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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사료

삼별초

작성자빈구름|작성시간11.08.19|조회수197 목록 댓글 0

원종 11년 5월, 처음 최우가 나라 안에 도적이 많은 것을 염려하여, 용사를 모아 매일 밤 순찰을 돌며 막게 하였다. 그 까닭으로 이들을 야별초라 불렀다. 도적이 여러 도에서 일어났으므로 야별초를 나누어 파견하여 잡게 하니 군대의 수가 많아져 드디어 좌별초, 우별초로 나누었다. 또 몽고에 갔다가 도망해 온 고려인으로 한 부대를 만들어 신의군이라 불렀으니 이것이 삼별초이다. 권신(權臣)들이 정권을 잡으면 삼별초를 자신의 앞잡이로 만들기 위하여 녹봉을 후하게 주고 또 사사로운 혜택을 베풀었으며 또한 죄인의 재산을 몰수하여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김준이 최 의를, 임연이 김준을, 송송례가 임유무를 제거하는데 모두 삼별초의 힘을 빌렸다.

                                                               <<고려사>>  병지1 오군(五軍)  

고종 22년 10월, 야별초가 지평현(경기도 양평) 사람과 함께 밤에 몽고 군사를 습격하여 죽이고 포로로 삼은 것이 매우 많았고 말과 노새를 빼앗아 바쳤다.

                                                                <<고려사절요>>

 
원종 11년 8월 병술일, 삼별초가 진도에 들어가서 그 곳을 거점으로 삼고 여러 고을을 침범·약탈하였다. 황제의 명령이라고 거짓으로 꾸며서 전라도 안찰사를 시켜 인민들이 가을 수확을 빨리 끝내고 바다에 있는 섬으로 옮겨 가서 살게 하였다.

                                                            <<고려사>> 세가

 
배중손은 원종 때 벼슬을 쌓아 장군이 되었다. 원종 11년(1270년)에 개경으로 환도하게 되어 방을 써붙여 날짜를 정하고 재촉하여 모두 돌아가게 하였다. 삼별초는 다른 마음이 있어 따르지 않았다. 왕이 장군 김지저를 보내어 강화에 들어가 삼별초를 해산시키고 그 명부를 가지고 돌아오게 하니, 삼별초는 명부를 몽고에 알릴까 두려워하여 더욱 반심을 품었다. 배중손이 야별초 지유, 노영희 등과 더불어 난을 일으켜 사람들로 하여금 나라 안에 부르짖기를 “몽고병이 크게 침입하여 인민을 마구 죽이니 무릇 나라를 돕고자 하는 자는 다 모이라.”고 하니 잠깐 사이에 사람들이 크게 모였다. 혹 달아나 사방으로 흩어지며 배를 다투어 건너다가 익사하는 자도 많았다. 삼별초가 사람의 출입을 금하고 강을 순시하면서 크게 부르짖기를, “무릇 양반으로 배에 타고 내리지 않는 자는 다 목을 베어 죽인다.”고 하니 이를 들은 자가 다 두려워하여 내렸다. 간혹 배를 내어 개경으로 향하려고 하는 자는 적이 작은 배를 타고 쫓아와 쏘니 모두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성 중의 사람들이 놀라 흩어져 수풀에 숨었으며, 어린이와 부녀자의 울음소리가 길에 가득하였다. … 적이 이미 탐라에 들어가 안팎에 성을 쌓고, 때로 나와 노략하며 주군을 횡행하고, 고을의 수령을 죽이니 해안 지방이 떠들썩하였다. 왕이 김통정의 조카인 김찬과 오인절 등 여섯 사람을 보내어 그를 회유하니, 김통정이 김찬은 머무르게 하고 나머지는 다 죽였다. 원종 14년(1273년)에 또 김방경에게 명하여 이를 치게 하니, 김방경이 흔도 등과 함께 나아가 공격하였다. 적이 크게 무너지고 김통정은 70여 명을 거느리고 산 속으로 도망가 매어 죽으니, 탐라는 마침내 평정되었다.

                                                   <<고려사>>  열전 배중손전

 

 

 해설:  삼별초의 시초는 최우가 처음 치안 유지를 위해 만들었던 야별초이다. 별초란 '선발된 군인'이란 뜻이다. 야별초가 좌별초, 우별초로 나누어지고 여기에 신의군이 보태어져 삼별초가 되었다.  삼별초는 최씨 무신정권의 군사적 기반으로 대몽항쟁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나 소극적이었다. 무신정권이 붕괴되어 왕정 복고와 개경 환도가 이루어지자  삼별초는 이에 반발하여,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몽고와의 항쟁에 나섰다. 직접적 동기는 명부가 몽고군에 알려져 보복당할 것을 두려워한 때문이지만, 오랫동안 몽고군과 싸우면서 다져진 민족 의식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새로운 왕을 추대하고 관부를 설치하고 관리를 임명하여 항몽 정권을 수립한 삼별초는 진도로 남하하여, 몽고군에게 당한 피해 및 지배 세력의 부패와 수탈에 대한 반발이 심했던 민중의 지지와 협조 속에 많은 지역을 차지하기고 한다. 내륙 깊숙히 전주·나주까지 진공하고 전라·경상도의 연해 지방과 바다를 완전히 장악하면서 4년간 해상 왕국을 건설하여 몽고와 고려의 통치 세력에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민중의 힘을 조직화하는데 소홀해 결국은 섬에서 섬으로 떠돌다가 제주도에서 여·몽 연합군의 공격으로 김통정 등이 자결함으로써 삼별초의 항쟁은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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