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위 진법에서 최소 전투단위인 통을 구성하는 보병은 방패수(防牌手), 총통수(銃筒手), 창수(槍手), 검수(劍手), 궁수(弓手)의 병종으로 구성되며 기병은 기창(騎槍)과 기사(騎射)로 구성됩니다..
전투대형인 ‘진(陣)’을 구성할 때 기본 배치 대열은....
가장 바깥에 방패수(防牌手)가 자리잡고 그 뒤로 총통수(銃筒手), 창수(槍手), 검수(劍手), 궁수(弓手) 그 뒤로 기창과 기사가 배치됩니다.
오늘은 보병 병종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1. 방패수(防牌手)
다른 말로는 ‘팽배(彭排)수’라고 하며 이름 그대로 방패를 가지고 최일선에서 적의 공격을 막는 역할을 합니다. 현대로 보면 전경들의 데모진압 과정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듯... 방패 외에 환도로 무장하였습니다.
방패는 오위진법의 구성하는 여타 병종과 달리 정원 5천명 규모의 독립된 병종으로써 조선 초기 중앙군을 이루는 정예 병종 중 하나입니다.
조선 초기 방패의 종류에는 원방패와 장방패가 있었습니다.


(원방패 복원품)
원방패는 직경3척(63cm)의 원형 모양으로 주재료는 소나무이며 천과 가죽으로 안팎을 덧붙이고 테두리에는 철띠를 둘러 보강한 형태였습니다.
장방패 역시 몸체는 나무이며 표면과 뒷면에는 가죽과 천을 덮은 구조였습니다. 길이는 5척 6촌(117.6cm)이고 너비는 2척 2촌(46.2cm)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원방패는 보병이 휴대하고 전투에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장방패의 경우 실물 유물이나 자세한 기록이 없어서 조금 애매한 부분이 있습니다. 길이나 다른 나라의 사용예를 보면 입방패라 하여 서양의 파비스처럼 땅에 고정시켜 사용하는 방식이 아닌가 추정하고는 있습니다만. 조선 전기 입방패라는 기록이 실록에는 한번 밖에 등장하지 않아 장방패와 입방패의 용도가 동일한지는 좀 애매하다고 생각됩니다. 장방패가 파비스와 같은 용도의 입방패라면 방패를 땅에 고정시키는 고정장치가 따로 있어야 하는데 현재 남아 있는 기록이나 유물에서는 이를 뒷받침할만한 자료가 없는 실정입니다. 조선 전기 일반 남성의 키를 160cm라고 가정한다면 약 118cm에 이르는 길이는 상당히 긴 것으로 한손(왼손)으로 운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장방패 형태이면서 입방패가 아니라 원방패와 같이 보병이 휴대하고 전투를 할 수 있는 형태의 장방패가 있는데 서양에서는 탑형방패(tower shield)라고 하는 종류입니다.
궁중유물전시관에 이와 유사한 형태의 조선시대 방패 유물이 있는데 높이 83cm, 가로 40cm로 장방패보다 길이는 약 35cim, 너비는 6cm가 작아 보병이 충분히 휴대할 수 있는 크기입니다. 이 유물의 연대가 얼마나 되는지는 제가 아직 모르겠습니다만...
실록에 처음으로 방패를 만들어서 군에 지급했다는 기사를 보면....
[비로소 삼군(三軍)의 방패(防牌)를 만들었다. 그 모양은 널판으로 둥글게 만들기도 하고 길게 만들기도 하는데 모두 안쪽으로 오그라 들었다. 모두 안쪽에는 가죽[皮]으로 싸고 오채(五彩)를 베풀어 나두(螺頭)를 그렸고, 그 가운데 머리 위에는 동경(銅鏡)을 장치하였다. 보졸(步卒)을 시켜 왼쪽 손으로 이것을 잡고 자기 몸을 가리게 하고, 오른쪽 손으로는 칼[劍]을 잡고 마병(馬兵)의 앞에 서서 수병(守兵)이 되어 진퇴(進退) 용약(踊躍)하게 하여, 적(敵)으로 하여금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였다.]
원방패와 장방패 형태에 대한 설명은 ‘세종실록 오례의’의 설명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보졸(步卒)을 시켜 왼쪽 손으로 이것을 잡고 자기 몸을 가리게 하고,]라는 부분에서 ‘이것’이 원방패를 지칭하는 것인지 원방패와 장방패 모두를 지칭하는 것인지 해석에 따라 차이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궁중유물전시관의 장방패 수준이라면 위 기사 내용을 증명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개인 생각으로는 보병 주통과 전통 중 수비를 담당하는 주통의 방패수는 주통은 장방패를, 전투를 담당하는 전통의 방패수는 원방패를 사용하면 좀 그럴싸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하여튼...이건 이정도에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방패수는 가장 위협한 근접전투를 담당하였기 때문에 선발기준이나 이후 훈련 강도가 높았던 것 같습니다.
태종 시절 무과시험 도중 목창(木槍)을 가진 갑사와 목검(木劒)을 가진 팽배수의 대련 후 2명의 갑사가 사망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2. 총통수(銃筒手)
오위진법이 만들어지면서 독립된 병종으로 등장한 병종으로 이전까지의 진법에서는 대게 궁수와 합쳐져 분류되었습니다.
세종 때 비약적으로 발전한 화약무기의 성능으로 인해 오위진법에서는 하나의 독립된 병종이 됨과 동시에 방패수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병종이 되었습니다.
앞글에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1개의 통을 구성할 때 5종류의 병종이 비율은 균등한 것이 원칙인데 인원이 적을 때에는 창수, 검수, 궁수의 비율은 상황에 따라 가감할 수 있으나 방패수와 총통수 만큼은 반드시 정원을 맞추게 되어 있을 정도로 오위진법에서 중요한 병종입니다.
총통수가 이렇게 독립 병종이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세종 대의 화약무기 발전으로 인해 화약무기가 개인이 소지할 수 있을 정도로 소형화됨과 동시에 위력 면에서도 일반 궁시에 근접하거나 능가하는 성능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특히 화약 무기 특유의 소음(?)으로 인한 기선제압 효과를 높이 산 것이 총통수를 선제공격을 담당하는 병종으로 만들어 준 듯합니다.
오위진법 편찬 당시의 개인용 화약무기로는 일총통(一銃筒), 이총통(二銃筒), 삼총통(三銃筒), 세전총통(細箭銃筒), 세총통(細銃筒), 사전총통(四箭銃筒), 팔전총통(八箭銃筒) 등 다양한 화약무기가 존재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화살을 발사물로 사용하였으며 일발다전이 가능하였습니다.

총통수는 총통 외에 환도를 부무장으로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총통수가 일제사격 이후 방패수 뒤에서 환도로 근접전투를 담당했다고 보기에는 좀 그런데... 나름대로 고급병종인 총통수를 그냥 소비한다고 보기에도 좀 그렇고... 그렇다고 방패수 바로 다음이라는 포지션이 사격 후 뒤로 빠진다고 보기에도 애매하고...;;;
4. 창수(槍手)
말 그대로 창으로 무장한 병종으로 검수와 더불어 근접상황에서의 공격과 방어를 담당하는 근접전투병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 전기 창의 종류에는 장창(長槍)과 중창(中槍)의 존재가 보이며...세종오례의의 창 설명에는 길이가 날을 포함하여 11척 5촌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왼쪽부터 '세종오례의', '경모궁의궤', '국조의례의')
조선군 역시 장창과 방패수의 조합으로 적 기병의 돌격을 막는 전술을 사용한 듯합니다. 이성계가 왕년에 왜구와 전투 시 재미를 본 듯...
5. 검수 (劍手)
검수의 존재가 좀 애매합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검병(劍兵)인데...조선시대 검을 전투 무기로 사용한 예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다른 예로 환도를 ‘검’으로 칭하는 것을 생각하면 환도로 무장한 병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만...
오위진법 이전의 여러 진법에서는 ‘장검수(長劍手)’로 표현되는 병종이 존재합니다. 장검은 미첨도나 월도와 비슷한 무기입니다.(사진 참조)

그런데 오위진법에서부터는 단지 ‘검수’라고만 등장하기 때문에 진짜 환도수를 뜻하는 것인지...장검수를 간략하게 표현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전투력 측면에서 보자면 장검수가 맞을 것 같기는 합니다만...로마군의 예처럼 단병접전에서는 의외로 짧은 환도가 유용할 수도 있으니...
다만 이전까지 장검과 같은 장병기를 운용하던 전투교리를 갑자기 환도와 같은 단병기로 전환할만한 이유나 배경이 없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는 장검수였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나 생각하는데... 진실은 저 너머에...???^^;;
5. 궁수 (弓手)
역시 이름 그대로 활로 무장한 병종입니다.
조선 전기 전투용 활로는 조선을 대표하는 활인 각궁이 있었으며 그 외에도 여러 종류가 있었으나 성능 면에서 각궁에 많이 모자라며... 흑각궁에 근접하는 성능을 가진 활로는 한우뿔로 만든 향각궁이 있는데... 전투용으로는 아무래도 흑각궁과 향각궁을 많이 소지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화살로는 유엽전 등의 장전과 애기살인 편전을 사용하였으며 화살 보유 규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당나라 때 병법서인 ‘태백양경’에는 병사 1인당 지급하는 화살숫자를 30대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조선 후기 훈련도감 기병의 보유 화살수가 장전 20개, 편전 15개였던 것에서 조선 전기 궁수의 일인 휴대 화살수 역시 30대 내외 정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조선 전기 원칙상으로는 보병도 왠만하면 갑옷을 입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위병종도 모두 갑옷을 입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다만 구체적인 갑옷의 종류를 말하기에는 아직 내공이 많이 딸리는 이유로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