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테르모필레전투 B.C.480년

작성자라일리우스|작성시간07.03.26|조회수1,679 목록 댓글 1
간헐천과 온천이 흐르는곳 그래서 "뜨거운 통로"라는 의미를 가진곳 "테르모필레", 현재 '300'이라는 영화가 상영되면서 다시금 찾게되는 이곳은 현재 그저 평온하고 조용한곳에 불과하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2500여년전에 커다란 사건의 현장이었다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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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테르모필레지역의 사진)

 

테르모필레 지역을 지나는 사람은 한때 거의 다닐수 없을 정도로 좁고 기다란 땅이었다는 사실을 알면 많이 놀랄정도로 지형이 퇴색하였다. 하지만 2500여년전에 이곳은 피빛이 물든 전쟁터였다.

 

페르시아 전쟁 초기 마라톤에서 대패한 다리우스 히스타피스(다리우스대왕) 이후 계승을한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는 여러문제로 골머리를 앓게된다. 그의 통치 첫해를 제국 내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힘을쏟았고 자신의 권력기반을 돈독하게 만드는데 전력을 쏟았다. 또한 여러가지의 상황을 유도하여 군대를 강성하게 만드는데 자신의 재산을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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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및 소아시아 지도)

 

그것은 선대 다리우스 대왕이 무리하게 전쟁을 준비하였기 때문에 페르시아에 대한 내란이 발생하였던점들이 작용하였다 볼수있겠다. 그렇게 시작된 국가제정의 확충과 아울러 군비확충 이어서 강성한 군대를 육성한 결론으로 볼수있다. 하지만 크세르크세스는 군대를 강력하게 만든 이유는 다른곳에 있었다.

 

또한 그의 신하들은 그리스 정복을 감행하도록 부추겼던것도 사실이었다. 특히 선대 다리우스대왕이 이루지못한 그리스정복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하였다. 항상 크세르크세스의 머리에서는 그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B.C.484년부터 B.C.481년의 기간동안  페르시아 관할내와 속주들에서 군대를 징집하기에 이른다.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때까지 전쟁을 이루었던 군대의 규모중 가장 큰 규모라 기록하고있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크세르크세스의 육군과 해군을 합친 병력은 264만 1610명 이라고 기록하였다. 3년간의 준비는 그리스까지 전해지는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리스에서는 대병력에 대한 반응이 여러갈래로 나뉘었지만 '테미스토클레스'를 주축으로 하는 강경파의 목소리를 통해 그들은 결전의 준비를 하게 되었다.

 

'델포이의 신탁'을 통해 "나무 성벽"으로 방어하라는 지시를 받게되자, 아테네 폴리스는 해군력을 증강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로리움에 있는 국가 소유의 광산에서 많은수의 은이 발견되자, 아테네의 명장이자 정치가인 '테미스토클레스'는 민회를 설득, 은광의 수익금 전부를 '갤리선' 200척으로 이루어진 함대를 구축하는 데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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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단 갤리선)
 

이처럼 전시상황으로 돌변한 그리스지역의 문제를 처음에는 다소 우유부단했던 스파르타도 그리스의 약 30개 도시 국가로 이루어진 그리스 동맹의 결성을 주도하게되었고, 그러는 동안 크세르크세스는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지역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페르시아의 군대가 쉽사리 이동하기엔 병력이 많았다고 말해야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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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군의 원정로)

 

그들의 첫 난관은 아시아와 유럽을 분리시키는 좁은 해협인 '헬레스폰트 해협'(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야 하였는데, 그들이 2단으로 배를 붙여 만든 배다리가 폭풍우로 인해 부서져 한동안 멈추게 되는일이 있었다. 이 상황에 대해 헤로도토스는 "크세르크세스는 격노하여 '헬레스폰트 해협'의 물을 300번 채찍질하고 낙인을 찍은 다음 족쇄를 채우라고 말하고, 다리를 만든 기술자들의 목을 베게 하였다."라고 기록한다. 

 

B.C480년 6월 무렵, 페르시아 육군은 해군과와 함께 테살리아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진군하였다. 그리스동맹군은 테르모필레에서 전투를 치르기로 결정을 내렸는데, 테르모필레는 15미터도 채 안 되는 해변으로 본토의 산맥이 가파르게 비탈져 있는 좁고 기다란 땅이었다.

 

페르시아 군대는 이 기다란 땅을 매우 좁은 행렬로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전투시 많은 공격자에게는 상당하게 불리하고 방어자에겐 방어로써의 가치가 높다고 말할수 있는 곳이었다.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왕은 자신의 휘하에 동맹군병사 7000명을 데리고 테르모필레 근처의 해협에 진을 쳤다.

 

레오니다스의 휘하의 동맹군이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동안 아테네의 전함들은 아르테미시움 앞바다에서 기만술로 페르시아 함대에 타격을 입히고 있었다. 크세르크세스는 8월 초가 되어서 테르모필레에 도착하였고, 대규모의 군대로 그리스군을 대파할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는 일차적으로 항복을 권하였다. 하지만 그리스동맹군은 끝까지 싸울것을 계속 말할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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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르모필레 전투 초반)

 

화가 날데로 난 크세르크세스는 메디아군과 시시안군을 파견, 동맹군을 제압하려 했지만 막대한 손실을 입을 뿐이었다. 패배를 테르모필레를 넘어가야하는 상황에 직면한 크세르크세스는 자신의 정예병력인 근위대를 '히다르네스'에게 맡겨 보냈지만 마찬가지 결과를 초례할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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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르모필레전투 초반 전투도)

 

자신의 정예병력마저 대패한 시점 크세르크세스는 테르모필레를 넘어야한다는 집념에 사로잡혀있었다. 그때 테살리아에 살고있던 '에피알테스'라는 농부가 그에게 다가와 언덕 너머 동맹군의 후방으로 안내해 주겠다고 제의하면서 활기를 찾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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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알테스가 알려진 후방에 대한 지리)

 

다음날 아침, 페르시아군은 동맹군의 후방에서 공격하기 위해 접근하고 있었다. 포위, 이제는 늦었다는것과 자신들의 최후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은 스파르타군은 맹렬하게 방어하기 시작하였다. 테르모필레를 점령하는 집착을 보인 크세르크세스는 자신의 전진부대에게 채찍질도 불사하면서 진군명령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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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르모필레전투 상황도)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의하면 "채찍질에 내몰려서 전진한 페르시아군 다수는 밟혀서 죽거나 밀려서 바다로 떨어져 죽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페르시아군의 전방 공격과 '히다르네스'를 사령관으로한 후방 공격군의 도움으로, '레오니다스' 왕과 1천명의 스파르타의 병사들은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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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의 마지막 절규)

 

이후상황

테르모필레 전투가 전쟁의 종지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크나큰 오산이다. 실제 이 상황은 테르모필레전투이후 살라미스 해전을 통한 관문에 지나지 않는다는 내용이 되는데 테르모필레에서 승리를 거머쥔 페르시아는 육,해군이 합동하여 아테네군을 추격하였고, 아테네까지 점령하게 되었다. 크세르크세스는 아티카(아테네의 심장부)로 진군해 들어가 약탈하고 불을 질렀고, 아테네 사람들은 인근에 있는 살라미스 섬으로 피난, 제 2차전을 준비하였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그리스 함대는 아테네와 함께 살라미스 섬 사이에 주둔하였고, 아크로폴리스가 페르시아에 함락되는 2주일동안 체제 정비에 전력을 쏟았다. 그동안 아크로폴리스의 수비군은 전멸하였고, 아크로폴리스는 철저하게 파괴당하였다.

 

그리스동맹의 해군은 테르모필레 근처에서 여러차례 페르시아 함대와 교전을 벌였지만 결정적인 해전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육지에서 '레오니다스'휘하의 동맹군이  패주하자 함대는 남쪽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함대는 살라미스 만에 다시 집결하였고 다시금 체제정비에 들어갈때 테미스토클레스는 작전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그리스 동맹함대는 페르시아 해군보다 약했다. 특히 페르시아의 핵심이었던 페니키아의 전함이 그리스의 갤리선보다 크면서도 조종하기가 더 쉽다는 사실과 아울러 페르시아 함대는 약 1200척이라는것과 대조적으로 동맹군의 배는 380척이라는 내용을 보았을때 적어도 가능성에서는 난제였던것이 분명하였다. 특히 해군은 페르시아의 해군만큼 숙련되어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머리가 지끈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살라미스 섬과 아티카의 해안 사이에 있는 해협을 통과한다면?" 이란 생각을 품게되는 테미스토클래스의 가정은 페르시아를 자연히 살라미스로 유도하게 만들었다. 폭이 좁아서 배가 50척씩밖에 나란히 전진할 수 없다는 장점은, 만일 동맹군이 페르시아군을 천연적인 깔때기 모양의 이 해협으로 유인할 수 있다면, 페르시아군의 수적 우세와 뛰어난 선박 조종술은 무용지물이 될 것이라는 가정을 낳게되었고, 승기를 잡을수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테미스토클레스는 싸움을 촉발시키기 위해 크세르크세스에게 허위 전갈을 보내서, 그리스 함대에게 도망칠 기회가 생기기 전에 공격하라고 알렸다."라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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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해군과 그리스해군의 상황)

 

그 소문의 진상을 깨닫지 못한체 크세르크세스는 바로 일에 착수한다. 페르시아 함대는 육군을 태우고 전투 대형으로 아티카의 끝부분을 돌아서 그 해협을 향해 나아갔다. 승리를 확신한 크세르크세스는 전투를 편안히 지켜 볼 수 있게 산 위에 자리를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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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위에서 지켜보는 크세르크세스)

 

페르시아 함대가 좁은 통로로 몰려들자 큰 혼란이 일어났다. 갑자기 살라미스 섬의 언덕에서 나팔 소리가 들리면서 동맹군의 갤리선이 쏜살같이 전진하였다. 갤리선은 페르시아 함선의 측면을 들이 받았고 충격을 받은 페르시아 함선은 배가 부서지면서 균형을 잃고 서로 부딪치게 만들었다. 특히 돌발상황에 놀랄사이 동맹군은 타격을 입은 적선에 뛰어올라가 난전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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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미스해전 상황)

 

아티카 해안의 백사장에는 페르시아 함대의 부서진 나무 조각과 토막 난 시체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살라미스에서 패전의 광경을 목격한 크세르크세스는 남은 함선을 모아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의 원정은 그 해에 끝이 나게 되었고, 결말을 유도하였다. 하지만 그의 야심은 아직은 계속이라 해야할듯 일부의 원정군을 트라키아와 일부 소아시아부근에 주둔시켜 '마르도니우스'의 지휘 아래 그곳에서 겨울을 나도록 하였다. 이것은 일년뒤인 B.C.479년에 발생한 '플라타이아이'전투를 위한 준비과정이 되었다.

 

'헤로도토스' 테르모필레와 살라미스전쟁에 대해 말한다. "이 원정에 비하면 다른 모든 원정은 하찮게 보일 뿐이다."라고 (헤로도토스의 역사, 제7권, 20절)

 

기록에 의하면, 해군력이 "총 517,610명, 보병의 수는 1백 7십만명이고, 기병은 8만명이었다. 이 외 낙타병과 전차병을 약 2만명으로 잡았다. 그러므로 육군과 해군의 총계는 2,317,610명에 달했다." (제7권, 184절)

 

3차 페르시아 전쟁을 가르키면서 학자들에게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있다. 역사가 윌 듀렌트는 페르시아의 병력이 과장되었다고 주장하면서 1백 30만으로 말하였고 이후 여러학자들 사이에서도 과장되었다는 견해가 크다고 말한다.

 

*오랜만에 글을 올리네요...네이버지부는 지금 활동중지상태 ㅡㅜ;;;

다음이 가장 활성화 되있다고 생각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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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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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타메를랑 | 작성시간 07.03.29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테르모필레 전투 이후 벌어진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스파르타가 주축이 된 그리스 연합군은 페르시아군을 크게 무찔렀고, 스파르타군은 이후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이집트로 원정을 가 이집트 독립에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소아시아의 남부 지방에 원정까지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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