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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성왕과 유리명왕 그리고 온조왕의 신하들

작성자클라우디우스|작성시간02.03.30|조회수509 목록 댓글 0
잠시 잃어버린 기상, 고구려를 찾아서 카페에 올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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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성왕과 유리명왕 그리고 온조왕의 신하들 (3차수정판)

.. 번호:1992 글쓴이:클라우디우스 조회:18 날짜:2002/03/30 13:43 ..


.. 저의 추측으로 쓴 부분도 있습니다.
잘못 인용한 부분도 있을 수 있구요... 그러니까 틀린부분 있으면 지적해주세요(아마 많을겁니다.).
아! 그리고 제 컴에 없는 한자들은 ?로 대신했습니다.


우선 확실히 동명성왕을 섬겼던 이들의 이름들부터 언급하죠....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극재사(克再思), 중실무골(仲室武骨), 소실묵거(少室默居)
소서노(召西奴), 비류(沸流), 부여온조(夫餘溫祚), 오간(烏干), 마려(馬黎), 마신(馬?), 을음(乙音), 해루(解婁), 전섭(全?), 흘간(屹干 - 흘간이 아니라 흘우(屹于)의 오기인듯하다.), 곽충(郭忠), 한세기(韓世奇)
송양(松讓), 부분노(扶芬奴), 부위염(扶尉?). 해유리(解類利), 구도(仇都), 일구(逸苟), 분구(焚求)

그리고 그 외에 동명성왕을 섬겼을 걸로 짐작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본문을 참고 하시죠.

아! 그리고 유리명왕을 섬긴 인물들은

옥지, 구추, 도조, 탁리(託利), 사비(斯卑), 설지(薛支), 위사물(位沙勿), 기산(箕山)의 우씨(羽氏), 연비(延丕), 제수(祭須)
해도절(解都切), 해명(解明), 해무휼(解無恤), 해색주(解色朱), 해재사(解再思), 해여진(解如津)

백제의 온조왕을 섬긴 인물로는

오간(烏干), 마려(馬黎), 을음(乙音), 해루(解婁), 전섭(全?), 흘간(屹干 - 흘간이 아니라 흘우(屹于)의 오기인듯하다.), 곽충(郭忠), 한세기(韓世奇), 부여다루(夫餘多婁), 곤우(昆優), 진회(眞會), 주근(周勤), 구파해(仇頗解)

자! 위의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 봅시다.


우선 부여에서 나올 때 함께한 세 친구가 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오이(烏伊), 마리(摩離), 협보(陜父) 입니다.

오이는 동명성왕 6년(서기전 32) 겨울 10월 부분노(扶芬奴)와 함께 행인국(荇人國)을 정벌하고 유리명왕 33년(서기 14)에 마리와 함께 양맥과 한나라의 고구려현을 점령했습니다.

마리는 유리명왕 33년(서기 14) 가을 8월에 왕명을 받고 오이(烏伊)와 함께 군사 2만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梁貊)을 쳐서 그 나라를 멸망시키고, 진군시켜(進兵) 한(漢)나라의 고구려현(高句麗縣)<현은 현도군(玄郡)에 속한다.>을 공격해서 차지하였습니다.

대보(大輔) 협보는 유리명왕 22년(서기 3) 사냥을 즐기던 유리명왕에게 간하다 좌천됩니다.
이후 그는 남쪽으로 내려가 다파나국을 세웁니다.
그런데 석탈해의 출신지인 다파나국(多婆那國)국인지 아니면 이름이 비슷한 남쪽의 다른 나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모둔곡(毛屯谷)에 이르러 만난 세 사람이 있습니다.

삼베옷(麻衣)을 입고 있던 이가 재사
잠삼(衲衣)을 입고 있던 이가 무골
마름옷(水藻衣)을 입고 있던 이가 묵거입니다.

주몽은 재사에게 극씨(克氏), 무골에게 중실씨(仲室氏), 묵거에게 소실씨(少室氏)의 성을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이름은
극재사(克再思), 중실무골(仲室武骨), 소실묵거(少室默居) 입니다.

그리고 주몽은 이들과 만나 후 졸본에 이르러 고구려를 세웁니다.
당시 졸본부여의 왕은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범상치 않은 사람인 것을 알고 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고 왕이 죽고 나서 주몽이 뒤를 이었다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나옵니다.
이 해는 한(漢)나라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년(서기전 37),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 21년 갑신년이었고 주몽의 나이 22세였습니다(삼국유사에는 12세).
그리고 슬하에 비류와 온조라는 두 명의 자식을 둡니다.

그러나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온조왕이 주몽의 아들이라고 맨 처음에 기록했다가 조금은 다른 기록을 남기죠.

그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조 비류왕(沸流王)은 그 아버지는 우태(優台)로 북부여왕(北夫餘王) 해부루(解夫婁)의 서손(庶孫)이었고,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로 졸본(卒本) 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이었다. 소서노는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은 비류라 하였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우태가 죽자 소서노는 졸본에서 과부로 지냈다. 뒤에 주몽이 부여(扶餘)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전한(前漢) 건소(建昭) 2년(서기전 37)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高句麗)라 하고, 소서노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이때 소서노의 나이 18세입니다.). 주몽은 그녀가 나라를 창업하는 데 잘 도와주었기 때문에 그녀를 총애하고 대접하는 것이 특히 후하였고, 비류 등을 자기 자식처럼 대하였다.

그러니까 주몽은 졸본(卒本) 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
소서노(召西奴)의 도움으로 나라를 건국했다는 것입니다.

저도 주몽의 세력만으로 고구려를 세웠다기 보다는 졸본부여의 세력과 힘을 합쳐서 고구려를 세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고구려 900년 설이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졸본부여의 역사도 고구려의 역사로 본거죠.
그리고 유리명왕때 오이와 마리가 고구려현을 쳤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구려(혹은 구려)라는 이름은 주몽이 나라를 세우기 전부터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 명칭은 졸본부여와 그 일대를 일컫는 말이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저는 주몽과 그를 따르는 무리와 졸본의 토착세력인 소서노가 힘을 합쳐 나라를 세웠다고 생각한다는 말이죠.
훨씬 설득력 있지 않습니까?(나만 그렇게 생각하나?)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는 유리가 온후 그들은 어머니 소서노와 함께 남하하여 나라를 세우죠.

유리명왕 1년(서기전 18) 온조는 한수 남쪽의 위례성(慰禮城)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십제(十濟)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을 부여로 하였죠(한국의 성씨에 관한 글을 보니 원래는 여를 성으로 쓰다가 무왕때부터 부여로 썼다는 말도 있더군요.).
그러나 백성(百姓)들이 즐겨 따랐다(百姓樂從)고 하여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쳤죠.
미추홀(彌鄒忽)에 나라는 세운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수 없어서 위례(慰禮)에 돌아와 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도 평안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가 죽고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에 귀부(歸附)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온조왕 13년(서기전 6)에 소서노는 61세의 나이로 죽죠....

비류와 온조가 어머니인 소서노와 함께 남하할 때 함께한

오간(烏干)과 마려(馬黎)를 비롯한 10명의 신하가 있습니다.
마려는 마씨의 조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마려의 형인 마신은 고구려에 남아서 동명왕을 도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전씨대종보>를 보면 온조를 따른 십제공신 중엔 오간과 마려외에

을음, 해루, 전섭(全?), 흘간(屹干 - 흘간이 아니라 흘우(屹于)의 오기인듯하다.), 곽충(郭忠), 한세기(韓世奇)

란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온조왕 2년(서기전 17) 봄 3월 지식과 담력이 있었서 우보(右輔)가 되어 군사업무를 맡았다는 재종숙부(族父) 을음(乙音)도 혹시 고구려에서부터 온 신하가 아닐까 합니다.
(전씨대종보에서는 을음도 온조를 따라 남하했다고 하죠.)
물론 추측입니다. 성도 초기 고구려 재상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을씨고.....

그리고 온조왕 41년(서기 23) 봄 정월에 우보(右輔) 을음(乙音)이 죽자 우보가 된
북부의 해루(解婁)가 있습니다.
해루는 본래 부여 사람으로 신식(神識, 신견과 비슷한 의미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이 깊었고, 나이가 70세를 넘었으나 기력이 쇠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보가 되었다고 합니다.
본래 부여사람이니 온조가 남하했을 때 함께한 10명의 신하중 하나겠죠?
그리고 그는 다루왕 7년(서기 34) 봄 2월에 90세의 나이로 죽죠....
그러니까 고구려가 건국되었을 때 29살이란 말이 되는군요.

그리고 이제부터는 온조왕만 섬긴 사람들을 알아보죠.

우선 온조왕 28년(서기 10) 봄 2월에 태자가 되어 중앙과 지방(內外)의 군사 업무를 보기 시작한 맏아들 부여다루(夫餘多婁)가 있죠. 후에 다루왕이 됩니다.

온조왕 34년(서기 16) 겨울 10월에 우곡성(牛谷城)에 근거하여 반란을 일으킨 옛 마한의 장수
주근(周勤) 이 있습니다.
이에 온조왕은 친히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이를 토벌하였고 주근이 스스로 목매어 죽자 그 시체의 허리를 베고 그의 처자도 아울러 죽였다고 합니다.

온조왕 43년(서기 25년) 겨울 10월에 20여 가구와 함께 부양(斧壤)에 귀순한
남옥저(南沃沮)의 구파해(仇頗解) 가 있습니다.

그리고 전씨대종보에 나오는 흘간은 아마
흘우가 아닐까 합니다.

동부의 흘우는 다루왕 3년(서기 30) 겨울 10월에 말갈과 마수산(馬首山) 서쪽에서 싸워 이겼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고 왕이 기뻐하여 말 10필과 조(租) 500섬을 상으로 주었다고 합니다.
여담인데 다루왕 4년(서기 31) 가을 8월에 고목성(高木城)의 곤우(昆優)가 말갈과 싸워 크게 이기고 200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고 합니다.
다루왕 7년(서기 34) 봄 2월엔 우보 해루(解婁)가 죽은후 뒤를 이어 우보가 되죠.
공석인 우보자리는 해루와 같은 북부 출신인 진회(眞會)가 맡습니다.
다루왕 10년(서기 37) 겨울 10월에 우보에서 좌보(左輔)가 된 흘우는 다루왕 21년(서기 48) 3월에 죽고 이를 왕이 슬퍼하여 곡하였다고 합니다.

다시 동명성왕으로 돌아와보죠.

우선 동명성왕 2년(서기전 36) 여름 6월에 동명성왕과 맞서다 항복한
비류국(沸流國)왕 송양(松讓)이 있습니다.

동명성왕 6년(서기전 32) 겨울 10월에 왕이 오이(烏伊)와 함께 태백산 동남쪽의 행인국(荇人國)을 정벌한
부분노(扶芬奴)가 있습니다.
그는 유리명왕 11년(서기전 9) 여름 4월 선비(鮮卑)의 침입을 물리치고 황금 30근과 좋은 말 10필을 하사받았습니다(원래 식읍을 하사했으나 부분노가 받기를 거절하죠.).

동명성왕 10년(서기전 28) 겨울 11월에 북옥저를 정벌한
부위염(扶尉?)이 있습니다.

그리고 동명성왕 19년(서기전 19) 여름 4월에 왕자 해유리(解類利)가 동부여로부터 그 어머니 예씨(禮氏)와 세 친구 옥지, 구추, 도조와 함께 고구려로 왔습니다.
그해 가을 9월에 40세의 나이로 동명성왕은 승하하고 용산(龍山)에 장사 지내졌습니다.

유리명왕이 고씨성을 쓰지 않고 해씨성을 그대로 쓴 것(모본왕까지가 해씨입니다.)과 동부여에서 온지 5개월만에 동명왕이 죽고 왕위에 오른점등을 들어 동명성왕과 권력다툼을 벌여서 아버지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또 다른 주장으로는 고구려의 왕실이 태조왕때 소노부(消奴部)에서 계루부(桂婁部)로 바뀌면서 계루부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계루부의 조상인 주몽을 해씨의 조상인 유리왕 앞에 올려놓고 주몽을 개국시조로 삼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리고 대무신왕 15년(서기 32) 봄 3월에 남의 처첩, 우마, 재화를 빼앗아 마음대로 하고, 주지 않는 자에게는 채찍질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분하고 원망스럽게 여겼서 왕이 쫓아내고 서인으로 삼았다는
비류부장(沸流部長) 구도(仇都)
비류부장(沸流部長) 일구(逸苟)
비류부장(沸流部長) 분구(焚求) 가 있습니다.
대무신왕은 그들을 죽이려 하였으나, 동명왕의 옛 신하들이었으므로 차마 극형에 처하지 못했다고 나옵니다.

자 그럼 유리명왕의 신하들도 써보죠.
혹시 압니까 이 중에서도 오이, 마리, 협보, 부분노 처럼 동명성왕도 섬겼던 이가 있을지... ^^

유리명왕 19년(서기전 1) 가을 8월에 교제(郊祭)에 쓸 돼지가 사라지고 이를 찾지 못해 처영된
탁리(託利)와 사비(斯卑)가 있습니다.

유리명왕 20년(서기 1) 봄 정월에 죽은
태자 해도절(解都切)이 있습니다.
유리명왕 14년(서기전 6) 봄 정월에 부여왕 대소의 사신을 받은 유리명왕은 그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도절을 볼모로 보낼려 했으나 도절은 거절합니다.

유리명왕 21년(서기 2) 봄 3월에 국내(國內) 위나암(尉那巖)으로 천도할 것을 권한
장생(掌牲) 설지(薛支)가 있습니다.

유리명왕 21년(서기 2) 9월에 사물택(沙勿澤)에서 유리명왕의 신하가 되기를 자청한
위사물(位沙勿)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성과 이름 모두 유리명왕이 하사했습니다.

유리명왕 24년(서기 5) 가을 9월에 유리명왕이 기산(箕山)에서 만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양 겨드랑이에 깃이 달려 있어다고 전해지면 왕은 그를 조정에 등용하여 우씨(羽氏) 성을 주고 사위로 삼았습니다.
기산(箕山)의 우씨(羽氏) 정도로 하죠.... ^^;

그리고 유리명왕 23년(서기 4) 봄 2월에 태자가 되어 유리명왕 28년(서기 9)에 자살한 왕자
해명(解明)이 있습니다.

그에 관한 일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유리명왕 27년(서기 8) 봄 정월에 왕태자 해명은 옛 도읍에 있었는데, 힘이 세고 무용(武勇)을 좋아하였으므로, 황룡국(黃龍國)의 왕이 그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 강한 활을 선물로 주었다. 해명은 그 사신 앞에서 [활을] 당겨 부러뜨리며 “내가 힘 세기 때문이 아니라 활이 강하지 못한 탓이다.”고 말하였다. 황룡국왕이 [이 말을 듣고] 부끄럽게 여겼다. 왕은 이것을 듣고 성을 내며 황룡국왕에게 “해명이 자식으로서 불효하니 과인을 위해서 [그를] 죽여 줄 것을 청합니다.”고 말하였다. 3월에 황룡국왕이 사신을 보내 태자와 만나기를 청하였으므로, 태자가 가려고 하자 어떤 사람이 “지금 이웃나라가 이유없이 만나기를 청하니 그 뜻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고 간하였다. 태자는 “하늘이 나를 죽이려고 하지 않는데 황룡국왕인들 나를 어떻게 하겠느냐?” 하고는 마침내 갔다. 황룡국왕이 처음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그를 보고는 감히 해치지 못하고 예를 갖추어 보냈다.

유리명왕 28년(서기 9) 봄 3월에 왕은 사람을 보내 해명에게 말하였다. “내가 천도한 것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를 튼튼하게 하려는 것이다. 너는 나를 따르지 않고 힘 센 것을 믿고 이웃나라와 원한을 맺었으니, 자식된 도리가 이럴 수 있느냐?” 그리고 칼을 주어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였다. 태자가 곧 자살하려고 하자 어느 사람이 말리며 말하였다. “대왕의 맏아들이 이미 죽어 태자께서 마땅히 뒤를 이어야 하는데, 이제 [왕의] 사자가 한번 온 것으로 자살한다면, 그것이 속임수가 아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태자는 말하였다. “지난번 황룡국왕이 강한 활을 보냈을 때, 나는 그것이 우리 나라를 가볍게 본 것이 아닌가하여 활을 당겨 부러뜨려서 보복한 것인데, 뜻밖에 부왕으로부터 책망을 들었다. 지금 부왕께서 나를 불효하다고 하여 칼을 주어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니 아버지의 명령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는가?” 마침내 여진(礪津)의 동쪽 벌판으로 가서 창을 땅에 꼽고 말을 타고 달려 찔려 죽었다. 그때 나이가 21세였다. 태자의 예로써 동쪽 들[東原]에 장사지내고 사당을 세우고 그 곳을 불러 창원(槍原)이라고 하였다.

유리명왕 31년(서기 12) 한(漢)나라의 왕망(王莽)의 장수 엄우(嚴尤)와 싸우다 전사한
연비(延丕)가 있습니다.

유리명왕 32년(서기 13) 겨울 11월에 학반령(鶴盤嶺)에서 복병으로 부여군을 물리치고 유리명왕33년(서기 14) 봄 정월에 태자가 되어 군무와 국정을 위임받은 왕자 해무휼(解無恤, 나중에 대무신왕이 된다.)이 있습니다.
그는 유리명왕 28년(서기 9)에 어린나이에 부여사신을 꾸짖는 위엄도 보였었죠.

유리명왕 37년(서기 18) 여름 4월에 왕자 해여진(解如津)이 물에 빠져 죽었는데 그 시체를 찾은
비류 사람 제수(祭須)가 있습니다.

그리고 유리명왕의 아들이자 대무신왕의 동생인
해색주와 해재사가 있습니다.

해색주(解色朱)는 후에 민중왕이 되었고
해재사(解再思)는 태조왕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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