 그 신주는 의당 김가의 자손에게로 돌려보내야 하고, 고명(誥命)·면복(冕服)·책보(冊寶)·의장(儀仗) 등의 물건은 종묘에 고유한 다음 모두 내다가 불태워 없애야 할 것이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뒤에 예조가 또 아뢰기를,
"신주의 형식이 사가의 목주(木主)와 다르니 태워 없앤 뒤 개조하고, 또 성릉(成陵)의 호를 혁파하소서."
하였다.
인조실록 22권, 인조 8년 5월 21일 경자 2번째기사 1630년 명 숭정(崇禎) 3년
공빈 김씨의 묘소에 법에 어긋나게 세운 석물을 허물 것과 조맹의 무덤에 봉분할 것을 명하다
과거 선조(宣祖) 때에 공빈 김씨(恭嬪金氏)가 【 광해군의 어미이다.】 죽자 양주(楊州)에 장지를 잡았는데, 고려의 상주국 문하 시중(上柱國門下侍中) 조맹(趙孟)의 묘소가 그 곁에 있었으므로 그 부분을 허물 것을 의논하였으나 선조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광해가 왕위에 오른 뒤 공빈을 왕후로 추존하고 묘호(墓號)를 성릉(成陵)으로 올렸는데, 조맹의 묘소를 파낼 것인지에 대해 광해가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영의정 이덕형(李德馨)이 불가하다고 하였기 때문에 봉분만 헐었다. 광해가 폐위되자 김씨도 따라서 공빈으로 폐해지고 마침내 능호도 고쳐졌으나 조맹의 무덤은 여전히 봉분이나 표석도 없는 상태였다. 그의 후손 조수이(趙守彝) 등이 상소하여 봉분할 것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고 이어 공빈의 묘소에 법에 어긋나게 세운 석물들을 헐도록 명하였다.
인조대에 가서는 광해군의 노력이 허망하게 불태워버리거나 허물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비슷한 처지의 서자출신인 영조는 어땠을까?
영조: 내 어머니 숙빈의 사당과 묘를 자주 왔다갔다하는데다 숙빈의 기일은 끝내주게 챙겼지.
그랬다.
육상궁은 숙빈최씨를 모시는 사당이다.
영조실록을 보면 영조는 육상궁을 자주 오갔다. 처음 지을 당시에는 숙빈묘라고 불렸지만 영조 20년(1744) 3월에 육상묘로 바꾸었으며 그 후 다시 영조 29년(1753) 6월에 육상궁이라 개명하였다.
영조는 심지어 숙빈 기일에 제사에 참석하지 않은 이조판서를 날려버렸다.
또한 진전(선원전)에 제사를 지낸 이후에도 육상궁으로 행차하려다가 곽란기에 토를 하기도 했었다.
육상궁은 영조이후 칠궁으로 불리는데
육상궁을 비롯한 5채의 사당에 조선 역대 왕들의 친모로서 왕비에 오르지 못한 7인의 신위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1908년에는 연호궁(延祜宮), 저경궁(儲慶宮), 대빈궁(大嬪宮), 선희궁(宣禧宮), 경우궁(景祐宮)이 육상궁 경내로 옮겨왔고, 1929년에는 덕안궁(德安宮)이 이곳으로 옮겨와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淑嬪崔氏)
-추존된 왕 진종의 생모인 정빈 이씨(靖嬪李氏)
-원종의 생모인 인빈 김씨(仁嬪金氏)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禧嬪張氏)
-장조의 생모인 영빈 이씨(暎嬪李氏)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綏嬪朴氏)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귀비(純獻貴妃) 엄씨(嚴氏)
총 일곱분의 생모를 육상궁에 모시게 되어서 그렇다.
광해군이 지하에서 이 궁의 존재를 안다면 "내 모후 공빈김씨도 추가해주라."고 말했을것 같다.
현재 육상궁의 근황은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649564&ref=D
청와대 특별 관람객에게만 개방되던 서울 육상궁이 오는 6월부터 일반에 공개되는걸로 진행되고 있다.
기존에는 청와대에 특별관람을 신청하지 않은 이들은 육상궁 관람이 어려웠고 1968년 무장공비 침투사건으로 폐쇄됐다가 2001년 청와대 특별 관람객에게만 공개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