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초기의 시칠리아의 상황(BCE 264 - BCE 261)
로마가 참전을 결정했을때 시칠리아에 주둔한 카르타고군의 사령관은 한
니발의 아들인 한노(Hanno)였다. 로마는 우선 마메르티니인들에게 로마
원로원의 지원 승인을 알리기 위해서 클라디우스(Gaius Cladius)를 사절
로 메사나에 보냈다. 이들은 메사나에서 마메르티니인들에게 큰 환영
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중 일부가 돌아가는 길에 카르타고 해군에 사로
잡히게 되었다. 카르타고군 사령관 한노는 로마와의 충돌은 피하고 싶
어 했기 때문에 사로잡은 로마의 사절들을 돌려 보냈다. 하지만 로마 원
로원의 전쟁 수행의지는 강경했다.
로마는 기원전 264년, 집정관(Consul) 클라디우스(Appius Cladius)와 집
정관 플라쿠스(Fulvius Flacus)가 지휘하는 2개 정규 군단과 보조병으
로 구성된 20,000명의 군대를 시실리로 파병했다. 메사나에 이르는 해협
은 매우 좁았지만(2차대전때 독일군이 시칠리아에서 퇴각할때도 메사나
를 통해서 퇴각했다.) 제해권을 카르타고가 쥐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건
널수가 없었다. 로마는 동맹 도시인 타렌툼, 로크리(Locri), 엘레아
(Elea)에서 군함을 빌린뒤 카르타고 해군의 감시를 피해 야간에 도하를
했다. 시칠리아에 상륙한 클라디우스는 가장 먼저 시라쿠사왕 히에로가
이끄는 군대를 공격했다. 전투는 매우 치열해서 양군이 승패를 가리지
못했는데 히에로는 자신의 군대가 피해를 크게 입었기 때문에 시라쿠사
로 철수했다. 로마군은 다시 메사나 외곽에 포진한 카르타고군을 공격했
다. 카르타군은 큰 피해를 내고 메사나에서 철수했다
로마가 시라쿠사와 카르타고 양군을 격파하자 시실리의 많은 도시가 로
마측으로 돌아섰다. 로마에 매우 유리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기원전 263
년, 집정관이 새로 막시무스(Valerius Maximus)와 크라수스(Otacilius
Crassus)로 교체되었다. 로마는 시실리에 주둔한 병력을 증강시켜서 263
년에는 시실리의 로마군은 50,000으로 증가했다. 로마는 시라쿠사 공격
에 앞서서 카르타고와 시라쿠사와 동맹을 맺은 도시들을 공격했다. 가
장 먼저 에트나산 남서쪽에 위치한 하드라논(Hadranon)이 로마군의 공격
으로 함락되었다. 그리고 로마군은 켄토리파(Kentoripa)를 포위 공격해
서 함락 시켰다. 이렇게 되자 총 67개의 도시가 로마의 편으로 돌아섰
다.(50개의 도시라는 설도 있다.) 이제 로마군은 시라쿠사를 포위 공격
하기 시작했다. 시라쿠사왕 히에로는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자 우선 로
마와 평화협정을 체결하기로 했다. 히에로는 로마측에 몸값을 받지 않
고 모든 포로를 넘겨주고 전쟁배상금으로 황금 100탈렌트(200탈렌트라
는 설도 있음)를 배상하는 조건으로 로마와 15년간의 평화 조약을 맺었
다.
262년, 집정관이 메겔루스(Postumius Megellus)와 비툴루스(Mamilius
Vitulus)로 교체되었다. 시라쿠사가 항복하자 시실리의 로마군은 2개 군
단으로 축소 되었다. 로마는 카르타고와도 쉽게 평화조약을 체결할수 있
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로마는 아직까지도 카르타고와 전면전을
치룰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카르타고측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
고 있었다. 카르타고는 켈트인과 이베리아인, 리구리아인 용병을 대규모
로 고용해서 시실리로 투입했다. 아그리겐툼이 시실리에서 카르타고군
의 기지가 되었다. 카르타고가 전쟁을 그만둘 의사가 없다는 것을 파악
한 로마는 아그리겐툼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262년 6월, 두명의 집정관
이 지휘하는 로마군은 아그리겐툼 외곽에 도착해서 도시에서 2km 떨어
진 곳에 병력을 주둔시켰다. 이들은 아그리겐툼공격은 매우 쉽게 끝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5개월간 포위가 계속되자 아그리겐툼의 카르
타고군은 점차 식량이 떨어져 가기 시작했다. 아그리겐툼 수비군은 구원
을 요청했고 한노가 지휘하는 카르타고군이 포위를 뚫기 위해서 아그리
겐툼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한노가 지휘하는 카르타고군은 보병 30,000명, 기병 1,500명, 코끼리 30
마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편, 로마군역시 긴 포위로 인해서 부대내에
전염병이 돌고 식량사정도 나빠졌다. 한노는 로마군의 상태를 파악하고
누미디아인 기병으로 로마군을 전장으로 끌어내려고했다. 로마군은 상황
이 매우 나빴기 때문에 별수 없이 한노의 도전에 응했다. 그런데 신기하
게도 전투에서 카르타고군이 대패했다. 보병 3,000명과 기병 200명이 사
망하고 4,000명이 로마군에 사로 잡혔다. 코끼리들은 모두 전멸 당했다.
(코끼리가 별로 신통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였던것 같다..) 구
원군이 대패해서 퇴각하자 아그리겐툼 수비대는 포위망을 돌파하기로 결
정하고 밤을 틈타 로마군의 포위망을 뚫고 빠져 나갔다. 다음날, 로마군
은 아그리겐툼을 점령하고 아그리겐툼의 주민 25,000명을 노예로 팔았
다.
아그리겐툼의 함락과 한노가 지휘하는 카르타고군을 격파했다는 소식이
로마로 전해지자 로마 원로원은 생각을 바꿨다. 카르타고와의 제한적인
전쟁이 아니라 시실리전체를 로마의 영향권안에 넣기로 결정한 것이었
다.
로마가 참전을 결정했을때 시칠리아에 주둔한 카르타고군의 사령관은 한
니발의 아들인 한노(Hanno)였다. 로마는 우선 마메르티니인들에게 로마
원로원의 지원 승인을 알리기 위해서 클라디우스(Gaius Cladius)를 사절
로 메사나에 보냈다. 이들은 메사나에서 마메르티니인들에게 큰 환영
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중 일부가 돌아가는 길에 카르타고 해군에 사로
잡히게 되었다. 카르타고군 사령관 한노는 로마와의 충돌은 피하고 싶
어 했기 때문에 사로잡은 로마의 사절들을 돌려 보냈다. 하지만 로마 원
로원의 전쟁 수행의지는 강경했다.
로마는 기원전 264년, 집정관(Consul) 클라디우스(Appius Cladius)와 집
정관 플라쿠스(Fulvius Flacus)가 지휘하는 2개 정규 군단과 보조병으
로 구성된 20,000명의 군대를 시실리로 파병했다. 메사나에 이르는 해협
은 매우 좁았지만(2차대전때 독일군이 시칠리아에서 퇴각할때도 메사나
를 통해서 퇴각했다.) 제해권을 카르타고가 쥐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건
널수가 없었다. 로마는 동맹 도시인 타렌툼, 로크리(Locri), 엘레아
(Elea)에서 군함을 빌린뒤 카르타고 해군의 감시를 피해 야간에 도하를
했다. 시칠리아에 상륙한 클라디우스는 가장 먼저 시라쿠사왕 히에로가
이끄는 군대를 공격했다. 전투는 매우 치열해서 양군이 승패를 가리지
못했는데 히에로는 자신의 군대가 피해를 크게 입었기 때문에 시라쿠사
로 철수했다. 로마군은 다시 메사나 외곽에 포진한 카르타고군을 공격했
다. 카르타군은 큰 피해를 내고 메사나에서 철수했다
로마가 시라쿠사와 카르타고 양군을 격파하자 시실리의 많은 도시가 로
마측으로 돌아섰다. 로마에 매우 유리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기원전 263
년, 집정관이 새로 막시무스(Valerius Maximus)와 크라수스(Otacilius
Crassus)로 교체되었다. 로마는 시실리에 주둔한 병력을 증강시켜서 263
년에는 시실리의 로마군은 50,000으로 증가했다. 로마는 시라쿠사 공격
에 앞서서 카르타고와 시라쿠사와 동맹을 맺은 도시들을 공격했다. 가
장 먼저 에트나산 남서쪽에 위치한 하드라논(Hadranon)이 로마군의 공격
으로 함락되었다. 그리고 로마군은 켄토리파(Kentoripa)를 포위 공격해
서 함락 시켰다. 이렇게 되자 총 67개의 도시가 로마의 편으로 돌아섰
다.(50개의 도시라는 설도 있다.) 이제 로마군은 시라쿠사를 포위 공격
하기 시작했다. 시라쿠사왕 히에로는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자 우선 로
마와 평화협정을 체결하기로 했다. 히에로는 로마측에 몸값을 받지 않
고 모든 포로를 넘겨주고 전쟁배상금으로 황금 100탈렌트(200탈렌트라
는 설도 있음)를 배상하는 조건으로 로마와 15년간의 평화 조약을 맺었
다.
262년, 집정관이 메겔루스(Postumius Megellus)와 비툴루스(Mamilius
Vitulus)로 교체되었다. 시라쿠사가 항복하자 시실리의 로마군은 2개 군
단으로 축소 되었다. 로마는 카르타고와도 쉽게 평화조약을 체결할수 있
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로마는 아직까지도 카르타고와 전면전을
치룰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카르타고측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
고 있었다. 카르타고는 켈트인과 이베리아인, 리구리아인 용병을 대규모
로 고용해서 시실리로 투입했다. 아그리겐툼이 시실리에서 카르타고군
의 기지가 되었다. 카르타고가 전쟁을 그만둘 의사가 없다는 것을 파악
한 로마는 아그리겐툼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262년 6월, 두명의 집정관
이 지휘하는 로마군은 아그리겐툼 외곽에 도착해서 도시에서 2km 떨어
진 곳에 병력을 주둔시켰다. 이들은 아그리겐툼공격은 매우 쉽게 끝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5개월간 포위가 계속되자 아그리겐툼의 카르
타고군은 점차 식량이 떨어져 가기 시작했다. 아그리겐툼 수비군은 구원
을 요청했고 한노가 지휘하는 카르타고군이 포위를 뚫기 위해서 아그리
겐툼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한노가 지휘하는 카르타고군은 보병 30,000명, 기병 1,500명, 코끼리 30
마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편, 로마군역시 긴 포위로 인해서 부대내에
전염병이 돌고 식량사정도 나빠졌다. 한노는 로마군의 상태를 파악하고
누미디아인 기병으로 로마군을 전장으로 끌어내려고했다. 로마군은 상황
이 매우 나빴기 때문에 별수 없이 한노의 도전에 응했다. 그런데 신기하
게도 전투에서 카르타고군이 대패했다. 보병 3,000명과 기병 200명이 사
망하고 4,000명이 로마군에 사로 잡혔다. 코끼리들은 모두 전멸 당했다.
(코끼리가 별로 신통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였던것 같다..) 구
원군이 대패해서 퇴각하자 아그리겐툼 수비대는 포위망을 돌파하기로 결
정하고 밤을 틈타 로마군의 포위망을 뚫고 빠져 나갔다. 다음날, 로마군
은 아그리겐툼을 점령하고 아그리겐툼의 주민 25,000명을 노예로 팔았
다.
아그리겐툼의 함락과 한노가 지휘하는 카르타고군을 격파했다는 소식이
로마로 전해지자 로마 원로원은 생각을 바꿨다. 카르타고와의 제한적인
전쟁이 아니라 시실리전체를 로마의 영향권안에 넣기로 결정한 것이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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