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사]]Re:제3차 중동전쟁(6일전쟁)(퍼옴)

작성자최세종|작성시간02.06.29|조회수270 목록 댓글 0
중동의 2차 전쟁을 보고 세계 여론은 이스라엘을 독수리로 비유했고
이집트를 참새로 비유했다.
더이상 아랍은 강국이 아니었다.
중동의 최강자는 이스라엘이었던 것이다.
불과 독립한지 10년도 채 안되어서...
물론 결과만을 본다면야 뭐 아랍을 비하할수도 있을것이다.
만약 유럽이면 어떻하겠냐는등..
하지만 이러한 이스라엘의 저력이라면 어디서라도 결코 약자의 대열에
는 서있지 않았을것이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깊이 생각해 봐야 하는 문제이다.
무엇이 4대 강국인가??
그리고 무엇이 우방인가??
스스로 강국이 되지 못하고 타국가를 강국으로 인정하는 이 모습은
그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를 스스로 밝히는 것이다.

나역시 이스라엘을 강대국의 지원을 받은 국가로 알고 있었고
그들의 그런 현격한 전과는 그러함에 근거한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1950년대에 이스라엘은 그러한 지원을 받지 못했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의 도움이 있었고 여러가지 도움이 있었겠지만
궁극적으로 그들 민족이 다른 국가와 위세와 위협에 굴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힘을 키워 얻은 결과라는 것이다.
어떻게 이러한 사실을 보고 그렇지 않다고 결론을 내릴수 있겠는가?
(앗 또 딴말하고 있다. --;;)

2차 중동전 이후 약 10년동안 중동에는 정규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당시 아랍권의 리더는 낫세르였다.
낫세르는 외교적 능력이 매우 뛰어난 사람인것 같다.
또한 대중적 인지도와 지지도역시 높았으니 지도자로서는 매우 훌륭
한 조건을 갖추었다고 볼수있다.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이집트 중심적이었다.
이것은 결국 아랍의 단결을 저해하게 되었다.
1965년 상황에서 이집트는 동구지역에서 지원을 받아 친소적 성향을
띠어가고 있었다.
한편 이스라엘은 라본 사건과 같은 문제와 62년을 기점으로 하는 신구
세대의 대립이 문제시 되고 있었다.
이당시 수상은 에쉬콜로서 그는 세계유태주의자로 유럽 일변도가 아닌
대미,대소, 아랍권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애쓰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정치적 경제적 어려움은 정치권에 새로운 상황을 요구하게 했
고 그것은 아랍과의 긴장상태였다.
불만과 분열을 억제시킬만한 요소가 필요했던 것이었다.
한편 낫세르 역시 이스라엘의 혼란을 호기로 삼았으니 양자는 똑같은
것을 추구하고 있었다.


한편 소련은 시리아를 중심으로 야심적이고 정열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이에 경쟁적인 입장인 미국은 사우디 아라비아를 중심
으로 이스라엘등과 깊은 이해관계를 맺고 있었다.

67년 4월 갈릴리호 부근 이스라엘 농부에 대한 시리아 포격과 함께
대규모의 공중전이 일어났다.
이 공중전에서 시리아는 MIG - 21 6대가 격추되었고 이 사건은 소련
으로서는 엄청난 충격과 우려를 주었다.
시리아는 중동에서 유일한 공산당 정권이었고 아직 정권이 불안한 상
태에서 이런 충격적 패배는 시리아의 바트당이 몰락으로 까지 갈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주었던 것이다.
귀하고 귀한 시리아의 상처를 준 이스라엘에 대해 차마 직접 손대지
는 못하고 결국 아랍권의 리더가 있는 이집트를 이용하게 된것이다.

6일전쟁은 이러한 배경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한편 낫세르는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아랍권에서의 위치를 봐서 차마
발을 뺄수없는 상태였고 그리고 본인이 원하는 목적에도 부합되었기에
이를 지원했던 것이다.
결국 우탄트 유엔 휴전 감시위원회 총장에게 철수를 요구했고 무능한
이 총장은 단독으로 철수를 결정했으며 우유부단하게 쳐다보다가 이스
라엘은 UN에 또 따귀를 맞은격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5월 이집트군의 가자지구 및 샤름 엘 셰이크를 재점령하니
상황은 악화되었고 이스라엘의 수상 에쉬콜은 밤잠을 설칠정도로 스
트레스를 안밖으로 받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상황은 이스라엘 내부에 강경파인 다얀이 국방상으로
임명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6월 4일 내각은 전쟁은 필수불가결하다고 판단했다.

당시 양군의 전력을 살펴보자
이집트군은 총 21만을 보유했고
구체적인 장비는
전차 (JS - 3 , T - 55 , MK - 3 , SU - 100) - 1300대
장갑차 (BTR - 152 , BTR - 40) - 1100대
2500야드 대전차 미사일 슈멜
전투기 (수코이 - 7(50) , MIG - 21(40) , MIG - 15 , 17(100) TU - 16
IL - 28(70))대를 보유.
SAM 2 지대공 미사일

시리아, 이락, 요르단은 이집트에 비해 장비, 군사력으로 매우 뒤
떨어져 있었다.

이스라엘군은 71000여명의 정규군을 포함 총 275000여명을 보유하고
있었다.
전차 (M - 48 , M - 4 , 센츄리온 , 자주포 , AMX - 13) 1050대
SS - 10, SS - 11 대전차 미사일
전투기 (미라지 3 CJ(92) , 슈퍼 - 미스테르 (24) , 미스테르(50)
, 우라간(40) , 바뚜르 2 - A(24) , 푸가 매지스터(연습기 60)
기술적, 효율성, 창의성의 압도적으로 높은 이스라엘군에게 유리한 점
은 아랍군의 레이다 장비, 통신 장비였다.
너무 구형이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또한 그들은 여전히 선형의 고정 방어개념에 입각한 부대를 배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아랍의 고질적인 수세적 공격개념으로 매우 유감스러운 모습이
아닐수없다. 역시 우리나라도 수세적 공격개념을 가지고 있는 상태지
만서두...
불리하면 휴전을 유리하면 적 분쇄를 하겠다는 소극적이고 무능한
개념을 의미한다. (당시 중동에서 본다면..)

이스라엘은 3대 기본원칙을 가졌는데
1. 항공 우세
2. 기갑부대는 요새화 지역 돌파에 집중
3. 돌파후 융통성 있는 작전과 속도와 모든 이점을 활용한다.

각 군은 인간 불도자라는 개념을 깊이 익히고 있었고 이러함은 각
전투 특히 요새전투에서 보여준 이스라엘군의 근접 전투 양식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위의 원칙하에 기만 작전에 이스라엘은 들아가기 시작했다.
작전 스타일은 기습 선공!! 이었다.

1967년 6월 5일 4대씩 편대를 이룬 공격기가 발진하고
3시간 후에 이집트군 공군력은 소멸되었다. 공중전에서
격추된 이집트공군은 총 59대였다.
기적으로까지 불리는 이 공군 기습전은 완벽한 레이더
방어망을 뚫고 이루어진 것이었다.
당시 이집트는 총 23개 기지를 가지고 있었고 요르단에
있는 마르코니 247레이더 기지는 매우 위협적이었다.
더구나 지중해에 소련 해군 레이다와 미 6함대와 키프러스
산정의 영국 레이더까지 중동에서 레이더망이 조밀조밀
배치되어 있었다.
결과적으로 매우 놀라운 비행 능력과 전술에 대한 특별한
창의력, 과학적 허점을 찾아낸 논리적 사고관이 이끌어낸
승리였다.
하루가 지나가는 시점에서 아랍의 총 26개의 비행장은
격파되었고 아랍은 전 공군력을 잃었다.
이스라엘 공군은
. 11개의 강력한 비행장(MIG - 21 , TU - 16 비행단 소유)
을 우선 공격했고,
. 공격기는 동시에 각자에 목표에 도달했고,
. 완벽히 파괴될때까지 폭격되었으며,
. 07시 45분 (카이로시간 08시 45분)으로 통상 레이더 기지
요원이 근무가 해이해짐과 동시에 각 요인들의 출근 시간
을 이용,
. 공군기는 해상 150피트 저고도에서 지중해로 우회 동시
공격했다.

목적은 달성되었고 단 1건의 사고 역시 없었다.
해면위의 저고도 비행은 하늘과 바다의 방향감각을 잃게
하여 불의의 사고를 유발함과 동시에 높은 연료소모의 위
험성까지 수반한다.
또한 공격의 반복은 출격과 재출격까지 총 1시간을 소요
시간으로 계산 공군기 290대로 하루 7회에서 10회 연속
출격 공격하여 아랍에서는 이스라엘이 영, 미국의 전폭기
600대 이상의 추가 지원을 받아 공격한것으로 오인할
정도였다.
사실상 6일 전쟁에 핵심적인 교훈은 공군 운용이라고 여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이스라엘이 이후 전쟁에서 어떻게
했을것인지는 상상만으로도 족할 것이기때문이다.
총 7시간이 지나갔을때 전 아랍의 공군력은 제거되었고
이러한 작전을 추진하고 성공시킨 이스라엘의 영웅은
호드 장군이었다.
전쟁이 종결될때까지 이스라엘 공군은 총 19대를 잃었다.
제공권 장악하에 육군 지원은 완벽 그자체의 공격작전을
만들어 주었으며 이것이 바로 평균 연령 23세의 공군조종사
들의 실력이고 그들의 능력이었던 것이다.(물론 정비사를 포
함해서...)

시나이 전역은 특별히 달라진 사항은 없었다.
다만 샤자리 부대와 제 6사단과 같은 높은 공격 및 방어 능력
을 자랑하는 부대가 쿤틸라 일대에 배치 된 것이 다른점이었고
주요 장갑기계화 부대가 남부 축선상에 치우쳐 있었다.
이것은 과거 남부축선상의 공격과 이스라엘의 기만작전에
의한 것이었다.
시나이 전역은 간단히 이스라엘 군의 3단계 작전으로
종결되었다.
제 1단계는 제 1방어선의 돌파 단계로 남부의 독립여단이 쿤틸라
에서 주변의 이집트 군을 견제하는 동안 탈 사단과 샤론 사단은
라파와 아부 아게일라를 향해 돌입하고 요폐 사단의 제 1여단은
이 양사단 사아의 모래 언덕을 통해 빌 라판 부근의 도로를 봉쇄
제 2방어선에서 제 1방어선 지역에 대한 증원을 차단함은 물론
제 1방어지역 부대 상호간의 지원 및 협조를 단절시키는 것이었다.

제 2단계는 추격 및 포위 작전으로 제 2방어선 돌파가 선행되어야
하며 이 임무는 요폐와 탈 사단이 수행하는 것이었다.
즉 탈 사단이 라파를 점령하여 엘 아리쉬로 휘몰아 간후에는
그 주력을 남으로 전환하며 빌 라판 배후에 도달한 샤론의 제
1여단과 협격 빌라판을 점령 신속히 전진 제벨 리브니로 직행하여
온 요폐 제 2부대와 함께 제벨 리브니를 공격한다는 것이다.
탈 사단의 돌파와 전진을 지원하기 위해 가뷔시는 공격 첫날
야간에 1개 공수여단을 엘 아리쉬로 투하 이집트군의 증원과
퇴로를 차단하기로 하였다.
이와 동시에 샤론 사단은 아부 아게일라를 탈환하고 쿠세이마
방어망을 격파하여 이렇게 하여 라파 - 엘 아리쉬 - 쿠세이마
삼각지대와 제벨 리브니 일대까지를 점령 완료하게 되면 모든
부대는 이집트군을 강타 추격하는 작전이었다.
그뒤 탈 사단과 요폐 사단은 수에즈 운하 지대로 신속히 돌진하여
제 2방어선을 완전히 분쇄하고 제 4기갑사단을 격퇴하며 또한 요페
사단은 기디 통로와 미틀라 통로를 점령하고 탈 사단은 그 북부와
중부 축선을 확보하여 이집트군의 퇴로를 차단하면 이로써 제 2단
계 작전은 완료되는 것이다.

2단계 작전까지 이집트 군에게 휴식 및 재편성의 기회를 주어선
안되는 것이므로 결정적으로 이러함은 이스라엘 군의 재보급
재편성 및 휴식의 시간을 없애는 것이었다.
따라서 총 72시간 동안 지속될수 있는 보급 장비를 기본 휴대하게
되었다.

제 3단계는 잔적 소탕 및 종결 작전으로 남부 이집트 군을 격파하
고 수에즈 운하로 진격한며 모든 시나이 반도를 점령하는 단계였고
마무리 작전은 샤름 엘 셰이크 점령이었다.
물론 작전에서 견제 대상으로된 샤자리 , 제 6사단의 막강한 전력
은 역으로는 매우 치명적인 우려를 낳을수도 있는 것이었다.
단독 독립여단으로 이들을 견제하다가 역으로 공격당하게 되면
쿤틸라에서 네게브로 관통될수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1개 사단과 에일라트에 2개 대대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아뭏든 작전은 실행되었고 용맹스런 지휘관과 나를 따르라는 불굴
의 전투의지의 이스라엘 상하군은 작전에 돌입했으며 원하는 목
적을 달성했다.
시나이 전역의 주역인 이스라엘군은 아마도 군의 지휘자라면 누구나
열망하는 그런 군대의 모습이었다.
그만큼 그들은 감동적이었고 정열적이었다.

첨가할 만한 이집트 전력이 있다면 이집트 전차의 사격거리인데
그들은 사거리 3천미터 정도면 이스라엘 전차를 명중시키지 못
했다. 반면 이스라엘은 이점을 즉시 인식 접전시 최대한 거리를 두고
공격했다.
결과는 일방적인 이집트 전차부대의 전멸이었다.
이런 상태의 부대가 바로 이집트를 포함한 아랍군의 모습이다.




요르단 전역
이지역에서 일어난 전투를 이해하기 위해선 지형을 이해해야 할것
같다.
통상 웨스트 뱅크라 불리우는 이지역은 B자의 뒤집은 모양이다.
그 3면은 이스라엘에 둘러싸여 있고 요르단강과 사해로 요르단 동
부지역과 분단되어 있다.
웨스트 뱅크의 B자 모양에서 처럼 가운데 부분이 깊숙히 들어와
있는 부분을 예루살렘 회랑이라 부르며 웨스트 뱅크는 요르단 왕국
전체 GNP의 약 절반이상을 생산하는 인구 밀집지역이었다.

웨스트 뱅크는 이스라엘 보다 상대적으로 지대가 높아 이스라엘
의 심장부를 보다 용이하게 잘 관측할수 있었고 장거리포를 이용
텔아비브까지 포격할수 있었다.
그러나 웨스트 뱅크는 이스라엘의 공격을 받는다면 단시간에 남북
으로 나뉘어질수 있음은 물론 요르단 본토와도 분리시킬수 있는
단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웨스트 뱅크 중앙은 SCOPUS산을 중심으로 예루살렘 방어군과
남쪽은 헤블론을 중심으로 방어군 그리고남쪽에 비해 약 3배정도 크기
의 북쪽에는 전전선에 걸쳐 부대가 포진되어 있었다.
요르단군의 작전 계획은 전 방어에 남부지역 헤브론의 부대가
샤자르 부대가 있는 쿤틸라 일대로의 돌격으로 바로 이집트군과
접속한다는 것이었다.
어려움은 있지만 아뭏든 중요작전은 이런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요르단과는 반대로 심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가장 우호
적인 요르단과의 전투를 원하지 않았다. 특히 후세인 왕가와는 역사
적으로도 특별한 관계였기에 1948년 전쟁에서도 요르단은 전력을
다하지 않았고 1956년의 전쟁에서는 아예 손을 맞잡고 수수방관했
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시나이에 거의 전주력을 쏟아 부을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요르단 군 지휘권이 이집트에 의해 장악되었던 점에 대해
너무 가볍게 보았다.
그 만큼 요르단을 믿고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당시 이스라엘의 요르단 국경선 지역 방어부대는 훗세인을 필요
없이 자극하지 말것이며 만약 요르단 군이 먼저 발포한다 하더라도
격심하지 않으며 침묵을 지킬것을 명령했다.
즉 선제공격 및 반격이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요르단이 개입한다면 최대한 시리아를 견제하고
최단기에 집중적으로 지형적 종교적 유리한 지역인 웨스트 뱅크
전체를 차지할 것을 계획했다.
요르단 지역에 이스라엘은 북중부 사령부 예하와 예비군이 투입
될수 있어 전차 350대를 보유한 부대가 투입될수 있는 여력을 가지고
있었다.

요르단 작전은 3단계로 볼수있다.

제 1단계 작전은 완강하게 구축된 요르단군의 제 1방어선을 돌파하여 진격의
관문을 여는 돌파작전이다.
북부사령부는 제닌을 점령 남부 사령부는 라트룬 돌출부 점령, 텔 엘 풀 요
르단 국경요새지대 돌파 , 스코푸스 산에 회랑을 건설 웨스트 뱅크의 대동맥
차단및 교두보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제 2단계는 북부에서 제닌을 비롯한 모든 전선에서 요르단군을 압박 북부
중심지 나불루스로 전진하며 남부는 예루살렘과 라말라 일대를 점령하는
것이다.

제 3단계는 완벽하게 웨스트 뱅크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이작전에서 우선적으로 제공권 장악, 수준높은 부대와 신속한 동원, 맹렬
한 공격력이 이스라엘군이 보유하고 있다는 가정하에 추진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스라엘군의 웨스트 뱅크를 점령하는데는 약 50시간이 소요되었으며 물론
요르단은 시나이 반도 사태에 대해 매우 불안하게 판단하고 있었으나 정확
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를 못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없지만 만약 전쟁에 참여치 않거나 결정적인 순간에
요르단이 참전을 안한다면 혹시나 받을 수있는 아랍국의 적대적 의식을
생각지 않을수 없었기에 요르단은 공격을 결심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결국 전면공격을 실시함과 동시에 이와 같은 패배를 당하게 되었다.
정말 .... 한번의 선택이 돌이킬수없는 사태를 초래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집트 군과는 달리 요르단군은 강력했으며 최선을 다해 방어했고
이로 인해 이스라엘군은 다대한 타격을 입었다.
전면 공격이라고는 하나 요르단은 수세적 공격 다소 체면적인 문제를 염두
한 공격행위였다...
따라서 방어에 상당히 치중했다.

시나이 반도에서 275명이 전사했던 이스라엘은 요르단에서 299명과
두배많은 부상자를 내었던 것이었다.
요르단은 약 1500여명이 전사한것으로 보인다고 이스라엘측은 주장했고
웨스트 뱅크에 배치된 부대의 1/3에 타격을 입혔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이유는 요르단군과 동수의 부대가 웨스트 뱅크에 투입되었기
때문이라고도 볼수있다.
그러나 과연 동수의 병력이 문제였던 것일까?
나는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우선적으로 적이 요새화 되어있는 지역을 방어거점으로 잡았다는 것과
그리고 요르단군 영국식 훈련을 받았다는 점이었다.
거점 방어식의 소련식과는 다르다고 하는데 솔직히 이점은 참고사항일
뿐 정확히는 모르겠다.
내가 보기에는 적의 공격에 얼마나 침착하게 대응하느냐가 관건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영국식 방법은 이스라엘의 우회공격에 대단히 강력한 저지력을
가진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남은 지역은 시리아 지역
그러나 시리아는 쉽지 않은 국가였다.
그 이유는 그 뒤에 존재한 소련때문이었다.
또한 골란 고원역시 문제였다.

골란 고원은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괴롭힌 곳이었고 아울러 이스라엘의
시리아에 대한 증오의 근원이기도 했다.
이런 시리아를 공격하는데 증오와 그뒤의 배후와의 갈등에서 역시 명분
은 선제공격을 허용하는 것 밖에 없을 것이다.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공격은 이집트를 선두로 해서 이루어졌고
요르단과 시리아는 후공격개념이었다.
더구나 시리아는 그중에서도 최후의 공격대상이었는데 그만큼 견제공격
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시리아가 전쟁이 시작한 이후 가장 늦게
이스라엘군의 공격을 받게 되고 그리고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국가이기도
하다...
그 중요한 위치를 빼았겼으니...
시리아와의 전쟁은 6월 9일날 시작되었다.
6월 5일 5시간의 간격으로 이집트와 요르단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던 것에
비하면 6월 9일은 전 작전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시작되었던 것으로 봐
도 될것 같다.
6일과 7일 양일간 대규모 항공 폭격을 우선 실행했는데 이것은 돌파에
앞선 준비와 적을 직접적으로 견제, 제공권 상실에 대한 공포심을
시리아군에게 심어주고 자 하는 의도에서 실행되었다.
8일 요르단과 시나이에 투입된 4개 여단이 시리아에 투입되었고
엘라자르 북부사령관은 대기하던 알버트 기갑여단을 선두로 자우라와
칼라일대를 점령 소위 석유로상에 발판을 굳히고 쿠네이트라로 공격
할수있도록 함과 동시에 역시 대기중인 골라니 보병여단을 기갑여단
좌측에서 텔 아자지아트와 텔 파하르 요새를 점령하여 쿠네이트라로
공격한 기갑여단의 측면과 배후를 보호토록 했다.
이작전만 성공하게 되면 지원 부대를 투입 골란 고원 전체를 석권하겠
다는 작전이었다.


항공기의 지원하에 공격된 기갑여단의 공격은 엄폐, 은폐물이 없는 경사
지를 전진했고 공병이 지뢰를 제거하며 강력히 저항하는 시리아군의
요새로 신중히 전진했다.
결국 첫 진지인 나무쉬를 확보함과 동시에 시리아군의 도주가 시작되
었다.
골라니 여단은 이보다 더 혈전을 치르고 있었는데 텔 파하르에 대한 공
격이 대표적이었다.
이 요새는 주변 100미터의 지뢰지대와 철조망을 감싸고 있고 어떤
폭격에도 견딜수있도록 축성되어 있었다.
7시간의 처절한 혈투끝에 투입된 대대의 살아남은 최고 지휘자는
하사관이었고 그에 인솔된 부대원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이 요새를 점령했던 것이다.
이것은 전 장교가 전사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총 34명의 전사자와
78명의 부상자를 낸 이전투가 여단장이 작전에 실패한것으로 볼만큼
매우 처절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 역사상 대대단위급 부대에서 최고의 손실로남는 전투로
스스로 선두에 서서 돌격하는 지휘관 없이는 이루어질수없는 전투이
기도 하다.
이 전투로 보아서 이스라엘군의 지휘권이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그 어떤 수정없이 살아남은 최고 선입자에게로 이양됨을 알수있다.
감탄과 경의를 표하지 않을수 없는 전투가 아닐수없다.
이러한 초전의 혈전끝에 시리아 전역은 마무리 지어졌고 이스라엘은
승리했다.
이로써 6일전쟁이 종결된다.
아래는 양측이 입었던 인원 및 주요 장비 손실이다.



이스라엘 아랍
전사 689 19,600
인 명 부상 2,563 30,760
포로 16 6,584
계 3,268 56,944

항공기 26 451
주요장비 전차 86 990
함 정 0 3


--------------------- [원본 메세지] ---------------------
중동전쟁을 알구 싶어요
아시는분은 리플기다릴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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