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데 없이 제목만 엄청 길군요...^^
1592년 4월 14일 부산진을 공격하여 점령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다음날 동래성을 3면에서 포위합니다.
이에 앞서 일본군 침입 보고를 받은 경상좌병사 이각과 울산군수 이언성, 양산군수 조영규가 각각 휘하 병력을 이끌고 동래성에 입성하였습니다. 하지만 적세에 겁을 먹은 이각은 곧 성을 빠져 나가 소산역으로 나서 역시 동래성을 응원하러 온 밀양 부사 박진 부대에 합류합니다.
그림 좌측 상단에 도망가는 이각...
고니시는 전투 전 남문 밖에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라는 패목을 세워 항복을 권했고, 송상현은 곧 거기에 [싸우다 죽는 것은 쉽지만, 길을 빌려 주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라고 회답하였죠.(유명한 일화죠...)
전투가 시작되자 송상현을 비롯한 지휘부는 남문을 중심으로 방어를 합니다만 일본군은 수비가 취약한 인생문 방면을 집중 공격하여 성벽 일부를 무너뜨리고 성 안으로 난입합니다.
적이 성 안으로 들어오자 송상현은 최후를 감지하고 조복으로 갈아입고(혹은 갑옷 위에 있었다고도...) 북쪽을 향해 네 번 절한 다음, 가지고 있던 부채에 고향의 아버님에게 보내는 유시 한 수를 남기고 일본군에 의해 살해당합니다.
孤成月暈 (고립된 성을 적이 달무리처럼 에워쌌고)
大鎭不救 (진을 구할 길이 없사옵니다.)
君臣義重 (군신간 의리가 중하여 여기서 죽게 되니)
父子恩輕 (부모님의 은혜를 소홀히 하는 불효를 용서하소서)
붉은 조복 오른편에 있는 사람이 양산군수 조영규라고 합니다. 역시 전사했습니다.(
울산군수 이언성은 포로로 잡혔다가 며칠 뒤 풀려 납니다.)
민간인도 전투에 참여해서 일본군에게 저항하여 민간이 피해가 컸습니다. 그 중 김상과 이촌녀로 알려진 두 여인이 지붕 위에서 기왓장을 깨서 일본군에게 저항했습니다만 모두 살해당했습니다.(이촌녀는 특정인 이름이 아니라 이름을 모르는 두 명의 여자라는 뜻(二村女)) 민간인 피해가 얼마나 심했는지 훗날 양산 군수 조영규의 아들이 아버지의 시신을 찾으러 동래성에 왔다가 시신이 너무 많아 찾지 못했다고 했으며 매년 4월 15일이면 성 안 거의 모든 집안이 다 제사를 지냈으며 일가가 모두 사망하여 제사를 못 지내는 집도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최근 동래역 지하철 공사로 인한 발굴작업 중 인골 수십구가 발견되어 당시 전투의 치열함과 처참함을 보여주었는데 조선 후기에도 동래성 증축 공사 때도 시신이 일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1872년 지방지도 기준 - 부산진, 동래성, 소산역 위치
(당시 동래성은 임진왜란 당시보다 증축된 상태임.)
(현재 동래성과 소산역 위치)
(*증축된 조선 후기 동래성 기준이므로 임진왜란 당시에는 성이 더 작았을 것으로 추정됨.)
(*다섯 성문 중 현재 남아 있거나 복원된 성문은 북문과 인생문 뿐이고 남문, 서문, 동문은 위치 표시되어 있다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