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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두 남자의 인생 이야기2 – 벤티디우스와 라비에누스

작성자클라우디우스|작성시간14.08.29|조회수66 목록 댓글 0

역시 작년에 써보았던 단편입니다.

 

 

BC 53년 카레 전투에서 크라수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수레나(Surena)가 이끄는 파르티아군에게 참패하였다. 로마의 침공을 격퇴한 파르티아는 친로마파 왕인 아르타바스데스 2(Artavasdes II)가 지배하는 아르메니아를 침공한다. 파르티아는 아르메니아를 제압하고, 아르타바스데스 2세는 파르티아와의 결혼 동맹을 강요당한다.

BC 51년 파르티아는 로마를 침공한다. 파르티아의 왕 오로데스 2(Orodes II)의 왕자 파코루스가 지휘하는 파르티아군은 카레 전투의 생존자인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Gaius Cassius Longinus)가 이끄는 로마군에게 격퇴된다.

이때의 패배로 파르티아는 한 동안 로마를 침공하지 않았다. 그러나 BC 44년 카이사르가 암살당하고 로마는 또 다시 내전에 휩싸인다. BC 42년 카이사르의 암살자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이끄는 군대와 카이사르의 장군이었던 안토니우스와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가 이끄는 군대가 필리피(Philippi)에서 격돌하고 카이사르파가 승리를 거둔다. 특히 안토니우스는 로마의 동방에 자신의 부하들을 행정관으로 보내 로마의 동방 속주를 지배한다.

그런데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퀸투스 라비에누스(Quintus Labienus)를 파르티아에 보내 지원병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파르티아의 오로데스 2세는 지원병을 보내는 것을 망설였고, 그 사이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패하고 말았다. 카이사르의 암살자 편에 썼던 라비에누스는 로마로 돌아갈 수 없었고, 라비에누스는 파르티아에 눌러앉게 된다.

 BC 40, 서로 대립하던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브룬디시움(Brundisium, 현재 이탈리아 브린디시) 협약을 통해 안토니우스의 동방 지배권과 옥타비아누스의 서방 지배권을 재확인한다. 같은 해에 라비에누스와 파르티아의 왕자 파코루스는 로마의 동방을 침공한다. 라비에누스가 이끄는 파르티아군은 기병의 우위를 앞세워 루키우스 데키디우스 삭사(Lucius Decidius Saxa)가 이끄는 로마군을 격파하고, 시리아를 차지한다. 데키디우스 삭사는 도주하였으나, 파르티아군에 잡혀서 처형당한다.[1]

 파르티아군은 티레를 제위한 시리아 전체를 차지하였고, 파코루스 왕자는 여세를 몰아 팔레스타인을 침공한다. 파코루스는 카이사르에 의해 지명되어 유대를 다스리던 히르카누스(Hyrcanus)를 몰아내고, 안티고누스 2(Antigonus II Mattathias)를 왕으로 세운다. 그 사이 라비에누스는 소아시아를 제압해나간다. 라비에누스는 이 때부터 임페라토르(Imperator, 총사령관), 파르티쿠스(Parthicus)라 칭하며 소아시아에서 세금을 징수하고, 신전을 약탈하였다. 사실 파르티쿠스는 파르티아를 제압한 자에게 수여되는 말인데, 라비에누스는 이런 로마의 관습과는 상관없이 파르티아 편에 서서 로마의 속주를 차지하고 이 명칭을 사용하였다.[2] 라비에누스와 파코루스의 활약으로 파르티아는 소아시아와 시리아를 점령하고, 아르메니아와 유대에 친파르티아 정권을 수립하게 되었다.

 파르티아인이 무섭게 세력을 뻗쳐나가자 안토니우스는 잃어버린 동방을 되찾기 위해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Publius Ventidius Bassus)를 파견했다. 이때가 BC 39년의 일이다. 이 때 조국의 영토를 회복하려는 벤티디우스와 조국을 버리고 파르티아에 귀순한 라비에누스간에 벌어진 일을 소설로 재구성해보았다. 혼란의 시기에 서로 다른 선택을 한 두 남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나는 안토니우스의 명령에 의해 소아시아에 상륙했다. 다행히 파르티아는 해군이 없어서 아직 티레도 제압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 우리의 상륙을 해상에서 저지할 수 없었다. 그래도 적의 눈에 띄면 좋을 것이 없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상륙했다. 나는 우선 소아시아 남부 킬리키아에서 파르티아군을 격파하는 것을 첫번째 목표로 삼았다. 확인한 결과 라비에누스는 지금 파르티아군이 아닌 주위에서 차출한 병력만 지휘하고 있었다. 나는 경무장 병력으로 급히 이동을 했다. 라비에누스는 교전을 회피하였다. 나는 계속해서 라비에누스를 쫓았고, 우리는 타우루스 산맥[3]에서 서로 대치하게 되었다. 며칠 간의 대치가 이어졌고, 우리에게는 중무장 보병이 충원되었고, 적에게는 파르티아군이 충원되었다. 파르티아군이 합류한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궁기병과 중기병을 사용하는 파르티아군을 상대할 방법도 생각해야했다. 다행히 개활지에서는 기병 위주의 파르티아군을 이길 수 없었지만, 여기는 험준한 산과 언덕이 많아 진영 위치만 잘 잡으면 파르티아 기병의 위력을 반감시키고, 로마의 중무장 보병의 위력을 배가시킬 수 있었다. 로마군은 파르티아 군에게 티레에서, 시리아에서 참패하였고, 그래서 파르티아군에 대한 두려움이 있지만, 그건 로마군이 불리한 장소에서 싸웠기 때문이다. 전투는 항상 우리군이 유리한 시간과 장소에서 싸워야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승산이 있었다. 나는 언덕에 진영을 꾸렸고, 파르티아군은 언덕 아래에 위치했다. 그리고 승리를 굳히기 위해 한 가지 방법을 더 동원하였다. 복병을 사용하여 아군의 피해를 줄이고, 적군의 피해를 늘리기로 했다. 우선 파르티아군의 선제 공격을 유도하기 위해 로마군이 파르티아군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꾸몄다. 그리고 선제 공격하려는 적을 격파하기 위해 복병을 준비했다. 새벽에 자신만만한 파르티아군이 언덕을 올라 기습을 시작했다. 라비에누스가 이끄는 부대는 합류하지 않은 상태였다. 더욱 좋은 조건이었다. 나는 적을 확인하고나서 매복한 병사들을 돌격시켰다. 우리 로마군은 비탈길을 따라 내려가면서 파르티아군을 공격했다. 지리적 이점을 살리지 못한 상태에서 기습당한 파르티아군은 로마군에게 격파되었다. 파르티아군은 큰 피해를 입었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언덕 아래에 위치한 라비에누스의 진영으로 향하지 않고, 소아시아 남부 킬리키아로 도주하였다. 라비에누스는 그의 병력을 모았다. 그러나 파르티아군에 의지해서 여기까지 온 이들이기 때문에 라비에누스 진영에서는 탈주병이 발생하였다. 이 중 한 명을 잡아서 앞으로의 계획을 알아내었다. 라비에누스는 여기서 싸우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보고, 도주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나는 숲 속에 복병을 준비해놓았다. 라비에누스의 군이 당도하자 복병으로 기습을 하였다. 많은 수를 죽이고 포로로 잡았다. 옷을 갈아입고 도주한 라비에누스는 데메트리우스(Demetrius)에게 잡혔다.[4]

 

나는 감옥에 갇혀 있는 라비에누스를 찾아갔다.

 

라비에누스 오래간만이다. 카이사르님이 루비콘 강을 건넌 이후이렇게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구나. 문다 회전에서는 너가 전사한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려다 실패하고 울면서 도주하걸 보았던 것 같기도 한다..”

 나는 안타까움과 경멸이 섞인 눈으로 라비에누스를 쳐다보았다.

그러게요. 오랜만입니다. 벤티디우스 아저씨.” 라비에누스가 멍한 눈으로 대답하였다.

나는 그의 멍한 눈을 보자 갑자기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외쳤다.

넌 왜 조국을 배신하고, 파르티아인의 앞잡이가 되었느냐?”

 아버지, 티투스 라비에누스와 카이사르는 친한 사이였죠. 그런데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간에 내전이 발생했을 때 아버지는 카이사르를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폼페이우스 가문의 클리엔테스였기 때문이죠. 아무리 아버지가 카이사르와 친해도 파트로네스를 버릴 정도로 신의가 없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가부장이 집안의 모든 것을 결정하고 아들의 생사까지 결정하는 로마에서 저는 아버지를 따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BC 45년 문다에서 아버지가 전사하고 저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고, 나중에 몸을 의탁한 카이사르 암살파의 지도자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BC 42년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했습니다. 그런데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저를 파르티아에 원군을 요청하는 사신으로 보냈었죠. 조국으로 돌아가봤자 카이사르의 반대파로 있던 나는 살아날 수 없었습니다. 내가 뭘 선택할 수 있었다는거죠?”

 라비에누스가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너희 아버지 티투스 라비에누스와 나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Publius Ventidius Bassus)는 모두 이탈리아 북부 피케눔(Picenum) 출신이다. 그런데 우리 가문은 동맹시 전쟁에서 로마군에 대적하였다. BC 88년 전쟁이 로마인의 승리로 끝났고, 어린린 나는 어머니 품안에 안긴 상태로 개선식에 끌려나왔다. 개선식의 주인공은 위대한 폼페이우스의 아버지였던 폼페이우스 스트라보였지. 사실 BC 89년 집정관이었던 폼페이우스 스트라보가 만든 폼페이우스 법 (Lex Pompeia)에 따르면 포강 이남 거주자는 모두 로마 시민권을 받았지만, 로마군에 대항한 사람들은 쇠사슬에 묶여 개선식에 끌려 나와 폼페이우스의 전차 앞에서 걸어갔다. 그래도 로마 시민이라고 개선식이 끝난 후 석방되기는 했다. 그러나 피케눔에서 폼페이우스 가문의 미움을 받고 살아갈 수는 없었다. 나는 무척 가난했다. 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힘들게 돈을 모은 나는 노새와 마차를 로마군에 납품했다. 이때 너희 아버지 티투스 라비에누스와도 친분을 가졌고, 그 덕분에 카이사르와도 친해졌지. 사실 나와 티투스 형님은 동향이지만 고향에서 자라지 않은 생면부지인 나를 잘 챙겨주셨었지. 사실 카이사르와 나의 친분은 다 너희 아버지 덕분에 생겼지. 너희 아버지 티투스 라비에누스는 갈리아 전쟁에서 큰 활약을 하였고, 카이사르는 너희 아버지에 관해 많은 기록을 남겼다. 나는 비천하게 밑바닥 생활을 하면서 기어 올라갔고, 너희 아버지는 귀족 출신은 아니지만 능력을 인정받으면서 출세 가도를 달리고 있었지.”

 라비에누스가 눈을 부라리면서 말했다.

 당신은 내전이 발발했을 때(BC 54) 카이사르를 선택했죠. 같은 피케눔 출신이라도 우리 아버지와 다르게 아저씨는 폼페이우스 가문의 클리엔테스가 아니었죠. 아머지는 문다에서 전사했지만 당신은 내전 동안의 활약으로 카이사르에게 인정을 받았죠. 카이사르는 아저씨를 16명의 법무관 중 하나로 임명했고,[5] 카이사르가 암살된 이후 안토니우스 편에 섰고, 보궐집정관까지 역임하게 되었죠.[6] 내전 기간 동안 출세 가도를 달리는 아저씨한테서 설교 듣고 싶지 않습니다.”

 너희 아버지는 카이사르 휘하에서 복무할 때도, 폼페이우스 휘하에서 복무할 때도 항상 용맹스럽게 전쟁을 누볐다. 너희 아버지 티투스 라비에누스 형님은 명예와 신의를 알고 용맹스러운 멋진 남자였다. 그런데 너는 파르티아인의 주구가 되어 조국을 침략했다. 물론 너가 파르티아에 머문 것은 너의 상황을 고려하면 이해할 수 있지만, 시리아와 소아시아를 점령한 이후 너가 스스로 임페라토르, 파르티쿠스라 부르며 자신을 높인 것, 그리고 전투에서 패배한 후 부하들을 버리고 혼자만 살려한 것을 보면 너는 절대로 명예와 신의를 중시하지 않아. 너는 그냥 너 하나의 부귀 영화만 바랄 뿐이아.”

그는 울부짖으며 외쳤다.

 지금 로마에서 누가 조국을 위해 일한답니까! 다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 살지 않습니까? 술라와 마리우스의 내전 이후 순수히 조국애로만 살아가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나도 남들처럼 명예와 부를 누리고 싶었습니다. 아저씨도 그래서 카이사르를, 안토니우스를 선택한 것 아닙니까? 다만 나는 폼페이우스와 브루투스가 죽은 이후 더 이상 로마인을 선택할 수 없었기 때문에 파르티아의 왕자 파코루스를 선택한 것 뿐입니다.”

동족끼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내전이 좋은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조국을 배신한 너의 죄가 씻겨지진 않아. 더 이상 변명하지 마라. 너는 곧 너의 죄값을 죽음으로 치를꺼야.”

 나는 나의 죄값을 치르고 죽을 텐데, 아저씨는 앞으로 더 많은 동족을 죽이고 부귀영화를 누리겠군요. 공화국은 사라지고 안토니우스 황제가 등극하면 안토니우스의 장군 중 하나인 당신은 더욱 출세하겠죠. 그리고 파르티아인들까지 격퇴했으니 더더욱 아저씨의 명예는 높아지겠죠. 아저씨 역시 로마인의 피를 손에 묻히고 부와 명예를 누릴려는 점에서 나와 다를바 없습니다.”

 안타깝구나. 이전에 조카처럼 아꼈던 너가 이렇게 변하다니그냥 죄값을 치르고 죽어라. 할말이 없으면 나는 이만 나가보겠다.”

 나는 라비에누스를 뒤로 하고 감옥문으로 향했다.

 로마에 가셔서 나의 아들이 죽어 있으면 장사나 잘 치뤄 주십시요.”

 나는 뒤돌아서 라비에누스를 쳐다보았다.

 아들이 있었느냐?”

 라비에누스는 말없이 끄덕였다. 나는 뭐라 한 마디 더 하려다가 슬픈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라비에누스 보고 그냥 감옥문을 나섰다.[7]

다음 날 라비에누스는 처형되었다. 생각해보면 같은 로마인의 피를 손에 묻혀서 부와 명예를 누리려 했다는 점에서 나는 라비에누스와 다를바 없었다. 그 동안 나는 살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무엇이든 하였는데 이런 나의 삶이 씁쓸해지기 시작했다.

 이후 나는 아마누스 협곡(Amanus Pass)에서 파르나파테스(Pharnapates)가 이끄는 파르티아군을 격파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파코루스 왕자는 파르티아로 후퇴하였다.

 다음 해인 BC 38년 파코루스는 다시 로마를 침공했고, 긴다루스(Gindarus) 산에서 파르티아군과 교전했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나는 병력이 충분하지 않아서, 병력을 집결시킬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로마의 동맹인 것처럼 속이고 로마군에 위장 잠입한 파르티아의 간첩 파르나이우스(Pharnaeus)를 통해 파코루스 왕자에게 거짓 정보를 흘렸다. 나는 적이 빠른 경로로 오길 바라는 것처럼 말했다. 파르나이우스는 파코루스에게 이를 보고했고, 적은 경로를 바꿔서 유프라테스 강의 깊은 곳으로 도하를 시도했다. 그들은 돌아서 온 것이다. 그들은 다리를 만들고 강을 건너는데 40일을 소모하였다. 나는 파르티아인의 도착 3일전에 병력을 모두 집결시켰다. 그리고 로마군을 언덕에 배치시켜서 언덕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파르티아의 궁기병을 격퇴하였고 언덕 밑에 위치한 중기병은 던지는 무기들로 제압하였다. 나는 던지는 무기의 살상력을 극대화 하기 위해서 500보 안에 적이 들어왔을 때 공격하게 하였고, 이 때문에 적의 피해를 극대화할 수 있었다.[8] 나는 내가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원하는 방식으로 적과 교전하여 적을 쉽게 물리칠 수 있었다. 파코루스는 눈에 띄는 값비싼 무구를 착용하고 있어서 쉽게 눈에 띄었다. 파코루스 왕자는 그의 호위병과 함께 전사하였다. 나는 파르티아인의 로마의 영토 안에서 쓸어버린 것이다. 안토니우스는 유대에 친로마정권을 다시 세우기 위해 가이우스 소시우스(Gaius Sosius)를 헤롯에게 지원군으로 보냈다. BC 377월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헤롯(Herod)은 전 유대의 왕이 되었다. 유대에 친로마 정권이 들어선 것이다. 이제 로마는 동방의 지배권을 다시금 되찾았다.

 나는 개선식을 위해 로마로 귀환했고, 라비에누스의 아들에 관해 알아보았다. 개선식에 앞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발부스(Lucius Cornelius Balbus)와 옥타비아누스를 만났다. 스페인 남부 가데스의 백만장자이고, 그가 섬기는 인물들이나 친한 사람들은 다 그 시대의 승자이거나 유력자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아꼈다. 그가 가데스 주민들에게 고발당했을 때,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키케로가 그의 변호를 위해 발벗고 나설 정도였다. 그는 폼페이우스를 위해 일하다가 나중에 카이사르를 위해 일했다. 그는 카이사르의 집사 노릇을 하였고,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 옥타비아누스를 만나 그의 편이 되었다. 항상 승자의 편에 귀신처럼 서는 사람이었다. BC 40년 그는 집정관이 되었다. 로마시민으로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에게는 처음 주어진 명예였다.

 

 나는 옥타비아누스, 발부스와 의례적인 인사를 하였다.

 인사 후에 발부스는 나에게 말했다.

 벤티디우스님은 공화국을 위기에서 구했습니다. 개선식의 자격이 충분합니다.”

 바쁘신 두 분이 여기까지 올 이유가 없다고 보는데 정말 하시고 싶은 말씀은 무엇인가요?”

 사실 개선식 이후 무엇을 하실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궁금해서 여쭙고자 했습니다.”

 나는 발부스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지금까지 나는 옥타비아누스이 군대와 교전한 적이 없었다. BC 43년 무티나(Mutina)에서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했을 때도 나는 무티나에 없었고,, BC 41년 안토니우스의 아내 풀비아(Fulvia) 와 동생 루키우스 안토니우스가 페루시아(Perusia)에서 옥타비아누스와 교전했을 때도 나는 나의 주둔지를 지켰다. 그러나 파르티아 전쟁을 통해 나의 실력을 알게된 옥타비아누스는 측근인 발부스를 통해 나를 회유하려 한 것이다.

 나는 발부스에게 되물었다.

 발부스님은 자식도 없고, 나이도 지긋하고, 부와 명예도 대단하신데, 앞으로 무엇을 더 바라십니까??”

 저는 카이사르(옥타비아누스, 카이사르의 양자라 카이사르의 이름을 물려받았음)님과 저의 조카가 잘 되기 만을 빕니다.”

 저는 개선식 후에는 은퇴해서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더 이상 동족의 피를 손에 묻히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한 아이의 후견인이 되어 살고 싶습니다. 대신 이 아이의 안위가 위협되면 저는 무엇을 할지 모릅니다.”

 도대체 누구의 후견인이 되고 싶으십니까?”

 퀸투스 라비에누스의 아들, 티투스 라비에누스의 후견인이 되고 싶습니다.”

 발부스는 웃으며 말했다.

 역적의 아들인데 개선식에나 끌고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발부스를 노려며 말했다.

더 이상 아무 죄 없는 아이들이 개선식에나 끌려나오고, 자신의명예를 위해 동족을 욕보이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그냥 죽음의 위협도, 전쟁도 없이 평화롭게 살았으면 합니다. 물론 티투스 라비에누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발부스는 난처해하며 말했다.

 벤티디우스님의 어릴 적 불운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공화국의 앞날에 방해만 되지 않으면 누구라도 카이사르님의 자비에 호소할 수 있습니다. 이 점만 염두해 두시면 그런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카이사르의 앞날에 실질적인 위협이 되지 않는 이상 티투스는 안전한 것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저는 제 뜻을 알아주신 것으로 알고 개선식을 끝으로 은퇴하겠습니다. 더 이상 동족의 피를 손에 뭍히고 싶지 않습니다.”[9]

 나는 옥타비아누스와 발부스를 뒤로 한채 방을 나섰다.

 

 다음 날, 나는 개선식을 치뤘다. 파르티쿠스라는 호칭은 취하지 않았다. 은퇴하여 티투스의 후견인으로 조용히 살려면 굳이 개인적 명예를 앞세워 옥타비아누스를 자극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파악한 옥타비아누스는 자신 외에 다른 이들이 제국의 1인자가 되거나, 자신보다 군사적 명에가 높아지는 것을 바라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피케눔으로 향했고, 어느 허름한 농가에서 어머니와 힘겹게 살아가는 티투스 라비에누스를 만났다. 나는 이들 모자 뿐 아니라 다른 전쟁 고아와 과부들을 도우며 남은 생을 살아갔다.

 할아버지와 이름이 같은 티투스는 총명했다. 세월이 지나자 티투스는 역사가와 웅변가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티투스의 웅변술은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그러나 티투스는 당대의 역사에 관심이 많았고, 공화정 이상을 옹호하였으며, 이제는 아우구스투스가 된 옥타비아누스와 그 당파를 공격했다. 아마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삶 때문에 그렇게 되었으리라. 나는 말렸지만 티투스는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티투스는 당대의 역사를 저술하기 시작했다. 그는 말과 글을 무기로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무력을 동원하거나 말로 정권 탈취를 권하지도 않았다. 그냥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며 비판할 분이었다. 그래서 정권에 실질적인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정권에 큰 위협이 되지 않는 불평분자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파르티아로부터 조국을 구원하 해방자인 나와 충돌할 수도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굳이 그런 화음을 만들고 싶지 않을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티투스를 내버려 두었다.

 이제 나는 몸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생의 마지막이 다가오면 바로 알게 된다는데, 오늘이 나의 마지막인 듯하다. 티투스에게는 기별을 보냈는데 아직 오지 않았다. 개선식에 끌려나왔던 꼬마가 로마 최고의 장군으로 개선식까지 거행하고, 지금은 사람을 살리는 일에 힘 쓰고 있다. 내 인생의 전반기는 살기 위해서, 중반기는 조국을 위해서, 후반기는 동족을 죽인 죄를 씻고, 로마의 미래인 아이들을 살리면서 살았다. 티투스가 과거에 사로 잡혀서 사는 것 같아서 조금 안타깝다. 그래도 나의 삶은 나름 보람차고 후회없는 인생이었다.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는 내가 살았던 시대보다 조금더 따뜻하고 희망찼으면 좋겠다. 어린 시절의 나 같이 불행한 아이들이 없도록 나라에서 제도적으로 아이들을 돌보아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힘이 점점 빠져나갔다. 나는 방으로 급히 들어오는 티투스를 보면서 눈을 감았다.[10]

 

로널드 사임은 <로마 혁명사>에서 벤티디우스가 공병 대장(프라이텍티 파브룸(praefecti fabrum))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사임은 힘든 유년기를 보낸 벤티디우스가 아스쿨룸에서 폼페이우스 스트라보의 포로가 되어 로마 개선식에 끌려나왔고, 후에 군납업자로 성공했고, 보급과 수송의 전문인으로 카이사르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겔리우스의 <아티카 야화>에 따르면 벤티디우스가 사제와 집정관이 되었을 때 노새몰이꾼이 집정관이 되었다는 풍자시가 로마에 붙었다고 전한다.[11] 그는 카이사르 암살 후에 안토니우스의 편을 들었다. 벤티디우스는 안토니우스가 무티나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한 후 아이밀리아 가도를 따라 도주할 때 피케눔에서 3개 군단을 이끌고 합류했고, 안토니우스에 의해 파르티아인을 격퇴하기 위해 동방으로 보내졌다. 벤티디우스는 그만큼 안토니우스의 신뢰를 받고 있었다.

 사임경은 벤티디우스는 카이사르 밑에서 종군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카이사르식의 결단력과 빠른 속도를 가졌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킬리키아 관문, 아마누스 산, 긴다루스에서 벌어진 3차례의 전투에서 파르티아인들을 격퇴하였고, 51년 전에 폼페이우스 스트라보의 포로 가운데 하나로 개선식에 끌려왔던 인물이 로마에서 개선식의 주인공이 되었고,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뤄졌다고 한다.

 그런데 벤티디우스가 킬리키아 관문 전투에서 격파한 퀸투스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의 장군이었던 티투스 라비에누스의 아들이고, 티투스 라비에누스는 벤티디우스처럼 피케눔 출신이다. 동향인이면서 카이사르의 부하였던 두 사람과 그 가족이 서로 알았다는 가정 하에서 이번 이야기를 썼다. 그리고 제정 초기에 티투스 라비에누스라는 연설가, 웅변가가 있었다. 이 라비에누스라는 성은 흔치 않다. 분명히 라비에누스 집안과 관계가 있을텐데, 나는 이 사람이 퀸투스 라비에누스의 손자라는 가정을 추가로 해보았다.

 내전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동지였을지도 모르는 두 사람은 적으로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벤티디우스와 라비에누스 모두 같은 로마인의 피를 손에 묻힐 것을 각오하고 영달을 추구했다. 다만 섬기는 주인이, 가지고 있는 국적이 다른 뿐이었다. 살기 위해 동포를 죽여야만 하는 것. 내전이 가지는 가장 큰 비극인 것이다. 그러나 로마의 모든 이가 이런 내전 속에서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했을까? 로마에서 누군가는 내전으로 인한 폐해에 대해 고민을 하고, 속죄의 행동을 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에서 벤티디우스의 개선식 이후 행적을 전쟁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으로 가정하였다. 물론 허구이지만 내전의 상흔을 이겨내기 위해 누군가 했을지도 모를 노력을 묘사한 것이다.

 

※ 인물 소개

.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Publius Ventidius Bassus, ? ~ ?) : 이탈리아 북부 피케눔 출신. BC 88년 동맹시 전쟁이 끝난 후 위대한 폼페이우스의 아버지였던 폼페이우스 스트라보의 개선식에 어머니의 손에 매달린채 끌려왔다. 당시에는 광장히 어렸을 것으로 추측된다. 빈곤한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으로 추측되며, 후에 군납업자로 카이사르와 친분을 쌓았고, 그의 이런 경력 때문에 사람들에게 노새 몰이꾼으로 비웃음을 샀다. 카이사르에 의해 법무관으로 임명되고, 카이사르 암살 이후에는 안토니우스의 편에 섰다. 그는 2차 삼두정이 수립된 이후 옥타비아누스의 사퇴로 공석이 된 집정관에 임명된다. 파르티아군이 로마의 동방을 휩쓸자, BC 39~38년 동안 3차례의 전투에서 파르티아군을 격파하고 로마의 동방을 회복한다. 그가 파르티아인을 격파할 때 쓴 전략, 전술은 로마인들에 의해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티베리우스의 조카 게르마니쿠스처럼 명장이라고는 이야기되는데 특별한 전략, 전술이 전해지지 않는 장군과는 다르게 그는 단 3번의 전투로 로마의 명장으로 기억되었다. 로마인 최초로 파르티아인에 대한 승리로 개선식을 거행한 인물이고, 개선식으로 끌려나온 인물이 후에 개선식을 거행한 드라마틱한 인생을 산 인물이다. 개선식 이후 그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으며 그의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뤄졌다고 한다.

 

. 퀸투스 라비에누스(Quintus Labienus, ? ~ BC 39) : 카이사르의 장군이었던 티투스 라비에누스의 아들. 아버지인 티투스 라비에누스는 내전에서 파트로네스인 폼페이우스 편을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내전 기간 동안 아버지를 수행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BC 44년 카이사르 암살 이후 암살자들 편에 서고,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에 의해 파르티아의 오로데스 2세에게 원군 요청을 하러 간다. 그러나 오로데스 2세는 결정을 미루기만 하였다. 라비에누스는 BC 42년 필리피 전투에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한 후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파르티아에 남고, BC 40년 파코루스 왕자와 함께 시리아를 침공한다. 파코루스와 라비에누스는 로마의 동방 속주와 예속 왕국들을 휩쓸었다. 그러나 BC 39년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에 의해 패배하고 도주하였다가, 데메트리우스(Demetrius)에 의해 붙잡혔고, 처형당한다. 카시우스 디오의 <로마사>에 따르면 그가 로마 침공을 제안했고, 스스로 임페라토르, 파르티쿠스라는 칭호를 사용했다고 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어쩔 수 없이 파르티아에 투항한 것을 넘어서 파르티아에 자신의 지위를 높이려고 시도한 것이 틀림없다.

 



[1] 퀸투스 라비에누스가 파르티아에 망명하게 된 이유, 파르티아가 라비에누스와 파코루스를 앞세워 로마를 침공하고, 기병의 우위를 앞세워 데키우스 삭사에게 승리한 것은 디오 카시우스 <로마사> 48 24~25장 참고

[2] 파르티아군이 시리아, 소아이사를 제압하고, 팔레스타인을 침공하여 친파르티아 정권을 세우고, 라비에누스가 임페라토르, 파르티쿠스라는 칭호를 취한 것은 디오 카시우스 <로마사> 48 26장 참고

[3] 터키 남쪽에 위치한 산맥, 지중해를 마주보고 동서 800km 길이로 뻗어 있다.

[4] 벤티디우스의 소아시아 상륙, 벤티디우스의 라비에누스 추격, 타우루스산맥에서 서로 보충병이 합류한 이후 언덕에서 교전한 내용. 라비에누스의 병력 없이 로마군에 도전했다 패하고 도주한 파르티아군. 도주 계획이 탄로나서 후퇴 도중 로마군의 기습을 받고 궤멸한 라비에누스군. 병사들을 버리고 도주하였다가 사로잡힌 라비에누스에 관해서는 디오 카시우스 <로마사> 4839~40장 참고. 파르티아군이 두려운 척하여 적의 공격을 유도하고, 이를 매복으로 격퇴한 것은 프론티누스 <전략> 2 5(매복편) 36절 참고.

[5] 벤티디우스가 카이사르에 의해 법무관에 지명된 것과 어린 시절에 개선식에 끌려나온 것은 디오 카시우스 <로마사> 43 51장 참고

[6] 벤티디우스가 보궐집정관에 임명된 것은 디오 카시우스 <로마사> 47 15장 참고

[7] 라비에누스와 벤티디우스의 대화는 허구이다.

[8] 적의 간첩을 이용하여 거짓 정보를 흘려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적이 행군하게 하고, 그 사이에 병력을 보강한 것은 프론티누스 <전략> 1 1(계획 은닉) 6절 참고. 적이 500보 이내 들어왔을 때 공격하게 한 것은 프론티누스 <전략> 2 2(싸움 장소 선택) 5절 참고. 플로루스는 <로마 역사의 요약> 2권에서도 벤티디우스가 적이 근접했을 때 공격하게 한 것이 언급된다.

[9] 카이사르와 옥타비아누스를 섬겼던 발부스와 벤티디우스의 만남은 허구이다.

[10]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티투스 라비에누스(? ~ AD 12)라는 웅변가, 역사가가 살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와 그 당파를 공격했고, 후에 세네카가 티투스에 관해서는 혹평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그의 저술들은 원로원에 의해 다수가 불탔고, 몇몇 연설만 다른 사람들의 저서를 통해 전해진다. 그리고 티투스 라비에누스와 퀸투스 라비에누스의 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티투스 라비에누스가 퀸투스 라비에누스가 부자 지간이고, 벤티디우스가 퀸투스 뿐 아니라 전쟁 고아들을 후견했다는 것은 허구이다. 그러나 라비에누스 집안 출신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직계 후손이거나 가까운 친척인 것은 분명하다.

[11] 겔리우스는 <아티카 야화(Noctes Atticae)> 15 4장에서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를 전하면서 그가 집정관이 되었을 때 로마인들이 풍자시를 벽에 붙였던 이야기, 그의 장례가 국장으로 치뤄진 이야기를 전한다. 그는 BC 43 11월 옥타비아누스의 사퇴로 공석이된 집정관직에 보궐로 선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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