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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글...조총에 대해서...

작성자moko|작성시간07.07.19|조회수211 목록 댓글 0
조총[鳥銃]
 본문
전통 무기의 화약무기류 중 하나. 조총은 유럽에서 전래되었으며 탄약을 총신 끝에서 넣는 전장식 화승총이다. 이름은 “하늘을 날으는 새를 쏘아 맞혀서 떨어뜨릴 수 있다(能中飛鳥)”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다.
전체길이는 약95~200cm이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120~130cm 정도이다. 무게는 약 2~4kg이고, 최대 사정거리는 약 300m, 유효사정거리는 약 150m 이내인데, 실전에서는 약 50~100m 이내에서 사격하는 것이 보통이다.
중국 문헌 《천공개물》에서는 17세기 조총의 위력을 “약 47m이내에서는 새의 몸통이나 깃털이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고, 약 78m거리에서는 몸통은 남아나며, 약 155m거리에서는 위력이 없어진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보통 총신은 차가운 철봉에 뜨겁게 달군 철을 감아 단조(鍛造)해서 파이프 세 개를 만든다. 다음에는 이 세 개를 뜨겁게 하여 접합시키고 동으로 된 추를 사용하여 내부를 연마한다. 마지막으로 한 쪽을 휘어서 구멍을 막고 나무로 된 총상(銃床)에 붙인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주조로 제작된 것이 대부분이다.
조총의 점화장치로는 누르는 방식(버튼식)으로 방아쇠가 되어 있고 화승을 끼우는 망새가 총구 쪽을 향하고 있는 것과, 당기는 식(레버식)으로 되어 있고 화승을 끼우는 망새가 총상 쪽을 향하고 있는 두 종류가 있다. 중국에서는 앞의 방식이 주류였으며 뒷 방식의 조총은 서양총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에 전래되었다. 명나라 황제가 사용한 어제화창(御制火槍)은 이 후자의 방식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당기는 식이되 화승을 끼우는 망새가 총구쪽을 향하고 있다.
탄약을 장전하여 발사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숙련된 사수라 할지라도 20초에 한 발 정도이며 보통은 그 이상이 걸렸다. 조총은 다음 탄환을 사격할 때까지 시간이 걸려 전술적인 측면에서 이를 보완하는 조치가 필요하였다. 전장에서는 병사들 각자가 알아서 사격을 하는 것이 아니고 지휘관의 호령에 따라 일제히 사격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이유는 개별적으로 사격을 하면 적을 멀리서 쓰러뜨리려는 심리가 작용하여 유효 사정거리 밖에서 사격을 개시하기 쉬워 탄환을 허비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실전에서는 다음 탄환을 발사할 때까지 간격을 좁히기 위하여 병사들을 여러 대열로 나누어 순서에 따라 각 대열이 일제히 사격하는 방법을 취했다. 화승총은 비가 내리거나 강풍이 불면 사용할 수가 없어서 날씨에 따라 좌우되는 결점이 있었다.
《신기비결》에 나와 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사격 순서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세총(洗銃 ; 총열 내부를 청소한다)
2. 하화약(下火藥 : 총구로 총약을 넣는다)
3. 이삭장 송약실(以朔杖 送藥實 ; 삭장으로 총약을 안으로 밀어 넣는다)
4. 하연자(下鉛子 : 총구로 탄환을 넣는다)
5. 이삭장 송연자(以朔杖 送鉛子 ; 삭장으로 탄환을 안으로 밀어 넣는다)
6. 하지(下紙 ; 총구로 종이를 넣는다)
7. 송지(送紙 ; 종이를 안으로 밀어 넣는다)
8. 개화문(開火門 ; 화문을 연다)
9. 하선약(下線藥 ; 점화용 화약을 화약접시 안으로 넣는다)
10. 요화문 사문약 하합어신약(搖火門 使門藥 下合於身藥 ; 총을 흔들어 총약과 점화용 화약이 섞이게 한다)
11. 잉폐화문(仍閉火門 ; 화문을 닫는다)
12. 용두안화승(龍頭安火繩 ; 용두에 화승을 부착한다)
13. 청령 개화문(聽令 開火門 ; 명령에 따라 화문을 연다)
14. 준적인 거발(准賊人 擧發 ; 적을 겨눠서 사격한다)
전쟁이 끊일 사이가 없었던 유럽에서는 14세기에 중국으로부터 금속제 대포가 전래되어 총?포 등 우수한 화기가 잇달아 만들어졌다. 15세기 초기에 화승을 사용하는 점화장치가 발명되었고, 15세기 말에는 화승총인 아케버스(arquebus)라는 총이 발명되었다. 아케버스는 스페인에서 인기를 얻게 되어 테르시오(tercio)라 부르는 아케버스부대와 창부대를 전술적으로 함께 편성하여 실전에 투입하기도 하였다. 이 전술의 진가가 발휘된 것이 1525년에 있었던 파비아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스페인군은 프랑스군에게 대승을 거두며 프랑스 왕을 포로로 잡기까지 하였다. 이 전투를 묘사한 태피스트리(1530년 제작)를 보면, 스페인군이 사용한 화승총의 점화장치는 버튼방식으로 되어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레버방식의 점화장치는 16세기 후반에 개발되어 유럽 국가들의 화승총 표준이 된다. 조총은 두 경로를 통해서 중국에 들어왔다. 하나는 동남아시아를 통해서였다. 1498년 바스코 더 검이 인도양을 발견함에 따라 유럽인이 아시아로 진출하기 시작하며 이 진출과 함께 유럽인이 개발한 여러 가지 화기가 아시아에 전래된다. 이 화기에 가장 먼저 눈을 뜬 것이 당시 남지나 해 일대에 큰 해상세력을 갖고 있던 왜구들이었다. 일찍부터 유럽인과 접촉을 시작했던 왜구들은 처음 보는 이 우수한 화기로 무장을 하고 중국 연안에 그들의 활동무대를 넓혀나갔다. 왜구들이 즐겨 사용했던 무기는 버튼방식의 점화장치를 가진 조총이었다.
일본에 화승총이 전래된 것은 《철포기》의 기록에 의하면 1543년으로 되어 있다(당시 포르투갈인이 남긴 기록에서는 1542년). 이 기록의 진위나 이때 일본에 화승총이 처음으로 전래되었는지 아닌지는 상관 없이, 당시 다네가시마(種子島)를 찾아 온 포르투갈인이 타고 있던 선박은 포르투갈 선박이 아니고 왜구 두목인 왕직(王直)의 배였다. 따라서 일본에 화승총을 전해준 사람은 실질적으로는 왜구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또 하나의 경로는 서역(西域)을 통해서이다. 이 경로를 통해서 전달된 조총을 노밀총(魯密銃)이라고 부른다. 노밀은 나라 이름으로 터키를 말한다. 노밀총은 앞의 경우보다 더 늦게 전달되었기 때문에 종래의 조총보다도 신형으로 사정거리도 길고 훨씬 위력이 있는 총이었다. 총상은 기존의 조총과 다르게 되어 있어 어깨에 대고 사격하기 좋게 만들어져 있었다.
이 두 경로를 통해서 중국에 전래된 조총은 먼저 왜구들과 싸움이 빈번한 남쪽지역의 명나라 군사들이 그 위력을 알고 이 총으로 무장하게 되며, 나중에는 북방 유목 민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명나라 군대의 주력부대들도 이 조총으로 무장하게 되었다(16세기). 척계광이 생각해 낸 부대 편성방식에서는 전차부대의 16.5%, 기병부대의 14.5%, 보병부대의 40%를 조총으로 무장하게 하였다.
일본에서의 철포대(鐵砲隊)로서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척계광과 거의 같은 시대였음)의 철포대가 유명하였다. 1575년 나가사키(長篠) 전투에서 그는 3천 정의 철포를 사용하여 대승을 거두는데, 이때 노부나가군의 철포 무장률은 전체 병력의 불과 7.9%에 지나지 않았다. 나중에 에도(江戶) 시대에 들어서 군대 규정에서 철포 무장은 전체 병력의 8.5%였다. 어쨌든 명나라 군대의 조총 무장률은 일본 군대를 훨씬 상회하고 있었다.
조총은 대단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당시 강력했던 기병을 제압할 만한 힘은 지니고 있지 못했다. 일본에서는 고대 시대를 제외하고는 기병이 그리 발달하지 않아서 활로 무장한 기병 부대에 의한 싸움은 별로 없었다. 따라서 노부나가의 나가사키 전투에서도 기병은 사용되지 않았으며 이런 모습이 바로 중국에서의 전투와 다른 모습이었다.
예를 들어 1618년의 부차 전투에서는 유정(劉挺)이 지휘하는 동로군(東路軍)에 강홍립(姜弘立)이 이끄는 조선의 원군부대가 있었다. 이 부대는 1만 명이었으며 일본의 기술을 도입하여 만든 조총으로 무장된 병사가 5천 명이나 되었다. 유정과 강응건(康應乾)이 지휘하는 명나라의 주력부대가 누루하치가 이끄는 후금의 팔기(八旗) 기병에 의해 무너지자,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의 원군부대가 누루하치군과 대적하게 되었다. 전투는 일방적으로 전개되어 조선군이 조총으로 첫 사격을 하자 누루하치의 팔기 기병은 조선의 원군부대에게 다음 탄환을 장전할 틈을 주지 않고 돌격해 들어왔다. 결국 조선의 원군부대는 패하였다.
이러한 조총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 때는 임진왜란 직전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전인 1589년(선조22)에 일본 대마도의 종의지(宗義智)는 우리 조정에 조총 2점을 진상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위정자들은 조총의 뛰어난 성능에 놀라기는 하면서도 이를 통해서 새로운 화기를 개발하려는 생각은 못하였던 것 같다.
결국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새로운 무기 조총의 위력을 실감하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약 400여 년 전인 1592년 일본의 전국시대를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대군을 이끌고 우리 나라를 쳐들어 왔다.
당시 일본군은 철포라고 하는 총을 가지고 왔는데, 이것이 바로 조총이다. 조선군은 일본군 조총의 위력에 밀려 연전연패를 거듭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징비록》 등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문헌에 의하면 우리 선조들이 조총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가 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당시의 조총은 3연발이 가능하고, 치사율(致死律) 뿐만 아니라 명중률에 있어서도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던 활에 비해 5배나 되었다고 묘사할 정도로 무서움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선조는 조총을 “천하의 신기(神器)”라고 경탄하기도 하였다.
물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우리나라에는 중앙에 무기 제조기관인 군기시(軍器寺)가 있었고, 그곳에 27,000여 근의 화약과 천자총통·지자총통·현자총통·황자총통 등의 대형 화포, 그리고 승자총통·차승자총통·대승자총통·중승자총통·소승자총통·별승자총통·영자총통·측자총통 등의 휴대용 화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군이 사용하던 휴대용 화기는 승자총통 계열의 화기이다. 선조 때에 전라도와 경상도의 병마절도사를 지냈던 '김지' 가 육지 전투용으로 개발한 승자총통은 차승자총통·소승자총통·대승자총통·중승자총통·별승자총통 등으로 계속하여 연구 개발되었으며 그 제원도 다양했는데, 대체로 무게는 1.5~4kg, 구경 12~30mm, 길이는 20~76.5cm 정도로써 종래의 소화기보다 총신이 길었으며, 또 3개에서 15개의 탄환을 발사하고 사거리는 600보 정도였다.
그러나 이와 같이 다양하고 사거리도 비교적 길었던 화기를 장비한 조선군이었지만, 당시 조선군이 갖추고 있던 화기 대부분이 화기 발달사의 초기단계라 할 수 있던 지화식(指火式) 화기였었기 때문에 정확한 조준사격이 불가능하였고, 명중률도 낮았다. 또한 총의 규격이 너무 다양하고 통일되지 못함에 따라 제작하고 운용하는 데 있어서 많은 혼동을 초래하였다. 이에 반해 조총은 기존의 총에 비해 사격시 조작이 간편하였고, 조준이 가능하였기 때문에 명중률도 높았다.
이런 연유로 우리나라는 임진왜란 초기에 일본군에게 육전(陸戰)에서 연패하였다. 그러나 조선군은 초기 전투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우리나라와 일본군 화기의 성능상의 우열과 전술상의 차이를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하고 일본과 명나라의 선진 화기를 도입하는 것이 국난을 극복하는 최상의 길이라는 것을 느끼고 이를 위해 노력하였다.
선조 26년(1593) 2월, 당시 의주로 피난을 가 있던 선조는 화포장(火砲匠)으로 하여금 조총을 시험적으로 쏘아보게 하였는데, 이 때 명나라군(明軍)의 주모(周某)라는 자가 우연히 이를 보고 자신에게 사람을 보내면 조총과 염초의 제법을 지도해 주겠다고 제의하였다 한다. 이에 선조는 비밀리에 그 사람과 접촉하여 기술을 배워오도록 지시하였다.
또 왜병 포로 가운데서도 약간의 총포 지식을 가진 자라면 조총과 화약 제조장에 투입하는 것이 기술을 익히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고, 포로 중에서 흉폭하고 교활하여 다스리기 어려운 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조총과 염초 제조장에 투입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이렇듯 우리나라는 조총의 제조법을 알아내기 위해 부역 죄인을 심문하여 그 제조법의 전습 여부를 확인하고, 적으로부터 노획한 조총을 행재소(行在所)에 올려 보내게 하여 심사하게 하는 한편, 항복한 왜인을 동원하여 조총에 대한 기술을 알아내고 조총을 시험 제작하는 등 보다 발전된 화기 제조술을 배우려는 여러 가지 노력을 경주하였다.
이러한 노력들이 쌓여져 마침내 조총의 제조기술을 완전히 익히기에 이르렀다. 더 나아가 같은 해 12월초에는 중앙에서 뿐만이 아니라 지방의 감영(監營)·병영(兵營)에서도 조총을 제조하게 될 정도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몇 가지 난관도 있었다. 하나는 제작의 기술적인 문제로 조총 총신을 제조함에 있어서 그 제조법이 교묘하여 제조가 쉽지 않았으며, 제조된 조총의 성능도 떨어졌다. 또 조총을 만드는 철이 부족하고 재정이 궁핍하였기 때문에 제조되는 조총의 수량이 매우 적었다.
이에 따라 선조는 중앙에서 숙달된 철공(鐵工) 5~6명을 뽑아서 훈련도감으로 하여금 이들에게 조총 제조하는 법을 교육시키게 한 뒤, 황해도, 충청도 지역의 탄과 철이 풍부한 곳에 내려 보내 그곳에 도회소(都會所)를 설치하여 조총 등의 화기를 제조토록 하였다. 또한 지방에서도 자체적으로 조총을 조달하도록 하였고, 상납도 적극 권장하였다.
선조 27년 4월, 조총을 자주 올려 보낸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조총을 가지고 상경한 그의 아들 원사웅(元士雄)에게 관직을 제수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또 전쟁의 화(禍)가 크지 않았던 전라도와 경상도의 병영과 수영에서는 숙련된 장인들을 모아 조총을 제조하기도 하였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이순신(李舜臣)장군이다. 《난중일기(亂中日記)》에 의하면 이순신장군은 선조 26년 9월 14일 왜군의 조총을 모방하여 우수한 성능의 조총을 제조하는 데 성공하고, 이를 인근 고을에 보내 제조토록 하였다는 보고 내용이 있으며, 진주성 전투에 대한 보고문인 '진주수성승첩장(晋州守成勝捷狀)' 에도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이 진주성에서의 전투에 대비하여 170여 점의 조총과 화약을 제조하여 전투에 사용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아울러 경상도지역에서 활동한 김성일(金誠一)도 산청에 있는 지곡사에서 호남지방에서 모집한 숙련공들을 통해 정철(正鐵)을 가지고 조총을 제조하였다 한다.
이와 함께 조선은 조총 등의 새로운 화기를 도입함과 동시에 이에 적합한 군사의 편제와 전술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선조는 26년(1593) 2월 중앙과 지방의 군사들에게 조총을 학습하도록 하여, 조총사격술을 과거시험과목에 넣었고, 조총 3발을 사격하여 1발 이상 명중시킨 자를 선발하였으며, 같은 해 6월에는 군기시로 하여금 서울에 와 있는 명나라의 참장 낙상지(駱尙志)의 진지에 약간 명의 포수를 보내어 포술을 익히게 하였고, 다음 달에는 행재소의 무신 및 금군과 화포장에게 명군의 각종 화포를 비롯한 방패·낭선·창·검 등을 익히도록 하는 등 포수의 양성을 본격화하였다.
선조 27년 2월 훈련도감이 임시기구이기는 하지만 하나의 어엿한 군영으로 정식으로 발족하게 되었다. 훈련도감의 창설로 조선군의 전술은 종래의 궁시 위주에서 포(조총)·살(창검) 위주로 바뀌게 되었으며, 이를 위하여 조총을 포함한 각종 화기의 개발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리고 지방에서도 포수를 양성하고 속오군(束伍軍)을 편성하기 위해 화기를 자체 생산하여 조달할 수 있도록 기존의 ‘훈련사목’에 그 내용을 추가하여 각 도의 감영·병영·수영 및 각 읍에 반포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선조 31년(1598) 2월 선조가 명나라 제독 마귀(馬貴)에게 조선군의 전장에서의 활약을 묻는 물음에 답하여 “조선 포수들이 적을 많이 명중시켜 가상하나 다만 그 수가 적은 것이 한스럽다.”고 한 것과 같이 조선의 포수는 상당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러한 노력은 임진왜란의 전황에 있어서 수세적인 국면을 타개하는 데 커다란 힘이 되었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우리나라에는 국방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이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화기기술에 대한 지식이 널리 보급되었고 무기생산에 대한 정부의 관심도 높아졌다.
따라서 화기제작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기관으로서 조총청(鳥銃廳)이 설치되었고, 이곳에서 조총의 대량생산이 이루어졌다. 그 뒤 광해군 6년(1614) 7월 14일에 국방의식의 증대로 화기 제작의 중요성이 커짐에 따라 조총청을 화기도감(火器都監)으로 확대 개편하였다.
그리하여 광해군 14년(1622) 10월에만 해도 조총 900여 정과 화포 90문을 포함하여 기타 무기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또 훈련도감에서는 인조 6년(1628) 호남지방에 표류해 온 네덜란드인 벨테브레(Weltevree ; 후에 박연으로 개명)를 불러들여 화포를 제작토록 하였고, 그의 후손들을 훈련도감 군적에 편입시키는 등 신무기의 개발에 주력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인조 5년(1627)에는 연간 1,000정이던 조총 생산량이 10년 후에는 그 두 배인 2,000정까지 증가되었다. 이렇게 생산된 조총은 자체 내의 도감군(都監軍)에게 지급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타의 중앙군과 개성부나 황해·평안·함경도 등의 국방상 요지에도 공급되었다.
이렇듯 우리나라는 임란 중에 조총의 제조를 전습받은 지 30여 년이 지난 인조 년간에 이르러서는 국내에서 생산된 조총이 일본의 것보다 훨씬 더 우수하다는 자신감까지 표명하게 되고 제조 수량도 꾸준히 증가하였으나, 임진왜란 직후의 개발수준을 뛰어넘을 수가 없었으며 전술 역시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임진왜란을 계기로 보급된 조총은 정규군보다 오히려 사냥꾼의 수렵기구로 활발히 사용되어 포수는 상당한 사격솜씨를 자랑하게 되기도 하였다.
이후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다시 한번 국방의 중요성을 깨닫고 군사제도를 정비하고 군비를 강화하며 있을 수 있는 적의 재침에 대비하였다. 효종은 북벌(北伐)이라는 정책의 추진 속에서 무기생산에 진력하였고, 조총병 육성에 진력하였다.
특히 군사들을 무장시키는 데 가장 비중을 많이 차지한 것은 조총이었기 때문에 우선 조총을 질량적으로 개선하고 그 생산을 늘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인조 때와 마찬가지로 효종 6년(1655) 7월에는 제주도에 표착한 네덜란드인 하멜(Hamel) 일행을 서울로 압송하여 훈련도감에 배속한 후 신무기 기술을 전수하도록 조처하여, 하멜은 도감군과 같은 급료와 보포(保布)를 지급받으면서 새로운 조총의 제조에 참여하였다. 이때 하멜 일행은 자신들이 소지했던 총을 모델로 하여 조총을 제작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조총이 많이 생산되고 그에 기초하여 조총부대가 조직됨으로써 군대의 무장장비가 현저히 강화되어, 1655년 국경지역에 조총 6,499자루와 5,049명의 포수들이 배치되었던 것이다.
이후 우리나라에서 제작한 조총의 우수성은 대외적으로도 널리 알려졌는데, 효종 8년 3월(1657) 청나라는 우리나라의 조총을 대량으로 무역해 줄 것을 요청해 오기도 하였으며, 또한 우수한 조총병의 지원을 요청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변급과 신유(申瀏) 장군의 2차례에 걸친 나선정벌은 이러한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2차 나선정벌 당시에 흑룡강에 출병하게 된 조선군의 출정인원은 포수 200명을 포함한 총 304명이었다.
신유 장군의 출병에 관한 사실이 기록된 《북정일기(北征日記)》를 보면 조선군은 출병 전에 2번, 출병 후에 3번 등 5차례에 걸쳐 연습 사격을 하였는데, 그 데이터를 보면 사격 실력이 매우 우수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조총병의 사격 실력은 평균 25.8%의 명중률을 보여 4발 중에서 1발을 맞추는 정도의 실력을 보였으며, 5월 18일의 사격에서는 32.5%의 명중률, 5월 17일의 사격에서는 20% 명중률을 보이는 등 약간의 편차를 보이지만 우수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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