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 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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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Ⅰ. 분석 틀 1. 전투와 국가통합 2. 분석틀
Ⅱ. 제1차 진주성전투 승전과 국가통합 1. 전투배경 및 원인 2. 전투준비 및 과정 3. 전투결과
Ⅲ. 제2차 진주성전투의 옥쇄와 국가통합 1. 전투배경 및 원인 2. 전투준비 및 과정 3. 전투의 의의
Ⅳ. 사회갈등 요소별 국가통합
결론 및 국가통합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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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대학교 공공인재학부 교수
**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연구관
서론
역사상 국가적 위기에 분연히 떨쳐 일어나 목숨을 바친 사례는 한 국가의 구성원들에게 애국심을 돋우는 기폭제가 된다. 중과부적의 병력으로 적병에게 대승을 거둔 무장들의 전공과 무용담은 사회구성원의 애국심과 감흥을 이끌어내기 충분하다. 그러나 선대가 남긴 역사가 후대에게 한 순간의 유흥을 위한 자료로만 활용된다면, 이는 매우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편향된 기록에 의존하여 정당하지 못한 역사적 서술을 사실로 인식하고, 잘못된 교훈을 얻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이러한 점에서 임진왜란(1592~1598) 시 진주성에서 벌어진 두 차례 전투(1차 1592년 10월, 2차 1593년 6월)만큼 편향된 기록에 의해 역사적 인식이 왜곡되어 있는 사례를 찾기도 어렵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초기에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부산, 한양, 평양 등 조선의 핵심지역을 점령하였다. 1592년 4월 13일 부산에 일본군 1군이 상륙한 이후, 4월 13일 부산성이 함락된 것을 시작으로 5월 3일 한양성, 6월 15일 평양성이 함락되었다. 이 기간 동안 대부분의 조선의 성은 전투다운 전투를 벌이지 못한 채 함락되었고, 관군이 동원된 상주전투, 충주 탄금대전투, 용인전투에서 조선군은 일본군에 일방적으로 패하였다. 물론 이 시기에도 경기도 양주의 해유령전투와 경상도 의령군의 정암진전투에서 신각과 곽재우가 승리를 거두기는 하지만 소규모 전투이기 때문에 전체적인 전쟁의 흐름을 바꿀만한 규모는 아니었다.
유성룡의 『징비록』을 비롯한 많은 문헌에서는 임진왜란의 이미지를 조선조정의 갈등 및 내분, 전쟁준비 부족, 선조와 관군의 무능, 전투의 패배 등으로 묘사하고 있다. 실제로 임진왜란은 한국인들에게 국왕을 비롯한 관과 군의 무능과 전투패배, 전투로 인한 백성들의 고생 등으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로 각인되어 있다. 또한 임진왜란 전투 중에서 이순신장군의 해전 승리, 진주성 1차 전투와 행주산성전투, 그리고 의병의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만이 조선군의 승전사례로 회자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일본이 작성한 책자와 문서의 기록에 따라 임진왜란 과정에서 발생한 일본군의 피해를 살펴보면 임진왜란을 바라보는 시각이 기존에 알려진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24년 일본군 참모본부가 임진왜란이 정당한 전쟁이었음을 전제로 기술하여 편찬한 『일본전사 조선역(日本戰史 朝鮮役)』의 기록만 살펴보더라도 임진왜란동안 많은 일본군 사상자가 발생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영토를 온전히 점령하려는 전쟁의도가 완전히 실패하였음을 알 수 있다.1)
1592년 4월 임진왜란 개전 초부터 참전한 일본군은 1번대에서 9번대까지 158,700명이고, 큐슈(九州)의 나고야성(名護屋城)에 예비군으로 준비된 병력은 10번대에서 16번대까지 118,300명으로 총 28만 명이 넘는다.2) 일본측 기록에는 1592년 4월 1차로 1~9번대가 조선에 상륙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 외 부대가 조선에 상륙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런데 1593년 6월 진주성 2차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일본군에게 하달한 작전명령서에 조선침략 직전 구성된 제대 중 1번대에서 9번대까지의 지휘관뿐만 아니라 10번대에서 16번대까지의 지휘관도 기록되어 있다.3) 이것은 일본군이 임진왜란 개전초 많은 병력손실이 발생함으로써 예비로 규슈지역에 대기하던 10번대에서 16번대까지의 병력도 임진왜란에 참전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임진왜란 개시와 함께 참전한 일본군은 28만 6천명에 달하는데 반해, 2차 진주성전투개시 전(1593년 6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작전명령서 상에 기록된 공격 및 수비가담 병력의 총수가 11만명에 불과하다. 이는 1592년 4월부터 1593년 6월말까지 약 1년 3개월 동안 일본군은 최대 17만 명이 전사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또한 일본군이 계속 승리한 것으로 기록된 임진왜란 초기 1년 동안, 일본군의 한양성 점령 이후 조선 8도를 분할 점령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각 군의 사망자 수를 살펴보면, 조선영토의 점령의도를 달성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개전 초기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작전명령서 상의 1번대에서 9번대까지의 부대로 하여금 조선 8도를 분할 점령하도록 하였으나, 이들은 각도의 점령에 성공하지 못하였고, 조선군 및 의병과의 전투 중 많은 사망자를 냈다.4) 예를 들어, 일본군의 선봉에서 가장 많은 전투기록을 남겼고, 평양까지 점령한 바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1번대는 1592년 3월 조선출병 당시 18,700명 규모였으나, 1년 후인 1593년 3월에는 7,415명만이 생존하여 사망률이 60.34%에 달하였다. 그러나 전투기록이 많지 않은 황해도에 주둔했던 일본군 3번대(대표장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는 같은 기간 동안 사망률이 53.80%, 강원도에 있었던 일본군 4번대(대표장수: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의 사망률은 56.35%, 충청도에 주둔했던 5번대(대표장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의 사망률은 45.27%에 이른다.
이러한 사실은 임진왜란 개전초기부터 조선 전역에서 끊임없는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일본군의 임진왜란 참전병력수와 사망자수는 임진왜란을 새롭게 해석할 여지를 남긴다. 무엇보다도 조선이 전쟁을 준비하는 데 있어 국가통합을 이루지 못함으로써, 임진왜란 내내 패전을 거듭한 것이라는 한국인들의 인식은 왜곡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므로 바뀔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
이에 본 연구는 임진왜란 시 두 차례에 걸친 진주성전투 배경과 준비, 과정 및 결과를 살펴봄으로써 조선이 국가통합을 바탕으로 전쟁준비에 임하고 있었다는 점을 밝히려고 한다. 특히 2차에 걸친 진주성전투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서, 조선이 일본군에게 일방적으로 패퇴한 것이 아니라 국왕 아래 전 백성이 왜군을 물리치겠다는 통합된 의지와 노력으로 전쟁에 임했기에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했음을 밝히고자 한다. 또한 두 차례 진주성 전투과정에서 일본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함으로써 임진왜란의 전세(戰勢)를 극적으로 변화시켰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를 위해 2차례의 진주성전투의 배경, 과정 및 결과를 살펴보고,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게 되는 지역갈등, 계층갈등, 정치이데올로기 갈등 등 갈등요인들이 어떻게 해소되고 통합될 수 있었던 것인지를 추적하고자 한다. 또한 진주성전투가 오늘 우리사회가 당면한 국가통합의 과제에 대해 함의하는 바를 이끌어내고자 한다.
Ⅰ. 분석 틀
1. 전투와 국가통합
국가사회통합이란 용어를 한 국가 혹은 사회의 구성원이 합의하는 가치를 이끌어내어, 이에 국가사회적 제도 및 기능을 일목요연하게 조화시키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면, 전쟁 및 전투상황 하에서 국가사회적 통합은 생존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작동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생사의 불확실성에 직면하게 되는 전쟁 상황에서는 생존의 가치가 극대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차적으로 개인의 생존을 도모해야하는 상황에서 개인의 생존을 국가사회적 생존으로 승화시킬 수 있어야 진정한 국가통합을 달성할 수 있다. 사실 국가사회를 위해 각 개인이 죽기로 각오하고 싸운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것이다. 특히 죽을 것이 확실한 전쟁상황에서 죽기를 각오한다는 것은 1차적 생존의 욕구를 넘어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개인적 생존을 넘어선 국가사회적 생존을 위해 결사항전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전장환경과 전장심리에 대한 이해를 수반한다. 전장환경은 자연조건(지형, 기후, 질병, 야음, 강풍, 강설, 홍수 등), 적의 기도와 전술, 무기체계, 사기, 심리상태에 강한 영향을 받게 된다.5)
특히 사기 측면에서 과중한 책임감, 집단상황의 불명확, 상급자 및 동료관계의 악화는 집단 역량을 저하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심리적 측면에서 공황과 불안, 유언비어 유포와 타인의 생각이나 행동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피암시성의 증대와 가치판단의 하락은 심리적 위약감을 가중시키는 요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전쟁상황에서 발생하는 사기악화 및 전장심리의 부작용을 극복하고 구성원간의 갈등을 효과적으로 통합하기 위해서는 인적ㆍ제도적 조치들이 대단히 중요하다.6)
진주성전투가 국가통합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본 논문의 주장을 단순히 전투개시 이후에 생존을 위한 집단적 노력이 잘 조직화되었다는 점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진주성전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임진왜란 과정을 통틀어서 진주성전투만큼 일본군의 거의 대다수 병력이 장시간에 걸쳐 공격을 감행하고, 또한 조선군이 최후의 순간까지 수십 차례 공격을 막아낸 사례가 없다. 또한 진주성전투를 포함하여 임진왜란 이전부터 국가적 위기상황에 대한 대비와 이를 위한 국가적 통합과정이 없이는 진주성전투 과정과 결과를 설명할 수 없다.
진주성 전투는 이스라엘의 마사다 전투에 비견될 만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전투의 결과가 현재의 국가통합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찍이 역사상 로마군의 공성전에서는 패배하여 전멸당한 이스라엘의 마사다 옥쇄(玉碎) 항전기록은 하나의 전투사례를 넘어서 현재까지도 국민통합 혹은 국가통합을 위한 좋은 표본이 되기 때문이다.7)
2. 분석틀
본 연구는 <표 1>과 같은 내용과 절차로 진주성전투의 국가통합적 의미를 살펴볼 것이다. 두 차례에 걸친 진주성전투에 대해서는 전투배경, 전투준비, 전투과정, 전투결과를 진주성전투라는 지역적 한계에 가두는 미시적 관점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임진왜란 전체 과정이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살펴보아 두 차례의 진주성전투를 임진왜란 전체과정에서 발생한 필연적 사건의 흐름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또한 조선이 갈등과 분열의 상황에서 임진왜란에 임했다는 기존관점에서 탈피하여 조선의 전 구성원이 국가통합을 이룬 상태에서 임진왜란을 극복했을 것이라는 관점에서 진주성전투를 분석할 것이다. 또한 본 연구에서 전제한 국가통합적 관점의 타당성을 밝히기 위해 임진왜란 과정에서 조선의 지역갈등, 계층갈등, 정치이데올로기 갈등 등 주요한 갈등요인에 대해서 논의할 것이다.
<표 1> 분석 내용 및 절차
1차 진주성전투의 국가통합 의미 | → | 2차 진주성전투 국가통합 의미 | → | 1,2차 진주성전투의 갈등요인 진단 |
전투배경 및 원인 전투준비 및 과정 전투결과 | 전투배경 및 원인 전투준비 및 과정 전투결과 | 지역갈등 계층갈등 정치이데올로기 갈등 |
진주성전투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임진왜란 과정에서 진주성전투를 바라보는 기존의 전투과정서술 중심의 미시적 관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제기된 의문점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거시적 관점을 제시하려 한다. 특히 1차 진주성전투의 논의에 있어서는 기존의 관점에 대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첫째, 기존의 역사관점에서는 1차 진주성 전투를 경상도지역에 국한된 지역적 전투로 다루고 있다. 또한 명나라 개입 이후 각지에서 벌어진 의병항쟁으로 그 의미를 축소하고 있다. 1차 진주성 전투가 일본군의 호남지역 점령을 위한 전초전 성격의 지역적 전투인가, 또는 지역을 초월한 조선인 전체 민관군의 국가통합에 의한 준비된 승전인가를 논의할 것이다. 둘째, 진주성전투를 기록하고 있는 일본측의 『일본전사 조선역』은 1차 진주성 전투를 제대로 기록하고 있지 않다. 다만 2차 진주성 전투에서의 일본군 승전을 다루는 과정에서 1차 진주성전투의 패전을 암시하고 김시민목사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일본이 감추고 있는 1차 진주성 전투의 진정한 가치를 논의할 것이다.
2차 진주성전투의 논의에 있어서는 기존의 관점에 대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의문점을 제기하고자 한다. 첫째, 일본은 임진왜란을 일본군의 승전, 조선군의 무력함과 패배, 명군의 개입에 의한 종전으로 묘사하고 있고, 한국의 학계도 이를 받아들이고 있다. 특히 2차 진주성전투를 일본에서는 자국의 완벽한 승전으로 평가하고 있고, 한국의 학계도 2차 진주성전투를 패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2차 진주성 전투를 과연 일본군의 승전, 조선군의 패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인가를 논의할 필요가 있다. 일본군은 조선 각지에서 전투를 치루고 있던 전 병력인 약 10만 명을 동원하여 진주성을 공격한 반면, 조선에서는 관군의 지원 없이 진주주둔군 3천 명과 의병 3천 명만으로 진주성을 방어했다. 2차 진주성 전투를 기존 학계의 평가대로 패배로 볼 것인가, 아니면 조선민의 계획된 옥쇄로 볼 것인가를 논의할 것이다. 둘째, 기존의 학계는 2차 진주성전투를 조선군의 분열된 리더십에 의해 패배로 연결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8) 또한 명군과 조선군의 진주성 방치로 인해 2차 진주성전투의 패배를 자초했다고 전투패배에 초점을 두고 있다. 2차 진주성전투를 패전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2차 진주성전투 이후 진주성을 점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의도대로 일본군이 호남을 비롯한 3남 지방을 점령하지 못하고 일본군이 부산지역으로 후퇴하는 동시에 임진왜란 종전을 위해 명군과 종전협상을 서두른 이유가 무엇인지를 논의할 것이다.
조선인의 갈등과 분열에 의해 임진왜란을 대비하지 못하고 지속적인 전투패배로 이어졌다는 식의 기존 학계의 평가에 대해 본 논문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하면서 재평가를 시도한다. 첫째,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가장 첨예한 사회갈등의 요인인 지역갈등이 임진왜란에 대응하는데 있어 영향을 주었던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두 차례에 걸친 진주성전투에 참전한 관군과 의병의 출신지역에 관한 정보 등을 검토함으로써 이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진주성전투 당시에 계층갈등의 요소들이 있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두 차례의 진주성전투에 어떤 계층의 조선인이 참여했는지를 밝히면서 국가사회통합에 저해요소가 될 수 있는 계층갈등요소와 이에 대한 극복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Ⅱ. 제1차 진주성전투 승전과 국가통합
1. 전투배경 및 원인
진주성전투 배경을 비롯한 임진왜란의 전반적인 과정은 일본군이 조선을 장악하기 위한 전략과 그에 따른 병력운용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최소한 임진왜란 초기의 전체적인 전투양상은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전투작전명령에 입각하여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1592년 5월 3일 한양성 함락 때까지는 도성 함락을 위해 전 부대의 기동을 한양으로 집중하였다. 하지만 한양성 함락 이후 6월부터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작전명령에 따라 조선 전체를 경영하기 위해 각 부대를 조선 8도에 분산 배치하였다(<표 1> 참조). 실제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5월 13일 왜장들에게 조선 8도를 각각 점령하도록 하고 조세(군수물자)의 조달량을 할당하는 문서를 하달하였다.9) 조달량은 총 1,191만 6,186석이며, 각 도별로 할당량을 정하고 있다. 이같이 한양성 점령 이후 일본군의 각 부대를 조선 8도로 배치하고, 각 지역별 조달물량까지 정한 것은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 8도를 실질적으로 점령하려는 의도로 파악된다.
<표 1> 조선 8도 지역별 일본군 배치 및 조세 조달량
지역 | 일본군 부대 | 일본군 병력 수 | 주요 도시 | 조달물량 할당량 (석) |
평안도 | 1번대 | 18,700 | 평양 | 1,794,186 |
함경도 | 2번대 | 22,800 | 길주, 함흥 | 2,071,028 |
황해도 | 3번대 | 11,000 | 황주, 용천 | 728,867 |
강원도 | 4번대 | 14,000 | 금화, 충천, 원주, 철원 | 402,289 |
충청도 | 5번대 | 12,400 | 죽산, 문경, 상주 | 987,514 |
충청도 | 6번대(5번대로 통합) | 12,700 | 충주, 음성 | |
전라도 | 7번대 (6번대로 개칭) | 15,700 | 평산, 개성 | 2,269,379 |
경상도 | 8번대 (7번대로 개칭) | 30,000 | 개령 | 2,887,790 |
경기도 | 9번대 (8번대로 개칭) | 10,000 | 한양 | 775,133 |
자료: 參謀本部編, 『日本戰史 朝鮮役』, 村田書店, 1924, 65~73쪽; 參謀本部編, 『日本戰史 朝鮮役』, 附記, 村田書店, 1924, 71쪽.
5월 초 한양성 함락 때까지는 부산에서 서울까지의 축(軸)선상에 있는 각 도시에서 전투가 발생하였지만, 6월 이후부터는 일본군의 각 부대가 맡은 지역으로 분산배치되었던 6월부터는 조선 전역에서 일본군에 맞선 조선관군과 의병의 전투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각 지역에서 발생한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는 1592년 4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작전명령서에 나타난 일본군 각 부대 및 지휘관 별 일본군 병력수와 이로부터 1년 2개월 후인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전투 직전에 일본군의 각 부대 및 지휘관 별 일본군 병력수를 비교하면 쉽게 알 수 있다.
<표 2> 일본군 각 부대별 사망자수
지역 | 일본군 부대 | 1592년 조선출병당시 병력 | 일본군 잔여 병력수 (1593년 6월) | 사망자수 (사망률) |
평안도 | 1번대 | 18,700 | 7,415 | 11,285 (60.34) |
함경도 | 2번대 | 22,800 | 14,432 | 8,368 (36.70) |
황해도 | 3번대 | 11,000 | 5,082 | 5,918 (53.80) |
강원도 | 4번대 | 14,000 | 6,110 | 7,890 (56.35) |
충청도 | 5번대 | 25,100 | 15,694 | 9,406 (37.47) |
전라도 | 6번대 | 15,700 | 8,744 | 6,956 (44.30) |
경상도 | 7번대* | 30,000 | 16,600 | 13,400 (44.66) |
경기도 | 8번대 | 10,000 | 7,785 | 2,215 (22.15) |
합계 | 147,300 | 81,118 | 66,182 (44.74) | |
주: 1) 일본군 병력수 중 ① 1592년 조선출병당시 병력은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작전명령서 상의 인원이고, ② 일본군 잔여병력수는 조선내 잔여병력을 모아 1593년 6월 2차 진주성공격을 위해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내린 작전명령서상의 편제 병력수를 의미한다.
2) 7번대의 파견 병력수는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의 30,000명이다. 잔여 병력 수는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의 3,000명에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의 13,600명의 병력을 더한 것이다.
자료: 參謀本部編, 『日本戰史 朝鮮役』, 附記, 村田書店, 1924, 95쪽.
<표 2>는 일본군 1번대에서 8번대까지 1차로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조선의 각 지역에 파견된 일본군 병력수와 파견된 지 1년 2개월 후 남은 병력 및 사망자 현황이다.10) 임진왜란에 파견된 일본군수와 1년 2개월 후에 남은 일본군수를 비교한 위의 내용은 조선 전역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전국적으로 벌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부산 동래성전투를 시작으로 충주 탄금대전투, 한양성 함락, 4차에 걸친 평양성전투 등 임진왜란 중 가장 많은 전투기록을 가지고 있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1번대의 사망률은 60%가 넘는다. 일본군 1번대의 사망률은 임진왜란 기간 동안 전국적으로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임진왜란 중 전투기록이 별로 없는 황해도, 강원도, 충청도 지역에서도 각각 파견병력의 53.8%, 56.35%, 40.43%가 사망했다. 이것은 임진왜란 중 조선인이 전국적으로 침략군인 일본군에게 끊임없이 도전하여 양측 모두 큰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것을 방증한다. 또한 이것은 일차적으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 8도의 완전한 점령 및 조달물자의 확보 전략에 중대한 차질이 있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전라도 지역을 담당한 일본군 6번대의 전투기록은 또 다른 의미를 시사한다. 일본군 6번대는 한양성 함락 이후 영동과 무주를 거쳐 금산성(錦山城, 현 충남 금산)에 본부를 주둔시켰다. 이 부대는 1592년 7월부터 웅치와 이치를 넘어 전라도 전역을 장악하기 위해 전주성으로 향하였다. 이 부대는 조선군의 저항을 받았지만 끝내 웅치와 이치를 돌파하고 전주성 앞까지 도달하였지만 바로 금산성으로 후퇴하였다. 일본군 6번대가 금산성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금산성에 있는 일본군 본대를 고경명이 이끄는 의병이 공격했기 때문이다.11) 금산성이 조선군에 점령당한다면 일본군 6번대는 조선군 및 의병에 의해 포위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본군의 움직임은 전반적인 임진왜란 전쟁 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밖에도 일본군이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한 이유는 남해 바다에서는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이 일본수군의 진출을 막았고,12) 육지에서는 전라도와 충청도, 경상도에 있는 조선군과 의병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임진왜란 초기에 점령한 부산에서 한양 사이에 있는 거점도시에 일본군의 발을 묶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군 6번대는 여러 경로로 전라도 진출을 시도했지만 경상도 서부지역의 곽재우(의령 거점), 정인홍(성주 거점), 김면(거창 거점) 등의 의병군과 경상도 지역에서 전투를 먼저 치러야만 했고, 그 결과 전라도 점령이 좌절된 것이다.13)
일본군은 전라도 지역뿐만 아니라 낙동강 서부지역인 경상우도 역시 점령하지 못하였다. 실제로 경상우도 지역에서는 많은 전투기록이 남아 있고, 대부분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조선관군과 의병이 자유롭게 활보하였다. 특히 의병군의 봉기는 일본군의 호남 진출을 막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14) 앞에서 언급한 1592년 7월과 8월에 있었던 고경명, 조헌, 영규 등 의병군의 금산성 탈환전은 끝내 일본군 6번대를 성주로까지 후퇴하게 만들었다. 6월 곽재우의 기강 및 정암진전투,15) 7월 김면의 거창 우척현 전투16) 및 곽재우의 현풍성 전투, 그리고 권응수의 영천성에 이은 신녕, 의흥, 의성, 안동 등 지역의 수복, 8월 김면과 김시민의 거창전투, 조헌과 영규 의병의 청주성 수복, 그리고 정인홍 의병군이 성주성 공격, 9월에 있었던 경상좌병사 박진의 조선관군이 경주성을 탈환하는 등의 조선군의 일본군에 대한 적극적 공격에서의 승리는 경상우도로의 일본군 진출을 막았다.
<그림 1> 1592년 7~8월 중 경상우도의 전황

더욱이 김시민을 중심으로 한 조선군의 활약상은 일본군이 왜 대군을 이끌고 진주성을 공격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많은 역사 사료가 김시민과 진주에 있던 조선군 및 의병이 1592년 5월부터 10월 제1차 진주성전투 때까지 진주성 내·외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음을 알려준다.17) 5월 말 최강 등은 진주의 의병들과 함께 고성 읍성을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이 사천을 점령하고 진주를 침범하려 하자 일본군을 야습해 축출하는데 공헌을 하였고, 6월 말∼7월 초 김시민은 고성에 있으면서 왜적에 대한 기습활동을 전개하여, 사천, 고성, 김해 등 지역을 수복하였고, 의병장 김면의 요청을 받아 구원병 1천을 이끌고 거창의 사랑암에서 금산으로부터 서남진하는 일본군을 맞아 승전하였다.18) 김시민은 이러한 공으로 1592년 7월 26일 종5품 판관에서 정3품 진주목사로 파격적으로 관직이 승진되었다.19)
이후에도 김시민은 9월에는 진해로 출동하여 적을 물리치고 적장 평소태(平小太)를 사로잡아 행재소(行在所)로 보낸 공로로 당상관인 통정대부로 승진하고 경상우병사에 임명되었다.20) 그 후에는 관찰사 김수의 요청에 따라 금산(金山)까지 출격하여 적을 격파한 기록이 있다. 즉 5월부터 9월까지 김시민은 진주에만 머물지 않고 고성, 사천, 거창, 금산, 지례 등 경상우도 전 지역에서 전투를 벌였고, 낙동강 건너 영산전투에 참전한 기록도 있다.21) 김시민은 이러한 전공으로 판관에서 목사를 거쳐 경상우병사가 됨으로써 경상우도 전체 육군의작전권을 갖게 된 것이다. 특히 김시민이 진주에서 직선거리 약 150km나 떨어져 있는 금산(金山, 현 경북 김천)까지 출격했다는 것은 잘 훈련된 기마병을 적절히 이용하여 전투에 승리할 수 있었을 것으로 이해된다.22)
이러한 경상우도의 조선군과 의병의 활약으로써 1592년 10월 1차 진주성 전투 당시 경상도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장악한 지역은 함창(현 상주시 함창읍), 상주, 지례(현 김천시 지례면), 선산, 김해, 창원, 진해, 고성으로 한정되었고,23) 진주 부근의 조선군과 의병이 동원되어 고성, 진해, 창원 지역의 일본군들을 부산지역으로 몰아내어 경상우도 지역은 조선군 및 의병 관할지역이 된 것이다. 이렇게 경상우도에서 조선관군 및 의병이 실질적으로 일본군을 물리침으로써 조선 전역을 분할 점령하려던 일본군의 계획은 차질을 빚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부산에서 서울을 거쳐 조선의 중부와 북부를 잇는 일본군의 보급로가 차단되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조선군이 일방적인 패퇴를 거듭하던 국면이 반전되어, 조선군 및 의병이 전국적으로 일본군과 대항하여 싸우게 된 것이다.
일본군은 경상도 전역의 점령과 일본군 보급로 확보를 위해서는 경상우도의 조선관군 및 의병과 반드시 대규모 전투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경상우도의 조선관군과 의병의 중심이 진주성이었기 때문에 진주성에 대한 일본군의 공격은 필연적이었다. 이는 1차 진주성전투에 참여한 일본군 주요 지휘관이었던 가토 미츠야스(加藤光泰),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 하세가와 히데카즈(長谷川秀一), 기무라 시게코레(木村重茲) 등이 작전회의를 열어서 토론한 끝에, “경상우도의 병마의 주력이 진주성에 있는 듯하니, 이에 뿌리를 먼저 뽑아버린다면 다른 지방에서 시끄럽게 움직이는 조그마한 군사들은 싸우지 않고서도 스스로 흩어지고 소산될 것이니 먼저 이 성을 대병력으로 일거에 함락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 될 것이다”라고 결론지었다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24)
기존의 학계에 일반적으로 알려져 온 일본군의 진주성 공격 이유는 키타지마 만지(北島万次, 1997)가 주장한 바와 유사하다. 그는 첫째 경상남도에서의 성주 의병장 김면, 전라우병장 최경회, 합천군수 배설, 의병장 곽재우 등의 조선 관군과 의병의 반격으로 말미암아 부산포와 한양 사이의 일본군의 보급로가 막힌 것, 둘째 진주가 경상도로부터 전라도로 통하는 요충지였다는 것을 일본군의 진주성 공격 이유로 꼽았다.25)
그러나 일본군이 진주성을 공격했던 원인으로 알려지고 있는 기존의 시각은 다음의 이유에서 새로 수정될 필요가 있다. 일본군은 조선 8도 전 지역을 점령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군 점령지역은 부산에서 양산, 밀양, 언양, 김해, 문경, 성주, 상주, 충주, 한양 등이다. 낙동강 서쪽의 경상우도는 일본군이 점령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창원을 점령하였다가 조선관군과 의병에 의해 수복되어 경상좌도까지 위협당하고, 금산(현 김천)을 조선관군과 의병에게 점령당함으로써 보급로가 차단되었다. 따라서 일본군은 경상우도의 중심부인 진주성에 주둔하고 있는 조선관군 및 의병과 전면전이 필수 불가결했던 것이다. 또한 경상우도의 작전권을 총괄하던 김시민이 진주성에서 전투준비를 함으로써 일본군을 진주성으로 적극적으로 유인했을 것으로도 판단된다.
2. 전투준비 및 과정
1차 진주성전투를 위해 일본군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직접 진주성 공격명령을 내린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26) 또한 일본군 1번대에서 9번대(후에 8번대로 개칭)까지의 병력 이외에 나고야에서 주둔 중이라고 알려진 10번대에서 16번대까지의 예비병력 대부분이 경상도 지역에 주둔한 것은 이 지역에서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말해준다.
<표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충청도에 주둔하기로 되어 있던 일본군 5번대는 충청도 죽산뿐만 아니라 경상도의 문경과 상주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다. 또한 전라도에 주둔하는 것으로 계획하였던 일본군 6번대도 전라도로 들어가지 못하고 경상도 금산에 주둔하고 있다가 조선관군과 의병의 공격에 밀려 성주에 주둔하였다. 또한 경상도를 점령하기로 계획하였던 일본군 7번대는 개령에 있었다. 이 병력 이외에도 일본군의 10번대부터 15번대까지 나고야성(名護屋城)에 머무르기로 되어 있던 병력의 대부분이 경상도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6번대부터 14번대까지의 부대의 배치지역이 경상도에 있다는 것과, 1차 진주성 공격을 담당한 것으로 나타나는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은 10번대, 기무라 시게코레(木村重茲)와 하세가와 히데카즈(長谷川秀一)는 11번대, 가토 미츠야스(加藤光泰)는 15번대 소속이었다. 이렇게 기록상 확실히 나타난 경상도지역에 배치된 일본군 지휘관과 소속 부대병력을 합하면 무려 111,160명이다. 진주성을 비롯한 경상우도의 조선관군과 의병의 위세를 판단할 수 있다.
<표 3> 경상도 지역 일본군 주둔 추정 (단위: 명)
일본군 부대 | 일본군 병력 수 | 주요 도시 | 주요 지휘관 성명 |
5번대 | 12,400 | 죽산, 문경, 상주 | 來島統總, 福島正則, 長宗元親, 戶田勝隆 |
6번대 | 15,700 | 금산, 성주 | 高橋統增, 小早川秀包, 小早川隆景, 立花統虎, 筑紫廣門 |
7번대 | 30,000 | 개령 | 毛利輝元 |
10번대 | 17,550 | 선산, 안동 | 宮部長熙, 南條元續, 明石則實, 別所吉治, 水下重賢, 垣屋恒總, 長岡忠興, 前野長康, 濟村廣英 |
11번대 | 24,960 | 창원 | 大谷吉繼, 木村重茲, 長谷川秀一, 淺野長慶 |
13번대 | 6,450 | 양산 | 谷衛友, 服部一忠, 石川貞通, 一柳可遊, 竹中重利 |
14번대 | 13,750 | 대구, 청도 | 稻葉貞通, 羽柴秀勝 |
15번대 | 4,100 | 미상 | 加藤光泰 |
자료: 參謀本部編, 『日本戰史 朝鮮役』, 附記, 村田書店, 1924의 기록을 재구성
물론 이 병력 모두가 진주성을 공격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주요 도시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병력은 제외되어야 할 것이다. 즉 일본군 5번대와 6번대, 7번대 등 거점지역에서 조선관군 및 의병과 일상적인 전투를 벌인 병력은 진주성 공격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10번대부터 15번대까지의 병력 중에서 선산, 안동, 양산, 대구, 청도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 역시 제외시키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판단된다. 단, 창원에 주둔하고 있던 하세가와 히데카즈(長谷川秀一)는 창원에서 김해로 철수한 후, 실제로 1차 진주성 전투에 참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를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 이러한 기준으로 1차 진주성 전투에 참여 가능한 일본군 병력수는 약 53,000명이다.
사료에 따르면, 1차 진주성전투에 참여한 일본군의 수는 적게는 13,000명, 그리고 최대 30,000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최관(2003)은 일본측 사료를 바탕으로 13,000명의 일본군이 동원되었다고 주장하였고, 강성문(2010)은 2만 명 정도로 예측하고 있으며,27) 김성일은 학봉집28)에서 3만 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일본군의 전투단위인 1개 번대가 기본적으로 15,000명으로 내외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진주성을 1개 번대가 공격했다면 15,000명 정도이고, 2개 번대가 공격했다면 30,000명, 3개 번대가 공격했다면 45,000명까지로 공성(攻城) 병력규모를 예상할 수 있다. 일본군에게 진주성이 경상우도의 중심부로 인식되고 있고, 진주성을 중심으로 한 경상우도의 조선군과 의병의 활동이 경상우도에 그치지 않고 점차 경상좌도로 확대되어 부산성과 한양성으로 이어지는 일본군의 보급로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전략적으로 공격명령을 내렸고, 나고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예비병력이 대부분 부산과 김해지역에 도착한 점을 감안하여 진주성을 공격한 일본군 수를 추정할 수 있다. 또한 당시 진주성을 공격한 일본군은 부산과 동래 등에 주둔해 있다가 김해를 거쳐 3개 제대로 분할하여 진격하였고, 일본군 1개번대 편성이 약 15,000명 정도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일본군 공격군의 총수는 45,000명 정도로 추정되고, 김성일의 추정을 감안해도 최소한 3만 명 이상의 일본군이 진주성을 공격해온 것으로 판단된다.
대규모 일본군에 맞서 진주성을 방어하는 조선군의 수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료가 3,800명 정도로 기록하고 있다.29) 다만 진주목사 김시민은 진주성전투를 차근차근 준비해 왔으며, 자신과 전투를 오랫동안 함께 한 진주관군을 중심으로 전투를 치르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첫째, 김시민은 진주성전투에 진주성 주둔군 3,700명과 이광악 곤양군수의 100명으로 수성군을 편성했다. 3,000명 이상의 경상우도 및 전라도, 충청도 의병이 진주성을 돕기 위해 진주성 주변으로 몰려 왔지만, 김시민은 이들 의병을 진주성 내부로 미리 불러들이지 않았다. 이것은 김시민 본인이 훈련시키고 함께 전투한 경험이 있는 진주성 주둔군만으로도 전투에 승산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진주성전투가 임박했을 때 유승인 병사의 진주성 입성을 거부한 것도 김시민 본인이 준비한 전술로 일사분란한 전투를 치루기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30)
둘째, 김시민은 초유사 김성일의 명에 따라 진주목사를 대리하기 시작한 1592년 5월 경부터 실제로 진주성에서 일본군을 맞아 싸울 준비를 한 것으로 보인다. 진주성의 남쪽은 험준한 절벽 아래 남강이 흐르고, 서쪽은 절벽이며, 북쪽은 3개의 인공 해자(垓字)로 형성되어 있다는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으며,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1년 전부터 경상도 관찰사 김수의 지휘로 진주성을 확장한 것도 김시민이 진주성에서의 전투준비를 하게 한 원인이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31) 김시민이 진주의 지휘권을 갖게 된 이후 성민을 안심시키고, 피난했던 성민을 귀향시켰으며, 성채를 보수하고, 관군에 대한 군사훈련을 시킴으로써 진주성 수성을 위한 준비를 한 기록은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특히 1차 진주성전투에 500기의 기마병으로 조선관군의 위용을 보이는 것은 김시민이 전투준비를 치밀하게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32) 또한 진주성전투에 앞서 고성, 창원, 거창 등뿐만 아니라 멀리 금산(金山)까지 출격하여 각종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것은 김시민이 전투준비를 위해 군대의 체계를 확립하고 강군을 위한 훈련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셋째, 김시민은 진주성전투를 준비하는 데 있어서 수성의 강점을 살리기 위한 무기를 마련하였다. 대형 화포인 현자총통 170여 대를 만들고, 시한폭탄인 비격진천뢰를 준비하고, 염초 510근을 만들어 놓은 것은 진주성전투를 적극적으로 준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33) 성을 수비하는 군대가 대형 화포로 무장되고 현대의 수류탄과 같은 무기가 있다면 임진왜란 당시 성을 공격하는 부대는 막대한 희생을 치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뿐만 아니라 질려포, 대기전, 화철, 능철, 궁노, 대궁 등을 사용했다는 기록34)과 노약자들과 여자들에게 남자의 옷을 입게 하여 군사의 위용을 웅장하게 하였다는 등의 기록은 실제 전투에서 김시민이 조선군의 강점이 발휘되고, 일본군의 약점이 나타날 수 있도록 만반의 전투준비를 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김시민은 실제 진주성전투를 진주수성군 중심으로 치르기는 하지만 그 외의 경상우도와 전라도에 있는 조선군 및 의병 병력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1차 진주성전투가 발발하고 있던 시점에 진주성 주변에는 진주성 수성군 이상의 조선 전투 병력이 진주성 외곽에 배치되어 있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표 4>는 진주성 주변에 배치되어 있었던 조선 외원군(外援軍) 현황이다. 이것은 김시민의 진주성 수성전의 전략을 엿볼 수 있다. 진주성 공성전은 잘 훈련되고 지휘체계가 정비된 진주성 수성군 중심으로 벌이는 한편, 진주성전투 도중에 일본군의 집중력을 분산시키고, 전투가 종료된 후 물러가는 일본군을 효과적으로 섬멸하여 경상도 지역 전체를 탈환하려고 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표 4> 제1차 진주성 전투 외원군(外援軍)
방면 | 주장 | 직위 | 병력 | 최근접지 | 비고 |
동면 | 윤탁 | 삼가의병장 | 200여명 | 마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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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언충 | 초계가장 | 100여명 | 마현 | 윤탁 군과 합세 | |
심대승 | 선봉장 | 200여명 | 향교후산 | 곽재우 군 | |
서면 | 최경회 | 전라우의병장 | 100여명 | 살천장/단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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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계영 | 전라좌의병장 | 1,000여명 | 함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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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열 | 승의장 |
| 단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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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룡 | 진주한후장 |
| 살천 | 조경형과 동행 | |
남면 | 조응도 | 고성가현령 | 500여명 | 진현 | 정유경군과 합세 |
정유경 | 진주복병장 | 500여명 | 사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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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 | 고성의병장 |
| 망진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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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 고성의병장 |
| 두골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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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면 | 김준민 | 합천가장 | 500여명 | 단계-단성 | 전인홍 휘하, 중위장 정방준과 동행 |
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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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00여 명 이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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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 지승종, 「16세기말 진주성 전투의 배경과 전투상황」, 조원래 편, 『임진왜란과 진주성전투』, 국립진주박물관, 2010, 43쪽.
물론 진주성 외원군 역시 진주성을 돕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하였다. 일본군이 진주성에 진출한 10월 5일 이전에 각지의 의병이 진주성으로 몰려왔고, 진주성전투가 본격적으로 벌어진 10월 6일부터 일본군이 물러난 10월 10일까지 진주성 외곽에서 조선의병과 일본군 간의 산발적인 전투가 벌어진 바 있다. 고성의 최의도와 진주의복병장 정유경의 군사 500명, 정인흥과 합천가장 김준민, 그리고 중위장 정방준의 구원병 500명, 전라우의병장 최경회의 2,000명, 정기룡과 조경형의 군사 등은 일본군을 후방에서 견제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전투도 벌인 바 있다. 즉 1차 진주성전투의 승리는 김시민의 진주성 수성군의 공로뿐만 아니라 경상우도와 전라도 의병의 협력에 의해 이루어낸 성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1차 진주성전투는 8일 동안 신경전을 벌였고, 실제 전투는 5일간 지속되었으며, 총 10여 회의 회전이 있었다. 일본군의 진주성 함락을 위한 공격에 대한 진주수성군의 대비는 치밀하게 전개되었다.
첫째, 일본군의 공격 첫째 날인 10월 6일과 둘째 날인 10월 7일 성 안을 향하여 일제히 총과 화살을 쏘고, 일시에 크게 부르짖는 등 위협을 할 때, 김시민은 확실히 전투에 대비한 모습을 보였다. 김시민은 일본군이 총과 화살을 쏠 때 일체의 반응을 하지 말도록 하여 탄알과 화살을 아끼도록 하였다. 일본군의 총성이 멎자 대포를 쏘고, 북을 울렸으며, 성 안의 기병 500여 명으로 하여금 적이 보이는 곳에서 힘차게 돌진하도록 하는 동시에, 악공에게 누각 위에 올라가 피리를 불게 하는 여유를 보였다.
둘째, 10월 8일 일본군이 대나무 사다리 수천 개를 만들어 공성을 실시할 때에는 현자총통(玄字銃筒)을 쏘게 하였고, 성 위에서 진천뢰(震天雷)와 질려포(蒺藜砲), 바윗돌을 굴리는 동시에 자루가 긴 낫을 이용하여 성 위로 올라오는 적을 막았다. 심지어는 돌과 끓는 물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일본군이 공격하지 않을 때에는 헛되이 화살을 쏘지 못하게 하여 물자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셋째, 10월 9일 일본군이 성을 향해 총과 화살을 쏘는 동시에 흙을 져 날라 가산(假山)을 만들어 성을 공격할 때에는 현자총통을 쏘아 공성을 위한 기구를 부수고, 화살을 쏘아 적을 공격하였다.
넷째, 공격 마지막 날인 10월 10일 새벽 거짓으로 퇴각하는 체하다가 다시 돌아와 성 동문으로 들이 닥쳤을 때에도 준비된 군사로 이를 방어하였다. 성 동문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과정에서 일본군 주력부대가 북문으로 쳐들어 왔을 때에도 성안에 거주하던 남녀노소의 백성들이 모두 방어에 임하도록 하여 결국 적을 패퇴시켰다.
결론적으로 김시민은 일본군과의 전투 준비를 오랫동안 하여 왔고,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가하기 위해서는 성을 중심으로 전투를 벌이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전략적 관점에서 진주성에서의 회전(會戰)을 준비하였으며, 진주성전투 시 진주성 수성군과 외곽지원군의 전력을 최적화하여 싸워 크게 물리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35)
3. 전투결과
진주성전투는 임진왜란 최초로 성을 지켜낸 전투이다(진주대첩). 진주대첩은 목사인 김시민의 완벽한 전투준비와 리더십, 민관군의 합심, 전라도 및 경상도 의병의 긴밀한 협력체계에 의한 협력, 그리고 효율적인 무기 사용의 조화로 전투경험과 최신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이긴 전쟁이다. 직접적으로 전투에 참전한 병력수만 놓고 보면 조선군 3,800명으로 30,000명이 넘는 일본군을 물리친 전투이다. 무엇보다도 전투준비를 완전히 갖춘 일본군의 대규모 주력부대가 육상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진주성전투에서 일본군의 사망자가 얼마인지를 추정하기는 쉽지 않다. 일본은 1차 진주성전투에 대해 제대로 기록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2차 진주성전투의 승전을 다루면서 김시민 목사의 존재와 1차 진주성전투의 패전을 암시하고 있다. 일부 사료에는 일본군의 말을 언급하면서 1차 진주성전투에서의 일본군 피해를 지휘관급이 3백 명, 병사가 1만여 명에 달한다고 하였다.36)
하지만 일본군 사료를 통해 1차 진주성전투에서 발생한 일본군 사망자를 추정해 볼 수 있다. 1차 진주성전투에 참전이 확실한 일본 지휘관별 참전 병력수와 사망자수의 근거는 <표 5>에서 보는 바와 같다. <표 5>에 있는 일본군 지휘관 이외에도 일본군 15번대 소속 가토 미츠야스(加藤光泰)의 참전이 확실하지만 참전 병력수가 1,000명인 반면, 잔여 병력수가 1,097로 오히려 늘어난 것으로 집계된 까닭에 계산에서 제외했다.37) 1차 진주성전투에 참여가 확실한 지휘관의 소속 병력의 참전 병력수는 총 10,500명이고, 이중에서 사망자는 3,911명으로 사망률이 37.20%이다. 1차 진주성전투에 참여한 일본군 소속이 임진왜란 초기에는 나고야에 주둔하고 있던 예비병력인 10번대에서 15번대 병력이고, 이들이 부산과 김해로부터 진주성으로 공격해 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들은 1차 진주성전투 이전에는 중요한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1차 진주성전투 참여 이후에는 전투에서 입은 피해로 인해 부산지역으로 물러나 대규모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즉 1차 진주성전투에 참여한 일본군의 전체 인원 중에서 약 37%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것을 근거로 하고, 1차 진주성전투에 일본군 참여병력이 30,000명이라고 가정하면, 일본군은 이 전투에서 약 11,1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사료의 추정치와 일치한다.
<표 5> 1차 진주성전투 참전이 확인된 일본군 주요 지휘관별 소속부대 사망자 추정
지휘관 성명 | 참전 병력수 | 잔여 병력수 | 사망자 수 (%) | 소속 부대 |
長岡忠興 | 3,500 | 2,296 | 1,204 (34.40) | 10번대 |
木村重茲 | 3,000 | 1,823 | 1,177 (39.23) | 11번대 |
長谷川秀一 | 4,000 | 2,470 | 1,530 (38.25) | 12번대 |
합계 | 10,500 | 6,589 | 3,911 (37.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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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참전병력은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작선명령서 상의 인원(1)이고, 잔여병력은 2차진주성 전투를 위해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발령한 작전명령서 상의 진주성 공격인원(2)으로 (1)과 (2)의 차이를 사망자수로 추정함
자료: 參謀本部編, 『日本戰史 朝鮮役』, 村田書店, 1924, 65~73쪽 및 257~262쪽.
한 마디로 1차 진주성전투는 3,800명의 조선관군이 30,000명 이상의 일본군을 맞아 5일 동안의 주야에 걸친 전투로 1/3 이상의 일본군 병력을 사망시킨 김시민과 진주성 수성군의 확실한 승리였다. 이 승리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정복을 위한 전략에 심각한 차질을 빚게 한다. 즉,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정복 1차 목표인 조선 8도 경영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선인의 국가통합에 의한 지속적인 항전으로 분쇄되었고, 나고야에 주둔하고 있던 약 12만 명의 예비병력이 수로를 통해 평양성 이북에 상륙하여 조선을 완전히 점령하려는 계획은 이순신의 수군에 의해 좌절되었다.38) 나고야에 있던 예비병력은 끝내 부산지역 해안을 통해 조선으로 들어왔지만 경상우도 조선관군과 의병의 활약, 그리고 1차 진주성전투로 인해 북상하지 못하고 경상도 지역에 머무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또한 부산에서 한양에 이르는 일본군 보급로도 실질적으로 막힌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일본군 보급로의 차단은 결국 한양 이북에서의 일본군 전투에 차질을 빚게 하여 일본군이 1593년 1월 4차 평양성전투 이후 평양에 있던 군대뿐만 아니라 함경도,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등에서 활약하고 있던 전체 일본군을 후퇴시킬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원인이 된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1차 진주성전투는 일본군의 전라도 도발을 막은 전술적 의미의 전투로 소극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임진왜란 전체의 전투상황의 틀을 바꾼 전략적 의미를 갖는 전투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1차 전투성전투의 승리는 8개월 후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명령에 의해 2차 진주성전투가 발생한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한다.
Ⅲ. 제2차 진주성전투의 옥쇄와 국가통합
1. 전투배경 및 원인
제2차 진주성전투의 배경 및 원인 역시 임진왜란의 전반적인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차 진주성전투가 발생하기 전 이미 조선 전 지역에서 일본군에 대항하는 크고 작은 전투가 발생하여 일본군의 조선 8도에 대한 실질적인 점령은 실패로 끝났다. 평안도의 경우, 조선군이 일본군에 일방적으로 밀리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1592년 6월 14일 평양성이 일본군 1번대(지휘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3번대의 일부 소속부대(지휘관: 오오토모 요시무네 [大友吉統])에 함락된 이후, 3,000명의 조선관군은 명나라 원군 3,000명과 함께 7월 17일 적극적으로 평양성 수복을 위해 공세를 취한 바 있으며(제2차 평양성전투), 2차 평양성전투의 실패 후에도 곧 바로 8월 1일에는 20,000명의 조선군만으로 평양성 탈환을 시도하였다(제3차 평양성전투). 3차 평양성전투 역시 실패하였지만 1592년 6월을 전후하여 일본군은 공세에서 수세로 바뀌게 된다.
제2차 평양성전투를 앞두고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3번대 병력이 황해도로 철수하였다. 이것은 평양성전투도 중요하지만 3번대에 맡겨진 황해도 지역사정이 일본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면서, 황해도를 책임지고 있던 3번대 지휘관인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자신의 소속 부대에게 철수를 명령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렇게 일본군이 평양성을 함락한 1592년 6월부터 1차 진주성전투가 벌어졌던 1592년 10월까지는 조선 전역에서 조선관군과 의병이 일본군에 공세를 취했던 시기로 볼 수 있다.
1차 진주성전투 이후에 일본군의 사정은 더욱 악화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나고야성에 주둔하고 있던 12만 명의 일본군을 서해 수로를 통해 평양으로 원정시키려는 일본의 계획은 조선수군에 의해 좌절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부산에 도착한 이 병력을 활용하여 진주성을 함락시킨 후 북쪽으로 이동시키려 계획했을 것이나, 1차 진주성전투에서 일본군의 막대한 피해로 인해 전투력이 상실됨으로써 이후 전투수행을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1차 진주성전투 이후에 조선전역에서 발생한 조선군 및 명군과 일본군의 전투에서 일본군 10번대에서 15번대까지의 장수와 병력이 보이지 않는다. 즉, 경상도 지역에 주둔하였거나 1차 진주성전투에 참여했던 장수와 병력은 2차 진주성전투가 발생하기 전까지 주요 전투에 참전한 기록이 없다.
일본군은 평양성전투의 패배 이후 빠른 속도로 경기도 이북 지역에서 한양성으로 퇴각하였다. 일본군 사료에 따르면 1593년 3월에 한양성에서 일본군 1번대에서 9번대까지, 그리고 번외2번대 등 경기도 이북을 담당하고 있던 부대와 지휘관별로 인원을 점검한 기록이 있다.39) 이러한 기록은 일본군이 평양성에서 조명연합군에게 패퇴하였기 때문이기보다는 평안도와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 경기도 등 한양 이북에서 일본군이 더 이상 조선관군 및 의병과 전쟁을 지속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던 것을 방증한다. 즉, 조선 8도 전역에서의 조선관군 및 의병의 항전과 1차 진주성전투 이후 경상도 지역에서의 세력 약화로 인한 일본군 후방교란, 그리고 부산에서 한양으로 이어지는 보급로의 차단에 따라 일본군 전병력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일본군이 명나라 원군에 의해 결정적으로 한양 이남으로 후퇴하였다는 기존의 입장은 수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판단된다. 명군은 4차 평양성전투에서 조명 연합작전에 의해 평양성을 수복한 이후에는 실제 전투에서 큰 활약을 하지 못하였다. 특히 이여송이 43,000명의 명군 전체를 이끌고 참여한 벽제관전투에서 패배를 맛본 이후 명군은 일본군과의 직접적인 전투를 회피하고 있었다.40) 명군은 전투에 직접 참여는 하지 않되, 임진왜란 참전에 따른 명분은 확보하기 위해 일본군을 퇴각시키는 방법을 찾으려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후 명군은 조선이 원하는 전투를 통한 임진왜란 종결보다는 강화(講和)를 택함으로서 명군의 희생을 줄이는 동시에 전쟁을 끝내기 위한 명분을 찾으려 한 것이다.
2차 진주성전투 이전의 조선관군과 의병, 명군, 일본군의 활동 및 전투상황은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왜 2차 진주성전투에 집착하였는지를 잘 설명해준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경기도지역으로부터 부산지역으로 철수 중인 일본군에게 1593년 2월 27일부터 5월 20일까지 모두 5차례에 걸쳐 진주성 공격과 전라도 공격을 명령했다.41) 특히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5월 1일 후퇴하는 일본군에게 보낸 명령서 15개조 중 7조에서 진주성을 공격하고, 진주성 함락 시 성안의 조선인을 남김없이 베어 죽일 것, 8조에서 진주성을 함락한 후에는 전라도를 공략할 것, 9조에서 전라도를 공략한 후 성을 쌓아 주둔할 것 등 구체적인 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다.42) 이 시기 전투상황과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작전명령으로 임진왜란 전체에 대한 그의 전략이 수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조선 8도 경영이 불가능하고, 조선 전역에서의 전투에서 승산이 없자, 명나라와의 화의를 교섭하여 명군과 조선관군의 발을 묶어 놓겠다는 의도였던 것이다.
명나라와 일본군과의 화의과정에서 함경도에서 포로가 된 임해군과 순화군 두 왕자의 송환문제를 협의한 것도 조선관군이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명군과 조선관군을 화의를 통해 휴전상태로 발을 묶어 놓은 상태에서 경상우도의 진주성을 공략하고 전라도를 실질적으로 점령한 뒤, 명나라와 그 상태에서 휴전하여 조선 남부를 경영하겠다는 속셈인 것이다. 실제로 일본군이 진주성으로 진격할 때 진주성을 비워줄 것을 미리 명군에 통지했다. 또한 2차 진주성전투가 벌어지기 직전부터 전투가 종결되기까지 명군과 조선관군의 일본군에 대한 추격전이 멈추었고, 명군의 명령에 의해 진주성에 있던 조선관군은 성을 나왔다. 명군은 진주성의 전략적 가치를 생각할 필요가 없었고, 하루 빨리 종전되기만을 원했기 때문이다.
최관(2003), 이상훈(2010), 키타지마 만지(北島万次, 1997)는 일본군이 제2차 진주성전투를 일으킨 원인에 대해 첫째 진주성을 공략하여 충청도 및 전라도를 점령함으로써 군량의 확보, 둘째 경상도와 전라도의 점령으로 명과의 화의에서 조선 남부 할양요구를 기정사실화하려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전략, 셋째 1차 진주성전투 패전을 만회하여 일본군의 사기를 고양하기 위한 전략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2차 진주성전투 원인에 대한 기존의 시각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점이 보다 구체적으로 논의될 필요가 있다. 첫째,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2차 진주성전투를 앞 둔 시점에서 조선관군 및 의병과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일본군의 사망자수가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실질적인 전투력이 급감하여 새로운 전략을 수립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이 시점에서 가능하다면 조선 남부만을 영속적으로 점령하는 대안부터 조선에서 완전히 철군하는 대안까지도 생각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명군 지휘관들이 실질적인 전투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자국 군대의 희생을 최소화하고자 하는 의중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벽제관전투 이후 명군은 일본군과의 전면전을 꺼렸고, 2차 진주성전투 이전까지 명군은 일본군과 거의 전투를 하지 않았다. 따라서 강화(講和)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명군의 진출을 저지하는 동시에, 명군으로 하여금 조선관군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게 하여 조선관군의 진출을 저지하였던 것이다.
셋째, 명군과 조선관군이 전투에 나서지 않는다면 의병들의 사기가 떨어져 진주성을 쉽게 함락할 수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또한 일본군이 전투력을 많이 상실하였지만, 조선에 진출한 일본군 전병력을 투입한다면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진주성도 쉽게 함락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넷째, 진주성을 함락한 이후 진주성에 있던 조선인을 모두 살해함으로써 일본군의 잔인성을 경상우도 및 전라도 조선인에게 알린다면 경상도와 전라도를 실질적으로 경영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2. 전투준비 및 과정
2차 진주성전투에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전체 병력을 동원한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군이 최초 임진왜란을 위해 준비한 병력은 1번대부터 16번대까지, 번외1번과 번외2번, 수군 등 총 281,840명이고, 이들의 대부분은 조선에 파견되어 싸운 기록이 있다.43) 이를 토대로 살펴보면, 조선에서 전투를 벌인 기록이 없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등의 부대를 제외하고 일본군 266,840명이 전쟁에 참여했 볼 수 있다. 한편 2차 진주성전투를 벌이기 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작전명령서에 기록되어 있는 일본군 총병력은 115,528명이다. 1592년 4월 임진왜란 발생 후부터 1593년 6월 2차 진주성전투 이전까지 조선영토에서 전투 중 사망한 일본군은 151,312명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일본군은 <표 7>과 <표 8>과 같이 부대편제를 개편하였다. 기존의 부대편제로는 사망자가 너무 많이 발생했기 때문에, 진주성 공격을 위해서는 부대의 공격력을 회복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표 7> 제2차 진주성 공략을 위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군 편성 명령 (제1대-3대)
부대 | 주요 지휘관 | 병력규모 (명) | 이전 부대편제 | 진주성 공격방향 |
제1대 | 加藤淸正, 相良賴房 | 6,790 | 2번대 | 북면 |
黑田長政 | 5,082 | 3번대 | ||
鍋渡直茂 | 7,642 | 2번대 | ||
毛利吉成 | 1,671 | 4번대 | ||
島津義弘 | 2,128 | 4번대 | ||
高橋元種 | 741 | 4번대 | ||
秋月種長 | 388 | 4번대 | ||
島津忠豊 | 476 | 4번대 | ||
伊東祐兵 | 706 | 4번대 | ||
소계 | 25,624 |
| ||
제2대 | 小西行長, 宗義智, 松浦鎭信, 大村喜前, 五島純玄, 有馬晴信 | 7,450 | 1번대 | 서면 |
長谷川秀一 | 2,470 | 11번대 | ||
長岡忠興 | 2,296 | 10번대 | ||
昌原11人衆 | 4,400 | 미상 | ||
淺野長吉, 淺野長慶 | 4,000 | 11번대 | ||
羽柴秀勝 | 4,018 | 14번대 | ||
伊達政宗 | 1,258 | 16번대 | ||
黑田如水 | 325 | 미상 | ||
소계 | 26,1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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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 宇喜多秀家 | 7,785 | 8번대 | 동면 |
石田三成 | 1,646 | 번외2번 | ||
大谷吉繼 | 1,535 | 11번대 | ||
木村重茲, 太田伴助, 山田蕂藏 | 1,823 | 11번대 | ||
稻葉貞通 | 638 | 14번대 | ||
明石則實 | 363 | 10번대 | ||
濟村廣英 | 370 | 10번대 | ||
別所吉治 | 313 | 10번대 | ||
一柳可遊 | 406 | 13번대 | ||
竹中重利 | 286 | 13번대 | ||
服部一忠 | 693 | 13번대 | ||
谷衛友 | 340 | 13번대 | ||
石川貞通 | 298 | 13번대 | ||
宮部長熙 | 912 | 10번대 | ||
垣屋恒總 | 201 | 10번대 | ||
水下重賢 | 450 | 10번대 | ||
南條元淸, 南條元續 | 803 | 10번대 | ||
소계 | 18,8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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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參謀本部 編纂, 『日本戰史 朝鮮役』, 1924, 254~262쪽.
<표 8> 제2차 진주성 공략을 위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군 편성 명령
(제4대 이하)
부대 | 주요 지휘관 | 병력규모 (명) | 이전 부대편제 | 관할 |
제4대 | 毛利秀元 | 13,600 | 7번대 | 북쪽고지 (예비) |
제5대 | 小早川隆景 | 6,596 | 6번대 | 북쪽고지 (예비) |
小早川秀包 | 400 | 6번대 | ||
立花統虎 | 1,133 | 6번대 | ||
高橋統增 | 288 | 6번대 | ||
筑紫廣門 | 327 | 6번대 | ||
소계 | 8,7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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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계 | 92,9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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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군 | 桑山一睛 | 5,460 |
| 가덕도 등 |
거제도 | 蜂須賀家政 등 | 8,250 | 5번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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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성 잔류 | 毛利輝元 | 6,990 | 7번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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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성 잔류 | 毛利重政 | 5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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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성 잔류 | 龜井眞矩 | 1,3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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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계 : <표 7> + <표 8> | 115,5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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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參謀本部 編纂, 『日本戰史 朝鮮役』, 1924, 254~262쪽.
그때까지 살아남은 일본군 151,312명 중에서 1593년 5월 20일자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작전명령서에 명시된 진주성 공략을 위한 일본군 동원병력은 <표 7>과 <표 8>에 나타난 바와 같이 92,972명이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불시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수군 병력 5,460명을 부산 가덕도 인근에 집결시키고, 거제도에도 8,250명을 집결시키도록 하였다. 또한 일본군의 주 주둔지인 부산, 김해, 기장 등에는 1만 명도 안 되는 병력을 주둔시켰다. 일본군이 진주성 공략에 사활을 걸고 모든 역량을 집결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명나라와 화의를 진행한 이유는 일본군이 전체 병력을 진주성으로 집중시켜 전투를 벌이는 동안 조·명연합군 병력의 남진을 억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대부분의 병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앞에서 논의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 남부지역 지배야욕 이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첫째, 일본군은 3만 명 정도의 병력으로 진주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진주성을 반드시 함락시키기 위해서는 1차 전투의 공격병력보다 2~3배 정도 많은 병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둘째, 1차 진주성전투에서 진주 주변에 배치된 조선 의병의 존재도 의식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1차 진주성전투에서 진주성 외원군이 큰 역할을 하지 않았음에도 실패했는데, 만일 진주성 외원군이 역할을 한다면 일본군의 피해는 더 컸을 것이라는 점을 전투경험이 많은 일본군은 너무도 잘 알았을 것이다.
한편, 조선관군은 2차 진주성전투에 합류하지 않았고, 오히려 진주성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을 철수시켰다. 사료에 따르면 진주성을 비우자고 주장한 주요 인물은 도원수 김명원, 순찰사 권율, 의병장 곽재우 등이다.44) 관군을 담당하고 있던 도원수와 순찰사는 조명연합군의 실질적인 작전권을 행사하였던 명나라 군대의 입장을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대의명분 상 조선을 돕기 위해 파병된 명군과 군사작전 상의 갈등을 빚는 것은 빠른 전쟁종결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진주성에 도착한 전라병사 선거이가 권율의 명에 의해 진주성에 주둔하고 있던 자신의 병력을 빼서 한양 방향으로 향했던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45)
이에 반해, 진주성 수성을 주장한 사람은 국왕이었던 선조, 우도절제사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등으로 알려져 있다.46) 국왕 선조를 제외한 이들은 조선군으로서의 관직은 받았지만 기본적으로 의병장 출신이다. 이들이 지휘한 병력은 대부분이 의병으로 조직되어 있어 각자 독자적인 부대 지휘권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군의 전략에 따를 필요가 없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에 따라, 진주목사 서예원과 판관 성수경을 비롯한 진주성 주둔군을 중심으로, 인근 지역에서 활약하던 김해 부사 이종인, 사천 현감 장윤, 거제 현령 김준민 등이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전라도 지역에서는 창의사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복수 의병장 고종후, 태인의병장 민여운 등이 합세하였고, 충청도 지역에서는 충청병사 황진, 해미현감 김명세, 태안현감 윤구수, 당진현감 송제, 보령현감 이의정 등 지역연합세력이 합류했다. 진주성을 방어하기 위한 진주관군 및 의병의 정확한 병력수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최소 3,000명47)에서 최대 6,000명48) 정도로 예상된다.
<표 9> 제2차 진주성 전투 참여 수성군
지휘관 | 직함 | 병력 | 비고 |
김천일 | 창의사 | 300 | 도절제(총의병) 장예원 판결사 |
최경회 | 경상우병사 | 500 | 도절제(총관병) |
황진 | 충청병사 | 700 | 순성장 |
고종후 | 복수의병장 | 400 | 의병장 고경명 장자 |
이잠 | 적개의병부장 | 300 | 남원의병장(적개), 변사정의부장 |
이계련 | 의병장 | 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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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여운 | 태인의병장 | 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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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열 | 수천의병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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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보 | 도탄의병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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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득뢰 | 전라우의병부장 | - | 최경회의 전라우의병 통솔(추정) |
오유 | 복수의병부장 | - | 고종후의 부장 |
서예원 | 진주목사 | 3,000 | 진주판관은 성수경 |
장윤 | 사천현감 | 300 | 전라좌의병장 임계영의 부장 |
김준민 | 거제현령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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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인 | 김해부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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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의 | 복수의병장 | - | 고종후 군(추정) |
이계년 |
| - | 임희진 군(추정) |
정원한 | 웅의대장 | - | 민여운 군(추정) |
심우신 | 영광의병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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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충훈 | 현웅군대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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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호 | 채의대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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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희진 | 해남의병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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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세 | 해미현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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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구수 | 태안현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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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건 | 결성현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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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제 | 당진현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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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수 | 남포현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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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몽열 | 황간현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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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정 | 보령현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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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세 | 해미현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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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 5,8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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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오종록, 「진주성 전투의 지휘체계와 전투과정」, 조원래 편 『임진왜란과 진주성전투』, 국립진주박물관, 2010, 104~105쪽; 지승종, 「16세기말 진주성 전투의 배경과 전투상황」, 조원래 편 『임진왜란과 진주성전투』, 국립진주박물관, 2010. 57~58쪽.
일본군 대병력이 진주성을 향해 몰려오고, 관군과 명군의 지원이 없을 것으로 확인된 시점에서도 진주성 주둔 관군과 의병은 2차 진주성전투를 준비하였다. 1차 진주성전투와 달리 대규모 일본군이 공격해오는 상황에서도 진주성 주둔군이 진주성에서 철수하지 않고 전투에 임한 이유는 다음과 같을 것으로 판단된다. 첫째, 진주성에는 김시민이 훈련시킨 정예군이 계속 주둔하고 있었고, 이들은 김시민이 훈련시킨 전략을 숙지하고 전투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49) 둘째, 진주성 수성군은 1차 진주성전투에서의 승전한 경험이 있기에 사기(士氣)가 높았을 것이다. 진주성에 거주하고 있던 일반백성이 동요하지 않고 성 안에 남아 전투에 도움을 주었던 것은 전투에 또다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셋째, 1차 진주성전투에서 일본군에 대해 심한 타격을 가함에 따라 경상우도와 전라도로 일본군이 다시 진출을 시도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경상도 지역 대부분은 조선관군과 의병의 지역이 되었고, 이로써 일본군의 보급로가 차단되어 임진왜란의 종료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들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넷째, 국왕 선조의 뜻이 진주성 수성이었다는 점이 작용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2차 진주성전투는 조선관군과 의병 6,000명의 병력으로 일본군 9만 여명을 상대한 혈전이었다. 전투는 1593년 6월 21일에 시작되어 29일까지 9일간 지속되었다. 21일 첫날은 실질적인 교전이 없었던 것을 감안하면, 8일 동안 내내 전투가 벌어졌다. 날짜별 전투상황을 다시 정리해 보면 일본군 9만 여명의 병력이 총 25회 이상 진주성을 공격하였고, 진주성에 있던 조선관군과 의병은 29일 마지막 전투에서 동문이 무너지기까지 대단한 결집력을 보이며, 일본군의 공세를 막아냈다. 특히 6월 23일, 25일 26일에는 모두 1일 당 6~7회의 교전을 모두 버텨냈다. 제1차 진주성전투에 비해 훨씬 많은 적(1차 30,000명 추정, 2차 92,000명)을, 두 배의 교전 기간 동안(1차 4일, 2차 8일), 두 배가 넘는 교전 횟수(1차 10회 교전, 2차 25회 교전)를 버텨낸 것이다.50) 성을 공격하고 수비하는 공성전은 성격상 공격하는 부대의 피해가 심대한 것이 특징이다. 전투기간이 길어지고, 교전회수가 많아짐에 따라 공격부대의 피해가 더 막대했을 것이다.
<표 10> 제2차 진주성전투의 교전 상황
일자 | 일본군 공격 | 비고 |
6월 21일 | 기병 2백기 출몰 | 교전 없음 |
22일 | 2회 교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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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 6회 교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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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 대치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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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 7회 교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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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 7회 교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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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 1회 교전(전방위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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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 1회 교전(전방위전) | 충청병사 황진 전사 |
29일 | 1회 교전(전방위전) | 김천일 투신, 이종인, 최경회 전사 등 전원 옥쇄(玉碎) |
총계 | 25회 교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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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선조실록』 권40, 26년(1593) 7월 16일 5번째기사, 「6월 29일 함락된 진주성 싸움의 자세한 경과」의 내용을 재구성함
3. 전투의 의의
진주성 함락 후 일본군은 진주성에 있던 모든 조선인을 참살하고, 진주목사 서예원과 최경회 등의 목을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앞에 가져다 바치며 진주성전투 승전을 선언했다.51) 또한 유성룡은 징비록52)에서 진주성 방어실패의 원인으로 진주목사 서예원이 늦게 입성하여 전투준비를 미리 하지 못한 것, 지휘체계가 혼란스러웠던 것, 진용의 문제 등을 지적했다.53)
그러나 2차 진주성전투는 다음의 이유에서 패배가 아니라, 최고수준의 국가통합을 상징하는 옥쇄(玉碎)로 인식되어야 하며, 이에 따라 기존 역사관은 대폭 수정될 필요가 있다. 첫째, 진주성에 있었던 일본군은 조선 각지에서 전투를 치루고 있던 전 병력인 약 9만여 명을 동원하여 진주성을 공격한 반면, 조선에서는 조·명연합군을 비롯한 외원군의 지원 없이 약 6천명의 진주성 주둔군 및 의병만으로 성을 방어했다. 일본군은 8일간 지속적으로 25회 이상의 파상공세를 취했다. 만일 진주성 동문 성곽이 일본군에 의해 파괴되어 무너지지 않았다면 전투는 더 오래 지속됐을 것이다. 그리고 중과부적의 상황에서 언젠가는 함락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진주성전투를 이끈 의병장 김천일과 최경회 등은 이 운명적 전투결과를 알고도 2차 진주성전투를 위해 스스로 사지를 찾아간 것이다. 진주성 함락이 예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에 참전하였고, 전투결과가 예정대로 나온 것을 일본군의 승전 또는 조선군과 의병의 패전으로 기록할 수는 없다.54)
둘째, 진주성에 있었던 조선관군과 의병이 언젠가는 함락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항전한 이유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앞에서 4일간, 10차례의 교전을 한 1차 진주성전투에서 일본군의 사상자를 약 10,000명으로 추정한 바 있다. 2차 진주성 전투는 8일 동안, 25차례의 교전이 있었다. 25차례 교전에서 조선관군과 의병은 24차례의 교전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고, 일본군은 마지막 1차례의 승리를 했을 뿐이다. 진주성 수비군의 수는 1차 진주성전투에 비해 약 2배이고, 공격한 일본군의 수는 1차 진주성전투보다 3배로 추정된다. 단순한 산술로도 일본군의 사상자는 25,000명 이상일 가능성이 높다. 조선관군과 의병은 이러한 일본군에 입힐 타격도 예상하며 전투를 준비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셋째, 2차 진주성전투를 조선군의 분열된 리더십 또는 작전의 실패로 평가하는 것은 단견에 불과하다. 6,000명의 수성군으로 9만여 명의 공격을 8일 간, 25차례의 공세를 버티기 위해서는 확고한 지휘체계와 상하의 일치단결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2차 진주성전투는 자신의 지역을 지키겠다는 진주성 주둔군과 지역의병의 확고한 의지가 표현된 것이라고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실제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1593년 5월 1일에 하달한 작전지시에서 진주성을 점령하여 한명도 빠짐없이 토벌한 후 전라도로 출진하여 전라도 전역을 점령하도록 명령한 바 있다. 그러나 일본군은 진주성을 공략한 뒤, 7월 2일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넘어가는 구례까지 진출을 하기는 하였지만 전라도 진격을 포기하고 부산지역으로 퇴각하였다.55) 또한 일본군은 더 이상의 전투를 멈추고 임진왜란 종전을 위해 명군과 화의협상을 서둘렀다. 이것은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일본군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추가적인 전라도 공략 등 전투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고 볼 수 있다.56) 한마디로 2차 진주성 전투로 인해 정유재란이 있기까지 실질적인 임진왜란은 종료된 것이다.
Ⅳ. 사회갈등 요소별 국가통합
본 장에서는 조선인의 갈등과 분열에 의해 임진왜란을 대비하지 못하고 지속적인 전투패배로 이어졌다는 기존의 시각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하고자 한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첨예한 사회갈등의 요인인 지역갈등, 계층갈등, 정치이데올로기 갈등이 임진왜란 당시에도 존재하고 있었는지를 논의하려고 한다.
첫째, 임진왜란 당시 전투는 각 지역간 유기적 협력이 없이는 불가능하였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일본군 제6번대가 웅치와 이치를 넘어 전라도 전주로 진격하다가 본영이 있는 금산(錦山)으로 회군한 이유가 전라도 의병장 고경명, 충청도 의병장 조헌, 승병 영규 등이 본영인 금산(錦山)을 공격하였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일본군 6군이 전라도로 진격하지 못한 것은 경상도 서부지역의 곽재우(의령 거점), 정인흥(성주 거점), 김면(거창 거점) 등의 의병군에 의해 경상우도에서 차단당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 조선 남부 지역 관군과 의병은 상호 긴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일본군에 대항하였다.
또한 1차 진주성전투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인 조선관군은 진주주둔 관군이었지만 진주성 외원군은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참여한 의병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능주(현 전남 화순군) 출신인 최경회는 의병 2,000명을 이끌고 전라도에서 단성까지 와서 합천 군사와 합세하여 진주지역으로 전진하였으며, 남원 출신 임계영도 1,0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함양까지 진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2차 진주성전투에서는 전라도 출신 의병장들이 대거 참여하여 전투를 지휘하였으며, 충청도 의병장들도 다수 참여하였다. 즉, 2차 진주성전투를 사실상 끝까지 지휘하다 전사한 창의사 김천일은 나주 출신이다. 이밖에도 2차 진주성전투에서 전사한 경상우병사 최경회는 화순 출신이고, 충청병사 황진은 남원 출신이며, 복수의병장 고종후는 장흥 출신이고, 태인의병장 민여운은 태인 출신이며, 도탄의병장 강희보는 광양 출신이다. 또한 2차 진주성전투에서 전사한 양산숙은 나주 출신이고, 황대중은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강진 출신이다. 그리고 충청도 출신 조선관군 및 의병장도 2차 진주성전투에 참여하여 전사한다. 김명세는 해미현감, 윤구수는 태안현감, 송제는 당진현감, 이의정은 보령현감, 정명세는 해미현감이었다.
1차 진주성전투는 김시민이 지휘한 진주성주둔 관군 3,800명이 성내에서 전투를 벌였고, 조선 남부지역 의병 약 3,000명이 성외에서 외원한 반면, 2차 진주성전투는 진주성주둔 관군 3,000명과 의병 3,000명이 성내에서 치룬 전투였다. 1차와 2차 진주성전투 모두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지역의 관군 및 의병의 긴밀한 협력에 의해 이루어 낸 성과라 할 수 있다. 즉, 임진왜란 당시 조선인은 지역갈등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한 지역이 위급할 때에는 다른 지역 민관군이 혼연일체가 되어 죽기를 각오하고 전투에 참여하였고, 함께 전사하는 등 국가통합을 이루고 있었다.
둘째, 두 차례에 걸친 진주성전투에서는 계층과 세대, 남녀 갈등을 넘어, 각자가 모두 국란을 극복하기 위해 결사항전함으로써 전쟁에 있어 생존과 승전을 향한 국가통합의 단면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고 판단된다.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의병은 관군이 붕괴하자 자발적으로 가담했다. 양반과 농민, 천민 등 계층의 구분 없이 자진해서 가담한 의병들이 조선 8도 전역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기에 일본군의 사망자가 전국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일본군은 조선관군을 상대로 거점지역에서 승리하면 조선 8도 전지역을 어려움 없이 점령할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57) 그러나 임진왜란 초기 관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백성은 혼연일체가 되어 일본군에 대항하였기에 실질적인 조선 8도 점령에 실패한 것이다.
1차 진주성전투를 위해 김시민이 진주목사 대리를 맡게 된 후 우선적으로 한 일은 진주성민을 안심시키고, 피난하였던 성민을 귀향하게 하였으며, 성채를 보수하고, 군사훈련으로 군사 체계를 갖추는 것이었다. 전투 전에 김시민은 노약자들과 여자들에게 남자 옷을 입게 하여 군사의 위용을 웅장하게 함으로써 일본군에게 심리적인 타격을 가하였고,58) 전투과정에서도 성내에 있는 일반 백성들의 협력을 받았기에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2차 진주성전투를 위한 작전명령서에서 일본군이 진주성을 함락할 경우, 성안의 모든 조선인을 남김없이 죽이라는 명령을 하달한 데에는 이같이 1차 진주성전투에서 성안의 일반백성들이 계층과 남녀노소에 상관없이 결사항전하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2차 진주성전투에서도 계층과 남녀노소와 상관없이 전체 진주성 백성들이 전투에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우선 일본군 93,000여명이 몰려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주성 내 백성들은 특별한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진주목사였던 서예원이 전투 경험이 많은 의병장 김천일에게 실질적인 전투지휘권을 이양한 것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 위한 전략적 행위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의병장 최경회는 당시 61세, 김천일은 56세였다. 또한 적장을 안고 진주남강에 몸을 던진 논개는 전북 장수 출신으로, 당시 19세에 불과하였다. 계급갈등도 문제가 되지 않았고 남녀노소의 차이도 결사항전의 의지를 모으는데 방해가 되지 않았다.
셋째, 임진왜란 당시 조선 조정의 정치이데올로기 갈등으로 인해 전투를 효과적으로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였고, 조선이 임진왜란의 각종 전투에서 패배했을 것이라는, 즉 동인과 서인의 정치이념 갈등에 의한 당파싸움에 대한 논란이다.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전에는 동인과 서인의 당쟁과 대립이 격화되지 않았던 시기이다. 또한 임진왜란 직전 동인과 서인 모두 일본의 침입을 예견하고 준비하였다. 동인과 서인의 갈등으로 비쳐지는 논란은 임진왜란 준비의 방법에 있어 차이를 보였기 때문이다.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 정사 황윤길은 서인으로서 곧 일본의 침략이 예상되므로 적극적으로 전쟁준비를 하여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부사 김성일은 동인으로서 일본의 침략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지만 민심이 동요되면 오히려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조용히 전쟁준비를 해야 한다는 입장의 차이였다. 이를 정치이데올로기 갈등으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오히려 후세에 조선왕조의 역사를 당쟁의 역사로 보려는 편협한 역사관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국론의 분열로 임진왜란에 대한 국가적 대비가 전혀 없었으며 이로 인해 조선이 패퇴할 수밖에 없었다는 식의 인식이 수정될 필요가 있다. 진주성전투 사례만 보더라도, 임진왜란 발발 이전에 진주성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가 이루어졌었고, 진주판관 김시민은 500기 이상의 기병을 준비하였다. 김성일이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바로 초유사로서 진주로 달려와 김시민으로 하여금 진주목사를 대행하게 한 것 등을 통해 김성일의 외란(外亂)에 대한 대비태세를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임진왜란에 대한 준비는 진주성에서만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전국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탄금대에서 패배한 신립이 기병 중심의 8,000명으로 일본군을 맞이했다는 기록은 조선조정에서 가능한 준비를 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만, 일본군의 규모와 전투력이 예상보다 강했고, 일본군의 기습적 공격에 의해 초반 전투에서 조선관군이 패배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반면, 일본군 역시 임진왜란 전 과정에서 통일된 행동을 보이지는 않는다. 2차 평양성전투에서 조선군과 명원군이 평양성을 공격했을 때, 11,000명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일본군 3번대 병력이 평양성을 빠져나간 바 있으며, 4차 평양성전투에서 일본군 1번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황해도에 있는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부대에게 원병을 청했으나 거부된 바 있다. 또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후 일본 내 세키가히라 전투(關ケ原の戰ぃ)에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의 서군에 가담하였고, 일본군 3번대를 지휘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동군으로 나뉘어 치열한 전투를 벌인 바 있다. 이러한 일본군의 전투에 대한 전략과 입장의 차이를 아무도 일본군의 분열로 확대 해석하지 않는다.
결론 및 국가통합적 의미
본 연구는 일본측 자료와 국내 사료를 통해서 임진왜란을 조선의 일방적 패배로 바라보는 기존의 시각, 즉 조선의 내분과 갈등, 미흡한 전쟁준비, 국왕과 관군의 무능, 각종 전투의 패배로 바라보는 관점이 수정되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조선이 위와 같이 위약(危弱)하기만 하였다면 진주성전투 1차전의 승리와 2차전의 옥쇄(玉碎)의 결과 임진왜란의 판세를 바꾸어내는 성과를 이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두 차례에 걸친 진주성전투의 내용을 심도 있게 살펴보기 위해서는 임진왜란 전 과정을 거시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고, 역으로 임진왜란의 전 과정에 대한 거시적 시각은 두 차례에 걸친 진주성전투의 의미를 보다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임진왜란 전 과정을 통해 진주성전투의 의미를 살펴보고, 진주성전투가 제공하는 조선의 국가통합적 의미를 살펴보았다. 국가통합적 의미를 찾는데 있어서는 거시적 차원뿐만 아니라 지역갈등, 계층갈등, 정치이데올로기 갈등 등의 미시적 차원에서도 분석하였다. 이 분석에서는 1924년 일본군 합동참모본부가 발행한 『日本戰史 朝鮮役』에 나타난 일본군 파병수와 사망자수를 비교함으로써 의미를 추적하였다.
1ㆍ2차 진주성전투의 국가통합적 의미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은 중대한 역사적 의미를 발견하였다. 우선 두 차례 진주성전투를 포함한 임진왜란 전 과정에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의도한 조선경영을 위한 목표는 계속 실패했다는 것이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목표는 조선 8도의 완전한 점령과 조선 장악 이후 나고야에 있던 예비병력을 주축으로 조선에서 징집된 병력 및 물자의 조달로 명나라까지 침략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작전명령서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작전명령서에 따르면 일본군 총병력 28만여명을 15만여 명의 1차 출병병력과 12만여명의 예비대로 구분한다. 15만여 명의 일본군 1차 출병병력은 한양성 점령 이후 조선 8도를 나누어 점령하고, 조선 8도에서 할당된 곡물을 징발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조선에 대한 완전한 장악 이후 조선 8도에서 징집된 조선인 병력과 물자를 징집하고, 나고야에 12만여명의 예비대는 남해와 서해를 거쳐 평안도에 파견하여 명나라를 침공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그의 조선 8도에 대한 점령계획은 조선 전 지역에서의 동시다발적인 관군과 의병의 저항에 의해 무산되었다. 이것은 조선 8도를 분할 점령하기로 되어 있던 일본군 8번대 모두 임진왜란이 발생한 1592년 4월부터 이듬해 6월 2차 진주성전투 이전까지 각 부대별로 많게는 60% 이상, 평균 약 45%의 사상자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또한 나고야에 주둔하는 것으로 되어 있던 일본군 10번대에서 16번대, 두 개의 번외번대 모두 1592년 6월부터 10월까지 경상우도 또는 진주성에서 전투를 벌인 기록이 있다. 이것은 경상도와 전라도, 충청도 등 조선 남부에서 극심한 전투를 치렀다는 결정적인 근거이다.
특히 경상우도에서는 의병의 항전이 치열하게 전개됨과 동시에 진주목사 김시민의 활약으로 고성, 사천, 창원, 거창 등지와 직선거리 기준으로 진주성에서 북쪽으로 150km 떨어진 금산(金山, 현 경북 김천)까지 조선관군 및 의병의 지역으로 만들어 일본군을 몰아냈다. 또한 김시민은 철저한 사전 전란대비와 치밀하게 짠 군사전략을 바탕으로 1592년 10월 4일 동안 10여 차례의 교전이 있었던 1차 진주성전투에서 3,800명의 관군으로 30,000명의 일본군을 물리치고, 일본군의 1/3 이상을 사상시키는 손실을 입혔다. 1차 진주성전투는 진주성 주둔군뿐만 아니라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의병이 외곽에서 응원함으로써 전투의 효과를 배가했다. 즉. 1차 진주성전투 과정에서 조선인은 지역통합, 계층통합, 남녀노소통합, 정치이데올로기 통합을 이루어 전투를 준비하고 싸웠기 때문에 승전할 수 있었다. 1차 진주성전투의 승전은 부산에서 한양으로 이어지는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써 한양 이북에 있는 일본군의 전투력을 약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고, 1593년 1월 일본군 1번대의 평양성 후퇴를 시작으로 일본군이 조선 중·북부 전 지역에서 남부지역으로 퇴각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일본군이 이렇게 조선 8도를 점령하는데 실패하자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임진왜란의 목표를 변경하였다. 일본군의 전투력이 약화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8도 점령을 포기하고, 조선 남부만을 점령하겠다는 의도를 나타낸다. 이것은 진주성 점령을 비롯하여 전라도 진출과 전라도 점령을 지시한 그의 5차례에 걸친 진주성 공격명령서에 잘 나타나 있다. 28만여 명의 파병 일본군 중에서 16만여 명이 이미 사망하였고, 115,000여 명 밖에 남지 않은 일본군 병력의 대부분인 92,000여명을 진주성 공격에 투입한 것은 그의 전략을 잘 읽을 수 있다.
그러나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변경된 조선 남부지역 경영 목표도 2차 진주성전투이후 무산되었다. 조선관군과 의병은 1593년 6월에 있었던 2차 진주성전투에서 8일간 25회의 교전으로 92,000여 명의 일본군 중에서 20,000명 이상을 전사시켰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이로써 일본군은 전라도 진출을 포기하고 부산지역으로 후퇴한 후 명나라 대표와 긴 휴전협상에 들어간다. 2차 진주성전투을 통해 조선인은 지역통합, 계층통합, 남녀노소통합, 정치이데올로기 통합을 이루어 전투에 임했기 때문에 소정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는 2차 진주성전투를 조선관군과 의병의 패배가 아니라 조선인의 국가통합정신과 노력에 의해 임진왜란을 조기에 종식시킨 계획된 옥쇄로 평가해야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두 차례의 진주성전투는 다음과 같은 의미로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 두 차례의 진주성전투 모두 국란을 이겨내야 한다는 조선인의 국가통합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인은 결코 갈등하지도 않았고 무능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전쟁 준비에 임함으로써 결국 일본군을 물리쳐 이긴 것이다. 둘째, 두 차례의 진주성전투는 모두 경상도지역에 국한된 지역적 전투가 아닌, 지역을 초월한 조선인 전체 민관군의 국가통합의지에 의한 준비된 승전이란 의미가 있다. 셋째, 1차 진주성전투의 승전에 의해 조선 8도에 분할하여 전투를 벌이고 있던 일본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2차 진주성전투 옥쇄(玉碎)에 따라 일본군의 조선 남부지역 점령계획이 무산되고 점령지역이 부산지역으로 위축되었다. 넷째, 특히 2차 진주성전투는 전투패배가 아닌 더욱 가치 있는 의미가 부여되어야 할 것이다. 조·명연합군의 방관 하에 3천 명의 지역주둔군과 3천명의 의병만으로 92,000명의 일본군을 상대로 8일 동안 25회의 교전을 소화해냈다. 이들은 죽음을 알면서 진주성을 방어했다. 이들의 죽음이 임진왜란의 조기종결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았기에 이들은 죽음을 택했던 것이다.
다양한 이해와 가치들이 각축(角逐)하는 우리사회는 많은 갈등과 분열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특히 한국사회의 이념갈등, 지역갈등, 세대갈등, 계층갈등의 양상은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 논문이 새롭게 조명한 두 차례의 진주성전투는 합의된 국가사회적 가치를 지키고 달성하기 위해 구성원의 부단한 노력이 지속되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실천되며, 제도화되어야 결국 국가통합을 이룰 수 있다는 교훈을 준다.
(논문투고 : 2013.5.7. / 논문심사완료 : 2013.5.29. / 논문게재 확정인 : 2013.6.18.)
참고문헌
<1차 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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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권27, 25년(1592) 6월 28일(병진) 4번째기사, 「경상우도 초유사 김성일이 의병이 일어난 일과 경상도 지역의 전투 상황을 보고하다」
『선조실록』 권28, 25년(1592) 7월 26일(계미) 9번째기사, 「김시민·이상신·김홍미·이천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선조실록』 권40, 26년(1593) 7월 10일(임술) 9번째기사, 「창의사 김천일이 진주성의 방어 준비 상황을 보고하다」.
『선조실록』 권40, 26년(1593) 7월 16일 5번째기사, 「6월 29일 함락된 진주성 싸움의 자세한 경과」.
『선조실록』 권40, 26년(1593) 7월 5일(정사) 2번째 기사, 「호남으로 진격하려는 왜적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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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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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gnificance of National Integration of the Two Jinju Fortress Battles during Imjin War
This paper analyzes and reinterprets the background, process, and result of the two-round of Jinju Fortress Battle in 1592 and 1593 respectively during Imjin War between Korea and Japan. It is newly found that more than 150,000 Japanese army were killed from April, 1592 to June, 1593. Although Japanese army was victorious in early battles for two months from the beginning of the war in 1592, Korean army and civilian militia had started counterattack on the Japanese after the early attack. Especially, the two-round of Jinju Fortress Battle inflicted great losses on the Japanese army. The two pyrrhic battels had changed the tide of war. Due to severe damage from the two battles, Japanese army did not achieved the goal of the invasion, and finally was forced to retreat. The results of the two battles are impossible without Korean people’s integration. Then, this paper discuss how Korean people overcome various conflicts, such as regional conflict, class conflict, and ideological conflict, during the war.
요약 (임진왜란 시 1ㆍ2차 진주성전투의 국가통합적 의미)
본 논문은 임진왜란시 1ㆍ2차 진주성전투 배경, 경과 및 결과를 일본측 사료와 국내 사료 분석을 통해 국가통합적 관점에서 재해석하였다. 본 논문은 임진왜란에 참전한 일본군의 부대편성표의 변경내용을 분석하여 일본군의 피해를 추정함으로써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군의 피해가 매우 컸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고자 하였다. 두 차례 진주성전투결과, 일본군이 최종 승리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이후 일본군이 부산을 중심으로 퇴각하여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음을 논증하였다.
특히 2차에 걸친 진주성전투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서, 조선이 일본군에게 일방적으로 패퇴한 것이 아니라 국왕 아래 전 백성이 왜군을 물리치겠다는 통합된 의지와 노력으로 전쟁에 임했기에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했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2차례의 진주성전투의 배경, 과정 및 결과를 살펴보고,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게 되는 지역갈등, 계층갈등, 정치이데올로기 갈등 등 갈등요인들이 어떻게 해소되고 통합될 수 있었던 것인지를 추적하고자한다. 또한 진주성전투가 오늘 우리사회가 당면한 국가통합의 과제에 대해 함의하는 바를 이끌어내고자 한다.
Keywords: Imjin War of 1592(壬辰倭亂), Jinju Fortress Battle(晋州城戰鬪), National Integration(國家統合) |
주제어: 임진왜란, 진주성전투, 국가통합,
|
1) 기존 학계에서도 임진왜란은 조선이 일본의 침략을 막아낸 승전이었다는 입장을 견지한 경우가 있었다(허선도, 「임진왜란론: 올바르고 새로운 인식」, 『동양학』, 15권 1호, 1985, 457-472쪽 참조). 한편 학술논문은 아니나, 언론인 출신 저자가 저술한 서적에서도 임진왜란을 조선이 승전한 전쟁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례도 있다(양재숙, 『임진왜란은 조선이 이긴 전쟁이었다: 임진왜란의 상식을 되짚다』, 도서출판 가람기획, 2012).
2) 일본군은 1592년 1월 5일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명령에 따라 각 지방의 제후들이 조선을 침공하기 위한 병력을 큐슈지방의 나고야성(名護屋城)에 집결시켰다. 이때 제대(諸隊) 편성은 1~16번대(番隊, 각 번대병력은 4,000~24,000명 수준), 수송 및 수군(船手衆), 예비부대인 번외(番外) 2개 부대, 직속 무사로 구성된 특수부대인 하타모토(旗本) 등 281,840명으로 구성되었다(參謀本部編, 『日本戰史 朝鮮役』, 村田書店, 1924, 65~73쪽).
3) 參謀本部編, 『日本戰史 朝鮮役』, 村田書店, 1924, 257~262쪽.
4) 參謀本部編, 『日本戰史 朝鮮役』, 附記, 村田書店, 1924, 94~95쪽.
5) 최용성, 「전장환경 및 전장심리 측면에서 본 현리전투」, 『3사논문집』, 육군제3사관학교, 1996, 135~138쪽. 조두영, 「전투심리」, 『정신의학』, 제18권제4호, 서울大學校醫科大學精神科學敎室, 1993 225~229쪽.
6) 인적 조치 사항으로 지휘관은 적절한 영향력과 동기유발을 통해 부하의 정신적 안정을 도모하고, 상하 및 동료간에 상호 신뢰감을 가질 수 있는 풍토를 조성할 필요가 있다. 제도적 조치사항으로 무기, 장비, 상관에 대한 신뢰감을 갖도록 평소에 교육이 필요하고, 군기(軍紀)를 엄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를 통해 전투에 참여하는 병력에게 전투승리에 대한 확신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오현무, 「전투상황이 심리적으로 미치는 영향」, 『軍事發展』, 제72호, 陸軍敎育司令部, 1994, 56~57쪽).
7) 이스라엘 국방군 장관이었던 모세 다이안은 이곳의 고대 신화를 이스라엘 국방군의 상징으로 보고 이스라엘 군의 신병훈련의 마지막 장소로 마사다를 선정하였다. 신병 훈련부대에서 각 훈련지에서 마사다까지 명예스러운 행진을 하며 마지막 밤에 이곳을 올라 "다시는 마사다가 함락되게 하지 않는다!"는 맹세를 하는 의식을 한다. 2001년 유네스코는 이곳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위키피디아, ‘마사다’)
8) 2차 진주성전투를 패배로 인식하고 패배의 원인을 지휘체계의 공백과 혼란, 성 밖 아군의 파벌성에 따른 대립, 명군의 미온적 태도 등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최효식, 「1, 2차 진주성전투의 전황과 승패의 요인」, 조원래 편, 『임진왜란과 진주성전투』, 국립진주박물관, 2010”등이 대표적이다.
9) 이상훈, 「임진왜란 시 국내외 정세와 진주대첩의 배경」, 조원래 편, 『임진왜란과 진주성전투』, 국립진주박물관, 2010, 16쪽; 參謀本部編, 『日本戰史 朝鮮役』, 附記, 村田書店, 1924, 71쪽.
10) 병력손실현황은 일본의 참모본부가 1924년에 임진왜란에 관한 기록을 정리하여 발간한 『日本戰史 朝鮮役』의 기록에 따른 것이다. 일본군은 1593년 3월 20일 한양(책 원문에는 京城으로 표기) 병력수를 사열한 결과 많은 수의 병력이 전사, 병사 혹은 후송됨으로써 다수의 병력손실이 발생하였다는 점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전쟁기간 중 장티푸스(腸窒扶斯), 말라리아, 이질, 종기 등으로 인해 많은 병력이 손실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參謀本部編, 『日本戰史 朝鮮役』, 附記, 村田書店, 1924, 92~95쪽.)
11) 비변사가 아뢰기를, “신들이 듣건대 전일 금산(錦山)에 들어왔던 왜적의 수가 거의 만여 명에 이르는데 사납고 용감함이 비길 바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라도의 병력(兵力)은 다른 도와는 달라 웅치(熊峙)의 싸움과 이치(梨峙)의 공수(攻守)에서 맹장(猛將)과 경졸(勁卒)이 많이 전사하였는데도, 퇴각(退却)하지 않고 끝내 조헌(趙憲)·고경명(高敬命) 등의 의병과 연합하여 왜적을 무찔러 일시에 섬멸하였으니, 그 충성과 용맹이 가상합니다.(『선조실록』 권40, 26년 7월 5일(정사) 2번째 기사)
12)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일본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평양에 주둔한 선조에게 일본 수군 10만 명이 서해를 따라 올 것이라는 서신을 보낸 바 있으나, 5월 이후 남해안에서 이순신이 연전연승하면서 일본군의 한쪽 날개가 꺾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유성룡(이연도 역), 『징비록』, 두산동아, 2010, 79쪽.)
13) 유성룡(이연도 역), 『징비록』, 두산동아, 2010, 90쪽.
14) 유성룡(이연도 역), 『징비록』, 두산동아, 2010, 90쪽.
15) “재우(再祐)는 4월 24일에 의병을 일으켜 왜적들을 토벌하였다. 김천일(金千鎰) 등이 뒤에 비록 창의사(倡義使)로 이름하였지만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사람은 실제로는 재우이며 왜적들이 감히 정암진(鼎巖津)을 건너 호남(湖南)으로 가지 못하게 한 것도 바로 재우의 공이다.”(『선조실록』 권27, 25년 6월 28일(병진) 4번째기사)
16) “김면은 무장 김세문의 아들이다. 적을 거창 우척현에서 막아 여러번 패퇴시켰다(유성룡(이연도 역), 『징비록』, 두산동아, 2010, 90쪽.)“. “왜병이 지례(知禮)에서 거창(居昌)에 침범하자, 의병장 김면(金沔)이 격퇴시켰다.”(『선조수정실록』 26권, 25년 6번째기사
17) 지승종, 「16세기말 진주성 전투의 배경과 전투상황」, 조원래 편, 『임진왜란과 진주성전투』, 국립진주박물관, 2010; 박성식, 「진주성전투」, 『경남문화연구』, 제14호, 경상대 경남문화연구소, 1992.
18) 김준형, 「진주 주변에서의 왜적방어와 의병활동: 제1차 진주성 전투 이전」, 『경남문화연구』, 제17권,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소, 1995, 113~114쪽.
19) “김시민을 진주 목사에, 이상신(李尙信)을 동지사 서장관(冬至使書狀官)에, 김홍미(金弘微)를 경상좌도 도사(慶尙左道都事)에, 이천(李薦)을 영흥 부사(永興府使)에 제수하였다.”『선조실록』 권28, 25년 7월 26일(계미) 9번째기사)
20) 박성식, 「진주성전투, 『경남문화연구, 제14호, 경상대 경남문화연구소, 1992.
21) 김준형, 「진주 주변에서의 왜적방어와 의병활동: 제1차 진주성 전투 이전」, 『경남문화연구』, 제17권,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소, 1995, 113쪽.
22) 실제로 김시민은 1차 진주성전투에서 500기의 기마병을 전술에 이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사실만으로도 김시민은 전투에 대한 준비를 충실히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신립이 탄금대 전투에서 배수진을 친 이유도 조선의 주력인 8,000명의 기마병 중심의 군대를 이용하여 일본군을 무찌르려 한 사실로 보아 조선은 일본의 침략에 많은 준비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23) “진주판관 김시민 등은 관군과 전군수 김대명 등이 모집한 병사들을 거느리고 고성, 진해의 적을 방어하고 있고, 함안군수 유숭인과 칠원현감 이방좌, 사천현감 정득렬, 곤양군수 이광악 등은 각기 함락된 성에 돌아가서 싸워 지킨 공이 많습니다. 그리하여 함창, 상주, 개령, 기만, 지례, 선산, 김해, 창원, 진해, 고성 바깥의 적들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고 있습니다.”(김성일이 8월 9일에 올린 장계의 내용이다. 본 장계는 조선왕조실록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고, 임진왜란 당시 경상우도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부하였던 이로(李魯)의 용사일기[龍蛇日記]에 수록되어 있다(김준형,「진주 주변에서의 왜적방어와 의병활동: 제1차 진주성 전투 이전」, 『경남문화연구』, 제17권,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소, 1995, 113쪽. 참조).
24) 김준형, 「진주 주변에서의 왜적방어와 의병활동: 제1차 진주성 전투 이전」, 『경남문화연구』, 제17권,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소, 1995, 116쪽.
25) 北島万次, 「壬辰倭亂과 晋州城 戰鬪」, 『南冥學硏究』, 慶尙大學校 南冥學硏究所, 1997, 38~39쪽.
26) 일본은 제1차 진주성전투가 누구의 명에 의해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공식 기록을 남기지 않고 있다. 일본 참모본부가 1924년 발간한 『日本戰史 朝鮮役』의 기록에 따르면 長岡忠興, 長谷川秀一, 木村重玆의 3장수가 김해에 머무르면서 “경상도 토적의 주력은 진주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만약 그곳을 토벌하면 기타 지역이 연달아 무너지게 되어 있다.”고 하여 휘하 13장수의 군사를 합하여 2만여 군사로 하여금 진주성을 점령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參謀本部編, 『日本戰史 朝鮮役』, 村田書店, 1924, 208쪽). 그런데 사료로서 신뢰성을 인정받는 일본 기록인 『다이코기(太閤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여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진주성 진격명령을 내렸음을 시사하고 있다. “모쿠소(もくそ) 혹은 모쿠소 판관(木曾判官)의 나라(김시민 목사의 나라, 즉 경상도를 일컬음)에서 반란이 일어나 부산포와 수도 사이의 통로를 방해했으므로 호소카와 엣추노카미 3,000여 명, 하세가와 도고로 3,000여 명, 기무라 히타치노스케 2,000, 오노키 누오도노스케·마키무라 뵤무노타이·가스야 나이젠노쇼·오타 히다노카미·아오야마 슈리노스케·오카모토 시모즈케노카미 병사 5,000 도합 그 세력 13,000여 명으로 하여 목소판관의 진주성을 평정하라는 뜻을 명령하셨다”(최관, 「일본에서의 김시민 장군」, 제2회 충무공 김시민장군 선양 국제학술심포지엄 자료집. 무공김시민장군기념사업회, 2003, 108쪽). 모쿠소란 목사(牧使)를 의미하는데, 유성룡의 징비록이 일본에 전해져 간행된 1693년 이전까지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 장수의 명칭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김시민 장군을 모쿠소라고 칭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최관, 「일본에서의 김시민 장군」, 제2회 충무공 김시민장군 선양 국제학술심포지엄 자료집. 무공김시민장군기념사업회, 2003, 111쪽).
27) 강성문, 「진주대첩을 통해서 본 김시민의 전략과 전술」, 조원래 편, 『임진왜란과 진주성전투』, 국립진주박물관, 2010, 277쪽.
28) “김해(金海)에 머물러 있던 적 3만여 명이 한꺼번에 진격하였는데, 9월 24일에는 세 부대로 나뉘어 노현(露峴)에 있던 군대를 습격하고, 27일에는 또 창원부(昌原府)를 침범하였습니다.”(김성일, 「진주성(晉州城)을 지켜 승첩(勝捷)한 것을 치계(馳啓)하는 서장」, 『학봉집』, 제3권 狀, 1649)
29) 오종록, 「진주성 전투의 지휘체계와 전투과정」, 조원래 편, 『임진왜란과 진주성전투』, 국립진주박물관, 2010, 98쪽; 최효식, 「1, 2차 진주성 전투의 전황과 승패의 요인」, 조원래 편, 『임진왜란과 진주성전투』, 국립진주박물관, 2010, 113쪽; 박성식, 「1, 2차 진주성 전투의 실상과 그 영향」, 조원래 편, 『임진왜란과 진주성전투』, 국립진주박물관, 2010, 135쪽 등.
30) “이튿날에 선봉 천여 기(騎)가 진주 동봉(東峯) 위에 달려왔다가 돌아가다. 병사(兵使) 유숭인(柳崇仁)이 싸움에 패하여 단기(單騎)로 달려와서, 성에 들어가 함께 지키기를 원하니 목사 김시민(金時敏)이 생각하기를, “병사가 성에 들어오면 이는 주장(主將)을 바꾸는 것이니, 반드시 통솔하는 방법이 어긋나서 서로 합하지 못할 것이다.” 하고, 거절하고 들이지 않으며, “적병이 이미 어울렸으므로 성문을 엄하게 경계하는데, 만약 조금이라도 열고 닫으면 갑자기 침입할 염려가 있으니 주장은 밖에서 응원을 함이 옳습니다.” 하다(조경남, 『난중잡록[亂中雜錄]』, 권2, 1592년 10월 2일자).
31) 강성문, 「진주대첩을 통해서 본 김시민의 전략과 전술」, 조원래 편, 『임진왜란과 진주성전투』, 국립진주박물관, 2010, 286쪽.
32) “목사(牧使)는 성중(城中)에 명령을 내려 적을 보아도 못 본 체하게 하고 탄알 한 개나 화살 한 대라도 함부로 허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단지 성 안의 기병 500여 명으로 하여금 적이 보이는 곳에서 힘차게 돌진하게 하였습니다“(김성일, 「진주성(晉州城)을 지켜 승첩(勝捷)한 것을 치계(馳啓)하는 서장」, 『학봉집』, 제3권 狀, 1649.)
33) “목사는 변란이 일어난 뒤로 국사에 온 마음을 다하여 염초(焰硝) 150근을 미리 구워서 만들었으며, 대충 왜국의 제도를 모방하여 총통(銃筒) 170여 자루도 주조하였으며, 별도로 재간이 있는 경내의 사람들을 뽑아서 항상 총쏘기를 연습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싸움에 임하여서는 화약 쓰기를 물 쓰듯이 하면서 섶이나 짚에 싸서 성 밖에 던지기까지 하였으며, 잇달아 철환을 터뜨려 대적을 꺾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김성일, 「진주성(晉州城)을 지켜 승첩(勝捷)한 것을 치계(馳啓)하는 서장」, 『학봉집』, 제3권 狀, 1649)
34) 김성일, 「진주성(晉州城)을 지켜 승첩(勝捷)한 것을 치계(馳啓)하는 서장」, 『학봉집』, 제3권 狀, 1649.
35) 1차 진주성전투가 종결될 무렵 김시민은 이마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고, 후에 사망했다. 만일 김시민이 전투 후반에 쓰러지지 않았다면 김시민은 후퇴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더 큰 전과를 거두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36) “갑오년 강화 때 왜적이 말하기를 ‘진주의 싸움에서 그들의 將官 죽은 자가 3백 명, 군사 죽은 자가 3만 명이므로 반드시 그 보복을 한 뒤에야 강화를 논의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김시양이 1612년(광해군 4년)에 쓴 涪溪記聞에서 인용된 글이다(박용국. 「임진왜란기 진주지역 남명학파의 의병활동」, 『남명학』, 제16집, 2011, 344쪽).
37) 가토 미츠야스(加藤光泰)의 소속 부대원의 수가 증가한 것은 다른 부대인원을 편입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38) 1592년 여름 평양성에 주둔하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조선 조정에 보낸 서신에서 “일본 수군 십여만 명이 서해를 따라 올라올 터인데, 대왕의 어가는 어디로 가시겠습니까?”하며 협박하는 문서를 보낸바 있다. 유성룡은 이순신의 해전승리로 인해 일본군의 서해로의 기동은 좌절되었다고 적고 있다(유성룡(이연도 역), 『징비록』, 두산동아, 2010, 79쪽).
39) 參謀本部編, 『日本戰史 朝鮮役』, 附記, 村田書店, 1924, 94~95쪽.
40) 명나라 군사는 조선군과의 연합작전 8회에 그쳤다. 참전 초기 평양성 탈환작전 및 정유재란시 울산성 전투 등 최후 공격전 외에는 대부분 전투에 소극적이었다. 유성룡의 징비록에서는 명나라 군대가 일본과의 싸움을 꺼리었고, 고의로 일본군의 퇴로를 열어주었다는 기록이 다수 등장하고 있다.
41) 參謀本部編, 『日本戰史 朝鮮役』, 附記, 村田書店, 1924, 94~95쪽.
42) 풍신수길의 작전지시 3(1539년 5월 1일자)- 목사성(진주성) 공략은 흙주머니(土囊)와 죽창을 만들도록 명하고, 부상자가 나오지 않도록 전투에 임할 것이며, 한명도 빠짐없이 토벌할 것. 그렇게 한 뒤에 전라도(赤國)에 출진하여 승리하도록 할 것. 전라도로 출진해서 완전히 토벌한 후, 앞에서 말한 성들을 견고하게 만들고, 군사의 다소에 따라 성의 크기를 결정하고, 장소도 검토하여 각자 소유할 것(參謀本部 編纂, 『日本戰史 朝鮮役』, 1924, 133~135쪽).
43) 이들 일본군 중에서 조선에서 전투를 벌인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 부대는 번외1번 15,000명뿐이다.
44) 김강식, 「충렬록에 나타난 癸巳晋州戰 전사자의 추숭과정과 의미」, 조원래 편, 『임진왜란과 진주성전투』, 국립진주박물관, 2010, 328~329쪽.
45) 선거이는 김천일에게 “적과 우리가 많고 적음이 엄청나게 차이가 있으니 물러나 보존함만 못하다”고 하였다(『선조실록』 권40권, 26년 7월 16일(무진) 5번째기사).
46) 김강식, 「충렬록에 나타난 癸巳晋州戰 전사자의 추숭과정과 의미」, 조원래 편, 『임진왜란과 진주성전투』, 국립진주박물관, 2010, 328~329쪽.
47) 창의사 김천일의 장계에는 “15일에 전라병사 선거이, 조방장 이계정, 충청병사 황진, 조방장 정명세, 경기 조방장 홍계남, 경상우병사 최경회, 복수의장 고종후들이 잇달아 달려왔는데, 다음날 전라순찰사 권율이 전라병사와 각항의 전령 등에게 전령하여 모두 나아오게 하므로 제장이 일시에 달려가니 성중이 흉흉하여 이 때문에 일이 누설되었습니다. 신이 최경회, 황진 등과 더불어 겨우 수합하였으나 3,000명에 불과하였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선조실록』, 권40권, 26년(1593) 7월 10일(임술) 9번째기사, 「창의사 김천일이 진주성의 방어 준비 상황을 보고하다」)
48) 김천일이 말한 3,000명의 병력이 외부에서 진주성을 구원하러 들어온 의병일 수 있다. 진주성에 주둔하고 있는 관군이 3,000명 정도로 가정하면 총병력은 6,000명이 된다.
49) 김천일과 최경희이 서예원을 불러 창고의 곡식을 계산하니 거의 수십만 석이 되었다. 모든 장수들이 크게 기뻐하여 말하기를, “성은 높고 물은 험하며, 양식은 풍족하고 기계도 넉넉하니, 이야말로 오늘날 힘을 바칠 시기이다.” 하고 말하였다(조경남, 1593, 『난중잡록[亂中雜錄]』, 권2, 1593년(癸巳年) 6월 15일자, 난중잡록은 조선시대 선조 때 남원(南原)의 의병장 조경남(趙慶男)이 1582년(선조 15)에서 1610년(광해군 2)까지 왜병과 싸운 사실 등을 기록한 개인 저작이다.)
50) 『선조실록』을 기록하던 사관(史官)이 제2차 진주성 전투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한 대목이 눈에 띤다. “온 성중의 제군(諸軍)이 모두 역전(力戰)하였기 때문에 여러 날 동안 버티고 쉽게 함락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이때를 당하여 약간의 외원(外援)만 있었더라면 왜적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반드시 낭패를 당하고 물러갔을 것이니, 어찌 이처럼 참혹한 데 이르렀겠는가.”(『선조실록』 권41, 26년 8월 7일(무자) 2번째기사)
51) 參謀本部編, 『日本戰史 朝鮮役』, 村田書店, 1924, 269쪽.
52) 유성룡의 징비록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임진왜란과 같은 일이 두 번 다시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쓴 글이다. 따라서 2차 진주성전투의 사실을 서술한다기보다는 조선인이 반성해야 할 일을 중심으로 진주성 방어문제를 서술한 것으로 판단된다.
53) 유성룡은 진주성 함락의 이유로 다음의 네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 적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들은 뒤에 (진주목사 서예원이) 겨우 입성하여 방비 등의 일을 미리 조처하지 못한 것, 둘째 제장들이 객병을 거느리고 한 성 안에 많이 모였는데 통제하는 사람이 없어 각각 제 주장만 고집하여 분란을 면치 못했던 것, 셋째, 제장들이 당초에 사세를 헤아리지 못하고 경솔히 함안으로 나아가서 진을 치고 있다가 적병이 크게 이르자 낭패하고 도망해 돌아와서 적으로 하여금 승세를 타게 한 것, 넷째, 정진에 군사를 진열시키고 굳게 지켰다면 적이 사면에서 함께 진격하여 오지는 못했을 것인데, 모두 버리고 떠났으므로 적병이 수륙으로 함께 진격하였고 진주가 함락되기 전에 의령·삼가·단성·진해·고성·사천 등지에 적이 구름처럼 모여 원병의 길이 막힌 것 등이다(유성룡(이연도 역), 『징비록』, 두산동아, 2010, 120~122쪽).
54) B.C. 72-73년경 유대지방의 마사다 요새에서 15,000명의 로마군을 상대로 960명의 유대인이 전투를 벌이다 유대인 전원 사망한 것을 마사다 승전 또는 패전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역사는 이 사건은 마사다 항전 또는 마사다 옥쇄(玉碎)라고 부른다.
55) 『선조실록』 권40, 26년(1593) 7월 16일(무진) 5번째기사, 「6월 29일 함락된 진주성 싸움의 자세한 경과」.
56) 전라도 보성출신으로 남원에서 임진왜란을 겪었던 안방준의 기록에 따르면, “(1593년) 7월 2일 적이 호남을 향해서 가다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정예병력 손실이 커서 호남을 점령하기 어렵다고 하고 병사들을 쉬게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하며 즉시 철군하라”고 명령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안방준, 「진주서사」, 『은봉전서(隱峯全書』 권7, 1864). 진주서사는 안방준 사후 200여년 뒤인 조선 고종때 후손들이 문집으로 엮어 출판하였다.
57) 일본 내부 전투에서는 군대 간의 전투가 종결된 후에는 일반백성들은 승리한 군대의 백성이 되는 것이 상례였다.
58) 박익환, 「임진년 진주대첩에서의 학봉과 김시민의 공업」, 조원래 편, 『임진왜란과 진주성전투』, 국립진주박물관, 2010, 23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