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todayhumor.com/?humordata_1965036
★REDRRR(2022-10-09 11:57:53)175.199.***.65추천 4
일반 백성들에게는 손을 안 댔다고 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가 궁금하네요.
'란보도리 乱妨取り' 또는 '란도리 乱取り' 라는 어엿한 과거가 있는데, 일반 국민에게 손을 안 댔다는 건.
오다 노부나가가 상락 했을 때 란도리하던 병사의 목을 쳤다는 일화 하나를 두고 일반화라도 하시는 건가요?
https://ja.wikipedia.org/wiki/乱妨取り
https://ja.wikipedia.org/wiki/乱取り
일본 전국시대의 오치무샤가리 落武者狩り 하나만 보신 것 같은데, 란도리의 경우는 아주 광범위한 약탈이었습니다.
https://www.google.com/search?client=opera&q= "오치무샤가리"&sourceid=opera&ie=UTF-8&oe=UTF-8
https://www.google.com/search?client=opera&q= "落武者狩り"&sourceid=opera&ie=UTF-8&oe=UTF-8
https://thewiki.kr/w/노예무역
작게는 재물을 뺏는 것이었고, 그나마 강간과 살인으로 끝나면 다행이었습니다.
아예 '노예'로 유럽 (포르투갈 등등) 의 노예상인들에게 넘기는 식이었죠.
https://www.yna.co.kr/view/AKR20211102083800005
임진왜란 당시에 우리나라에서 약탈하고, 납치 강간을 일삼고, 심지어 코와 귀를 잘라가던 것 자체가 원래 전국 시대의 일본에서는 '당연하게 이루어지던 것' 이었습니다.
이제 란도리, 란보도리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시려나요?
오치무샤가리, 번역하면 낙오무사 사냥 (패잔병 사냥)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https://ddnavi.com/serial/611000/a/
오치무샤가리의 비극적인 사례로 손꼽히는 게, 혼노지 (본능사) 에서 오다 노부나가를 몰락시키고 몇 일간의 천하제패를 누린 다음 패배하고 도망가다가 농민의 창을 맞고 죽은 '아케치 미츠히데' 입니다.
이게 참 재밌는 게, 그 당시 일본 백성들이 저런 식으로 오치무샤가리에 나설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제가 위에 언급한 대로 세율이 너무 빡세니까 (70% 기본) 허구헌 날 동네 방네에서 터지는 전쟁에서 발생하는 패잔병들을 잡아 죽이고, 그 목을 영주에게 가져가서 포상이라도 받아야 먹고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니까 일본에서는 '마비키 (갓 태어난 아기 등의 자녀를 죽여 식구 수를 줄이는 것' 가 성행했던 겁니다.
그리고, 그 란도리의 범위는.
농민들이 전장에 굴러다니는 병사들과 무장들의 갑옷, 칼을 줏어다 파는 범위부터, 그 농민들을 역으로 사냥하는 노예사냥꾼과, 전쟁에서 이긴 측이 패배한 측의 백성들을 싹 잡아다 '여자는 성노예, 남자는 수출노예' 로 팔아버리는 등등 아주 광범위했습니다.
일반 백성은 손을 대지 말라고 따로 선언한 장수, 위에서 언급한 오다 노부나가의 '미야코 (지금의 쿄토)' 진입에서 란도리 엄금을 선언하거나, 특이한 몇 명의 사례가 있다는 것 자체는 알고 있습니다만.
'원래 손을 안 댄다' 라고 일반화하시는 건 무리수가 심하게 있지 않나 싶네요.
일본의 여성 노예에 대한 대표적인 사건으로 꼽을 만한 것이 바로 '마리아 루스 호 사건' 입니다.
자국의 여성을 동물 취급을 해버린 사건이죠.
https://www.instiz.net/pt/4837895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827670
당시 시세를 두고 여러 말이 있지만, 제 또한 여자 한 명당 '화약 한 드럼' 이런 식의 교환이 이루어졌다는 기록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러니까 오다 노부나가의 란도리 엄금은 그야말로 정치적인 쇼라고 보는 거죠.
왜냐면, 사카이와 미노를 평정한 이후 집중적으로 철포대 (조총부대)를 양성하는데, 사실 그 당시 오와리의 경제적 상황은 미노 평정을 통한 오와리 통일 이후로 제법 시간이 지난 이후에 안정됩니다.
애초에 오와리의 상황이 그렇게 좋았다면 오케하자마부터 병력, 물자가 부족한 것에 대해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었겠죠.
이를 두고, 오다 노부나가 또한 란보도리를 통해 노예사냥을 벌여서 사카이를 통해 팔아넘기는 식으로 전쟁물자를 조달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보거든요.
오다 노부나가가 아니더라도, 다른 기록에 대한 언급은 금방 찾을 수 있습니다.
https://www.aladin.co.kr/shop/ebook/wPreviewViewer.aspx?itemid=238144661
무기와 바꾸는 조건으로, 개종을 거부한 일본인 키리시탄을 포르투갈 등의 노예상인에게 팔아버린 기록도 있습니다.
그리고, 코니시 유키나가가 키리시탄 (카톨릭 신자) 이긴 했지만, 당시 일본에서 종교탄압의 대상이 되는 건 매한가지였습니다.
https://yoda.wiki/wiki/History_of_the_Catholic_Church_in_Japan
키리시탄 뿐만 아니라, 잇코잇키 (일향종) 등의 수많은 사례에서도 개종 , 배교 거부자들이 그야말로 갈려나가거든요.
그렇게 갈려나가는 방식 중에 하나가 노예로 팔아버리는 것이었습니다.
혼간지 등을 불질러버린 이유 중에 재정 확충에 비협조적 (상납X) 안 하는 집단에 대한 극단적인 '보여주기 식 본보기' 같은 게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언급되기도 하니까요.
이런 식으로 노예 사냥을 벌이고, 사방팔방으로 '삥뜯기' 를 시전해서 전쟁을 벌인 게 일본 전국 시대입니다.
전국시대가 하루이틀도 아니었고, 일본의 내전은 보는 사람이 지겨울 정도로 오랫동안 지속되었죠.
란도리도 하루이틀의 역사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백성은 건드리지 않았다' 라는 말을 일반화할 수 있는가 싶네요.
제 입장에서는, 그 말이 더 충격적이네요.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될 점 한 가지가, 당시 조선의 세율이 일본보다 훨씬 가혹했다고 하는 '개짖는 소리' 입니다.
에도 막부가 끝날 때까지도 일본의 기본 세율은 사실상 칠공삼민 이었습니다.
https://www.google.com/search?client=opera&q= 七公三民&sourceid=opera&ie=UTF-8&oe=UTF-8
칠공삼민, 시치코우산민의 의미는 7할, 70가 세금이라는 겁니다.
참고로, 전국시대의 유명한 무장 중 한 명인 타케다 신겐, 호조의 '오공오민' 이 정말 희귀한 사례 수준입니다.
https://www.kokugakuin.ac.jp/article/171751
이 링크에서「四公六民」に改めて領民を保護する者も出てきます。 이라는 문구가 등장합니다.
이를 번역하면 '사공육민' 으로 개정하여 영민(백성)을 보호하는 사람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라는 의미인데, 40% 라는 세율이 '백성을 보살핀다' 라고 인식될 정도라는 겁니다.
그럼 조선의 세율은 어땠는가 하면.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2295
1결당 몇 두 이런 식이라서 % 로 계산하면 어떨런지 파악하기 어렵죠.
스크린샷에서 나타나듯, 10%의 세율을 부과했습니다.
https://blog.naver.com/mosfnet/220744680814
- 참고로 기획재정부 자료입니다. 개나소나 블로그 아닙니다.
오유에 일뽕 거하게 들이키고 짖어대는 것들이 '조선의 세율은 가혹했다' 운운하는 것에 가끔 반박 댓글을 달아두면 원글 통삭제하기 바쁘더군요.
애초에 조선은 그렇게 세율이 가혹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기준으로 생각해도 기본 세율 10% 는 납득하고도 남는 수치죠.
여기서 그럼 왜 이런저런 탐관오리가 발생했느냐.
일단, 향리 (아전) 들에게 녹봉을 안 줬습니다. 알아서 먹고살라고 하는 식이었죠.
이러니까 각종 법률을 지 맘대로 적용해서 뜯어낸 겁니다.
그리고, '원균' 같은 벌레들이 지가 빼돌릴 분량까지 합쳐서 뜯어내는 식이었죠.
이러니까 암행어사를 수시로 파견해서 확인하고 밟아놓을 수 밖에 없었으며, 탐관오리로 인한 민란을 '안핵사'를 파견해서 합의 후 해산으로 끝내고, 탐관오리부터 족치러 간 겁니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5092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36_0040_0020_0030_0010
저렇게 세율이 낮으면, 중앙정부에서 '과시용 건축'을 하려고 해도 힘듭니다.
게다가 민생을 살피라는 유학적 가르침을 율령으로 반포하고,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로 대표되는 조정을 통한 '유사 의회 합의 시스템' 이 있기에 더더욱 마구잡이로 천수각을 올린다는 건 불가능 그 자체일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반면, 일본은 이미 이야기 했다시피 70%라는 세율을 거둬올리니까, 아예 금으로 칠한 천수각을 올리기까지 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 히데요시 등이 대표적으로 그런 천수각을 올린 경우에 해당하며, 오다 노부나가의 경우는 아예 아내인 노히메가 '백성의 고혈' 을 언급하며 간언했다는 기록조차 있거든요.
이게 2006년 NHK 대하드라마 '공명의 갈림길' 19화 후반부에서 나오는 아즈치성을 완공하면서 천수각의 아름다움을 오이치와 노히메 (키쵸)에게 선보이니까, 노히메가 쓴소리를 하는 부분으로 각색되기도 합니다.
일본의 천수각, 이집트의 피라미드, 로마의 콜롯세움 같은 것과 비교해서 우리나라에는 왜 저런 대형 건축물을 안 올렸느냐 이러면서, '기술 발전을 등한시해서 그렇다' 라고 하는 개헛소리까지 지껄이는 작자들이 있는데.
애초에 민생을 생각해서 세율을 10% 언저리, 최대 2~30% 이상은 올리지 않은 것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일 뿐입니다.
또한 저 천수각의 전술적 목적을 언급하면서 정당화하는 경우도 있는데, 정작 저 위치에 '관측병' 을 둔 적은 없거든요.
오로지 성주 또는 성주 일가의 '펜트하우스' 역할을 했을 뿐이죠.
이런 걸 보면서도 참 씁쓸합니다.
세율에 대한 팩트 하나 없이, 무조건 조선이 일본보다 세율이 가혹했다느니 등등의 ㅈㄹㅇㅂ을 쏟아내는 게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것을 보면 참...
아니 '세금 깎아준다' 라는 막연한 말에 무작정 순왜로 일본군에 합류했다가, 현실은 '기본 7할, 깎아주면 4할' 이라는 것에 일본군의 전열에서 이탈해서 일본군과 사투를 벌인 원인이 바로 저거인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