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사]]진주만공격 - 상세편

작성자율리우스 카이사르|작성시간01.06.17|조회수505 목록 댓글 0
진주만공격 - 상세편 1941년 12월 미국과 일본간의 전면 전쟁이 발발되기전 미군과 일본군은 항공전력확장에 몰두해 왔으며 일본항공부대는 1930년대 초반부터 중국과 만주일대에서 벌어진 중국, 일본, 소련간의 분쟁 중 치열한 공중전을 통해 항공전력을 강화하고 전투력을 향상시키는 좋은 계기로 삼아왔다. 일본군이 태평양전쟁 초기에 일시적으로 미군을 압도하고 전승을 구가할 수 있었던 것은 이와같은 오랜세월에 걸친 항공전력의 축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으로의 접근 세계정복의 유혹은 압도적인 것이었다. 1941년 8월 일본의 정치적인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일단의 군국주의자들은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의 지도를 펴놓고 대동아공영권의 야심을 펼치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앞에 놓여진 장래의 피의 대가에 대해서는 믿지 않으려 했다. 유럽에 있어서의 독일의 정복은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식민지제국을 표류하게 했으며 이들이 공격을 받아도 본국으로부터 지원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영국은 말레이제국과 함께 싸우고 있었으나 일본이 군사적으로 말레이제국을 침범해도 이를 방해할 힘이 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중국본토에 있어서의 일본의 오랜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져있었다. 소련육군과 공군의 전력은 1939년에 몽고전투에서 과시됐으며 일본군의 최고사령부는 소련은 일본이 다루기에는 너무 강하고 큰 상대임을 간판하고 있었다. 1941년 겨울, 소련육군이 모스크바를 향해 후퇴하고 있을 때에 동쪽과 남쪽에는 공격하기 쉬운 표적이 있었다. 중국에서의 전쟁은 일본육군의 전쟁이었다. 만약 일본의 지휘부가 서부태평양의 광대한 지역에서 전쟁을 하기로 찬성한다면 그것은 일본해군의 최고의 시간이 될 것이며 해군항공력은 대단히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나 태평양 건너편에는 아직도 중립을 지키고 있는 미군이 있었는데 그의 육군은 작았지만 해군은 세계에서 규모가 가장 컸다. 미국의 산업은 세계에서 가장 큰 육군을 만들어낼 힘이 있었으며 1941년의 일본함대를 하잘 것 없는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군함과 항공기의 생산능력을 갖고 있었다. 30년이상 동안 일본제국 해군은 계획의 근거를 미국과의 비교에 두고 있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걸쳐 일본은 그의 라이벌에 대항해 서부태평양지역에서의 방어를 위주로 훈련해왔다. 1940년 중 미국과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어갔다. 1940년 7월 미국은 야심적인 새해군의 건설계획을 발표했다. 그해 9월에 일본이 프랑스령 인도지나의 북쪽을 점령함에 따라 미국은 중요한 석유공급을 포함하는 통상금지조치를 가했다. 그러나 일본 수뇌부에 있어 미래 해군세력의 계산은 간단한 것이었으며 태평양지역에서 기회의 문을 닫혀지고 있었다. 1937년에 시작된 전투함 건조계획이 1941년 거의 끝나감에 따라 그해말까지 일본해군의 미국에 대한 함정비율은 7대 10이 되게 돼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함정건조계획이 진행됨에 따라 이 비율은 1943년 5대 10 그리고 1944년에 3대 10으로 벌어지게 돼 있었다. 만약 일본이 행동을 취할려면 지금 해야할 때였다. 일본의 야욕은 방비가 거의 없는 동남아의 유럽식민지를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했다. 서부태평양지역에서의 방해를 제거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공격을 가해 미국을 패퇴시켜야만 했다. 서부태평양의 미해군세력은 1912년에 하와이에 최초로 개항된 진주만에 배치되고 있었다. 1940년 5월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태평양함대가 미본토 서해안항구에 위치하는 대신 영구적으로 진주만에 배치되도록 지시했다. 미태평양함대의 하와이배치를 도화선으로 1939년 8월 일본의 연합함대사령관으로 임명된 야마모토 제독은 미국태평양함대의 하와이 배치를 '우리의 목에 들이댄 칼끝'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야마모토는 하와이에 전진배치된 미함대로부터의 위협이 대응할 수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리하여 진주만은 일본군공격의 이상적인 목표가 되었다. 그러나 어떻게 효과적으로 대처할 것인가? 전통적인 해군의 사고방식으로는 외해에서의 본격적인 해전을 요구하고 있었다. 해군항공전력은 정찰이나 교란등에 유용하게 사용될 것이나 마지막 결정은 전함의 거포에 의해 결판날 것이다. 미해군은 이러한 생각에 끌려든 것이다. 초기의 계획은 장거리비행정이 마샬군도의 기지로부터 출발해 5500마일을 비행후 진주만을 공격하며 이렇게 함으로써 미함대를 바다로 끌어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야마모토는 이런 유틀란드 해전(유틀란드 해전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영국함대와 독일해군이 유틀란드 헤에서 치른 해전이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함대를 보유하고 있는 영국의 함대를 그동안 유럽의 열강의 눈을 피해 새로건설된 독일함대가 승리하여 영국의 발목을 묶은 해전이었다.)과 같은 스타일의 전투를 태평양에서 재현시킬 생각이 없었다. 1940년 봄에 실시된 함대훈련에서는 전함에 대해 어뢰를 탑재한 뇌격기의 공격효과를 시범했었다. 미국을 전쟁으로 끌어낼 뿐만아니라 항공기에 의한 강력한 공격으로 태평양함대를 제거시킬 방법이 있었다. 1941년 1월 야마모토는 믿을 만한 장교들로서 비밀기획그룹을 편성했다. 해군항공의 전문가인 오니시제독은 하와이에 대한 공중공격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그는 영국무관을 지낸 겐다 미노루 소령의 보좌를 받고 있었는데 겐다소령은 1940년 1월 이탈리아의 타란토에 대기중인 이탈리아함대에 대해 영국의 해군항공기가 어뢰로 공격해 큰 성공을 거둔 상황을 보고했다. 겐다 소령의 의견은 미군기지에 대한 반복적인 공격은 가능하지만 위험요소가 크다는 것이었다. 모든 항공모함에서 출격하는 최소한 400대 이상의 항공기가 필요했다. 공격에 참가하는 조종사는 일차목표인 전함의 갑판위에 철갑폭판을 정확히 명중시킬 수 있을 정도로 고도로 훈련되야만 했다. 어뢰공격을 가하는 뇌격기조종사도 적함의 홀수선에 저공저속의 수평공격을 정확히 가하도록 고도의 기량이 요구되었다. 1941년 4월 야마모토는 비공식적인 에버작전계획을 세부검토를 위해 연합함대 참모들에게 시달했다. 4개월 후에 일본의 해군대학은 이 계획으로 전쟁연습을 실시했다. 이 첫 번째 전쟁연습을 통해 공격은 미전함 2척 격침, 항공모함 2척 격침 그리고 항공모함 1척을 대파시키는 성공을 거둔 것으로 나타났다. 두 번째 전쟁연습은 첫 번째 연습보다 결과가 나빠서 공격함대는 2척의 항공모함을 상실하고 127대의 항공기를 잃었다. 이 작전계획이 위험부담이 크다는 것은 이미 선임해군장교들에게는 분명해졌으며 기동함대사령관으로 임명될 나구모 쥬이치 제독도 이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야마모토는 직위해임을 내세우며 나구모를 설득시켜 이를 받아들이게 했다. 10월 초까지 이 계획은 승인되었으며 일본해군의 6척의 항공모함은 이 계획을 위해 배치되었다. 나구모는 이 획기적인 작전을 위해 그의 함대를 세부적으로 준비해 나갔다. 작전을 철저히 세분화시켜 계획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정보기관은 진주만을 비롯한 오아후 섬과 여러 비행장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호놀룰루 동쪽 5마일에 있는 광활한 천연항만의 한 복판에는 포드섬이 위치하고 있고 이곳에는 드라이 독크와 유류저장탱크 그리고 7개의 미육군항공대기지가 있었다. 이들은 북쪽에 할레이와기지, 동쪽에 버로기지 중앙에 휠러기지 그옆에는 힉캄기지 등이 위치하고 있었다. 항만의 입구 바로 서쪽에는 이와해병항공기지가 위치하고 있었다. 섬의 동쪽에는 카나오헤 해군항공기지가 있었고 이곳에 PBY 카나리아 초계비행정이 배치돼 있었다. 오아후 섬과 해군기지의 큰 모형도가 만들어 졌으며 조종사들은 극비리에 이곳을 눈에 익혔다. 일본가고시마만의 천해가 실제훈련장으로 선정됐는데 이 지역이 진주만의 지형조건과 유사했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점은 어뢰공격의 정확성이었다. 해군최고조종사들에 의해 6개월간의 훈련이 수행됐지만 결과는 아직도 실망적이었다. 어뢰는 너무 높거나 낮은 고도에서 투하되거나 물에 떨어진 후 항주하는데 실패했다. 겐다 소령에게는 저고도어뢰공격은 포기해야만 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야마모토는 작전이 어뢰공격없이는 추진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진주만공격 개시 암호명 작전 Z의 공격은 1941년 11월 17일로 계획됐다. 그달 11일까지 어뢰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뇌격기로부터 바다에 어뢰를 투하하기 위한 목제안정장치를 부착한 개량된 어뢰의 인도가 지연되었다. 일본과 미국의 협상은 예정일자가 지나도록 계속됐다. 야마모토는 공격개시일자를 12월 8일(일본시간)로 재지정했다. 이 날은 오아후 시간으로는 12월 7일 일요일이었다. 11월 22일까지 기동함대는 일본 북쪽 안개 덮인 쿠릴열도의 가장 큰 에도로푸 섬의 히도카프만에 집결했다. 11월 26일 나구모의 31척의 함대는 정박지를 출항해 동쪽으로 침로를 잡았다. 12월 2일 야마모토의 연합함대사령부는 진주만 공격작전을 계획대로 수행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목적지가 승조원에게 함내 방송을 통해 알려지자 전승조원은 환호했다. 1941년 12월 6일(하와이 시간) 나구모의 기동함대는 무선침묵과 안개의 은폐를 이용해 전속력으로 목적지로 항진했다. 최종해상급유가 실시되고 유조선은 일본으로 회항했다. 기동함대의 주력은 6척의 항공모함으로 편성됐는데 이들은 '아까기, 가가' 및 경항공모함 '소오류, 히류' 그리고 새로 건조된 '소오쿠, 즈이가쿠' 등이었다. 전함 '히에이'와 '기리시마' 그리고 순양함 '도네', '지쿠마' 및 '아부가마'는 경계진에 편성되어 있었다. 이 주력함대의 전방에는 이미 27척의 잠수함이 목적지로 향하고 있었다. 상선의 항로를 우회하고 미군 초계기의 감시를 피해 항해를 계속한 기동부대는 12월 7일 새벽에 목적지 북쪽 230마일의 해역에 도착했다. 일본함대에서 최초로 발진한 항공기는 순양함에 탑재된 정찰용 수상기였다. 항공모함의 비행갑판과 격납갑판에서는 정비사가 항공기를 점검하고 있었고 무장사들은 폭탄, 어뢰, 기관총탄 등을 탑재하기에 바빴다. 바다는 비교적 잔잔하고 엷은 안개가 끼어있어 기동함대를 은폐시키고 공격기를 발진시키는데는 이상적인 조건이었다. 기함 아카기 함상의 나구모사령관은 표적에 관한 최신의 정보를 수령했다. 8척의 주요함정은 전함정박지역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항공모함은 없었다. '렉싱턴', '호넷', '요크타운' 및 '사라토가'는 어디갔을까? 사실은 '요크타운'은 대서양에 있었고 '사라토가'는 샌디에고에서 수리중이었다. '렉싱턴'과 '엔터프라이즈'는 미드웨이와 웨이크 섬의 해병주둔부대에서 공급할 항공기를 수송중이었다. 오전 6시 30분에 항공기 첫편대가 일본 항공모함으로부터 발진하기 시작했으며 30분동안 183대가 출격했다. 이 중에는 1800파운드의 철갑폭탄을 장비한 수평폭격기 B5N '케이트' 49대가 포함돼 있는데, 이것은 두꺼운 장갑갑판을 가진 전함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비행장을 폭격하기 위해 250킬로그램의 폭탄을 탑재한 아이치 D3A1 급강하폭격기 55대 그리고 폭격기를 엄호하고 지상에 대한 기총사격을 가할 A6M '제로전투기' 43대의 항공기가 포함돼 있었다. 이와같은 다수의 호위전투기를 배치한 것은 중국에서의 경험에 의한 것이었는데 일본폭격기는 현대식 전투기의 공격에 아주 취약한 것이 입증됐기 때문이다. 공격편대군은 항공모함 상공에 집결해 편대를 짜고 남쪽으로 향했다. 비행고도는 엷은 구름이 깔린 바로 위인 6750피트 였으며 목표지역까지의 소요비행시간은 1시간 50분이었다. 제1파의 편대장인 후지다 미쓰이 중령은 호놀룰루시에 있는 KGMB방송국의 일요일 아침 경음악방송에 다이얼을 맞추었다. 그는 시정이 좋을 것이라는 기상예보를 듣고 힘이 솟았다. 진주만의 해군기지는 일요일 아침의 안개 속에 잠겨있었다. 함정승조원들은 제3경계태세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전투함정의 대공포 중 4분의 1은 요원을 배치하고 있었다. 진주만의 언덕 위에 있는 미육군의 레이다 조작사는 접근해오는 항공기군을 접촉하고 보고하였으나 이 항공기는 그날 아침 캘리포니아로부터 도착하게 돼 있는 B-17 편대로 오인되었다. 오전 7시 55분 태평양기뢰함대소속의 기뢰부설함에 승함해 진주만 입구에 있던 기뢰함대사령관은 항공기가 폭탄을 투하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항공기의 일본국기인 붉은 히노마루가 그려진 것을 볼때까지는 이것이 사고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폭탄이 떨어짐과 거의 동시에 태평양지역사령부에 경보가 울렸다. 수분 후에 놀란 태평양함대 사령관 허스밴드 킴멜 제독은 일본군의 공격보고를 받았다. 포드섬에서는 그의 부장인 벨링거 소장이 '진주만 공습중, 이것은 연습이 아님.'이라는 방송을 하고 있었다. 많은 함정승조원들은 일요일 외출로 육상에 나가 있었다. 진주만에 정박중인 94척의 함정 중 '네바다'호는 두 개의 보일러에 스팀을 올리고 있었다. 엷은 흰증기가 연돌에서 하늘로 길게 올라갔다. 오전 7시 55분 성조기를 게양하기 위해 국기게양 요원이 도열하고 있었다. 하늘을 쳐다본 어떤 수병들은 북쪽하늘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점을 발견했다. 많은 항공기편대들이 진주만 뒤 사탕수수밭 언덕을 넘어 저공으로 비행해왔다. 첫 번째 공격은 오아후의 비행장들을 강타했다. 힉캄과 휠러비행장에 폭탄이 떨어져 밀집시켜 놓은 육군항공대의 항공기를 파괴시켰다. 7시 57분 어뢰공격기의 제1파가 전함 정박구역의 함정을 공격하기 위해 해상을 초저공으로 누비며 쇄도했다. 일본의 제로전투기들은 미군전투기들이 공격기들을 요격하기 위해 출격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자 지상표적에 대한 기총사격을 임의대로 실시했다. 오전 8시 5분 특수철갑폭탄을 탑재한 수평폭격기들의 폭탄이 전함에 명중하기 시작했다. 공격은 약 6분간 계속됐으며 진주만 해군기지는 폭발과 하늘로 치솟는 기름연기 구름으로 쌓였다. 전함 정박지에 있던 함정들은 참화를 입었다. 전함 '애리조나'는 침몰했으며 '테네시'와 '메릴랜드'는 불길에 쌓였다. '오클라호마'는 12발의 폭탄을 맞아 대파됐으며 '버지니아'는 9발, '캘리포니아'는 3발의 직격탄을 맞았다. 항진을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전함인 '네바다'는 폭탄을 맞고 해안에 좌초했다. 노후된 '유타'는 전복되었으며 순양함 '헤레나'는 어뢰 5발을 맞았다. 수천명이 익사, 소사 또는 침몰하는 배와 함께 수장됐다. 제2파의 편대군은 오전 8시 54분에 시마사키 중령이 이끄는 167대의 공격부대에 의해 실시됐다. 제2파의 편대군은 공격기를 엄호할 35대의 제로전투기, 비행장을 공격할 54대의 수평폭격기 그리고 전투함정을 재공격할 72대의 급강하폭격기로 편성돼 있었다. 일방적인 일본의 승리 미군의 공중에서의 저항은 미미해서 제1차 공격부대의 편대장인 후지다 중령은 3시간 동안에 한 대의 미군기와도 만나지 않았다. 미군의 항공전력은 지상에서 대부분 파괴됐다. 미해병항공기지인 이와 비행장에 있는 49대의 F4F 와일드 캣과 SBD 다운트레스는 제로전투기에 의해 지상에서 파괴되었다. 해병대는 다운트레스기를 끌어다 놓고 후방석의 기총으로 공격하는 일본기에 필사적으로 사격을 가했다. 일본군의 공격이 한창인 때에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에서 날아온 SBD 다운트레스가 이와 비행장 상공에 도착해 공격을 목격했다. SBD 편대장 H.L. 양 중령은 전투기의 공격과 대공포사격을 피해 포드비행장에 무사히 착륙했다. 북쪽에 떨어져 있어 공격을 받지 않은 작은 육군항공대 비행장인 할레이와에서 P-40 전투기 4대로 구성된 2개 편대와 P-36 1개 편대가 8시 15분부터 오전 10시 사이에 출격해 적기 7대를 격추시켰다. 빌로기지는 9시 50분까지 힉캄기지에서는 11시 27분까지 한 대의 전투기도 출격하지 못했다. 오아후섬에 있는 231대의 육군항공대의 항공기중 97대가 파괴되고 88대가 심하게 파손됐다. 그날 늦은 아침에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로부터 날아온 수대의 F4F 와일드 캣은 지상포화에 의해 격추됐으며 4대의 SBD 기도 마찬가지 였다. 그날 오후에 와일드 캣과 SBD 기들은 일본함대를 찾아 나섰다. 일본은 그들의 큰 승리와 작은 피해에 기뻐날뛰었다. 그들의 공격의 정확성은 많은 훈련을 통해 예상했던 바와 일치했다. 항공기에서 투하된 어뢰의 반이상이 명중했으며 급강하폭격기에서 투하된 폭탄의 50퍼센트와 수평폭격기의 폭탄 25퍼센트가 목표에 명중했다. 나구모의 공격기동함대는 전투기 9대, 급강하폭격기 15대 및 뇌격기 5대를 상실했으며 74대가 파손됐으나 항공모함으로 모두 귀환했다. 하와이로부터 40마일 가까이까지 접근했던 항공모함에 착함하던 일본군 항공기는 해상상태가 나빠져 15도까지 롤링하는 악기상 속에서 50대가 착함 중 부서졌다. 일본군의 조종사 및 승무원의 손실은 55명이었다. 미해군은 4척의 전함이 침몰되고 3척이 대파됐으며 1척이 반파되었다. 그리고 2척의 경순양함이 파손됐으며 구축함 3척이 대파됐다. 보조함은 3척이 침몰되거나 대파되었다. 해군과 해병대는 3077명이 사망(실종자 960명 포함, 대두분은 전복된 '애리조나' 함에 갇혀 익사)했으며 876명이 부상당했다. 육군 및 육군항공대에서 226명이 죽고 396명이 부상했다. 제1파 및 2파의 공격편대군이 거의 무사히 귀환하자 기함인 아카기 함상에서는 다음에는 무엇을 할것이냐의 불확실한 한때가 흘러갔다. 히류함상에 타고 있는 공격적인 야마구치제독은 제3차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구모사령관과 제1항공함대사령관인 구사카제독은 처음부터 2차공격까지만 계획하고 있었다. 오아후 섬에는 수리시설과 유류저장시설 등 아직도 손대지 않은 많은 주요 표적이 남아있었으며 방어력은 거의 궤멸된 상태에 있었다. 마침내 기함 아카기의 지휘소에서는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의 연합함대사령부에서는 진주만 공격성공의 보고를 듣고 환성이 터져나왔다. 누구나 야마모토가 미태평양함대를 완전히 섬멸하기 위해 그날밤이나 그 다음날에 새로운 공격을 나구모에게 명령할 것으로 기대했다. 항상 신중한 야마모토는 결정을 나구모에게 일임했는데 역시 신중한 나구모는 아마도 미해군의 5척의 항공모함이 하와이로 돌아올 것을 우려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일본의 정찰기와 정보기관은 한척의 항공모함의 위치도 탐지하지를 못했다. 기함 아카기의 마스트에 철수신호기가 게양된 것은 오후 1시 30분인데 이것은 폭탄을 탑재한 공격기가 아카기의 갑판을 발진한지 7시간만의 일이었다. 진주만에 대한 공격은 약 3시간동안 진행됐다. 항공전투의 측면에서 볼 때 진주만 공격작전은 새로운 무기와 기술을 구사해 놀라운 성고을 거둔 공대지전투의 걸작품이었다. 방어군 측의 항공전력은 5개월 전에 바바로사작전의 개전초기에 독일공군이 러시아에서 수행했던 것처럼 지상에서 궤멸됐다. 장거리항속능력을 갖추고 중무장한 일본군의 제로전투기는 앞에 있는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놀라운 비행기처럼 보였다. 그러나 전략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일본함대의 공격은 미해군의 태평양해역전력에게는 엄청난 타격이 되었으나 그것은 큰실책이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파렴치한 날'이라고 불렀듯이 일본의 공격은 사전경고나 선전포고없이 수행됨으로써 미국의 고립주의자들을 복수심에 불타게 만들었다. 일본군의 공격은 미국세력에 손상을 입혔으나 그것을 파괴하지는 못했다. 실제로 6척의 전함은 구조물이 파괴되어 정박지역에서 침몰했으나 앞으로의 전투에서 해군전력의 결정적인 역할을 맡게 될 항공모함은 손상되지 않은 채로 건재했다. 일본해군은 남방의 자원지역을 계속 정복해 나갔으며 작전 Z는 그 서곡에 불과했다. 미국의 해군항공세력은 서부 및 중부태평양에서 일본군의 진출을 방해할 능력이 있었고 한편 손상되지 않고 남은 진주만의 수리시설과 유류저장시설은 재건함대를 육성하고 지원하는데 기여했다. Tripod의 구병주님 홈페이지에서 퍼온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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