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사]][펌] 송산전투 명군을 향해 조총 5만3천발을 쏜 조선군

작성자타메를랑|작성시간21.02.11|조회수230 목록 댓글 0

http://gil092003.egloos.com/10009469

 

 

1641년 8월 송산전투에는 유림이 이끄는 조선군 약 2500명도 참전하였는데요.

전투가 벌어진 직후 조선에 보고된 보고서에 조선군의 전사자와 소비 군량, 소비 탄환이 기록되어 있네요.

 

조선왕조실록 1641년 9월 21일 기사中

명ㆍ청의 전투 상황과 아군의 피해 상황

대명(大明)의 군사가 청인과 싸워 전세가 불리하자 기병(騎兵)은 도주하여 송산보(松山堡)로 들어가고 보병은 배를 타고 도주하였는데, 영원(寧遠)과 행탑(杏塔) 등지에 죽은 자가 즐비하였다. 이 당시 조대수(祖大壽)가 금주에서 포위된 지 여러 달이 지남에 중국이 크게 군사를 조발하여 보내 구원하였는데, 군문(軍門) 홍승주(洪承疇)가 나이가 어리고 오만하여 여러 사람의 말을 듣지 않다가 결국 패배하였다. 대수가 청국의 진영에 사람을 보내, 포위된 지 9개월이 되었으니 빨리 교전하여 승부를 가리자고 말하였으나 한(汗)이 들어주지 않았다. 이 전투에서 아군은 전사한 자가 20여 인, 죽은 말이 열에 팔구이며, 소비한 군량이 3천 3백여 석, 화약은 9백 70여 근, 연환(鉛丸)은 5만 3천 2백여 개였다.

○甲午/大明兵, 與淸人戰不利, 騎兵走入松山堡, 步兵乘船而走, 寧遠、杏塔之間, 死者相屬。 時, 祖大壽在錦州, 被圍已累月, 天朝大發兵出援, 軍門洪承疇年少自用, 不聽群言, 以至於敗。 大壽送人于淸陣曰: "被圍已九朔矣。 願速交戰, 以決勝負。" 汗不聽。 是役也, 我軍死者二十餘人, 馬斃者十八九, 所費糧餉三千三百餘石, 火藥九百七十餘斤, 鉛丸五萬三千二百餘箇。

 

전사자 : 20 여명

말 피해상황 : 80~90% 손실

소비 군량 : 3300 여석

소비 탄환 : 53200 여개

 

송산전투 직후 조대수가 지키는 금주성 포위 상황도 보고가 되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641년 10월 8일 기사中

유림이 금주에서 돌아오자 그곳의 형세를 묻다

유림(柳琳)이 금주(錦州)에서 돌아왔다. 상이 불러 접견하고 묻기를,

“그곳의 형세는 어떠하던가?”

하니, 유림이 대답하기를,

“청인이 금성(錦城)을 포위하고 있는데 성은 장방형(長方形)으로 주위 둘레가 60리입니다. 

서북쪽에는 큰 산이 있고 산의 동서를 큰 냇물이 끼고 흘러 바다로 들어가며 남쪽에는 연대(烟臺)가 있는데 바로 몽고 지방이었습니다. 팔왕(八王)이 그 아래에 진을 치고 있는데 그곳은 청과 한(漢)이 반드시 차지하려고 다투는 요충지이기 때문에 천조의 원병이 그 산을 빼앗으려 하고 있으나 청인이 그 사실을 알고 성을 쌓고 수비하여 한인이 싸울 때마다 계속 불리하였습니다. 원병은 도합 12만 명인데 여덟 총병(摠兵)이 나누어 거느리고 연이어 나와 모두 송산(松山)을 근간으로 진을 쳤으며, 그 뒤에 남산성(南山城) 밖으로부터 대군(大軍)이 계속 당도하여 병세를 크게 확장하고서 참호를 파고 성을 쌓아 자리를 잡았습니다. 구왕(九王)은 한진(漢陣)의 동쪽에 진을 치고 곧장 한진을 공격하다가 전세가 불리하여 물러났는데 청인의 병마 중에 사상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그 뒤에 한(汗)이 대군을 거느리고 송산에 이르러 즉시 나아가 포위하였으며, 구왕이 운제(雲梯)를 만들어 성을 공격하려고 하자 한이 ‘지구전을 펴 식량이 바닥날 때를 기다리는 것만 못하다.’고 말했습니다. 나중에 많은 군인이 손상을 입은 것 때문에 나성(羅城)의 밖으로 군사를 이동하여 토성을 쌓았는데, 성벽이 높고 주위 둘레가 몇 리쯤 되었습니다.”

하였다.

 

즉 도르곤이 금주를 포위할 때 홍승주의 12만 대군이 원군으로 왔고, 도르곤이 홍 타이지에게 원군을 청하자 6일만에 심양에서 송산으로 달려왔고,

이 와중에 명군이 도르곤을 공격하여 도르곤군에 사상사 다수 발생하였고,

홍 타이지가 송산에 오자마자 매복군 2만5천을 보내 매복하여 기습하였고 

이 매복작전에 명군 53783명이 전사, 청군의 피해는 부상자 10명에 불과하였다는 것이네요.

 

당시 청나라군의 압도적인 교전비에 대해서도 기록이 남아 있네요.

 

조선왕조실록 1641년 11월 14일 기사中

영병 대장 유정익이 송산성 전투에 대해 치계하다

영병 대장(領兵大將) 유정익(柳廷益)이 치계하였다.

“송산성(松山城) 밖에 남아 있던 원병(援兵)들이 보병은 선두에 서고 기병은 그 뒤를 따라 도망갔는데, 청병(淸兵)이 그 사실을 알고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한병(漢兵) 1천 4백여 인을 죽였으며 청장(淸將) 한 사람과 군병들도 상처를 입었습니다. 항복한 한인의 말이 ‘홍군문(洪軍門)과 영원(寧遠) 주도야(朱道爺), 조(曹)ㆍ왕(王) 두 총병(摠兵), 서(徐)ㆍ최(崔)ㆍ유(劉)ㆍ장(蔣) 부총병 등이 다 항복했다.’고 하였습니다

이달 1일에 한인 10여 기(騎)가 성안에서 나와 청국의 기병과 교전할 때 우리 나라의 포수 김봉(金鳳)이 실수로 청인의 한쪽 팔을 맞추었는데, 우진왕(右眞王)이 김봉을 죽이려고 하므로 형부(刑部) 관원들이 그의 무죄를 극력 말하여 채찍으로 결죄(決罪)하고 놓아줬습니다. 그리고 해주위(海州衛)에 있는 쌀을 운송하는 일을 용장(龍將)에게 말하니, 대답하기를 ‘해주의 쌀은 곧 조선의 쌀이니 본국에서 인마(人馬)를 조발하여 운송하라.’ 하였습니다.”

 

명군이 패전하고 보병을 먼저 보내고 기병이 뒤따라 갔는데 청군이 이를 알고 추격하여

1400명을 죽였는데 청군의 피해는 1명도 안죽고 부상자만 발생했다는 기사네요.

 

그 와중에 조선 조총병이 총을 잘못 쏴 청군의 팔을 맞혀 죽을 고비에 있는 것을 조선 관리들이 봐달라 청하여 채찍만 맞고 말았네요.

 

조대수의 투항도 기록하였습니다.

식인 지옥이 펼쳐진 대릉하성 전투에서도 끝까지 버티던 조대수도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아 버렸네요.

 

조선왕조실록 1642년 3월 18일 기사中

조대수가 청국에 항복했다고 심양의 재신이 치계하다

심양의 재신(宰臣)이 치계하였다.

“청병(淸兵)이 송산(松山)을 함몰시켜서, 금주(錦州)에 원병(援兵)이 이미 끊어지고 굶주림과 곤궁함이 날로 심해지자, 조대수(祖大壽)가 마침내 청국에 항복하였다고 합니다.”

 

두 번 식인 지옥은 견디기 힘들었나 봅니다.

 

식인 생지옥도가 펼쳐진 명 대릉하 공방전 

 

출처:송산전투 명군을 향해 조총 5만3천발을 쏜 조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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