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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펌] 세종은 정말 노비 폭증의 원흉인가?

작성자화염폭탄|작성시간18.08.08|조회수159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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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의 실수로부터 배울 수 있다.” 과학철학자 칼 포퍼는 ‘추측과 논박’(2002)에서 지식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실수에 대한 두 종류의 개방성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진리로 간주되는 것이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대담한 추측에 대한 사회의 관용과, 그 추측이 다른 사람들의 논박을 넘어서지 못했을 때 스스로의 오류(실수)를 인정하는 개인의 솔직함이 그것이다. 만약 그 추측이 엄격한 비판(논박)을 극복하고 새로운 이론으로 받아들여졌을 때, “그 이론이 다른 경쟁 이론보다 우리의 문제를 보다 잘 해결할 수 있다고 논증될 때” 비로소 ‘과학’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이영훈 교수의 책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2018)를 읽으면서 칼 포퍼의 책을 다시 꺼내든 것은 ‘지식의 성장 조건’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다. 칼 포퍼는 지식의 성장을 위한 세 가지 조건으로 ①단순성 ②새로움 ③경험적 성공을 들었다. 이에 비춰볼 때 이 교수의 주장은 ①과 ②의 조건을 충족한다. 흔히 세종을 성군이라 하는데, 그는 양반 사대부들의 성군일 뿐 일반 백성들에게는 성군이 아니었다는 주장은 ②의 조건에 맞는다. 그 이유로 그가 드는 세종시대 노비의 삶의 질 악화와 세종 사후 ‘노비인구 대확장설’은 ①의 조건에 부합된다.
   
   문제는 ③의 경험적 성공, 즉 그러한 주장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느냐이다. 실록이든 호적(戶籍)이든 그의 대담한 추측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세종시대의 노비와 관련된 여러 논저를 검토해보니 이 교수의 주장은 ③의 조건에서 결정적 흠결이 있었다. 바로 그 점을 이 글에서 밝히려 한다.
   
   세종은 백성들의 성군이 아니었다는 이영훈 교수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세종이 노비의 인권과 삶의 질을 크게 악화시키는 법을 만들었고, 2)그 법으로 인해 세종시대 노비의 처지가 크게 악화되었으며, 3)세종 사후 노비 인구가 대확장되었다.
   
   과연 그게 사실일까? 1)과 관련된 첫 번째 법은 ‘주인고소금지법’, 즉 종이 주인을 고발하더라도 받아들이지 말고 즉시 목을 베도록 한다는 법이다. 이 법에 대해 이 교수는 1420년(세종2년) 9월 13일에 세종이 동의해 통과되었다고 하는데(위의 책 53쪽), 사실이 아니다. 이날 예조판서 허조는 당태종의 말을 근거로 주인고소금지법을 거론했다. 하지만 정작 세종이 받아들인 것은 부민(속관·아전·백성)이 수령(품관·수령·감사)의 죄를 고발하지 못하게 하는 법안(수령고소금지법)뿐이었다.
   
   주인고소금지법은 그로부터, 즉 수령고소금지법이 통과된 지 2년 후인 1422년 2월 3일에야 제정되었다. 입법자는 역시 허조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날의 실록 기록인데, 처음 입법이 제안되었을 때(1420년 9월) 세종은 여러 신하들에게 의논하게 했다(議之). 이 자리에서 정승인·유정현·박은 등은 그 법을 “심히 그르게 여겼다”. 그렇게 하면 “백성이 견디지 못할 것”이라는 게 그들의 반대 이유였다.
   
   그러자 허조는 당시 태상왕이던 태종에게 눈물로 호소했다. “윤허하지 않으시면 죽어도 눈을 못 감는다”면서 울먹이는 허조에게 태종이 감동되어 ‘즉시 통과시켰다(卽從之)’는 게 실록 기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영훈 교수는 “그를 둘러싼 어떠한 찬반논쟁도 없었”고, “세종은 신하들의 과격한 요구를 순순히 수용하였을 뿐”이라고 주장한다(위의 책 54쪽).
   
   다시 말해서, 양반 지배층이 자기들의 이익 내지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노비 관련 법안을 일치단결해 제정한 게 아니었다. 또한 허조의 입법 제안을 받아들인 사람은 세종이 아닌 태종이라는 게 실록 기록이다. 따라서 이 법의 책임을 묻자면 결정권을 쥐고 입법을 허락했던 태종, 즉 이영훈 교수가 ‘개혁적인 군주로서, 노비의 권리를 지키고자 노력했다’던 태종에게 지워야 하는 게 마땅하지 않은가.
   
   
   주인고소금지법은 태종의 결정
   
   이 교수는 또한 이 법이 제정된 이후 “조선의 노비는 주인의 어떠한 불법 행위나 악행에 대해 저항할 법 능력을 상실하였다”고 주장했다(위의 책 56쪽). 1422년 이후 노비는 “살아 있지만 실은 죽은 자와 마찬가지”인 ‘사회적 죽음’의 상태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상당 부분 사실일 것이다. 노비는 그 당시 주인의 재산으로 간주되어, 어떤 경우는 이 집 저 집으로 자식들을 분산시켜야만 했던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이 교수는 세종시대의 노비 상황의 열악함을 강조하기 위해 “조선 왕조는 노비를 죽인 주인에게 죄를 묻지 않았다”(위의 책 37쪽)고 주장한다. 틀린 말이다. 실록을 보면, 세종은 노비를 죽인 주인을 처형하게 했고, 그 사실을 고발하지 않은 이웃이 있으면 수령을 벌주게 했다(1440년 6월).
   
   실제로 집현전 관리 권채나 이색의 손자 이맹균 같은 명문가 출신의 관리들이 계집종을 학대하거나 살인한 아내를 대신해 파직당하거나 유배가기도 했다(1427년 9월, 1440년 6월). 자신의 여종을 임의로 죽인 안주인이 처벌받은 일(1438년 5월)도 있다. 그런데도 이 교수는 “세종에 의해 노비의 법적 권리가 박탈된 이후 노비에 대한 주인의 침탈이 맘대로 되었다. 노비를 죽여도 범죄가 되지 않았다. 노비가 노예적 상태로 떨어진 게 세종 때다”라고 말한다. 도대체 그 근거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이 교수의 사실 왜곡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세종이 1426년에 주인의 ‘노비구살(歐殺·때려죽임)금지법’을 제정하려 했으나, 변계량 등의 반대로 좌절되었다고 말했다. 호랑이 같은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혀 세종이 주저앉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1426년 윤7월 24일에 세종이 형조에 내린 왕명(傳旨)을 보면 그와 정반대다.
   
   이 왕명에서 세종은 “임금 된 자라도 (노비의 생명에 대해서) 함부로 하지 못한다. 더욱이 노비는 비록 천인이나 하늘이 낸 백성(天民) 아님이 없으니, 신하된 자로서 하늘이 낳은 백성을 부리는 것만도 만족하다고 할 것인데, 어찌 제멋대로 형벌을 행하여 죄 없는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 있단 말인가”라고 역설했다. 노비도 하늘 백성이라는 세종의 백성관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나아가 세종은 “지금부터는 (노비가) 죄가 있건 없건 간에 관청에 신고하지 않고 노비를 구타 살해한 자는 일체 법에 따라 처벌하라”고 지시했다. 호랑이 같은 신하들의 반대에 ‘주저앉거나’ ‘좌절하지’ 않고 노비구살금지법을 관철시킨 것이다.
   
   이 교수도 1998년에 쓴 글 ‘한국사에 있어서 노비제의 추이와 성격’에서 이 왕명을 언급했다. 그런데 그는 “그다지 구속력이 있었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해석했다. 하지만 ‘구속력이 없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어떤 전거도 제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세종이 노비를 정상의 인류로 간주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오로지 정상이 아닌 인류, 즉 ‘이류(異類)인 노비의 소생을 노비로 만드는 데’만 관심이 쏠려 있었다는 것이다(위의 책 63쪽). 이런 해석이 어떻게 나올 수 있는지 매우 궁금하다.
   
   세종이 노비제를 개악시켰다고 주장하면서 이 교수가 내세우는 두 번째 법은 노비종모법이다. 양인 아버지와 천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자식의 신분을 종래와 달리 어머니 쪽을 따르게 하는 법을 세종이 앞장서 입법했다는 것이다. 노비 관련 두 개의 악법, 즉 주인고소금지법과 노비종모법 중에서 이 교수가 중시하는 것은 후자(종모법)이다. 주인고소금지법은 노비의 권리에 관련된 것이지만, 그 자체로 ‘노비 폭증’의 원인은 아니다. 이영훈 교수가 주장하는 이른바 ‘노비 대폭발’의 직접적 원인이 되는 법은 후자인 종모법과 (근거 없는) 세종의 양천교혼 허용이다.


실제로 세종은 1432년 3월 15일에 부왕 태종 때 제정된 종부법 개정을 제안했다. “여자 노비가 자주 남편을 바꾸어 양민과 천민을 뒤섞기(混淆·혼효) 때문에 그 자식이 태어났을 때 어느 남편의 소생인지 애매(曖昧)하여 구분하기 힘들고(難明·난명) 자기 아비를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는 패륜”까지 발생한다는 게 세종의 상황 인식이었다. 세종은 이날 태종이 만든 종부법을 위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인륜의 바른 길(人倫之正道)을 지키는 방법에 대해 “각기 충분히 의논하여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이 지시를 들은 맹사성 등은 논의 끝에 종부법의 폐지를 주장했다. 낳은 자식의 신분을 남편 쪽에 따르게 하는 법(종부법) 때문에 여자 노비가 천인의 자식을 잉태했을 때 다시 양인 남자와 관계하여 자식을 양인으로 바꾸려 하는 폐단이 있으니, 종모법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세종은 관계되는 바가 중하니 다시 깊이 헤아려보겠다고 대답했다.
   
   이날의 종모법 논의와 관련해 이 교수는 “이 법은 원래 발의자 세종이 토로한 대로 비(婢·여종)는 성적으로 문란한 금수(禽獸)와 같아서 그 소생의 부계(父系)를 인정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고 있다(위의 책 63쪽). 그러나 세종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이 교수는 세종이 하지도 않은 말을 애매(曖昧)하게 갖다 붙이고 실록 속의 발언자를 뒤섞어(混淆·혼효) 사람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있다(難明).(‘금수’라는 표현은 세종이 아닌 맹사성의 말 속에 나온다.) 이 교수는 자기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세종이 ‘자진하여’ 이 법을 냈고, 신하들에게 “그 대책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실록을 보면, 세종은 이 제안이 나오기 8년 전부터 신하들과 여러 차례 종부법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허조를 비롯해 맹사성, 김효손 등이 종부법의 인륜파괴 문제를 제기하며 개정을 줄기차게 요구해왔기 때문이다. 세종이 종모법 요청을 거부할 수 없었던 사건들도 있었다. 그 하나는 각 고을의 창기가 양민과 천민을 번갈아 바꿔 상대하여 자식을 양민으로 만들려 하는 문제점이었다. 또 다른 예는 종모법 논의 2년 전인 1430년 10월에 있었던 ‘고미사건’이다. 여종 이고미는 천인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기 아버지의 뺨을 때리고 욕을 하는 등 패륜 행위를 했다. 한마디로 부모 자식 사이를, 부부 간의 관계를 심각하게 왜곡하는 법을 고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이 교수는 ‘노비라는 재산을 증식시키려는 양반들의 강한 요구’에 이끌려 세종이 이 법을 통과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교수의 결정적인 사실 왜곡은 그 다음, 바로 양천교혼 관련 주장에 있다. 세종이 양반들의 재산을 늘려주기 위해 종모법을 입법했고, 천인 여자와 양인 남자 사이의 혼인을 허용 내지 장려했다는 것이다. 이 교수에 따르면 세종시대에 들어 노비와 양인의 결혼을 허락하는 양천교혼법(良賤交婚法)이 통과되었고, 이로써 ‘양천교혼이 무한정 용인되었으며, 노비인구의 대확장’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실록 어디에도 세종이 양천교혼을 허용한 대목이나 법률이 없다. 반대로 종모법을 제정하면서부터 그리고 그 이후에도 여자 종과 양민의 결혼을 엄하게 금지하는 조처와 지시를 자주 내리고 있다(1432년 3월 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수는 어떤 근거 제시도 없이 “세종이 제정한 종모법에 의해 양천금혼의 빗장이 풀렸다”고 주장하고 있다(위의 책 64쪽).


노비인구 대폭발도 가설일 뿐
   
   이 교수는 왜 이처럼 양천교혼 허용 내지 권장이라는 근거 없는 주장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종모법과 양천교혼이 결합될 때 비로소 ‘15세기 노비인구 대확장’의 원인이 세종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천교혼 가설을 뒷받침할 만한 기록이 어디에도 없다. 세종시대에 제정된 종모법이라는 원인(cause)과 세종 사후 노비인구의 대확장이라는 결과(effect) 사이를 매개할 결정적 요소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세종이 15세기 노비 폭증의 원흉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노비인구 대폭발은 사실인가? 보다 정심(精審)한 연구를 해봐야 하겠지만, 지금까지 필자가 검토한 바에 따르면 이 주장 역시 빈곤한 몇몇 데이터를 토대로, 검증할 수 없는 추론과 가정의 조합으로 이뤄진 가설일 뿐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반론을 자제하려 한다. 해당 분야 전문가의 ‘사실에 의거한 바른 서술(擧事直書)’을 기다린다.
   
   “모든 논박은 위대한 성취로 간주되어야 한다.” 칼 포퍼는 추측이 없었으면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서는 인류 지식의 도약은 없었을 것이고, 엄밀한 논박이 없으면 근거 없는 주장과 거짓 이론을 판명할 길이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무성한 추측과 고집스러운 편견을, 사실의 연단(鍊鍛)을 거쳐 바른 지식으로 자리매김해주는 것이야말로 학자의 고결한 의무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영훈 교수나 또 다른 분들의 재논박을 기다린다. 필자 나름대로 실록을 토대로 논박을 해보았으나, 오류가 있을 수 있다. 무엇보다 이를 계기로 생산적 논쟁의 불모지인 우리나라 역사학계가 변화하기를 바란다. 고대사 문제나 식민지근대화 문제 등 여러 사안에 대해서 서로 다른 사료와 해석을 가지고 자기주장만 할 뿐 논박과 검증을 하면서 지식이 성장하는 과정이 없는 게 역사학계의 현주소다.
   
   “서로 논박하면서 각기 마음속에 쌓인 바를 풀어 놓으라”는 세종의 말대로, 연구자들이 한곳에 모여 충분한 시간을 갖고 토론하면 학계에 대한 불신도 해소되고, 우리의 문제를 보다 잘 해결할 수 있는 바른 지식이 쌓여갈 것이라 믿는다. 
   
   ※이 글은 박현모 교수가 최근 문화일보에 게재한 3개의 칼럼(5월 16·23·30일자)을 수정 보완하여 보내온 것입니다.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002510100008&ctcd=C01&cpage=1 



세종 논쟁 3라운드- 이영훈 교수 세종 비판에 대한 두 번째 반박


1 이영훈 교수는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2018)에서 세종을 양반들의 성군일 뿐이라고 주장했다백성들의 성군은 아니었다는 말이다그 근거로 그는 세종의 노비정책과 사대주의 외교를 들었다나는 주간조선 2510호에서 노비정책에 대한 이 교수의 사실왜곡을 지적했다이에 대해서 이 교수는 주간조선2512호를 통해 반론을 제기했다.
   
   따라서 세종의 외교정책을 살피기 전에 세종시대 노비정책에 대한 이 교수와 나의 논쟁을 짧게 요약할 필요가 있다이 교수가 세종을 16세기 노비 폭증의 주범이라고 주장하는 논리는 다음과 같다세종이 재위 초반에 만든 (노비의주인고소금지법(①)으로 인해 노비의 삶의 질이 현저히 악화되었고재위 중반에 역시 세종이 세운 노비종모법(②)과 양천교혼(良賤交婚방임정책(③)이 결합하여 노비인구가 대확장되었다(④)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에 대해서 나는 의 문제점을 두 가지 측면에서 비판했다주인고소금지법의 입법 책임자는 당시 상왕으로 정책 결정권을 쥐고 있던 태종이라는 점과이 법 제정으로 주인이 노비를 마음대로 죽여도 죄를 묻지 않았다는 주장이 잘못 되었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그런데 실록을 다시 살펴보니 입법 책임자는 태종이 아니라 세종이었다물론 즉위 초반 세종은 일체개품(一切皆稟)즉 일체의 정무를 부왕에게 품의(稟議), 즉 아뢰고 의논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허조의 입법 제안을 따른(從之)’ 것은 사실이다따라서 1420(세종29월 13일에 이 법이 통과되었다는 이 교수의 주장을 인정한다하지만 그 외 이 교수의 세종시대 노비제도 비판은 여전히 허점투성이임을 거듭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이 교수는 주인이 노비를 마음대로 죽여도 죄를 묻지 않았다고 주장했다하지만 세종은 노비를 죽인 주인을 처벌했다그 사실을 고발하지 않은 이웃이 있으면 수령을 벌주게 했으며(1434년 6), 주인이 임의대로 죽이면 처벌하는 법을 만들게 했다(1426년 윤7월 형조에 내린 전지(傳旨)). 실제로 세종은 집현전 관리 권채나 이색의 손자 이맹균 같은 명문가 출신의 관리들이 계집종을 학대하거나 살인한 사건과 연루되었을 때 파직하거나 유배 보냈다(1427년 91440년 6).
   
   이에 대해 이 교수는 주간조선의 반론 글에서 노비를 함부로 죽인 주인을 처벌한 세종의 처벌 수위가 낮았다고 주장했다해당 관료의 직첩을 회수하거나 벌금을 내게 하거나 고향으로 쫓아내는 정도가 고작이었다는 것이다그러면 조선왕조는 노비를 죽인 주인에게 죄를 묻지 않았다는 이 교수의 처음 주장(앞의 책 37)은 어떻게 된 것인가사실을 받아들여 수정해야 하지 않는가?
   
   둘째종모법 제정의 배경에 대해서도 이 교수는 사실과 무관하게 자기주장을 펼치고 있다1432(세종143월 15일 세종은 태종 때 제정된 종부법으로 인해 부부 사이는 물론이고 부모 관계를 심각하게 왜곡하는 현상을 지적했다낳은 자식의 신분을 남편 쪽에 따르게 하는 법(종부법때문에 여자 노비가 천인의 자식을 잉태했을 때 다시 양인 남자와 관계하여 자식을 양인으로 바꾸려 하는 폐단이 그것이다.
   
   그 폐단을 고치기 위해 종부법을 개정하자는 신하들의 요청은 이미 8년 전부터 계속 있었다세종이 주도적으로 발의한 게 아니라는 얘기다특히 이고미사건에서 보듯이 종부법은 이미 인륜질서를 파괴하는 악법적 요소가 있었다여종 이고미는 천인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기 아버지의 뺨을 때리고 욕을 하는 등 패륜 행위를 저질렀다대책 마련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교수는 이 법은 원래 발의자 세종이 토로한 대로 비(·여종)는 성적으로 문란한 금수(禽獸)와 같아서 그 소생의 부계(父系)를 인정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면서(앞의 책 63), 성도덕과 고정관념의 문제로 몰아갔다그러나 거듭 확인해봤지만 세종은 그 말을 한 적이 없다.(금수라는 표현은 세종이 아닌 맹사성의 말 속에 나온다.) 그럼에도 이 교수는 세종이 하지도 않은 말을 애매하게 갖다붙이고 실록 속의 발언자를 뒤섞어 사람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있다이러한 반론에 대해서 이 교수께서 왜 해명을 안 하는지 모르겠다.
   
   셋째양천교혼 관련 주장의 허구이다세종이 양반들의 재산을 늘려주기 위해 종모법을 입법했고천인 여자와 양인 남자 사이의 혼인을 허용 내지 장려했다는 게 이 교수의 주장이다그런데 실록 어디에도 세종이 양천교혼을 허용한 대목이나 법률이 없다반대로 종모법을 제정하면서부터그리고 그 이후에도 여자 종과 양민의 결혼을 엄하게 금지하는 조처와 지시를 자주 내리고 있다(1432년 3월 등). (이 교수는 양반 재산 증식과 관련해 자신의 책 어디에 그런 대목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기억이 안 나시면 자신의 인터넷 강의 조선왕조시대의 양반과 노비 세종대왕의 종천법(2015년 9월 17)을 다시 살펴보시기 바란다.)
   
   이 교수는 양천교혼 기록이 어디에도 없다는 나의 지적에 대해 주간조선 반론 글에서 양인과 비의 소생을 비 주인의 재산으로 삼게 했으니 양천교혼을 유인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고 주장했다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 교수의 해석일 뿐이다양천교혼을 금지하는 국법을 어겨가면서 천인 여자와 양인 남자가 혼인했다는 사료를 제시할 때만 그 해석이 설득력을 가질 것임은 실증주의자인 이 교수께서 훨씬 잘 알고 계실 터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교수는 세종시대에 제정된 종모법이라는 원인(cause)과 세종 사후 노비인구의 대확장이라는 결과(effect) 사이를 매개할 결정적 요소즉 양천교혼을 사실로써 증명하지 못했다그런데도 세종이 15세기 노비 폭증의 원흉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이에 대한 설득력 있는 답변을 듣고 싶다.
   
   
   2 이영훈 교수는 세종을 사대주의 국가체제를 정비한 군주로 비판했다조선왕조를 제후국으로 자리매김하여 태종 때까지 지속되던 하늘 제사(天祭)를 폐지하고출정의(出征儀)를 거행하지 않는가 하면주자가례에 따라 부왕 사망 시 3년상을 국가의례로 정립했다는 것이다처녀와 해청(海靑)을 지성으로 바치는 등 황제를 향한 세종의 성심은” 그치지 않았다고 비꼬아 말했다(앞의 책 156~166그 완벽한 사대의 예학이여).
   
   명나라 황제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안간힘을 기울였다는 이 교수의 언급은 솔직히 말해 논박할 가치조차 없다그런 성심을 통해 세종이 얻고자 한 게 무엇이었으며실제 그 결과가 어땠는지를 확인하는 것만으로 세종을 사대주의자로 낙인찍으려는 그의 억지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금방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는 세종을 사대주의자가 아니라 사대전략가라 생각한다큰 나라의 것이라면 맹목적으로 따르고 숭배하는 대외의존적 태도를 가진 자를 사대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세종은 이와 달리 국가이익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세우고그 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방책으로 지성사대를 했다가령 이 교수가 세종을 비판하기 위해 언급한 해청의 사례를 들어보자이 교수는 해청즉 해동청이라 불리는 우리나라에서 산출되던 사냥용 매의 진헌을 대명(大明사대에서 조선왕의 성심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보았다그는 1428(세종10)의 에피소드해청 3()을 이미 바친 뒤에 다시 2연이 잡혔을 때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미 황제를 위하여 잡았으니 즉시 바치지 않으면 내 마음이 편치 않다면서 나머지도 마저 바치게 한 것을 들어 세종의 지성사대를 이야기했다(앞의 책 159).
   
   그런데 이 교수는 중요한 것을 빠뜨리고 있다왜 세종이 온갖 방법을 다해서라도 황제의 마음을 사려 했는가 하는 점이다1432년 11월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이번에는 추가로 잡은 해청을 숨긴 신하의 처리 문제가 회의 안건이었다그 문제로 명나라 사신이 불쾌해하며 돌아갔기 때문이다이때 세종이 강조한 것은 의심의 실마리(疑端)였다고려 때 간혹 중국 조정을 속이려다가 발각되어 명 태조의 노여움을 사고” 국가적 신뢰도가 땅에 떨어졌었다조선 건국 후부터 정성으로 사대하여 조금씩 신뢰를 쌓아가는 마당에 공교로운 거짓말로써 의심의 실마리를 만드는 것은 마치 아홉 길 되는 산을 만들다가 한 삼태기의 흙을 잘못함으로 공이 깨어지는” 것과 같은 상황이 될 수도 있다는 게 세종의 생각이었다.
   
   세종이 중국 황제와 사신들의 요구를 지성스럽게 받든 사례는 해청만 있는 게 아니다해청 에피소드 바로 1년 전(1427)에는 말 5000을 보내라는 황제의 요청을 따랐다중국 사신들의 온갖 요구도 인내력 있게 수용했다금강산 구경마포 인삼 등 청구하는 물품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신들의 요구를 세종은 묵묵히 들어주었다.
   
   왜 그랬을까재위 중반부인 1432(세종145월 명나라 황제의 요구즉 소 1만마리를 압록강 건너 요동지역으로 보내라는 요구에 대응하는 과정을 살펴보자여기에서 이 교수가 간과하고 있는 세종의 의도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큰 소 1만마리를 일시에 보내라는 것은 수용하기 힘든 요구였다세종과 신하들은 회의를 열어 명나라의 요구를 그대로 따라야 할지감면 요청을 해야 할지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나라 안의 소들이 마침 병에 걸려 많이 죽은 탓에 보낼 수 없다고 버텨보자는 제안이 우선 나왔다황희 등을 제외한 대다수 신료들은 절반만 보내자는 의견에 찬성했다하지만 세종은 농사짓는 데 매우 중요하고나라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소를 명나라 요구대로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지금 소를 갖추어 바치는 일이 매우 어렵긴 하나국가의 안위(安危)보다는 덜 중요하지 않느냐는 게 세종의 판단이었다.
   
   세종은 실제로 그해(14327월부터 소 6000마리를 여섯 운으로 나누어 요동으로 보내기 시작했다아울러 소방(小邦·우리나라)에서는 그전부터 소의 생산이 심히 적고또 몸집이 작으나황제의 명령을 감히 어김이 있을 수가 없어” 전국의 쓸 만한 소를 어렵게 뽑아서 보낸다는 편지도 보냈다.
   
   세종의 이러한 판단과 조치는 주효했다그해 10월 명나라 황제가 조선에 보낸 외교문서를 보면황제는 조선의 탁월한 현왕(賢王)의 판단에 감복했다면서 지금까지 보낸 6000마리면 족하다고 말했다아울러 앞으로는 칙서에 명시된 물건만을 사신들에게 주라는 말도 덧붙였다조선의 큰 골칫거리인 사신들의 잡다한 요구를 물리칠 근거를 마련해준 것이다.
   
   여기서 보듯이 세종은 지성사대로 중국 황제의 마음을 움직이는 쪽을 택했다그래서 조선에 대한 견제의 성격이 강하던 명나라의 과도한 요구를 줄이고양국의 신뢰를 쌓는 데 주력했다사신들의 과도한 요구를 차단시키고그 파견 횟수를 급격히 감소시킨 것은 보이지 않는 외교적 성과였다(연평균 사신 파견 횟수태종시대 2.77회 → 세종시대 1.12). 한마디로 세종이 하늘제사를 폐지하고해청 및 조선 처녀를 정성껏 진헌한 것은 민폐 따윈 무시하고제후국 국왕으로 충성을 바치려는 행위가 아니었다이 교수가 부정적 의미를 담아 나는 알지 못한다고 한 더 고차의 정략을 구사한 사람이 바로 세종이었다.
   
   이 교수는 사실을 왜곡하기도 했다1433(세종153월의 어전회의를 언급하면서 이 교수는 세종을 정치와 인륜을 구분 못한” 왕이라고 비판했다(앞의 책 163). 과연 그랬을까당시 조선은 총사령관 최윤덕을 압록강 근처에 대기시켜 놓고국경 건너 파저강의 여진족 토벌 계책을 의논하고 있었다.
   
   이 회의와 관련해 이 교수는 기한 내에 도착하지 않거나 대오를 이탈한 군사를 모두 참(·목을 벰)하는 군법은 아름답지 못하다고 세종이 걱정하자 신하들이 가장 늦게 도착한 자와 가장 멀리 이탈한 자만 참하자고 하였다고 인용했다그러면서 그는 그런 군대가 전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라고 덧붙였다군사에 대한 세종의 자애는 엉뚱하게 조선왕조의 군대를 허물고 있었는지 모른다고도 했다(앞의 책 163).
   
   완전히 왜곡된 인용이다이날의 실록을 보면 세종은 대신들을 불러 여진족을 토벌하는 군사의 양식 준비와 명령불복종 문제 등을 의논하고 있다후자즉 명령불복종과 관련해 세종은 기한 내 도착하지 않은 자와 대오 이탈자를 모두 목을 베면 처벌받는 자가 자못 많을 것이며(受罪者頗多), 반대로 처벌하지 않으면 군령(軍令)이 엄하지 못할 것인데(軍令不嚴),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는가” 하고 물었다.
   
   이 교수의 왜곡된 인용과 달리세종은 처벌받는 군사가 많아지는 문제점과 군령이 엄하지 않게 되는 문제점 모두를 지적한 다음 그 해법을 묻고 있다어디에서도 자애로움에 치우쳐 군대를 허무는’ 말이나 의도를 찾을 수 없다더군다나 세종 정부의 파저강 토벌은 대승으로 끝났다최윤덕이 지휘하는 총 15000여 토벌군은 그해 4월 19일 새벽에 일곱 방향으로 기습 공격해 9일간 전투 끝에 여진족 183명을 참살하고 248명을 생포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아군 4명 사망). 도대체 이 교수는 어떤 근거로 세종에게서 외교와 군국을 포함한 내외 정치가 인륜의 논리로 관철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지(앞의 책 163심히 궁금하다.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09&nNewsNumb=00251610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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