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가일입니다. 이정기님의 글에 동감합니다. 조공 책봉관계란 당시에 있어서 국제적 질서를 유지하는 하나의 도구일뿐 한반도의 삼국이 중국의 지배아래에 있다는 근거는 성립될수가 없지요. 이는 분명 중국인들의 중화사상의 결과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삼국이나 조선의 국왕들이 상대적으로 약한 국가를 유지하고 다스리는 수단으로 조공을 바친것은 사실입니다. 조선의 국왕들은 조공의 대가로 중앙집권적인 정책을 보장받고 국가를 다스릴 수 있었으니까요. "벼량끝 전술"(맞나?)은 강대국을 상대로 자신의 국가를 유지하면서 필요하다면 상대방에게 무력으로 맞서는 자주적인 국가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전략을 삼국과 조선은 대륙의 강자를 상대로 사용하왔던 것이죠. 이러한 사실은 역사속의 국가들이나 지금의 국제관계에서도 지켜지는 하나의 국제적인 질서논리라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횡설수설했는데 담에는 더욱 열쌈히 공보해서 좀더 있어보이는 내용의 글을 올리겠습니다. 감사함다.
--------------------- [원본 메세지] ---------------------
조공지배란 그 지역에 지배자의 자치권을 그대로 놔두지만, 대신 조공을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역의 지배자가 조공을 바치면 중국왕조에서 작위를 내려주어 명분상 신하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조공이 중국의 일방적 기록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고구려시대 가장 조공사절이 많이 갔던 시기는 장수왕대 입니다.
장수왕대에 과연 고구려가 북위에게 조공을 바쳤을까?
서울대 노태돈 교수는 그때를 기점으로 동아시아에 조공책봉관계가
굳혀졌다고 하는데, 그건 아닙니다.
과연 5세기 고구려가 그 만한 국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공을 바쳤을까요? 장수왕과 문자명왕시절 북위의 실권자 고조가 고구려인이고 북위 최고의 학자 고겸이 고구려인이며 북위의 황제의 어머니인 문명태후가 고구려인인데 고구려가 뭐가 모잘라서 북위에게 조공을 바쳤을까요...
단순한 조공국의 왕이 죽었는데, 북위의 황제가 밖으로 나가서 곡을 하겠습니까?
국제관계란 힘의 논리로 움직입니다.
어느 한쪽의 힘이 강하면 다른 한쪽에서 조공을 바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조공이라고 해봤자 중국의 황제가 바뀌었을때 보내는 축하사절이 전부입니다. 백제의 경우에는 자신들의 정책이 중국의
힘이 필요하다 라고 느낄때 선물의 형식으로 보내는 것이지 매년 조공을 바쳤다란 것은 일본서기에 고구려가 일본에 매년 조공을 바쳤다라는
기록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또한 작위를 내려주는 것도 형식상 그리고 그것을 고구려 백제가 중국의
사절단들이 와서 받았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물론 중국왕조의 힘이 필요할때는 책봉을 받아들였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고구려나 백제가 중국의 책봉을 받을 이유가 있었을까요?
요동은 중국엣 공격하기에 껄끄러운 지역입니다.
거리상으로도 멀고 지형적으로도 멀리서 공격하기에는 적합한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가능한 중국역대왕조는 요동을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한나라때 요동을 공격한 인물들은 요동태수정도나 독자적으로 세력을
키우던 공손씨 뿐이었습니다.
중국왕조에서 공격해오지도 않고 공격해와도 이기는 데 책봉을 받아들일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광개토태왕이전에는 중국에 대한 무역권때문에 조공이 오갈수도 있고 책봉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고구려는 광개토태왕이전에는 약탈경제를 표방했기 때문에 굳이 조공을 보내고 책봉을 받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중국과 고구려간의 책봉관계는 대부분 중국의 일방적
기록이라고 봅니다.
고구려가 이러한데, 백제는 어떻겠습니까...
백제는 처음 나라를 세웠을때 부터 상인국가의 변모를 보였습니다.
서해의 유리한 지형을 내세워 해상무역권을 장악했으며 백제의 해상루트를 인도까지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그리고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는데도 아무런 지장이 없었습니다. 또한 백제같은 경우에는 고이왕이후부터는 국력이 급상승했기 때문에 중국의 군사를 무서워했을리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설명을 하자면 동성왕10년에 북위가 백제를 공격하지만
백제의 군대에게 패합니다.
이때 백제는 어떤 상황이었을까요...
당시 백제는 중국과의 무역도 사신도 보내지 못하던 상황이었습니다.
고구려가 황해에 대한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백제든 신라든 북조의 나라든 남조의 나라든 어느나라도 황해를
지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북위가 공격하기 17년전 백제는 고구려의 장수왕에게 한성이
함락당하고 나라자체가 위태로웠을때입니다.
불과 17년후에 당시 동아시아 5강중 하나였던 북위의 군대를 물리쳤다는 것은 백제라는 나라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힘이 대단했단 것을 보여주며 이정도의 군사력과 해상력을 갖춘나라가 굳이 중국에게 책봉을 맏았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제가 백제사는 공부를 별로 하지않아 무령왕시절의 시대상황을 잘
모르지만 남조의 정도의 국력을 가진 나라는 백제보다 아래이며
그러므로 남조와의 책봉관계는 남조측의 일방적인 기록이거나 백제의
실리추구에 한 수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는 다릅니다.
일본은 고구려와 백제에게 문화를 수입받습니다.
하지만 좀 더 중국다운 문화를 수입하기 위해 직접적으로 접촉을 시도한것이 견당사입니다.
그렇지만 일본에 대한 책봉도 그리 믿을만한것은 없습니다.
원래 중국측 기록이란 중국은 중심 주변은 지엽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사절이 어떤 의도로 왔던 간에 무조건
조공이라고 기록합니다.
그래서 중국측의 기록은 어떤 식으로든지 비판을 시작하고 나서
봐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삼국이나 조선의 국왕들이 상대적으로 약한 국가를 유지하고 다스리는 수단으로 조공을 바친것은 사실입니다. 조선의 국왕들은 조공의 대가로 중앙집권적인 정책을 보장받고 국가를 다스릴 수 있었으니까요. "벼량끝 전술"(맞나?)은 강대국을 상대로 자신의 국가를 유지하면서 필요하다면 상대방에게 무력으로 맞서는 자주적인 국가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전략을 삼국과 조선은 대륙의 강자를 상대로 사용하왔던 것이죠. 이러한 사실은 역사속의 국가들이나 지금의 국제관계에서도 지켜지는 하나의 국제적인 질서논리라는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횡설수설했는데 담에는 더욱 열쌈히 공보해서 좀더 있어보이는 내용의 글을 올리겠습니다. 감사함다.
--------------------- [원본 메세지] ---------------------
조공지배란 그 지역에 지배자의 자치권을 그대로 놔두지만, 대신 조공을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역의 지배자가 조공을 바치면 중국왕조에서 작위를 내려주어 명분상 신하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조공이 중국의 일방적 기록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고구려시대 가장 조공사절이 많이 갔던 시기는 장수왕대 입니다.
장수왕대에 과연 고구려가 북위에게 조공을 바쳤을까?
서울대 노태돈 교수는 그때를 기점으로 동아시아에 조공책봉관계가
굳혀졌다고 하는데, 그건 아닙니다.
과연 5세기 고구려가 그 만한 국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공을 바쳤을까요? 장수왕과 문자명왕시절 북위의 실권자 고조가 고구려인이고 북위 최고의 학자 고겸이 고구려인이며 북위의 황제의 어머니인 문명태후가 고구려인인데 고구려가 뭐가 모잘라서 북위에게 조공을 바쳤을까요...
단순한 조공국의 왕이 죽었는데, 북위의 황제가 밖으로 나가서 곡을 하겠습니까?
국제관계란 힘의 논리로 움직입니다.
어느 한쪽의 힘이 강하면 다른 한쪽에서 조공을 바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조공이라고 해봤자 중국의 황제가 바뀌었을때 보내는 축하사절이 전부입니다. 백제의 경우에는 자신들의 정책이 중국의
힘이 필요하다 라고 느낄때 선물의 형식으로 보내는 것이지 매년 조공을 바쳤다란 것은 일본서기에 고구려가 일본에 매년 조공을 바쳤다라는
기록과 다를바가 없습니다.
또한 작위를 내려주는 것도 형식상 그리고 그것을 고구려 백제가 중국의
사절단들이 와서 받았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물론 중국왕조의 힘이 필요할때는 책봉을 받아들였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고구려나 백제가 중국의 책봉을 받을 이유가 있었을까요?
요동은 중국엣 공격하기에 껄끄러운 지역입니다.
거리상으로도 멀고 지형적으로도 멀리서 공격하기에는 적합한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가능한 중국역대왕조는 요동을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한나라때 요동을 공격한 인물들은 요동태수정도나 독자적으로 세력을
키우던 공손씨 뿐이었습니다.
중국왕조에서 공격해오지도 않고 공격해와도 이기는 데 책봉을 받아들일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광개토태왕이전에는 중국에 대한 무역권때문에 조공이 오갈수도 있고 책봉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고구려는 광개토태왕이전에는 약탈경제를 표방했기 때문에 굳이 조공을 보내고 책봉을 받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중국과 고구려간의 책봉관계는 대부분 중국의 일방적
기록이라고 봅니다.
고구려가 이러한데, 백제는 어떻겠습니까...
백제는 처음 나라를 세웠을때 부터 상인국가의 변모를 보였습니다.
서해의 유리한 지형을 내세워 해상무역권을 장악했으며 백제의 해상루트를 인도까지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그리고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는데도 아무런 지장이 없었습니다. 또한 백제같은 경우에는 고이왕이후부터는 국력이 급상승했기 때문에 중국의 군사를 무서워했을리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설명을 하자면 동성왕10년에 북위가 백제를 공격하지만
백제의 군대에게 패합니다.
이때 백제는 어떤 상황이었을까요...
당시 백제는 중국과의 무역도 사신도 보내지 못하던 상황이었습니다.
고구려가 황해에 대한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백제든 신라든 북조의 나라든 남조의 나라든 어느나라도 황해를
지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북위가 공격하기 17년전 백제는 고구려의 장수왕에게 한성이
함락당하고 나라자체가 위태로웠을때입니다.
불과 17년후에 당시 동아시아 5강중 하나였던 북위의 군대를 물리쳤다는 것은 백제라는 나라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힘이 대단했단 것을 보여주며 이정도의 군사력과 해상력을 갖춘나라가 굳이 중국에게 책봉을 맏았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제가 백제사는 공부를 별로 하지않아 무령왕시절의 시대상황을 잘
모르지만 남조의 정도의 국력을 가진 나라는 백제보다 아래이며
그러므로 남조와의 책봉관계는 남조측의 일방적인 기록이거나 백제의
실리추구에 한 수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는 다릅니다.
일본은 고구려와 백제에게 문화를 수입받습니다.
하지만 좀 더 중국다운 문화를 수입하기 위해 직접적으로 접촉을 시도한것이 견당사입니다.
그렇지만 일본에 대한 책봉도 그리 믿을만한것은 없습니다.
원래 중국측 기록이란 중국은 중심 주변은 지엽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사절이 어떤 의도로 왔던 간에 무조건
조공이라고 기록합니다.
그래서 중국측의 기록은 어떤 식으로든지 비판을 시작하고 나서
봐야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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