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통일신라도 정치가 문란해지고 관리는 부패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새로운 나라를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고 그 와중에 남쪽에서는 견훤이라는 인물이 나타나 후백제를 세우게 되었으며 북쪽에서는 스님출신인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궁예는 폭정을 일삼게 되었으니 여러 장군들의 추대를 받은 왕건이 군사를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나라를 세우니 그 나라가 바로 고려이다. 고려는 건국된 후 국토 통일이라는 난작업을 마치지 않으면 않되었다.
후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왕건이 세운 고려와 기름진 평야지대를 손에 거뭐지고 있으며 지방 호족층의 지지를 얻고 있던 견훤은 삼국의 통일을 놓고 라이벌 관계에 이르렀다. 이때 신라는 국토의 태반을 잃고 기울어가고 있었으므로 삼국통일은 이파전 양상을 띄게 되었다. 하지만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음에는 아직 변함이 없었다.
왕건은 즉위 후 궁예의 심복들을 귀화시키는데에 힘썼다. 그러나 일부 장수들은 왕건에게 귀순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환선길 형제와 이흔암의 반란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저자에서 베어졌으며 궁예의 오른팔이던 종간과 동료 은부도 죽임을 당했다. 그밖에 많은 반란이 있었으나 조기진압으로 일이 커지는 것을 막을수 있었다.
반대파도 숙청하고 어느정도 왕실이 자리잡게 되자 왕건은 비로소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 부산히 움직였다.
먼저 삭방 골암성의 태수 윤선이 무리 2천명을 이끌고 투항해왔다. 삭방 골암성이 투항해오자 북쪽 변방이 굳건해졌다. 그러나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웅주 운주 등 10여 주 현이 배반하여 후백제에 붙기도 하였다. 또한 모반의 기미가 보이는 지방들을 순회하여 불안의 싹을 뽑아버리기도 하였으며 성도 쌓아 후백제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또한 북방 골암진에서는 오랑캐가 자주 침입하니 유금필에게 3천명을 주어 오랑캐를 막도록 했다. 920년(집권 3년)에 견훤이 신라를 공략하자 신라에서는 고려에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자 왕건이 군사를 보내어 후백제군을 막자 그 후로 급속도로 고려와 후백제는 사이가 냉각되었다. 그 와중에서도 왕건은 922년(집권 5년)에 서경에 행차하여 북진을 향한 대망을 잊지 않았다. 그 후 924년 전까지는 후백제와의 이렇다할 충돌 없이 있었으나 924년부터 고려와 후백제는 본격적으로 충돌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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