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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펌] 일제 강점기 무렵 조선인 문맹률에 대한 자료들

작성자망저만|작성시간22.09.22|조회수207 목록 댓글 0

http://transpoet-textcube.blogspot.com/2018/11/51.html 

 

日帝時期의 文盲率 推移/ 노영택 * 曉星女子大學校 史學科 敎授/ 국사관논총 51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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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조선총독부에서 전국에 일제히 실시한 국세조사에서 읽고 쓰기 정도의 인구를 조사한 바 있는데 이때 조사항목을 〈일본어 및 한글의 읽고 쓰기 할 수 있는 사람〉, 〈일 본어 읽고 쓰기 할 수 있는 사람〉, 〈한글 읽고 쓰기 할 수 있는 사람〉, 〈일본 어 및 한글 읽고 쓰지 못하는 사람〉 등 4개항으로 구분하여 조사하였다.
-朝鮮總督府, 《朝鮮國勢調査報告》(1930年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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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조선인 1천 7백 만명 중에 자기의 성명을 능히 기하는 자가 얼마나 있으며 독하고 서하고 수할줄을 지하는 자가 얼마나 되며 더욱이 사물의 리를 정당히 이해하는 자가 얼마 나 되며 보통상식을 구비하여 일개 시민의 자격을 완유하는 자가 기하이나 되는 고. 1천 7백 만의 반수가 부녀라고 하면 8백 50만이 곧 그것이라. 그중에서 서신 한장은 고사하고 언문 1 자를 능통 하는 자가 기하인고. 백인에 1 인이라 하면 혹 과장이 아닐가 하며 기타 반수인 남자중에서라도 대부분을 점령하는 농민의 지식을 논지할 것 같으면 신문 한장은 고사하고 일상 의사소통에 필요한 서신한장을 능수하는 자가 역시 백인에 1인이면 다행이라 하겠도다. 연즉 대체로 논지하면 조선의 일반민중은 대부분이 문자에 맹목이라 할 수 있나니
-〈동아일보〉 1922년 1월 5일자 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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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국세조사를 1925·1930·1935·1940년 등 4회 실시하였는데 1930년도에만 전국적 인 문맹률을 조사하여 발표하였다. 이 문맹률 조사는 조선총독부가 공식적으로 전국에 걸쳐 실시하여 발표한 것으로서 가장 확실하고 전국적 통계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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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朝鮮國勢調査報告〉의 12항에서 ‘읽고 쓰기 정도별 인구(府面)’와 13항에서 ‘읽고 쓰기 정도 및 연령 (15구분)별 인구’를 면단위까지 발표하고 연령층별을 15 개 구분하여 발표하였다. 그리고 조사내용을 보면 일본어 및 한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자, 일본어만을 읽고 쓸 수 있는 자, 한글만을 읽고 쓸 수 있는 자, 일본어 및 한글을 읽을 수도 쓸 수 도 없는 자 등 4 개항으로 하여 조사하였다.35

〈표 23〉1930년도 문자 읽고 쓰기 정도 통계표와 문맹률(한국인)
일본어 및 한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자 6.78%
일본어만을 읽고 쓸 수 있는 자 0.04%
한글만을 읽고 쓸 수 있는 자 15.44%
일본어 및 한글을 읽을 수도 쓸 수도 없는 자(문맹자) 77.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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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도의 문맹률은 77.73%인데 남자 63.92%, 여자 92.04%이다. 77.73%라면 거의 80%에 이르는 것으로 1920년대 말에 대체로 80% 정도가 문맹이라는 단편적이며 비공식 적 자료가 거의 정확성을 갖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농촌지역과 민중층 그리고 여성들의 문맹률인 것이 다. 전국 평균치가 약 78%인데 도시지역을 제외하면 농촌지역은 더욱 높아진다. 더욱이 당시의 도시인구보다는 농민이 80% 이상 90% 가까이 이르렀던 것으로 보면 1920년대에 농민이 거의 문맹이고 우리나라 문맹률이 90%에 이른다는 말도 적합한 표현일 것이다. 또한 부유층·중산층을 제외한 민중층은 90% 이상 문맹이었음도 확실해진다.

〈표 23〉에 있는 것과 같이 한국인으로서 일본어만을 읽고 쓸 수 있는 자는 0.03%이 니 큰 비중이 아니고 한글만을 읽고 쓸 수 있는 자가 15.44%인데 이들을 반문맹으로 규 정하여 본다면 완전히 문맹을 벗어난 사람은 6.78%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93%가 완전문맹·반문맹으로 문맹상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여성의 경우는 98.1%가 완전문맹·반문맹이니 중산층 이하 여성은 모두 문맹이었다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http://db.history.go.kr/download.do?levelId=kn_051_0040&fileName=kn_051_0040.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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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lbpark.donga.com/mp/b.php?m=user&p=1&b=bullpen&id=202005040042211226&select=&query=&user=dolas&site=donga.com&reply=&source=&pos=&sig=h6jzSYtYj3eRKfX2h4a9Rg-Aihlq 

 

팩트부터 틀림. 근대 국민교육은 갑오개혁이후 대한제국 시절부터임. 이때 학부에서 근대 교과서도 제작하고 남녀차별없이 여아들도 교육시킴.일본이 가장 억압한 부분이 교육 부문. 대학교 설립도 불허아무리 똑똑해도 전문대학 수준의 교육만을 한반도에서 받게끔 만듬. 그 이상을 받으려면 일본 본토로 가야했음. 돈없는 일반 서민이 일본으로 유학가는건 거의 불가능. 이건 일본 정부의 의도된 꼼수였음. 제국주의 시절 일본이 서양에서 가장 비난받는 부문 중 하나가 교육부문.

일제 지배 초창기에 전국에 약 3천개로 집계되던 서당(공식적으로만 해서.)들이 탄압 들어가면서 사실상 소멸했습니다. 한자 교육을 놓고 본다고 하더라도, 교육을 받는 곳 자체의 절대수가 엄청 줄어들었는데 문맹률이 나아졌을 거라고 하는 건 좀 동의하기 어렵네요. 이 서당도 특정지방 편중이 아니라 전국 곳곳에 고루 퍼져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남해의 임자도 같은 섬에도 서당이 2개 있었고, 600여호가 살고있던 전라도의 한 면에도 6개의 서당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노비 같은 하류층은 교육 기회가 없었을 거라고 하는데, 앞에서 말했다시피 18세기 즈음해서 전국에서 서당이 폭발적으로 늘어납니다. 단순히 서당이 글공부만 시키는 곳이 아니라, 18세기에 흔하게 벌어졌던 각종 송사 및 법적 분쟁에 필요한 문해력과 작성 요령 등 실생활과 관련된 기술도 가르쳐주는 역활을 수행했기 때문입니다. 하여튼, 당시 서울에는 노비 출신 훈장이 운영하는 서당이 1타로서 명성이 자자했고, 지방으로 내려가도 학생들의 절반은 평민 중인 노비 천민 등 다양한 신분계층이 다닌 것으로 확인됩니다.

따라서 본 글에서 일본의 교육 시스템이 문맹이나 근대화 교육에 도움이 되었으니 인정하자는 것 자체도 반박의 여지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덧붙여, 송사문은 한문이나 한글 등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때문에 서당에서 한문만 가르쳤다고 보기에도 어렵습니다.

마지막으로, 서당 소멸 전에는 서양식 교육과정이나 과목을 혼합한 독특한 양식의 서당교육체계가 태동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당연히 교육 소비자들의 수요가 반영된 결과였는데, 이게 탄압의 이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일제 주도 하 근대식 교육의 경쟁자+통제범위 밖의 교육기관이었으니까요.


개항이후 일본을 등에 업은 매판자본이 조선의 상업체계를 무너뜨립니다.실업자는 속출하고 일본 상인 때문에 장사가 안되니 서울 사민의 분노가 극에 치달아요. 지금으로 치자면 공사판 조선족이 한국인을 몰아내는 것과 같은 상황으로 보면 됩니다. 김홍집이 친일파 수장이라는 풍문이 돌자 화풀이 대상으로 김홍집을 선택한 겁니다.

 

https://mlbpark.donga.com/mp/b.php?p=1&b=bullpen&id=202206160070740348&select=&query=&user=&site=donga.com&reply=&source=&pos=&sig=h6jzSYtYj3HRKfX2h4a9Rg-Aihlq 

 

일제시대 고등교육 이상 받은 조선인 1.03%

36년이면 식민시절 초기부터 문맹률 신경썼으면 퇴치하고도 남을 만한 기간인데 그냥 별 신경 안쓴거죠.
1933년 조선 문명률 77%, 일본 본토 문맹률 3%
식민 통치관련 행정업무를 맡길 조선인 인력은 필요하니 딱 그정도만 한겁니다.
본토엘리트는 굳이 조선까지 안오니까 조선인 엘리트도 조금은 육성할 필요가 있었죠.


이렇게 소수나마 육성된 일제시절 엘리트들때문에 경제성장이 됐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보이던데, 정말 이렇게 까지 해서 한국이 일본 덕분에 잘됐다는것을 주장하려는 사람들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라는 하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교육부문부터 살펴보자. 독립은 교육부문에서도 획기적인 발전의 계기가 됐다. ‘표1’에서 볼 수 있듯이, 일제 말인 1944년 전문학교 이상의 학력을 가진 조선인은 전체 조선인 인구의 0.13%였다. 중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까지 합해도 1.03%에 불과했다. 일제 강점기에 관립 전문학교는 그 수가 매우 적었고, 대학교는 경성제국대학이 유일했다. 그리고 입학에는 민족별 쿼터가 있어, 일본인 2명에 조선인 1명꼴로 허용됐다. 조선인이 조선에서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는 사실상 봉쇄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유학은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다. 일제 말까지도 전문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이 전체 인구의 0.13%에 불과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일제시대 후기까지 교사의 절대다수는 일본인이었고 한글대신
일본어에 창씨개명으로 우리이름조차 못쓰게 하였습니다.

일제가 부분적으로 한글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갔던 것은
어느정도 교육받은 노동력이 절실한데 일본어는 어려워 빠르게
양성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대타로 가르친 것입니다.
덕분에 한글을 가르치던 주시경등은 수시로 감옥을 왔다갔다
해야했습니다.

그리고 일제말기까지 필요한 노동력을 제외한 대부분은 교육기회
자체가 제한되었고 차별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가 전문학교 이상 0.13%, 중등교육 이상 1.03%, 문맹률 80%

소위 일제시대에도 부유해서 유학비등을 댈수 있거나 일제에
인정받은 황국시민의 자손들 말입니다.

문제는 그 수까지 합쳐서 1프로 였고 그건 가르친게 아닙니다.
거짓, 선동하는 분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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