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이탈리아의 경제 사학자인 카를로 치폴라가 쓴 <대포 범선 제국>에서 참조했습니다.
----------------------------------------------------------------
오스만 투르크는 군대에 대포를 받아들이는데, 이집트의 맘루크인들보다 더 유연했다. 그러나 오스만 투르크도 전통적으로 육박전과 기마 전술을 선호하고 기마병이 사회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누리는 탓에 야전에서 쓰이는 야포를 받아들이는데 소극적이었다. 오스만 투르크는 기본적으로 포위 작전에서 대포를 활용했다.
아얄론 박사는 오스만 투르크인들은 "공성용 대포와 야전포 사이에 구조적인 차이를 발전시키지 않았다."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17세기 말에 투르크인들은 12파운드 포와 3파운드 포를 야포로 사용하기는 했으나, 더 큰 청동 대포와 똑같이 다루었고, 대포들 간의 차이점이라고는 구경과 포신의 길이 뿐이었다.
1453년, 오스만 투르크의 메메드 2세는 헝가리의 기술자를 고용해 만든 거대한 대포인 마호메타를 사용했다. 마호메타는 무게가 천 파운드나 나가는 바위를 발사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대포였으며, 끄는 데 소 60~140마리와 조작하는데 백 명의 인원이 동원되었고, 재장전하는 데 두 시간이 걸렸다. 연대기 작가들의 말에 의하면, 이 마호메타의 포성에 놀란 임산부들이 유산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주목할 부분이 두 군데 있다. 첫 번째는 거포를 만든 사람이 투르크인이 아닌 헝가리, 즉 서양인이었다는 사실이다. 무슬림들은 자신들에게도 대포 제작자가 있었지만, 가능하면 서양인 기술자를 구하려고 했다. 17세기 프랑스의 한 경제 학자는 "투르크 인들은 대포 기술자를 잡으면 결코 놔주지 않는다."라고 썼다.
서양의 대포 기술자를 구하기 위해 투르크인들이 보인 열성은 그들이 서양의 기술을 도입했지만, 결코 후발 국가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1867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압둘 아지즈 술탄은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에게 15세기에 만들어진 투르크 대포를 선물로 보냈다. 이 대포는 구경이 65cm이고, 포신의 두께가 14cm이며, 무게가 무려 18톤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괴물이었다.
오늘날 런던탑에 가면 이 대포의 위용을 감상할 수 있다. 17세기 초에 보테로는 "투르크인들은 어마어마하게 큰 대포를 가지고 있어서, 그 포성만으로도 성벽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썼다.
이 거대한 대포를 주조하기 위해서는 구리가 많이 필요했는데, 오스만 제국은 자국 영토인 아나톨리아 지역에 풍부한 구리 광산이 있었고, 광산에서 부릴 수 있는 노예가 많아서 제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문제는 무겁고 큰 대포를 전쟁터까지 실어나르는 과정이었는데, 투르크인들은 전쟁터에서 바로 대포를 만드는 과격한 해법을 구상했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메드 2세는 1480년 로도스섬 공방전에서 전장에서 바로 길이 5.5미터에 60~75cm의 구경을 지닌 대포 16문을 제조하도록 명령했다.
인도를 지배하던 이슬람 왕조인 무굴 제국에서도 라자 고팔(raja gopal)이라는 거포가 만들어졌는데, 이 대포는 무게가 자그마치 40톤이나 나갔다. 다분히 투르크의 기술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투르크인들은 거대한 대포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바람에 이 대포의 약점을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았고, 거대한 대포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다.
오스만 투르크는 포위 공격용 대포를 제작하는 데만 주력했고, 야포의 생산과 운용법 모두에서 서양에게 크게 뒤쳐졌다. 17세기에 이르러 특히 스웨덴에서는 "레예멘츠스튀케"가 등장하면서 유럽은 기동성이 뛰어나고 만족할 만한 발사 속도를 자랑하는 야포를 제작하는데, 빠른 진전이 있었다.
1664년 8월, 장크트 고타르트 전투에서 투르크군을 대파한 라이몬도 몬테쿠촐리(Raimondo Montecuccoli) 장군은 자신의 경험에 의거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투르크 군대의 거대한 대포는 적진을 맞힐 경우, 심각한 피해를 준다. 그러나 옮기기에 매우 번거롭고 재장전하고 조준하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더욱이 엄청난 양의 화약을 소비하는데다가 수레와 바퀴는 말할 것도 없고, 대포를 올려 놓는 누벽마저 망가뜨린다. 우리 편 대포는 옮기기가 더 용이하고, 더 효율적인 무기다. 여기에 아군의 장점이 있다."
몬테쿠촐리의 견해는 다른 출전들을 통해서도 뒷받침된다. 17세기 중반, 빈첸초 마리아 신부는 "투르크인들은 대포를 별로 이용하지 않으며, 실제로 포위 공격이 아니면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다."라고 적었다.
17세기 초, 파인스 모리슨은 "투르크 군대 대부분은 대포를 가지고 싸우는 기술이 없으며, 실제로 대포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예니체리 부대 일부만이 대포를 사용할 뿐이며, 비록 대포는 많이 있지만 기독교도들처럼 잘 다루지는 못한다."라고 썼다.
이런 경향은 18세기에 가서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18세기 후반, 투르크 군대에 파견된 프랑스의 토트 남작이 목격한 것처럼 투르크의 거포는 "넓은 구경 때문에 겉보기에는 막강해 보이지만, 막상 첫 발을 발사하고 나면 한참이 지나야 작동시킬 수밖에 없어 두려워할 까닭이 없었다."라고 기록했다.
토트 남작은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투르크인들은 군대에 야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르며, 그들의 뛰어난 전투 능력도 별로 효과를 보이지 못한다."라고 적었다.
토트 남작의 주장에 다소 비판적이었던 무슈 드 페이소넬도 "투르크인들은 작은 구경의 야포를 주조할 만한 적절한 용광로가 없었다. 투르크군에는 야포가 부족해 토트 남작이 이를 제작하는 임무를 떠맡았다."라고 밝혔다.
이처럼 거대한 공성용 대포에 대한 원초적인 집착과 구리가 풍부하다는 사실은 투르크인들이 대포를 발전시키지 못한 주요 요인이었다. 페이소넬은 "투르크인들은 철제 대포가 없고, 철제 대포를 주조하는 방법도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대포는 모두 청동 대포이고, 배에는 대포를 싣지 않는다. 비록 투르크의 요새나 상선에 종종 철제 대포가 실려있기는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전쟁터에서 얻거나 스웨덴이나 덴마크나 다른 유럽인들에게서 산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한편, 투르크인들은 해전에도 약점을 보였다. 모리슨은 "투르크의 갤리선은 튼튼하게 건조되지 않았고, 빠르지도 않으며, 전투에도 적합하지 않았다. 스페인인들이나 베네치아, 혹은 다른 기독교도들의 배처럼 오래 견디는 튼튼한 목재로 건조되지 않았다."라고 적었다.
여기에 모리슨은 다음과 같이 추가했다.
"투르크인들은 스페인인들을 바다에서 더 두려워한다. 홍해에 항구를 두고 있는 포르투갈인들에게 지금까지 줄곧 심각한 패배를 겪었기 때문이다."
1580년부터 1640년까지 포르투갈은 스페인에게 병합되어 있었다.
여기에 바다에서조차 거대한 대포에 대한 투르크인들의 집착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1516년 홍해의 아덴을 출항항 투르크 갤리선이 포르투갈 선박을 공격했다. 갤리선에는 바실리스크라는 거대한 대포가 실려 있었는데, 무려 38킬로그램의 돌덩어리를 쏘아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대포가 발사되자, 반동이 너무 커서 포르투갈인들이 용골을 볼 수 있을 정도로 투르크 갤리선은 완전히 뒤집어지고 말았다.
18세기에도 투르크인들은 갤리선에 크고 무거운 대포를 싣고 다녔다. 페이소넬은 "투르크의 전열함들은 모두 수백 파운드의 돌덩어리를 날려 보낼 수 있는 어마어마한 구경의 대포 너덧 문을 상갑판에 싣고 있었다."고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