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조선시대]]이인좌의 난은 정희량의 난이었다.

작성자화염폭탄|작성시간19.05.07|조회수206 목록 댓글 0

영조 시대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은 그러나 사실 정희량(鄭希亮)의 난이었다.


왜냐하면 반란의 총대장인 이인좌 본인은 반란이 일어난지 얼마 안 되어 붙잡혀 죽임을 당했지만, 

이인좌와 함께 반란에 가담한 정희량의 무리들은 가장 오랫동안 관군에 저항했기 때문이다.


이 정희량의 본관이 현재 경상남도 합천군인 초계(草溪)고,

태어난 곳이 안음현(安陰縣), 지금의 경상남도(慶尙南道) 함양군(咸陽郡)이었고,

아울러 정희량과 함께 반란에 가담한 조성좌(曺聖佐)는 경상남도 합천(陜川) 출신이었다. 

그래서 정희량과 조성좌가 관군에게 죽임을 당하고 난이 진압되자,

영남 즉 지금의 경상도는 반역향이 된다.

아울러 안음현은 역적 정희량이 태어난 곳이라고 하여 혁파된다.


영조실록 18권, 영조 4년 7월 7일 병진 5번째기사 1728년 청 옹정(雍正) 6년 안음현을 혁파하고 함양부에 붙이다

안음현(安陰縣)을 혁파(革罷)하여 함양부(咸陽府)에 붙였다. 역적의 괴수 정희량(鄭希亮)이 안음에서 났기 때문이다.


그러자 영남 선비들이 원통하다고 조정에 상소를 올렸다./


----------------------------------------------


영조실록 33권, 영조 9년 2월 25일 정축 1번째기사 1733년 청 옹정(雍正) 11년 영남 사람인 정랑 김오응 등이 상소하여 영남의 인재등용에 편견없기를 청하다


영남 사람인 정랑(正郞) 김오응(金五應)·감찰(監察) 장위항(張緯恒)·전적(典籍) 이세후(李世垕)·훈도(訓導) 박시태(朴時泰)·직장(直長) 정중기(鄭重器)·저작(著作) 김극령(金極齡)·사록(司錄) 정권(鄭權)·학정(學正) 성헌조(成憲祖)·부정자(副正字) 이권(李權) 등이 연명(聯名)하여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삼가 듣건대, 연신(筵臣)들이 영남(嶺南)의 일을 진달했다 하는데, 이는 대개 인재를 선발하여 등용하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는 대처(對處)하기 어렵다고 하고, 풍원군(豐原君) 조현명(趙顯命)은 천하의 일에 사변(事變)은 알기가 어려우니, 마땅히 진정시킬 방도를 강구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영남이 어찌하여 대처하기가 어려우며 또한 어떤 모양의 사변(事變)이 알기 어려운 것이 있기에 진정시키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는 아마도 흉역(凶逆)의 무리인 정희량(鄭希亮)·조성좌(曹聖佐)가 출생하였기 때문에 영남 사람을 다 의심하는 것이 아닌지요? 역적 정희량은 안음(安陰)에 살았고 역적 조성좌는 합천(陜川)에서 출생하였는데, 여기는 곧 낙동강의 오른쪽 궁벽한 고을로서 정인홍(鄭仁弘)이 악취(惡臭)를 남긴 곳입니다. 대개 일종(一種)의 잘못된 기운이 그 중간에 뭉쳐서 이렇게 흉악한 무리를 출생시켰던 것입니다. 그 변란이 처음 발생했을 적에 여러 고을의 인사(人士)들이 앞을 다투어 의병(義兵)을 일으켜 종이로 만든 기(旗)와 나무 장대를 가지고 곳곳에서 단속을 하였으니, 또한 그 일도(一道)의 충의(忠義)로운 기개(氣槪)가 일찍이 없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희량과 조성좌가 흉역 행위를 한 것은 한줄기의 맥(脈)이 이어져 온 곳은 따로 있으나 영남 지역의 인심(人心)은 진실로 변함이 없었으니, 무슨 처치하기 어려운 것이 있으며 무슨 사변이 알기 어려운 것이 있기에 나라의 진정시키는 대책을 허비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번의 선발하여 등용하겠다는 청은 사실상 영남 사람을 돌보아 아낀 것도 아니며 또한 나라에 수용(需用)하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는 다만 인심이 안정되지 못함을 염려하여 얽매어두는 방법을 베풀기 위한 것뿐이니, 다만 이적(夷狄)을 대우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영남 사람들이 비록 다른 장점은 없으나 그래도 염치와 의리의 귀중한 것을 대략은 알고 있으므로 백의(白衣)로 조령(鳥嶺)을 넘어가는 것을 예로부터 부끄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부질없이 의도적인 미끼를 던져서 도리어 무심(無心)한 물고기를 유혹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삼가 원하옵건대, 속히 두 신하에게 명하여 그들의 대처하기가 어렵다는 것과 알기가 어렵다고 한 원인을 자세히 진달하게 하고, 인하여 엄중하게 사실을 규명하게 해서 충신(忠信)과 역적(逆賊)을 명백히 분변해서 온 도(道)의 사람으로 하여금 남이 모르는 죄과(罪科)에 모두 돌아가지 않도록 해 주소서."


백의(白衣)로 조령(鳥嶺)을 넘어가는 것을 예로부터 부끄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 영남(嶺南)의 사람들이 서울에 과거보러 갔다가 합격하지 못하고 그냥 조령을 넘어오는 것을 수치로 여겨 학문을 열심히 하였다는 데서 온 말. 백의(白衣)는 벼슬하지 못한 사람./


----------------------------------------


영조실록 33권, 영조 9년 3월 6일 정해 2번째기사 1733년 청 옹정(雍正) 11년 박문수와 조현명이 상소하여 영남 사람들이 연명으로 상소하여 원통함을 호소한 것을 변명하다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와 풍원군(豐原君) 조현명(趙顯命)이 상소하였다. 영남(嶺南) 사람들이 연명으로 상소하여 원통함을 호소한 것을 변명한 내용이었다. 그 대략에 이르기를,


"이른바 조처하기 어렵다는 것과 알기 어렵다고 한 것에 대해서 할말이 있습니다. 한번 당폐(黨弊)가 고질이 됨으로부터 이쪽에서는 맞아들이고 저쪽에서는 물리치게 되어 진퇴(進退)가 날마다 여기에 국한되었고 그에 따라 환득환실(患得患失)하는 무리들이 떼 지어 일어나 역적질을 하게 된 것이니, 이것이 어찌 한 지방 한 고을에서 발생한 것이겠습니까? 동인(東人)·서인(西人)·남인(南人)·북인(北人)이 거의 까마귀의 암컷과 수컷을 분별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상황이니, 이것이 성교(聖敎)에서 이른바 삼당(三黨)에서 모두 난역(亂逆)이 나왔다고 한 이유인 것입니다. 이제 만약 한결같이 전의 투식만을 따른 채 바로잡을 방법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국가를 원망하여 변란을 일으킬 것을 생각하는 이인좌(李麟佐)·이웅좌(李熊佐)·정희량(鄭希亮)·한세홍(韓世弘)·박필현(朴弼縣)·박필몽(朴弼夢) 같은 무리들이 반드시 뒷날에는 없을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또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신 등이 이른바 조처하기 어렵고 알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의례적인 비답을 내렸다. 전번에 두 신하가 영남 사람의 일 때문에 연석(筵席)에서 주달한 뒤에 영남 사람들이 일제히 분노하여 일어나 변핵(辨覈)할 것을 청하고 나섰다. 사단(事端)이 우려스럽게 되자 두 신하가 이 소장으로 미봉(彌縫)하여 조절(調節)했던 것이다./


-------------------------------------------


그리고 조정에서 영남을 반역향으로 대했다는 정황은 영조실록 43권 영조 13년 3월 3일 신묘 4번째기사에서 언급된다.


영조실록 43권, 영조 13년 3월 3일 신묘 4번째기사 1737년 청 건륭(乾隆) 2년 경상도 감사 민응수가 도내의 이수연·조세붕·정희운을 천거하는 상소를 올리다

영남은 사부(士夫)의 기북(冀北)인데, 오로지 우도(右道)는 근래에 와서 풍습이 더욱 변천해진데다가 이인좌(李麟佐)·정희량(鄭希亮)의 무리가 나왔기 때문에 추로(鄒魯)의 고장을 도리어 촉인(蜀人)으로 대하고 있습니다. 만일 특별히 진작(振作)시키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장차 서로 자포 자기하여 글을 읽는 종자(種子)들이 영원히 끊기게 될 것입니다.


기북(冀北) : 중국 기주(冀州)의 북방(北方)으로, 준마(駿馬)가 많이 나는 곳임. 전하여 인재가 많은 고장임을 일컫는 뜻으로 썼음.

촉인(蜀人): 당(唐)나라 때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의 난(亂) 이후 반역(叛逆)하여 복종하지 않았던 유벽(柳闢)이 통솔했던 촉(蜀) 지방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임./


-----------------------------------


이글루스에서 본 글인데, 이 이인좌의 난이 일베 이용자들한테 아킬레스건이라고 한다. 

그러나 관점을 바꿔서 본다면, 이인좌의 난은 부패하고 타락한 조선 왕조를 뒤엎으려고 했던 위대한 혁명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일베 이용자들은 이인좌의 난을 부끄럽게 여겨서 숨기거나 왜곡하지 말고, 차라리 세상을 바꾸려 했던 위대한 혁명이라고 선전하는 것이 좋겠다. 

역사를 보는 관점이야 시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지 않은가?

조선이 임진왜란 때 망하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야 했다는 인식이 지금 대한민국에서 널리 퍼진 것처럼.


만약 그들이 입장을 바꾸어 이인좌의 난을 위대한 혁명이라고 선전해도

나는 거기에 대해서 가타부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겠다.

조선왕조가 망해서 없어진지 109년이 지났고,

지금은 왕이 아니라 국민들이 주권자인 민주 공화제인데, 

하물며 300여 년 전에 끝난 사건이 

어떻게 평가되든 간에 그것에 대해 굳이 말을 해야 할까? 


정여립의 난이나 동학농민전쟁 및 홍경래의 난도 

지금에 와서 반역이자 역적질이라고 비난받지 않고

오히려 위대한 혁명이라고 칭송을 받는데

이인좌의 난이 칭송받지 못할 이유가 없다.


사실 이인좌의 난에도 명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당시, 영조가 형인 경종을 독살하고 왕이 되었다는 의혹이 많았으니까.

개인의 도덕성을 가장 중시했던 성리학이 국가 이념인 조선 왕조에서

그런 왕의 개인적인 의혹은 얼마든지 반란의 합당한 명분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영조가 이인좌의 난 이후에 영남 출신들의 중앙 정계 진출을 제한하거나

영남을 반역향이라고 정한 것도 결코 잘한 일은 아니다.

반란에 가담하지 않거나 의병을 결성해서 반란에 맞서 싸운

영남 출신들로서는 억울한 연좌제일테니까. 


또한 지금 대한민국은 조선시대 왕족을 왕으로 모시는 전제 군주국가가 아니라,

민주 공화제 국가다.

이인좌의 난이 썩어빠진 조선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롭고 건강한 나라를 세워서 

백성들을 구하려는 정의로운 혁명이었다고 주장해도 

경찰이 와서 잡아가거나 처벌받지 않는다. 


근대 이전, 모든 봉건 왕조들에서 벌어진 반란들은

성공하면 왕이 되고 실패하면 역적이 되는 일들이었다.

즉, 이인좌의 난이 성공해서 

조선 왕조가 무너지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섰다면

반란의 주동자인 이인좌나 정희량 등은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려 용감하게 나선 영웅이라고 칭송을 받고 있을 것이다.


헌데 일베 이용자들은 그런 용기도 없는 것일까?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