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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펌] 과연 남한산성에서 김류가 병사들을 몰아붙여 대패했을까?

작성자타메를랑|작성시간21.02.11|조회수148 목록 댓글 0

http://gil092003.egloos.com/10009077

 

 

영화 남한산성에서도 묘사가 되었지요.

김류 <내가 무당한테 길일을 택했으니 전군 진군하라~~~>

해서 마지못해 내려간 조선군이 몰살되는.....

이는 아마 나만갑의 병자록의 기록에 기인할 것입니다.

 

연려실기술 병자록 中

○ 29일에 날씨가 잠깐 화창하니 군사들의 얼굴에 생기가 났다. 김류가 동서남북 네 성의 장수를 불러 명하기를, “남성(南城) 아래에 적의 진영이 매우 엉성하니, 각각 정예군을 내어 무찌르도록 하라.” 하니, 네 장수가 모두 그 계책이 잘못된 것을 역설하였는데 김류가 듣지 않고 친히 장졸을 거느리고 북문에 앉아 대장의 깃발과 북을 세우고 병기를 휘두르면서 싸움을 독려하였다. 성 아래에는 개울이 굽이져 있었는데 오랑캐의 기병이 곳곳에 매복한 채 겉으로는 고군(古郡) 남쪽 4, 5백 보 거리로 물러가서 군사와 소ㆍ말을 약간 머물려 주둔시켜 놓고 유인하였다.김류가 깃발을 휘두르며 진군할 것을 명령하니 우리 군사가 서로 버티면서 산에서 내려가려 하지 않자, 김류가 비장(裨將) 유호(柳瑚)를 시켜 나가지 않는 자를 목베게 하였다. 이에 유호가 만나는 사람마다 함부로 찍어 죽이니, 온 군사가 내려가면 반드시 죽을 것을 알면서도 내려가는데, 별장(別將) 신성립(申誠立)은 사람들과 영결(永訣)하고서 가기에 이르렀다. 우리 군사들이 그들의 남겨둔 소와 말을 취하는데도 적들은 못본 체하고 있다가, 우리 군사가 송책(松柵) 밖으로 다 나온 뒤에야 비로소 적이 말을 채찍질하여 나는 듯이 돌격해 들어오고 복병이 사방에서 일어나 곧장 우리 군사의 앞뒤를 끊었다. 이에 우리 군사는 총 한 방, 화살 한 번도 쏘지 못한 채 순식간에 짓밟혀 죽은 자가 거의 2백 명이고 신성립(申誠立)과 지여해(池如海)와 이원길(李元吉) 등도 모두 죽었는데, 오랑캐 군사로 죽은 자는 다만 두 사람뿐이었다. 처음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송책을 불사르면 군사가 진격하는 데 거칠 것이 없을 것이다.” 하니, 김류가 불사르도록 명하여 송책을 이미 불살라 버렸으므로 오랑캐가 우리 군사를 공격하는 데 더욱 거칠 것이 없었다. 또 처음 접전할 때에 군사들에게 화약을 많이 주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약을 청하는 소리가 시끄럽더니, 접전이 벌어진 다음에야 어느 겨를에 화약을 청하겠는가. 다만 화약통을 서로 두들길 뿐이었다. 산 언덕이 험준하여 이미 갑자가 올라가기 어려웠고 깃발을 휘두르면서 퇴군하였으나 성이 막혀 있어 보지 못해 마침내 모두 섬멸되기에 이르렀다. 유호가 또 초관(哨官)에게 죄를 돌려 퇴군하지 못했다 하여 베어 죽이니, 사람들이 모두 원통하게 여겼다. 김류가 허물을 돌릴 곳이 없자 원두표가 구원하지 못한 탓이라 변명하여 장차 사형에 처하려 하자, 홍서봉이 말하기를, “수장(首將)이 군율을 어기고서 부장에게 죄를 돌려서야 되겠는가.” 하자, 김류가 마지못해 대궐에 엎드려 대죄하고, 원두표의 중군을 매 때려 거의 죽게 하였다. 처음에 정예 군사를 모두 체찰부에 예속하였는데, 사상자가 적어도 3백 명에서 내려가지 않았는데도 사실대로 보고하기를 싫어하여 40명이라 아뢰니, 이로부터 사기가 떨어지고 묘당에서도 또한 화친하는 것에 전념하게 되었다. 《병자록》 《잡기》

 

조선왕조실록 1636년 12월 29일 기사中

김류의 지휘로 북문 밖에 진을 친 군대가 크게 패하다

이날 북문 밖으로 출병하여 평지에 진을 쳤는데 적이 상대하여 싸우려 하지 않았다. 날이 저물 무렵 체찰사 김류가 성위에서 군사를 거두어 성으로 올라 오라고 전령하였다. 그 때 갑자기 적이 뒤에서 엄습하여 별장 신성립(申誠立) 등 8명이 모두 죽고 사졸도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김류가 군사를 전복시키고 일을 그르친 것으로 대죄(待罪)하니, 상이 위유(慰諭)하였다.

 

그러나 실상을 알아볼까요?

과연 조선군은 출전하기 싫어했을까요??

아니요!!! 그 반대였습니다.

출전하면 우선 호궤를 받습니다. 은전이나 술 등으로!

게다가 수급이라도 획득하면 곧바로 면천! 부역면제! 관직! 승진!

또 12월 29일까지 남한산성을 포위한 병력은 얼마 되지도 않았을뿐더러!

적은 남한산성을 포위하기 위해 성 둘레 60~70리에 10~30명씩 조를 짜서 주둔하였습니다.

즉 수백 명씩 내려가는 조선군이 충분히 상대할 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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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포위 병력

12월 15일 : 1차 선봉대 마푸타+로오사+우바이 300(바야라)

12월 16일~17일 : 2차 선봉대 도도+쇼토+니칸 1천

                     3차 선봉대 요토+양구리 3천

12월 25일 : 홍 타이지 본군(우익)에서 보낸 증원군

            -대장 : 바야라 독주 궝아다이, 바불아이, 바두리

            -병력 : 장교 8명 + 갑병 832명 + 쿠툴어 400여명 = 1240여명

12월 25일 : 강화도 염탐부대 대장 콩코+바야라 50명

12월 27일까지 남한산성 포위병력 5500 여명

12월 29일 한양약탈 병력 총 1만1천명 (만몽팔기 1450여명 + 쿠툴어 700여명 + 외번 몽고 우익 9천명)

12월 29일 남한산성에 도착한 홍 타이지의 본군 3200 여명(바야라 437, 보병 1457, 쿠툴어 1300여명)

12월 29일까지 남한산성 포위병력 8700 여명

1월 4일 한족3왕 1300여명 도착, 김옥화 예하 우전 초오하 도착

1월 10일 도르곤+호오거 좌익 1만 3천 도착, 두두 6차 후미대 1천 도착, 석정주 우전 초오하 1만 도착

1월 10일까지 남한산성 포위병력 3만4천, 한양 약탈병력 1만1천.

1월 16일 로오사+우바이 1차 선봉대 300 본국 귀환명령

1월 18일 강화도 함락군 도르곤+두두 5천(갑병3300+쿠툴어1600) 남한산성 출발 강화도로 감

1월 23일 강원도-함경도-와르카 정벌군 니칸 3700명 남한산성 출발(만주팔기군100+외번몽고109부족 3600)

1월 23일까지 남한산성 포위병력(한양 약탈군도 이전에 회군명령 내림)

44000-300-5000-3700 = 약 3만 5천 (한산무갑, 보오이, 불법동원병력, 살상자 등 고려 안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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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일기 1636년 12월 22일 기사中

김신국이 아뢰기를,

“어제 북문을 거쳐 이시백(李時白)이 지키고 있는 곳에 이르러 성 밖을 바라보니, 적병이 비록 성을 에워싸고 모였다 해도 숫자가 적습니다. 이로써 헤아려 보면 성 밖의 둘레가 6, 7십 리에 불과하니, 설사 1리에 100명을 주둔시키더라도 여전히 1만 명이 못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3000명에도 차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김신국이 아뢰기를,

“신이 어제 전투를 보건대, 소규모로 병력을 풀어서 몇 명을 잡아 죽이는 것은 비록 사기를 고무시킬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것으로 큰일을 해낼 수는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세 갈래 길로 나누어 한번 크게 싸워서 승패를 결정지으면 모여 있는 적을 흩어 놓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시일만 끈다면 장차 다시 무엇을 하겠습니까.”

 

실제 조선군은 자모군이라 하여 자원병을 꾸려 포위 초기부터 거의 매일 계속 성 밖을 나가 청군과 싸워왔습니다.

실제 위의 병자록을 쓴 나만갑도 소수의 병력으로 계속 청군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으니까요.

 

 

승정원일기 1636년 12월 18일 기사中

나만갑이 아뢰기를,

“자모군(自募軍)을 20명이나 30명으로 무리를 지어서 중로에서 출몰하여 공격하게 하소서. 그렇게 하면 틀림없이 저들이 두려워하고 꺼리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포수로 하여금 내려가 싸우게 하고, 적을 유인하여 올라오거든 공격하는 것이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저들이 성으로 올라오지 않을 것이다.”

 

승정원일기 1636년 12월 18일 기사中

나만갑이 아뢰기를,

(중략)

신이 보기에 이서가 거느린 군병이 매우 정예하고 스스로 응모한 인원도 많으니, 자모군으로 하여금 중상(重賞)으로 출전을 유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심지어 김류는 출전하라는 인조의 명에도 신중해야 한다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636년 12월 22일 기사中

김류에게 결전할 것을 명하다

상이 김류를 불러 이르기를,

“오늘 한번 결전하라.”

하니, 김류가 어렵게 여기는 뜻으로 대답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각 영에 전령하여 식후에 출전하게 하라. 그리고 우리 나라 사람은 모두 잘못되었다. 심열이 어찌 오늘날 강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몰라서 차자의 말을 그렇게 했겠는가. 이는 다름이 아니라 매우 겁을 먹어서 그런 것이다.”

하니, 김류가 아뢰기를,

“신이 여러 대장들과 한 곳에 약속을 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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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1636년 12월 21일 기사中

근일에 아군이 자원해서 출전하여 무리에서 떨어진 적을 소탕하자, 조정이 온통 기쁨에 휩싸여 서로 축하하면서 장차 이렇게 해서 적을 다 섬멸시킬 수 있을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636년 12월 23일 기사中

자모군(自募軍) 등이 출전하여 50명 가까운 적을 죽였다.

 

조선왕조실록 1636년 12월 24일 기사中

군사 4백여 명을 보내어 출전하게 하였는데, 출발에 앞서 상이 몸소 나아가 호궤하였다. 어떤 병졸이 대열을 벗어나 땅에 엎드려 아뢰기를,

“비단옷 입은 사람을 장수로 정하면 자기는 성밑에 앉아 있으면서 고군(孤軍)만 나가 싸우게 하니, 대오 중의 사람을 장수로 정하여 출전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너희 대장에게 말해라.”

하였다. 싸움이 끝난 뒤에 어영청이 아뢰기를,

“오늘 출전하여 적을 죽인 수가 그들의 말대로 계산하면 1백 명이 넘습니다. 과장된 말을 다 믿을 수 없으나, 방패(防牌) 아래에 둔친 적이 얼마 남지 않았고 흐른 피가 땅에 가득합니다. 전장에서 얻은 것은 호전(胡箭) 1백 4개, 호궁(胡弓) 4개, 검 1자루, 궁대(弓帒) 1부, 갑주(甲胄) 1부, 양구(羊裘) 1벌입니다.”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636년 12월 26일 기사中

삼공과 비국 당상이 입대(入對)하여 아뢰기를,

“오늘 군사를 조발(調發)하여 출전하려고 했는데, 바람이 너무 강하니 날씨가 조금 풀릴 때까지 기다렸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김류에게 이르기를,

“경이 대장이니, 사태를 보아 가며 대처하라.”

하였다. 

 

승정원일기 1636년 12월 18일 기사中

정광경이 아뢰기를,

“군정(軍情)은 출전해서 잔약한 적을 사로잡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으니 허락할 만합니다. 대개 나라의 존망의 형세가 오늘에 결정될 것입니다.”

 

승정원일기 1636년 12월 19일 기사中

이서가 아뢰기를,

“난리를 앞두고 진(陣)을 바꾸는 것은 불가합니다. 협수사(協守使) 유백증이 선발한 사대부들을 추인(蒭人)의 규례에 따라 여러 성첩에 나누어 배치하고 그 군졸을 덜어 내어 유격병으로 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제 신이 40여 인을 성 밖으로 내보내었는데 교전과 진퇴에 매우 절도가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호병(胡兵)은 얼마나 되던가?”

하니, 이서가 아뢰기를,

“5, 6명이나 7, 8명의 마군(馬軍)이 한 무리가 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느 문으로 출병(出兵)하였는가?”

하니, 이서가 아뢰기를,

“북문(北門)으로 출병하였습니다. 어제 충청 병사 이의배(李義培)가 군사를 이끌고 올라왔다는 말을 듣고서 다시 사람을 보냈으나 그곳에 도착하지 못하였습니다. 체부(體府)가 장사(壯士)를 구해 가서 분부하도록 하려고 하기에 신이 영동(嶺東)의 포수 12명을 뽑아서 보냈습니다. 아침에 28인을 출전시켰는데, 적을 만나 크게 싸워서 상당한 성과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전공(戰功)을 탐하여 적의 목을 베려다가 해를 당하였고, 한 사람은 실종되었다가 오늘 밤에 돌아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분명히 죽은 호병(胡兵)은 몇 명인가?”

하니, 이서가 아뢰기를,

“한 곳에서는 4명이 사살되었고, 한 곳에서는 6명이 사살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군사들이 적을 보고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으니, 매우 기뻐할 만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장하도다. 상을 주어야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승정원일기 1636년 12월 19일 기사中

임담이 아뢰기를,

“총융사가 4명을 내보내어 성 밖을 순라하게 했으나 적병을 만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제부터 출입하는 형세를 적에게 보여 준다면 적이 필시 두려워하여 함부로 날뛰지 못할 것입니다. 구인후도 오늘 밤에 15명을 내보내 암문(暗門) 밖에 진을 치게 하여 병사를 숨겨 둔 듯한 형세를 취할 것입니다. 이것은 적이 두려워 야간에 감히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소신은 남문의 근처를 맡고 있습니다만, 조금도 두려워할 만한 일이 없습니다. 오늘 밤도 불을 끄고 기다려 보아 한 사람도 성에 접근하지 않는다면 필시 두려워하는 바가 있어서 그러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구인후의 군사는 적병을 사로잡기 위해서 출전하는가, 우리의 군세(軍勢)를 속이기 위해서 출전하는가?”

하니, 임담이 아뢰기를,

“군졸들이 출전을 자청하였으므로 구인후 또한 출전할 계획을 냈습니다. 신은 가볍게 대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만, 구인후는 나가서 싸우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있습니다.”

 

승정원일기 1636년 12월 19일 기사中

세자가 아뢰기를,

“협련 포수(挾輦砲手)들이 출전의 명령을 듣고 또한 뛰면서 다투어 달려 나가지 않은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하고, 이서가 아뢰기를,

“적이 대규모로 쳐들어왔다면 교전할 때 병력의 수가 틀림없이 많았을 텐데, 70여 기(騎)에도 차지 않았으니, 그들의 수가 많지 않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승정원일기 1636년 12월 19일 기사中

이식이 아뢰기를,

“3, 4십 명의 군졸이 무슨 손익(損益)에 관계되기에 출격하지 않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옳다. 병조 판서를 불러오라.”

(중략)

하니, 이식이 아뢰기를,

“경기 감사 또한 출전을 원합니다.”

 

승정원일기 1636년 12월 19일 기사中

박황이 아뢰기를,

“어느 곳인들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원두표(元斗杓)가 수비하는 곳에는 대부분 어영군을 배정한 까닭에 모두 자모군(自募軍)으로 출전하고 나니, 그곳이 가장 허술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영군이 가장 정예하니, 출전했던 자들이 돌아오면 즉시 성첩에 배치하라.”

 

승정원일기 1636년 12월 19일 기사中

정뇌경이 아뢰기를,

“군사들의 마음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당초에 60여 기가 출전하기로 되었는데, 이서가 강력하게 출전하지 못하게 하자 앞 다투어 출전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싸우고자 하는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승정원일기 1636년 12월 19일 기사中

정뇌경이 아뢰기를,

“근래 군심을 살펴보면 모두 대거 출전하기를 원하는데 이것은 결코 불가합니다. 소규모로 주둔한 적을 빈번하게 치면 그들이 반드시 한 곳으로 뭉치게 되어 그들이 점거하고 있는 도로가 열릴 것이니, 이것으로 원병(援兵)이 오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들이 달려와서 돌격하는 양상을 살펴보면 고립된 군사로는 당해 내기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군사들의 여론이 비록 이와 같이 말하더라도 어찌 경솔하게 행동할 수 있겠는가.”

 

승정원일기 1636년 12월 19일 기사中

김신국이 아뢰기를,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일 세 가지가 있으니, 군량이 떨어지는 것, 화살이 떨어지는 것, 군사들이 피로한 것입니다. 저들이 이와 같이 행동하는 것은 우리 군대로 하여금 이러한 세 가지 문제가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소규모의 군병을 출동시켜 주야로 쉬지 못하게 하고 목전의 작은 승리를 탐내서 이미 헛되이 쏜 것이 많으니, 장차 적의 대군이 오면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을 지키는 방법은 오직 성안을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출전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니, 박황이 아뢰기를,

“그 말이 매우 옳습니다.”

 

 

승정원일기 1636년 12월 20일 기사中

이경직이 아뢰기를,

(중략)

근래 군정(軍情)을 살피니, 모두 출전을 원하지만 성첩을 지키는 군사들이 여러 날 추위에 떨고 굶주리며 노숙하는 것이 이미 극한에 이르렀습니다. 신이 근심하고 답답해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승정원일기 1636년 12월 20일 기사中

북성(北城)의 독전어사(督戰御史) 윤집(尹集)이 청대하여 아뢰기를,

“소신이 독전어사로서 북성에 있었습니다. 당초에 북성은 모두 어영청의 포수가 배치되었는데, 이들이 재주가 출중함으로 인해 과시욕을 이기지 못하고 엊그제 출전하여 적을 죽이고 노획한 것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출전하기를 원하여 모두 성을 비우고 내려가려고 하였습니다. 신과 원두표(元斗杓)가 직접 출전을 만류하니 군병들이 모두 원망하여 말하기를, ‘출전하면 성공할 수 있는데도 부질없이 성첩에 배치하고선 사람이 얼어 죽는 것을 좌시하니 도리어 무슨 생각으로 그러시는 것입니까?’ 하였으니, 그들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승정원일기 1636년 12월 20일 기사中

상이 이르기를,

“우리의 군사가 자주 출전하므로 그들이 우리의 출병을 늦추기 위해 와서 화친을 청하는 것일 뿐이다.”

하였다. 허계가 아뢰기를,

 

승정원일기 1636년 12월 20일 기사中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매우 옳다. 우리가 연일 군사를 나누어 공격하니, 저들도 두려워서 우리의 출전을 지연시키려고 도모하는 것이다. 어떤 말로 답해야 마땅하겠는가?”

 

승정원일기 1636년 12월 20일 기사中

“그렇다면 공첩(空帖)을 만들어서 주면 공사(公私) 양쪽으로 편리할 것이다. 자모군들은 오늘도 출전하기를 원하는가?”

하니, 이서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이 성에 모두 12개의 문이 있으니, 문 한 개마다 100여 명 혹은 50여명의 병사를 내보내서 교전하게 하고 성 위에서 크게 북을 치며 사기를 돋우면 근처에 숨어 있던 적병들이 모조리 물러날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는 전진할 필요 없이 다시 성안에 들어오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적으로 하여금 공공연히 성 밖 30보(步) 내의 거리에 이르게 하여 말발굽 소리가 성안까지 떵떵 들리게 한다면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어제 그들의 용병술을 보니 실로 우리들이 미칠 수가 없었습니다.”

하였다. 이어서 그들이 출전하는 형세를 아뢰었다. 그리고 아뢰기를,

“적병은 해가 진 후에 서원촌(書院村)으로 돌아가서 땔감을 많이 취하여 각처로 몰래 흩어진 다음 한 사람이 각각 3병(柄)의 횃불을 피워 두고 그들은 성 아래로 내려가서 잡니다. 만약 불을 피운 곳에서 적이 잔다고 여겨서 가서 공격하면 틀림없이 헛걸음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즉 남한산성 포위 초기, 정확히 말하자면 홍 타이지가 도착한 12월 29일 이전까지만 해도

남한산성을 포위한 병력은 기껏해야 5500명 정도였습니다.

그나마 이 병력에서 쪼개 27일 쇼토는 1천을 이끌고 검단산에, 양구리는 1천5백을 이끌고 험천에 가있었기 때문에 27일 경 남한산성 포위 병력은 3천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것이 12월 29일 홍 타이지의 본군이 남한산성에 도착하면서 포위는 한층 강화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출전한 것이 29일 김류의 출전 지휘였습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조선군들은 서로 다투어 출전하였고 적의 병력은 기껏해야 수십밖에 되질 않았기 때문에 상당한 전과도 올릴 수 있었지요.

오히려 소규모 출전이 소규모로 흩어진 적을 한 곳에 모으게 되는 역효과를 일으켜

전황이 더 어렵게 될 것이라는 주장들도 생겨나게 됩니다.

29일 이후 몇백 명씩의 출전은 기록상 더 이상 없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결론

1. 왜 수시로 출전하길 원했던 조선군이 나만갑의 병자록에 의하면 갑자기 출전하기 싫어졌단 말인가?

2. 김류는 오히려 출전에 소극적이었고, 인조가 다그쳤다.

3. 남한산성 포위 초기 청군의 병력은 소수여서 출전해서 성과가 다수 있었다.

4. 12월 29일 이후 홍 타이지의 본군이 도착하고 사신들이 오가자 대규모 출전은 멈추게 되었다.

5. 여러 신하들은 잦은 출전이 오히려 해가 된다고 인조에게 말하였다.

6. 초기 병사들의 출전의지는 매우 강했다.

   오히려 출전을 만류하는 장수들을 원망했다.

 

-나만갑의 병자록에는 왜이렇게 29일 김류의 행적에 대해 극딜을 한 것일까요?

 29일 김류의 행적에 관한 다른 기록이 있는지요?

 

출처:과연 남한산성에서 김류가 병사들을 몰아붙여 대패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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