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사]]유틀란드 해전 독일 대양함대의 마지막 - 스카파 플로에서의 'Z상황'

작성자아나키스트|작성시간01.08.19|조회수247 목록 댓글 0

유틀란드 해전은 유례없는 막강한 전투력을 가진 영국 대함대와 독일 대양함대의 유일한 정면 대결이었다. 그러나 보다시피 어느 일방의 결정적 승리도 또한 치명적 패배도 가져 오지 않았으며, 제 1차 세계대전의 전세에 어떤 뚜렷한 전환점도 마련하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전투 세력에 있어서는 유리했던 영국 대함대가 전과에 있어서는 판정패를 당한 해전이었기 때문에, 격전이 끝났을 때, 매스컴의 바람 넣기 아래 독일 국민은 대승리의 감격을 나누었고, 영국 국민들은 암담한 실의에 잠기는 분위기로 빠져들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이후의 대서양은 영국 함대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었고. 독일 해군은 통상 파괴를 노리는 잠수함전으로 탈바꿈했고, 이 대양함대는 그 이후로도 계속 놀고 있게 되어버렸다.

1918년 11월 3일, 전쟁의 막바지에 이르러 놀고 있는 내려진 함대에 대한 '나가서 배째라' 식의 출항명령에 대한 항명으로 킬 군항에서 선상 반란이 일어나고 이게 도화선이 되어 당시 서부 전선이 붕괴상태에 있던 독일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상태에 들어가, 11월 11일에 휴전을 하게 돼었다.
휴전 당시에 독일 해군 지휘부는, 유틀란트 해전의 주역, '쉐르(Sheer)' 제독은 여전히 대양함대 사령관직을 유지하고 있었고, 1918년 8월 11일에는 병을 앓고 있던 '호르펜도르프' 대장을 대신 하여 '히페르(Hipper)' 대장이 대양함대 군령부장을 맡게 되어 유틀란트 해전의 두 주역이 대양 함대의 전권을 쥐고 있던 시기였다.

휴전조약에서는 독일의 이 대양함대를 가만히 내버려 두고서는 독일이 언젠가 또 도발할 것이라는 승전국들의 우려에 따라 일단 독일의 주력 드레드노우트급 전함 19척 중 11척과 전 순양전함 5척 을 영국의 군항 '스카파 플로'에 정박시킬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휴전조약을 맺긴 하였지만 아직 정전조약(베르사이유 조약)이 맺어지지 않은 상태여서 이 16척의 주력전함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결정되지 않은 상태였는데, 많은 연합국들은 당시 일급 기술력의 정수인 이 전함들을 갈라 먹어 각국의 해군전력을 강화할 수 있으리라는 꿍꿍이속을 가지고, 이 전함들을 더 많이 가져가기 위해 휴전 후 약 6개월간 협상에 바빴다.

한편 억류된 독일 대양함대 전함 16척은 무장도발을 막기 위해서 각 함마다 80명씩만을 남기고 스카파플로에서 한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이었다.
이 대양함대 16척은 '로이터' 중장이 맡고 있었다. 1919년 6월이 되자 베르사이유 조약의 구체적인 내용이 드러나면서 독일 장교들과 승무원들은 몹시 굴욕감에 떨게 돼었다.
독일 해군 장교들은 모두 다 대양해군의 상징이었던 이 전함들이 연합국의 논공행상의 대상이 되어버린다는 베르사이유 조약의 내용에 모두 분노하고 있었으며, 지휘관인 로이타 중장 또한 이 대양함대를 저들의 손에 고스란히 넘겨줄 수 없다... 고 다짐을 하고 있던 중...
드디어 베르사이유 조약 조인 약 1주일 전이던 1919년 6월 21일 토요일. 영국 함대들이 작전훈련을 하러 새벽에 출항하였을 때, 그 동안 고심해 왔던 로이터 중장은 'Z상황'을 지시했다.
철자의 의미대로, 마지막 상황, '자침'을 의미하는 지시였다. 이에 따라, 16척의 독일 전함들을 비롯한 70여 척의 독일 전함들은 모두 선체에 바닷물을 끌어들였다.
각 전함의 장병들은 끝까지 남아 한스럽게 국가를 부르는 가운데, 자침을 선택한 전함들은 하나하나 스카파 플로의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 갔다.


[굴뚝만 보이는 가라앉은 전함 '힌덴부르크(Hindenburg)']


스스로 가라앉은 대양함대의 전함급 함정들의 내역은 다음과 같다.

바이에른 급

바이에른(Bayern),바덴(Baden)

쾨니그 급

쾨니그(König),그로스 크르프르스트(Grosser Kurfürst),
마르크그라프(Markgraf),
크론프린츠 빌헬름(Kronprinz Wilhelm)

카이저 급

카이저(Kaiser),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der Grosse),
카이저린(Kaiserin) 쾨니그 알버트(König Albert),
프린츠레겐트 루잇폴드(Prinzregent Luitpold)

순양전함... 들

데르플링게르(Derflinger),힌덴부르크(Hindenbrug),
자이들리츠(Seydlitz), 몰트케(Moltke),
폰 데르 탄(Von der Tann)

해서,

전함급이 16척, 그 외에 다수



이 뜻밖의 소식이 각국에 전해지자 먼저 독일 국민들은 대양함대의 최후에 깊은 경의를 표하며 이때의 울분을 다수가 잊지 않았다 - 특히 히틀러가 엄청난 분통을 터뜨렸다고 하지요 - 영국은 이후 이 가라앉은 전함들을 다시 건져 올렸으나 물에 가라앉은 후라 상태가 엉망이어서 그다지 사용하지 못하고 그냥 폐선처리시킨다든가, 함포 사격 훈련용 목표물로 사용하여버렸다.

이렇게 되자 결국 얼마 남지 않은 드레드노우트급 전함 8척(나사우 급 4척, 헬골란트 급 4척)마저 연합국의 전리품 몫으로 쪼개지게 되었으며 후에 고철 처리되고 마는 암담한 마지막을 맞았니다.
그 중 인상 깊은 마지막이라면 미국으로 넘어간 전함 '오스트프리스란드(Ostfrisland)'라고 생각되는데... 항공력의 중요성을 주장한 '미첼(D. Michel)' 장군의 이론을 설명하기 위한 실험 대상으로 1920년 7월 20일 관계자들 앞에 끌려나와 비행기의 폭격 시범의 목표물로 쓰여 이틀동안 비행기에서 투하된 여러 종류의 폭탄 수십 발을 얻어맞고 - 해상 전투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한 상징이라고 할까요 - 가라앉아버렸다.
그 밖에, 많은 구식전함들도 승전국들에게 분배되어 버리고 독일 해군은 6척의 구식전함만을 가지게 되어버렸다.


[살아남은 구형전함 '슐레지엔(Schlesien)' 전후 개장후의 꽃무늬(--) 사진]


해전을 지휘했던 양국 지휘관들 또한, 1차대전의 승패에 따라 그 명암이 엇갈렸다.
영국의 두 장군은 각각 영광스런 해군 제독의 생애를 보낸 뒤에, 젤리코는 1935년 11월에, 그리고 비티는 그로부터 4개월 후에 영국의 센트-폴 성당에 그들의 안식처를 나란히 하였다.
그러나 패전국의 해군으로 몰락한 쉐르와 히페르 제독은 전쟁이 끝나자 군복을 벗었고, 패망의 쓰라림 속에서 노후의 날들을 보내다가. 쉐르 제독은 1928년에, 그리고 히페르 제독은 1932년에 눈을 감았다.

p.s:이 글은 홈피 163.152.43.245(일명 집쪼가리)의 홈지기님이 작성하신 글로 작성자의 허락 하에 일부 문장 수정 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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